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회: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 4>를 보고 나서
이승하
2023. 4. 7.
김종회 선생님께서 문학마실에 올려주시는 유튜브를 보면서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 이번에는 ‘한민족 디아스포라문학’ 시리즈 네 번째로, ‘현해탄과 태평양을 건너간 이주민 문학/ 일본 조선인 문학, 미주 한인 문학’을 소개해주셨다. 선생님의 열강을 듣고 몇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https://youtu.be/PnvnCmNu9gA
1443년, 조선조의 제7대 왕인 세종이 학자들과 함께 연구하여 만든 문자가 ‘한글’이다. 중국으로부터 한자를 배워 썼던 역대 왕조와 지배계급은 표의문자인 한자를 썼기 때문에 백성들은 우리말을 글자로 옮겨 쓸 수가 없었다. 말은 우리 식으로 구사하는데 글자는 한자로 써 말과 글이 다르기도 했다. 애민사상을 갖고 있던 세종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해 새로운 문자인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하였고 3년 뒤인 1446년에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내 나라 안에 널리 알렸다. 그런 한글을 우리는 지금까지도 쓰고 있는데 현재의 한글은 자음 14자, 모음 10자를 합쳐 24자다.
한글로 쓴 문학작품을 한국문학이라고 한다. 근년에 들어 해외로 이주한 교포가 그 나라의 언어로 쓴 작품도 한국문학의 외연을 넓히자는 의미에서 한국문학으로 인정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문학은 한글로 번역되기 전에는 그 나라의 ‘이민자 문학’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ㆍ재일교포 문단
일본은 한국에 대해 36년 동안 식민지 지배를 했었고, 한국 근대문학 초기에는 대다수 문인이 일본에 유학을 갔다 왔다. 즉, 일본문학의 영향권 아래서 한국의 근대문학이 전개되었다. 일본어로 쓴 한국 작가들의 작품 수도 엄청나게 많다. 『近代朝鮮文學 日本語作品集』이 일본에서 9권짜리 전집으로 발간되었는데 방대한 분량이다. 엄청난 수의 문인이 일본어로 작품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식민지 지배를 장기간 받는 과정에서 일본에 가서 정착한 재일교포도 많아서 1944년 일본의 통계를 보면 193만 6,843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다. 광복이 되어서도 일본에 60만 명 이상이 일본에 남아 재일교포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동경제국대학 독일문학과에 재학중인 김사량이 1939년에 쓴 「빛 속에」라는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처음 오른 이후 김석범ㆍ정승박ㆍ이기승ㆍ김학영 등이 후보에 올랐고, 김학영은 네 번이나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하지는 못했다. 이회성도 후보에 다섯 번째로 오른 작품이 수상작이 되었다. 김석범은 제주도 4ㆍ3학살을 다룬 『화산도』를 일본의 문예지 『문학계』에 5년 이상 연재했는데 아사히신문사에서 주는 오사라기지로상(大佛次郞賞)과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을 받았다. 보고사에서 12권 전집이 나와 있다.
재일교포 작가 중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아쿠타카와상을 탄 이는 이회성ㆍ이양지ㆍ유미리ㆍ현월 네 명이다. 이회성이 1972년에, 이양지가 1988년에, 유미리가 1996년에, 현월이 1999년에 이 상을 받았다. 일본에 귀화를 했다면 일본 이름으로 수상했겠지만 이들은 당당하게 ‘재일 조선인’ 이씨, 유씨, 현씨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일본에서 주는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일본에 살면서 한글로 작품 활동을 한 사람은 수필가 김소운, 시인 김시종이 있다. 일본의 한글문단은 1962년에 창간된 『한양』으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발간이 되기는 했지만 주요 필자는 한국의 문인이었기에 일본의 한글문단 형성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다만 『창작과 비평』 창간 이전에 참여문학과 리얼리즘문학의 이념 성립에는 일정한 역할을 했다.
『한양』 이후에 일본에서는 한글문단의 존립이 쉽지 않았다. 양석일 같은 작가가 일본에서 크게 인정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도 모두 일본어로 쓴 것이다. 양석일의 장편소설 『밤을 걸고』는 북송의 실상, 북송 당시 북한 당국과 조총련의 회유와 선전의 실상, 북한에 간 재일교포들이 겪은 북한의 실상 같은 것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의 소설 중 『피와 뼈』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택시 광조곡)』 『어둠의 아이들』은 일본에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ㆍ재미교포 문단
재미교포 문단에서는 LA 쪽에서 사는 분들의 활동이 활발하다. 한글 계간지인 『미주문학』이 창간된 것이 1982년인데 지금까지 결호 없이 발간해오고 있다. 1991년에 창간호를 낸 『뉴욕문학』도 수십 개의 성상을 쌓고 있다. 『시카고문학』과 『워싱톤문학』도 각 지역 교포들의 삶과 꿈을 담아 펴내고 있고, 애틀랜타를 거점으로 한 『한돌문학』도 있다. 미주이민문학회와 미주크리스천문학가협회에서 창립 24주년을 기념해 작품집 『미주이민문학』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의 꾸준한 한글문학 작품 활동이 국내 문단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수준이 낮기 때문일까?
