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로마의 기병 3
로마 기병의 말 (Roman Cavalry Horses)은 그러면 어떠했을까. 로마처럼 광대한 제국에서 예상되는 바와 같이,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한 가지 특정한 종류의 말이 제국과 연계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로마제국은 영토 방방곡곡에서 말을 끌어 모았고 말을 얻기 위해 다양한 기술을 사용했다. 로마 예술품에서의 흔적과 로마 사학자들의 견해에 근거해 보면 그 시대의 이상적인 말은 크고, 근육이 잘 발달되고, 약간 볼록한 머리를 가진 말이었었다[20]. 비록 로마인들이 훌륭한 기병마로서 생각하는 이미지가 있었지만 로마 기병은 말의 외양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가용한 말을 사용했다.
로마는 세계 馬시장의 용광로가 되었다. 고문서에서는 50 개가 넘는 말의 품종을 기록하고 있다. 비록 자연방목이 가능한 지역에서는 말이 잘 확립되어 있기는 했지만 고대에 로마, 아니 이탈리아 반도는 전반적으로 좋은 품종의 말로 유명하지 않았다. 아시아 말, 혹은 최소한 아시아 말의 품종 특성을 가진 말이 두 가지 경로로 로마에 유입되었다. 아시아 계 (로마인에게 Persian, Pharthian, Thracian, 혹은 Thessalian 으로 알려진) 말은 아마도 근대의 Akhal-Teke와 닮았었고, 알렉산더와 그 후계자들의 통치 기간에 중동으로부터 그리스로 전해졌다.
이 말들이 그리스로부터 로마의 군역으로 들어왔다. 이 품종의 주된 특징은 그 크기였는데, 평균 15 hands(15 뼘)을 약간 넘었고, 가장 큰 것은 16 hands에 가까웠다. 파라오의 戰車馬에 영향을 끼친 Caspian 품종의 선조인 좀 더 가벼운 중동계 품종이 북아프리카로부터 로마에 들어왔다. 로마인들은 그것을 Libyan 품종으로 알았다. 카르타고인과 누미디아인은 이 품종의 가볍고 세련된 특성을 이베리아로 들여와서 유럽 종자와 교배시켜 Spanish 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Libyan 품종은 아마도 근대의 Arab과 Barb와 밀접하게 연관되었을 것이다. 비록 로마인들이 Spanish 말을 “작고 못생긴” 말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그 말을 여전히 사용했고 기병마로서 뛰어나다고 여겼다.
로마 기병은 말을 여러 출처로부터 얻었다. 상류층에서 기병부대가 나온 공화정 시대에는 신병이 스스로의 말을 가지고 왔다. 제국 북부의 정복지 출신 기병이 많았던 imperial period와 late empire 시대에는 대부분의 경우 각 지역에서 나는 말을 각자 가지고 왔으며 따라서 그들의 말은 완전히 다른 품종이었다. Alae가 그들의 고향이나 고향 근처에 주둔하는 한에는 그 지역에서 양육한 원산지의 말로 보충되었다. 네 품종의 오리지널 고대 말 중에서 둘은 북부 유럽에서는 공통적이었으니 켈트 조랑말 타입(타입 1)과 노르웨이말 타입(타입 2, coldblood 혹은 짐수레 타입의 말)이 그것이다.
이 두 종의 말은 유럽 중부와 북부 정복을 통해 로마로 유입된 말들에 강한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이 두 종으로부터 조랑말 보다는 크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여전히 작고, 뼈가 무겁고, 썩 매력적이지는 않은 교배종이 생산될 수 있었다. 키 작고, 털이 덥수룩하고, 똥똥한 말이 카이사르가 상대한 갈리아 및 게르만 적군과 동맹군의 말이었으며, 초기 갈리아 alae의 말이 되었던 것 같다. 로마의 정복 중과 후에 갈리아 인들은 그들의 말을 개량하는데 흥미를 느꼈다. 그들은 이탈리아 말을 수입하였고, 남으로부터 스페인과 리비아 말을 들여오는 기회를 활용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후 300~400 년이 지난 제국시대 후기에 이르러 중앙 유럽의 말은 현저히 달라졌다. 여전히 크게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그 무렵에는 아시아로부터의 영향과 선별적 교배를 결합시켜 더 큰 말을 생산하게 되었으며, 이는 중요한 기병마가 되었다. 로마인은 수마의 공격적 성향으로 이를 군사용으로 선호했다. 대초원 지대의 부족들과 몇몇 유럽 부족들은 거세를 선호했다. 거세된 말은 덜 공격적이었으며 따라서 훈련시키고 통제하기가 보다 쉬웠다. 이들을 함께 섞는 것은 군사 행동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으므로 기병부대는 철저히 선별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인의 승마술과 장비는 어느 정도였을까. 제정 시대가 시작되면서 기병의 전투 역량은 한 걸음 크게 내딛었다. 갈리아 전쟁에 이어서, 로마 기병은 아시리아 인들이 말을 탄 전사들을 전투에 배치시키기 시작한 이래 가장 중요한 새로운 장비를 도입하였으니 이는 고정 프레임 안장이었다.
