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금과 가출의 위기, 제너럴 채의 지혜를 빌립시다. - 둘
6월달 쯤의 일이였습니다.
베트남 역사와 전쟁 이야기, 글구 모 카폐에서 호치민 찬양하는 이야기가 나오던 때였습니다.
어느 베트남 전쟁에 쓴 글을 보고 제가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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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부산] 조박사 : 만약에 채명신 장군이 미군의 총사령관이였다면 월남 패망은 없었다고 봅니다. 당연히 우리들 존재도 없었다고 봐요죠! 가난이 싫어서 탈출 러시를 하는 벳남 처녀들을 애초부터 막았을 터이니까요?? 호치민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최대업적은 벳남을 가난한 후진국국가로 만들어서 울마눌같은 베트남 미인들이 죽기살기로 벳남탈출러시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저는 개인적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09.06.13 01 :09
A : 딴지는 아니구요.. 채명신장군의 회고록이나 강연내용을 보면 게릴라전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채명신 장군은 남베트남군이나 미군은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채명신 장군 뒤를 이어 베트남으로 간 다른 장군들의 회고록에도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분들도 6.25전쟁때 초급장교로 시작해서 무용을 떨치신 분들입니다) 09.06.13 10 :14
A : 왜냐하면 월남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당시 국경선인 북위 17도선에서 정규전을 벌여서 북베트남군을 묶어놓은 다음 남쪽의 게릴라들을 섬멸했어야 했는데.. 소련이나 중국의 참전을 두려워한 미국정치인들이 북쪽에 대한 공격을 못하게 했기에 09.06.13 10 :17
A : 대대적인 토벌로 베트콩세력이 괴멸되려고 하면.. 북쪽에서 필요하면 마음놓고 북쪽의 정규군들을 내려보내서 베트콩들의 역할을 대신하게 하지요.. 그럼 남쪽의 연합군들은 북쪽에서 내려보낸 월맹군 게릴라들에게 신경을 쓰는 사이.. 다시 베트콩들이 세력을 회복하고 그런 악순환이 계속되었지요.. 09.06.13 10 :24
A : 당시 채명신 장군은 게릴라전의 특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이런 상태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분 말씀에 의하면 당시 대다수의 월남전에 참전한 미군 장군들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정치인들의 허락이 없었기에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채명신장군은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지지는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지요.. 결론적으로 채명신장군이 말하는대로 월남은 패망했지만 한국군은 패자가 되지는 않은 그런 결과가 나왔지요.. 09.06.13 10 :24
[부산] 조박사 :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까지 알고 계시네요. 만약에 채명신 장군이 미국의 총사령관이였다면 북베트남서 게릴라 전을 수행했을 거라고 저는 봅니다. 그렇다면 월남의 공산화는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09.06.13 13 :56
A : 채명신장군은 게릴라전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알고 있었겠지만.. 그분이 미군 사령관이었어도 당시 미국의 정치인들 때문에 실행하기는 어려웠을거라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미군 사령관도 뭔가 복안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정치인들때문에 실행을 못했을 뿐.. 09.06.13 14 :56
[부산] 조박사 : 이순신 장군도 선조임금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조선수군이 괘멸하고도, 12선의 배로 승리할 수 있었죠. 미국도 북진을 주장한 장군도 있었고, 두손 두발 다 묶어놓고 싸우라고 한다고 불평한 장군도 있었다고 합니다만, 옛날부터 채명신 장군이 만약에 미군 총사령관이였다면 어떠한 절묘한 수를 내어서 정치인을 설득시켰을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09.06.15 01 :39
A : 그럴 수도 있겠네요... 09.06.15 08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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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채명신 장군이 미군의 총사령관이였다면 월남 패망은 없었다고 봅니다???"
이 생각은 채명신 장군 대하여 어렴풋이 알았던,
아주 먼 옛날부터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였습니다.
이 글을 쓰려고 자료를 수집하다가 얼마전에 알았지만,
월남전 당시 이미 외국의 일부 언론들은
그 당시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더군요.
저는 깜짝놀랐습니다.
신기했다고나 할까?
내 생각과 같은 생각을 만나서 반갑다고나 할까?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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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 영국 런던 타임즈에서 바라본 월남전의 한국군 ▣
If the Korean forces had taken charge of the whole of South Vietnam
or the U.S forces had drawn a lesson from "Go Boi",
the Vietnam war would already have been won.
When on-e takes a ride in a car for 96 kilometers in the pitch-back
dark,there is not a single sign of rifle shooting or ambush attack.
None but the Korean soldiers could do so anywhere in South Vietnam
-The London Times.
만일 한국군이 전 월남을 장악하였거나
미군들이 "고보이" 교훈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월남전은 벌써 이겼을 것이다.
칠흙같은 어둠속을 96키로나 자동차로 달려도
총격도 복병기습의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월남 지역의 그 어느곳에서도 그와 같이 할자는 한국군 이외는 아무도 없다.
- 영국 런던 타임즈에서.
※ "고보이 교훈"이란?...
맹호부대 포병대대가 퀴논 (Qui Nhon)근처 고보이 (Go Boi)평야에
건기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고보이댐을 건설해주는 공사를 했습니다.
열대지방 베트남의 2모작 농사에서 3모작이 가능하게한 퀴논 영구댐이었죠.
전투부대가 대민지원을 하는것을 보고 영국기자가 놀랐나 봅니다.
※ ▣ 영국 런던 타임즈 기사의 원문과 비하인드 스토리 :
(펌) - 한국군에서 열흘간이나 종군한 바 있는 <런던 타임즈>의 니콜라스 토말란 기자는,
- 영국에 돌아가 1966년 5월 29일 <런던 타임즈> 일요파인 <선데이 타임즈>에
- 다음과 같은 특집기사를 싣고 ‘런던29일 UPI'발로 전세계에 타전했다.
“ 만일 한국군이 전월남을 장악하였거나
미군들이 ‘고보이’ 교훈을 배울 수 있었다면 월남전은 벌써 이겼을 것이다.
요컨대 한국군은 이 전쟁을 이해하고 있으면
베트콩과 맞먹는 냉정과 백병전의 결의를 가지고 싸우고 있다.
한국군에게는 공군도 없고 중포 (重砲)도 없다.
그들은 고보이와 같은 지역을 정복할 때 소규모 부대로 싸운다.
그들은 우선 무시무시한 일격을 가하는데 베트콩으로 판명된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부락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월남 지방민들은 한국군에 격분하고 있지는 않으나 한국군을 두려워 한다.
그들은 한국군이 이와 같은 점령하에서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월남 내의 그 누구보다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군이 장악하고 있는 19번도로의 이 지역은 극히 안전하다.
나는 두 명의 한국군과 더불어 칠흙같은 어둠속을
96킬로미터나 자동차로 달렸으나 총격도 복병 (伏兵) 기습의 기미도 전혀 보지 못했다.
그 어느 곳에서도 그와 같이 할 자는 없다. ”
- 이 기사를 발표한 <런던 타임즈>는 한국과 한국인에게 매우 냉담한 신문이었다.
- 해방 이후 혼란기를 겪고 있던 한국과 한국인에게
-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찾기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찾는 것과 같다’고 혹평을 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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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 뉴욕 타임지에서 노획한 베트콩 지령문 ▣
Captured Viet Cong orders now stipulate that contact with the Koreans
is to be avoided at all costs unless a Viet Cong victory is 100% certain.
Never defy Korean soldiers without discrimination, even when are not
armed, for they all well trained with Taekwondo.
- An excerpt from an enemy directive seized
노획한 베트콩 문서에 의하면 베트콩은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도록 지시가 되어 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이니 비무장한 한국군인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마라.
