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생, 전남 해남 출생. 조선대 사범대 독어과 졸업. 1969년 『시인』에 「참깨를 털면서」외 4편이 추천되어 등단. 196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1970년 『전남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 『목요시(木曜詩)』 동인. 1986년 전남문학상, 현산문학상을 수상.
작품경향은 산업사회 하에 붕괴되어 가는 고향을 주로 노래하며, 고향정신·대지(大地)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러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 이후부터는 광주사랑, 공동체정신, 생명중시, 인간해방, 식민문화 극복, 민족해방, 참나라·참세상 등을 열망하는 시를 쓰고 있다.
시집 『참깨를 털면서』(창작과비평사, 1977), 『나는 하나님을 보았다』(한마당, 1981), 『국밥과 희망』(풀빛, 1983), 『불이냐 꽃이냐』(청사, 1986), 『넋통일』(전예원, 1986), 『칼과 흙』(문학과지성사, 1989) 등이 있다.
우리 나라의 십자가, 청춘의 도시 광주
1980년 5월 광주가 진압 당하고, 땡볕만 내리 쬐는 6월에 들어서자 약 보름만에 당시 두 개의 지방지(전남일보, 전남매일)의 발행이 재개되었다. 전남매일신문은 첫 신문 6월 2일자 1면 상단에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를 게재하였다. 계엄 당국의 검열을 통과하면서 원문이 심히 훼손되어 실렸지만 시적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충분했다. 당시 모든 언론은 계엄당국에 의해 재갈이 물려 있었다. 5월 18일 이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사실 보도할 수 없었으므로 광주시민들의 마음을 시적 언어를 통해서나마 달래 보려던 편집진의 의도였을 것이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번 죽고
한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번을 죽고도
몇 백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저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 중에서
이 시는 1980년 5월에 광주가 어떠했는가를, 광주 시민의 마음이 무엇이었는가를 잘 대변해 주었다. 이 작품은 영어, 일본어 등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어 해외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준태는 이 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교사직에서 해직되어 이후 복직될 때까지 3년간을 거리의 시인으로 전전해야만 했다.
1980년 광주는 김준태의 시세계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광주의 대동정신을 경험한 그는 총칼 앞에 잠시 무릎을 꿇어야 했던 광주를 역사적 좌절로 파악하지 않고 희망 정신으로 꿰뚫고 있다. 이후 내놓은 제2시집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한마당, 1981)가 이러한 그의 시정신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는 1980년 광주의 살육을 목도하고 나서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라면 피라미 / 한 마리라도 소중히 여기련다 / 아아 나는 숨을 쉬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하찮은 물건이라도 / 입맞추고 입맞추고 또 입맞추고 살아가리라”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절규와 원한을 극복한 한 차원 높은 패러독스요, 광주 정신을 신성성으로 끌어올린 희망의 제시이다.
김준태가 추구하는 신성성은 인간주의와 생명주의로 이행된다. “驛前 광장 / 아스팔트 위에 / 밟히며 딩구는 / 파아란 콩알 하나 // 나는 그 엄청난 생명을 집어들어 / 도회지 밖으로 나가 // 강건너 밭이랑에 / 깊숙이 깊숙이 심어 주었다 / 그 때 사방 팔방에서 / 저녁 노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콩알 하나’ 중에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콩알’을 ‘밭이랑’에 심어 주는 화자의 행위를 통해 생명의 신성성을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적 경향은 ‘밭詩’ 연작에서 구체화된다. 문학평론가 김주연은 김준태의 시를 ‘농민시’, ‘농촌시’로 규정하면서 그의 시적 특질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김준태의 시에 나타난 전반적인 시적 주제는 대체로 광주, 역사, 통일 문제로 집약된다. 