비록 켈트인으로부터 기인하였고 스페인과 갈리아 작전 중에 로마인에 의해 채택된 것이긴 하지만 로마인은 고정 프레임 안장의 설계와 사용을 표준화하였다. 제국의 모든 기병은 이를 장착하였다. 안장에 대한 깨달음은 – 설계, 사용 및 그 이점 – 제국 전체와 국경 너머로 퍼져나갔다. 그들이 안장을 독립적으로 개발했는지 아니면 켈트인이나 로마인의 설계를 따라 배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프레임 안장을 도입하기 전에는 다양한 승마문화에 따라 프레임 없는 안장이 쓰이고 있었다. 프레임 없는 안장에 올라 탄 기수는 여전히 매우 불안정하였고 말 등에 직접 앉아 말의 척추를 직접 압박하였다. 프레임형 안장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였다. 로마의 안장은 네 구석에 위치한 뿔로 구성되었다. 가죽으로 마감한 나무 프레임이 네 개의 뿔을 연결했다. 기수의 몸이 프레임과 접하는 곳과 프레임이 말 등과 접하는 중요한 부위에는 패드를 덧대었다. 네 개의 뿔은 앞으로는 허벅지 위쪽을, 그리고 뒤로는 엉덩이를 떠받치면서 기수에게 확실한 좌석을 제공하였다. 덧붙여, 프레임은 말의 척추 위에서 아치를 만들어 예민한 부분 (척추)을 피해서 튼튼한 근육 위에 얹혔다.
불운하게도 완벽한 로마의 말안장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말 전문가와 협동하여 실험을 통해 상당한 정확성을 가지고 안장의 제작과 작동을 추리할 수 있었다. 가죽 안장덮개와 금속제 뿔 지주가 여러 로마 유적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유물들을 모형으로 사용하고 로마 시대 말의 彫像과 기병의 그림을 조사함으로써 역사학자 Peter Connolly는 로마 말안장의 모델을 만들었다. 오리지널 가죽과 잔존한 금속 단편에 있는 바느질 구멍과 눌린 자국들은 이 조각들이 어떻게 짜 맞추어지고 내부 프레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약간의 단서를 주었다. 고고학적 발견물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는 Connolly와 그의 동료들에게 아마도 두 가지 버전의 네 뿔 안장의 존재를 암시했다. 1) 편안하고 기병의 일반적 작전에 유용한 짧은 뿔 안장, 2) 좀 불편하지만 기수를 안장에 꽉 묶어주는 긴 뿔 안장. Connolly는 무겁고 긴 창 (heavy contus lance)을 쓰는 중기병이 긴 뿔 안장을 사용했을 거라고 추측한다[23]
안장 복제품이 완성된 후, 그걸 가지고 승마 사학자와 endurance riding (장시간 장거리 라이딩 하기) 챔피언 앤 하일랜드를 포함한 다양한 기수들이 시험을 했다. 하일랜드는 짧은 뿔 안장은 안장 없이 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안전함을 준다는 것을 발견했다[24]. 그녀는 또한 안장은 기수가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고 도약 하는 등 모든 종류의 장애물에 대처하는 능력을 개선한다는 것도 발견했다. 긴 뿔 안장에 대한 그녀의 결론도 마찬가지로 분명하였다. “첫 번 째 안장과 비슷한 개념으로, 이 안장은 안장의 앞머리부터 흘러 내려 안장의 꼬리를 형성하는 훨씬 더 뚜렷한 뿔을 가지며, 더 큰 안정감으로 기수를 묶어준다. 실제로, 충격적인 타격을 받는 기수는 움직이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며, 부상한 기병은 퇴각하여 치료를 위해 도움을 받아 내릴 때까지 말에 앉은 채로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25]”.
