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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왕자의 난(1398년)
간과한 것, 일단 방석을 세자로 정한 건 태조가 직접 나서서 결정한 일이니
불평하거나 반발하는 순간 불충으로 찍힐 수 있어서 일단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안의 분노와 실망은 절대로 지울 수 없었다.
① 세자의 친모가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
세자에게 가장 확실하고 빠른 정통성 부여 수단이 왕과 왕비의 자식이란 점인데 공인된
조선의 초대 왕비 신덕왕후의 영향력 면에서 보면 방석의 세자 책봉은 이상할 게 없었다.
동복형 방번에겐 아주 치명적인 결격사유(공양왕의 조카사위)가 있었기 때문.
문제는 신덕왕후가 한양 천도 이후 너무 일찍 사망해 버린 것.
다른 그 어떤 이유보다 신덕왕후의 죽음이 무인정사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복형이 몇 명 있던 종법상 왕자들의 어미인 신덕왕후가 멀쩡했으면 첩이나
서자 운운하는 말이 나올 수 없었고 쿠데타 자체가 발생할 수 없었다.
신덕왕후가 사라지고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태조의 노력도 한계가 자명했기에
방석의 입지는 급격하게 위태해졌다. 이건 방석의 불행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데
신덕왕후는 사망 당시 고작 40세였다.
이성계의 맏아들 이방우보다 어리고 이방과보다 겨우 1살 많던 그녀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날 줄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근데 이방우도 금방 죽었다
하지만 이후 조선 왕실이 공식적으로 그녀를 후궁으로 격하시켜버린 것을 보면 이것도 아주
완벽한 해답은 아니었다. 이미 조선 왕실은 이성계를 적장자로 만들기 위해 실제 적장자인
이원계를 손쉽게 서장자로 둔갑시켰고, 이성계의 백부 이자흥이 계모 한양조씨와 계외가와
싸워서 천호직을 쟁취한 바가 버젓이 정사에 기록이 되었음에도 단순히 신덕왕후가 살아있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더구나 1차 왕자의 난은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이성계가 버젓이 살아있을 때
일어났던 일인데, 신덕왕후가 살아있었다고 해도 일어났을 일이다.
즉, 다시 말해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계기가 신덕왕후의 죽음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이방석 측이 극한의 인내심으로 큰 왕자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이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으면 모를까, 선공이라도 건다면 신덕왕후는 그대로
권력에 미쳐 자식까지 죽이는 패륜녀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② 형제 중에서 하필 막내가 세자가 되었다.
이복형 다섯 명에다가 동복형마저 제치고 막내가 떡하니 세자 자리를 차지한 것 자체도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왕위 계승 서열은 폐세자같은 대형 사건이라도 터져서 배제되지 않는 한 적장자 계승이 원칙이다.
그런데 대외적으로 공표할 만한 어떤 이유나 명분도 없이 정통성이 제일 떨어지는 막내가 차기 후계자가
된 것 자체가 더 많은 정통성을 갖고도 왕이 되지 못한 형들에게는 사형선고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다.
태조와 신덕왕후가 다 죽으면 당장 가장 위협이 되는 동복형인 이방번부터 사사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특히 이복형 중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린 이방과와 이방원의 경우에는
태조 사후 곧바로 이방석 일파에게 살해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이방과는 이성계 휘하에서 불패의 최정예 사병인 동북면 가별초 부대를 오랫동안
통솔해왔고 이방원은 과거에 급제한 학맥과 세족과의 혼맥을 바탕으로 중앙정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막대했으니 그 존재들만으로도 공도 없고 정치력도 없는 막내의 왕위엔 차고
넘치도록 위협이 되고도 남는다.
