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포장이 된 곳은 시내 안쪽뿐이었다. 외지로 나가는 길은 남쪽 삼천리 가는 다리를 건너 칠전동을 돌아 서울로 가는 행 길, 동쪽 남춘천에서 학곡리를 지나 대룡산을 넘는 원창 고개로 난 홍천, 원주로 가는 길이었다. 북쪽으로 화천 가는 길이 있었지만 용산리부터는 포장이 안되어 있었다. 시내버스가 간간이 춘천댐을 오가긴 했어도 용산리부터는 먼지를 날리며 툴툴거리며 오갔다. 화천으로 가는 길이 포장이 안 된 이유 중 하나는 북한이 가까워서였을 것이다. 샘밭으로 넘는 다리는 소양1교 하나뿐이었다. 우두산으로 소풍을 갈 때면 전교생이 걸어서 갔다. 다리를 건너기 전 옆의 봉의산에는 진달래가 절벽에 만국기처럼 펄럭이며 우리를 맞았다. 공지천 다리는 콜타르가 칠해진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비가 오고 나면 다리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삐걱거려 마음 졸이며 건너야 했다. 강 상류에는 물길 중간 모래밭에 오리를 키우는 집이 있었다. 어느 해 홍수가 났을 때, 다리가 무너졌다. 오리집도 떠내려갔다. 그리고 시멘트 교각이 만들어 졌다.
전력사정이 안 좋은 때라 밤이면 도시는 금새 어두워졌다. 다만 동쪽 저 먼 낮은 하늘 위에 불빛은 밤새 빛났다. 불빛은 대룡산 꼭대기의 유도탄기지 사령부였다. 소문으로 전쟁이 나면 유도탄이 원산으로 날아간다고 하였다.
높은 건물이 없었고, 네온사인도 없는 도시에 그 불빛은 매일 밤 황황하게 눈에 들어왔다.
도청에서 로타리, 로타리에서 버스 터미널로 이어지는 직선 길이 예나 지금이나 춘천의 중심도로였다.
도청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다가 현재의 적십자 병원, 강원일보사가 있고, 그 아래 도경찰서가 있었다. 적 벽돌로 된 적십자 병원 담에는 밤에 박쥐가 많이 날아 다녔다. 로타리 한 가운데는 시계탑 아래 교통 경찰이 절도있게 서서 손짓으로 교통 정리를 했다. 로타리에는 은행들이 모여 있었다. 박정희 군사 정부때 화 폐교환령이 내리자 사람들이 로타리 남쪽에 있던 한국은행에서부터 줄을 서서 미군부대로 가는 길목에 있는 한전까지 늘어선 적이 있다.
인성병원이 있는 부근에서 봉의동 쪽으로 가는 중간에 요선시장이 있었다. 당시에는 중앙시장, 서부시장과 함께 춘천의 3대 시장 중의 하나였다. 시장에는 상의 군인이 많았다. 전쟁에 잃은 팔다리를 무슨 훈장처럼 과시하면서 행상인들에게 위협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요선 시장에서 적십자 병원 쪽으로 가는 큰 길에 회백색의 큼지막한 공중 변소가 있었다.
명동은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가장 큰 번화가였다. 맞춤 양복점을 비롯한 옷가게와 금은방이 많았다. 교복을 파는 집도 버젓이 중간쯤에 자리잡고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명동 가운데에서 조금 언덕으로 올라가 법원이 있었다.
가장 부자 동네는 시청 옆에 있는 조양동이었다. 시내 중심지와 가까우면서 양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앙시장은 대표 시장이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파는 양키시장도 시장 어느 골목에 자리잡았다. 거기에는 요술방망이를 제외한 모든 물건이 흘러 넘쳤다. 시장마다 품목에 따라 구역이 정해져있었다. 반찬을 파는 곳, 과일을 파는 곳, 옷을 파는 곳, 채소를 파는 곳 등등의 위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시장 한가운데 공터에서는 자주 서커스단이 들어 왔다. 포스터가 시내 곳곳에 붙여지고 삐에로가 등장하고 큰북을 등에 매달고 도시를 순회했다. 그가 걸을 때마다 북은 울렸다. 아이들은 무작정 그 뒤를 따라 다녔다. 하도 몰두하며 쫓아갔기 때문에 그만 낯선 동네에서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단체로 관람을 가기도 했다.
