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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고질(煙霞痼疾) 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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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유게시판 스크랩 백제를 찾아서[공주-부여 여행기]
월지 추천 0 조회 76 07.10.17 23:20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2007년 10월 13일.

새벽 5시 30분쯤에 눈을 떴다.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이것저것 챙겨서 

집을 나와 경부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이번 여정(旅程)은 공주(公州)와 부여(夫餘)였다.

집사람의 말에 의하면 초등학교 4학년인 딸아이의

교과과정에 백제(百濟)의 역사(歷史)가 나온단다.


여름휴가를 제외하고

1년에 2~3차례의 가벼운 가족여행을

계산하고 있던 터라 순순히 응해 주었다.


경산휴게소에서 가볍게 아침식사를 하고

회덕 분기점에서 호남선으로 갈아탔다가

유성 나들목에서 국도로 빠져나왔다. 

 

 

 

 

 


오전 10시 30분.

계룡산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에서 동학사까지는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울창한 숲 가운데로 길은 이어졌고

길가를 따라 계곡이 운치 있게 흘렀다.

 

 

 


통도사나 불국사, 범어사 같은 대찰(大刹)에 익숙한 탓일까. 

막상 눈앞에 펼쳐진 동학사는 당우(堂宇)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아담한 대웅전과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전각(殿閣) 몇 채가 전부였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에

햇밤과 호두를 조금 사고 공주로 향했다.

 


공주시내로 들어가기 직전

국도에 바로 연결되어 있는 석장리 유적지에 들렀다.

금강(錦江)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석장리 유적지는

전기, 중기, 후기의 구석기 유물이 모두 나왔고

약 10여개의 문화층이 발굴된 것으로 배웠다.

 


둔치에 넓게 조성된 잔디밭에는 몇 채의 움막이 섰고

교회에서 단체로 소풍을 나온 듯한 아이들이 잔디밭을 메우고 있었다.

 


박물관 안에는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강가의 막돌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 뗀석기[打製石器]에서부터

정교하게 갈아 만든 간석기[磨製石器]까지

온갖 형태의 돌로 된 도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험에 대비해 무작정 달달 외워야 했던

그 박제(剝製)된 지식(知識)을 딸아이에게 전해주기에는

시간과 감흥이 모두 모자랐다.


공주시내로 접어들자

백제문화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거리 곳곳에 걸렸고

그 때문인 듯 이 조그만 소도시는 몰려든 차들로 몸살을 앓았다.

 

 


공산성 입구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공산성(公山城)은 백제문화제 행사로 시끌벅적하였다.

주문(主門) 격인 금서루(錦西樓) 양쪽에는

백제군으로 분장한 수병(戍兵)까지 세워놓았다.  


백제의 제21대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은

고구려의 첩자인 도림(道林)의 꾐에 빠져 재정을 낭비하고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하여 백제 내부의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결국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을 받아

도읍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한성(漢城)을 빼앗기고 전사(戰死)하였다. 


이렇게 되자 개로왕의 아들인 문중왕(文周王)은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로 옮겼는데

이 공산성은 538년 성왕이 부여(夫餘)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 도읍지인 공주(公州)를 수호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중심 산성이었다.

 

 


공산성은 동서로 길게 이어진 타원형으로 생겼는데

북쪽이 움푹 꺼져있어 만하루(挽河樓) 너머로 금강과 연결되어 있었다.

금서루에서 오른쪽 성벽을 따라 얼마쯤 올라가자

이괄의 난을 피해 6일간 이곳에 머문 인조(仁祖)의 일화와 관련이 있는 

쌍수정(雙樹亭)과 그 사적비(史蹟碑)가 나왔다.  

 

 


성벽 위로 난 오솔길을 계속 따라가자

남문(南門: 鎭南樓)과 동문(東門)이 잇달아 나왔다.

 

 


성벽 안쪽으로 들어오자

당시 성내에 주둔한 군대를 지휘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문루인

광복루[光復樓: 원래는 웅심각(雄心閣)이라 했던 것을 김구, 이시영 등이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광복루로 개칭하였다고 한다]와 왕과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쓰인

임류각(臨流閣)이 나왔다.

 

 

 


다시 북동쪽 성벽을 따라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금강이 보이고 강과 거의 맞닿은 지점에

영은사(靈隱寺)와 만하루(挽河樓)가 나왔다.

 


영은사와 만하루 사이에는

수구(水口)와 연지(蓮池)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 연지의 물이 성안의 용수(用水)로 사용된 듯하다.

 


다시 성벽을 따라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가자

북문(北門)인 공북루(拱北樓)가 나왔다.