애초에 그래서 세자책봉 논의때 그 둘이 거론되었던 것인데... 게다가 이방간도 나중에
2차 왕자의 난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능력과는 별개로 야심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방석 세자 책봉은 7명의 형들 중에 그당시 생존해있던 5명 중에서
최소한 4명(방과, 방간, 방원, 방번)은 죽여버리겠다고 선전포고한거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이방우는 실의에 빠져서 술병으로 죽었고, 이방연은 조선 건국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며 애초에 이방의는
야심이 없었다. 게다가 이후 양녕대군이나 조의제문, 이인좌의 난 등의 사례를 보면 이방석이 천만다행으로
제대로 승계한다 한들 이 말자승계는 후대에 가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폭탄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따위로 승계율을 개판내놓고 나면 당장 이방석의 후계선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③ 게다가 그 세자가 왕으로서 자질이 없었다.
2번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방번, 방석은 1381년, 1382년생이라 조선이 세워질 때 겨우 10살쯤밖에 안 되었다.
반면 이복형들은 달랐다. 관직에 오래 머무른 방우,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 방과, 그리고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아버지의 가장 큰 정적인 정몽주까지 살해하며 조선을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방원 등은 개국 공헌에 힘쓴 형들이었다.
방의와 방간도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아버지를 도우며, 적어도 방번, 방석 형제와는 격을 달리하는
업적을 가지고 있었다. 업적을 생각한다면 방원을 세자로 안 세우는 게 이상할 정도였고, 비록 정몽주를
독단적으로 암살한 일로 이방원이 태조에게 찍혔다고 쳐도 실질적인 적장자이자 경험도 풍부한 방과가 있었다.
하지만 태조는 이를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삼은 데다가 그 명분을 제공하지도 못했다.
방석이 형들 다 제치고 황제가 된 강희제처럼 다섯 살 때부터 책을 읽으면 바로 암송하는
무서운 재질을 보여주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딱히 그런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고생한 자식들을 홀대하고 새엄마의 자식만 편애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아무리 태조가 무섭더라도, 섭섭함과 실망감은 감추기 어려웠다.
방석의 어린 나이가 그나마 강점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라면 그나마 어린 나이부터
유교적 제왕학을 학습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태조는 본인이 무장 출신이라 제대로 된 제왕학 교육을 받지 못했고, 안 그래도 신왕조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후계자는 보다 체계적인 준비를 거쳐 즉위하기를
바랐을 테니 어린 방석에게 여기에 대해 나름대로 기대가 컸을 것이다.
더하여 든든한 빽들도 있으니 조금씩 정치적 경력을 쌓아주면 되리라고 생각했겠지만 일단 태조 본인이
세자책봉 당시 이미 환갑으로 인생의 말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게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게다가 태조실록이 아무리 태종 시대에 간행됐다는 점을 고려해도 이방석은 세자로서 딱히 정무
경험을 착착 쌓아올린 흔적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장군들과 궁밖에 나가 남의 집 가축을 쏴죽이거나,
궁 안에 창기를 들이거나, 공부를 싫어하고 놀아제끼려 해서 태조가 친히 놀려고 해도 못하게 하라고
엄명하는 등 여러 모로 말썽을 일으켰다.
이방석이 죽을 때는 만 16세로 오늘날에 대면 고1 정도의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당대 사회
수준을 생각하면 태조와 정도전 일파가 집중관리해준 세자로서는 여러모로 부족해보인다.
그게 아니라면 세종 때에 했던 것처럼 세자와 대군들 사이의 예법을 확실하게 정한다거나 하는
사전작업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이조차도 없었다.
문종대에는 형에게 벌벌 기던 수양대군도, 정통성이 확실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오르자 바로 계유정난을 벌인 것을 생각하면 나이도 어리고 정통성도 형들에게 밀리는
이방석을 세자에 올리고 그 세자가 아무런 능력도 보여주지 못한 것은 명분도 능력도 없이
태조의 총애 하나로 세자책봉을 한것이라고 광고하는 꼴이다.