네 뿔 달린 로마 안장은 제정 시대가 시작될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안장은 기병이 말을 타고 보다 효과적으로 싸우는데 필요한 안정감을 제공하였고 창이나 칼로 적을 더 잘 가격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또한 안장은 말에서 쉽게 끌려내려올 수 있는 위협을 없앴다. 나아가, 안장은 거친 지형에서도 방해받지 않고 쉽사리 속보, 느린 구보, 혹은 질주 상태로 군사행동을 할 수 있게 하여 기병의 전술적 기동성을 크게 개선시켰다. 프레임 안장의 출현으로 기본 승마술을 훨씬 빠르게 가르칠 수 있게 되어 무기와 집체훈련에 보다 많은 시간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안장은 기병으로서 말과 함께 태어난 (born to horse) 병사를 모집하여야 하는 중요성을 떨어뜨렸다.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승마술의 모든 면이 관리하기 쉬워졌고, 이는 개별 병사와 기병 무기의 전투 효율성에 전반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
비록 이전에 본 그 어떤 것보다도 큰 진전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뿔 안장은 여전히 초보적이었다. 그 만듦새는 안락함이나 안전함에서 현대적 안장과 비교되지 못했다. 로마 안장을 말에 어떻게 졸라맸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한 개 이상의 어떤 종류의 혁대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가슴 띠를 이용하여 안장이 뒤로 흘러내리는 것을 막았고 엉덩이 띠를 써서 안장이 앞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막았다. 또한, 안장 밑에 두꺼운 패드를 넣어 말 등이 벗겨지는 것을 막았다 [26].
승마술 분야에서 로마인들은 혁신적이지 못하였으나, 제국시대 중에 세계 곳곳으로부터 효과적인 기술, 체계, 그리고 지식을 베끼고 학습하여 그 정보를 제국 전체의 로마군에 퍼뜨림으로써 군사계통의 효율성이 개선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 기병을 훨씬 유능하게 만들 수 있었다. 말에 대한 수의학적 진료와 마구간 설계 같은 표준 관행에는 말에 대한 첨단 지식이 반영되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장군 Xenophon이 기술한 기병을 훈련을 가슴에 새겼다. 실제로, 로마의 자료에는 군인과 말을 위한 학교를 기술하고 있는데 이에는 말에 타고 내리는 훈련, 도약 연습, 물을 가르는 훈련, 무기를 다루는 기술, 그리고 한 달에 3번씩의 20 마일의 행군 훈련이 포함되었다.
로마 기병에 대한 정보와 세부적 파악에 매우 우수한 자료로 남은 것이 바로 로마 기병 묘비석이다. 돌은 spatha 검, 창, 그리고 방패를 들고 돌진하는 기병을 묘사한다. 거기에 말은 재갈을 물고 있다. 비문에는 “Titus Flavius Bassus, Mucala의 아들, Dansala 출신, Ala Noricorum 소속의 기병, from the turma of Fabus Pudens, 46세, 26년간 복무. 유언에 의해 그의 계승자가 세우다.” 라고 쓰여 있다. 1세기, Caius Romanius의 묘비석 비문에는 “Caius Romanus Capito, trooper of the AIa Noricorum, from Celeia. of the voting tribe Claudia, 19년간 복무, 여기 잠들다. 그의 계승자가 유언에 따라 세움” 이라고 적혀 있다. 묘비석에는 안장을 위치에 고정시키기 위한 껑거리끈과 가슴받이가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로마인은 말을 컨트롤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재갈과 고삐를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Roman bit는 꽤 모질어서 말의 주위를 재빨리 이끌어냈다[28]. Curb bit는 한 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으며, 이는 로마인이 통상 방패를 왼손으로 들고 다니는 점과도 궁합이 잘 맞았다. 전투 중에 기병은 양쪽의 고삐 또한 그 손으로 잡았다. 실험을 통해서 앤 하일랜드는 고삐 대신에 방패로 말의 목 왼편을 눌러서 말을 오른쪽으로 돌릴 수 있음을 알아냈다. 이렇게 방패로 말의 목을 누르는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방패가 기수의 말을 제어하는 능력에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로마인은 또 말에 편자를 사용했다. 이는 임시적인 사용을 위해 설계된 클램프 혹은 매듭 타입이었다. 편자는 로마의 포장된 도로나 (기병은 통상 도로의 가를 따라 다녔다고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돌이 많은 길처럼 표면이 특히 단단한 곳을 행군할 때 사용되었다. 편자는 또 다치거나 손상된 발굽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로마 기병의 전술을 말하자면 그들은 로마 군을 위해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여기에는 정찰, 경계임무, 그리고 전투가 포함되었다. 이러한 임무는 모두가 전장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Vegetius는 “장군은, 그의 군대를 투입하기에 앞서, 신뢰할 수 있고 경험 있는 병사를 좋은 말에 태워 내보내서, 그가 진군하려 하는 지역의 앞, 뒤, 오른쪽, 왼쪽을 수색하여, 매복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로마 초기에는 기병이 충분하지도 않았고, 또 군단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그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기병도 없었다.