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뚜렷한 해명 방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생명 존중과 사랑의 정신이다. 가령, 그의 시에서 ‘고향’ ‘농촌’ ‘밭’ 등의 공간은 과거 지향적 공간을 통한 회귀 정신의 표명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 공간으로 열린 생명 사랑의 실현이다. 따라서, 그는 그에게 지워진 시적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적극적 방식으로 끊임없이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제3시집 “국밥과 희망”(1984)을 펴낸 이후 “불이냐 꽃이냐”(1986), “넋통일”(1986),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1988), “오월에서 통일로”, “칼과 흙”(1989), “통일을 꿈꾸는 색주가”(1991),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1994), “안녕, 20세기”(1999) 등의 시집을 계속해서 내 놓았다. 이밖에 평론집, 수상집, 명시해설집 등 10권의 저술이 있다. 또한 그는 1996년에 중편 ‘시인 오르페우스는 죽지 않았다’로 “문예중앙”을 통해 소설가로서 데뷔하기도 했다. 1983년에 광주문학상과 현산문학상을, 1995년에 전라남도 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했다. 1988년부터 1997년까지 전남일보와 광주매일에서 부장을 거쳐 편집부국장으로 종사했고, 지금은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광주·전남 회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조선대학 국어국문학부 초빙교수로 있다.(조대신문 709호 99년 5월 12일)
우리 나라의 십자가, 청춘의 도시 광주 - 시인 김준태
광주·역사·통일 주제로 생명존중과 사랑 절절히 표현
96년 중편 '시인 오르페우스는 죽지 않았다'로 소설계 데뷔
백수인(국어교육·교수)
1980년 5월 광주가 진압 당하고, 땡볕만 내리 쬐는 6월에 들어서자 약 보름만에 당시 두 개의 지방지(전남일보, 전남매일)의 발행이 재개되었다. 전남매일신문은 첫 신문 6월 2일자 1면 상단에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를 게재하였다. 계엄 당국의 검열을 통과하면서 원문이 심히 훼손되어 실렸지만 시적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충분했다. 당시 모든 언론은 계엄당국에 의해 재갈이 물려 있었다. 5월 18일 이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사실 보도할 수 없었으므로 광주시민들의 마음을 시적 언어를 통해서나마 달래 보려던 편집진의 의도였을 것이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수는 한번 죽고
한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번을 죽고도
몇 백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저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 중에서
이 시는 1980년 5월에 광주가 어떠했는가를, 광주 시민의 마음이 무엇이었는가를 잘 대변해 주었다. 이 작품은 영어, 일본어 등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어 해외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준태는 이 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교사직에서 해직되어 이후 복직될 때까지 3년간을 거리의 시인으로 전전해야만 했다.
1980년 광주는 김준태의 시세계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광주의 대동정신을 경험한 그는 총칼 앞에 잠시 무릎을 꿇어야 했던 광주를 역사적 좌절로 파악하지 않고 희망 정신으로 꿰뚫고 있다. 이후 내놓은 제2시집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한마당, 1981)가 이러한 그의 시정신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는 1980년 광주의 살육을 목도하고 나서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라면 피라미 / 한 마리라도 소중히 여기련다 / 아아 나는 숨을 쉬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하찮은 물건이라도 / 입맞추고 입맞추고 또 입맞추고 살아가리라"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절규와 원한을 극복한 한 차원 높은 패러독스요, 광주 정신을 신성성으로 끌어올린 희망의 제시이다.
