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원 조씨(太原趙氏)

태원(太原)은 중국(中國) 산서성(山西省)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태원분지의 중심지이며, 근대공업과 상업이 발달하였고, 사적(史蹟)이 많은 곳이다.

태원 조씨(太原趙氏)의 시조(始祖)는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장사랑(將士郞)에 오른 조 만(趙 萬)으로 전하고 있으나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선계(先系)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태원조씨족보(太原趙氏族譜)」에는 만(萬)이 난을 피하여

함경도 북청지방(咸鏡道北靑地方)에 가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본관(本貫)을 태원(太原)으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만(萬)의 아들 을생(乙生)이 장사랑(將仕郞)에,

손자(孫子) 경종(敬宗)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으며,

경종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희령(熙寧)이 참봉(參奉)을 지냈고,

막내 희형(熙亨)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러

명문인 태원 조씨(太原趙氏)를 유명하게 하였다.

어모장군(禦侮將軍) 세운(世雲)은 참봉을 지낸 희령(熙寧)의 아들이며,

동생 세복(世福)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참봉(參奉)을 지낸 옥룡(玉龍)·윤헌(允憲)·호상(豪尙)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태원 조씨(太原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49가구, 2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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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 조씨(平山趙氏)

평산(平山)은 황해도(黃海道)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화실(多和悉)이었는데

통일신라(統一新羅)의 경덕왕(景德王)이 영풍(永豊)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에 평주(平州)로 하였고 1272년(원종 13)에 평산으로 바꿔 도호부(都護府)로 승격,

고종(高宗) 때 군(郡)이 되었다.

평산 조씨(平山趙氏)의 선계(先系)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며,

시조(始祖) 조응선(趙應善)은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왕에게 직간(直諫)하다가 평산(平山)으로 유배(流配)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계대(系代)를 알 수 없으므로

후손들은 시조의 배소지인 평산(平山)을 본관(本貫)으로 삼고

조선조(朝鮮朝)에 참봉(參奉)을 지낸 조충백(趙忠白)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충백(忠白)의 아들 복린(馥麟)이 중추부사(中樞副使)를 지냈고,

후손 발(發)의 아들 호문(好問)은

1480년(성종 1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그 후 평산 조씨는 많은 학자(學者)를 배출하여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산조씨(平山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1,285가구, 5,543명이 살고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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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조씨(平壤趙氏)

평양(平壤)은 평안남도 남서부에 위치한 4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로서

역사상 왕조에 따라 왕검성(王檢城), 기성(箕城), 낙랑(樂浪), 서경(西京), 호경(鎬京),

유경(柳京) 등으로 불리웠고,

단군(檀君), 기자(箕子), 위만(衛滿)의 3조선과 고구려의 도읍이기도 했던 곳이다.

고려 태조때 서 경(西京)이라 부르다가 광종때 서도(西都)로 개칭되었으며

목종때 와서는 호경(鎬京)이라 하였으나 1369년(공민왕 18)에 만호부(萬戶府)를 두고

후에 평양부(平壤府)로 개칭하였고,

1895년(고종 32) 전국을 13도로 분할함에 따라 평안남도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평양 조씨(平壤趙氏)의 시조 조 춘(趙 椿)은

고려조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에 이르렀고

중국으로 건너가 남송(南宋)을 도와 금나라를 토평한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그의 현손 인규(仁規)는 고려조에 제교(諸校)가 되고 이어서 장군(將軍)에 오른 뒤

성절사로 원나라에 30여 차례나 사신(使臣)으로 왕래하였다.

그의 둘째 딸이 충선왕비가 되자

국구(國舅)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금자광록대부(金紫光綠大夫)에 올라

수태위판중서문하이병부사(守太尉判中 書門下吏兵部事)·태자태사(太子太師)·

상장군(上將軍)에 오르고 평양부원군(平壤部院君)에 봉해져서

충렬왕의 명으로 선대의 본관인 상원(詳原)을

평양(平壤)으로 이적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인규(仁規)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 서(瑞)가 충렬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사(三司使)에 이르렀고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으며,

둘째 아들 연(璉)과 셋째 아들 연수(延壽)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넷째 아들 의선(義旋)은 불문출가(佛門出家)하였고,

다섯째 아들 위(瑋)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연(璉)의 손자 준(浚)은 고려 우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 안렴사(江原道按廉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고,

대호군(大護軍), 전법판서(典法判書) 등을 거쳐

최 영(崔 瑩)장군 휘하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에 책록되었다.

