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성 옛 터
작사:왕평 작곡: 전수린 노래: 이애리수
Ⅰ.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Ⅱ. 성은 허물어져 빈 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여 왔노라
Ⅲ. 나는 가리로다 끝이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 -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있거라
본래의 노래제목이 ‘황성의 적(荒城의跡 )’이란 이 노래는 일제시대
때인 1928년 바이올리니스트 전수린(全壽 鱗)이 작곡하고 당시 주로 항일노래를
작사하던 왕평(王平, 본명:李應浩)이 )이 작사한 민족성이 강한 노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황성옛터’란 지금의 개성시 송악동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의 옛 궁궐터인 만월대(滿月 臺)를 말하는 것입니다.
919년(태조 2)에 태조가 송악산 남쪽 기슭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창건한
이래 1361년( 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고려왕의 주된 거처가된
곳으로 이 노래의 작곡가인 전수린의 고향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때는 1928년 늦가을, 악극단 취성좌(聚星 座-이듬해 조선 연극사로
통합됨)단원 들이 만주를 거쳐 신의주, 평양까지의 지방공연을 마치고 황해도
배천의 한 여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극단의 배경음악
연주자였던 전수린은 극작가 왕평과 함께 자신의 고향 개성의 만월대를 찾았습니다.
옛 궁궐은 온데 간데 없고 무성한 잡초 속에 주춧돌과
성벽의 일부만 초라하게 남은 모습에, 지금 일제치하에 있는 우리민족의
서글픈 신세를 떠올립니다. 여관으로 돌아온 전수린은 만월대에서 느낀 회상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며 그 멜로디를 오선지에 옮겼습니다. 이 멜로디를 듣고, 여기에 왕평이 가사를
붙여 ‘황성의 적’이란 노래가 탄생한 것입니다.
악극단 ‘취성좌’가 지방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극장 ‘단성사’에서
연극공연 막간에 이애리수(李 愛利秀)로 하여금 이 노래를 부르게하였는 데,
노래를 부르다가 이애리수 자신도 가슴에 밀려드는 망국의 설움을 참지못하고 그만
울어버렸습니 다. 객석에서는 오히려 폭풍같은 박수가 터져나왔습니 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며, 이애리수가 노래할 때마다 관중들도 따라 불렀습니다.
그렇게 노래가 인기를 끌자, 1932년에 빅터(VIC TOR)레코드사에서 드사에서
이 노래를 ‘황성옛터’ 라는 음반으로 제작하여 당시 5만장이나 팔려
우리 대중 가요사에 한 획을 긋게 됩니다.
이 노래가, 망해버린 고려 왕조의 사적을 통해 역사적
비애를 표현한, 곧 일제에 짓밟혀 암울하게 살아가는 식민지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민족정서가 강한 노래가되었기에 일제 당국은 공연 때 마다 공연을 중단시키는 일이
잦았습니다. 급기야,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묶는 탄압을 하기에 이릅니다.
작사가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은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밤샘조사를 받아야
했으며, 대구에서는 음악시간에 이 노래를 가르친 교사가 파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실로 이 ‘황성옛터’는 일제 형극의 모진 세월 속에
함께 울고 몸부림치며 불렀던 우리민족사에 길이 남을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부른 이애리수 엮시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본명은 이음전(李音 全), 애리수는 예명 ‘앨리스’에서 따온 것입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0살 때부터 외삼촌을 따라 극단 배우로 활동하면서
막간 가수로 노래도 하다가 자연스럽게 음반을 취입하였습니 다. 1931년에 콜럼비아레코 드에서
부른 〈메리의 노래〉, 〈라인강〉, 〈부활〉 등 이 정식 데뷔곡입니다.
18살 나이에 황성옛터를 부르면서 일약 국민가수로 등극하였으나, 당시
대학생이던 배동필을 만나 사귀면서 집안의 반대에 부딪쳐 음독자살을 시도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배동필과 결혼하면서 은퇴 - 그후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한 때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오다가 2008년 일산의 한
요양원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습니다만
2009년 3월 31일 99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황성옛터 (F#m)| 트레몰로 기초반
송은(왕금식) | 조회 77 |추천 0 | 2015.03.11. 21:19
'눈물젖은 두만강,황성옛터'의 노래에 얽힌 이야기
| 조회 135 |추천 0 | 2013.07.2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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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 <눈물젖은 두만강> 작사 : 현명천, 김용호, 작곡 : 이시우
1935년 두만강 가에 있는 투먼(圖們)시의 허름한 만춘여관에서 젊은 여인이 밤새 흐느껴 울고 있었다. 옆방에 숙식하는 만주 일대 순회 공연하던 유랑극단 ‘예원좌(藝苑座)’의 단원인 이시우 씨는 잠을 설쳤다. 같은 조선인인 여관집 주인의 말에 따르면 독립운동을 위해 고향을 떠난 남편(문창학)이 일본 경찰에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만주 땅 형무소까지 찾아가보니 이미 총살당한 후였다는 것이다. 이 날은 더구나 남편의 생일. 여인(김증손녀, 당시 30세)은 생일상 겸 제상에 술을 부어놓고 밤새 오열을 토했던 것이다.
