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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인테리어는 경영 합리화의 절대적 요소가 아닐까. 아직도 인테리어를 불필요한 장식, 과소비의 주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결국, 품질의 한계나 영업의 효율성이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야 경영 생명에 인테리어디자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안타까움을 접하게 된다. 영업의 이익을 위해 환경과 양식이 눈앞의 궁극적 현상에만 집착한다면 결국 양질의 능률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컨설팅은 의논상대 혹은 전문적인 일을 수행하는 일이라 풀이된다. 복합적인 공간을 만드는 데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과 끊임없는 확인, 새로운 정보와 자료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을 회사 자체에 부서를 두고 진행하며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경제적, 시간적 손실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 조안준 인테리어디자인 & 컨설팅의 사무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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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컨설팅 영역이 다양해지고 대중화되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컨설턴트 W. Cohen 같은 사람도 그랬듯이 처음 부터 컨설팅 영역에 뛰어들어 직업으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떤 일이나 연구에 부족함을 느낄 때 우리는 먼저 책을 찾거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 조언을 구하게 된다. 컨설팅은 쉽게, 전문적인 조언이나 경험, 자질, 기술로 일을 수행하 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그 분야에 학위나 전문 컨설턴트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클라이 언트는 독특한 환경, 특별한 분야의 경험이나 지식, 자료에 대한 것을 보다 더 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학위가 주는 신뢰성 은 무시할 수 없다. 굳이 컨설턴트의 조건이라면 책임의식(Responsibility), 자신감(Self-Confidence), 리더쉽 (Leadership), 그리고 능력(Ability)이 아닐까? |
[ 서교호텔 별관 연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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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시절 교수님 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인연으로 양아버지가 되어주신 故 Mori Jun 교수님이 처음 회사라고 차리자 이런 글을 내게 선물로 주셨다. “작은 것을 소홀이 하면 큰 것이 허물어지니 작은 것을 소중히 여겨라. 때론 가장 작은 것 이 가장 큰 감동을 준다.” 나는 이 말씀을 내 디자인 철학으로 삼고 있다. 또 컨설턴트로서의 모토는, 내게 일을 주신 클라이언트의 이윤 추구를 위해 정확한 대안 제시와 결정적 조언을 위한 도전의식을 갖는 것과 전문가로서의 고집까지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갖자는 것이다. |
[ 서교호텔 일식당 HIKARI ] |
[ 서교호텔 객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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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학을 떠났던 70년대 후반에는 유학생이 드물었다. 당시는 실내 장식이라든가 환경 미술이란 단어도 생소했다. 먼저 일본에서는 사람도 인테리어의 한 요소라는 것과 작은 공간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지에 대한 확실함, 미국에서는 큰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랄까, 공간을 구성하면 거칠 것 없이 펼쳐지는 사고와 절제, 타성에 젖지 않으려는 노력, 또 남을 인정해 줄 때 내가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 등을 배웠다. 이러한 경험들이, ‘WHY NOT’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도전적 사고와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감성에 큰 힘이 되는것 같다. |
[ 한일증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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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꽤 규모가 큰 프로젝트 Competition이 있을 때 참여할 의사를 타진해 왔었다. 그러나 도급순위는커녕 참여한 회사 와 비교도 안되는 규모로는 자격이 없었다. 솔직히 분하기도 했고 그들의 찬란한 업적(?)에 주눅도 들었지만 나는 자신있 게 프로포즈를 했다. “회사의 규모나 실적이 적어서 디자인 설계와 공사를 줄 수 없다면 제 개인의 능력을 보시고 할 수 있는 일을 주시겠습니까? 제게 컨설팅 즉, 이 회사의 가정교사 일을 시켜 회사에 이익이 생길 수 있다면 좋은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아직도 아찔하다. 당돌한 프로포즈에 임원들이 당황했지만 며칠 후 회장님과 의 면담을 약속해 주었다. 정확히 13명의 남자, 그것도 오십 이상의 어른들 앞에서 보이지 않는 지적 투자를 설명하기 위해 경영자, 교수님, 동료에게 자료를 받고 외우고 결국, 나름대로 컨설턴트로서 전문의견을 갖추고간 나에게 첫 질문이 ‘얼마를 주어야 하냐’ ‘여자가 그런 것을 할 수 있냐’ ‘그런 일을 해본 경험이 있느냐’… 나는 당혹스럽고 화도 났지만 이것은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지는 쪽이냐, 이긴 쪽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만 큼의 이윤 추구를 줄 수 있으며 여자로서의 장점과 단점 중 장점을 봐 달라는 말, 그리고 이것이 나의 첫 작품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설명했다. 컨설팅 피를 제시하자 다시 회의를 하자는 말에 우리 회사에 투자를 하면 다섯배 만큼 의 효과를 책임지겠다고 말했던 기억도 있다. 그 후 나는 이 첫 컨설팅에 내가 제시한 대로 계약하였고, 지금까지도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지면으로 컨설팅의 영역과 과정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더구나 디자인 컨설팅은 철저히 클라 이언트 측이냐 설계회사 측이냐에 따라 방법론이 달라지고 부여되는 영역도 회사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애로사항이라면 건축 설비, 법규에 관한 다양한 지식의 요구에 대응해 항상 리서치를 해야하고 정확한 자료에 의한 의견 제시를 해야 하며 책임을 지는 일도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랄까? |
[ 진솔문고 ] |