그 후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개국일등공신에 올라

제1차 왕자의 난 때 다시 정사일등공신(定社一等功臣)으로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태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특히 준은 시문에 탁월하여 하 윤(河 崙)등과 함께

「경제육전(經濟六典)」과「송당집(松堂集)」을 집필하여,

고려의 절신(節臣)인 동생 견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견은 어려서 중이 되었다가 환속하여 벼슬이 안렴사(案廉使)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경기도 과천(果川) 청계산(淸溪山)에 은거했다.

이태조(李太祖)가 그에게 개국공신을 책록하고 친히 찾아갔으나

불사이군의 충절로 끝내 불취했다.


그외 태종(太宗)의 동서로서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진 박(璞)은

정사공신(定社功臣)과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錄勳)되고,

대제학(大提學),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했다.

명종때의 학자 형제인 성(晟)과 욱(昱)은

호(瑚)의 아들로 지평(砥平)의 운계서원에 함께 제향되었다.

이밖에 태종의 사위였던 대임(大臨)과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낸 후

학문에만 전념한 수(須), 정조(正祖)때 무신으로 서예에 뛰어났던 심태(心泰) 등이

명문 평양 조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양조씨는 남한에 총 8,451가구, 35,02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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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양조씨(豊壤趙氏)
 
[유래]
시조 조맹(趙孟)의 원래 이름은 바우(岩)이다.
그는 풍양현(현 남양주군 진건면 송능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천마산 기슭 바위동굴에 은둔해 살았던 도인이었다.

당시 신라를 정벌하던 왕건은 영해지방 전투에서 신라군에 참패를당하여 휘하의 장군들을

모아놓고 중지를 모았을때 한결같은 대답은

풍양현에 숨어 사는 바우도인의 지략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이에 왕건이 그를 찾으니 당시 나이가 70세이었다.

이때부터 신라정벌의 길에 올라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고려통일을 이루자 태조 왕건이 맹으로 이름을 내렸다.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이르렀고,

지금도 천마산에는 왕건을 만났다는 암굴(巖窟)이 있으며

현성암(見聖庵)을 세워 그를 수호하여 온다.

[가문의번영]
고려때의 조운걸은 1357년(공민왕 6년)에 문과급제하고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쪽에 피난하는 왕을 시종하여 2등공신에 올랐고 그후 3도안찰사를 지내고

1374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상주에 은거하고

출입할 때는 소를 타고 다니면서 "기우도(騎牛圖)"등의 작품을 남겼다.

풍양조씨 가문이 세도의 기반을 이룬것은

조선 숙종이후. 상신 7명, 대제학 4명, 공신 7명, 장신 7명을 냈다.
숙종 때 조도보는 조상경, 조상강, 조상기 등 아들 3 형제와 손자 8명이 있었는데

이들중 5명이 문과에 급제했다.

이들이 영조, 정조시대에 풍양조씨의 세력 기반을 다진 주역들이다.


학당 조상강은 영조때 병조판서를 네차례, 이조판서를 다섯차례 지냈다.

그의 증손자 조만영(趙萬永)은

순조의 외할아버지로 이때부터 풍양조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영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조엄은 조만영의 할아버지이다.


그밖에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 효종 때 좌의정에 올랐던 조익(趙翼),

숙종 때의 우의정 조상우(趙相愚), 영조 때의 좌의정 조문명(趙文命),

영조 때의 영의정 조현명(趙顯命), 영조 때의 우의정 조재호(趙載浩) 등이 회양공파이다.

현종 때 대제학을 지낸 조복양(趙復陽), 왜정때 상주에서 궐기하여 싸우다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순국한 조동범 등이 있으며,

현재 활약중인 바둑계의 천재기사 조치훈과

조순 전부총리도 이 가문에서 배출된 인물이다.

[계 파]
시조 조맹의 후대에서 조지린(趙之藺)을 중조(中祖)로 하는

전직공파(殿直公派)와 조신혁(趙臣赫)을 중조로 하는

평장공파(平章公派)로 크게 나누어지고 이들을 각각 1세조로하고 있다.
이 2파는 뒤에 다시 분파되는데,

전직공파는 호군공파(護軍公派),회양공파(淮陽公派),금주공파(錦州公派)의 3파로 나뉘고,

평장공파는 남원공파(南原公派)를 이루어 현재의 풍양조씨는 이4파 아래 총망라되어있다.
이 가운데 회양공파가 조선시대에 상신 6명, 문형 3명을 비롯하여

판서급이 30여 명이나 배출되어 벼슬을 도맡다시피 하였고 인구도 과반수를 차지한다.


