▣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당신의 주인 되신다
복음을 전하러 다니다 보면, 본의 아니게 자주 해외에 나가게 됩니다. 그때마다 저는 한국 사람이 전 세계 어디에나 퍼져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왜 한국 사람들은 그토록 멀고 추운 오지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갈까요? 대체 무엇이 우리 민족을 세계로 내모는 것일까요?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입니다.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면 그곳이 어디든 뛰어들어, 묻히고 찢기고 빠져 가며 찾아갑니다. 돈을 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머릿속에만 담겨 있어서 실생활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이론이 아니라 우리 생각과 말과 행동까지 움직일 수 있는, 마음속의 '실재'(實在)가 됩니다.
돈을 버는 것이 마음속의 '실재'라면, 목숨까지 내걸고 위험한 곳까지 찾아 들어갑니다. 돈을 버는 것이 인생의 가치이자 목표이니, 그것을 위해서라면 못 갈 데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 세계 170여 개국으로 흩어져 있는 것이고, 무서울 만큼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 더운 열대지방에 가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현지인들을 데려다 일을 시키는데, 오히려 현지인들이 너무 지쳐 죽을 정도입니다. 어찌나 더운지 가만히 서 있는 것도 너무 힘든 지역에서 "빨리 빨리"라고 외치는 건 전부 한국인뿐입니다. 오죽하면 외국인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한국말도 "빨리빨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국 사람은 선교 사역도 그런 식으로 합니다. 이전에 인도네시아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토록 더운 곳에서 8일 동안 연속으로 두 곳에서 집회하도록 준비한 겁니다. 한국처럼 날씨 좋은 곳에서도 8일 동안 연속으로 집회를 하면 대자로 뻗어 버릴 판국인데, 열대 지방에서 그렇게 하다니요? 알고 보니까 그 집회를 준비하신 선교사님이 글자 그대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고생하신 분이었습니다. 본인이 그렇게 하니까 남도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스타일이셨던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시키는 대로 했던 저는 결국 마지막 날에 탈진하여 생사를 오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찌나 상태가 심했던지 손도 까딱 못할 정도였고 심지어 경련까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때 참으로 깜짝 놀랄 광경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고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선교사님이 제 옆에서 뭐라 중얼중얼하셨기 때문인데, 그 말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어떻게 저런 양반이 이렇게 오래 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힘들어하며 누워 있는 제 옆에서 선교사님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이러셨습니다. "어허, 그것 참. 여기서 죽으면 비용이 많이 드는데 ... "
그 나라에서는 비행기로 시신을 보낼 때 일등석 요금이 적용되니까 돈이 많이 든다는 거였습니다. 아니, 농담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죽을 고비를 넘기며 끙끙 앓고 있는 제 옆에서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한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정말 저는 탈진 때문이 아니라 그 말 때문에 두려워서 죽을 뻔했습니다. 복음 전하다가 선교지에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평소에도 늘 해 왔던 저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주님, 저 죽어도 한국 가서 죽게 해주세요'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또 이 선교사님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또 한숨을 내쉬면서 "어허, 그것 참. 죽으면 당일에 시체를 처리해야 되는데 ... "라는 겁니다. 그곳은 시체가 하루도 안 되어 금세 썩어 버립니다. 워낙에 기온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은 제 몸이 썩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며 고민하시는 겁니다. 농담으로라도 해선 안 되는 얘기를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 겁니다. 저의 사역 동역자들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저 정말 무섭습니다. 진짜로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기도가 절실합니다.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악착스럽기로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민족입니다. 우리 주님도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를 들어 쓰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목적만 분명해지면 무엇에든 한눈팔지 않고 죽어도 달려가는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면,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이 닥치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일단 눈이 뒤집히기 시작하면,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 예배보다 골프?