공북루에는 백제문화제 행사의 일환으로

백제촌이 조성되어 갖가지 체험행사가 펼쳐졌고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공짜로 금관(金冠)을 만들어주는 코너가 딸아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코너는 특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듯 길게 줄이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바쁜 일정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제 엄마로부터 내일 부여에 가서

저 행사가 있으면 꼭 금관을 씌어 줄 것이라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딸아이는 그 집착에서 놓여났다. 

 

 


공산성을 벗어나 공주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 앞마당에는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비보이들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비보이 공연은 물론이고

박물관 관람도 무엇을 봤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건성이었다.

 


딸아이와 집사람은

급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사이 딸아이의 얼굴에 페이스페인팅을 할 만큼 태평이었다.

박물관을 나서니 벌써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다.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으로 갔다.

고분은 완만한 산비탈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부드러운 선들은 천년의 세월을 인 채 하늘과 맞닿아 있었고

그 사이로 자줏빛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막상 무령왕릉에 도착하니 그 입구는 폐쇄되어 있었고

다만 그 아래쪽에 실물과 똑 같은 크기의 모조 왕릉이 조성되어 있었다.

고분을 모두 둘러보고 나오니 사방은 완전히 어둠에 젖어 있었다.


차를 몰고 어둠속을 달려 부여로 갔다.

시내 곳곳을 둘러보았으나 구미를 당기게 하는 식당이나

시설이 좋아 보이는 모텔은 눈에 띄지 않았다.


굳이 부여시내에서

잠을 자야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아

서해바다와 접한 서천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괜찮은 음식점이 있을까

차창 밖을 유심히 살폈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막상 서천 읍내에 들어서니

이건 완전히 시골 깡촌이었고

눈에 띄는 몇 개의 모텔은

울산 시내의 허름한 여관 수준보다 못해 보였다.


내친 김에 장항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장흥 또한 허허벌판에 띄엄띄엄 공장만 눈에 띄었고

시내라고 들어가 봤지만 서천읍내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결국 금강 하구언을 지나 군산까지 내려갔다.

시내로 들어서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가

마침내 울긋불긋한 네온사인이 왕창 모여 있는 곳을 찾아냈다.

현란한 네온의 불빛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정확한 지명은 모르겠지만

군산시내에서는 제법 유명한 유흥가인 듯

고급술집과 모텔이 밀집해 있었다.

 


늦게까지 문을 연 몇 안되는 식당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가니 저녁 9시 30분이었다.

백반 정식을 시키니 청국장과 동태찌개에다 반찬까지 푸짐하였다.

역시 몇 시간을 헤맨 보람이 있었다.

허기가 져 급하게 찌개국물을 떠먹다보니 입천장을 홀라당 데었다. 


식사를 끝내고 나와

근처에서 제일 삐까번쩍해 보이는 모텔로 들어갔다.

그러나 겉모습과는 내부시설은 별로였다.


대충 씻고 지도를 펼쳐

내일의 일정을 가름하고 나니

12시가 넘어 있었다.


2007년 10월 14일.

아침 8시에 눈을 떴다.

서둘러 씻고 8시 30분쯤 모텔을 나섰다.

 


해안도로를 따라

어제 밤에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오는데

월명공원이라는 팻말이 눈에 띄었다.

 

 

 

 

 


월명공원은 야트막한 둔덕이었고

몇 개의 기념물이 세워져 있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군산 앞바다가

어렴풋하게 내려다 보였다.


수박 겉핥기로 시내를 대충 일별하고

군산을 빠져나와 금강을 끼고 이어진 도로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강은 완만하고 유장하게 이어졌고

들판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고 기름졌다.

 

 

어릴 적부터 산만보고

자란 눈에 비친 넓은 들판은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시원함을 주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나그네의 눈이 아니라

이 땅에 붙박고 사는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저 넓은 들판은 극소수의 지주가 대다수의 소작농을 착취했던

한 맺힌 땅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고대와 중세의 찬란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여 축적한

경제적 토대를 바탕으로 꽃피운 것이리라.


이국적인 풍경에 눈을 주며

이 땅에 얽힌 착취와 수탈의 역사를 되씹는 동안

차는 강경읍에 도착하였다. 

 

 


강경읍내 곳곳은 젓갈 가게가 즐비하였다.

거기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발효젓갈축제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특색 있는 식당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읍내를 몇 바퀴나 돌다가 결국 강경역 앞에 있는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늦은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강경역에서 파는

몇 가지의 젓갈을 사고 강경읍을 빠져나오니 12시였다.

곧바로 국도를 타고 부여로 향했다.

 

 


부여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들른 곳은 부소산성(扶蘇山城).

