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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대중가수” 시리즈는 현재 제 블로그인 “JOHN CENA의 WWE 프로레슬링”에서 연재를 진행하고 있으며
각 커뮤니티와 메타 블로그 연재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 전영록 ----> (레전드)
1980년대 가요계를 이끌었던 최고의 톱스타 4인방은 조용필, 이용, 김수철, 전영록이었습니다. 1980년대는 사실상 조용필의 적수가 없는 1인 독주시대였고, 조용필은 80년대뿐만 아니라 한국 대중가요 100년 역사에서도 불세출의 가요계 황제로 통하고 있습니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조용필의 독주체제 속에서 라이벌의 존재 자체가 무색하게 느껴졌던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러한 조용필의 대항마로 떠오르며 1980년대 가요계의 한 축을 형성했던 대표적인 라이벌이 바로 이용과 김수철, 그리고 전영록이었습니다.
전영록의 집안은 우리나라 연예계에서도 대표적인 연예인 가문으로 유명합니다. 전영록의 아버지는 원로배우 황해 선생, 어머니는 원로가수 백설희 선생입니다. 그리고 전영록은 여배우 이미영 씨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나중에 재혼을 했는데, 전 부인인 이미영 씨의 동생이 바로 우리에게는 “맹구”로 잘 알려진 이창훈 씨입니다. 즉, 당시 “맹구” 이창훈 씨가 전영록의 처남이었던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영록과 전 부인인 이미영 씨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중에 전보람 양이 2009년에 가요계에 데뷔한 뒤, 여자 아이돌 그룹인 “티아라”의 멤버로 합류했습니다.
오늘날 전영록은 “7080세대”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추억세대들에게는 “원조 아이돌”, “만능 엔터테이너”, “영원한 오빠”, “돌아이”로 기억되고 있으며, 신세대들에게는 “티아라 전보람의 아버지”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전영록은 50세가 한참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소년과도 같이 해맑은 동안 외모의 소유자로서 동년배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기도 합니다. 비록 어려 보이는 외모의 소유자이기는 하지만, 전영록의 연예계 데뷔 시기는 1970년대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그리고 1980년대 가요계의 4대 톱스타인 조용필, 이용, 김수철, 전영록 중에서도 전영록은 조용필 다음으로 나이와 가요계 데뷔 시기가 빠른 선배이기도 합니다.
1954년생인 전영록은 1971년에 CBS 라디오의 “영 페스티벌”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18세의 나이로 연예계에 데뷔했습니다. 1972년에는 “KBS 전국 노래자랑”에서 “듀오”라는 그룹으로 출연해서 장려상을 받으며 가요계에 데뷔했습니다. 전영록은 1973년에 솔로가수로 데뷔하며 그의 데뷔곡인 “애심”을 발표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전영록은 드라마에서는 “제3교실”, 영화에서는 “내 마음의 풍차”에 출연하며 연기자로 데뷔했습니다. 전영록은 1970~80년대에 걸쳐서 가수 이외에도 탤런트, 영화배우, 작곡가, MC, DJ 등의 다방면에 걸쳐서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했습니다.
