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당신의 주인 되신다
♣ 절박한 내게 찾아온 십자가의 복음
저를 변화시키려고 주님이 사용하신 것은 신학이나 교리, 성경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문턱도 못 밟아 본 제가 신학이나 교리, 성경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저였습니다. 그런 제게 기막힌 역사를 베풀어 교회로 이끌고 꼼짝 못하도록 붙든 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이었습니다. 다음의 단순한 말씀 한 구절이 엄청나게 크고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십자가의 복음이 이 말씀을 통해서 들려오는데, 그토록 주리고 절박하던 심령에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씀이 제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아십니까?
이 말씀은 제게 '창조주, 즉 이 세상을 만든 신이 있다. 그는 모든 우주를 동원해도 절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위대한 존재다. 그런데 바로 그가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실패작인 나를 사랑하다 못해, 미치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를 위해 자기의 하나뿐인 아들을 내주었다'라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세상 천지에 이런 미친 사랑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소설에서도 본 적 없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제 마음속에 '실재'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께서 제 마음을 여시니까, 이 단순한 말씀이 이런 의미로 느껴졌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저는 부모에게서도 "사랑한다"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미 저희 집안 배경을 밝혔으니 짐작하실 겁니다. 아버지는 말할 필요도 없고, 어머니도 늘 욕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워낙 험한 남편과 살다 보니 같이 험해질 수밖에 없으셨을 테지요. 어머니는 가정교육이고 뭐고 없이, 자식에게도 그냥 다 욕을 하셨습니다.
기분 좋을 때 역시 어버니는 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염병할 놈'이라는 말이 좋은 것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서야 그 말이 '전염병 걸려 죽을 놈'이란 뜻인 줄 알았습니다. 정말 기분 좋을 때는 '육시랄 놈'이라고 하셨는데, 이것도 '여섯 토막 내서 죽일 놈'이라는 뜻이더군요. 가장 황당한 것은 제가 예쁜 짓을 하거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을 때 하신 말입니다. "아이고, 이 망할 놈의 새끼!"
좋을 때 하는 말이 이러니, 화가 나면 어떻겠습니까? 호랑이한테 물려 갈 놈이라는 둥 호랑이한테 물어뜯길 놈이라는 둥 정말 별별 소리를 다 하셨습니다. 아니, 강아지한테 물려도 심각한 일인데, 호랑이한테 물어뜯기면 뭐가 남겠습니까?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분명히 그분은 제 생모이십니다. 계모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식에게 그런 소리를 하셨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저이므로, 혹여나 제가 사용하는 표현이나 단어가 불편하고 부담스러워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를 국민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어쨌든 주님의 그 사랑한다는 말에 꼬꾸라진 제게 주님이 다시 "너른 망해 버린 술집 사장 아들놈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해서 죽어야 했을 만큼 소중한 나의 자녀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결정타였습니다. 이 말씀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제 마음속 깊이 꽂혔습니다. 모든 게 사실로 믿어졌습니다. 아니, 전부 꾸며낸 이야기라고 해도, 평생 그분께 미쳐서 살다 죽고 싶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주님 앞에서 훌렁 뒤집어진 채로 지금까지 그분께 훌렁 미쳐 살고 있습니다. 그냥 미친 것과 훌렁 미친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냥 벗었다는 것과 훌렁 벗었다는 게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정말 글자 그대로 저는 그분께 훌렁 미치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이전처럼 살 수가 없었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을 가르쳐 주거나 훈련시켜 주는 사람도 없고 제자훈련을 받은 적도 전혀 없었지만, 그 좋은 예수님을 만났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었었겠습니까. 감사의 마음을 하나님께 표현하고 싶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니 그 방법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쉽고 단순하게 '무소유의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서원해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전임 사역을 시작할 때까지 10년 정도를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했습니다. 그 10년 동안 저는 눈물 없이 찬양해 본 적이 없습니다. 70년대 시골 교회이 찬양은 박자와 리듬, 멜로디에서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할머니 권사님들이랑 아줌마 집사님들이 모여서 찬송가로 노래하는데, 박자는 물론 반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멜로디도 딱 하나뿐입니다. 찬송가 전부를 똑같은 멜로디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가사만 다를 뿐 모든 노래가 다 똑같습니다. 이런 분위기로 노인과 부녀자들이 찬송하는데, 그 속에 젊은 사내 하나가 끼어 있는 웃긴 광경이 연출되었습니다.