이 파는 나중에 한평군파(漢平君派 : 이른바 노론집)와

청교파(靑橋派 : 이른바 소론집)로 나누어지는데,

한평군파는 조선 헌종 때 세도정치까지 폈던 집안으로 풍양조씨의 주축이 되며,

조선 후기에는 안동김씨와 쌍벽을 이루었다. 즉, 조만영의 딸이 문조(익종)와 결혼을 하고,

문조의 아들(조만영의 외손자)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1839년(헌종 5년)에는 조병현(趙秉鉉)이 형조판서가 되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대규모의 탄압을 하여 기해교난(己亥敎難)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집성촌]
경북 상주군 낙동면 승곡리.
마을의 대부분이 호군공파 후손들로 20여대를 이어 살고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자리잡은 퇴색한 단청과 이끼낀 기와집이 3백년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마을 한가운데 낮은 야산 밑에 자리한 양진당(養眞堂)은

난중일기를 쓴 조청이 여생을 보냈던 99칸 기와집으로 호군공파 후손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1982년에 문중에서는 이곳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로 지정받고 보수정화 작업을 시작했다.

[본관지] 풍양 : 현재의 남양주군 진건면 송능리의 옛 이름
[기 타]
[ 연락처 ] 조봉구 씨 : 02-392-4281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09,433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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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조씨(河東趙氏)

시조: 조관(趙琯)

<本貫地>
하동(河東)은 본래 신라의 한다사군(韓多沙郡)이다.

주요 성씨로 趙, 鄭, 董씨 등이 있었다.

<氏族 개요>
시조 조관(趙琯)은 고려조에 검교금오위대장군(檢校金吾衛大將軍)을 역임했다고 한다.
전해오는 문헌이 없어 세계(世系)나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으며

다만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동(河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1985년 현재 전체인구 10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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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 조씨(漢陽趙氏)

한양조씨의 시조(始祖) 조지수(趙之壽)는

덕원부 용진현(德源府龍津縣)에 세거해온 사족의 후예로

고려조에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 후 후손들은 조선이 개국하자 한성(漢城)으로 이 거하여 가세가 크게 번창하였고,

많은 명신과 훈신·유현을 배출하였으므로 본관을 한양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그러나 한양 조씨는 지수(之壽)의 후손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인재의 계통과

총관을 지낸 휘의 계통으로 대별되어, 서로 계대를 다르게 하며 보첩도 따로 만들고 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휘(暉)의 아들 양기(良琪)가 1281년(충렬왕 7)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일본정벌에 참가했고

21세 때 합단의 침입을 대파한 공으로 원나라 세조로부터 금포와 옥대를 하사받았다.
양기의 아들 돈(暾)은 1356년(공민왕 5) 쌍성수복 작전 때 공을 세워 예빈경이 되고

이듬해 평양에 침입한 홍건적을 대파한 후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르고 1375년(우왕 1) 삼중대광으로 용성군(龍城君)으로 봉해졌다.

돈(暾)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벼슬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그 중 맏아들 인벽(仁壁)은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로 왜구를 토벌하였고

정화공주와 결혼하여 이성계의 매부가 되었으며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에 봉해졌다.

또한 판도판서(版圖判書) 인재(麟才)의 증손이자 판서 세진(世珍)의 아들인 영무(英茂)는

조선조에 개국삼등공신(開國三等功臣)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한산군에 봉해졌으며 1405년(태종 5) 우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를

겸임한 후 한산부원군에 진봉되어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조선조에 와서 한양 조씨의 가문을 더욱 빛낸 사림파의 영수 광조(光祖)는

개국공신 온(溫)의 현손으로 14세 때 어천도 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 원강(元綱)을 따라가 희천에 유배중인 김굉필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성리학 연구에 힘썼으며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역설했다.

중종 때 대사헌(大司憲)에 있으면서

신진사류인 30대의 소장학자들을 요직에 안배하는 한편,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는 등

과격한 개혁을 단행하여 마침내 훈구파의 반발을 야기시켜 남 곤·심 정 등이

주동한 기묘사화에 피화되어 능주(綾州)에 유배, 배소에서 죽음을 당했다.

율곡 이 이는 김굉필·조광조·정여창·이언적을 가리켜 <동방사현>이라 칭송하며

평생토록 숭배하였다 한다.

 

그 밖의 인물로는 중종 때 대사간(大司諫)·형조 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위한(緯韓)과 그의 동생으로 시문에 능한 찬한(纘韓)이 유명했다.

공근(公謹)은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위성공신에 오르고 한흥군에 봉해졌으며,

인조 때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고,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낸 경(絅)은

청백리에 녹선되어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글씨에도 뛰어나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

장령 중여의 아들 종저(宗著)는 사학·천문·산수·의학에까지 박통하여 문명을 날렸으며,

충정공 인옥(仁沃)의 아들 뇌( )는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내고 효행으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안평대군 일파로 몰려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한 순생(順生)과

그의 아들 명(銘), 시인 수삼(秀三), 화가로 이름난 중묵(重默) 등이 유명했는데,

수삼(秀三)은 현종 때 문장과 시로써 여섯 차례나 중국을 왕래하여 명성이 높았으며,

서예와 중국어에도 능통했다
그의 손자 중묵(重默)은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으며 희원 이한철과 더불어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졌다.