진정으로 원하며 정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라면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꺼이 모든 것을 대가로 치릅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일을 할 때에는 지치지도 피곤치도 곤비치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의 하나가 바로 골프 치는 겁니다. 여러분 중에도 골프를 좋아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부디 화내지 마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골프란 무엇입니까? 해야 할 일이 많아 바쁜신 분들이 작은 공 하나를 작은 구멍에 넣겠다고 비싼 돈까지 내가며 땡볕에서 땀 흘리며 돌아다니는 것 아닙니까? 무식한 소리를 한다며 비웃을 분도 있겠지만,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다른 일을 시키면 한 시간도 안 돼서 힘들어 죽겠다며 뻗어 버릴 텐데, 골프를 하면 그렇게 지치지도 곤비치도 않는 겁니다. 제가 골프를 치는 사람이 아니니 그렇게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노방 전도를 그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18홀 정도 돌면서 골프를 치면 대여섯 시간 걸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대여섯 시간 노방 전도를 해서, 골프 칠 때랑 어떻게 다른지 한번 보자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크기가 작습니다. 더구나 전 국토의 70퍼센트 이상이 산이라서, 매우 적은 땅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왜 좋은 길목마다 골프장이 들어서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것도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 넓고 좋은 풀밭을 왜 그냥 놀려 두느냐는 말입니다. 하다못해 배추라도 심어서 키워 먹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할 말은 더 있습니다. 그렇게 홀에 공을 넣고 싶으면, 아예 홀을 크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작게 만들어 놓고서는 거기에 넣지 못해 안달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솔직히 그런 모습을 보면, 저는 답답해서 짜증이 납니다. 크지도 않은 홀에 공을 집어넣겠다고 부들부들 떨며 안절부절못하고, 온 신경을 다 쏟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미련한 집입니까? 스윙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한 번에 안 되면 여러 번 하면 좋을 텐데, 한 번해서 실패하면 주저앉아 청승을 떨지 않습니까. 저는 왜들 그러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아무리 이해해 보려 노력해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물론 어쩌다 한 번씩 하거나 시간이 남아돌아 넘쳐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면 이해가 됩니다. "바빠서 새벽기도를 나갈 수 없어요", "수요예배 때는 다른 일정이 있어요", "금요 철야예배 참석할 시간이 없어요"라고 하는 사람이 골프 치는 일은 열심히 한다면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솔직히 말해서 주변에 그런 분들 많지 않습니까.
항상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분들이, 어떻게 골프는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요? 예전에 어느 교회 부흥회에 강사로 갔다가 그 교회 장로님 댁에 묵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과 잠깐 대화를 나눴는데, 마음은 굴뚝같은데 너무 바빠서 새벽기도와 수요예배에 참석하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오던 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이 꺼진 캄캄한 거실에 누가 서 있던 겁니다. 알고 보니 집주인 장로님이었는데, 새벽예배 드릴 시간이 되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골프 삼매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새벼부터 일어나 열심히 골프 연습을 하면서도 예배에 참석할 시간은 없다 생각하는 이 능력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핑계일 뿐입니다. 마음속에 실재로 자리 잡은 것이어야 열정이 생기고 노력하게 되는 겁니다. 가치 있게 여기는 일을 해야 지치지도 피곤치도 시간이 아깝지도 않은 겁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6:21)
사람은 자신에게 있어서 보물 같은 것을 추구합니다. 나의 가치를 높여 줄 수 있는 것, 자아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것을 추구합니다. 돈, 사랑, 성공, 명예 등 ... 내 마음속의 실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노력이나 수고도 아깝지 않습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능력이 발휘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에 먼저 관심이 쏠리고, 그것을 위해 애쓰게 되며, 주머니도 열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란 겁니다.
그런데 왜 유독 진리에 대해서만큼은, 왜 유독 하나님에 대새서만큼은, 왜 유독 천국에 대해서만큼은, 왜 유독 거룩한 하나님의 복에 대해서만큼은 그렇게도 실재가 되지 않는 걸까요? 왜 그렇게 억지 춘향으로 신앙생활하는 걸까요? 왜 부흥회나 집회에서 받은 은혜에 대한 감격을 금세 잊어버리는 걸까요? 그렇게 늘 똑같은 삶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 걸까요?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들 '신앙생활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라며, 당연하게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합니다. 마음이 딴 데 있으면서도 주님이 실재인 척합니다. 그야말로 종교놀음에 빠지는 겁니다. 정망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상태에서는 결코 복음이 우리의 실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려고, 나의 필요를 채우려고, 겨우 예수님 믿어 주고 예배 드려 주고 교회 섬겨 주는 것밖에 하질 못하는 겁니다.