멜로디가 똑같았도 상관없었습니다. 리듬을 다 틀려도 괜찮았습니다. 그저 좋았습니다. 아니, 세상 어떤 노래가 그렇게 좋다는 말입니까? 제가 알던 노래라고는 어렸을 때 기생 누나들이 가르쳐 준 유행가가 전부였는데, 어떻게 그토록 아름답고 은혜로울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이 그런 가사를 쓸 수 있다니요. 저는 정말 제게 주신 복음이 고맙고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10년 내내 눈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저 같이 버림받은 불쌍한 놈을 어떻게 그토록 사랑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무런 복을 받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다른 건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주님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저는 하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하기에, 교회에서 예배드리다가 곧장 천국으로 가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믿은 것도 아니고 성경도 잘 모를 때였으니까요. 그래서 정말 예배 시간이 되면, '언제쯤 나를 데려가시려나? 오늘은 누군가 천당가게 되려나?' 하는 기대를 했습니다.
물론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만 아니면 지금 당장 가고 싶습니다. 제게는 이 세상보다 천국이 더 큰 실재입니다. 제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주님이 거기 계시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모두 그곳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몇 날이 며칠이 지나도 주님이 천국으로 데려가질 않으셨습니다. 제 생각과 달리,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 작은 케이크 속에 담긴 큰 감동
예수님 믿자마자 곧바로 천국에 가게 되면, 삶의 고민들도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저희 단체에서 하는 복음학교 같은 데에 골치 아프게 다닐 필요도 없으니까요. 바로 천국 가서 주님께 직접 들으면 되니 말입니다.
제 바람과 달리 결국 주님은 계속 저를 데려가지 않으시고, 대신 어느 한 여자가 저를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제가 아니라 그 여자가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절대로 제가 먼저 시작한 게 아닙니다. 어쨌든 결국 그 여자와 저는 부부가 되어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저희에게 다섯 명의 귀한 자녀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아이들의 이름을 보면 저희 가정이 어떤 분위기인지 대강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생명을 어떻게 나 같은 놈의 가정에 주셨을까' 싶은 마음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는 말씀을 따라 첫째 아이 이름은 '충성'이라고 지었습니다. 둘째의 이름은 '인애'입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란 뜻입니다. 셋째는 앞에서 소개했던 '찬송'이입니다. 넷째는 '응답'이라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늘 "응답하라, 오바"라며 장난을 치는 바람에 이 녀석의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막내 이름은 '선교'입니다. 이 녀석은 이름부터 선교라서, 자신은 어디 다른 데 취직하기도 어렵고 사업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선교사가 자신의 운명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인 지 오래입니다.
아이들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는지 궁금하신가요? 누군가 제게 "당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천하를 주고도 못 바꿀 내 주 예수님을 만난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할 겁니다. 그분은 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신 분입니다. 곰곰히 생각하던 저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물려줄 만한 것 중에는 복음만 한 게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주님이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라며 한사코 말리셔도, 아이들 뒤를 끝까지 따라다니며 세뇌라도 해서 시켜야 할 일이 있다면 선교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애초에 다섯 아이를 전부 선교사로 서원시켰습니다. 그래서 저희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에게 이런 세뇌를 당했습니다. "너는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이다. 너도 우리 주님이 얼마나 순진하신 분인지 잘 알지? 한 번 말씀드린 건 곧이곧대로 들으시는 분이야. 한 번 받으신 건 절대 놓지 않으시지. 괜히 요나처럼 도망 다녀 봤자, 작살 맞은 고래처럼 될 뿐이다. 힘이 있을 때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잘 도망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지쳐서 질질 끌려가게 된단다.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잘 순종하는 게 좋아. 잘 알았지?"
계속해서 그렇게 말하니까 다들 '선교사'를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전부 '타고난' 선교사들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저희 가정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 선교,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 십자가의 복음,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현실적인 문제이며 '실재'입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전부 해외 선교사인 덕분에 저희 가족은 웬만해서는 한자리에 모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다섯 아이 모두 우연히 같은 시기에 한국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제 생일을 맞게 되었고,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 조촐한 파티를 열었습니다. 오랜만에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선교사 다섯 분이 돈을 모아 케이크를 사왔습니다. 다섯 명이 함께 준비하니 얼마나 큰 케이크였겠습니까? 엄청 컸습니다. 얼마나 컸는지 딱 제 얼굴 절반만 했습니다. 그렇게도 작은 케이크가 존재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다섯 명이 힘을 모아 산 게 겨우 얼굴 절반만 하다니, 사실 조금 서운했습니다.
어쨌든 크기는 작아도 케이크는 케이크니까 일단 초를 박아 놓았습니다. 제 나이만큼 꽂으니까 더는 꽂을 데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분 좋은 상황에서 갑자기 주책없이 제 아내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침울해져 버렸습니다. 엄마가 계속 눈물을 흘리니까 아이들이 분위기를 바꿔 보겠다며, 한 사람씩 돌아가며 생일 축하 메시지를 던지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첫째 아들 충성이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 녀석이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아프리카에서 사역할 때, 저를 만나러 오신 것 기억나세요?"