다만 이 논점을 근거로 들때 주의해야 할 것은 이방석이 이렇게 자질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한듯이
묘사된 이 태조실록은, 태종의 시대에 태종의 중신인 하륜 등이 편찬을 담당했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의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명분 중 하나가 "세자에게는 암군의 조짐이 보였다."는
것이기에, 역사왜곡이 가미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부분이라 비판적인 시각으로 사료를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를 감안해도 민간에서조차 이방석에 대해 우호적인 기록이나 전승은 보이지 않고, 무인정사
당시에도 세자가 궁내 갑사들을 장악하여 대응에 나섰다거나 하는 기본적인 자질을 보여준 흔적도 찾기 어렵다.
오죽하면 외사촌형과 누이가 대놓고 이방원 편에 붙었겠는가?
④ 따라서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만약 초장에서 추측한 대로 이방석의 세자 책봉이 고려 구세력과의 결별이라는
이상이라도 제시했다면 적어도 기존 고려 권문세족에 환멸을 느끼던 지방 출신의
신진사대부들에게는 상당한 호응을 얻을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라서, 이방석의 세자책봉은 그냥 이도저도 아닌 무리수로 전락해버렸다.
방석의 어머니인 신덕왕후야말로 고려 전통의 명문가인 곡산-진주 강씨 집안이며 인맥으로
이성계를 고려 중앙귀족 사회에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결국 향처의 아들로 권문세족과 혼인한 큰 아들들 vs 권문세족 외가를 두고 신진사대부와 혼인한
막내아들의 구도에서, 후자가 딱히 전자에 비해 전왕조 시대의 유산에서 자유롭다는 근거는 전무했다.
그나마 처가는 족칠 수라도 있지 어머니의 후광으로 어거지로 왕위에 오른 막내 이방석이라면
오히려 외가를 비롯한 구 권문세족을 싸고돌면 싸고돌았지 숙청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방석 본인은 심효생 집안에 다시 장가를 들었다고 쳐도 여전히 그의 친형수는 고려 왕실 사람이고
그의 매형은 이인임의 조카였으며 이 둘은 이방석 옹위라는 명분으로 상당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정도전 진영의 선택을 받았다는 정도를 제외하면 이방석을 둘러싼 인적 구성은 개혁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특히 성리학을 전면에 내세운 신진사대부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왕이 설령 구체제와의 결별이라는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한다고 쳐도 적장자상속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종법을 깡그리 무시하는, 그것도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할 왕실이 말이다.
이런 후계지명을 마냥 지지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건 다른 게 아니라 아예 조선 건국의 정당성까지
훼손될 위험이 있었다. 여기에 조강지처인 절비 한씨에 대한 예우 문제나 세자의 외가 문제까지
겹치니 결과적으로 당대의 그 어느 누가 보든 간에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그저 젊은 계비 신덕왕후와
정도전 일당의 야합이며 이성계의 오판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이방석의 책봉이 구체제와의 결별이라는 이상이라도 제시했으면 무인정사에 대한 소장파
신진사대부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방석 친위세력의 핵심이었던 정도전의 준복권
역시 먼 훗날에야 실현되었을 것이며, 새로 집권한 이방원은 인재풀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태조가 직접 칼 빼들고 나선 것 이외에 딱히 이방석의 살해에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이방원은 동생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제낀 패륜을 저지른 것 치고는
너무나 수월하게 정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무인정사 당시 이래저래 반대파로 엮여서 하옥되거나
처벌된 이들도 나중에 은근슬쩍 중앙에 복귀해 벼슬살이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귀양갔던 순녕군 이지 같은 경우는 복귀해서 영의정까지 해먹고 졸기도 써줬다.
심지어 이방원은 수많은 공신들을 이래저래 숙청하면서도 능수능란하게
신진세력을 등용하여 이후 세종 시기 관학파의 전성시대에 토대를 닦아주었다.
⑤ 적이 너무 많다.
1~4의 요소가 합쳐진 결과, 결국 정치적 고려에 의한 이방석의 세자책봉은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정점으로
하는 왕실 종친 세력과 권문세족 출신의 공신세력을 동시에 적으로 돌리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태조와 신덕왕후 일가 및 정도전 일파를 제외한
조선 중앙 기득권층 전부를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다.