♣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은혜
영원하지 않은 것, 변하는 것, 지나가 버리는 것으로는 진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결코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에게 진짜 만족을 주고 내면의 갈망을 완벽하게 채울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죽고 나서, 그의 뒤를 여호수아가 잇게 됩니다. 그는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막중한 과업을 떠안습니다. 걱정과 두려움, 부담감에 휩싸인 여호수아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1:5-9)
여러분이 여호수아라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지도자에게 필요한 카리스마? 복잡한 상황을 풀어낼 수 있는 명석한 두뇌? 이방 민족과 협상할 수 있는 외교술? 일당백의 힘과 체력? 하지만 주님이 약속하신 것은 그와 완전히 다릅니다.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거라. 마음을 굳게 먹고 용기를 내라.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내가 너와 함께하지 않느냐. 모세에게 그랬던 것처럼 너와도 함께 하겠다."
모세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능력 덕분이 아닙니다. 주님이 모세와 함께하신 덕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이 약속을 오늘 우리에게도 주신다면 어떨까요?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이보다 완전한 약속, 이보다 완전한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할렐루야! 이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동행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이 기적 같은 일이 바로 하나님의 완전한 복음입니다. 주님만 함께하시면 됩니다. 주님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치의 망설임 없이 '완전한 복음'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복음 가운데 베푸신 영광이자 능력이며 축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복음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습니까? 복음에 대해 물어보면, 기껏해야 세례문답 때 배운 내용 정도만을 읊습니다. 아니, 사실 그 정도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복음을 '죄책감을 처리하는 쓰레기 하치장' 정도로 여겨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완전히 김빠진 복음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복음? 복음이 그냥 복음이지 뭐'라고만 반응할 뿐입니다. 복음을 싸구려 허섭스레기 취급한다는 말입니다.
결단코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것일 수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어떤 대가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고귀한 선물입니다.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2:10-11)
주님은 자신의 전부를, 자기 자신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갖고 계신 것에서 몇 가지를 여기저기 살짝 떨어뜨려 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선물보따리 몇 개 주는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그분의 모든 것을 함께하는 어마어마한 복음이란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받음 복음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영접기도나 회개기도를 하면서 찾는 죄책감 하치장이 절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 이용하는, 자동판매기 같은 예수님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 당신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점검하라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수전노'(守錢奴)라는 말을 아십니까? 부자가 되는 것을 절대가치로 삼고 그 일을 이루는 데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밀어 넣은 사람을 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수전노라 말하는 것은, 그가 돈의 종이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의 종입니까? 여러분의 순전한 마음을 누구에게 바치고 있습니까? 언제 어디서든 여러분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입니까? 굳이 애쓰지 않아도 관심과 에너지가 자연스레 쏠리는 '사랑의 대상'이 무엇입니까? 대체 무엇이 여러분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그 대상이 무엇이든, 여러분의 삶을 이끄는 그것이 바로 마음속의 '실재'입니다. 신앙 연수가 길어도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는 근본 이유 중 하나는, 복음을 내면의 실재로 삼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영광스러운 복음, 그 영적 가치를 마음속에 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왜 그럴까요?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자연스럽게 따라 가기 때문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면, 마음 역시 하늘로 향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양이란 짐승은 물을 아주 싫어하고 무서워한답니다. 그런데 몽골처럼 목축을 주업으로 하는 나라 중에는 목가적인 풍경의 넓은 들판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실개천이 흐르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대개 목동이 이끌고 다니는 양은 수백 마리나 됩니다. 수많은 양을 데리고 목동 혼자 그 많은 개천을 건너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양은 고집이 아주 센 동물입니다. 집을 찾아갈 능력도 없으면서 고집만 세고, 그래서 목동을 힘들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개천을 건너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겁니다.
이때 노련한 목동은 새끼 양을 덥석 안고는 그대로 물로 들어가 버린답니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서, 순간 어미 양의 모든 관심이 새끼에게만 쏠립니다. 평소에 매우 싫어했던 물이지만, 납치당한 새끼 양에게 관심이 쏠려 목동을 따라 개천을 건너게 된다는 겁니다. 또 양은 한 마리가 움직이면 단체로 따라가는 성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결국 한 마리의 새끼 양을 따라 모든 양이 개천을 건너게 된다고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배들 중에도 이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 형님입니다. 이 형님은 무엇엔가 한번 꽂히기 시작하면 평생 물고늘어지는, 편집증에 가까운 집착을 소유한 분입니다.
형을 피해 외삼촌 집으로 피신한 야곱 형님은 거기서 라헬과 사랑에 빠집니다.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던지, 7년을 수일처럼 여기며 기다렸습니다. 정말 심각한 수준입니다. 아무리 첫사랑이라도 그렇지, 무슨 연애를 그따위로 하느냐는 말입니다. 라헬의 손 한 번 못 만져 본 채 7년이나 지켜보면서 종살이를 한 게 아닙니까.