1976년에 발표된 영화 “푸른 교실”은 전영록의 데뷔 초창기의 대표적인 출세작으로 떠올랐습니다. “푸른 교실”에는 전영록, 임예진, 이덕화 등이 출연했는데, 당시 풋풋한 모습의 전영록과 임예진은 이 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당대의 대표적인 하이틴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가수 겸 배우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던 전영록은 1976년에 군에 입대한 후 약 3년의 공백기를 가지고 1979년에 컴백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군대 한번 다녀오고 나면 “사실상 가수로서의 생명은 끝났다”고 할 만한 시기에, “만능 엔터테이너” 전영록의 본격적인 전성기는 이제부터 막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영록이 제대하고 컴백할 무렵인 1979~1980년은 “가왕” 조용필이 본격적으로 국내 가요계를 평정하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조용필의 나이는 30대에 갓 접어들 무렵이었고, 전영록은 20대 중반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아이돌 가수들에게는 거의 “환갑”처럼 느껴질 만한 나이에 조용필과 전영록은 본격적인 전성기의 막을 열면서 전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가요계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조용필에게는 그에 필적할 만한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의 라이벌을 손으로 꼽아본다면, 1970년대 중후반~ 198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 남자가수 중에서는 이용, 전영록, 김수철, 김범룡, 구창모, 최백호, 최성수, 윤수일, 함중아, 송창식 등이 자천타천으로 라이벌로 거론이 되었고, 여자가수 중에서는 혜은이, 이은하, 윤시내, 정수라, 이선희, 인순이 등이 자천타천으로 라이벌로 거론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했던 가장 강력했던 라이벌은 이용과 김수철, 그리고 전영록이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제가 “대중가요, 대중가수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1980년대의 국내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4대 톱스타의 이름을 나열할 때, 일단은 “조용필-이용-김수철-전영록”의 순서로 나열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순서로 나열한 것이 반드시 전영록이 “80년대 서열 4위”를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이러한 순서로 이름을 나열한 이유를 설명해본다면, 조용필이 MBC와 KBS의 연말 가요 시상식의 대상을 휩쓸던 시절에 조용필의 아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조용필을 제치고 대상까지 수상했던 가장 위협적인 라이벌을 꼽을 때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1982년의 이용”, “1984년의 김수철”, “1986년의 전영록”의 순서였기 때문입니다.
조용필은 이미 1970년대 중~후반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국민가요를 탄생시킨 데 이어서, 1980~81년에 걸쳐서 “창밖의 여자”, “고추잠자리” 등이 연달아서 빅히트를 치면서 최고의 국민가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1982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용은 “잊혀진 계절”이라는 초대박 히트곡을 남기며 조용필의 아성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졌고, 당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조용필을 제치고 “최고 인기가수”(가수왕)를 수상했습니다. 1984년에는 김수철이 “못다핀 꽃 한 송이”, “젊은 그대”의 빅히트에 힘입어서 “KBS 가요대상”에서 조용필을 제치고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따라서 조용필의 전성기가 최고의 절정을 이루던 시절에 그의 아성을 위협했던 가장 강력한 도전자로서의 측면에 포커스를 맞췄을 때는 그 순서가 “1982년의 이용 -> 1984년의 김수철”의 순서로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노래 자체의 히트에 포커스를 맞췄을 경우에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고추잠자리”와 같은 초대박 히트곡 퍼레이드에 필적할 만한 대형 히트곡으로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 김수철의 “못다핀 꽃 한 송이”, “젊은 그대”가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영록은 조용필의 전성기가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인 1986년에 “KBS 가요대상”에서 조용필을 제치고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조용필의 최전성기였던 1980~86년에 걸쳐서 조용필이 대상을 독식하던 시절에 조용필에게 정면으로 도전해서 가요대상 수상자의 반열에 이름이 오른 인물은 이용, 김수철, 전영록, 이렇게 3명뿐이었습니다. 