- 1966.7.22 뉴욕 타임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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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 미국 저널지의 시각으로 본 월남의 대한민국 국군 ▣
What would happen of six hundred thousand Koreans were exclusively
conducting the Vietnam war? on-ly fifty thausand Koreans repelled the
enemy from their strategic responsibility area just overnight during
the enemy's Tet offensive...... The central coast area which Viet Cong
had been occupying since their anti-French war is now completely
under Koreans's control.
- Evansille Journal, U.S.A- March,1966
월남의 모든 사람을 다 제쳐놓고 60만 한국군에게 전쟁을 맡겨 보는 것이 어떨까?
5만에 불과한 한국군은 적의 구정 공세 기간중 전술 책임구역 내에 침입한 적을
단 하룻만에 격퇴했다...... 베트콩의 항불전쟁 이래 베트콩에 장악되어 있던
중부 해안 지대가 지금은 한국군에 의하여 완전히 통활되고 있다.
- 1966.3 미국 에빈스빌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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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한국군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라!
특히 "맹호"를 만나면 모든 작전을 취소하고 철수하여 병력과 장비등 인민의 재산을 보존하라!
"대체 한국군은 어찌이리 용맹한가?
백마의 병사들은 자신의 목숨조차도 아깝지 않단말인가?,
나는 이것을 단순한 "군인정신"이라 인정할 수 없다!
-호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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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한국군이 전월남을 장악하였거나
미군들이 ‘고보이’ 교훈을 배울 수 있었다면 월남전은 벌써 이겼을 것이다.
노획한 베트콩 문서에 의하면 베트콩은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도록 지시가 되어 있다.
월남의 모든 사람을 다 제쳐놓고 60만 한국군에게 전쟁을 맡겨 보는 것이 어떨까?
다시 윗 내용들을 요약하자면,
만약에 한국군에게 월남전을 몽땅 맡겼더라면
(즉 채명신 장군이 미군의 총사령관이었거나 미군대신 한국군만이 50만이 참전했더라면)
또는 미군이 한국군의 고도의 전략,전술 (민사심리전의 일환으로 고보이댐을 만들어준 대민지원 사업내용)
배웠더라면 월남전은 벌써 끝났을 것이다
란 내용입니다.
미군의 작전에 실망한 서방 언론들의 극찬이 한국군에게
쏱아졌습니다.
요컨데, "미국정부는 무능한 미군 장성대신에 한국군의 채명신 장군이 베트남전의 최고 사령관직을 주어야 한다."
라는 뜻이겠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정확한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일화도 전해져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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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1860대대 초에 국가별 위상을 봅시다.
1960년 1인당 GNP는 남한이 79달러, 북한이 117 달러였다.
이때 필리핀이나 태국은 한국보다 3배나 더 높았습니다.
당시 태국은 우리보다 새까맣게 우러러 보이는 선진국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태국 왕을 만나겠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태국 왕 (1967.5월 타놈 수상이 채명신 장군을 초청하여 방문시의 푸미폰 태국국왕으로 추정)은
"제너럴 채"가 온다면 만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만날 의사가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주월한국군의 명성이 아니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세계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이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월한국군" 초대 사령관인 "제너럴 채"를 모른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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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가 근거가 되는 것은,
1966년 10월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베트남전쟁 참전국 정상회담에 참가하기 위해
월남을 방문했는데, 그 때 아마도
태국국왕을 접견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잘못 알려져서 생긴 얘기같은데,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이 때문에 채명신 장군에게는 안 좋았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월남전에서 너무나도 큰 공적을 세워서
인기가 좋았으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밖에 나서
그 이후 출세를 못했다고 합니다.
혹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충성경쟁을 벌이던 사람들 중에서
채명신 장군이 출세하면 장차 정적이 될 것으로 여겨서
자기들의 권력유지를 위하여
채명신 장군을 시기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갖은 중상모략을 해서
더 이상의 성공을 가로막았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믿거나, 말거나,,,
허억~
또 돌덩이 날라오네,
욱~ 피하자! 피하자!
잡담 그만 하고 본론에 들어갑시다.
제가 송금과 가출의 위기, 제너럴 채의 지혜를 빌립시다.라는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 한베가족의 영원한 고민,
송금문제와 가출사태의 예방에 관한 얘기입니다.
이 고민을 어떻게 해결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제너랄 채의 지혜를
빌려봄이 어떻느냐는 제안을 제시합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하나의 대안으로 제너랄 채의 지혜를
빌려봄이 어떻느냐는 제안을 제시하는 것 뿐입니다.
제널라 채란 것은 "주월한국군" 초대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입니다.
그의 지혜라는 것은 대게릴라전, 민사심리전의 일환으로 실시된 대민지원 사업이란 것입니다.
말꼬리를 잡기를 좋아하신 분이 많이 계시더군요.
불필요한 논쟁은 자제하시길 바랍니다.
남의 결혼생활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관섭은 할 수가 없구요,
자칫 잘못하면 천길 낭떠러지기에 떨어질 수 있는 우리들의 상황에서
만약 님께서 제 얘기가 옳은 것 같다는 확신이 들면은,
한번쯤은 잘 이 원리를 응용해보시기를 검토해보라고, 권하는 것 뿐입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해서 제가 결혼생활 2년 6개월동안 지금까지
처가집엔 송금을 딸랑 60만원 했습니다.
그러고서도 아무 탈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더 자랑할려면 할 수 있는 것은,
울 마눌은 바르게살기운동 부산광역시회의에서
효부상을 수상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솔직히 몹시 찝찝한 부분이더군요.
그래서 별로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물론 저보다 더 짠돌이 분도 계시겠지만은,
저는 송금압박을 전혀 받아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결과적으로 국제결혼을 한 가정들 중에서
행복지수로 따지면 저의 가정이 상위 2%내에 들겁니다.
ㅎㅎ 저의 자가당착일지도 모르겠군요.
하여튼 이러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실행한 저의 노력중에
과거 어느 책인가 신문인가에서 읽은 기억이 있었던
어느 대민지원 사업내용를 딱 한가지 응용하였고,
혹시 내 기억이 왜곡되었나하는 의구심에서
그 내용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하고자
한달동안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노력한 끝에
드디어 진실이었음이 밝혀졌고,
이제서야 잠수를 끝내고 자신감있게 글을 씁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의 대안으로 제너랄 채의 지혜를
빌려봄이 어떻느냐는 제안을 제시합니다.
쓸데없이 이 귀절로 말꼬리 잡는 분 없기를~
그럼 먼저 저의 송금과정부터 다시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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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 과거에 썼던 본인 글)
그리고 마눌입국 5개월 정도 지나서 인터넷에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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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조박사 07.09.13 21 :59
입국 5개월정도가 된 어제 한국서 찍은 우리들 사진과 현금 30만원이 베트남에 도착했답니다 마눌은 전화하고는좋아서,, 오빠,남편 사랑한다고 야단법석이고,,, 뭐 대단하다고,,, 사위로서 당연히 추석을 맞아 장인과 장모님에게 용돈 드린 것 뿐인데,,, 그러면서도 지난 화요일 회사 회식이 있어서 술을 마셨다고 했더니, 아내 안 좋아요하면서 고함에 또 고함, 또한 베트남 처가집 식구들을 사랑한다고 차례로 말하다가, 베트남여동생(처제)도 사랑해요라고 했더니만, 베트남 가라고 호통 나는 왜 이리 살아야 하는지요 [3]
(부산) 사랑아빠 07.09.20 13:10
쪼맨만 넣지요....글을 못읽겠네요...내용은 재밌는데...