"맞아. 한 번 갔었지."
"그럼 그때 제게 카드 써 주셨던 것도 기억하세요?"
"내가 그랬나?"
예전에 아프리카에 사역하러 갔다가, 충성이가 섬기고 있는 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매우 가난한 국가들 중 하나인 '기니비사우'였는데, 직접 가서 보니까 한숨이 절로 나오면서, 저도 모르게 절망하게 되는 나라였습니다. 학교는커녕 전기도 없고 수도도 안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제 아들은 한 부족 마을의 청년들을 섬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곳에서 며칠 머물며 아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든 잘 견뎌라"고 말하며 강한 마음으로 파송했는데, 막상 아들과 함께 지내 보니까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곳 날씨가 어찌나 더웠는지, 언제 어디서든 잘 자는 저도 잠을 설칠 정도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체중이 10kg이나 빠진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 데서 썩기엔 우리 아들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에 대한 그러한 고민과 갈등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곳에 아들을 혼자 두고 한국으로 올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처럼 막살면서 이리저리 험하게 굴러먹던 사람에게는 열악하고 척박한 선교지가 딱 좋지만, 아들은 그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볼 때 제 아들은 저보다 가능성도 많고 성격도 좋습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내 아들이 여기서 썩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저는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을 적은 카드를 만들었습니다. 원래 그쪽에 은사가 없는지라 말이 카드지 그냥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곳을 떠나오며 아들에게 카드를 주고 왔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는 내내 그 카드를 벽에 붙여 놓고 힘을 얻었어요. 혹시 카드의 맨 마지막에 뭐라고 쓰셨는지 기억나세요?"
오락가락하는 제 머리로 그나마 카드를 적은 사실을 기억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어떻게 그 내용까지 기억하겠습니까.
"아니, 기억나지 않는구나. 뭐라고 썼더라?"
"아버지의 그 고백을, 그날 밤 저 또한 하나님께 드렸어요.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우리 땅 끝에서 죽어 하늘 복판에서 만나자.' 저는 이 말을 제 가슴판에 새겼습니다. 아버지, 훌륭한 믿음의 선배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 사역지를 '땅 끝'이라고 하는 러시아 체첸으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땅 끝에서 죽어 하늘 복판에서 만나요. 감사합니다."
생일 파티는 눈물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비록 얼굴 반쪽만 한 케이크였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감동이 담겨 있었습니다. 저희에게 선교는 이런 의미입니다. 저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십니다.
♣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여러분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입니까? 그분이 지신 십자가는 어떤 의미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선교는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이 문제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대답을 미루고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린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린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문제는 정말 중요합니다. 바로 "실제로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주인'이 대체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자연스레 떠오르고, 그것만 생각하면 힘이 솟게 하며, 내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끌리고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면서 겉으로는 전혀 아닌 척해도 마음속 보물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실재입니다. 사람은 바로 그것을 위해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외의 것은 모두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가치일 뿐입니다. 이것을 먼저 정확하게 살펴보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의 실재로 삼기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회색지대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양다리를 걸칠 수도 없습니다. 내면의 실재를 정확하게 짚어 보고 처리해야만, 나 자신이 아니라 나를 위해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을 내려놓지 않은 채로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억지로 믿는 척하고 애써서 교회 출석하는 모순이 나타나는 겁니다. 내면의 실재가 믿음이 아닌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런 문제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성령께 여러분의 내면을, 마음속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분은 우리 마음을 아시며 내면을 다루십니다(롬8:26-27). 정직하고 온전하게 기도하면,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서 실재가 되시도록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내가 주인 삼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 사랑하기로 결정하게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자신에게 없었음을 고백하십시다. 주님 앞에서 머뭇거리게 하는 것이 있었음을 인정하십시오. 이것만은 도저히 내려놓지 못하겠다며 마음속으로 꽁꽁 묶어 놓은 것들까지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자기 자신이든 애인이든 꿈이든 사업이든 사역이든 명예든 성공이든 돈이든 그 대상을 내려놓지 않는 한, 주님은 여러분의 주인도 사랑의 대상도 되실 수 없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밭에 감춰진 보화를 얻기 위해 전 재산을 팔아 대가로 치러야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드려야 합니다(마13:44). 사랑은 '전심'(全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두 명의 대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둘 중 한 쪽은 거짓 사랑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여러분의 진짜 주인은 누구입니까? 인생의 주인으로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