그 중앙 시장에 불이 난 적이 있다. 그 날 나는 2부제 수업의 오후반이었다. 점심을 먹고 옥천동 언덕에 있는 학교 운동장에서 수업 시작을 기다리는데, 시커먼 연기가 금새 저 아래에서 치솟아 올랐다. 시장은 내가 다니는 학교 바로 아래여서 저 아래 발생한 불길이 잘 내려다 보였다. 그것은 우리 또래들이 논둑과 야산에서 콩을 구워먹기 위해 지른 불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달랐다. 너무 격렬하고, 폭발적이고, 난폭했다. 인정사정이 없었다. 우리는 제자리에서 잰걸음을 걸으며 걱정과 야릇한 조바심을 느끼며 바라보았다.
후에 시장은 번듯하게 재건축 되었다. 현재의 시장의 모습은 그때 이후 변하지 않았다.
중앙시장이 끝나는 남쪽 끝에 도립병원이 있었다. 시멘트 담 안에 낮고 흰 건물이 음침하게 들어앉아 있어 낮에도 그 옆을 지나기가 으스스 했다. 정문 옆에 은행나무가 있었다. 가을 내낸 노란 은행잎이 날렸다. 향교에 있는 은행나무와 더불어 가장 도시의 가장 큰 은행나무였다. 허나 그 골목은 큰 벙거지들을 이고 다니며 아무 것이나 집어넣어 가버리는 양아치들의 집합장소였다.
춘천 국민학교 뒤편 언덕에 오순절 보육원이 있었다. 춘천 국민학교는 6.25전쟁 때 반동분자의 처형장소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지 오래되었지만 고아가 많았다. 철문 안쪽에 제 법 큰 집이 있었는데, 그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그 옆에는 국수집이 있었다. 안에서는 밀가루 반죽을 나란한 선으로 가닥을 뽑아냈다. 늘씬하게 잘 뽑아낸 국수 가닥을 말리기 위해 가게 앞 전선줄에 일일이 빨래처럼 매달아 놓았다. 식욕을 자극하기도 해서 지나가다가 우리 또래 아이들은 곧잘 끊어 먹었다.
죽림동 언덕 위에 망대가 있었다. 미군부대 앞의 소방서에 가장 높은 망대가 있긴 했어도 그것이 시내를 더 효과적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죽림동에 있지 않은 것은 아마 미군부대가 그곳에 있기 때문으로 짐작되었다. 망대 아래쪽 약사리 고개를 내려가서 우측에 형무소가 있었다. 동네 한 가운데 죄수들이 모여있는 꼴이었다.
농사철에는 우중충한 옷들을 입고 줄에 매어 끌려나온 죄수들이 온의동 가는 길의 양편 논, 밭에서 일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감시하는 사람은 긴 총을 들고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춘천 사람들의 산은 봉의산이었다. 봉의산 서편 아래 우물이 있었다. 마을에 우물터가 있어도 일부러 그 우물터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맑고 풍부해서 가뭄에도 물이 넘쳐났다. 사람들은 우물가 아래의 개울에서 빨래를 하기도 했다. 개울을 따라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을 정도였다.
봉의산을 배경으로 둔 도청은 알아주는 명당 터였다.
사람들은 명당의 혈이 강 건너 서면의 신숭겸 장군묘와 통한다고 이야기 했다. 또 하나의 명당은 우두산이라고 했다.
도서관은 도청 아래에 있었고, 건너편에 문화회관이 있었다. 도청뒤편에는 큰 절이 있었다. 없어진 후에야 알았지만 해방이 지난 지 10년이 넘도록 방치되어온 일본 신사였다. 규모가 상당했다. 도청 바로 뒤쯤에서 시작된 정문에서 세종 호텔 바로 아래까지 높게 올라간 계단은 실로 장관이었다. 그 맨 꼭대기 사당은 폐쇄되어 있었다. 오른편에 일본 제국 참전 열사를 기리는 탑이 있었다. 당시에는 6.25참전 탑 인줄로만 알았다. 탑은 양옆에 통로를 가지고 있었다. 커다란 향로가 있었고, 군인들의 동상이 있었는데, 그곳이 숨바꼭질하기가 좋은 장소였다. 우리가 험하게 놀았음에도 아무도 우리를 제지하지 않는 것을 이상스레 생각하면서 놀았다.
