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토벤(Beethoven) / 교향곡 5번 "운명" (Symphony No.5 'Schicksall')
배나무고개(梨峴)
2012. 4. 23. 06:30
Symphony No.5 in C minor, Op.67 "Schicksall"
베토벤 / 교향곡 5번 "운명"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작곡: 1807~1808년
초연: 1808년 12월 22일, 빈의 안 데어 빈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초연
출판: 1809년
헌정: 로프코비츠 후작과 라주모프스키 백작
편성: 플룻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현 5부, 그리고 4악장에서만 피콜로, 콘트라파곳, 트럼본 3
*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conducted by MYUNG-WHUN CHUNG Live at the Seoul Arts Center - 2006, Jan,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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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교향곡 5번 운명) 제1악장 소나타형식 Allegro con brio
(1). 소나타 형식. 교향곡 역사상 드물 게 보는 격렬함을 지닌 악장이다. 더욱이 이 악장은 서로 현저하게 대비되는 두 개의 주제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처음의 [운명의 동기]의 제1주제이다. 이 주제에서는 페르마타가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2주제는 호른에서 시작되어 바이올린이 부드럽게 노래한다. 그 반주에서도 '운명의 동기'를 들을 수 있다.
발전부는 거의 제1주제를 취급한다. 재현부는 물론 제시부의 재료를 차례대로 재현하며, 제1주제와 제2주제 사이에 아다지오로 템포를 늦추어 오보에 의한 짧은 카덴차를 삽입한 것은 진기한 느낌을 주며 긴장을 풀어준다. 또한 제2주제의 재현은 파곳에 의해 유도된다. 제시부에서는 호른이 그 역할을 맡지만 재현부에서는 호른으로는 연주가 어려웠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계속 파곳이 연주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호른으로 연주하게 하는 지휘자도 있다. 마지막 코다도 제1주제에 의한 전개풍의 것으로 충실한 느낌을 갖게 한다.
(2). 네 개의 음으로 된 그 유명한 제1주재가 힘차게 연주된다. 이 것은 남성적이고 장쾌하고 호방하다. 이 주재는 여러 모양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면서 곡은 클라이맥스로 향하여 박진감이 더해진다. 호른 독주의 브릿지에 이어 바이올린, 클라리넷, 풀륫이 차례로 제2 주재를 부드럽게 연주한다. 보통 제1주재가 남성적이면 제2주재는 여성적이고 부드럽게 구성되어 조화를 이루어 나간다. 발전부에서는 화려한 음색의 호른의 연주에서 시작하여 시종일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주재는 종횡무진한 활약을 거듭하여 드디어 최고의 정점에서 재현부로 이어진다. 매력적인 오보의 Adagio 연주가 잠간 휴식감을 주고는 다시 박진감을 더하여 나가다가 화려한 코다로 장엄한 끝마침을 한다.
1. Beethoven / Symphony No.5 (운명) 제1악장 - Myung-Whun Chung, Seoul Philharmo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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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교향곡 5번 운명) 제2악장 변주곡 형식 Adagio con moto
(1). 두 개의 주제를 사용한 변주곡이다. 처음에 저현부에서 연주되는 제1주제와, 이어 목관에 의한 제2주제가 나타난다. 이어 제1주제 변주, 제2주제 변주, 다시 제1주제의 변주가 연주되며,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경과부 후에 제1주제의 변주 2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다가 나타난다. 전체는 제1악장과 같은 격렬함을 지니지 않으며, 오히려 위안의 느낌을 주는 부드러운 감정을 지니고 있으나 어두운 부분도 있다.
(2). 변주곡 형식이지만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성이다. 비올라와 첼로가 연주하는 주재가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역시 곡은 전체적으로 긴장감도는 구성이다. 처절하게도 위풍당당한 제2주재가 상행의 가락을 연주하면서 박진감으로 넘쳐나게 곡을 이끌어 나간다. 이어 1, 2, 3의 변주가 곡을 수놓아가면서 사이사이에 힘찬 제 2주재를 넣어 더욱 처절하게 운명과 싸움을 계속하여 나가는 것이다. 로망롤랭은 이 악장을 베토벤이 운명과 엎치락뒤치락 투쟁하는 장면을 그린 것 같다고 표현하였다.
2-1. Beethoven / Symphony No.5 (운명) 제2악장(1/2) - Myung-Whun Chung, Seoul Philharmonic
2-2. Beethoven / Symphony No.5 (운명) 제2악장(2/2) - Myung-Whun Chung, Seoul Philharmo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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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교향곡 5번 운명) 제3악장 스케르쪼와 트리오 Allegro
(1). 3부 형식. 깊고 어두운 심연에서부터 치솟아오르는 듯한 저음 현의 주제로 시작하고, 운명의 동기가 변형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중간 트리오는 c단조로 현의 저음역에서 시작하며, 순차적으로 고음역으로 옮겨가는 푸가토가 된다. 베를리오즈는 이 부분을 '코끼리의 춤'이라고 한 바 있다. 베토벤 다운 유모어가 담긴 부분이다. 이후 제1부를 조금 변형한 부분이 나온다. 그리고 조용해진 후, 무섭게 꿈틀거리며 조금씩 힘을 배가시켜 나간다. 점점 힘을 증대시켜 폭발할 즈음 제4악장이 시작된다.
