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학교 68명의 어린이와 함께 하는 부활 주일.
오랜 세월 동안 남편을 후원해 주시고 계시는 한인 중앙교회(남편이 중학교 때부터 출석하여 신학생이 되어 전도사로 처음 섬긴 교회입니다) 목사님과 사모님, 성도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계란 100개를 선물로 아침 일찍 남편을 통하여 보내 드렸습니다.
한국에서 오시는 분께 부탁을 드려서 부활절 계란 포장지를 한국에서 공수해 왔고, 예수님 그림이 그려진 포장지에 계란 100개를 포장하였습니다.
너무 작은 선물이지만, 이억 만리 떨어진 브라질에서 살아가시는 한인 분들께는 오래전 한국에서 부활 주일에 주고 받았던 계란의 추억이 떠올라 포장지를 열고 계란 껍질을 까서 드실 때 잠시라도 부활의 기쁨과 함께 어릴 적 교회의 추억을 소환해 보시라고 부활절 계란 포장지를 한국에서 공수해 왔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다소 멍청해 보이고 미련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의 사랑과 정성을 담기 위해 새벽 늦게까지 수작업으로 부활절 카드를 만들었고, 저는 3시간 죽은 듯 깊은 잠을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아침 식사로 나누어 줄 치즈빵 100개를 굽고, 소세지 231개를 양파와 파와 함께 볶았습니다.
1월~4월생 아이들에게 아직 생일 선물을 다 사주지 못했고, 돈이 생길 때마다 그 때 그 때 돈이 되는 만큼 생일이 지난 아이들의 선물을 구입해서 나누어 주는데, 감사하게도 이번주에는 생일 선물도 몇 개 구입을 할 수 있게 되어 생일 선물 포장을 해서 늦은 생일 선물을 주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니면 생일 선물을 받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이기에 늦은 생일 선물이지만 아이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목요일부터 아이들의 한인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먹고 자면서 지냈기에 밥을 해도 더 신경이 쓰여졌고, 갱년기 증상이 시작된 것인지 불구덩이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몸이 뜨거워 어쩔 줄을 모르다가 갑작스럽게 얼음물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추워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제 몸 때문에 참는다고 며칠간 많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유치원 때부터 아파서 쓰러져도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쓰러지고, 병원에 실려가도 병원에서 나오면 학교로 도로 돌아가는 억척이었습니다.
조퇴나 결석은 제 인생에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지요.
너무 아파서 학교에서 엄마를 부르면 엄마와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저는 학교로 데려다 달라고 해서 교실 바닥, 선생님 책상 옆에 담요 하나를 깔고 누워서 수업을 다 마치고 집에 오는 아이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남들보다 키가 많이 작아서 늘 1번이었고, 2번과도 한 뼘씩 차이가 나는 키가 아주 작은 1번의 아이였습니다.
부모님 말씀으로는 키가 작아서 유치원에 다닐 때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종아리까지 눈이 차는데도 허벅지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유치원에 혼자 우산을 쓰고 가고 아무리 아파도 단 하루도 유치원에 빠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저에게 조그만게 독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저는 가끔 할머니의 "독하다"는 표현을 떠올려 봅니다.
제가 예수님 안에서 독한 기질이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예수님 없이 독한 기질로 인생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겠습니까?
저의 그 독한 기질까지도 예수님은 선한 방법으로 선한 도구로 변화시켜 주시고 사용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사람의 눈과 기준으로는 아무리 형편없어 보이고, 한심해 보이고, 쓸모 없어 보이고, 판단과 정죄와 무시와 멸시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활의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부활의 능력이 그 사람을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 줍니다.
또, 부활의 예수님이 내 구주가 되어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고,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달라지고, 사람들을 인정하는 기준이 달라집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부활의 예수님이 내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부활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왜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요?
왜 영의 눈이 아닌 죄인된 육신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날마다 즐겨하며 살아갈까요?
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그들의 골수를 쪼개지 못하고, 말씀을 부적처럼 염주처럼 여길 뿐, 말씀이 삶이 되지는 못하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의 마음은 없고,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율법만 마음에 가득한 것일까요?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는 모든 교인들이 부활 주일을 종교행사로 간과하지 않고, 나를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처럼 내 십자가 죽음이 삶으로 내 실제가 되어 지기를 기도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일이 우리 삶의 전부가 되고 목적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을 거짓과 위선과 가식으로 모독하는 부활절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자아가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혀지고, 사나 죽으나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
나는 죽고 오직 내 안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내는 삶.
내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죄악에 물든 마음과 생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의 마음으로 품어주고 사랑해 주고 섬기기를 자원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는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해서 몇 번이나 교회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부활 주일 설교 말씀 중, Roberto 목사님께서 하신 아래의 말씀이 꼭 제 이야기 같았고, 저에게 맡겨 주신 이 아이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니 잊지 말라고 저에게 신신 당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모습 이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말씀에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실제가 되시어 우리를 이전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너지고 부서지고 산산조각나 버린 것만 같은 우리를 이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새 창조물로 변화시켜 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을 이루어 주십니다.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9-10)
다시 사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 사랑합니다!!
68명의 어린이들 중에 64명이 제가 4년 전부터 전도해 온 아이들입니다.
브라질 빈민촌 마약촌 난민촌 어린이들인데, 처음 이 아이들을 만났을 때는 모두가 다 영양실조에 걸려서 뼈만 남고, 피부병에 머리에 이가 득실거려서 늘 이 아이들과 살을 맞대고 지내는 저는 머리에 이를 옮기도 여러번입니다.
만나면 싸움 밖에 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었고, 마약과 알콜 중독 및 범죄자 부모 아래서 감옥을 수시로 드나드는 부모 밑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을 만나서 한시간 복음을 전하는데 45분은 싸우고 욕하고 머리채를 붙들고 이빨로 물고 각목들고 휘두르고 벽돌을 집어 던지고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옷이 없어서 한겨울에도 웃도리를 못 입은 아이들이 태반이었고, 신발이 없어서 맨발인 아이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잘해야 슬리퍼인데, 그 슬리퍼 한 짝은 발이 아닌 무기로 늘 한 손에 들고 있었지요.
욕 안하고 대화가 불가능했던 아이들이 이제는 성구 암송을 30개를 그 자리에서 줄줄줄 하고, 찬양이 입에 붙어 있는 아이들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이 일을 감히 누가 사람이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지요!!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