김준태가 추구하는 신성성은 인간주의와 생명주의로 이행된다. "驛前 광장 / 아스팔트 위에 / 밟히며 딩구는 / 파아란 콩알 하나 // 나는 그 엄청난 생명을 집어들어 / 도회지 밖으로 나가 // 강건너 밭이랑에 / 깊숙이 깊숙이 심어 주었다 / 그 때 사방 팔방에서 / 저녁 노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콩알 하나' 중에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콩알'을 '밭이랑'에 심어 주는 화자의 행위를 통해 생명의 신성성을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적 경향은 '밭詩' 연작에서 구체화된다. 문학평론가 김주연은 김준태의 시를 '농민시', '농촌시'로 규정하면서 그의 시적 특질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비교적 은밀한 표현을 통해서지만, 시인의 농촌시에는 오늘의 농촌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대 인식이 숨어 있다. 때로 그것은 씨앗과 총칼의 대비를 통해, 때로 농산물 수입 정책에 대한 야유를 통해, 때로 도시 집중 현상에 대한 고발을 통해 수행되고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농촌을 피폐하게 하고, 농민의 거짓 없는 순정성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의 몸살, 사랑의 슬픔이 배어난다. 김준태의 농민시가 농촌과 농민을 말하면서 건강한 자연의 친화력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견실한 현실 인식과 시대 인식을 동반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김주연의 '비생명 시대의 생명' 중에서
김준태의 시에 나타난 전반적인 시적 주제는 대체로 광주, 역사, 통일 문제로 집약된다. 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뚜렷한 해명 방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생명 존중과 사랑의 정신이다. 가령, 그의 시에서 '고향' '농촌' '밭' 등의 공간은 과거 지향적 공간을 통한 회귀 정신의 표명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 공간으로 열린 생명 사랑의 실현이다. 따라서, 그는 그에게 지워진 시적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적극적 방식으로 끊임없이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제3시집 "국밥과 희망"(1984)을 펴낸 이후 "불이냐 꽃이냐"(1986), "넋통일"(1986),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1988), "오월에서 통일로", "칼과 흙"(1989), "통일을 꿈꾸는 색주가"(1991),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1994), "안녕, 20세기"(1999) 등의 시집을 계속해서 내 놓았다. 이밖에 평론집, 수상집, 명시해설집 등 10권의 저술이 있다. 또한 그는 1996년에 중편 '시인 오르페우스는 죽지 않았다'로 "문예중앙"을 통해 소설가로서 데뷔하기도 했다. 1983년에 광주문학상과 현산문학상을, 1995년에 전라남도 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했다. 1988년부터 1997년까지 전남일보와 광주매일에서 부장을 거쳐 편집부국장으로 종사했고, 지금은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광주·전남 회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우리 대학 국어국문학부 초빙교수로 있다.
아아 光州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김준태
아아,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아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 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엎어지고,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이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不死鳥여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화정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구나
(여보,당신을 기다리다가
문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 그들은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 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난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여보!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번 죽고
한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볓 백번을 죽고도
몇 백 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영광이여,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 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고향은 황토빛 툭사발
5월 광주는 시대의 아픔
붉은 황토흙속에서 토실토실한 밤고구마가 나오는 화산면 황토땅.
옛 물고구마의 명성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소득이 짭잘한 밤고구마는 그 땅에 몸붙이고 사는 사람들에게 살아갈수 있는 생명력을 부여해주고 있다.
화산면 황토땅의 밤고구마(또는 물고구마)같은 토양에서 태어난 김준태 시인.
어느 한 평론가는 그의 원초적(모성적)시의 근원을 이 땅(밭)이라고 보았다.
누구나의 삶의 터전은 땅이지만 김준태 시인 또한 그의 시를 통해서도 알수 있듯이 땅(고향)에서 생성되는 모습들을 그의 시를 잉태하는 근원으로 삼고있다.
나는 뜨끈뜨끈하고도 달작지근한 보리밥이다/남도 끝의 툇마루에 놓인 보리밥이다/금이가고 이빠진 황토빛 툭사발을 끼니마다 가득채운 넉넉한 보리밥이다 ...
보리밥인 나를 어둑어둑한 뒷구멍으로/재빨리 깊숙히 사정없이 처넣더니 /그칠줄 모르는 방귀만 잘 새어 나온다고/돌아서서 다시 퉤퉤 뱉아 버린다(보리밥 중에서)
그의 시들에서는 초기작인 「참깨를 털면서」에서도 느낄수 있듯이 향토성이 짙게 내재되어 있는 작품들을 쓰고있다.(왼쪽시 참조)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참깨를 터는 모습을 통해 노동이 인간의 내면에서 인격화 되는것을 느끼게 해준다.
할머니의 노동은 자연에 순응하기만 하는것도 아니고 저항하기만 하는것도 아닌 그는 고향 땅이라는 토대(근본)위에서 진실을 발견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향에 대한 시들을 통해 이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의 시들이 모두다 이 고향의식에서만 머무르고 있는것은 아니다. 그의 시는 광주의 5월이 한 중요한 전기가 되기도 한다. 당시 광주민중항쟁때 전남매일신문에 실었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그가 이시대의 역사의식에 얼마나 투철한 시인이었나를 보여주며 이 시를 실으므로해서 전남매일 신문이 정간되었던 일은 잘 알려진 사건이다.