역대 가요대상 수상자의 이름이 실린 리스트를 검색할 때도 조용필과 함께 “이용(1982년)-김수철(1984년)-전영록(1986년)”의 순서로 검색이 되기 때문에, 일단 필자인 저는 80년대 4대 톱스타의 이름을 “조용필-이용-김수철-전영록”의 순서로 나열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의 필자인 저 역시 1980년대 초반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고, 세월이 한참 흐른 2000년대 이후에 인터넷 검색과 TV, 신문기사 등을 통해서 과거의 기록을 복원해나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당시의 사실이나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있어서는 많은 고충이 따르고 있으며,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에 가깝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그 시절에 청소년, 청년기를 거치며 대중가요 팬문화를 향유했던 “7080세대” 선배님들의 증언을 적극 수집하고, 이를 최대한 생생하게 전달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7080세대” 선배님들의 증언을 토대로 해서 그 시절의 분위기를 전달한다면, 조용필의 독주체제가 견고하게 자리를 잡았던 1980년대 초반에 대중들의 이미지에 각인된 대표적인 “청춘스타” 빅3는 조용필과 이용, 전영록이었습니다. 대체적으로는 조용필의 독주 속에서 이용과 전영록의 2인자 다툼이 불을 뿜는 양상이었고, 실제로 그 당시 대중들의 기억 속에는 전영록은 “조용필 시대의 2인자 내지는 3인자”로 각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라이벌 구도 자체에 포커스를 맞췄을 경우에는 그래도 “조용필 vs 이용”의 라이벌 구도가 가장 대표적으로 거론이 되고 있습니다. 이용에게는 “잊혀진 계절”이라는 초대박 히트곡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 노래의 단발성 히트만으로도 “조용필의 가장 위협적인 라이벌”로서 그대로 각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조용필의 또 한 명의 위협적인 도전자였던 김수철에게도 “못다핀 꽃 한 송이”, “젊은 그대”라는 초대박 히트곡이 존재했고, 따라서 오늘날 “역대 가요대상 수상자 리스트”만을 검색할 경우에는 조용필의 이름에 이어서 이용, 김수철의 이름이 좀더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영록은 “단일 히트곡 또는 단일 시즌”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조용필의 아성을 뛰어넘기에는 다소 역부족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걸쳐서 조용필과 함께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꾸준하게 정상의 자리를 지킨 가수는 전영록이 거의 유일했습니다. 이용과 김수철이 모두 전성기가 그렇게 길지는 못했던 반면에 전영록은 1980년대 내내 조용필과 함께 거의 해마다 꾸준히 “10대가수”의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실제로 가수로서의 활동년수, 히트곡의 수, 연말 시상식의 수상실적 같은 측면에 포커스를 맞췄을 경우에는 1980년대의 대표적인 슈퍼스타였던 조용필의 거의 유일한 대항마로서, 그에 필적하는 활동실적을 올린 전영록이 “실질적인 2인자”로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당대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본상격인 “10대가수상”의 수상실적을 살펴보면 전영록의 진가가 더욱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전영록은 1979년~1989년에 걸쳐서 통산 10차례나 “10대가수상”을 수상하면서 이 부문의 최다 수상자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종전 기록은 이미자가 1960~70년대에 걸쳐서 “10년 연속 10대가수” 수상자로 기록되고 있었는데, 전영록이 이미자의 기록과 타이기록을 이뤘습니다. 이 부문에서 조용필은 “10대가수상”을 통산 8회 수상하면서 이 부문 역대 3위를 기록중이고, 남진은 “10대가수상”을 통산 6회 수상하면서 이부문 역대 4위를 기록중입니다.
게다가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대상격인 “최고 인기가수”(가수왕)의 역대 수상자 리스트에서는 조용필이 통산 6회로 이 부문 최다 수상자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이미자와 남진이 통산 3회 수상으로 이 부문 공동 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영록은 비록 MBC에서 대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본상격인 “10대가수상”의 수상 실적에서는 이미자, 남진, 조용필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역대 최다 수상자”로서 이름을 올렸다는 점에서 그의 기록이 더욱 돋보이고 있습니다.
전영록은 또한 “KBS 가요대상”에서도 거의 해마다 꾸준히 본상을 수상했고, 1986년과 87년에는 2년 연속으로 KBS에서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한편 1987년에는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개최가 무산되었고, “가요대제전”이 개최되었는데, 이는 1993~1997년까지의 “가요대제전”과도 비슷했습니다. 전영록은 공식적으로는 MBC에서 “가수왕”을 수상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과거 신문기사나 전영록의 프로필을 검색해 보면 “1987년 MBC, KBS 통합 가수왕”으로 표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를 “비공식 기록”으로 간주할 경우 전영록은 “1980년대의 MBC, KBS 시상식 본상 최다 수상자”인 동시에 “1987년의 MBC, KBS 통합 가수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연설명: “역대 10대가수 본상 수상 횟수 기록”에는 다소의 오차 가능성이 있습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통해서 1975년 기사를 검색할 때는 이미자가 “10년 연속 10대가수 수상”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연도별 10대가수를 검색할 때는1972년에는 이미자가 10대가수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검색되기도 합니다. 어떤 기사에서는 이미자가 “1964~1970년까지 MBC 10대가수의 단골 수상자였다”라고 기재되어 있기도 합니다.