(2). 스케르쪼의 주재는 상행하는 분산화음형의 가락으로 나타나지만 곧 이어 운명의 주재가 그 모양을 바꾸어 다시 3박자로 나타난다. 두 개의 주재가 번갈아 주고 받다가 트리오 부분으로 넘어간다. 트리오 부분은 푸가기법이 도입되어 박진감 넘쳐 나면서도 조용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다시 스케르쪼가 나타나고 드디어 폭풍 전야의 고요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3. Beethoven / Symphony No.5 (운명) 제3악장 - Myung-Whun Chung, Seoul Philharmo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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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교향곡 5번 운명) 제4악장 피날레. 소나타형식 Allegro
(1). 소나타 형식. 강렬하며 기쁨이 넘치는 모든 오케스트라 악기가 연주하는 승리의 노래인 제1주제로 시작한다. 베토벤의 신념인 "고뇌를 통해 환희로"가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제2주제는 바이올린에 의해 춤추듯 쾌활하게 연주된다. 발전부는 제2주제를 중심으로 나아가며,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때 스케르초에 대한 추억을 회상한다(이 회상 수법은 교향곡 제9번에서 결실을 맺는다). 그리고 제3악장의 마지막에서처럼 힘을 증대시켜 폭발할 듯이 돌진하며 제1주제가 다시 나타나 재현부로 들어간다. 이어 제2주제가 다시 등장하며 제1주제가 다시 나타나 재현부로 들어간다. 이어 제2주제가 다시 등장하여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소리 높여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곡은 강하고 화려하게 마무리된다.
(2). 3악장의 끝에서 폭풍전야의 고요함은 크레센도 되다가 악장 사이의 중단이 없이 드디어 폭발하여 승리의 함성을 내어 지르는 제1주제를 튜티로 연주한다. 베토벤은 드디어 운명과의 처절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승리의 함성을 내어 지르는 것 같다고 로망롤랭이 말했다. 그래서 이 퓽揚?‘승리의 악장’이라고도 불린다.
1, 2, 3 악장은 사실 이 4악장을 향하여 힘을 축적시켜 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연결부분을 거쳐서 제2주제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연결부분과 코데타를 거쳐 곡은 힘차게 발전부를 향해 나간다. 제1주제와 제2주제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발전부는 힘찬 발전을 계속하다가 잠시 3악장의 끝부분 폭풍전야를 만들었던 부분을 다시 내 세운 다음 재현부로 돌입한다. 이 곡의 특징인 대단한 규모의 코다로 화려한 끝을 장식한다.
4. Beethoven / Symphony No.5 (운명) 제4악장 - Myung-Whun Chung, Seoul Philharmo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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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교향곡 5번 운명) 작품 배경 및 해설
1828년 어느 날 파리 국립 음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대학의 대 강당에서는 베토벤의 제 5번 교향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많은 음대 교수들과 유명한 작곡가, 지휘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 위대한 작곡가의 걸작품이 연주되게 된 것이다. 다음은 이 대학의 교수였던 브리엔느씨가 이 연주회에 참석하였다가 그의 자서전에 남긴 글 한 도막이다.
“나는 그날 이 유명한 음악가의 작품 연주에 초대를 받고 좌석에 앉았습니다. 드디어 장쾌한 음악의 연주가 시작되자 청중들은 숨을 죽이고 빠져들었습니다. ……… 드디어 음악회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박수를 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박수 칠 생각을 그만 잊어버린 것입니다. 한참 후에 누군가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드디어 청중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여 나도 박수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모자를 집어 들고 머리를 찾으니 머리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
그런데 이 곡이 [운명]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까닭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 때문이다. 그의 제자이며 베토벤의 전기(傳記)로서 유명한 신틀러가, 하루는 이 곡의 제1악장 서두에 나오는 주제의 뜻을 물었더니 베토벤은,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하면서, 힘찬 몸짓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이 교향곡은 [운명]이라는 참으로 극적(劇的)인 제목으로 불리게 되었고, 또 그것이 인기를 높이는 큰 원인이 되고 말았다. 물론 그것은 베토벤의 비통한 생애와 너무나도 잘 통하는 말인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 [다다다다-] 하고 두드리는 동기(動機)는, 베토벤이 비인의 공원을 산책하다가 들은 새소리를 소재로 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가 새삼스럽게 발명해 낸 것은 아니다.