이 때문에 정찰이라는 중요한 임무는 동맹군에게 맡겨졌다. 갈리아에서의 작전 중에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게르만 기병에게 크게 의존하였다. 그들은 적군의 위피를 알아내고 약점을 찾아냈다. 카이사르는 기병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매일 ... 기병 활동을 통해, 몇 번씩 시도하여, 적이 우리에게 무엇을 할 수 있고 우리가 어떻게 부딪쳐 나갈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애쓴다.”
이들 동맹군 기병은 개개인이 로마 기병보다 우수했지만 정식 훈련을 받지 않았고 로마 군의 체계를 갖추지 못한 관계로 때때로 신뢰성이 없었다; 정찰 같은 비전투 임무는 그들 전사의 문화에 맞지 않았다[43]. 외국 기병이 정식으로 로마군의 조직으로 편성된 제정 시대에 와서는 alae는 이러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였다. 그러나, 적군의 기습으로 로마군이 타격을 받는 일이 많았는데, 이는 기병이 임무를 수행하는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열등한 지도력 때문이었다.
가장 초기의 공화정 군대로부터, 로마 지휘관들은 본대의 경계야말로 핵심적인 임무이며 이 임무를 맡기에 기병이 이상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화정 군대는 이 경계 임무를 목적으로 하는 “extra-ordinarii”라고 불리는 특수부대를 조직했다. 동맹군 기병의 3분지 1과 동맹군 보병의 5분지 1로 구성되어, 이들은 군 사령관을 위한 특별 임무를 수행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군의 핵심인 로마 보병 군단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다. 경계 임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행군 중인 군대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회고록에서 경계부대는 또한 군의 마초 징발 대원을 보호할 책임이 있음을 지적했다.
로마군은 정식 전투에 앞서 정교한 준비를 필요로 했다. 군단을 대형으로 적절히 배치하는 데는 여러 시간이 걸렸으므로 기병의 중여한 임무 중 하나는 배치를 차폐하고 보호하는 것이었다. 기병이 실제로 군단의 일부였던 공화정 초기에는, 군단에 배속된 자체 기병이 군단의 통제 아래 이 임무를 수행했다. 제국시대 중반에는 군 지휘관은 기병 alae를 이용해서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로마 기병은 알렉산더의 헤타이로이(companion cavalry) 전통에 따라 주전투(main battle)의 일부로서 전투에 참가했다. 그들의 임무는 군단의 측면을 보호하고 적의 기병을 섬멸하고, 그리고 바람직하게, 적 보병의 측면과 후미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Vegitius는 “가장 우수하고 육중한 말이 적 보병의 측면을 담당하고 가벼운 말은 적을 둘러싸고 좌우익을 교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46]. 창을 던지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어서 적과 교전하기 위해 돌진했다. 근접전이 벌어지면 기병은 창으로 공격했고, spatha(straight sword)를 보조 무기로 사용했다. Alae 간의 싸움 기술은 변했다. 초기 갈리아 alae는 부족의 전통에 따라 창 보다 칼을 선호했다. 후기 로마의 중기병은 무거운 contus 창을 주무기로 사용했고, 동쪽 alae는 활을 썼다. 주 전투에서 적이 깨뜨려지면, 유능한 로마 지휘관은 기병의 적을 쫓는데 있어 기병의 대단한 효과를 인지하였으며 인내가 다할 때까지 이 임무에 투입하였다.
로마의 대부분의 기간에, 로마 지휘관들의 마음에는 군단의 보병이 군의 중심이었다. 비록 로마 지휘관들이 기병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파악한 것으로 보이지만, they were consistently unable to make a firm commitment to that arm. 로마인들은 기병 지휘관을 존경했지만 외국인으로 기병을 배치했고, 제국 역사의 대부분에 있어 소규모로 유지했다. 군사 평론가 Flavius Vegetius Renatus는 로마 지휘관들의 외국인을 향한 전반적인 편견을 회고하고, 특히 기병 alae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군 전체가 하나의 동일한 명령으로 통제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군사행동에서 가장 핵심적인 점이라는 것일진대, 모든 면에서 그렇게도 이질적인 군대로부터 기대할 것이 별로 없었다... 군단은 그들 기병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기병을 로마군의 힘에 큰 보탬이 된다고 간주했다. 그렇다면 수많은 전투와 전쟁 그리고 그들의 적은 어떠했을까. 다음은 이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