한편 TV나 신문, 인터넷 등을 통해서 검색되는 전영록의 프로필에서는 “1979~1991년까지 MBC 10대가수 최다 수상자”라고 표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도별 수상자를 검색했을 때는 전영록이 1979년~1989년까지의 기간 중에서 시상식 개최가 무산된 1987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10대가수 본상을 수상하며 통산 10회를 수상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다소의 오차 가능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MBC 10대가수(본상) 통산 최다 수상자”는 전영록이 단독으로, 또는 전영록과 이미자가 공동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통계상으로 나타난 기록만을 살펴볼 경우에는 198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가요계의 톱스타 중에서 “가왕” 조용필이 압도적인 독주체제를 이뤘고, 조용필과 함께 거의 해마다 꾸준히 “10대가수”의 반열에 오르며 조용필에 필적하는 활동실적을 올린 전영록이 그 시절의 실질적인 2인자였음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전영록은 가수로서뿐만이 아니라, TV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배우로서 종횡무진 활약했고, CF를 통해서도 스타덤에 오르며 당시 조용필의 거의 유일한 대항마로서 그 시절의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대표적인 청춘스타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전반적인 가요계 패권의 추이를 살펴볼 때도 조용필이 1979년의 컴백에 이어서 1980~81년 사이에 가요계를 완벽하게 석권할 무렵, 조용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가요계에 컴백하고 10대가수의 반열에 올랐던 대표적인 라이벌 가수가 전영록이었습니다. 1982년에는 이용이 워낙에 초대박의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에 그 당시의 엄청났던 임팩트로 인해서 오늘날까지도 1980년대의 대표적인 라이벌 구도는 “조용필 vs 이용”의 라이벌 구도가 대표적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용이 한바탕 돌풍을 일으키고 난 뒤, 1983년부터는 다시 조용필이 견고한 독주체제를 이어가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이용과 전영록의 2인자 다툼이 불을 뿜었습니다. 1984년에는 김수철이 한바탕 돌풍을 일으키면서 조용필의 강력한 대항마로 떠올랐습니다. 1985년에는 이용이 치명적인 스캔들에 휘말리며 오랫동안 가요계를 떠나야 했고, 1986년 이후부터는 김수철의 전성기도 다소 시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용과 김수철의 돌풍의 열기가 잠잠해질 무렵인 1980년대 중반까지도 조용필의 1인 독주체제의 아성은 견고했고, 조용필의 뒤를 이은 2인자의 자리를 놓고 전영록, 김범룡, 구창모 등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조용필이 1986년을 마지막으로 “방송 은퇴와 가요대상 사양”을 선언한 이후, 본격적으로 세대교체의 물결이 일었던 과도기 시절에도 전영록은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세대교체기였던 1986~88년에 걸쳐서는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에서 전영록, 이문세, 주현미 등이 각축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전영록은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까지 마지막으로 전성기를 누린 뒤, 1992년 이후부터 가요계를 한동안 떠나 있었습니다.
전영록은 가수로서 활동하는 동안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불티”,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내 사랑 울보”, “나그네길”, “종이학”, “저녁놀”, “하얀 밤에” 등의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배출했습니다. 또한 작곡가로서도 “나를 잊지 말아요”(김희애),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양수경), “돌이키지 마”(이은하), “얄미운 사람”(김지애), “바람아 멈추어다오”(이지연) 등의 히트곡들을 배출했습니다.
전영록은 영화배우와 라디오 DJ로서도 종횡무진 활약했는데, 특히 영화 “돌아이” 시리즈를 통해서 전영록은 발군의 무술실력을 뽐내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당시 전영록에게는 “한국의 성룡”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실제로 홍콩의 스타 배우인 성룡과의 만남이 성사되면서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친분을 맺기도 했습니다.