계단 왼편의 넓은 나무 그늘은 시민들의 유일한 휴식처였다. 많은 시민들이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로 나들이를 나왔다. 여름방학 식물채집과 곤충채집을 하러 그리로 갔다. 사생대회를 하는 곳도 그곳의 나무 밑이었다.
시청 앞에 KBS방송국이 있었다. 방송국 아래 유일한 놀이터가 있었다. 그내와 썰매 등이 있을 뿐이지만 토요일 오후 그곳에 가면 낯선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가끔 사각모를 쓴 대학생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후평동을 가기 위한 유일한 길은 봉의산 동쪽 기슭이었다. 좁은 언덕을 지나 춘천 여고 뒤편의 골목을 따라 더 올라가면 경사진 좁은 길이 있고,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없는 절벽 아래 판자집 지붕들이 내려다 보였다. 후평동은 너른 배추밭, 보리밭이었다. 군데 군데 농사짓는 사람들의 집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물이 많아지는 때는 후평동까지 소양강물이 들어와 그곳에서 목욕을 하러 사람들이 몰려왔다.
유봉여고가 자리잡기 전에 언덕을 메운 자리에 천막 학교가 섰다. 동도 기술 학교였다. 당시에는 라디오가 과학기술의 첨단이었다. 광석 조립 라디오를 들고 다니는 그 학교 형이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 없었다.
그때는 시내의 언덕마다 어김없이 판자집들이 들어 차 있었다. 어느 언덕에도 나무 한 포기 남아나지 않았던 것은 모조리 땔감으로 베어갔기 때문이었다. 아슬아슬한 절벽 위까지 집들이 자리 잡았다. 팔호광장의 동편 효자동 언덕, 봉의초등학교 건너편 언덕 , 죽림동 언덕이 대표적인 판자촌이었다.
사창고개를 넘는 언덕에도 판자촌이 많았다. 사창고개 언덕 위에는 나와 같은 반 친구가 하는 솜틀집이 있었다. "사창고개 솜틀집"이었다. "사창고개 이발소"도 있었다. "사창"의 상호를 단 상점들이 많았는데, 아마 "사창(私娼)"의 본 뜻을 잘 모르고, 별 의미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 같다. 언덕을 내려가면 유명한 "사창고개 막국수" 집이 있었다.
사창고개 골목 아래로 내려가면 겨울이면 불 화덕을 문 앞까지 들고 나와 그 옆에 앉아 있는 여자들을 볼 수 있었다. 여름에는 흰 속 옷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부채를 부치며 "애들은 이리로 다니는 것이 아니란다." 하며 우리를 핀잔을 주었다. 우리는 그 아줌마들의 말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학교에 다니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막국수 집으로 유명한 곳은 또 중앙초등학교 앞과 성수학교 정문 옆의 제중당 한의원 옆에 있었다.
아직 닭갈비집들이 생기기 전이었다.
성수학교와 춘고 사이에 지금의 찜질방에 해당하는 움집이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땀이 무지하게 많이 나오도록 더운데 관절염들이 씻은 듯이 낫는다고 소문이 났다. 그러나 제법 비싸서 보통 사람들은 이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춘고마당은 시민의 공설 운동장이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서는 운동회를 그곳에서 했다. 가을 운동회 때는 실에 꿰어 매단 찐 밤을 파는 장사꾼이 인기였다. 지금처럼 돌로 쌓아 올린 계단이 있었다. 축구와 야구경기 응원에 우리는 자주 동원되었다. 특히 미루나무의 그늘이 비껴간 어느 한 여름의 카드섹션은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시내의 최초의 빵집은 로타리에 자리 잡은 해금강이었다. 거기에서 만들어진 하드 맛은 최고였다.
현재 강원대학 정문 옆과 춘천 여중 사이의 농대 옆에는 문둥이가 살았다. 가끔 그들은 집집 마다 동냥을 하러 다녔다. 어린 애 간을 빼 먹는다는 소문이 있어 우리는 눈섶이 없는 거지가 오면 방에 숨었다.