속에서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도 이미 썼던 것이다. 게다가 이 4개 음부(音符)의 움직임이라는 것이,실은 아무 변화도 가락도 없는, 말하자면 아무 데나 뒹굴고 있는 돌무더기같은 것이어서, 그것만으로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훌륭한 계산에 의해, 전곡을 통하여 완벽한 구성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극적(劇的)인 장대(壯大)한 음의 확산(擴散)이 되어서 만인을 한결같이 감격케 한다. 정히 하나의 경이(驚異)라 아니할 수 없다.
음악학자 리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이 교향곡은 끝악장을 목표로 진행되며, 전체가 그렇게 계획된 것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분석은 옳다. 왜냐하면, 제 1악장 서두의 [다다다다-]라는 모티프가 이 악장만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 3악장에서도, 제 4악장의 재현부 직전에서도 변형되어 나타나서 전 악장을 튼튼히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1882년 파리에서 이 곡이 연주되었을 때, 한 노병은(老兵)은, [이것은 황제(皇帝)다.]하고 외쳤다고 한다. 그런 뒤에 한때는[황제교향곡]으로 불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슈만은 이 곡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들어도, 마치 자연의 현상처럼 외경(畏敬)과 경탄이 새로와진다. 이교향곡은 음악의 세계가 계속되는 한 몇 세기(世紀)고 간에 남을 것이다.]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한 것은 1808 년(38세)이다. 작곡에 착수한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대개[제 3번-영웅]을 완성한 직후인 1804 년 무렵부터 진지하게 손을 댄 것 같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1795 년(25 세) 무렵의 노우트에 이 곡의 선율이라고 생각되는 대목의 스케치가 있다고 하니, 통산하면 약 12 년이나 걸린 셈이 된다. 이런 점을 보면 베토벤은 정말로 신중파(愼重派)다.하기는 그랬으니까 이같은, 하나의 음도 허실이 없는, 견고하고 정밀한 구성을 갖춘 걸작이 이루어졌지만.
[암흑에서 광명으로!]---이것은 평생을 통한 베토벤의 신조였는데, 그것이 작품성에서 보다 힘차고 감동적으로 표현된 것이 이 [제 5 번]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으로서 보다 장대(壯大)하고, 보다 울림이 좋고, 보다 정돈된 곡은 이 곡 말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의 의지의 응결(凝結)이라는 면으로 볼 때는 이 [제5번]이 단연 대표적이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는 베토벤=[운명], [운명]=베토벤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런데 요즘 외국에서는 [운명]이라는 별칭을 쓰지 않고 그냥 [제5번]만으로 표시한다. 레코드를 보아도 역시 그렇다. [제3번] [제6번] 등은 뚜렷이 [Eroica], [Pastoral] 등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유독 [제5번]의 레코드 자켓에는 아무 표지가 없다.
그 이유는 [영웅]이나 [전원]은 베토벤 자신이 붙인 명칭인데 반해서, 이 [제5번]에 대해서는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말했다는 데서 후세에 [운명]이라는 별칭이 생겼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별칭이 너무나도 사랑을 받고 있어서, [운명]이라 해야 곧 알지, [제5번]이라면 빨리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되어 있다. 언젠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줄 안다. 굳이[운명] [운명]하고 강조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가라 앉혀서 조용히 듣고 있노라면, 높고 두꺼운 운명의 벽을 하나하나 넘어서 가시밭길을 돌진하는 베토벤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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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市立交響樂團, Seoul Philharmonic Orchestra)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현악단이다. 1945년 10월에 창단된 고려교향악단이 그 모체였으나 3년 뒤 해산되었고, 1948년 말에 고려교향악단과 서울관현악단 단원들로 새로 구성한 서울교향악단이 발족되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다시 해산되었고, 이때 악기와 악보 상당수가 소실되고 일부 단원들은 월북 혹은 납북됐다.
1950년 11월에 생존 단원들을 중심으로 해군 측의 주선 아래 해군정훈음악대라는 명칭으로 재건되었으며, 종전 후인 1954년에는 해군교향악단으로 개명되었다. 해군교향악단은 1957년 8월에 서울시로 이관되어 민간 관현악단이 되었고, 현재 명칭으로 바뀌었다. 1975년에는 단원을 대폭 증원해 4관 편성의 대규모 관현악단으로 확대했으며, 1978년에는 악단 운영권을 서울시 측에서 세종문화회관 측으로 이관했다. 1999년 재단법인이 된 세종문화회관 측의 전속 악단이 되어 서울시 교향악단으로 개명되기도 했으나, 운영권과 단원 오디션 문제 등으로 인해 세종문화회관 측과 갈등을 빚어 파업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사설 관현악단인 서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구 뉴서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는 영문 명칭의 동일함을 이유로 법정 소송이 빚어지기도 했다. 2005년 6월에 악단 자체가 재단법인화 되면서 다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어 운영되고 있다.
주요 공연장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며, 이외에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도 공연하고 있다. 부지휘자는 성시연, 악장은 스베틀린 루세프이며 상주 작곡가(composer-in-residence)로 진은숙이 활동하고 있다.