538년 성왕이 웅진(熊津)에서 부여(夫餘)로

도읍(都邑)을 옮길 때를 전후해 축조(築造)되었다 한다.

 


성문인 사비문(泗沘門)을 지나자 나오는 것은 삼충사(三忠祠).

백제의 세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을 모신 사당(祠堂)이었다.

세분 모두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쓰러져간 분들이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인가.

흐르는 시간 앞에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삶의 유한(有限)함과 인생(人生)의 허망(虛妄)함.

역사(歷史)에 이름을 남겨 후세(後世)에 길이 기억(記憶)되게 함으로써

그 유한함과 허망함을 극복하려는 유교적 사유. 


모두들 허울뿐인 감투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허명(虛名)이라도

서로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면

개명(開明)한 21세기를 사는 우리 역시 이 같은 사유방식(思惟方式)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삼충사를 지나자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곳이라는 영일루(迎日樓).

군량미를 보관했던 창고의 부지로 추정되는 군창지(軍倉址).

당시 내무반 막사 터로 보이는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가 잇달아 나왔다.


수혈주거지 앞에 이르렀을 때

우리 앞에 외국인 세 명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 중에 한명이 하얗고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딸아이가 ‘와! 산타클로스다’라고 했다.

내가 영어로 그들에게 딸아이의 이야기를 전하니,

그 수염을 기른 외국인은 허허 웃으면서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던 친구가

수염 기른 그 외국인의 배를 문지르며

“산타크로스는 배가 불룩하게 나와야 하는데,

이 친구는 보다시피 배가 전혀 나오지 않았으니

산타크로스가 아니다“고 했다.


내가 외국인들과 웃으면서 영어로 막 이야기하고

그 내용을 다시 통역까지 해주자 딸아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 짜식. 이제 왜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을 거다. ㅋㅋ -

 

 

 


다시 얼마를 더 가

반월루(半月樓)에 오르니

부여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사자루(泗玼樓)는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누각(樓閣)이었다.

백제시대에는 이곳에 망대(望臺)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주위에 수목이 우거져 조망(眺望)은 시원치 않았다.

 


사자루에서 북쪽 사면으로 내려오자

제법 가파른 비탈길이 나오고 그 중턱에 바위절벽이 박혀 있었다.

낙화암(洛花巖)과 백화정(百花亭)이었다.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패망하자

이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꽃처럼 몸을 날렸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러나 당시의 인구나 경제의 규모로 미루어 볼 때

삼천궁녀는 터무니없는 과장으로 보인다.

 


어쨌든 고대(古代)에 전쟁에서의 패배는

여자를 물권(物權)의 객체(客體)로 전락시켰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백화정에 올라서자

눈 아래로 백마강이 유유히 흐르고

그 물위로 유람선이 떠 있었다.

 


낙화암에서 다시 얼마쯤 더 내려오자

고란사(皐蘭寺)가 바위절벽에 제비집처럼 매달려 있었다.

 

 


대웅전 뒤쪽에는 바위틈에서 물이 흘러나온다는

고란정(皐蘭井)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한 잔을 마시면 3년은 젊어진다는 전설이 있었다.

다시 20대로 돌아가기 위해 4잔을 연거푸 마셨으나

배만 불러올 뿐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가로 내려오자 유람선 선착장이었다.

 딸아이는 어떻게 해서든 유람선을 탈 욕심으로

고란사에도 들리지 않고 우리보다 먼저 선착장에 내려와 있었다.

 


유람선을 타고 돌아본 낙화암에는

서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운 햇살이 깃들어 있었다.

꽃처럼 떨어져 내리는 궁녀들의 환영(幻影)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유람선에서 내려 다시 부소산성 입구까지 걸었다. 

거기서 다시 세워두었던 차를 타고 정림사지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은 건물만 번듯할 뿐 별 볼거리는 없었다. 

그러나 넓은 잔디밭 위에 푸른 하늘을 이고 선 석탑은

천년의 세월을 버텨온 고색창연(古色蒼然)함으로 서늘하였다.


딸아이는 그 사이

박물관 앞마당에 개설된 백제촌 체험마당에서

그토록 열망하던 그 공짜 금관(金冠)을 기어코 얻어걸렸다.

오! 그 욕망의 집요함이여...,

 

 


정림사지를 나와 바로 옆에 있는 부여박물관으로 갔다.

부여박물관에는 문외한의 눈으로 보아도 백제문화의 정수라 할 만한

훌륭한 문화재들을 많이 소장되어 있는 것 같았다.

 

 

 


마제석검,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등

청동기 시대의 유물뿐만 아니라 일부는 모조품이기는 하지만

교과서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백제금동대향로, 칠지도,

마애삼존불, 사택지적비, 산경문전 등이 모두 전시되어 있었다.