┗ (부산) 사랑아빠 07.09.20 13:10
쪼맨만 넣지요....글을 못읽겠네요...내용은 재밌는데... 등록 취소
텍스티콘 비밀메모 0 / 300자
┗ [부산]그다음 07.09.14 10:44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박사님 형수님이랑 보고싶군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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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 과거에 썼던 본인 글)
아무도 송금 문제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것을 절대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곤 5개월 정도 지나자 첫 송금이 있었습니다.
금액은 300달러, 명분은 한국 최대의 명절인 추석 (秋夕)
그리고 그동안 찍었던 우리들 사진.
한 보름동안, 마눌은 잘때마다 꼭 껴앉고 고맙다고 야단이였습니다.
송금얘기는 일체 꺼내지도 못했는데, 얼마나 바랬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눌은 부모님께 죄인의 신세에서 벗어난 것을 마음적으로 안도했던 모양입니다.
나 또한 기뻤지만, 한편으로 속으로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죠!
마눌의 그러한 모습은 또 다시 내에게 미안함에 조그마한 상처로 남았습니다.
300달러, 이 금액을 정하까지 1주일 동안 전자계산기가지고
내 나름대로 머리 굴리면서, 엄청 많은 갈등을 했었습니다.
20만원에서 50만원 사이의 금액을 내 스스로 결정해야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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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앞,뒤, 중간부분 생략)
~단 돈 1,000원 이하로 이 정도 식사하기에는 이 지구상에서는 잘 없을거에요... 보통 베트남인들 식사는 싸구려 식사 그러니까 500원짜리 식사를 많이 하더군요...왜냐고요? 돈이 없으니까...베트남 1인당 국민소득은 2006년 1월 현재 약 700달러 정도랍니다...~
~ 자그만치 베트남 인구가 8,000만이 넘는대요.....국토로 보나 인구로 보나 중국 인도 만큼은 시장이 풍부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오기만 하면 베트남도 시장이 만만찮을거에요...국토 면적은 우리 한반도 1.5배가 되고요....현재 1인당 GNP는 700달러 정도...우리 나라 1인당 GNP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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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앞,뒤, 중간부분 생략)
2. 껀터 지역 개관
2.1 껀터 (Can Tho)
껀터성 (Province)은 베트남 남서부 메콩 델타 (Mekong Delta)지역의 중심지로, 호치민 (Ho Chi Minh)시에서 서쪽으로 약 17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총면적 3,022㎢, 인구 약 200만, 1인당 평균 소득 336$ (1998년) 정도로, 그 성도인 껀터시는 베트남 5대 도시에 속하는 메콩 델타 지역 최대의 도시이다.
남부 지역 수로·육로의 교통 중심지이며, 공항도 가지고 있어 캄보디아와 같은 인근 국가와의 교역도 활발하다. 5월∼11월은 우기, 12월∼4월은 건기로 구분되고, 연중 날씨는 고온다습하며 태풍이 없다. 베트남 최대의 곡창지대인 메콩 델타 지역의 중앙에 위치한 도시인만큼 쌀 농사를 주로 하고 있으며, 다양한 과일도 많이 생산된다. 민물고기나 새우 양식을 하는 곳이 많으며 돼지·오리·닭 등의 축산도 발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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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앞,뒤, 중간부분 생략)
베트남의 국민 1인당총생산액은 370달러에 불과하고 하노이 같은 대도시의 경우도 700달러 정도다. 즉 하노이의 일인당 월 평균소득은 60$ 정도라는 것.
그러나 하노이의 보통 가정에서는 노부모와 어린 아이를 제외한 부부나 성장한 자녀들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월 120불 정도의 가구당 평균소득을 올리고 있다.
운이 좋아 외국인 가정에서 기사로 일을 하게 되면 월 150$ 이상으로 수입이 껑충 뛰기도 한다. 외국인 기업에서 비서나 통역관으로 일하는 경우에도 대개 200$ 이상 정도를 받는다. 우리 기준으로 결코 많은 액수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이 자주 먹는 쌀 국수 한 그릇의 가격은 4000동 (우리돈 320원), 즉 1$이면 세 사람이 가서 배를 불릴 수 있고, 요새는 그나마 환율이 올라 3000동 정도의 거스름돈 까지 받는다. 이른 아침부터 식사를 길거리에서 국수로 떼우고 있는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이들에겐 자가용의 개념으로 애용되는 자전거, 한 대 당 가격은 대만산이 5-600,000동 정도로 40$ 가량이고 베트남산은 이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유난히 바람이 잘 빠지는 이 자전거의 바퀴에 바람을 넣고 싶으면 한 바퀴당 500동, 우리 돈 40원을 내야한다. 그래서 그들의 자가용 유지비는 평균 2만동 이라고 하니까 1$ 50센트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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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 과거에 썼던 본인 글)
사위로서 처가집을 도와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순수하게 생각못하고,
신중하게 처신해야 하는 함이, 베트남 국제결혼한 나 자신의 비애라 입니다.
성의 표시를 안하면 마눌의 원망과 불신을 살 수도 있고,,,,
그런데, 너무 적으면 섭섭하거나 불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고,,,
너무 많으면 처가집이 타락의 길로 빠질 것 같고,,,,
베트남 처가집에 송금규모를 결정한다고,
베트남의 경제동향을 분석 (조금 거창?)한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요?
결론은 송금목표를 첫번째 송금이므로,
처가집수준에서 1년 연봉을 기준으로,
마눌이 주위의 한베가족보다 조금 적은 금액으로 결정하면서,
설날까지 600달러를 보내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금액이라면 딸 셋이 호치민에서 1년동안 송금할 수 있는 액수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저는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 모르겠지만, 이 금액이 맞는 금액인지, 틀린 금액인 줄 알지 못했지만, 아마 내 계산이 틀렸을 겁니다.
설날을 앞두고 작년 12월에 또 30만원을 보냈는데,
이번엔 마눌은 별 반응이 없고,
장인어른이 결혼 후 처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했고 설날때 옷 사입겠다란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0개월정도 지나고, 보름 전쯤 드디어 일이 터졌습니다.
설날이라 수시로 전화하던 마눌은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베트남 집 아파요. 돈 마니마니라고,,,,,
즉각 통역전화를 통하여 꼬치꼬치 캐 물었습니다.
장모가 집을 수리하고 싶다면서 돈이 필요하답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만,
한국돈 200만원이면 된다는데,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아니고, 나중에 필요하답니다.
또 비상초를 꺼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설날 때 보내준 돈 30만원이 부메랑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오는가?
내 입장에선 어찌되었든 처가집에서 송금요구했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 기분이 나빴습니다.
베트남의 나무판자와 바나나잎사기로 지붕으로 지은 집을 저는 직접 보았습니다.
태풍에 그러한 집이 날라갔다는 얘기도 들은 적 있습니다.
마눌은 태풍이 불면 야자나무도 뽑힌답니다.
홍수가 나면 강물은 온통 쓰레기 천지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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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앞,뒤, 중간부분 생략)
~그저께는 아내가 벳남에 부모님 집이 강가에 있고 쓰레기가 떠다닌다고 하면서
땅도 없어요 돈도 없어요 ..없어요 없어요로 일관하면서 도움줄것을 눈물로 호소하는데
괜히 심통이 나대요 그래서 비꼰말을 했습니다
[ 쓰레기가 떠다니면 건저내면 되고 땅이 없어면 땅사면 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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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 과거에 썼던 본인 글)
호치민에서 결혼식후에 호텔로 오면서,
비가 내려서 길에 물이 차니 울 마눌은 그것을 보고 손가락으로
뭐라뭐라 자꾸 말합니다.
베트남 말로 해도 그 말뜻이 무었인지 훤하게 들려옵니다.
홍수가 나면 무섭다!
베트남 처가집에 가니, 마눌은 집 나무벽을 치고 자기 가슴을 칩니다.