정명훈 취임 이후 정기연주회 프로그램이 마스터피스 시리즈, 익스플로러 시리즈, 명협주곡 시리즈, 아르스 노바, 실내악 시리즈로 세분화되었다. 2006년에 베토벤 시리즈, 2007년에 브람스 시리즈, 2010년부터 2011년에 걸쳐 말러 시리즈로 주요 교향악 작곡가들의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고 있다.
해군교향악단이었던 1957년에 구 남베트남과 중화민국, 홍콩 등지에서 순회 공연을 가졌으며, 민간 악단이 된 뒤에는 동남아시아(1977), 미국(1982 & 1986), 유럽(1988, 2010, 2011) 순회 공연을 가졌다. 2004년 10월에는 아시아 오케스트라 위크에 한국 대표 관현악단으로 참가, 도쿄와 오사카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역대 상임 지휘자는 김생려(1948-1961), 김만복(1961-1969), 원경수(1970-1971 & 1994-1996), 정재동(1974-1990), 박은성(1990-1991), 마르크 에름레르(2000-2002), 곽승(2003-2005) 등이 맡았으며, 2006년에 정명훈이 예술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발탁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외에도 임원식, 정치용, 구자범, 이동호, 박태영, 김홍재, 스코트 유 등의 한국 혹은 한국계 지휘자들과 로린 마젤, 샤를르 뒤투아, 와타나베 아키오, 아사히나 다카시, 요엘 레비, 장-클로드 카자드슈, 제임스 저드, 헤수스 로페스-코보스, 유카-페카 사라스테 등의 외국 지휘자들도 객원으로 지휘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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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udwig van Beethoven (루트비히 판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요제프 칼 슈타이어가 그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초상화(1820). 장엄 미사를 작곡하고 있다.
기본 정보
본명 Ludwig van Beethoven
출생 1770년 12월 17일
독일 본
사망 1827년 3월 26일 (56세)
오스트리아 빈
국적 독일
직업 작곡가
베토벤의 친필 서명
루트비히 판 베토벤(독일어: 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 가운데에는 〈교향곡 3번〉,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피아노곡 〈엘리제를 위하여〉,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 등이 있다.
생애
유년 시절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1712년~1773년)이었다. 할아버지 베토벤은 17살에 독일로 이주하여 쾰른 선제후 궁정의 베이스 가수로 취직해서 악장(Kapellmeister)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외아들 요한 판 베토벤(1740년~1792년)도 같은 곳에서 테너 가수로 일하였으며 피아노와 바이올린 교습으로 부수입을 벌었다. 요한은 1767년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와 결혼하였는데, 마리아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요한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의 딸이었다.
부친
베토벤의 첫 음악 교사는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악기에 세워놓았으며,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된다. 그러나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토벤은 다른 음악 선생으로는 판 덴 에덴(van den Eeden)의 궁정 오르간 주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프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가족의 친구이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친척 [1](Franz Rovantini) 에게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가르침이 있었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9살 나이(속설에서 말하는 7살이 아닌)에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신동으로 삼아 돈을 벌려 했으나 결과는 시원찮았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서 요한은 거짓말로 아들 베토벤이 6살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7살이었다.
음악수업
1779년 이후 어느 시기에 베토벤은 본에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교사였던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에 음악 수업을 받게 되는데, 그는 같은 해 궁정 오르간 주자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네페는 베토벤에게 작곡을 가르쳤으며, 1783년 3월 베토벤이 처음으로 출판한 곡인 드레슬러 행진곡에 의한 9개의 건반 변주곡(WoO. 63)을 작곡하는 데 도와주었다. 베토벤은 곧 네페의 보조 오르간 주자로 일하였는데, 처음에는 임금을 받지 않은 일이었으나(1781년), 나중에 악장 안드레아 루체시가 지휘하는 궁정 예배당에 고용되었다.
사람들과의 만남
폰 브로이닝 집안과의 만남
베토벤은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받아, 이때부터 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젊은 의대생 프란츠 베겔러(Franz Wegeler)는 그를 폰 브로이닝 집안(von Breuning, 나중에 베겔러는 이 집안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에 소개해 주었다. 베토벤은 종종 폰 브로이닝 집안에 갔는데, 여기서 그는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였으며, 이 곳 아이 몇몇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의 환경은 알코올 의존증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는 자신의 집안에 비교한다면 편안한 곳이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과 알게되어 그는 평생 친구이자 재정 지원자가 되었다.