어느 날 우리는 수업을 중단하고 춘천중학교아래까지 걸어갔다. 우리 손에 젓가락만한 나무에 매단 종이 국기가 들려졌다. "하이레세라세 황제가 온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열렬히 손을 흔들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한 시간은 족히 기다린 후에 지나가는 차들을 향하여 소리치며 국기를 흔들어댔다.
그는 6.25때 우리나라를 공산치하에서 구한 위대한 이디오피아 황제였다. 동원된 환영 행렬은 도청까지 이어졌다.
황제가 방문하고 나서 공지천에 커피숍이 세워졌다. 직접 이디오피아에서 커피를 보내주기로 약속한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거피숍 "이디오피아"이고, 그 옆의 탑도 그 때 세워진 것이다.
소양강은 원래 네 개의 강줄기였다. 그 네 개의 강을 대마지강이라고 불렀다. 삼악산 아래쪽은 신영강이라 불렀다. 아버지는 가끔 나를 데리고 강으로 낚시를 하러 갔다. 견지 낚시로 갓 잡아 올린 고기를 내가 있는 쪽으로 던지면 자갈 위의 고기 비늘은 햇빛을 받아 파닥이며 튀었다. 나는 황급히 잡아 어망에 넣었다. 낚시를 거두고 나온 아버지는 산채로 고추장을 찍어 드셨다. 나는 흘러가는 물살을 바라보았다. 강은 맑고 투명했다.
강의 주변은 너른 모래사장이 우두산 옆에서 삼악산 아래까지 이어졌다.
강옆에는 변변한 둑이 없었다. 강이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강물까지 한참을 모래를 밟으며 걸어야 했다. 여름엔 수영나온 사람들, 빨래를 하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비누가 귀하던 때였다. 모래 사장 한 가운데는 아주 큰 검은 드럼통에 양잿물을 넣고 장작으로 불을 지펴서 빨래를 삶아주는 장사꾼이 있었다.
그리고 의암댐이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그 댐이 도시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는지 사람들은 몰랐다. 알았더라도 감히 군사정부의 개발계획에 싫다는 의견을 내 놓지 못했으리라. 우선 네 개의 강은 가운데 섬을 만들어 놓고 하나로 합쳐졌다. 물이 점점 차 올랐다. 시에서는 서둘러 둑을 만들었다. 그 공사와 함께 강의 자갈밭과 모래사장이 없어졌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차츰 무엇을 잃어버린 다는 생각을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물이 고여서 썩기 시작했다. 조상 대대로 넘게 흘렀을 맑은 물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것이다. 봄, 가을 아침이면 안개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낮 열두시가 되어도 걷히지 않는 지독한 안개에 사람들은 갇혀버렸다.
어쨌든 공지천은 너른 호수가 되었다. 겨울이면 꽁꽁 얼어 전국에서 가장 넓은 빙판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스케이트를 매고 공지천으로 모여 들었다. 덕분에 스케이트를 파는 체육사들이 호황을 누렸다.
전기가 잘 들어오지 않아 집집 마다 예비로 호롱불이 있었다. 내 또래 아이들은 소주 댓병에 석유를 사러 심부름을 다녔다. 소주 댓병은 변변한 반찬이 없던 시절 간장을 사오는 데도 사용되었다.
둥근 탐지기 같은 것을 땅에 대고 귀에다 무엇을 꽂고 열심히 귀 기울이는 사람은 고물 장수였다. 가슴에 청진기를 대듯 땅위를 조심스럽게 둥근판을 움직이던 그가 갑자기 멈추면 지켜보던 우리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장비를 내려놓고 삽으로 열심히 땅을 팠다. 그러면 요술처럼 땅 속에 묻혀 있던 쇠붙이가 나왔다. 한 번은 철모가 나왔다.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가 파낸 철모 안에 해골이 함께 따라 나왔다. 우리는 다시는 그 사람을 따라 다니지 않았다.
대부분 아이들은 세수도 변변히 하지 못해 불결했다. 목욕탕에는 어쩌다 추석이나 설날 때나 갔다. 대부분 집의 수돗가나 펌프에서 해결했다. 겨울에는 부엌에서 엄마가 큰 다라에 물을 따뜻하게 데워서 씻어 주었다.