베트남말로 열변을 토하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듣습니다.
처가집! 좀 지어주세요.
TV에서 한국의 성벽을 나오자 한국집 예뻐요! 베트남집 안예뻐요!하며 흥분합니다.
무슨 뜻인지 또 알고는 스트레스를 은근히 받죠!
베트남에서의 처가집에서 느끼는 그 공포를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나나나무를 지은 집을 버리고 시멘트집에 애착하는 이유를 말입니다.
작년 봄에 마눌에게 분명히 얘기했습니다.
오빠가 돈 벌어서 우리 식구 먹여살려야 하니,
투엉, 너는 나중에 한국말 배워서 회사에 취직하여 1년만 고생하면 집 한채 지어줄 수 있다.
마눌도 그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새까맣게 까먹고는 집수리한다고 돈을 달라니?
마음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무리하서라도, 처가집에 집 한채 제대로 지어주고 싶죠!
약간의 빚과 생활의 좀 어려움은 있겠지만, 그정도의 능력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 후의 일어날 후폭풍은 생각만 해도 너무나 무섭습니다.
off-line서 만난 분들은 저보고 너무 과민하게 생각한다고 그럽니다.
내 자신도 너무 냉철하게 처신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은,
베트남 사람들의 생리를 저도 7개월동안 직접 부딪히면서 경험한 사람입니다.
내 원칙은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마눌에게 고기가 아니라 고기잡는 법을 가르켜야 한다지만,
저는 처가집야 말로, 한국의 사위로서
고기를 주지말고 고기잡는 법을 가르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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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 과거에 썼던 본인 글)
담배 한대 피고 들어오자 여우같은 울 마눌은 내 눈치를 살피면서,
오빠 괜찮아요? 오빠 괜찮아요? 하면서 내 주위를 돌면서 나를 달랩니다.
그러면서 내 자존심을 팍 상하는 한마디로 던져서 내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오빠, 돈 없어요. 아내, 통장 돈 많아요.
오빠, 100만원, 아내, 100만원,
내년 설날 같이 베트남 가요.
지금까지는 남들이 심하게 느꼈다는 고통들을 모두 다 쉽게 넘기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하루 더 웃음소리가 집밖으로 들리게 살아왔다지만,
처가집을 관리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서 언제쯤이면,
순수한 마음에서 아무런 부담없이 처가집을 대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마눌에게 인간적으로 대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베트남 국제 결혼을 한 저의 비애 (悲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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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저의 송금과정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 아니였죠.
송금하는 방법도 신경을 썼습니다.
거기에 관련하여,
얼마전에 저는 과거 베트남 전재에 참여하신분들께,
다음과 같은 쪽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먼저 울 카폐회원이신
부천상록수님께 8월 16일에 문의를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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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내용)
2009-08-16 11 :10 :13
안녕하세요.
[부산] 조박사입니다.
요즘 한달째 글을 쓰고 있습니다.
월남전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 당시 민사심리전의 일환으로
실시했던 대민지원사업으로
많은 전과를 올린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그 노하우를
현재 우리 한베가족들이 물려받아서
가출과 송금문제에 적극적 대처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한가지 문의하고 합니다.
님께선 월남파병 용사로 알고 계신데,
제가 옛날에
어느 책인가, 신문인가서 읽었던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쌀 등을 나누어 줄때
미군은 그냥 나누어 주었지만,
한국군은
베트남 현지인들을 고용해서
다리보수나 마을 회관 건립 등에
한국군과 같이 참여시켜서
그 댓가로 쌀 등을 나누어주면서
대민활동을 배가시켰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인터넷에 아무리 뒤져도
이에 관한 내용을 찾을 수가 없네요.
혹시 그 당시 그런 내용을 들었던 기억이
계시다면 확인 차원에서
쪽지로 답을 부탁드립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하십시요.
[부산] 조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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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월남전 참전용사 사이트를 찾아다니면서,
같은 내용의 쪽지를 여러번 보내서 문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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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여러곳에 보낸 쪽지 내용)
인터넷을 찾아보니깐 월남전 당시
그 당시 민사심리전의 일환으로
실시했던 대민지원사업으로
월남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많은 전과를 올린 것으로 압니다.
제가 옛날에
어느 책인가, 신문인가서 읽었던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쌀 등을 나누어 줄때
미군은 그냥 나누어 주었지만,
한국군은
베트남 현지인들을 고용해서
다리보수나 마을 회관 건립 등에
한국군과 같이 참여시켜서
그 댓가로 쌀 등을 나누어주면서
대민활동을 배가시켰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인터넷에 아무리 뒤져도
이에 관한 내용을 찾을 수가 없네요.
혹시 그 당시 그런 내용을 들었던 기억이
계시다면 확인 차원에서
답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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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내용은 좀 실망스러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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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받은 쪽지내용)
반갑습니다 ..솔직이 저는 최 전방 에서 근무 한 관계로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고
님의 이야기대로 마을 회관을 지워주고 다리를 놔주며 농사 짓는 방법을 가르켜 주엇다는 정도 입니다 ..
하지만 참전 전우회에 문의 하여 다른 정보가 나오면 연락 드리 겟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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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받은 쪽지내용)
저는 1967년 맹호부대로 파병되여 전투부대중
무전병까지 임무 수행을하고 16개월만에 사선에서 승리의 기쁨도 만끽하기도 바쁘게 고엽제라는
다욕신으로 피폭되여 약으로써 생을 이여가고있담니다
그러나 님! 께서 말씀하신 대민봉사는
대=소 작전과 전투 병으로썬 자세한건 알수없으며
그당시 대민사업에 보수나=댓가성 없이 불상한
주민에게 주는것을 본적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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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서 부호아빠라는 닉네임으로
이 건을 문의 드렸습니다.
문의 내용은 크게 차이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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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 사이트를 통해 얻은 답변)
신포청천 2009-08-30 12 :54 ; 부호아빠님께
질문에 대하여 본 홈에서 답변 드리기에는 역부족 입니다.
자료가 전무 하여 다음 사이트를 소개해 드리오니 질의 하시면 친절 하게 답변 하실겁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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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 사이트를 통해 얻은 답변)
운영자 ; 2009-08-30 22 :34
관심가져주시어 감사합니다..
문의하신 '대민지원' 이란, 어느 한분야에서만 실시된것이 아니라 식량.교육.건설.문화.의료등..
여러 분야에서 실시된 것인만큼 각기 업종이나 조건에 따라서 진행된것으로 생각합니다.
때문에 당해분야의 구체적 상황외에는 꼭 집어서 이렇습니다..라는 명쾌한 설명은,
전투부대에서만 지내왔던 저의 경험으로는 부족할것 같습니다.
자세한 대답을 못드려 죄송합니다.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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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전투부대 장병들이라서 대민지원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구나' 라고
생각하고는 인터넷에서 월남전 참전수기를 통해 얻은
이번엔 장교분들에게 문의를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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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메일 내용)
RE : 월남전 대민지원에 관한 문의입니다.
저는 월남에서 전투만을 했고, 사이공에서는 5개월 동안만 전속부관을 했습니다.
일선부데에서는 월남 사람들을 공사에 투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한 두 가지 예외는 있을지 몰라도 한국군은 일본사람들처럼
월남인들을 작업에 끌어들이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아마도 저는 선생님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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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한겨레 신문에서 양민학살론으로 파월용사들이 곤욕을 치른 적이 있어서
그런지 대답은 소극적이였습니다.
아마 한국군의 월남 노동자 착취설로 유도할 목적으로 제가 질문을 드린 것으로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재답변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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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답변 내용)
제가 표현력이 부족한 것 같군요.