야곱의 외삼촌이자 라헬의 아버지인 라반도 대단한 양반입니다. 아니, 세상 천지에 딸을 키워 파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7년이 지나 야곱과 라헬이 결혼식을 올린 첫날밤, 이 개념 없는 아버지는 라헬이 아닌 그의 언니 레아를 신방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당시에 전깃불만 있었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어두컴컴한 데다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있으니, 순진한 야곱은 당연히 라헬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밤의 일을 더는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야곱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사랑하는 라헬이 아닌 레아와 첫날밤을 보냈다니,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이때부터 야곱 형님의 정신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라헬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한 겁니다. 기어코 라헬과 결혼하려고 7년을 더 봉사했습니다. 라헬이 죽고 나서는 요셉에게 목을 매기 시작했습니다. 이 형님은 레아와 라헬 말고도 부인이 둘이나 더 있었기 때문에 자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유독 라헬이 낳은 아들인 요셉에게만 애정을 쏟았습니다. 이거야말로 편집증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저는 라헬이 일찍 죽은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이 하도 라헬에게 집착하니까 하나님이 걱정하신 나머지 라헬을 먼저 데려가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에게 너무 집착하니까 이집트로 팔려가게 하셨던 겁니다. 나중에 집안이 통째로 이집트로 이주했을 때, 야곱이 좋은 마음으로 고향을 떠났겠습니까? 이집트에 요셉이 있으니까 간 것입니다.
야곱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진짜 주인 노릇을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것, 도저히 떨어질 수 없어서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내면의 '실재'입니다.
그리고 그 실재가 바로 그 사람의 주인입니다.
♣ 밑바닥 인생 속으로 주님이 찾아오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신 복음의 영광과 능력과 축복은 우리 내면에 얼마나 '실재'로 자리 잡고 있을까요? 여러분 마음속의 진짜 보배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모든 것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은, 온 마음을 쏟아 붓는 가치가 무엇입니까? 하늘의 가치입니까, 땅의 가치입니까? 나입니까, 주임입니까? 이 질문에 정확히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제 삶을 나누고 싶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밝혔듯이 저는 교회에 다녀 본 적도, 예수를 믿어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무엇이고 성경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신앙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의 집안 내력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제 아버지는 우리 민족의 음주문화 중흥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오신, 제법 잘 나가는 고급 술집 사장님이셨습니다. 그러니까 화류계 집안이라는 것이지만, 오해는 말아 주십시오. 저는 그런 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술집 사장은 제가 아니라 저희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주십시오. 주범과 공범은 하늘과 땅 차이니 말입니다.
어쨌든 제 아버지의 술집은 동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주점이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기생 누님이 많은 최고급 술집이었기 때문에, 국회의원이나 경찰서장, 교장선생님 정도는 되어야 손님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주 가끔 교감선생님이 따라오시기도 했지만, 대부분 고위관리만이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저만 빼고 말입니다.
사장 아들이라는 특권 덕분에 저는 어릴 때부터 아무런 부담 없이 미성년자 출입 금지 구역을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인간의 본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밤이 되면 인간은 저렇게 달라지는구나' 하고 저도 모르는 사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늘 애국심을 입에 달고 살고, 평소 체면과 품위를 생명처럼 여기며 사는 점잖은 분들의 이중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딸 같은 여자랑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았으니 그럴 수밖에요.
그래서인지 누군가 제게 명함을 건네며 인사를 하면,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이렇게 질문하게 됩니다. '혼자 있을 때,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이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까?'라고 말입니다.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겁니다.
무슨 얘기를 잘하고 어떤 지위를 가졌으며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등의 정보는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을 아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내면을 봐야 합니다. 그 사람 내면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하지 아니함이라 (잠23:7)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것을 철저히 보고 자라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제가 중학교 2학년일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늘 기생 누님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 광경일 뿐입니다. 그분은 가족에든 무엇에든 얽매이지 않고 전혀 부담 없이 일평생 즐기면서 사셨습니다. 놀이란 놀이는 다 해보셨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우리나라의 그 춥고 배고팠던 시절에도 사냥 놀이를 다니셨을 정도니까요.
