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운동’과 횡대서양(transatlantic) 저항 네트워크: 세계혁명론 비판과 트랜스내셔널 전망.
- 신동규(申東奎, 1976-), 코기토, 인문학연구소, 2019, 7-34
변역의 흐름에는 항상 노래(참요)가 있다. 촛불봉기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였을 것이다. 시대에 따라 또한 생산양식에 따라 변역에는 여러 양태들이 표면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 양태들 중에는 사상, 정치, 제도, 문화 등의 다양성을 표출하여,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상쇄되어 소멸하기도 한다.
양태 중에서 전달의 수단으로 보면, 프랑스 대혁명에는 전단과 팜플렛 그리고 노래가 있었다, 일차대전은 유럽의 전쟁이며, 이 때서야 사상가 또는 지도자들의 저술의 요약이 돌아다닐 것인데, 이런 현상은 68년에 케바라의 전언과 마오 어록이 전파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차 대전은 전쟁도 전지구적이라 할 수 있고, 전파에 의한 언어 메시지 전달도 전지구적으로 연결되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런데 68년을 월러스틴이 문화혁명으로 보는 데는 대륙간에 네트워크의 형성이 있었다고 보는 경우인데, 언어를 넘어서 영상과 연설 그리고 운동가의 얼굴이 메시지로 역할을 한다. 월러스틴이 쓴 횡대서양(transatlantic)이란 용어에서 보아, 이 용어는 당시의 제3세계의 운동의 전파와 연관 있으며, 곧 이어 프랑스 정신과의사 가타리가 1974년에 개념화하는 가로지르기(transversalité. 횡단성)에 닿을 것이다. 횡단 또는 가로지르기가 형이심학에서 의식의 상호침투에 맥이 닿아 있을 것이고, 의식의 활동의 측면은 재인식과 역동성에 있을 것이다. 주어진 영혼 관념과 달리 재인식의 의식 작동은 벩송에 닿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의식의 활동성을 헤겔의 변증법적 지양과 이른 거꾸로본 맑스에게서 찾기도 하지만, 그 의식활동은 주어진 주체가 비주체를 전유할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 논리에 대한 서로 대립적 견해일 것이다. 주체의 기원과 성립에 관한 논의는 근대성의 정립에 관한 논의와 맞물려 있는데, 주체가 먼저 정립된 것이 아니라 정립화 과정에 있다는 사유를 하는 경향은 물론 맑스와 니체에도 있었지만, 사유의 총체로서 형이심학을 의학과 생리학의 발달 다음으로 다룬이는 벩송일 것이다. (55TKJ)
이 논문에서 우선 68년에 지구적 연결 사항으로, 체 게바라, 마틴 루서 킹, 호치민을 연결하는 트리켄티넨탈리즘(Tricontinentalism)이라 하는데, 용어가 불확실하지만 논자가 대륙간의 연결성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로 썼을 것이다. 이 세 인물을 기준으로 대륙이란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를 지칭할 것이다. 아시아는 베트남이 주요 무대이고 그와 연동되어 호주와 한반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린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 논문이 대륙간 연결이 있다는 점을 알리는 글인데, 미국의 마틴 루서 킹의 흑인문제와 남아시아의 베트남 전쟁, 그리고 푸에블로호 사건의 김일성 사이의 연동을 설명하는 경우는 처음인 것 같다. 이 대륙간의 연대와 연동이 체 게바라의 편지에 나타난 “호, 호, 호치민”이 남아메리카까지도 연동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의 확산을 겁내고 있었던 호주까지를 넣으면, 대륙간의 연결이란 용어를 쓰는 것도 타당하리라. (55TKJ)
* 목차
국문 초록 7
1. 머리말 8
2. 세계혁명(world revolution)과 문화혁명의 이중주: 반(反) 68의 역설 11
3. 트리컨티넨탈리즘과 1968년 저항의 네트워크 18
4. 푸에블로호 사건과 베트남 전쟁: 미국의 ‘지구적 전략’과 반전운동 24
5. 맺음말 29
* 참고문헌 31
# 본문 중에서 **********
1. 머리말 8
