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詩南里
시남리는 남지읍의 북단에 위치한 법정리로 유어면에서 남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산에 부딪치며 서쪽으로 꺾여 든 낙동강이 사남리의 북쪽을 흐른다.
[호구총수]에 남곡면 청단촌(靑丹村)과 오항촌(烏項村), 신남촌(新南村) 등 3개촌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 구한 말 동리 폐합 때인 1910년에 하나로 합하여 지면서 신남리가 되었다.
시남은 본래 신남(新南)이었으므로 곧 새남으로 본다.
[新南]이나 [詩南] 이나 다 같이 [새남]의 차자인 것으로 그 뜻은 해뜨는 새벽 남쪽마을이라 할 것이다.
[南]은 앞을 말하기도 하고 남쪽을 가리키는 말이니 낙동강의 남쪽을 말한다고 본다.
오항촌의 오항은 지금도 이이목이라 불리고 있는데 시남 마을에서 북쪽으로 고개를 넘어서야 강가에 이르르는데 이 고개가 까마귀의 목이라 한다.
흔히 목(項)이라 불리는 곳은 그곳이 아니면 통과하기에 어려운 길목을 말하는데 그 중요로움이 6.25때 실증(實證)되었다.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이 구축되었을 때 유엔군은 공산군의 도하지점(渡河地點)으로 유어면의 마수원나루와 월하리 박진나루로 예상을 하였는데 공산군은 뜻밖에도 이 이이목나루로 도하하여 영산으로 나아가려했던 것이다.
청단촌은 시남리의 동편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장마면 신구리 미구와 남지읍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 시남(詩男)
[호구총수]에 신남(新南)이라 촌명이 기록되어 있음을 보아 오래된 지명은 신남으로 새남, 새벽이 열리는 마을이란 뜻으로 본다.
마을이 동향으로 있으니 어는 골짜기보다 먼저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으니 새빛, 새벽 마을인 것이다.
수개리의 북쪽으로 마을 동남쪽에는 유어를 경유하여 창녕현으로 가는 옛 한길이 있다.
전에는 75호였던 것이 지금은 41호이며, 처음에 경주 최씨가 살았다 하며, 지금은 성주 이씨, 김해 김씨, 김녕 김씨, 경주 최씨, 진양 강씨 등이 살고 있다.
경의재(景義齋 :성주이씨 봉선소)가 있다.
** 장승뱅이
시남 마을 입구로 전에 장승이 서 있었던 곳이라 장승백이라 부른다.
전에 방아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1호만이 살고 있다.
** 애양골(愛羊谷)
시남 마을 동편 입구로 성주 이씨 효열비각과 열녀비가 있는 일대를 지칭할 때 흔히 비각걸이라 한다.
어린 양의 형국이라서 애양곡이라 하였다.
** 이이목(烏項)
귀이목, 이목, 오목으로도 불리는데 시남 북쪽 강가에 있는 마으로 북향으로 인가가 형성되었다.
이 마을은 조선 중기에는 상당히 컸던 마을이라 [호구총수]에 오항촌(烏項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0여호 이상이 살았던 마을은 지금도 2,3호 뿐으로 마을터는 횡뎅그레 비어 버리고 인가가 띄엄띄엄 있을 뿐이다.
오여정(吾與亭)이 동편에 있다.
까마귀가 이곳에서 목을 잃은 형국이라 하여 이이목, 오항이라 하였다고 한다.
새끼 새가 자조(慈鳥)라 칭송하여 불리었던 새이다.
또 달에는 옥토끼가 있다하고 태양에는 세발가진 까마귀 즉 금오(金烏)가 있다고 사람들은 믿어왔다.
그래서 가마귀 오(烏)짜가 든 지명이 여러 곳에 있는 것이다.
목(項)이라 불리우는 곳은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도 좁은 통로로서 길목, 물목, 섬목, 건널목 등으로 쓰이고 있다.
** 이이목 나루
이이목 북쪽 낙동강을 건너는 나루이다.