당시에는 아무나 기생이 될 수 없었습니다. 미모는 기본이고 노래와 춤에 능해야 하며, 시를 쓰고 감상할 줄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들 나름대로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요즘의 연예인보다 수준이 더 높았을 겁니다. 그래서 큰 술집에서 일하거나 이름이 알려진 기생들은 부자나 고위관리 같은 특별한 손님만 상대했습니다.
그런 기생들과 밤낮으로 붙어 놀러 다니던 아버지였으니, 어쩌다 집에 오면 보는 어머니 얼굴이 예뻐 보였겠습니까? 어머니의 외모는 대강 어머니를 많이 닮은 저를 통해 짐작하시면 됩니다. 연예인 같은 기생들과 지내는 사람이었으니, 저랑 비슷하게 생긴 어머니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무슨 감동이 되겠습니까? 한마디로 확 짜증이 날 수밖에요. 결국 술주정이 발동하기 시작하는데, 정말 별 짓을 다 당해 봤습니다. 자정부터 시작한 술주정은 새벽 네다섯 시까지 이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이때 아버지께 정말 많이 당했기 때문에, 저는 웬만해선 그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자정부터 새벽이면 잠이 가장 많이 쏟아질 시간이 아닙니까. 남들 다 자는 그 시간에 저희 가족은 삶과 죽음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툭하면 집에 불을 지르려 하고, '이 허망한 세상, 그냥 같이 죽어 버리자'며 장전한 사냥총을 이마에 갖다 대고 ... 안전장치를 풀고서 방아쇠에 손가락까지 걸은 상태라 자칫하면 바로 죽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그냥 무조건 아버지께 매달려 용서해 달라고 울며불며 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회개할 이유가 없을 때도 죽어라고 회개한 덕분인지, 예수님 믿고 나서 회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아버지가 빨리 죽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런 소원을 품었을까요. 그러나 그런 소원은 저만 품은 게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발소리만 들어도 곧바로 탈이 나면서 아프셨을 정도니까요.
결국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비명횡사해 버렸습니다. 대체 무얼 어떻게 한 건지 그 많은 재산까지 전부 날리고서, 그야말로 아무런 부담 없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저희 가족은 순식간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내던져졌습니다. 주민등록증조차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뒷골목에 살면서 큰 고생을 맛보았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얼마나 처절하고 힘든 일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만 없어지면 죽음의 공포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를 통해 공급받았던 것들이 아버지와 함께 모두 사라지면서 또 다른 공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과 집안의 파산을 겪으면서 저는 결국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습니다. 저의 최종학력은 중학교 2학년 중퇴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제가 가진 국가 인증 자격증이라고는 달랑 1종 운전면허 하나뿐입니다. 저는 그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알 뿐입니다.
어쨌든 결국 생계를 꾸릴 책임은 하루아침에 과부가 되어 버린 어머니가 떠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어디서 무슨 재주로 돈을 벌 수 있겠습니까? 저희 가족은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래를 준비해야 할 청소년 시기를, 저는 폭력과 음란, 범죄 투성이의 뒷골목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정말 비참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하루가 일 년처럼 느껴질 만큼 끔찍합니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에 굶주리고 매 맞는 경험은 저만 한 것이 아닙니다. 정도는 달라도 저와 비슷한 연령대의 분들 중에 의외로 많은 사람이 그런 경험을 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몸이 힘든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잊히는 법입니다. 제가 정말로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제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왜 사는 걸까? 그렇다고 손목을 긋거나 불이라도 싸질러서 이 비참한 인생을 끝장낼 배짱도 없고,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는 욕심도 없는 머저리 등신!'
제가 얼마나 바보 같고 한심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더 힘든 것은 도움을 요청할 대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말로 통하지 않는 외국에 혼자 남겨진, 더구나 아는 사람도 부를 사람도 없는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끔찍하지 않습니까? 제가 마치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예수님의 이름도, 복음에 대한 설명도 들어 본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부를 대상도 없이 그토록 기막힌 절망의 터널을 걸어가는 것이 정말 비참했습니다. 세상이 두렵고, 제 자신이 너무 미워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저는 스스로를 학대하고 비하하는 불쌍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모든 비참함이 갑자기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 같은 인생이 결코 부를 수 없고 감히 찾을 수도 없을 것 같은 분을 만난 것입니다. 더는 내려갈 데가 없는 깊은 밑바닥에서 처참하게 주저앉아 있는 저를 일으켜 주신 분을 만났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을 말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