한 평론가는 대체로 고향,흙,밭을 바라보는 김준태의 마음을 고향을 떠나온 자의 고향의식과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자의 고향으로 나누고있다.
그가 고향을 떠나있을때 그는 농촌의 소외와 버려짐을 아프게 절규하는 시들을 쓰게되지만 그의 정신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때 그는 그 소외되고 짓밟힌 고향에서 더이상 무너질수 없는 큰 진실에 당도한다고 말한다.
김준태 시인은 화산면 에서 태어나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시집에는 「참깨를 털면서」를 비롯해 「국밥과희망」「아아광주여,영원한 청춘의 도시여」등의 시집이 있다.
그는 전남일보, 광주매일 기자를 거쳐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금단의 소문을 뚫고 내지를 비명 "광주여" - 글 최재봉(한겨레신문사 기자)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죽음과 죽음 사이에/피눈물을 흘리는/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우리들의 아들은/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우리들의 귀여운 딸은/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있나/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김준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1·2연).
시인 고은은 '1950년대'의 앞에 '아'라는 간투사를 더하였다.
그가 20대의 젊음으로 허위허위 통과한 그 시절을 향한 애정과 증오, 보람과 회환, 그리움과 치떨림이 그 한마디에 농축돼 있음이다.
그의 후배 시인인 김준태(48)씨에게는 광주라는 지명이 비슷한 감탄사로써 호명돼야 할 대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경우 '감탄사'라는 문법 용어는 얼마나 후안무치한 관습의 폭력일 것인가. 광주는 결코 감탄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의 맥락에서, 그리고 '그날' 이후 한국사의 흐름에서 광주는 감탄이기에 앞서 눈물과 애도와 한숨과 분노와 결의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광주'의 앞에 붙는 '아아'는 감탄사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비명이자 주문이다. 그것은 총창에 난자당한 도시를 대신해 내지르는 비명이며, 그것은 중음을 떠도는 원혼들을 부르는 주문이다.
그것은 한 저주받은 도시와 교신하기 위한 시인의 패스워드다.
"피의 학살과 무기의 저항 그 사이에는/서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자격도 없다/적어도 적어도 광주 1980년 오월의 거리에는!"(김남주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열흘 동안의 광주는 확실히 서정적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건조하지도 않았다. 으깨진 머리에서 흐르는 뇌수, 갈라진 배에서 비어져 나온 내장과 피, 그것을 목도하는 이들의 눈물과 토사물,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느라 군인들이 떨군 땀방울 따위로 광주의 거리는 질척거렸다. 그것은 차라리 엽기적이었다.
그 엽기의 주모자들은 지금 오라에 묶인 몸으로 형무소에 들어앉아 있다.
몇차례의 재판을 통해 그들의 죄상이 적어도 일부나마 밝혀지기도 했다.
12·12 쿠테타로 실권을 잡은 신군부가 집권의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광주였다는 사실쯤이야 이제는 상식 축에도 끼이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오라를 받지 않았을 때, 그들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던 때, 광주는 금기에 싸인 소문일 뿐이었다.
광주는 우리의 원죄였다. 스러진 목숨들의 숫자와 불타버린 재물의 양과는 무관하게, 그 심리적·사회적 파장에 있어서는 한국전쟁에 버금가는, 한국 현대사의 '타락'이었다.
원죄의식에 내몰린 젊은이들은 돌멩이와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섰고, 맞아죽거나 목졸려 죽거나 스스로 제 몸을 불태워 죽기도 했다.
80년대는 '광주'라는 핵을 둘러싸고 회전했다. 광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좋았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광주는 80년대의 중요한 일부였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광주가 80년대의 전부였다.
광주의 시인인 김준태씨에게 광주가 80년대의 전부였음은 당연한 노릇이다.
80년 5월 학살 당시 광주 전남고등학교 독일어 교사였던 그는 지금은 없어진 <전남매일신문>의 편집국장 대리였던 소설가 문순태(55)씨로부터 시 한 편을 써오라는 주문을 받는다. 6월 2일 오전 10시께였다.