이 나루를 건너면 의령군 낙서면 정곡리이다.
6.25동란 때 공산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뚫으려 최초에 이 나루로 도하하였다.
** 오여정(吾與亭)
이이목 동쪽에 있는 정자로 이 일대가 경치 좋기로 이름 난 곳으로 절벽에 피는 백일홍과 낙동강 푸른 강물, 그 위에 떠 있는 배의 선유(船遊) 등 한때 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놀러 오곤 하였다.
오여정은 시남리 산 68번지에 있는데, 양훤(楊暄)의 유게소(遊憩所)였다.
**청단 (靑丹)
시남리의 동부지역으로 골짜기가 깊은데 그 안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도 [호구총수]에 청단촌으로 남곡면의 제일 첫머리 촌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보아 오래 된 마을이다.
청단의 [靑]은 동쪽을 나타내는 데 우리나라를 예전에 [靑邱]라 하였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靑邱라 할 때 [靑]은 [東]을 나타내고 있다.
청단의 [丹]은 그 훈이 붉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마을, 골(谷)의 옛 말이다.
그러므로 청단은 동쪽 담, 동편 마을인 것이다.
이장이 있는 행정 리로 전에는 29호였던 것이 20호로 줄었으며, 초계 변씨, 김해 김씨, 창녕 성씨 등이 많이 살고 있으며,
봉양재(鳳陽齋)가 있다.
** 시남미(詩南山) - 시남 마을 서편의 산을 시남의 동산이라 하여, 시남미, 시남산이라 부른다.
** 와우산(臥牛山)
청단 마을 남쪽 산으로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 하여 와우산 누부실이라 불린다.
** 비봉산 - 봉새가 날아 오른는듯 하므로 비봉산이라 한다.
** 달뜬봉 - 정월 대보름날 달을 제일 먼저 볼 수 있으리만치 인근에서 일찌기 달이 뜬다하여 달뜬봉이라 한다.
** 잔고개
비봉산 북쪽 청단소류지에서 진골소류지로 가는 작은 고개로 이리로 통하여 유어로 간다.
작은 고개의 [작은]이 [잔]으로 변했다.
** 진골(長谷) -청단의 북쪽 골짜기로 골짜기가 길므로 진골이라 하였다.
** 뒷골 - 뒷골이라 하기도 하여 청단의 뒤에 있는 골짜기와 고개로 장마면 신구리로 간다.
** 못안고개 - 청단에서 북쪽으로 합장골로 가는 고개를 못안고개라 한다.
** 합장골 - 청단 마을 동북쪽의 골짜기로 골짜기가 합하여 지므로 합장골이라 한다.
** 말등어리 (馬嶝)
진골 북쪽 산등성이로 말의 등과 같은 형국이므로 말등어리, 말등거리라 한다.
서편에 이이목이 있다.
북쪽에 강을 따라 유어면으로 가는 벼리길이 있어 비리길이라 불리는데 아주 길이 험하다.
** 비리길
낙동강변 낭떨어지 절벽의 연속인데 이이목에서 서쪽으로 월평, 동으로는 유어면 진창 큰소재미로 가는 길이 있어
이것을 비리길이라 한다.
비리는 벼리의 변화로 벼랑의 이곳 지방말이다.
** 대리골 - 시남 북쪽 골짜기로 이이목으로 통하는데 다락논들이 있는 들이기도 하다.
** 험치골 - 시남미 북쪽 기슭의 골짜기로 대리골 서편이다. 골짜기가 험하다 하여 험치골이다.
** 진실골
시남 앞에 고곡으로 가는 쪽의 골짜기가 길므로 진실골이라 한다.
이 들에 나 있는 길은 예전에 관찰사가 대구 - 진주를 오가는 길이어서 관찰사길이라 불리었다.
노폭이 [서발들이]라 하는데 요즘 같으면 3~4m라 할 것이다.
인근 동민들이 해마다 부역으로 길을 닦았다 한다.
** 꿀마대 - 시남 동쪽에 있는 들을 꿀바대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