우리나라에서는 1968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특히 프랑스의 68운동을―혁명(revolution)으로 지칭하는 경향이 강하다.1)그러나 프랑스, 독일, 미국, 체코슬로바키아, 스위스, 캐나다, 멕시코 등에서 1968년에 일어난 사건을 명명할 때 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1968년 프랑스에서 급진 좌파들이 대학에서의 ‘문화혁명(Révolution culturelle)’을 부르짖고, 멕시코의 대학생들이 “우리는 올림픽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혁명을 원한다!(No queremos olimpiadas, queremos revolución!)”는 구호를 외쳤지만, 이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방증할 뿐이다. 프랑스에서 조차 혁명보다는 ‘사건(événement)’으로 부르는 경향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은 역사적으로 유사한 사건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희귀한 혁명(Révolution introuvable)’이라고 정의했으며,2)에드가 모랭(Edgar Morin)은 ‘정체불명의 혁명(révolution sans visage)’으로 불렀지만,3)이는 68운동이 좌파와 우파 모두가 ‘혁명’이라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혁명이 아닌 그 무엇인가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8-9)
한편 취리히에서 일어난 ‘글로부스 폭동(Globuskrawall)’이라는 표현은 급진적 학생과 경찰 사이에 발생한 폭력적 충돌을 상기시키고 있으며, 10월 멕시코의 ‘틀라텔로코의 학살(Massacre de Tlatelolco)’이라는 용어는 정부의 과잉진압으로 발생한 참상을 전한다. (9)
독일에서 ‘68운동’에 대한 설명은 루디 두치케(Rudi Dutschke) 암살 미수 사건 전후 서독 대학생들의 급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9-10)
따라서 그들의 이념과 행동은 아래로부터 직접민주주의가 구현되는 진정한 소비에트로 간주되었다. 즉 문화혁명론의 중심에는 개인주의의 강화와 자유[libertaire]의 확대가 있다. /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강조하면서 1968년에 분출되었던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문화적 해석은 ‘영광의 30년’이 만든 소비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소외’되는 조건들을 숨기는 역할을 했으며, 저항의 원인보다는 그 영향에 더욱 주목하면서 신자유주의를 잉태한 68운동이라는 안티테제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10)
미셸 장카리니-푸르넬(Michelle Zancarini-Fournel)이 지적하듯 68운동에 대한 문화적 접근은 역사가들의 관심을 제한된 사실을 근거로 한 ‘해석’과 68년을 원자화하고 단절의 시점을 찾는 ‘시대구분’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5) ... 그동안 68운동을 이해하는 한 축이었던 세계혁명(World Revolution)론도 역설적이게 문화혁명론을 강화하는데 기여해 왔다. (11)
2. 세계혁명(world revolution)과 문화혁명의 이중주: 반(反) 68의 역설 11
1968년에 혁명이 일어났는가?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은 1966년부터 1970년 사이 세계-체제(world-system)의 주요한 지정학적 구역인 범유럽 세계, 사회주의 블록, 제3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1968혁명(revolution of 1968)’이라고 부른다.6)
월러스틴의 분석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은 18세기 동안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었던 세계-경제(World-Economy)의 주도권 투쟁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8)세계 체제의 팽창 과정에서 일어난 경쟁에서 패배의 결과가 1789년의―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사건이었으며, 이 혼란한 상황은 프랑스 부르주아의 기대와는 다르게 영국의 항구적인 승리를 보장해주었다.9) (12) - [1800 나폴레옹이 루이지에나에 군대를 파견하려는데, 아이티에서 노예반란과 열사병으로 전멸한다. 프랑스 1803년 12월 20일에 루이지에나를 미국에게 매각한다.]