한국군이 일본인처럼
침략자로서
베트남사람들에게 자기네들 침략전쟁을 위한
강제노역을 시켰다는 것이
아니라,
(참고로 저의 할아버지께서도 징용피해자십니다.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 당시에 직접 원폭 폭팔 광경을 목격하시고는
어린 시절 저에게 이마가 번쩍거리며 화끈거렸다란 목격담을 들려주셨습니다.)
자유와 평화의 십자군으로써
전쟁에 찌든 그 당시 베트남사람들에게
배급물자등으로
쌀등을 나누어줄 때
그냥 나눠 준것이 아니라,
거기다가 대민지원 차원에서
한국군이 건설하는
베트남사람들을 위한,
마을회관, 다리, 등등을 건설할 때
같이 동참시켜서
대민지원 효과를 배가시켰다란
내용을 옛날 신문인가? 잡지에서 본 기억이 있어서
그부분을 문의 드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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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이번에는 약간 누그러진 반응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이트를 소개하고 거기서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트로 찾아갔더니, 이미 제가 질문을 해 놓았고, 답변도 나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답변 당사자에게 제가 메일로 또 질문을 올렸고,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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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메일 내용)
전투부대의 대민지원은 부대인근 마을에 경로회를 연다던가, 의료지원 정도였고,
본격적인 대민지원은 비둘기부대 (건설지원단)가 주축이었는데
주로 사이공 (호치민) 근처에서 도로를 증설하고 다리를 놓고
학교와 유치원을 지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은 그 당시 전사기록에 별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 찾아보기 힙듭니다.
자유게시판 3125번에 자세히 보시면
"「빈 투안」에는 농민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진료소를 개설하였고
한국군 병사들은 각자가 매일 받는 배급미의 일부를 기증하여 각 부락에서
배급되는 저장미에 보태고 있다.
또한 품삯을 받고 도로 공사를 거들고 있는 남녀 촌민들도 적지 않다."
라는 정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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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제가 요구한 것에 대한 물음은 부족한 답변이었으나,
제가 과거 읽었던 것이 부정확한 것이 아니였다는 근거가 되기에는 충분한 것 같았습니다.
이처럼 악착같이 진위여부를 확인하고자 했던 이유는
그런 사실이 실제로 한건이라도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사실은
제가 이 글을 작성할 때
기억의 왜곡에 의한 거짓말이나 기타 허구로 쓴 소설이냐 하는
문제하고도 관련이 있기때문입니다.
제가 거짓말로 소설을 쓰고 싶진 않았지요.
그래서 이런 내용들을
제가 시리즈로 글로 좀 써봐서
가출과 송금문제로 고민하는
다른 한베 가족들에게
대안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근데, 제 기억이 잘못됐다면,
제가 거짓말을 하는 꼴이 되기에
사실 여부를 그렇게 악착같이 문의드린 것에 대한 정확한 이유입니다.
어찌되었거나 근거가 발견되었기에
미흡하지만, 제가 과거 월남전에서 민사심리전 대민지원에서
실행되었던 원리와 사례를 응용한 (?) 경험을 발표합니다.
앞에서 "송금하는 방법도 신경을 썼다."고 했습니다.
물론 울 마눌은 전혀 송금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솔직히 않했다기 보다는 못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심저어 이런 일까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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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 과거에 썼던 본인 글)
울 마눌 입국후 1달 반쯤 지났을 무렵입니다.
베트남과 한참 전화를 하더니만,
베트남 아버지 아파요하면서 눈물까지 글썽이려고 합니다.
그 순간, 아!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드디어 송금요구를 시작할 모양이구나!
순간적으로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더 이상 마눌의 입에서 말나오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마눌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말이 나올 새도 없이
그 즉시 1588전화를 걸어서,
어디가 아프냐? 왜 아프냐? 언제부터 아프냐? 어떻게 해서 아프게 되었느냐? 등등
마치 형사가 범인 신문하는 식으로 꼬치꼬치 무려 30분동안 통화를 하면서 캐 물었습니다.
나중엔 마눌은 자존심이 상해서, 눈을 흘기면서 신경질적으로, 허리와 무릅이 조금 아프다고 합니다.
통화가 끝나고, 이 날도 다른때 골치아픈 일이 있었던 날과
마찬가지로 비상초 3개를 꺼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머리가 혼란스럽더군요!
무었보다도 눈물까지 글썽이는 마눌의 눈동자가 머리를 휘감았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도시에서 막노동을 하던,
그 누구라도 연세가 들면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쑤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가누가 아프다, 집에 도둑이 들었다. 등은
단순히 신랑을 갈취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철석같이 믿었건만,
마눌의 눈물은 저에게 다른 생각을 해주게 하였습니다.
베트남 신부들은 효녀심청이라고 합니다만,
이국땅에서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출가외인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 누구라도 효녀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꼭 내가 이런식까지 잔인하게 해야하나?
미안하다. 투엉! 우리의 앞날을 위해서 나는 마음 독하게 먹고, 갈등의 요인들을 원천봉쇄해야 한다.
너의 이 순간의 아픈 마음을 오빠는 잊지 않고 있을께!
순수하게 장인,장모가 아프다는 얘기라도
그것이 빌미가 되어 송금까지 이어진다면,
잘못하면 송금이 송금을 부르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초반부터 너무 강하게 대응했을까?
그 뒤로는 왠만하면 장인,장모 아프다는 얘기를 안합니다.
그 뒤로 전화를 걸때마다 어디 안 아프냐고 문안 인사를 드렸는데,
마눌이 듣기에는 사실상 반 협박에 가까웠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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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금방법을 두고 고심했던 이유는 혹시나 역풍을 맞지 않을까하는 고민때문이였습니다.
여기서 역품이라 함은 처가집을 도와주고 싶은 목적이
베트남사람들의 잘 못된 인식으로 왜곡되어
처가집과 사위간의 상호 불신과 갈등을 초래하여,
결국은 극단적으로는 가출하는 사태에 이르던지 아니면 끝없는 송금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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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내가 배트남의 통장을 고집하는 이유는 예전 배트남 결혼후 배트남으로 보내준 돈이
중간에 모두 허공속으로 사라졌기 때문 임니다
나중에 가서야 사라진 돈의 행방을 알았습니다
대부분이 소개자인 친구의 주머니 속으로 나머진 배트남 아내의 먼 친척의 주머니에
돈에 대해서 만큼은 배트남은 더러운 곳임니다
배트남의 부모님과 최소한 친형제 이외의 한국의 소개자 업자 그리고 오래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친구
밑으면 안됌니다
그리고 어떤경우는 장인 보다는 장모에게 송금하는것이 좋습니다
장인이 더러는 걸래같은 자도 있습니다
사위가 아내 용돈 쓰라고 준돈을 뺏어 술 사먹고 노름하는 장인들도 더러는 있다는 것임니다
위문제로 배트남 인터뷰같이 보았던 한국 신랑이 마음 고생하는걸 본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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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이혼한 새언니한테 전화가 왔어요, 왜 전화햇을까요?
B ; 베트남사람 감사할줄도 모르고 미안해 할줄도 모릅니다 내생각은 나하고 결혼했는데 왜돈안주냐
요즘벳남결혼하면 돈몇백주는것 관례이다보니 안주니 이혼했어 위자료500백 받을 생각이었나 싶군요
그것도 안되니 생각이 바꿔었나 보군요 아마 베트남에서 시킨것 같습니다 그엄마에 그딸이거던요
한국사위한테 송금받은 돈으로 뭐 한는줄 아세요 도박합니다 카드게임 엄청해요
하루에 천불이 왔다갔다 합니다
마누라 친구중에 아마라호텔 나이트 다니다가 대만놈 만나사는여자인데 엄청 이뻐죠 이놈이 매달 천불씩 주다가
그돈으로 부녀가 딴짓하는것 보고 500불만 주더라구요 06.08.25 20 :27
C ; 베트남 여성들 돈때문에 결혼한거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돈때문에 결혼 하거에요
그 단적인 예로 20분 정도 신랑 될사람 얼굴보고 사랑이란 느낌이 올까요 돈을 요구하는거도 여러가지에요
가족중 누가 아프다 집에 도둑이 들었다 또 누가 일하다가 다쳐다 거의 온집안 식구가 다 동원되어 아파옵니다.