모차르트와의 만남
평소 모차르트를 존경해왔던 베토밴은 오스트리아의 빈으로가서 그와 만나고 싶어했으나 쉽지않았다 그것은 집안사정이 가난해 자신의 동생과 부모를 먹여살려야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당시 어머니는 병을 앓고 있었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이기 때문에 사실상 가족을 돌보는 사람은 베토벤뿐이었기 때문에 베토벤도 빈으로 가겠다는 생각은 단념한지 오래였다. 그러던 중 1784년 그의 스승인 네페의 도움으로 빈으로 갈수있는 교통비와 숙박비를 얻은뒤 부모의 동의를 얻어 빈으로 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는데, 이때 당시 불과 그의 나이 14세때였다. 모차르트는 자신을 만나기위해온 베토벤을 정겹에 맞이하는 한편 그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자신이 연주한 짦은 음악마디로 베토벤에게 즉흥곡을 만들보라고 지시한다. 조금의 주저함도없이 베토벤이 즉흥곡을 만들어 기대 이상으로 연주하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후 베토벤은 모차르트에게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때 모차르트는 베토벤에게 받는 교육비를 일절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만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독일(프로이센)에 있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정을 모차르트에게 말한 뒤 빈을 떠나게 된다. 이것이 모차르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으며 만난지 불과 1달만의 일이다. (그뒤 하이든을 만나기 위해 빈으로 다시오게 되는데 이때가 1792년으로 모차르트 사망 1년후이다)
궁정 교향악단
1789년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뒤를이어 베토벤은 법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월급의 반을 받을 수 있었고,궁정 교향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여 가족의 수입으로 삼았다. 교향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의 세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플루트 및 바이올린 주자 안톤 라이하(Anton Reicha)와 친구가 되었다.
하이든과의 만남
선제후의 도움으로 1792년 베토벤은 빈으로 갔다. 아마 1790년대 말 당시 런던으로 가던 요제프 하이든이 성탄절 쯤에 본에서 머물 때 그에게 처음으로 소개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2곡의 장송칸타타(WoO.87,WoO.88) 악보를 보고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베토벤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어 1792년 7월에 런던에서 빈으로 귀환한 뒤부터 베토벤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베토벤이 본을 떠날때 그의 친구들이 이별의 인사말을 적은 기념노트를 보면, 빠른 날자는 8월 24일(리히터가 쓴 것), 늦은 날짜는 11월 1일(브로이닝이 쓴 것)이므로, 베토벤이 빈으로 떠날 준비 기간과 출발시간을 거의 가늠할 수 있다.
11월 10일에 빈에 도착한 베토벤은 즉시 하이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하이든은 그에게 만족했지만, 베토벤은 실제로 가르침을 받다보니 이전의 위대한 우상이었던 거장 하이든에게 여러가지로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하이든이 고치고 돌려준 베토벤의 악보를 본 요한 셍크(Johann Schenk, 1753-1836)가 미처 하이든이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오류와 잘못을 지적해주자 하이든에 대한 불신감은 더욱 깊어졌다. 베토벤은 마침내 "하이든에게서는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당시 하이든이 베토벤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하이든의 느긋하고 여유있는 성격을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가르친다는 일이 적성에 맞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다 가르치는 상대가 젋은 혈기에 급한 성격으로 알려진 베토벤이었으니 둘이 서로 잘 맞지 않았음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후 베토벤은 당시 빈에게 뒤어난 이론가로 통하던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 가르침을 받고, 모짜르트의 연적으로 알려진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에게 성악곡 작곡을 배운다. 그리고 1793년말, 결국 베토벤은 하이든 곁을 떠나지만 두 사람간의 불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베토벤이 스스로 가장 만족해하던 C단조 3중주곡을 출판하지 말라고 하이든이 충고한 것 때문에 베토벤은 심한 상처를 받았던 일도 있듯이,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 뭔가 개운치 않은 앙금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1794년, 하이든이 두 번째 영국 여행을 떠나자 베토벤은 선생님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1795년 피아노 소나타 1~3번 작곡을 완성하여 하이든에게 헌정하였으며, 그해 8월 하이든이 빈으로 돌아왔을때 카를 리히노브스키 후작 저택의 연주회에서 직접 들려주었다. 이 3곡의 소나타가 작품2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하이든과 베토벤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베토벤 쪽에서 말하자면 하이든은 과거의 업적을 놓고 볼 때 역시 위대한 대선배였다. 단지 그는 자시의 향학열을 만족시켜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지위와 연륜을 갖춘 하이든 쪽에서 볼 때도 신출내기 청년 음악가의 불평이나 불만 따위에 일일이 대응하여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 사정이 두 사람 간의 돌이킬 수 없는 불화를 막아준 것이라고 여겨진다.
피아노 3중주 1~3번 작품1과 피아노 소나타 1~3번 작품2를 작곡한 것 외에 그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은 상당수의 곡을 작곡하는데 오늘날에는 대부분 WoO작품번호로 분류된다. 그의 작품을 볼수록 작곡 양식이 성숙해지고 범위가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음악학자들은 1791년에 쓴 어느 변주곡집에서 그의 교향곡 3번의 주제와 비슷한 부분이 있음을 찾아낸 바 있다.