그에 의하면 이 세계혁명은 1848년과 1968년에 두 번 일어났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1848년은 1789년의 희망과 한계를 변증법적 변화로 이끌어낸 ‘지양(aufheben)’의 순간이었으며, 1968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미국의 헤게모니가 주도하는 반혁명에 대응하는 ‘혁명’의 순간이자 1919년 혁명의 목표를 완수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였다.14) (12-13)
월러스틴은 세계-체체의 문화적 특징을 .. 지문화[지정학적 문화](geoculture)를 통해 설명한다.15)월러스틴이 1848년을 세계혁명으로 정의하는 이유는 이후 자유주의가 “세계체제에서 문화적 헤게모니를 달성했으며, 지문화의 근본적인 핵심(fundamental core)을 구성”하였기 때문이었다.16) .. 이로써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등 세 개의 이데올로기가 경쟁하는 구도를 형성하는 기점이 되었다.17) (13)
월러스틴에 따르면 1968년은 미국의 헤게모니와 소련의 공모에 대한 심판의 시기였으며, 지배이데올로기의 중심이었던 중도적 자유주의에 대한 거부가 일어나는 동시에 구좌파가 주도하는 전통적인 반체제 운동이 중도적 자유주의의 아바타가 되는 전환점이었다.20) (13-14)
월러스틴은 1968년에 일어난 개별적 사건을 프라하의 봄(Prague Spring), 프랑스 오월(French May) 등으로 지칭하면서,21)이러한 개별적인 사건의 총체를 ‘혁명’으로 정의한다. (14)
1968년의 세계에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이나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비견할 만한 정치적, 사회적 변동을 수반하는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혁명’은 없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시기적으로 1968년 이후에 세계-체제에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으며, 월러스틴은 이러한 과정을 ‘세계혁명’이라고 정의한다. 결론적으로 월러스틴은 1968년에 일어난 사건들이 아닌 그 결과의 지속성을 혁명으로 정의한 것이다. (14) [통시적 관점에서 혁명.]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무엇보다도 프랑스의 68운동을 오독한 결과로 ‘1968년 5월’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풍토가 적어도 1980년대 이후 오랫동안 지속되었고,22)
특히 월러스틴이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우파가 전유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문화혁명 담론은 소위 신좌파가 형성한 68운동의 유산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적어도 68운동이 추구했던 근본적인 가치였던 저항과 해방의 담론이 혼란과 무질서로 대체되었다. (15)
68운동이 ‘문화혁명’이라는 해석 ... 이것은 그 이전 세대가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것이었다. 노동-가족-조국(Travail, Famille, Patrie)라는 비시 정부의 구호는 실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였다. (15) [푸꼬의 정, 학교, 군대, 공장(직장), 병원, 감옥 등의 분석에 근대성이 가족삼원성에서 사회삼원성으로 이어지는 체계에는 삼신성이 토대였다. 이에 대해 새로운 공동체를 생성하려는 쪽은 자연주의에 기대를 걸었다.]
사르코지는 가정과 학교, 공장에서의 관계 변화를 단순한 예절의 문제로 국한했지만, 이것은 도덕적 태도의 변화를 넘어서는 ‘권위’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지적한 것이 뤽 볼탕스키(Luc Boltanski)와 에브 시아펠로(Eve Chiapello)였다.24) (16)
이러한 논의의 출발점은 1967년 볼리비아의 정글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 있었던 레지스 드브레(Régis Debray, 1940-)였다. “자본의 발전 전략은 5월의 문화혁명을 요구했다”26)고 주장한 드브레는 1968년의 해방적 자유(libertaire)와 새로운 생산 질서가 요구하는 자유화(Libération)를 하나로 연결했다. (17)
[볼탕스키와 시아펠로는] “... 적어도 국가적인 층위에서 자본주의의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프랑스경영자위원회(Conseil national du patronat français)나 국제적인 층위에서 그러한 일을 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rganisation de coopération et de développement économiques)가 평가하기에 자본주의의 작동을 위험하게 한 심층적인 위기와 관련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체제를 비판하는 68운동의 역동적인 측면을 강조하기도 한다.28) (17)
이러한 논의는 68운동이 신자유주의의 문화적, 사상적 배경을 만들었다는 역사인식을 형
성하는데기여하였다. (18) - [트로츠키주의자와 공산당의 대립으로 신자유주의가 덕을 보았다기보다, 매카시(Joseph McCarthy, 1909-1957)의 거짓 폭로보다 교묘하게 우파(진자유주의)의 길을 트고, 자본의 ‘제국’을 만들었다. 상층이데올로기는 간지(List)발휘하여 극좌의 72년 무장투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3. 트리컨티넨탈리즘과 1968년 저항의 네트워크 18
[초록과 결론에는 트리켄티넨탈리즘이라 써 놓아 햇갈렸다. - 삼대륙주의]
여기에 호치민(Ho Chi Minh, 1890-1969),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1929-1968),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 등 1968년을 상징하는 아이콘들이 자리잡고 있다. (18) - [이런 논의에서 맑스를 제외한 것 자체가 문제이다.]