조선 건국의 주역이 신진사대부라지만 정도전처럼 정말 지방에서 올라와 어렵게 공부해서
사대부의 반열에 합류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오히려 조준, 권근, 민제, 김사형 등등
한가닥하는 집안 출신 사대부들이 수두룩했으니 이게 얼마나 거대하고 무모한 시도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특히 조준은 이로 인해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간에 정도전하고 완전히 틀어진 사이가 되었는데
아무리 정도전이 실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좌의정의 위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조준과 척을 졌다는 것은 스스로 정치적 고립 상태를 자초한 것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위에서 구세력과의 결별이라는 목표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방석을 후계자로 옹립하기로 결정한 직후 이들의 행보는 분명히 큰왕자들에 대한
토사구팽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결국 태조나 정도전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큰 왕자들과 혼맥으로 얽힌
권문세족 출신들에게는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읽힐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초강경파 정도전 일당이 정국을 주도하고 각종 강경책이 봇물을 이루면서 결국 주류를
차지하는 권문세족 출신들은 이방석 즉위 이후의 상황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적이 많을 때의 기본 전략은 모름지기 "적의 적은 나의 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일례로 막내가 즉위한 순치제 사례를 보면, 왕위 계승의 경쟁자들이 서로 극한 대립으로
치닫다가 결국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가장 만만한 막내를 후계자로 세우고 권력을 적당히
갈라먹은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순치제 모델이 홍타이지의 급서라는 특수한 조건 하에서 성립된 것이긴 하지만
보다 핵심적인 요소는 상호 견제의 결과 권력의 분점에 대한 합의에 있다.
즉 방석의 친위세력은 납득하기 어려운 세자책봉에 대하여 어떻게든
반대급부를 제공함으로서 불만을 누그러뜨리거나, 반대세력의 두 축인
큰 왕자들과 권문세족 출신 공신들을 분열시키든가 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권력의 분점은 고사하고 반대세력 탄압에 열을 올리며 어그로만 만땅을
끌면서 큰 왕자들과 공신들의 일대 야합을 오히려 촉진시켜버렸다.
특히 조준, 김사형 같은 대신들은 반정 당시까지만 해도 과연 붙어줄지 말지
미지수 그 자체였지만 정작 일이 터지자 별 다른 밀당조차 없이 너무나 수월하게
반정 진영에 합류해버렸다.
명분은 없고 적은 많으니 방석의 친위세력은 무리수를 남발했다.
초장부터 명확한 설명도 없이 세자빈 유씨를 폐출시켜버리더니 정말 간통이라고 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지만 집안관리 제대로 못한 방석의 허물이 되며
정치적 의도에 의한 공작이라면 추진세력이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회의,
실망, 자괴를 느낄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어느 쪽이 되었건 방석의 입지와 권위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모두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방석을 주시하는 상황에서 어쨌거나 세자빈을 폐출시키려
했다면 보다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 처리해야 했다.
제후국 주제에 왕자들의 분봉이라는 신박한 삽질을 시도하는가 하면, 급기야 세자의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어야 할 신덕왕후가 급사하자 도성 내, 그것도 왕궁 코앞에 묘를 쓰는 초유의 편법이 터졌다.
목숨걸고 명 사신행에 자원해 외교분쟁을 잘 봉합하고 돌아온 권근에 대해 무리한
탄핵을 시도했다가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는가 하면, 이미 자신들이 반대를 넘어 아예
항명에 이은 정변까지 일으켜버린 바 있는 요동 정벌을 재추진하고 이를 빌미로
사병혁파를 강압적으로 실행에 옮겼지만 정작 인력풀의 부족으로 가장 경계해야 할
종친들을 대거 진도(진법) 훈련에 동원하면서 오히려 거병의 기회를 조성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무리수는 결국 신덕왕후의 조카인 상장군 신극례마저 이숙번과 그의 수하들을 유숙시켜가며
무인정사에 참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즉 방석을 가장 지지해줘야 할 그의 외가 쪽 친척들마저
등을 돌릴 정도였으니 얼마나 민심이 돌아섰는지 알 만한 일이다.