그로부터 석간 마감시간인 오전 11시30분까지 앉은자리에서 써내려 간 것이 1백9행의 길다란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였다. 근 보름 만에 처음 나온 신문에 실린 이 시가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어떻게 읽혔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아, 우리들의 도시/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아아, 광주여 광주여/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무등산을 넘어/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아아, 온몸에 상처뿐인/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이 시를 쓰고서 시인은 스무날 남짓 잠행을 하고, 돌아와서는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은 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게끔 된다.
어쨌거나, 살육의 피냄새와 비명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에 쓰여진 이 시는 마냥 슬픔과 고통만을 짓씹고 있지는 않다.
그 슬픔과 고통을 거름 삼아 궁극적인 승리와 행복을 구가하려 한다는 데에 이 시의 미덕이 있다.
"예수는 한번 죽고/한번 부활하여/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번을 죽고도/몇 백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지금 우리들은 더욱/아아, 지금 우리들은/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광주여 무등산이여/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꿈이여 십자가여/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더욱 젊어져갈 청춘의 도시여/지금 우리들은 확실히/굳게 뭉쳐있다 확실히/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시인이 광주의 죽음에서 부활을, 아픔에서 영광을, 무덤에서 깃발을 건져 올리는 것은 5월 광주에 대한 믿음과 긍지 때문이다.
그해 5월의 열흘 동안 광주를 지배한 것이 학살과 슬픔만은 아니었다.
학살에 대한 항거, 슬픔을 딛고 나아가는 행진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해방 광주가 있었다. 학살자들에 대한 분노와 적의, 공동운명체인 이웃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있을 뿐 아무런 폭력도 차별도 없었던 대동세상이 잠깐이었을망정 그곳에 펼쳐졌던 것이다.
"금남로는 사랑이었다/내가 노래와 평화에/눈을 뜬 봄날 언덕이었다/사람들이 세월에 머리를 적시는 거리/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처음으로 알아낸 거리/금남로는 연초록 강 언덕이었다"(김준태 '금남로 사랑').
1996년 10월의 금남로는 축제 무대였다. 광주를 연고로 둔 프로야구단 해태 타이거스의 여덟 번째 한국 시리즈 우승을 이곳 사람들은 여덟 번째 손주를 본 조선조의 할아버지처럼 좋아들 했다(정치·경제적 불만의 호도이자 대리만족 기제로서 프로야구가 시작됐다는 냉정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특히 이곳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를 주어왔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야구만이 아니었다.
그해 5월의 상징과도 같은 도청 앞 분수대 주변에는 제3회 남도음식대축제, 광주김치대축제, 조선대 개교 50주년 기념 등의 각종 플래카드가 어지럽게 걸려 있다.
'전남 개도 100주년' '기회와 희망의 전남 건설' 따위의 구호를 이마에 붙인 도청 건물이, 이제는 금융 및 사무 중심가로 변한 금남로를, 솟구쳐 오르는 분수 너머로 응시하고 있다.
그 시선은 정녕 축제와 희망의 그것일 터인가.
80년 5월 계엄군에게 살해당한 '민주영령'들은 광주시 북동쪽 망월동 묘지에 잠들어 있다. 그들과 함께 그해 5월에 입은 부상으로 나중에 숨을 거둔 이들, 그리고 김종태, 이한열, 강경대 등이 역시 죽어서 이곳을 찾아왔다.
이들의 죽음이 5월 광주와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망월동 공동묘지의 5·18 묘역은 따로 초입에 새 터를 마련해 묘지 조성 작업이 한창이다.
그가 '역사의 교과서'라 일컫는 망월동 묘지를 찾은 김준태씨는 "그해 5월의 상황이 광주가 아닌 부산이나 청주 전주, 그 어디에서 벌어졌더라도 양상은 마찬가지 였을것"이라며 "광주를 특정 지역의 문제로 국한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김준태 시집평론
대지(大地)정신과 통일(統一)정신 - 김훈(문학평론가)
김준태의 시들은 다시 <밭>으로 돌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 시인들, 더구나 전라도의 황토흙을 고향으로 삼는 시인을 짓누르는 광주·5월·통일·분단·억압·외세·해방·민주 같은 시의 주제들을 모두 걸머지고 김준태는 다시 <밭>으로 돌아가고 있다. <밭>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김준태의 시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가 전원풍의 목가를 부르기 위하여 <밭>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다.