C ; 실제로 아파서 그럴수도 있겟죠 그러나 저희 집사람 한국에 온지 5달정도 되었는데 벌써 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다 팔아먹어요
물론 도둑도 이미 들었죠 전 버릇될까봐 모른척 합니다.
한번 송금 시작하면 기둥뿌리 뽑아서 베트남 줘야 할겁니다.
때론 안쓰럽고 미안하지만 그렇게 한다고해서 송금해주는거 아니라는걸 깨우쳐주려고 합니다. 06.09.20 18 :18
D ; 윗글에 대한 저의 생각은 사랑이란 감정없이 돈때문에 한국왔기 때문에 다시 전화가 온다해도 단호하게 해야 한다는겁니다.
다시 받어 주면 훗날 땅을 칠지도 몰라도 그건 한국여자도 마찬가지죠. 마음을 버릴때 버려야 상처가 빨리 아물어 옵니다. 06.09.20 1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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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한가지 머릿속을 맴도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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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E : 잘 살고 계시는 분도 계시군요. 요즘 제가 문제 가정을 종종 보는데,
남쪽여성들이 남편에게 빚 3억동(1700만원)을 뺏아내려고 어거지를 쓰는것입니다,
북쪽여성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손 벌리는거 잘 안하는거 같습니다,
추측컨데, 3억동으로 집수리하고 논 장만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려는 심산인듯합니다,
심청이를 자청하는 남쪽여성을 많이 봅니다. 사랑을 팔고사는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에와서 잘 살면 이뻐서라도 처가를 도우려할것입니다,
헌데, 때쓰고 협박하고,,울고불고,, 이건 아니라고봅니다, 07.01.03 09:20
E : 여러 회원님들께 부탁드리고 싶은건, 주면 안된다는겁니다,
내가 주면,, 옆집에 불똥이 튀서.. 또 다른집에 불화를 조장합니다, 뺏기는건 잘못된겁니다,
내가 스스로 돕는것이 옳다고 봅니다,
물고기 한마리를 주지말고, 낚시질을 배울 수있도록하는것이 현명하다고 봅니다, 07.01.03 09:24
E : 3억동 줘서.. 잘 쓰는 처가들도 있겠지만,
일부는 일도 않고,, 마약에 손데고.. 돈이 사람들을 망칠 수도 있다는겁니다 07.01.03 09:26
E : 컨터쪽에 처가를 둔분의 말에 의하면..
남쪽사람들의 소원은 집에 타일 깔고 살면서 논 3개 (3000스퀘어)를 갖는거랍니다.
딸하나 팔아서 그것들을 장만하려는 심산으로,,
나이불문하면서 외국으로 시집을 보내려고 애를 쓴다는군요. 07.01.03 09:33
E : 남쪽 시골에 어리고 가난하고 못배운 신부를 맞이한다면, 결혼비용 일체를 부담하며,
처가에 후달릴것을 각오함이 좋을듯합니다. 제가 걱정하는것은 3억동이 전염되는것입니다,
돈을 떠나서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겁니다, 내가 돈주고 신부 사온건가하는...
나와 살고 있는 여자가 내편이 아닌것에 대한 허탈감. 07.01.03 09:56
E : 조건 안따지면서 어떻게든 시집 보내려는 베트남의 부모들과 업자들간에 뽕짝이 맞아서..
번개불에 콩구워 먹듯이 일이 진행되는데, 결국, 모든 부담은 한국인 신랑이 해야한다는것입니다
(현재의 국제결혼풍습) 단타로 1천만원정도를 생각들하나본데,
그게 끝이아닌, 살면서 계속해서 후달리는 .. 경우를 많이 보게되서 슬프내요. 07.01.0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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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롯 이 글이 베트남 지역차별적인 발언이긴 하지만,
"내가 스스로 돕는것이 옳다고 봅니다,
물고기 한마리를 주지말고, 낚시질을 배울 수있도록하는것이 현명하다고 봅니다,"
라는 구절은 참 평소부터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이었습니다.
그 구절은 여기서 인용한 내용전부터도 가끔 나왔던 얘기였고,
평소 제가 생각하던 것과 비슷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북쪽여성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손 벌리는거 잘 안하는거 같습니다,
추측컨데, 3억동으로 집수리하고 논 장만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려는 심산인듯합니다,
심청이를 자청하는 남쪽여성을 많이 봅니다. 사랑을 팔고사는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라는
내용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북쪽 지역 여성과 결혼하신 회원님들과 off-line 모임에서 만났을 때,
상당히 많은 분이 송금문제로 갈등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문뜩 머릿속을 지나가는 한가지 생각,
"월남전에서 파월 장병들은
쌀 등을 나누어 줄때
미군은 그냥 나누어 주었지만,
따이한 한국군은
베트남 현지인들을 고용해서
다리보수나 마을 회관 건립 등에
한국군과 같이 참여시켜서
그 댓가로 쌀 등을 나누어주면서
대민활동을 배가시켰는데,
그 목적은
월남 사람들은 열대지방 특유의 게으른 국민성이 있고,
내전과 데모로 지친에다가 내전으로 높은 실업율 때문에
한국군의 절약미 등으로 양곡을 모았지만,
근면, 자조, 자립 정신을 함양한다는 차원에서
대민사업에 동참시키고 그 호흥도 대단했다"
라고 기억되는 내용이었습니다.
근 20년전에 읽었던 내용이기에,
기억은 또렸하지 않았지만,
대충정리하자면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머릿속에는 다음 단계의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고통분담!!
어자피 그 해에 울 마눌 통장도 처음 만들어주었고,
마눌은 은행이란 것을 처음 가 보았기에,
처가집도 은행이란 것을 이용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는
은행통장을 만들어서 on-line송금 시켜면은 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일단 처가집에서도 통장을 만드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간단한 방법을 쓰기로 했죠.
수박을 한덩어리 사들고,
제가 결혼했던 정보회사로 찾아가서
송금액 30만원을 주면서 부탁을 했죠.
업체 소장은 고객관리 차원에서 은쾌히 승낙을 하면서
업체서는 결혼식때 찍은 사진을 들고,
벳남 현지지사로 찾아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야 확실한 신원확인이 된다는 것이였습니다.
마눌은 머리를 꾸부리며너서
"마담, 고맙습니다.!"란 인사를 연거퍼 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마눌은 눈물을 글썽이며,
오빠 고맙습니다를 연거퍼 말하는 것이였습니다.
마눌은 신이 나서 벳남에 전화했고,
글구 몇 일후,
퇴근하고 보니, 마눌은 낮에 처가집에 전화했는데,
장모님께서 아침 6시부터 출발하여
호치민시까지 장장 7시간 동안 차를 타고
호치민에 도착한 이후에 돈 300달러를 받고서는
저녁 10시가 되어서 처가집에 도착하고서는
몸살이 나서 힘들어 죽겠다라고 3일을 앓아 누웠답니다.
저는 속으로 내 뜻대로 송금과정에 동참을 했구나라고
쾌제를 불렀습니다.
몇 달후 구정 전에 이번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또 300달러를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장인께서 새벽부터 밤늦도록
돈을 받으면서 고생하셨고,
그 뒤에는 첨으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설날때 옷사입겠다란 말을 들었습니다.