이렇게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어떻게든 우군을 만들어주려다보니 자연스럽게 동복형인 이방번에게
차츰 권한이 몰리게 되었다. 아래에서 보듯 좌군절제사가 되어 매형 이제와 함께
삼군부를 맡는가 하면 사병혁파 때에도 이방번만은 사병의 유지를 허락받았다.
문제는 이방번에게 힘을 실어주면 해결되는지와, 이방번은 확실히 방석의 편인지의 여부였다.
우선 이방번이 방석보다 형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1살 많을 뿐이다.
즉 삼군부 좌군절제사가 된 태조2년에 그는 고작 13살. 매형 이제가 정몽주 암살모의에
참여했을 정도로 나이가 좀 있긴 했지만 이래가지고서야 권위고 뭐고 이방원을 위시한
신의왕후 소생들, 종친들 입장에서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동복과 이복을 떠나서 동생에게 지위를 뺏긴 형이라는 입장은 이방번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아닌 게 아니라 이방원 역시 이복동생들 다 죽여놓고 났더니 다시 동복형과 칼을 맞대지 않았는가?
다시 언급하겠지만 실록에 따르면 이방번은 나름 세자위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이방원이 난을
일으킨 것을 알고도 딱히 세자 편을 들지도 않고 그냥 관망만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어차피 태종 정권의 입장에서 자기들이 방석과 도매금으로 살해한 방번을 굳이 억울한 방관자로
만들어 줄 이유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록의 신빙성은 절대 낮지 않다.
어쩌면 태조가 기껏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을 이러저리 쳐내가며 방석의 승계를 준비해놨더니
막판에 가서 이방번의 난이라는 초대형 통수를 맞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방책?
태조도 이에 대한 걱정을 안 한 게 아니라서 나름대로는 예방 조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초 왕자들과 사위를 책봉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군사력을 재편성했는데
이때 이방과와 이방번, 이제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어
친위군의 중추가 되었다.
이방번과 이제야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도 아예 모른 척 할 순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적장자가 된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이성계에게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동북면의 가별초 지휘권은 이방원에게 잠시 주어졌다.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 방번이 넘겨받는다.
(방원은 전라도 절제사로 전임)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였다.
더불어 왕자들을 지방 절제사로 전임시키면서 아예 지방으로 내보내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실록에 따르면 정도전 일당은 환관 김사행을 사주하여 왕자들을 아예 제후처럼 분봉시키는 방안을 밀어붙이려
했으나 태조가 답을 안해주고 오히려 정안군에게 하도 말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고 한다.
사실 고려식 외왕내제도 아니고 대명 사대를 국가전략으로 채택한 주제에, 또 성리학적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한 주제에 왕자들의 분봉책을 시도한 것은 무리수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아예 중앙에서 벗어난 왕자들이 지방군을 이끌고 도성을 공격한다면 이 또한 죽쒀서 개주는 꼴이다.
왕자들의 지방행이 좌절된 정도전은 이후 요동정벌과 이를 구실로 한 사병혁파 정책을 추진한다.
그러나 정도전 일파에 대한 불만, 사병혁파와 요동정벌 등 급진정책에 대한 반발은 태조의 예상 이상으로 거세었다. 사병혁파와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 징집은 반대파로서는 자신들의 수족을 자르려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실제로
이방원의 경우 신덕왕후에 대한 경계심까지 합쳐져 사병혁파를 계기로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정도전은 분명 출중한 인물이지만 정치적 능력은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정몽주나 하륜이 중앙에서 치열하게 부대끼며 정치가 뭔지
몸으로 체득할 때 정도전은 지방에 유배되어 그런 경험을 전혀 쌓지 못했다.
힘을 가진 1인자에게 사상적 기반을 제공해주는 것과 직접 똥물에 몸담그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인데 이 부분에서 사형 정몽주나 경쟁자 조준, 하륜보다 서툴렀다.