음악수업
베토벤은 바로 작곡자로 자립하지 않았으며, 음악 공부와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였다. 하이든의 지도를 받으며 그는 대위법을 숙달하고자 하였으며, 이그나츠 슈판지히에게서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다. 이때 일찍이 그는 때때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서 주로 이탈리아풍 서악 작곡 양식 등의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이 관계는 1802년(또는 1809년까지일수도 있다.)까지 이어졌다.1794년 하이든이 영국으로 떠나자 선제후는 베토벤이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빈에 남기로 하였으며,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과 다른 선생에게서 대위법 공부를 계속하였다.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 기간이 끝났으나,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 남작 등 이미 빈의 여러 귀족들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연주활동
1793년 베토벤은 빈에서 피아노 명인이자 귀족 살롱의 즉흥 연주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여기서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전주곡과 푸가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 출간한 작품은 변주곡집(WoO 66)로 보인다.1794년 거의 내내 베토벤은 작곡에 매달렸으며 작품 출판을 하지 않아 이듬해 1795년의 작품 출판이 더욱 중요해졌다.베토벤은 1795년 3월에 빈에서 처음으로 대중 연주회에서 공연하여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였다. 기록 증거가 모호하여 이 작품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인지 2번인지는 불분명하나 두 작품 모두 완성을 앞둔 비슷한 상황이었다.(두 작품 모두 몇 년 동안 완성되어 출판되지 못하였다)연주회 직후 그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처음으로 작품 번호를 붙여 피아노 3중주 1번을 내놓았다. 이들 작품은 자신의 후원자 리히노브스키에게 헌정되었으며, 한 해 생계비에 가까운 이익을 얻었다.
유명세를 타다
1803년의 베토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리히노브스키 공(그는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에도 동행하였다)도 함께하였으며,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공연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Op.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임금에 헌정하였다. 이 곡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한 작품으로, 비르투오조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작품으로 유명하다.[2] 임금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았다.[3]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으며, 그해 11월에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오늘날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4]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자유를 빼앗아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5]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6]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7]
음악적 성숙
1798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드디어 그가 작곡의 꽃이라고 여기던 현악 4중주와 교향곡에 손을 대었다. 1798년에서 1800년 사이에 그가 작곡한 현악 4중주 1~6번 (Op.18)(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의 부탁으로 그에게 헌정한 곡이다)은 1801년에 출판되어 1800년 교향곡 1번과 2번와 함께 초연하였으며,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 신예 음악가 세대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계속 다른 악곡도 작곡하여 "비창" (Op. 13)과 같은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작품도 내놓았는데, 쿠퍼[8]는 이를 "성격의 강렬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 역동성, 음조 면에서 이전 작품을 뛰어넘었다"[9]고 평가하였다. 1799년 그는 그의 생전에 널리 인기를 얻었던 7중주도 완성하였다.
1800년 2월 2일에 베토벤은 교향곡 1번을 초연하기 위하여 도시 극장을 임대하였으며,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과, 자신의 7중주,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한 곡(이들 곡은 당시 출판되지 않은 상태였다) 등 다양한 곡목을 공연하였다. 알게마이네 무지칼리쉐 차이퉁(Allgemeine musikalische Zeiting) 지에서 "오랫동안 가장 흥미로운 연주회"라고 묘사했던 이 연주회는 어려움도 겪었는데, 일부 비평가들은 "연주자들이 독주자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나(가령 베토벤의 피아노와 목관 5중주에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이 쓰였으나 형식이 같은 모차르트의 작품과 매우 비슷한 측면을 보인다.)무지오 클레멘티와 같은 음악가들에게서도 양식상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의 선율, 음악적 전개, 전조(轉調)와 기조(基調)의 쓰임, 감정의 특성 면에서 그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으며, 자신의 초기 작품이 처음으로 출간될 때 일부 작품에서 그 영향이 도드라졌다. 그때부터 1800년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업자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교습
맬러(W.J. Mähler)가 그린 1804년의 베토벤.
1799년 5월 베토벤은 헝가리인 백작부인 안나 브룬스비크(Anna Brunswik)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교습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였는데, 그는 맏딸 요제피네(Josefine Brunswik von Korompa (1779-1821)와 관계를 맺어, 그때부터 수많은 억측의 대상이 되었다. 교습이 끝난 직후 요제피네는 요제프 다임(Josef Deym von Střítež 1752-1804)백작과 혼인하였으며, 베토벤은 이들의 가정에 자주 방문하였으며, 모임에서 교습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였다. 요제피네의 결혼은 누가 보기에도 불행하였으나, 부부는 네 자녀를 두었으며, 1804년 다임이 죽은 뒤에도 요제피네와 베토벤의 관계는 별 진전이 없었다.[10]
베토벤은 그 밖에 다른 제자도 있었다. 1801년에서 1805년까지 그는 페르디난트 리스(Ferdinand Ries)를 가르쳤는데, 그는 작곡가가 되어 나중에 그들의 만남을 다룬 책인 "베토벤은 기억한다"을 썼다. 젊은 카를 체르니도 1801년부터 1803년까지 베토벤 밑에서 수학하였다. 체르니 자신도 저명한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그가 맡은 제자 가운데는 프란츠 리스트도 있었다. 그는 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도 빈에서 초연한 바 있다.