체 게바라는 쿠바의 하바나에 있는 아프리카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인민의 연대조직(OSPAAAL : Organization of the Solidarity of the Peoples of Africa, Asia, and Latin America)에 메시지를 보냈으며, 이 글은 4월 16일 「트리콘티넨탈에 보내는 메시지(Message to the Tricontinental)」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8)
트리컨티넨탈리즘의 관점에서 베트남 전쟁은 제국주의의 토대를 일소하기 위한 ‘억압받는 나라’의 적극적인 형태의 저항이었다. 따라서 두 번째, 세 번째 베트남을 만드는 것은 제국주의가 만든 세계적 차원의 지배질서 - 세계 체제-를 해체하는 방법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19)
마틴 루서 킹의 1967년 4월 4일[암살] .. 마틴 루서 킹 암살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며칠전에 있었던 1968년 3월 31일 연설은 ... “... 나는 여전히 “우리는 극복하리라(We Shall Overcome)”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극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덕 세계의 활(arc of the moral universe)은 길지만, 그 활은 정의(justice)를 향해 구부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33)
마틴 루서 킹은 이 연설을 존 바이에즈(Joan Baez)가 1963년 워싱턴행진(March on Washington)에서 부른 <우리는 극복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인용하면서 끝맺었다. 가스펠송이었던 <우리는 극복하리라>는 밥딜런(Bob Dylan)의 <바람에 실려(Blowing in the wind)>와 함께1960년대 저항 운동의 대표적인 노래였다. (21)
특히 파리는 각국에서 진행되는 저항 요소들이 모여 가장역동적인 운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용광로였다. (22)
호주에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암살 이후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인종폭동(race riot)’은 일종의 교훈으로 받아들여졌다. 사법개혁위원회(Legislative Reform Commitee) 의장인 베리 피톡(Barry Pittock)은 “우리는 미국에서 블랙파워가 확대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이런운동은 억압받는 소수자들, 즉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주도권을 잡고 책임을 맡아야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나는 이것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라고 주장하면서 호주의 원주민 문제를 공론화했다.35) (22)
특히 [68] 4월 11일 루디 두치케가 뮌헨 출신의 극우 청년 요제프 바흐만(Josef Bachmann)이 쏜 총에 맞아 부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서독의 대학생들은 당시 학생운동을 비판했던 극우 언론 악셀스프링거(Axel Springer)를 이념적 배후로 지목하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4월 15일에는 서독의 주요도시에서 학생 시위가 이어졌다. (22)
1968년 4월 15일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서 수 천 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반전 평화 집회가 열렸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설교녹음을 듣고 줄리 펠릭스(Julie Felix)가 <우리는 극복할 것이다>를 부르면서 생폴 성당까지 행진을 이어갔다는 소식은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의 주목을 받았다.39)
4. 푸에블로호 사건과 베트남 전쟁: 미국의 ‘지구적 전략’과 반전운동 24
1960년대 후반 북한의 대남 무장활동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1966년 30건이었던 남북 사이의 교전 횟수는 1967년에 218회, 1968년에는 356회까지 늘어났다.42)그 절정은 1968년 1월 21일에 발생한 청와대 습격사건과 1월 23일에 일어난 푸에블로호 사건이었다. 특히 푸에블로호 사건은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한반도가 ‘제2의 베트남’이 될수도 있다는 우려를 만들어 냈으며, 베트남에 이어 또 다른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24-25)
적어도1968년 1월 푸에블로호 사건 직후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북한의 행위가 베트남전을 수행하고 있는 미국을 난처하게 만들기 위한 음모 또는 의도된 계획이라고 믿고 있었다. 린든 B. 존슨(Lyndon Baines Johnson) 대통령은 “실제로 내가 만난 모든 전문가들은 북한과 북베트남,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공작을 연계하여 말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예외 없이 확실한 연관 관계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44) (25)