김준태의 <밭>은 이 세계에 구축된 먹이 피라밋의 최하위의 자리이고, 더 이상은 물러설 곳도, 벗어버려야 할 것도 없는 최후방의 자리이지만, 거기서부터 새로운 싸움을 밀어올려야 할 최전방의 자리이기도 한다. <밭> 위에서 인간과 자연은 서로 삼투하면서 길항 한다. <밭>은 인격화된 자연이고, 자연화된 인격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매개들은 노동이다.
김준태의 <밭> 위에서 노동은 생산을 위한 근로행위일 뿐 아니라 도덕성을 완성해나가는 인격행위로 드러나 있고, 그 <밭>은 밭의 적들조차도 그 속으로 끌어들여 썩어서 무화(無化)시켜 버리는 밭이다. 고향 또는 농촌에 대한 그의 현실적 인식은,
기차는 가고 똥개만 남아 운다
기차는 가고 식은죽만 남아 식는다
기차는 가고 시커멓게 고개를 넘는
깜부기, 깜부기의 대갈통만 벗겨진다
인정 많은 형님들만 곰보딱지처럼 남아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무덤을 지키며
거머리 우글거린 논바닥에 꼿꼿이 서 있다. -「湖南線」
같은 시행들처럼 참혹한 소외와 버려짐의 현실을 직시하지만, 그 소외된 자리의 한복판을 <거머리 우글거린 논바닥에 꼿꼿이서>서 버티는 마지막 사람들의 외로운 의지를 맞물려놓고 있다.
대체로 고향·흙·밭을 바라보는 김준태의 마음을, 고향을 떠나온 자의 고향의식과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자의 고향의식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가 고향을 떠나 있을 때 그는 농촌의 소외와 버려짐을 아프게 절규하는 시들을 쓰게 되지만, 그의 정신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는 그 소외되고 짓밟힌 고향에서 더 이상은 무너질 수 없는 큰 진실에 당도한다.
아마도 그의 시의 귀향은 광주의 5월이 한 중요한 전기가 된 것 같고, 그가 고향에서 찾아낸 진실을 <밭>의 도덕성과 포용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 진실은 때로는 단순한 것이고, 단순하기 때문에 강력한 것이다. 그리고 김준태의 시 속에서 그 단순함에 힘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그의 도저한 생명주의와 거기에 바탕하고 있는 낙관주의, 그리고 조태일이 <동물적인 기백>이라고 표현했던 거센 열정 같은 것들이다.
그는 등단시절의 한 시 속에서 <네놈이 떠나버림 밭귀퉁이에/홀로 남아서 시를 쓴다/……/네놈이 보듯이 이런 시를 쓴다>라고 썼지만, 광주의 5월 이후 그가 이룩해내 정신의 귀향 속에서 그는 그 분노와 소외의 밭귀퉁이를, 마지막으로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한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가 시로써 밀어붙이는 진실 또는 진실을 위한 싸움은 그 확실하고도 근원적인 자리로부터의 밀어올림이다. 그의 초기작인 「참깨를 털면서」는 밭 위에서 벌어지는 노동이 인간의 내면에서 인격화되면서 노동이 도덕성과 지혜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할머니와 젊은 손자가 함께 참깨를 턴다.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손자는 있는 힘을 다해 내리친다. 참깨는 마르지 않은 부분은 털어지지 않는다. 바람에 말려가면서 털리는 부분만을 털어야 한다. 마르지 않은 부분을 두들겨 패면 참깨는 모가지가 부러져버린다. 모가지가 부러져버리면 참깨는 알맹이를 거둘 수가 없다.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라고, 그 할머니는 쏟아지는 깨 알맹이에 정신이 팔린 젊은 손자를 나무란다.
그 할머니의 노동은 자연에 순응하기만 는 것도 아니고 저항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할머니의 노동은 그 둘을 한데 합치고 넘어서서 어떤 새로운 의미의 행동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노동은 인격화되고, 그 인격화된 노동이 도덕성과 지혜에 도달하고 있다. 김준태의 시들은 그 <밭>의 도덕성 위에 인간의 폭력과 허위를 썩여버리려는 열정이다. 그러므로 그이 <밭>은 순수 자연이 아니다.