물론 재미교포 문단에서 발군의 실력을 갖춘 이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한국 국내문단에서 그들이 한글로 쓴 작품이 연구되고 평가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민 1세대건 1.5세대건 재미교포가 한글로 쓴 작품이 작품성 내지는 문제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제일 첫 번째 요건이다. 한국문단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작가를 발굴하고, 문학적 담론을 끌어내고, 도전적인 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재미교포 작가 하면 소설가 송상옥과 시인 고원, 박남수, 마종기, 전달문 등을 떠올리게 된다. 이 가운데 4명이 고인이 되었다. 즉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거나 키워내는 일을 재미문단의 어른들이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원로들만의 잘못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젊은이들의 관심사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재미한인의 수가 200만 명이므로 인적 자원이 적은 것은 아니다. 재미교포 문인들이 문학판이 활성화될 수 있게끔 노력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는 잡지마다 발표 지면의 역할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국내의 문학평론가와 연구자들을 끌어들여 쟁점을 제기하고 개선점을 찾아내고 비전을 제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근년에 박경숙 같은 재미 소설가가 국내 문단에서 주는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통영문학상, 미주에서 주는 가산문학상, 연변소설가협회에서 주는 두만강문학상 같은 상을 받아 재미 한글문단의 수준을 높인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영어로 작품을 쓰는 이들이 있다. 미국 문단에서 인정을 받은 이는 소설가 강용흘ㆍ김용익ㆍ김은국ㆍ차학경ㆍ이창래ㆍ린다 수 박ㆍ수잔 최ㆍ노라 올자 캘러 등 한두 사람이 아니다. 시인은 캐시 송이 대표자주라고 할 수 있다. 재미교포 작가인 김은국의 『순교자』나 『빼앗긴 이름』, 이창래의 『네이티브 스피커』나 『제스처 라이프』 같은 작품은 미국 내에서도 크게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물론 영어로 쓴 것이며, 한글 번역본이 국내에 출간되어 있다.
ㆍ재중국 조선족 문단
중국의 동북 3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재중국 조선족은 한중수교(2002년) 이후 많은 이들이 취업을 위해 한국으로 건너옴으로써 급격히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언어 소통에 별 지장이 없다. 그래서 2002년 이후 ‘연변 아줌마’를 식당 같은 데서 만나는 것이 아주 쉬워졌다.
재중국 조선족 문단의 소설가 김학철, 시인 리욱ㆍ김철ㆍ리상각ㆍ석화 등이 국내에도 꽤 알려져 있다. 재중국 조선족은 한글로 작품을 쓰는 이점이 있는데 수준이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다. 그 이유는 분단 이후 북한과는 계속 교류를 했는데 남한과는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20세기 말까지 재중국 조선족 중학교(초급중학교)와 고등학교(고급중학교) 학생들이 공부한 교과서 『조선어문』에는 조기천의 시가 4편이나 실려 있는데 2004년에 시작되어 2008편에 개편이 완료된 교과서에는 북한 시인들의 작품이 한 편도 없다.
북한의 문학은 인민성과 당파성에 입각해 사상을 주입시키려는 의도로 쓴 것이 많다. 무려 50년 동안 북한 문학의 영향을 받으며 창작한 재중국 조선인 문단의 작품인지라 독창적이거나 획기적인 작품이 눈에 뜨이지 않는다. (필자는 그 동안 학술지에 재중국 조선인의 시를 연구한 논문을 4편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연변문학』 『도라지』 『북향』 등 문예지가 꾸준히 발간되고 있고 한글 시집도 100권 이상 간행되어 문학인의 인적 자원은 풍성한 편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동북 3성의 조선인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문예지의 앞날도 그리 밝지는 않아 보인다. 재중국 조선인들은 조상의 고향은 조선이고 자신의 조국은 중국이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이것이 문학 창작의 근간이 되기도 했는데 이제는 젊은 세대들이 중국 본토로 이주해 감으로써 재중국 조선족 문단의 약화는 불가피한 일이 되고 말았다. 재중국 조선족 시인들을 연구한 학자로는 소재영ㆍ황송문ㆍ윤윤진ㆍ정덕준 등이 있다.