전영록은 가수로서도 1970년대에 데뷔해서 1980년대를 대표하는 톱스타 4인방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요계의 “레전드(전설)”의 반열에 올라 있는 인물입니다. 특히 전영록은 가수 이외에도 작곡가, 배우, DJ, CF 스타로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했습니다. 특히 “한국의 성룡”이라는 별명이 말해 주는 것처럼 영화 “돌아이”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모았고 전영록은 초특급 액션배우로서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2007년에 SBS에서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인 “옛날 TV”에서는 전영록이 액션 영화배우로서 최고의 주가를 올렸던 작품인 “돌아이”를 선후배들간에 합동으로 재연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날 방송에서 전영록의 과거의 화려하고 영광스럽던 시절에 대한 영상물이 나온 뒤, MC들이 전영록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던 중 “80년대 비”라는 발언이 나왔습니다. 이는 왕년의 인기 여배우 임예진씨에게 “70년대 문근영”이라는 별명이 붙었거나, 또는 김수미씨의 과거 젊은시절 사진이 김태희씨의 외모를 닮은 것으로 화제를 모은 사례와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음악 매니아층이나 과거 80년대에 사춘기를 보낸 선배 세대의 팬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불쾌하게 느껴지는 발언일 수도 있습니다. 비를 “2000년대 전영록”이라고 하거나 문근영을 “2000년대 임예진”이라고 부르지 않고, 거꾸로 전영록을 “80년대 비”라고 부르거나 임예진을 “70년대 문근영”이라고 부르는 것이 선후배간의 위계나 역사적 흐름에 관한 최소한의 상식이나 예의를 망각한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의 칼럼이 직접 기사화된 사례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예능 프로그램에서 과거의 전설적인 스타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방법이 좀 서투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1980년대에 전영록이 당시의 대중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오늘날의 신세대 팬들의 눈높이에서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최근에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과거에 영광을 누렸던 대선배 연예인들이 출연할 때 2000년대 이후에 전성기를 누린 신세대 스타들에 비유해서 그들을 설명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아이돌 가수들에게 열광하는 신세대 팬들의 눈높이에서 과거 선배들이 그 시절에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나름의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비록 1980년대 당시에는 “한류열풍”이라는 키워드 자체가 존재하기 이전이지만, 전영록은 한국 가요계에서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존재감을 부각시킨 일종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고, 실제로 중화권 최고의 액션배우인 성룡과의 교분을 맺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80년대의 전영록 이후로는 2000년대의 비(Rain)가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로 부각되면서 가수 겸 배우로서 높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전영록이 가수활동 이외에도 영화배우로서 발군의 활약을 보여준 것처럼, 비(Rain)는 초창기에 드라마를 통해서 배우로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가수로서의 인기도 동반 상승하는 효과를 얻었고, 미국 진출 이후로도 영화배우로서의 활동에 좀더 주력하고 있습니다.
“가수로서의 활동 실적”만을 놓고 봤을 때는 1970~80년대에 걸쳐서 롱런하며 꾸준한 실적을 올린 전영록에 비해서, 비의 가수 경력이 현저하게 짧은 편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가수 외적인 활동”, 즉 연기자로서 활동하며 해외진출로 “월드스타”의 반열에 오른 비(Rain)가 “만능 엔터테이너”로서는 한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는 평을 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옛날 TV”의 MC들이 전영록과 비(Rain)를 비교한 것이 어느 정도의 일리는 있다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물론 1980년대의 전영록이 활동하던 시대와 2000년대의 비(Rain)가 활동하는 시대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요계 전설”로서의 면모를 살펴봤을 때도, 대선배인 전영록과 까마득한 후배인 비(Rain)를 비교하는 발언 자체가 “7080세대” 선배님들이 불같이 화를 낼 수도 있는 다소 위험한 발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가수로서의 경력 자체도 그만큼 현격한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다만 가수 외적인 활동에서의 실적까지를 모두 고려했을 때, 1980년대 당시 전영록이 당대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였다는 것을 오늘날의 신세대 팬층이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는 역시 비(Rain)를 비교대상으로 했을 때 가장 피부에 와닿는 느낌이 빠를 것 같습니다. 이 글의 필자인 저 역시 “7080 추억세대의 스타 전영록”을 “오늘날의 신세대 팬들”에게 소개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옛날 TV”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MC들이 가볍게 던진 발언 내용을 굳이 인용을 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다소간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아무튼 전영록의 전성기 시절에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7080세대” 선배님들의 증언을 취합했을 때도 알 수 있듯이, 전영록은 조용필, 이용과 함께 “빅3”로 불리며,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대표적인 청춘스타로서 팬들의 기억 속에 자리매김하며 한시대를 풍미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팬덤문화를 형성했던 세대의 대중들은 오늘날까지도 “조용필 시대의 2인자”가 이용과 전영록 중에서 누구였는지에 대해서 갑론을박으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기도 합니다.