그의 <밭>은 인간의 생애와 인간의 기쁨이나 슬픔, 고난과 노동 속으로 편입된 부분의 자연이다. 그의 시가 그 <밭>의 도덕성을 다른 많은 진실들이 세워질 수 있는 바탕으로 삼고 있을 때, 그의 시 속의 고향은 떠나버린 사람들의 비탄의 고향이나 남은 사람들의 악에 받친 소외의 자리가 아니라, 그 위에서 인간이 미래에 있을 갱생과 쇄신을 감히 말해도 좋을 새로운 고향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의 시 속에서 <밭>과 결부되는 진실의 하나는 <밥>이다.
국밥을 먹으며 나는 신뢰한다
국밥을 먹으며 나는 신뢰한다
인간의 눈빛이 스쳐간 모든 것들을
인간의 체온이 얼룩진 모든 것들을
국밥을 먹으며 나는 노래한다
오오, 국밥이여
국밥에 섞여 섞여 있는 뜨거운 희망이여
국밥 속에 뒤엉켜 춤을 추는
인간의 옛 추억과 희망이여 -「국밥과 희망」
같은 시행 속에 드러난 <밥>이 그가 먹으려는 밥이다.
옛 추억과 희망과 신뢰가 뒤엉켜 춤을 추는 공정의 밥은 그의 <밭>의 의미내용과 밀접하게 들러붙어 있다. 그는 <밭>이나 <밥>처럼 근원적인 것에 대한 긍정과 사랑을 심화시켜나가면서, 만원버스 속에서 붐비는 <사람>들에 대한 논리를 초월한 사랑에 도달하기도 하고 꼼지락거리는 아가의 발가락 위에 미래와 희망을 건설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살육의 거리 금남로에서 다시 돋아나는 목가를 결국은 노래할 수 있게 된다.
「금남로 사랑」이라는 그의 시는 그 살육의 거리를 밭고랑, 강언덕, 고향 어머니 같은 언어 속으로 끌어들여, 인간이 단지 인간인 이유로 해서 보장되는 희망의 힘을 노래하고 있다.
<금남로>라는 거리의 시대사적 기성 이미지에 과도하게 의지하고 있는 것은 그 시의 한 결함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시는 피와 죽음을 썩여서 넘어서는 생명주의의 넉넉한 힘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가 광주의 5월 이후에 다시 만난 <고향·밭·밥·사람> 같은 진실들을 밟고 80년 5월로부터 「금남로 사랑」에 이르는 시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참깨를 털던 시인의 할머니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 할머니는 열여덟 살 적에 빤히 보이는 앞섬에서 뭍으로 시집을 왔다. 할머니는 칠순이 넘도록 뭍에서 살았지만, 건너다 보이는 섬의 고향이 그리워서 고사리 캐러 간다며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바다를 건너다보며 울었다고 한다. 지금 할머니는 그 산중턱에 묻혀 있다.
당신보다 먼저 간 남편과 아들, 며느리의 무덤 옆에 할머니는 묻혀 있다. 할머니의 무덤은 산비탈 아래로 펼쳐지는 참깨밭과 고구마밭의 황토 흙을 내려다보고 있다. 황토가 끝난 곳에서부터 바다가 시작되고, 할머니의 고향인 앞섬은 해풍에 밀리는 아지랑이 속에서 멀거나 가까웠다.
남편은 돈 벌러 일본땅을 흘러다니고 아들은 남방으로 징용 끌려가 버린 사내 엇는 오랜 세월을 노을이 떨어진 논두렁과 밭두렁에서 <홀로 땅을 닦으며 사시던> 그 할머니는 경으로도 선으로도 깨칠 수 없는 한 큰 진실을 시 쓰는 대학생 손자에게 심어주고 생애을 마감했다. 할머니의 죽음은 쓰라린 사별만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당신이 참깨를 털고 고구마를 캐면서 흔들리거나 더렵혀질 수 없는 도덕성과 지혜를 확보했던 그 산비탈 밭가장자리 무덤 속에서 시인의 시골집 안방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할머니의 죽음은 쓰라린 사별이라기보다는 한 생애의 완성이며 자연 속에서 인간의 가장 온당한 자리매김으로 보였다. 사내들이 없는 그 황토밭의 공허를 할머니는 자신의 전생애를 내던져가며 메웠다. 황토밭에서 농부들이 무를 캐내고 있었다. 지난해 김장 때 무값이 똥금이 되어버려 억울해서 팔지 못하고 흙 속에 묻어두고 겨울을 났으나, 봄이 와서 다시 캐어보니 역시 값이 맞지 않는다고 농부들은 말했다. 황토흙의 그 부드러운 속살은 보온과 통풍을 스스로 조절하는 것이어서 겨우내 흙속에 묻혀 있던 무들은 전혀 냉해를 입지 않았고, 갓 뽑아온 것처럼 푸르고 싱싱했다. 값이 맞지 않지만, 밭에 봄작물을 심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무를 캐서 팔 수밖에 없다고 농부들은 말했다.