1800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주로 두 작품에 집중하였는데, 월광 소나타 등과 이보다는 작은 곡도 계속 썼다. 1801년 봄 그는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1801년과 1802년에 수차례 공연되었으며, 베토벤은 이 곡의 인기에 편승하여 피아노 편곡판도 내놓았다.[11] 1802년 봄, 그는 교향곡 2번를 완성하여 연주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결국 취소되어버렸다. 이 교향곡은 이듬해 1803년 4월에 자신이 상임 작곡가로 있는 빈 강의 강변 극장(Theater an der Wien)의 어느 예약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교향곡 2번과 더불어 이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3번,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도 같이 공연됐다. 평가는 제각각이었으나, 연주회는 재정적으로 성공하였고, 베토벤은 일반 연주회 표의 세 배 가격으로 표값을 책정할 수 있었다. [12]
1802년 전에는 어쩌다 가끔 형 베토벤을 도와주던 동생 카를이 출판 경영에서 큰 역할을 맡으면서, 베토벤은 출판업자와의 사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최근 작곡된 작품에 더 높은 값을 불러 협상할 뿐 아니라, 카를은 베토벤이 예전에 작곡하고는 출판하지 않았던 일부 작품도 팔았으며, 형이 인기있는 작품들을 다른 악기 편성으로 편곡하도록 권하였다. 베토벤은 이런 부탁에 응했는데, 그는 출판업자들이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비슷하게 편곡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13]
청력 상실
1796년경 베토벤은 점차 청력을 잃어갔다.[14] 그는 심각한 귀울음(耳鳴)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왜 청력을 잃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 납 중독, 티푸스, 자기 면역 장애(가령 전신 홍반성 루푸스) 등의 설이 있으며, 심지어 잠을 깨기 위해 찬물에 머리를 담그던 습관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은 당시 부검 결과로, 오랫동안 외상이 커져 "내이(內耳)가 부푼" 상태였다는 것이다.[15]
베토벤이 죽은 다음날 한 어린음악가가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가져간다. 그는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죽을때까지 잘 보관했으며 대대로 가보로 물려준다. 2차세계대전때 이물품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이것이 1994년 런던 소더비 경매소에서 세상에 공개된다.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아르곤 국립연구소에서 분석한결과 일반인의 100배가 넘는 납수치가 나타났다.[16] 이로써 베토벤이 일생동안 겪은 육체적 고통과 청력상실의 직접적인 원인이 납중독임이 밝혀졌다.[17]
1801년에 베토벤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이로 인해 음악 활동과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렸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 일부는 이미 청력 상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18] 베토벤은 의사의 조언에 따라 빈 바로 바깥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지내며 자신의 증세에 적응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는데, 베토벤은 음악 활동을 위하여 계속 살겠노라는 자신의 결심을 담았다.[19] 시간이 지나면서 청력 상실은 심해졌다. 이에 관한 확실한 일화가 있는데, 자신의 교향곡 9번을 초연할 때 연주가 끝나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그는 베토벤이 청각장애인임을 배려한 여가수의 도움으로 객석을 향해 뒤돌아서자 그제서야 관객들이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고 있음을 보았으며 그러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20]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어도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수지맞는 돈벌이 수단이던 공연 연주는 점점 어려워졌다. 1811년에 그는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로 그는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1815년의 베토벤
베토벤은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꼈다.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 박물관에는 나팔 기구 등 보청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분명 큰 걱정거리였지만, 카를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는 그럭저럭 사람의 말이나 음악을 들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21] 그러나 1814년 베토벤은 거의 대부분 귀머거리가 되었으며, 그가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로 시끄러운 아르페지오나 우뢰같은 베이스 음표를 연주할 때, "Ist es nicht schön?"(아름답지 않소?)라고 말할 때 손님들은 그의 익살과 용기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22]
베토벤이 청력을 잃으면서 특이한 사료가 보존되었다. 바로 그의 대화록이었다. 죽기 전 10년 또는 몇 년 동안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할 말을 이런 책에다가 써서 전하였으며, 베토벤은 말로 대답하거나, 책에다가 쓰기도 하였다. 이 책들은 음악이나 다른 화제에 대한 토론을 담고 있으며, 그의 생각을 전해주고 있으며, 음악과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자기 작품의 연주를 어떻게 느꼈을지에 대한 연구의 자료가 되고 있다. 불행히도 베토벤이 죽은 뒤 그의 비서 안톤 신틀러(Anton Schindler 1795-1864)가 음악가 베토벤을 이상화된 모습으로 그리려고 이러한 대화록 400권 중 264권을 파손해버렸다.(또는 고친 것도 있다)[23]
후원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
베토벤은 작품 출판과 공연회로 수입을 벌었으나, 후원자들의 지원도 받았는데 이들을 위하여 그는 개인 연주회를 베풀고 이들의 부탁을 받은 작품을 써서 일정 기간을 두었다가 나중에 출판하기도 하였다. ,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등 그의 초기 후원자들 몇몇은 작곡을 요청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함과 더불어 연금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아마 베토벤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레오폴트 2세 황제의 막내 아들인 루돌프 대공이었을 터인데, 그는 1803년 혹은 1804년에 베토벤에게서 피아노와 작곡 교습을 받았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어 1824년까지 만났다.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곡을 헌정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대공 3중주(1811년)과 대작 장엄 미사(Missa Solemnis, 1823)도 있다. 루돌프도 답례로 베토벤에게 자신의 작품 한 곡을 헌정하였다. 베토벤이 루돌프에게 보낸 편지들은 오늘날 악우 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에 보관되어 있다.