그래서 건국 이전에는 2인자 자리를 홀로 차지하지 못하고 조준과 나눠야 했고 조준의 전제개혁 때
전혀 끼어들지 못해 존재감이 낮아졌다 교우관계(이숭인, 권근)를 단절하며 척불정책을 강행해야 했다.
그의 정책들은 건국 초기 필요한 것이었지만 너무 급진적으로 전개한 데다,
반대파의 반발을 지나치게 강경하게만 대처했기에 그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정도전의 대명강경책과 군제개혁
이렇게 세자 문제로 혼돈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발표한다.
당시 조선과 명은 표전문 사건 등 외교문제로 인한 사신 억류 등의 문제가 터지면서 골이
깊어지고 있었는데 이 때 표전문을 짓는데 참여했던 권근은 태조가 따로 부르지도 않았어도
스스로 찾아가서 '저도 표전문 사건에 관련되어 있으니 제가 가서 직접 해결하겠습니다.'라고 하며
자원해서 명에 다녀왔다.
권근의 노고로 일은 잘 처리되었고 권근도 황제(주원장)에게 대접까지 융숭하게 받으며 성공적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정도전과 그 파벌은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온 권근을 사헌부를 통해 탄핵해버렸다.
이유는 정총 등 표전문 관련으로 억류된 이들 가운데에 홀로 살아 돌아왔다는 것.
물론 태조는 '만리 길 마다 않고 자원해서 일 처리하고 온 권근에게 상은커녕 무슨 탄핵이냐?' 라며 씹어버렸다.
결국 정도전은 이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민심과 사대부의 지지만 잃어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태조가 그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표전문 사건이 마무리된 후 정도전은 이참에 아예 요동을 공격하여 명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과격한 모습을 보였고 그를 위한 군사 개편까지 기획했다. 그리고 그 첫발로 공신과 종친이 보유하고
있는 사병들을 회수하여 조선의 중앙군을 강화하는 '사병 혁파'를 추진한다.
하지만 그의 사병 혁파 시도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애초에 이성계 본인이 사병을 가지고 왕이 된 만큼 이를 모두 혁파하려면
사병의 준동을 진압할 수 있는 훌륭한 관군이 확보되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중앙군이라곤 본래 함흥의 이성계 일가에게 충성하던 직속 가별초들이었다.
이들이 함흥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정도전이나 이방번에게 복종하여 다른 전주 이씨
문중 인사들을 가차없이 적대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또한 함흥 출신 왕자들과 문중의 종친이 보유하는 사병들 또한 본래 가별초였기 때문에 이성계의
지휘 아래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수많은 주변 이민족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역전의 용사들이다.
이들은 일반 사병보다도 더 특정 가문에 대한 사병화의 정도가 심각했기 때문에 모시는
주군들이 극구 반대하는 관군으로의 강제편입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장 사병 몰수 대상 리스트에 있는 이지란이 가별초의 실질적 2인자, 이방과가 가별초의 차기
수장이었는데 아무리 1인자의 위세를 빌린다 한들 낙하산 문신 정도전과 큰마님을 밀어낸
후실의 막내아들이 가별초에 발휘할 수있는 영향력은 한계가 명백하지 않았겠는가.
정 사병 혁파를 하려면 이성계 본인이 앞서서 사병을 빼앗고 자식들이 말 안들으면
줘패서라도 뺏어야 되는데 이성계가 이러지 않았다는것도 문제.
물론 사병혁파는 필요한 정책이었지만 당시 실행자가 당시 독단적인 정책으로 정계의
온갖 어그로란 어그로는 다 끌고다니던 정도전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정도전은 이러한 사병혁파를 추진하면서 당연하게도 공신은 물론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왕실 종친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은 안 그래도 세자 책봉 문제로 골이 깊은 상황에서
이러한 발표가 나오니, 자신들의 수족이 잘린다는 생각을 넘어서 정도전이 기어이
나라를 뺏고 자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려고 수작을 부린다며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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