이러한 이유로 이미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는 “이 사건(푸에블로호 사건―인용자)의 기저에는 북한이 아니라 베트남이 자리 잡고 있다”고 논평하였다.46)(26)
당시 북한은 공개적으로 [북]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강조하고 있었다. 특히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주도하는 문화대혁명이 진행되면서 홍위병들이 남한의 [남]베트남 파병에 대응하는 북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었었다. 이는 김일성이 정치적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66년 가을 조선노동자 대표자회 연설에서 김일성은 베트남 전쟁을 “혁명 역량과 반
혁명 사이의 투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49) (27)
한반도에서 북한의 무력시위 증가는 두 번째 전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을 보인 나라 중에 하나가 호주였다. 1968년 1월 영국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 주둔하고 있었던 군대를 1971년까지 철수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미국을 도와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던 호주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전쟁의 확산과 공산주의 세력의 남하에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 (28)
즉68운동은 베트남 전쟁을 매개로한 지구화된 저항 네트워크 속에서 개별적 국가의 사회 위기가 만들어낸 다양한 사건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구성되었다. 1968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네트워크화된 트랜스내셔널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28-29)
5. 맺음말 29
체 게바라, 마틴 루서 킹, 호치민을 연결해주는 트리켄티넨탈리즘[tricentinentalism, 삼대]과 흑인민권운동의 결합을 통해 냉전체제와 탈식민주의가 68운동과 어떠한 상호 작용을 했는지 살펴본다면, 단순하게 신자유주의를 만든 세대의 소동으로 68운동을 치부할 수 없게 된다. (29-30)
마틴 루서 킹이 흑인에 대한 억압과 베트남 인민에 대한 억압을 동일하게 파악했다면, 김일성은 베트남 민족해방 투쟁을 남조선 혁명과 동일하게 인식하면서 지구적 차원에서 1968년의 저항 네트워크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마틴 루서 킹과 김일성을 연결 시켜주는 것이 바로 체 게바라의 편지에 나타난 국제적 연대에 대한 호소였으며, “호, 호, 호치민”이라는 구호로 전세계에 퍼졌다. / 이러한 상황에 대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나라 중에 하나가 호주였다. 호주는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여해 미국을 돕고 있었으며,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공산주의의 남하에 매우 민감한 대응을 하고 있었다.(30)
# 운동권
1940 드브레(Régis Debray, 1940-) 프랑스 작가, 철학자, 고급공무원. ENS 문학으로 일등입학, 1965년 철학으로 교수자격, [1966년 (UJC-ml)이 (UEC)와 합류하고, 1968년에 마오주의 흐름에도 동조한다. 이시기에 그는] 1966 볼리비아 민족 해방군(L'Armée de libération nationale de Bolivie)에 가담하여 체게바라(Che Guevara, 1928-1967)와 함께했다가, 1968년 봄에 볼리비아 감옥에 있었다. 혁명 속의 혁명: 라틴아메리카의 무장투쟁과 정치투생(Révolution dans la révolution ?: Lutte armée et lutte politique en Amérique latine [essai](Paris, Maspero, 1967, 138 p.)
1940 루디 두취케(Rudi Dutschke, 1940-1979) 독일 정치 활동가. 1968년 2월 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ind, SDS)의 지도자. 극우파에 의한 두취케 피격이후(68, 04 01) 붕괴하고, 여러 분파 중에서 1971년 적군파(赤軍派, Rote Armee Fraktion; RAF, fr. Fraction armée rouge)가 등장한다.
* 사학자들
1930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2019) 미국 사회학자, 역사학자. 근대 세계 체제 3(The Modern World-System, vol. III: The Second Great Expansion of the Capitalist World-Economy, 1730-1840s, 1989)근대 세계체제 4(The Modern World-System, vol. IV: Centrist Liberalism Triumphant, 1789–1914, 2011
1937 아리기(Giovanni Arrighi, 1937-2009) 이탈리아 경제학자 사회학자. 미국서 활동. 제국주의 지리학(Geometry of Imperialism, 1977)(260 p.)