그러나 워낙 씻지 않고, 밖에서 뛰어 놀았으므로 겨울에는 대부분 손들이 텄다. 더러 동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면 담배 잎을 푼 물에 손을 담갔다. 옷 소매는 흘러내린 코를 연실 닦아냈기 때문에 검게 번들거렸다.
그것은 서로가 같은 입장이었으므로 누구도 그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오히려 말끔한 아이가 놀림감이 되었다.
"서울 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고기. "
우리는 그를 향해 어깨동무를 하고 합창을 하며 놀려주었을 정도다.
서울은 가까이 있었다. 서울로 가는 경춘선 기차가 있었다. 막차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기차 역에서 가끔 기적 소리가 낮은 도시를 음험하게 감싸 앉았다.
오후 6시가 되면 미군부대에서 하기식이 있었다. 성조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높은 국기봉에서 내려왔다. 미군 성조기는 깨끗했고, 우리 국기는 낡고 색이 바랬다. 빠른 금관악기 소리에 이어 실제 대포가 터졌다. 비해서 밤 10시에는 다시 부대에서 취침을 알리는 금관악기 소리가 도시에 낮게 울려 퍼졌다.
서울 가는 버스는 삼용여객과 강원운수였다. 서울은 춘천 사람 모두에게 동경의 세계였다.
왕복 2차선이었고, 의암댐을 지나는 길은 경관이 좋았지만 아슬아슬한 절벽으로 위험했다. 가끔 버스가 의암호로 빠지는 추락사고가 발생했다.
낮에도 시내 한복판을 군용차량들이 한 참을 줄지어 지나갔다.
공장이라야 소양강 다리 건너 잠사 공장, 효자동 삼거리의 제지 공장이 전부였다.
생산이 없는 도시의 발전은 더뎠다. 그러더니 효자동 부속초등학교 앞에 거대한 구조물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곳에 무엇이 만들어지는 지 몰랐다. 몇 해를 두고 완공된 건물이 강원도 실내 체육관이었다.
극장도 많았다. 도청 아래 제일극장, 서부시장에 신도극장, 시청 옆의 소양극장, 중앙시장 안의 중앙극장, 명동에 문화극장, 새로 만들어진 남부시장에 남부극장, 그리고 소양로의 동보극장은 이전해서 현재의 육림극장이 되었다.
봉의산 동쪽에는 성심여대가 있었다. 그곳은 춘천 시민과 별개의 세계가 들어와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다. 금색의 그 건물은 산중턱에 단아하고 우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아직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마지막 중학교 입시제도에 있었다. 두꺼운 동아전과와 수련장을 거듭 풀었다. 방과 후 보충수업이 있었다. 체력장 연습도 해야 했다. 어두워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학교에 등교할 때면 확성기에서 미군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운동장에서 놀 때는 동요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들은 참 곱게 귓가를 애무했다.
내 주위 친구들은 함께 춘천 중학교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알았다. 입학시험도 치루기 전에 "우뚝솟은 봉의산 백두산의 정기"로 시작하는 그 학교 교가를 부르고 다닐 정도였다.
어느 날 늦게 귀가하신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새로 생긴 00중학교가 제일 좋단다."
그 학교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동편 숲에 노랗게, 봄이면 시내의 여기 저기 온통 환한 세상으로 피어나는 춘천시화(市花)인 개나리꽃처럼, 설레는 꿈처럼, 자리잡고있었다. 해서 바라보는 것조차 눈이 부셨다.
첫댓글 ㅎㅎㅎㅎ ...그렇지 춘천. 바라보는 것조차 눈이 부셨지. 효자 산 10번지
호반의도시,,,너무 적나라하게 표현했어여, 그중학교 역사가 너무 짧았지여...
사창고개 호빵 할머니/근로자식당 짜장면 (지금 곱배기보다 더많았지?)/간접 이수근 환영은 안했나..도청언덕에서......ㅎㅎㅎ..누굴까????
규리는 어쩜 이리 기억력이 좋으실까!! ^^ 그기다 표현력까지.. 문학소녀가 연상되는구나. 혹시 글쓰는 일에 종사하는걸까? 잘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