다음날 그는 마침 그곳에서 만난 문학청년 현명천 시인에게 이 여인의 기막힌 사연을 얘기했다. 이 말을 들은 시인은 오선지에 즉흥적으로 가사를 썼고, 작곡에 소질이 있던 그는 곡을 붙여 다음날 간도 순회 공연에서 악극단 막간 소녀가수 장성월이 처음 불렀는데 반응이 좋았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김용호 시인에게 2절, 3절 노래가사를 부탁했다. 그리고 1938년 OK레코드사에 의해 김용호 작사, 이시우 작곡, 김정구 노래의 ‘눈물젖은 두만강’의 완성품이 만들어졌다. 그가 바로 이시우 선생이다.
나라 잃은 서러움 때문인지 이 노래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운 내 님이여”, “추억에 목 메이는 애달픈 하소”, “님 가신 이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등 구절마다 국민들의 가슴을 헤집어 놓았던 것이다. 결국 이 노래는 194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민족성이 강한 노래’로 낙인찍혀, 발매 및 가창 금지곡이 됐다. 이시우 선생과 김정구 선생은 생전에 ‘눈물 젖은 두만강’에 얽힌 사연을 이처럼 소개하곤 했다 한다.
*** 이시우(李時雨·1913~1975) 선생을 기리는 기념사업이 고향인 경남 거제시 거제면민들에 의해 추진되어 거제면 서정리에 ‘눈물젖은 두만강’의 작곡비와 기념동산을 조성했다. 지난 1975년까지 작곡활동을 하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이시우 선생은 일본의 와세다(早稻田)대학 전문부에서 법률을 전공한 엘리트다. 특히 생명파 시인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1908~1967)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거제시에 이시우 선생의 기념동산까지 생겼으니 참으로 반갑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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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황성옛터(1932)> 작사 : 王平, 작곡 : 전수린
1930년경 지두환이 이끄는 순회극단이 만주 일대와 평양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무대 감독 겸 작사는 王平이 맡고 있었다. 개성에서 공연을 마친 왕평과 전수린은 옛 고려의 영화를 되새기면서 달빛 쏟아지는 만월대의 옛터를 찾아 거닐게 되었다. 달빛에 빛나는 王城의 옛터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폐허가 되어 있었고 벌레 소리만 쓸쓸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전수린은 훗날 이 때의 광경을 온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이곳에서 영화를 누렸던 옛날을 회상하며 눈물지으며 말없이 돌아왔다고 한다. 비가 내려 공연은 할 수 없게 되고 이때 황성 옛터의 악상이 떠올랐다고 한다. 비 내리는 객지의 여인숙에서 만월대의 밤을 회상하던 전수린은 그 생각을 바이올린을 들고 즉흥적으로 연주하였고 그 멜로디를 왕평은 오선지에 옮겼다고 한다.
그 해(1932) 가을 그들이 단성사에서 공연할 때 연극 막간에 이애리수가 ‘황성 옛터’를 불렀는데 객석에 있던 관객들의 눈은 눈물로 가득하였으며 흥분한 관객은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고 한다. 절망적일 정도로 애조 띤 이 노래를 듣던 관객들은 망국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이 때부터 이애리수가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관객도 함께 부르게 되었고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황성 옛터는 1932년 이애리수의 노래로 발매되어 순식간에 5만장을 판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민중에게 조선민족의 자각을 선동할 수 있다고 하여 ‘황성 옛터’를 발매 금지 시켰다고 한다. 왕평과 전수린은 종로경찰서의 취조를 받고 유치장 신세가 되었다. 총독부는 이 노래를 부르는 조선인을 발견하는 즉시 심문하고 취조했다. 대구의 모 보통학교에서는 창가 시간에 이 노래를 불렀다고 음악 선생님이 그 자리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 그러나‘황성 옛터’는 끈덕지게 불렸고 이애리수는 민족의 여인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술좌석에서 늘 황성옛터를 즐겨 불렀다고 전한다。 황성옛터 가요는 일제 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며 불렀으며 노래속의 荒城은 주권을 잃은 대한제국을 일컫는다。아리랑과 함께 황성옛터는 애국심(愛國心)의 민족노래라고 말할 수 있다。
왕평은 연극 각본의 연출가이며 또 배우로서도 무대와 영화에서 활약한 슈퍼 스타였다. 8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놀았던 목계 솔밭에는 ‘황성 옛터’의 노래비가 2009년 11월 후원 단체인 (사)청송향토문화발전회와 청송군에 의해 파천면 송강리에 세워졌다. 본명 이응호, 자 광희, 호가 왕평인 그는 1908년에 태어나 1941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자연석으로 건립된 이 노래비는 3절까지 노래가사가 적혀 있고 왕평의 내력이 적혀 있다. <글 : 청송군교육삼락회 박두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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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노래는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노래인데.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가슴이 뭉클해지네요...
곡을 올려 놨으니 한 번 감상 해 보소 !
나도 울고, 너도 울고 그리고 우리 모두 가슴저리게 울지 않고서는 못 베길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