1940 볼탄스키(Luc Boltanski, 1940-) 러시아 유대가계, 프랑스 사회학자. Le nouvel esprit du capitalisme, 1999(avec Ève Chiapello, 1999)
1947 미셸 장카리니-푸르넬(Michelle Zancarini-Fournel, 1947-) 프랑스 역사가. 68, une histoire collective, 1962-1981, 2008(avec Philippe Artières, 2008, 847 p.), Le moment 68 : une histoire contestée, 2008(313 p.)
1965 시아펠로(Ève Chiapello, 1965-) 프랑스 여성 사회학자. avec Luc Boltanski,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Le Nouvel esprit du capitalisme,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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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홍석률(洪錫律, 1965-) 서울대학석박. 성신여대교수, <1953-1961년 통일논의의 전개와 성격, 서울대, 1997, 김인걸.> 「1968년 푸에블로 사건과 남한 북한 미국의 삼각관계」(한국사연구 113 한국사연구회, 2001).
1973 이신재(李信宰, 1973-)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푸에블로호 사건이 북한의 대미인식과 협상전략에 미친 영향, 북한대학원대학교, 2013, 신종대.>
푸에블로호 사건과 북한(서울: 선인, 2015).
1976 신동규(申東奎, 1976) 창원대 <[미기록], 2009, Paris I Pantheon-Sorbonne, Michel Dreyfus.> 「사회보장제도, 그르넬 협상, 그리고 1968년 5월-6월 총파업-노동총연맹의 총파업 전략(2013)」, 역사와 담론68, 호서사학회, 2013, 334~336
“1968년 저항 확산의 논리와 총파업-정치적 측면의 복원과 ‘영광의 30년’의 위기-(2018)”(프랑스사 연구), “1968년의 결정적 사건과 위기 요소의 초국적 순환, 2019,”(인문연구, 인문과학연구소), “‘68운동’과 횡대서양(transatlantic) 저항 네트워크: 세계혁명론 비판과 트랜스내셔널 전망, 2019)”(코기토, 인문학연구소), “68운동의 동원 메커니즘과 노스탤지어―인민전선과 연대의 기억, 2020)”(역사비평, 역사문제연구소), “‘파리의 5월’, 저항의 아이콘을 둘러싼 연대와 적대-1968년 다니엘 콘-벤디트의 추방과 프랑스 공화주의의 모순적 메커니즘-(2020)”(서양사론)
1980 우인희(禹仁熙, 1980-), 창원대학사, 부산대 석사. 강사. 「월러스틴과 68혁명」(역사와 경계 110, 부산경남사학회, 2019).
1982 김주호(金主鎬, 1982-) 고려대 학사, 경상대 사회학과 교수, <Die paradoxe Rolle der Demokratie beim Übergang zum neoliberalen Kapitalismus in Südkorea: Von der Kritik zur Rechtfertigung(한국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형성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역설적 역할: 비판에서 정당화로), Johann Wolfgang Goethe University, 2016, Sighard Neckel.> 「68운동의 정신, 자본주의 비판에서 자본주의 정당화로-볼탕스키와 시아펠로의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을 중심으로, 2008」(서양사론, 138, 한국서양사학회, 2018).
* 참조 *
1965 이재원(1965-), 연세대 사학과 교수, <Les Français et l'idée coloniale, de la Libération aux accords de Genève: le cas de l'Indochine, 2003, 파리Univ. de Paris X (Univ. de Paris Nanterre), Jean-Jacques Becker.> 「프랑스의 ‘68년 5월’」, 『서양사론』, 100호(2009).
1970 민유기(1970-) 경희대 교수. 고려대 학석사, 프랑스 석박사. <La reforme de l'habitat populaire dans la region parisienne 1870-1914: anthropologie historique des logements sociaux, 2003, 프랑스 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 Andre Burguiere.>. 「68년 5월 운동과 프랑스의 대학 개혁, 2013」(프랑스사연구, 39호)
(8:32, 55TKJ)
68년: 울나라 태극기부대(할배부대)와 유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