[ 뉴질랜드 정부 관광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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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부모님을 정말 잘 만난 덕으로 꼬맹이 시절부터 제법 큰 방을 소유할 수 있었던 나는 그 방을 일주일이 멀다하고 책상이며 침대, 그림까지 그리고 천을 깔면 쉽게 옮겨진다는 것을 터득한 후로 옷장까지 옮기며 그야말로 난리 굿을 부렸 다. 어지간히 눈총과 꾸지람도 받았지만 며칠이 지나면 또 그럴 것이고 바꿔놓은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님 의 묵인하에 나는 씩씩하게 그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외국인과 같이 다니던 학교 덕에 친구 집에라도 가면, 우리와 다 른 환경을 보며 나는 눈과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옮겨가며 얼마나 행복해했었던가. 그렇게 나의 레이아웃은 시작되었다. 둘 상을 많이 탔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미술대회는 물론이고 환경미화 부분에선 우리 반은 거의 1등은 맡아놓고 해서 거의 “상”이란 도장이 찍힌 노트를 썼고 이 반 저 반, 지난 해 담임 선생님 반으로 품을 팔고 다니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내가 그린 카드를 사겠다는 친구가 생기고, 결국 돈은 못 받았지만 고무줄보다 더 질긴 냉면을 여러 번 얻어 먹었다. 또, 카톨릭 학교의 보수적인 교육에도 불구하고 미술반이 앞장서 수녀님을 설득해 개교이래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어 당당히 남학생을 초대했던 기억도 난다. 무슨 배짱으로 선생님께 남학교에도 포스터를 부쳐달라고 할 수 있었는지… 이것이 나의 마케팅의 첫 케이스가 아닐까. 그럴 즈음 이젠 온 집안을 움직이기 시작해 “또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했네” 하는 아버지 목소리가 자주 들렸다. 셋 나는 그 대학을 너무 우습게 보았다. 어머니가 그래도 탈 없으라고 시험날 계란을 깨뜨리는 모습을 보며 깔깔 웃기도 했다.그렇게 못되고 한심한 아이였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 떨어졌다. 신문에 이름이 없던 날 옥상에 올라가 펑펑 울면서 도 여기 벤치는 저쪽이 좋은데, 계단이 너무 가파르네 하며 그런 내 꼴이 하도 기가 막혀 울다 웃다 하였다. 그리고 내가 선택받는 학교가 아니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학교에 가리라 결심했다. 나는 이것이 자긍심이라고 아직도 믿고 있다. 넷 먼저 나가서 공부하고 돌아오고 싶었다. 유학 생각을 하자 각 나라마다 즐비한 인테리어디자인, 환경이란 단어가 들어 왔다. 합격하면 허락하신다는 부모님께 나는 두 달동안의 일어 공부와 포트폴리오 대신 그 동안의 상장과 무슨 미술전시 회냐 야단 치시던 교장 수녀님의 극찬의 추천장으로 백년 전통의 동경여자미술대학에 지원했고 시험에 합격했다. 나는 이렇게 내가 선택한 이 학교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면접 때 “자네 언어 실력으로 대학 강의가 어렵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네 굉장히 힘들겁니다. 그래서 녹음기를 두 개 살 것이고 착한 친구 두 명을 꼭 만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이 말을 졸업할 때까지 실천했다. 지금까지도 그 두 친구 Tokiko Tokashi, Yoshiko Ootuka에게 고마움을 갖고 있는데, 디자이너의 길을 함께 가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다섯 미국에서는 더 힘든 언어 장벽으로 고통의 나날이었고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과 앞서간 디자이너들을 보며 좌절과 오기의 반복, 즉 살아남기 위한 강인함을 얻었다.재미난 이야기 하나 - 카페에 앉아서 건축 스케치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알바르 시자의 사진과 설명을 보며 그 모습이 나에게도 잘 어울 릴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림 그리고, 짐 옮기고, 방 만드는 것으로 살 수 있다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의 행복감이 나를 이 길로 오게 한 것은 아닌지… |
[ APEC 사무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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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여자임을 늘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맑은 목소리, 따스한 눈빛, 정성스런 손길, 호소력 강한 눈물, 그리고 가끔, 아니 자주 삐지기도 하는 이런 모든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나는 이 소중 함으로 단 한 번도 자신을 비굴하고 나약하게 보이지 않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 본 적도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칭찬반, 원망 반을 섞어서 ‘설득력과 리더쉽이 강하다’고 말 할 때가 있는데, 차등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에 맞는 행동과 당당한 실력, 그리고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맵시있는 태도를 갖는다면, 우린 모두 “짱”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가끔 정성 으로 맛있는 과자를 구워 감사함을 전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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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5년 전 보이지 않는 것에 비용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처음 디자인 컨설팅이란 상호를 내걸며 불안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설계자가 곧 자문자로 인지되기 때문에. 하지만 컨설팅의 당위성을 알도록 클라이언트를 이해시켜 보자하 는 당찬 결심이 적중한 것 같다. 글쎄, 위상이 어떻게 보여질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의 주어진 환경과 나의 능력안에 서 늘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기때문에 한 60쯤 되어 나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생각한 적은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조안준 인테리어디자인 & 컨설팅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런 일을 하고 싶어하 는 학생들이나 동료들이 많이 생긴걸 보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앞으로 회사 차원에서는 인터넷을 활용한 컨설팅과 외국과의 합작 컨설팅을 준비중이며, 개인적으로는 디자인 컨설팅과 디자인 마케팅 방법론에 대한 연구를 하여 관심있는 분들께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
[ 중앙투자금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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