이렇게 조선조에서 세도를 떨친 한양 조씨는 근대에 와서도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나라와 가문을 위해 공헌했다.

독립투사인 맹선(孟善)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매국칠적을 죽이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평양(平壤)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했고

독립단을 조직하여 군사훈련에 힘써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인원(仁元)의 아들인 병옥(炳玉)은 대학생으로 한인회·흥사단 등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이 되자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경무부장(警務部長)으로 치안유지에 힘썼다.

그 후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으며,

1955년 민주국민당이 민주당으로 개편될 때 최고위원이 되어 야당을 영도했으며,

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신병으로 미국 육군병원에서 영면하였다.


저서로「민주주의와 나」·「나의 회고록」 등이 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청록파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지훈(芝薰)도 해방 후부터 6·25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문단의 선구자로 민족적 정서운동에 앞장섰으며,

종신토록 대학교단에서 문학을 피력하였고, 사회활동에 이바지함이 지대하여

후에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이 밖에도 많은 유명인사를 배출시킨 한양 조씨는 선현의 유지에 맥을 더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양 조씨는 남한에 총 64,881가구, 273,4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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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 조씨(橫城趙氏)

횡성(橫城)은 강원도(江原道) 남서부에 위치하는 지평으로,

고구려 때는 횡천현(橫川縣) 또는 어사매(於斯買)라 부르다가

신라 때에 황천(黃川)이라 고치고 삭주(朔州 : 춘천)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에 이르러 다시 횡천이라 일컫고 종전대로 삭주에 예속시켰다가,

후에 원주(原州)의 속현(屬縣)으로 하였고, 1389년(공양왕 1)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현감(縣監)을 두고,

1414년 횡천과 홍천이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횡성으로 개칭하였다.

1627년(인조 5)에 원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636년(인조 14) 다시 현이 되었고,

1760년(영조 36)에는 원주로부터 토포사(討浦使)가 이설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횡성군으로 개칭되었다.


횡성 조씨(橫城趙氏)의 시조(始祖) 조 익(趙 翌)은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첨(瞻)의 아들로

958년(고려 광종 9)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횡성(橫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익(翌)의 아들 승린(承藺)이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으며,

손자(孫子) 윤익(潤益)은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를,

증손(曾孫) 주조(周祚)는 중서승(中書丞)에 이르렀다.

영인(永仁)은정당문학(政黨文學)·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거쳐

개 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했다.

한편 영인의 아들 충(沖)은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

대사성(大司成)·한림학사(翰林學士)로 동지공거(同志貢擧)를 겸임하고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가 되어 수차에 걸친 거란군(渠丹軍)의 침입을 물리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충렬왕(忠烈王)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오른 변은 충(沖)의 손자이며,

평장사(平章事) 계순(季珣)의 아들로 동생 해(咳)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지근(支瑾)의 아들 무(茂)가 벼슬을 지내고 공(功)이 있어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으며,

후손 인(隣)은 부호군을 지냈다.

선조(宣祖) 때 학자(學者)로 이름난 목(穆)은

대춘(大椿)의 아들로 벼슬이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으나

청빈하여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일생을 학문(學問)에만 힘써

대학자(大學者)로 존경을 받았고 문장(文章)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외 인물로는 성립(誠立)이 공주목사(公州牧使)·대사간(大司諫)·수찬관(修撰官) 등을

역임했으며 식(湜)은 공조참의(工曹參議)·승정원 우승지(承政院右承旨) 등을 지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석동(錫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횡성조씨(橫城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1,106가구, 4,461명이 살고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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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양조씨(興陽趙氏)

시조: 조윤서(趙允瑞)

<本貫地>
흥양(興陽)은 전남 고흥군(高興郡)에 있던 지명으로

본래 장흥부(長興府) 고이부곡(高伊部曲)이다.
주요 성씨로 趙, 柳, 李, 張씨 등이 있었다.

<氏族 개요>
조윤서(趙允瑞)는 조벽(趙壁)의 아들로 조선조 명종4년 문과에 급제하여

온양군수(溫陽郡守)를 지냈다고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나와있다.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1985년 현재 전체인구 15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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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조씨 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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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조씨 역사자료[사적] 조씨(趙氏)성(姓)의 본관(本貫) !
아구할배 추천 0 조회 57 08.05.20 16:4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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