역시 몸살로 하룻동안 누워있었답니다.
그 뒤론 별 송금 얘기가 없었습니다.
전부 송금 얘기가 나온 것이,
마눌 입국이후 2년 6개월동안 5번정도 얘기했었나?
어찌되었든 송금군기는 확실하게 잡았던 셈입니다.
제가 송금 압박을 받지 않았던 요인으로
이때 월남전 한국군이 현지인을 대민지원 사업에 동참시켰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이를 제 나름대로 응용해서
실행한 효과는 한 30%정도 될 겁니다.
역시 주된 50%정도는 필터링에 운좋게 성공해서
빚없고 욕심없는 처가집을 선택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겠쬬.
월남파병때의 대민지원사례를 결혼생활에 응용했다고 말하기엔 미흡하고,
또 채명신 장군께서 실시하셨던
민사심리전의 일환으로 실시된 대민지원 사업사례의 원리를 응용하면
송금압박과 가출예방에 절대 효과적이라고 완벽하게 검증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효과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란 가능성을 내비쳤다는 점만은
누구라도 공감할 수 사항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의 두달이란 시간을 투자해서,
사실여부를 확인하고자 이리저리 노력을 했는데,
대민지원 사업에 당시 월남인들을 동참시켰다는 사실은
확인되었지만,
그 목적은 아직까지 확인되질 않았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제가 헛것을 보거나 착오를 해서 송금문제의 해결에
첫단추를 끼웠다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일단은, 증명되었다는 사실이죠.
최악의 경우 그 당시에 제가 읽었던 내용이 저작의 과장에 의해 쓰여졌더라도
그 과장은 근거가 있는 과장이였을 것입니다.
"「빈 투안」에는 농민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진료소를 개설하였고
한국군 병사들은 각자가 매일 받는 배급미의 일부를 기증하여 각 부락에서
배급되는 저장미에 보태고 있다.
또한 품삯을 받고 도로 공사를 거들고 있는 남녀 촌민들도 적지 않다."
파월전사에 공식적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구절이라고 합니다.
벳남 속담에 이런 말이 있죠!!
돈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게 아니다.
나무에서 저절로 열리는게 아니다.
말로 백마디 해보았자 헛수고인 것 같습니다.
한국신랑들을 봉으로 보는 습관부터 시정시켜야 될 것 같습니다.
송금요구는 신부측의 욕심이 아니라,
처가집의 욕심입니다.
앞으로 결혼하실 생각이 계시는 분이나,
결혼하시고 송금을 아직 안 하신분이나,
혹은 송금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계시는 분들은
이 원리를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느 노병의 태도를 보건데,
과거 파월한국군에 대한 명예회손 사례가 두어건 있었죠.
하는 양민학살설과 용병설,
그 노장교께서는 아마 제가
파월 한국군에 의한 벳남사람 착취설을 쓰려고
착각하셨던 모양입니다.
아직까지는 확인이 안된 내용이지만,
그 당시 한국군이 품삯을 주면서 벳남사람들을
대민지원 사업에 동참시킨 목적은
내전으로 찌든 현실에서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생계의 보탬을 주고,
또한 자조의 목적으로 근로의욕을 고취시켜주고자 하는 취지였지,
과거 일본제국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군이 벳남 사람을 착취시킬 목적이 아니였음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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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자조1 (自助) ?
①자기의 발전을 위하여 스스로 애씀. ¶자조 정신/두레는 농민들이 중심이 된 농촌 자조 조직이다.
②?법률?국가가 자력으로 국제법에서의 권리를 확보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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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일본제국주의, 즉 왜놈들은
조선을 근대화시켜준다는 명목으로
경부선을 깔아주고, 여러 항만을 구축했지만,
실은 자기네들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민족을 수탈시킬 목적이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경부선의 경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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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1901년 8월 20일에 서울 영등포에서, 같은 해 9월 21일에 부산 초량에서
일본 자본의 회사인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기공되어 4년 후인 1904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
1905년 1월 1일을 기하여 전선(全線)의 영업이 개시되었다.
그 해 5월 25일에 서울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 광장에서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 경인선(1899년 9월 18일 개통)에 이은 두 번째의 철도 개통이었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 체제 구축이 철도 부설 및 채광권 획득에서 비롯되었던
많은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은 경부선의 부설은 일제의 우리 나라 침략 정책 수행의 구체적 발판이었다.
1894년 ‘한일잠정합동조관(韓日暫定合同條款)’으로
경부간 철도 건설에 관한 문제가 조약 문서상에 나타나고,
1898년 ‘경부철도합동조약(京釜鐵道合同條約)’으로
경부철도의 부설권이 일본인 회사에 강압적으로 특허되기까지
일제는 민간인을 앞세워 암암리에 그 기초 공작을 진행하였다.
즉 일본인 마쓰다(松田行藏) 등은 1885년(고종 22)에 내한하여
4년에 걸쳐 전 국토를 돌아다니며 지세·교통·민정 및 경제 상황을 은밀히 조사하였다.
이어 내한한 일본인 철도기사 고노(河野天端) 등도
당시 부산 주재 일본 총영사 무로다(室田義文)의 비호 아래 사냥꾼으로
가장하고 서울∼부산 간 철도 부설 예상 지역을 면밀히 답사한 뒤
측량 도면과 함께 보고서를 작성하여 1892년에 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공사의 진행은 우리 나라 관민의 저항과 반대, 용지 매수 분쟁, 결빙과 홍수 및 화폐의 차이
등으로 많은 난관에 부닥쳐, 1902년 말까지 북부에서는 51.5㎞, 남부에서는 53.1㎞만 완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노일전쟁이 임박하자 일제는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공사를 서둘러 강행하였고,
졸속한 공사를 면할 수 없었다.
경부선이 개통되자 같은 해 9월 11일에는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를 연결하는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을 매체로
경부철도와 일본철도를 연결하는 연대 운수가 개시되었다.
또한 같은 해 11월 10일에는 경부철도와
군용철도인 경의선(서울 용산∼신의주간)의 연락 운행이 시작되었고,
11월 11일에는 군용철도 마산포선이 개통되어 영업을 개시함으로써
군용 철도 시대의 막을 열게 되었다.
그 근본 목적은 일제의 우리 나라 침략 수탈 정책을 뒷받침하고,
이어 1905년 4월 28일 개통된 경의선과 함께 대륙 진출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어서
결국 경부선의 개통은 그 길을 닦은 셈이 되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된 뒤에는 수송량이 급격히 늘어났고,
이에 따라 일제는 그 동안의 시설 보수에서 한 걸음 나아가
1936년에 경부선 복선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전∼영등포 간의 복선 공사는
1939년에, 부산진∼삼랑진 간은 1940년에 완공되었고,
삼랑진∼대전 간 복선은 1940년 공사에 착수하여 더욱 치열해진 전쟁 중인 1944년 10월에 준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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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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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1906년 통감부는 탁상 위에 펼쳐 놓은 지도에 직선을 그어 나갔다.
연장 741㎞ 직선대로가 대한제국의 예산, 사로잡힌 의병과 끌려 나온 농민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졌다.
곡창과 광물 산지와 일본행 수송선이 들고 나는 개항장을 잇는 수탈의 통로였던
이 길은 애초부터 이 땅 사람들의 편익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한반도의 영구 지배를 노렸다.
이제 신작로는 행정과 군사 요충을 중심으로 거미줄마냥 촘촘히 깔려 나갔다.
장터와 포구, 관아와 마을을 휘감으며 물자만이 아닌 사람들 사이의 정을 이어주던 옛길은 허리가 뭉텅 잘려나갔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옛 관례를 핑계 삼아 대가 없이 도로용지와 노동력을 빼앗고 부린 건설 방법은
통감부 때와 매한가지였다.