ㆍ중앙아시아 고려인 문단
중앙아시아에 있는 카자흐스탄ㆍ우즈베키스탄ㆍ타지키스탄ㆍ키르기스스탄 등에서 살고 있는 한민족을 가리켜 고려인이라고 한다. 이들은 1860년경부터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를 해간 우리 조상의 후손인데 특히 사할린 섬은 러일전쟁 때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가 소련이 되찾은, 역사적으로 분쟁의 소지가 있는 곳이다.
스탈린이 1937년에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에 살고 있는 조선인 20만을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으로 이주시켰으니, 그 유명한 ‘고려인 강제이주’다. 그는 일본의 러시아 극동지역 침략에 대한 우려를 느끼고 있었다. 이 지역 조선인이 화근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해 주민들을 몽땅 90회 이상 수송열차에 실어 이주케 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우리 민족이 살게 되었다.
허허벌판에 이주를 시킨 이후 소련 당국은 고려인들에게 학교 교육의 과정에 한글 교육을 전혀 넣지 않아 강제이주를 한 당사자 아래 세대는 한글로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고려인 2세대, 3세대 중에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소설가 아나톨리 김, 러시아 국내의 각종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겸 화가인 박 미하일,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각종 문예지에 시가 실리고 있는 이 스따니슬라브 같은 실력 있는 문인이 있지만 우리와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자양이 완전히 다를 뿐 아니라 러시아어로 창작되기에 번역과 출간에 어려움이 있다.
80년대 말에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이민을 간 최석 시인이 『고려문화』라는 문예지를 내면서 양국간 문화와 문학 교류를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90년대에 이민을 간 김병학이 이 스따니슬라브의 시집을 한역하고 고려인들의 구전가요를 집대성한 『재소고려인들의 노래를 찾아서』 같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하지만 모국어를 잃어버린 고려인들이라 한글 문단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ㆍ한국 디아스포라 문학
20세기 말부터 한류는 전 세계에 한글 교육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한글을 배우려는 외국인에게 원어민 교육을 하는 대학원생이 늘고 있는데 이제는 우리 문화를 얘기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민의 역사도 곁들여서.
외교통상부에서 발행한 『외교백서』를 보니 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 교민의 수가 750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좁디좁은 한국을 떠나 6대주에 나가 살고 있는 교민의 수가 이렇게 많다니 한국인의 저력이 놀랍다.
750만 이민의 역사는 조선왕조 말기와 대한제국 시대에 만주와 연해주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기근을 못 견뎌, 탐관오리의 학정을 못 이겨, 죄를 짓고 국경을 넘어간 사람들이 있었고,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상해로 가서 광복을 꿈꾸었다. 강점기 말기에는 일본으로 간 조선인의 수가 200만에 육박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노동자 28만 명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미주문인협회의 초청으로 2006년과 2007년에, 미주시문학회의 초청으로 2009년에 미국 LA에 가서 특강을 한 후에 현지의 교민 문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호주 시드니에서 발행하는 한호일보의 초청으로 시드니에 4년 연속 갔다 왔다. 한호일보 주관 신춘문예 시상식에도 참석했다. 시상식장에서 수필 수상자의 남편인 할아버지가 아들과는 한국어로, 손자와는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보고 비애를 느꼈다.
연구자로서 다년간 해외동포들이 쓴 문학작품을 보고 있는데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교포 1세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창작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눈물을 글썽이며 달을 본다. 또 하나는 현지어 습득 과정에서 세대간의 갈등이 불거진다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 이민을 간 1세대는 현지어 습득이 쉽지 않다.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온 1.5세대는 학교에 다니면서 빨리 현지에 즉응한다. 현지에서 태어난 2세대는? 부모나 조부모의 노력이 없다면 한국어를 할 줄 모른다. 말은 해도 글은 쓸 줄 모은다.
교민들은 모국어로 작품을 쓰고 있다. 애국심에 충만하여, 향수를 담아 쓴 작품을 본국에서는 외면해 왔다. 나는 ‘그들만의 리그’를 이룬 교민의 작품을 보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수준 향상을 위해 조언도 해주었다. 이들의 모국어 사랑이 눈물겨웠다. 이민 2세대, 3세대에게 한글의 아름다움을 알려 한국을 찾게 하자.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얘기해주자. 디아스포라 문학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필요한 시대에 김종회 선생님이 큰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