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를 생각한다
박 창 길
“음무~음무~.” 울음을 묶어 수송차에 싣는다. 가축 경매장에 들어서자 사람 소리와 소 울음소리로 시끌벅적하다. 곧 대형 전광판이 붉은 숫자를 내뱉기 시작한다. “경매 번호 185번! 응찰을 시작하세요. 중량 500kg 최저가 350만 원입니다. 3초 후에 경매를 종료하겠습니다.” 동상이몽,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마음이 같은 모습 다른 마음이다. 수백 개의 눈이 한 곳을 향하고, 추운 날씨에도 손바닥에 땀이 고인다. “9번 응찰자에게 420만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언 손 녹이며 황소 고삐를 잡고 낙동강 다리를 건넜다. 핏덩이 둘을 내리 잃은 어머니는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다음에 낳을 아이들을 살릴 수 있을지 간곡히 물었다. 무당은 고향을 등져야만 살 것이라 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서둘러 가산을 처분하고 소달구지에 어린 딸아이를 태웠다. 오랜 삶의 터전을 등진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일당 벌이를 위해 소달구지 끌고 하루에도 열댓 번 해평 낙동강 변을 오갔다. 샛강에 저녁노을 비치면 종일 모래를 실어 나른 황소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아버지는 피곤한 몸을 막걸리 두어 병으로 씻었다. 그러고는 별빛을 이불 삼아 달구지에 누웠다. 멍에를 짊어진 황소는 터벅터벅 달빛을 안고 천관녀의 집으로 가는 김유신의 말처럼 외양간으로 돌아갔다.
평생 소와 함께 흙에서 살던 아버지가 소 네 마리가 담긴 낡은 외양간을 남기고 흙으로 돌아갔다. 그 외양간이 오늘 소란하다. 암소 한 마리가 어린 황소 등에 올라탄다. 어린 황소는 그 무게를 즐기지 못하고 도망가기 바쁘다. 발정이 난 암소는 배란기 때마다 암수 구별 없이 쫓아다닌다. 황소는 괴롭지만, 나에게는 기쁜 소식. ‘그’의 손길이 필요하다.
농장에 트럭 한 대가 도착한다. 그는 트렁크에 실린 영하 190도 액체질소 통에서 정액이 담긴 기다란 빨대 하나를 꺼내더니 융해기에 넣어 36도로 맞춘다. 일이 분 후 그것을 인공수정 주입기에 꽂는다. 내가 고삐를 기둥에 바투 붙들어 매니 소가 불안한 듯 콧김을 씩씩거리며 내뿜는다. 소의 더운 김이 내 콧속으로 들어온다. 나도 후끈 달아오른다.
소는 왕방울 같은 눈을 껌벅이며 언제 소란을 피웠냐는 듯이 순종한다. 수소와 잠자리 한번 해 보지 못한 채 금속 막대기의 삽입으로 성스러운 의식을 치른다. 그날 밤 신랑 없는 신방이라도 꾸며 주고 싶었다. 경운기에 마대를 싣고 낙엽을 구하러 간다. 산비탈에서 긁어모은 붉은 벚나무 잎을 신방에 깔았다. 비록 원앙금침은 아니지만 푹신하고 잘 익은 가을 속에서 태몽 꾸기를 바랐다.
한 달 후 그녀는 달라졌다. 황소 보기를 돌같이 했다. 같이 사는 소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도도하게 뿔로 치고 그래도 안 되면 뒷다리를 치켜들었다. 그녀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잠자리를 주고 싶었다. 농장에 기거하며 소들의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가 늙은 호박을 삶아서 특별 제공하고 된장 끓인 따뜻한 물도 먹였다. 나는 그녀의 방에 왕겨를 두둑이 깔아주었다.
열 달 후 이슬이 비친다. 곧 출산할 것 같아 마음을 졸인다. 새벽,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가보니 새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다. 수건으로 점액질이 묻은 털을 닦아주니 금방 일어선다. 놀라움 그 자체다. 놔두면 어미가 핥아주지만, 날씨가 추워 모녀에게 빨리 안정을 찾게 해주고 싶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송아지가 젖을 빨지 않는다. 머리를 잡고 끌어서 퉁퉁 불은 젖에 갖다 대도 입을 벌리지 않는다. 젖 맛을 보여주려고 젖을 손으로 짜서 억지로 입을 벌려 먹인다. 맛을 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돌린다. 힘이 없는지 계속 누워만 있다. 속이 탄다.
문득 첫아이 태어나던 날이 떠오른다. 서울에서 근무하던 때라 아내는 예천 처가에 내려가 있었다. 아침에 병원에 간다는 연락을 받은 뒤 밤이 새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전화기를 안고 자고 깨기를 반복했다. 다음 날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애꿎은 장모님만 들볶았다. 순산했다는 전화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그때처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가보니 송아지가 일어나 걸어 다닌다. 기특하다. 모정을 표현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소도 차이가 있다. 어떤 소는 송아지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근처에 가면 달려와 뿔로 떠받는다. 이번 산모는 송아지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가 젖을 먹이고 수시로 핥아준다. 안심이다.
소 판 돈이 들어왔다. 시세로는 괜찮다지만 받는 돈은 항상 기대에 못 미친다. 머릿속으로 38개월 사룟값을 계산한다. 경매장 수수료와 수송비, 남는 것이 없다. 아버지가 남긴 소는 황송아지 한 마리만 낳고 더 이상 임신하지 못했다. 서너 번 인공수정을 시도했지만 헛수고였다. 그 소는 공밥을 먹는 소로 전락했고, 오랜 시간 함께했지만 팔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가족 같은 소는 옛말이 되었다. 소에게 미안하다.
식구가 느니 사료 사러 가는 날이 자주 돌아온다. 그날은 사료 담당 어머니와 데이트하는 날. 축협 사료 창고에 가면 어머니는 먼저 커피 자판기를 찾는다. 뜨겁고 달금한 공짜 커피 한 모금에 미소가 번진다. 사료 포대를 싣고 돌아오는 길에 신평시장에 들른다. 자꾸만 앞서는 내 발걸음이 미안하지만, 보조를 맞추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소를 키우면서 먹이 담당 어머니와 축사 관리를 맡은 내가 손발이 잘 맞는 것과는 다르다. 어머니는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끌고 다닌다고 투덜대면서도 힘든 기색이 없다. 반찬 가게에 들러 콩잎이며 창난젓 검정콩을 비닐봉지에 담는다. 자식처럼 소를 보살피는 어머니에게 내 마음도 한 줌 보탠다. “어머니, 맛있는 수제빗집 있는데 먹고 갈래요?” 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임영웅 사진으로 도배된 식당에 'ㄱ'자로 굽은 할머니가, 다정하게 들어서는 우리를 보더니 한마디 건넨다. “혹시 옆에 계시는 분이 어머니세요?” “아니요, 큰누님이에요.” 하니 할머니의 허리가 ‘1’자로 펴지며 시원하게 웃는다. 덩달아 어머니 입도 귀에 걸린다. 오랜만에 어머니의 지갑이 햇빛을 본다. 식탁 위에 수제빗값이 먼저 자리를 잡는다. 기다리는 답이 아닐 때 웃음이 터지고, 그 웃음은 허리를 펴게 하나 보다.
샛강에 어둠이 내리고, 농사꾼 아버지처럼 낡은 외양간에 겨울바람이 세차게 몰아친다. “야야, 소 춥다. 천막 내려라.” 하는 아버지의 말이 환청처럼 들린다. 군데군데 헤진 천막을 묶은 끈을 푼다. 그 끈에 보풀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