마제석검은 실제 사용한 칼이 아니라

순전히 무덤에 묻기 위해 만든 부장품용이며,

비파형 동검은 원래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세형동검으로 발전하였다는 따위

교과서적 지식을 열심히 설명하였지만,

딸아이가 얼마나 흡수하였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이 아이가 때가 되어

이 같은 지식을 교과서를 통해 직접 배우게 될 때

언젠가 이 같은 유물에 대해 직접 보고 들은 적이 있다는

기억(記憶)을 되살려 내는 것만으로도

나처럼 생짜배기로 외운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짐작으로 위안을 삼았다. 


생각해보면, 단순히 지식을 전수한다는 것이

 들이는 노력과 비용에 비해 그 결실은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그러나 인간이 배운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배움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는 생각의 훈련과

그 결과로서 사고의 계발과 감수성의 확장의 체득이 아니겠는가.


사고력(思考力)과 감수성(感受性)의 체득(體得)!

이것이야말로 한 사람의 삶의 질(質)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要因)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사려 깊은 부모가

자식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최고의 자산(資産)이 아닐런지.


사실 천리가 넘는 이번 여정(旅程)은

모호하고 추상적이지만 내 나름대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로 이 배움의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 진행된 것이었다.


그나저나 유람선과 금관 따위

눈에 보이는 흥밋거리에만 유별난 집착을 보이는

저 아이가 언제쯤에나 이 아비의 숨은 뜻을 알아먹을까...,

 


부여박물관을 뒤로 하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여정.

궁남지(宮南池)로 향했다.

 


궁남지는 백제 별궁(別宮)에 딸린 연못이라고 하는데

신라의 선화공주(善花公主)를 얻기 위해 서동요(薯童謠)를 지은

무왕(武王)의 탄생설화(誕生說話)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사방으로 온통 수양버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네모꼴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못 한가운데에 둥근 인공섬이 만들어지고

그 위로 포룡정(抱龍亭)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연못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서로 뺏고 뺏기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로맨스와 꽃향기 가득한 비원(秘苑)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 기적(奇蹟)처럼 느껴졌다.

 


궁남지를 벗어나

그를 에워싼 넓은 연지(蓮池)를 돌아보니

자줏빛 낙조(落照)가 내려앉고 있었다.


국도를 타고 오다

서대전 나들목에서 다시 경부선으로 갈아탔다.

밤길을 내달려 울산에 도착하니 밤 10시 30분이었고,

몸은 피로에 절어 녹초가 되어 있었다.


2007년 10월 14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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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7.10.17 23:28

    첫댓글 사진도 올리지 않은 글을 읽고 댓글을 남겨주신 한돌님, 이화님께 죄송합니다. 일일이 그림을 옮겨 붙이는 것이 귀찮아 제 블로그에 올린 글을 스크랩하고 기존의 글을 지우는 바람에 님들의 댓글까지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 07.10.17 23:45

    월지님은 사진 욕심 안부리셔도 됩니다. 글로도 충분하거든요 ^^* 입천장 데어서 매운 것도 못먹고 어떡해요 ㅎㅎㅎ

  • 07.10.18 12:23

    음식에 양념을 첨가하면 입맛을 돋우듯이 글 외적으로 약간의 화장을 하니 훨씬 이해가 쉽네요.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유적지 주차장은 유적지로 부터 멀수록 좋다는 견해입니다. 무령왕릉을, 공산성을 보전하는 것이 결코 백제문화를 보전하는 것은 아니니깐요.

  • 07.10.18 21:18

    1박2일간의 여정을 고스란히 잘 담아 놓으셨네요...정말 존경합니다(자랑스런 아버지 또한 가족이란 단어를 가슴에 팍 새긴 멋진남자) 후일 예쁜딸이 일취월장하여 영어든 중국어든 유창하게 구사하는 멋있는 숙녀로 변하겠지요.

  • 07.10.19 05:02

    이 시대 아빠들 참 할일도 만치...그래도 먼훗날 딸래미가 이글과 사진을 보면 어떤 생각이 날까?? ?월지님, 엄청난 유산을 미리 준비해 두셨구먼....

  • 07.10.24 20:19

    유적지 관람한다고 돌아다니기 보다 나도 혜수의 관심처럼 머리에 금관 얹어 사진 찍어보고,비보이 공연이나 보고,유람선 타고,페이스페인팅하고.....그런게 훨~ 낫겠다.....난 조금씩 비춰지는 혜수의 이야기에만 관심 쏠렸습니다."혜수야 ^^안녕~! 너 비보이 공연 못본거 후회스러울건데....그거 엄청 재미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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