“치마끈 졸라매고 논 사놓으니 신작로 복판에 다 들어가네.”
“밭은 헐려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려서 정차장 되네.”
목숨보다 귀한 땅과 집을 앗긴 농민의 애통한 마음이 절절한 민요가락이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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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수탈은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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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식량생산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조선의 일반 서민들이 그 혜택을 본 것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쌀은 일본의 노동자들에게 보다 값싼 쌀을 공급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실려갔고,
조선의 서민들은 다시 만주로부터 수입된 콩, 조, 수수 등의 웰빙 잡곡으로 연명했었다.
근대적인 의학과 보건의 개념이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총독부 자신이 그것을 조선의 기층민중에게까지 보급하려는 어떠한 의지도 의욕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죽하면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병사들이 왔다가 경악했다고 하던가?
화장실 바로 옆에서 빨래를 하고 빨래하는 옆에서 쌀을 씻어 밥을 먹더라고.
그만큼 보건과 위생에 대해 무지하던 것이 조선인들이었다.
그나마 전염병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신이 위험하니 적극적으로 대처해 피해가 없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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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대한제국의 예산으로 대한제국 사람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해서,
자기네들은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자기들의 수탈통로인 신작로를 딱았지만,
파월한국군은 각자가 매일 받는 배급미의 일부를 기증하여 각 부락에서
배급되는 저장미에 보태고 있다.
또한 품삯을 받고 도로 공사를 거들고 있는 남녀 촌민들도 적지 않다.
즉 공사의 주된 노동력은 한국군 파월장병들이었고,
월남사람들은 거드는 수준,
즉 대미지원사업에 참여시키는 수준이었고,
그들의 품값도 주월한국군이
절약한 저장미로 주는 형태였습니다.
다시 한번 자기의 배고품을 참고,
월남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고생하셨던
파월장병님들의 노고에 감사함을 표시합니다.
그럼 파월한국군은 벳남에서 착취한 것이 없을까요?
있을 수도 있겠지요. 분명히 존재히 존재(?)합니다.
제가 어렸었을때 파월장병이셨던 먼 친척 아저씨께서 월남고추를 가지고 오셔서
사람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었습니다.
글구 그 월남고추는 매운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기였습니다.
저는 작년에 벳남에 가서 30년이 넘은 뒤에야 월남고추 맛을 보았죠.
오기를 부려서 반쯤은 먹었는데,
처가집 식구들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몹시 놀라더군요.
또한 친척 아저씨께서 직접 잡으렸다고 그러시는데,
어릴 때는 믿었는데, 지금은 영 뻥같으니,, 쩝쩝,,,
어릴적에 부산의 금강원 동물원에 비단구렁이 한마리가 있었습니다.
월남에서 파월장병들이 사로잡아서 기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릴적에 가보면 늘 잠만 자는 모습만 보입니다.
어른들께 여쭈어 봤더니
1년에 한번 먹이를 먹고는 늘 잠만 잔다는 것이였습니다.
하기사, 좁은 동물원 유리관 속에 있으니,
활동량이 없을 터이니, 당연히 식사량도 적을 수 밖에요.
자 이상이 제가 알고 있는
월남에서 한국군이 착취한 내용(?)의 전부입니다.
파월한국군의 명예를 더럽히고자 하는 자들에겐
이것도 이 내용도 침소봉대(針小棒大)할 수 있겠네요.
아마 그들은 위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할 것 같네요.
한국군이 자기가 먹을 식량을 아껴서
자기들은 배고품을 참고,
도로건설을 하면서,
베트남사람들에게 도로건설을 거들게 하고는
그 도로를 통하여,
귀국할 때 월남고추를 얻어가서 (혹은 시장에서 사가서)
벳남사람들의 부식활동을 방해함으로써,
쌀은 있는데, 반찬을 못먹게 하여
결국은 식사를 못하게 만들어서 수 많은 사람을 굶어죽게 하였고,
동남아시아나 인도 등지에
비단구렁이에 의한 어린이 식인사고가 가끔 발생하던 때에,
비단구렁이를 사로 잡아서,
사이공 벳남동물원에 안보내고,
한국으로 가지고 가서는,
결국은 뱀을 보고싶어하는
월남사람들은 뱀을 보기 위하여
사이공 시내를 한시간이나 걷거나,
혹은 차를 타고가서야 뱀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여가, 문화생활 파괴일 뿐만 아니라,
식인 비단구렁이가 어린 아이를 못잡아 먹게 하여서,
월남 인구가 증가하는 불행을 가져왔다.
거듭 얘기하거니와 위 내용은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군의 월남인 착취설을 주장할 지도 모르는 사람이
주장할 내용을 예상해서 쓴 것입니다.
ㅋㅋㅋㅋㅋㅋ
어디 좀 이상하질 않습니까?
이것을 파월 한국군의 착취나 수탈로 행위로
생각할 지는 휜 여러분 각자의 지능지수에 맡기겠습니다.
진짜 마지막으로 채명신 장군께서 하달하신
민사심리전과 대민지원 원칙을 적음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담 부터는 민사심리전과 대민지원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우리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을 뽑아서 올릴까 합니다.
긴 글 지겹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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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첫째, 대민지원은 월남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과 복지 증진에 이바지하도록 지원한다.
둘째, 대민지원은 월남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실시한다.
셋째, 대민지원을 통하여 월남인의 자립, 자조정신과 국가 건설에의 참여의식을 고취시킨다.
이상의 실천사항에 따라 월남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요망하는
농사지원, 건설지원, 의료지원, 구호활동, 친선행사, 태권도 지도 등에 힘을 기울여
성실한 자세로 지원활동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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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한국군의 민사심리전은 남베트남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그들의 생활관습과 문화를 존중하면서 대민지원을 통해 주민 속에 파고들어 가는 것이었다.
대민지원의 기본방향은 주민들의 현실적인 요구를 해결해 줌과 동시에
주민들의 지속적인 생활방편이 돌 수 있는 자조사업에 치중했다.
그리고 부대기지 주변 촌락으로부터 점차 원거리의 주민 밀집지역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 결과 한국군의 민사심리전은 군사작전을 지원하는 보조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군사작전의 여건을 조성하고, 효과를 확대함은 물론 군사작전을 통해 달성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담당하는
핵심적인 분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울러 남베트남 주민들에게 한국군에 대한 신뢰심을 고양시킴은 물론
남베트남 정부의 지지도를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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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자조사업)
농사에만 의존하는 지역 주민들에게 기술교육을 시켜 자립능력을 갖게 하고,
농업 이외의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기술교육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건설지원단, 수도산단, 해병여단, 100군수사령부 등은 직업훈련소 건물을 신축하고,
원생을 모집하여 기술교육을 실시했다.
교유기간은 가사반 4개월, 기곅술반 7개월, 양재반 6개월, 타자반 4개월 등이었다.
수료자들에게는 남베트남 정부와 협조해 직업을 알선해 주기도 했다.
자조사업 추진은 지역별, 부대별로 주민분포와 여건을 고려해 적합한 기술학원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베트남인 강사를 채용하고, 굥육비와 운영자금의 일체를 대민자원 예산으로 조치했다.
또한 각 과정의 입교시과 졸업식 행상에는 부대 지휘관 및 관계자가 참가해 한·베트남간 유대강화와 함께
주민들의 자립정신을 주입시키면서, 친선유대를 도모하도록 했다.
첫댓글 수고 하셨읍니다 ...자료 수집 하시느라고 ..님의 쪽지를 받고서 질문에 답변을 하고자 여러모로 알아 볼려구 했지만 도움이 안되서 미안 합니다 ...
좋은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