"아 제미럴, 우린 당했으면 당했지 속이지는 않았어!"라며 한 늙은 농부는 손에 쥔 무를 내팽개쳐버렸다.
"나에게 고향의 의미는 맹목적 복고주의의 친화력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인간의 본직을 경건하게 연마시키는 작업이다. 나는 그 힘이 당대의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큰 원초적인 힘이 될 것을 믿는다"라고, 해남을 떠나면서 그 시인은 말했다.
(출처 : http://haenamculture.pe.kr/cul6-4kimjunte.htm)
참깨를 털면서/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감상>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중략)/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5·18광주항쟁을 최초로 형상화한 이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썼던 시인이 바로 김준태(60) 시인이다.
이 시는 1980년 6월 2일자 전남매일 1면에 일부 게재되었고, 전 세계 외신을 타고 나라 밖으로도 알려졌다. 이 시 발표 후 전남매일은 강제 폐간되었고, 김준태 시인은 재직하던 전남고교에서 해직되었다. 이 일례는 그의 문학적 이력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하다. 진보적 문인인 김준태 시인은 시를 통해 대동세상(大同世上)에의 열망을 노래해왔다.
남도의 입심을 잘 살려가며 시를 써내는 김준태 시인. 그의 시 세계의 원적(原籍)은 농민시이다. 첫 시집 《참깨를 털면서》에서도 그랬고, 그 이후 발표한 〈밭시〉 연작에서도 그랬다. "칼과/ 흙이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흙을/ 찌른 칼은/ 어느새/ 흙에 붙들려/ 녹슬어버렸다"(〈칼과 흙-밭시(詩) 52〉). 그는 흙의 건강한 생명력을 강하게 신뢰하는 시인이다.
시 〈참깨를 털면서〉는 김준태 시인의 데뷔작이다. 밭에서 할머니와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가 참깨를 털고 있다. 할머니는 깻단을 슬슬 막대기질 하지만, '나'는 산그늘이 내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조바심을 낸다. 명령하듯 깻단을 한번 내리치면 복종하듯 솨아솨아 쏟아지는 깨알들이 기막히게 신기하고 신이 난다. 그예 모가지까지 털다가 꾸중을 듣는다. 목숨 가진 것에 대한 조금의 외경도 포용도 없이 무턱대고 털어대는 쾌감에 정신없으니 왜 혼나지 않겠는가. 이 시를 읽으면서, 인간의 본직을 잘 잊고 사는 나도 할머니 곁에서 참깨를 털며 한 차례 꾸중을 듣고 싶어진다. 참깨농사뿐만 아니라 사람농사까지 원융(圓融)하게 지어온 그 할머니로부터 꺼끌꺼끌한 사투리로 꾸중을 듣고 싶어진다.
준엄한 역사의식으로 당대에 대응해 우직하게 노래하는 김준태 시인의 또 다른 관심사는 통일문학이다. 말을 구부리거나 곧은 문장을 비틀어서 만든 시가 아니라 '심장을 싸늘하게 감싸는' 시를 찾는다는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언제나 안테나의 촉수가 쉴 새 없이 작동되어야 하고 상황이 타전이 되어 오면 재빠르게 이웃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혹은 예언의 나팔을 불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이름하여 시인이 아니던가." 현실로부터 비켜서지 않는 그의 열정은 폭포수 같다 할 것이다.
[문태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