“단일 시즌, 단일 히트곡”을 기준으로 할 때는 “1982년 이용-잊혀진 계절”이 워낙에 초대박의 임팩트를 남겼기 때문에 지금도 라이벌 구도 자체에 포커스가 맞춰졌을 때는 “조용필 vs 이용”의 라이벌 구도가 1980년대를 상징하는 라이벌 구도로 각인되며 이슈를 선점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가수로서의 경력 전체를 포괄하는 활동실적과 통계자료에 의하면 전영록은 조용필 다음으로 화려한 경력을 쌓은 그 시절의 실질적인 2인자였습니다. 다만 전영록은 “조용필 시대”의 초창기부터 막바지까지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2인자의 지위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할 만한 초대박 히트곡의 부재가 다소 아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전영록의 대표곡으로 알려져 있는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는 1980년대 가요계를 풍미한 국민가요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대중들은 전영록의 가수로서의 히트곡인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내사랑 울보”, “불티”, “종이학”, “저녁놀”, “애심” 등의 노래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전영록의 영화배우로서의 출세작인 “돌아이”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편 전영록의 딸인 전보람 양은 2009년에 가수로 데뷔한 뒤, 여자 아이돌 그룹인 “티아라”의 멤버로 합류했습니다. 전영록의 딸인 전보람 양이 대를 이어서 가수활동에 나서면서 전영록의 이름은 오늘날 아이돌 가수들에게 열광하는 신세대 팬들 사이에서도 다시금 그 존재감이 부각되었습니다. 또한 “황해, 백설희 - 전영록 - 전보람”으로 3대째 대를 이어서 가수활동을 이어가는 대표적인 “연예인 가문”으로서 또한번 화제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2010년에는 원로가수이자 전영록의 모친인 백설희 선생이 타계했습니다. 전영록은 모친상의 슬픔을 뒤로하고, 이후 음악활동과 후배양성 등의 활동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2011년 새해 들어서는 전영록의 딸인 전보람 양이 여자 아이돌 그룹 “티아라”의 리더 직책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티아라의 복고풍 분위기의 뮤직비디오에는 왕년의 하이틴 스타였던 전영록과 임예진이 직접 출연하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전영록의 전폭적인 지원사격과 함께 전보람 양이 소속된 여자 아이돌 그룹 “티아라”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편 전영록은 2011년에 KBS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예능 프로그램인 “낭만을 부탁해”에 출연하면서 왕성한 방송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전영록은 최수종, 김정민, 허경환, 정주리, 가애란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시청자들에게 추억과 웃음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전영록은 여전히 소년같은 해맑은 미소와 감미로운 목소리를 통해서 “7080 추억세대”와 “신세대”들 모두에게 친숙하게 다가서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출처: 과거 신문기사와 TV 방송 등을 기본 토대로 해서, 인터넷 검색(네이버, 다음, 가수 홈페이지)을 통해서 얻은 정보들을 참고했습니다. 특히, 옛날 가요 부분은 네이버 지식인,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백과 등의 자료에 더욱 많은 부분을 의존했습니다.}
** 원문 출처 => http://johncena07.blog.me/70114180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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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ㅋㅋㅋㅋ 약 7000년 이후의 가수네요 ㅋㅋ 수정해주세요 ㅋ
그렇군요
ㅋㅋ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