왕실 극장의 직위를 거부한 뒤 1808년 가을에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베스트팔렌 왕국의 임금인 제롬 보나파르트가 카셀의 궁정에서 급료가 높은 악장(Kapellmeister) 자리를 맡아달라고 제안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베토벤의 친구들에게서 소식을 전해들은 루돌프 대공, 킨스키(Kinsky) 백작과 롭코비츠 공은 베토벤이 빈에 머물도록 설득하고자 연간 4,000 플로린의 연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루돌프 대공만이 베토벤에게 약속한 날에 주기로 한 연금의 몫을 지불하였다. 킨스키는 장교직 복무로 소환되어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며, 얼마 안되어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롭코비츠는 1811년 9월에 연금 지불을 중단하였다. 뒤이어 후원을 계속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며 베토벤은 대개 작품의 권리를 팔거나 1815년 이후 적은 연금에 의지하였다. 당초 후원자들의 재정 지원 약속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어느 정도는 무의미해졌는데, 정부가 전쟁 준비로 돈을 찍어내어 심각한 물가 상승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슈베르트와의 만남
베토벤은 훗날 "가곡의 왕"으로 불리우는 슈베르트와 만난적이 있었다. 두사람의 거처는 불과 2km 떨어져 있는 거리에 살았지만 베토벤의 청력상실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재대로된 대화를 하지못해 때문에 쉽게 만나지 못했다 슈베르트의 소심한성격 또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다 지인들의 권유로 슈베르트가 용기를내어 만나게 된것이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그의 악보를 보고 캄탄을 금치 못했으며 이렇게 늦게 만난것에 대해 후회를 했다고 한다. 또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내명은 이제 다되었네 슈베르트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말게.."
그후 하고 싶은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지만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허약한 목소리를 듣고 괴로운 나머지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베토벤죽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이것이 슈베르트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작품 시기별 분류
베토벤의 작품은 보통 세 시기, 즉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한다. 이 방식에 의하면 초기는 1802년 정도까지, 중기는 1814년 정도까지 그리고 1815년 무렵부터 후기로 나눈다. 초기, 즉 고전기는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도 새로운 방향을 찾아 그의 작품의 지평을 넓힌다. 초기의 중요한 작품은 교향곡 1번, 교향곡 2번, 첫 여섯개의 현악 사중주곡, 첫 세개의 피아노 협주곡, 20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든다. 여기에는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도 들어있다. 중기, 즉 영웅기는 그의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면서 시작된다. 영웅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면모를 나타내는 대 편성곡들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작품으로는 교향곡 3번부터 교향곡 8번까지 여섯 개의 교향곡과, 나머지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삼중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7번부터 11번까지 다섯개의 현악 사중주곡과, 7개의 피아노 소나타(발트슈타인, 열정 등), 또 크로이처 바이올린 소나타와 그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가 있다. 후기는 1815년경부터 인데, 지적인 깊이와 형식적인 혁명성 그리고 집중성과 인간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가령 현악 사중주곡(작품번호 131번)은 7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향곡 9번은 마지막 악장에 오케스트라와 더불은 합창을 집어넣었다. 그밖의 이 시기 작품으로는 장엄미사, 마지막 다섯개의 현악 사중주곡, 대 푸가, 마지막 다섯 개의 피아노 소나타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등)이다.
낭만주의적 특징
베토벤을 둘러싼 찬반 논쟁 가운데 하나는 그가 낭만주의 작곡가인지, 아니면 고전주의 작곡가인지에 대한 것이다. ‘낭만주의적’의 의미와 낭만주의 음악 시대 자체의 기간에 대한 의견이 사람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베토벤을 이 운동이나 기간에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문맥에 따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문학과 예술의 한 미학적 시기로 간주한다면, 베토벤은 분명히 독일의 괴테·실러와 영국의 퍼시 실리와 같은 문학적 낭만주의 시기의 첫 절반에 위치한다. 그는 또한 슈포어와 E.T.A. 호프만과 같은 동시대인들로부터 낭만주의 작곡가라고 불렸다. 그는 자주 연가곡의 첫 작곡가로 간주되며, 낭만주의적인 민속 특징에 자주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SMALL>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작품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교향곡
교향곡 1번 다 장조 작품번호 21 (1800년)
교향곡 2번 라 장조 작품번호 36 (1803년)
교향곡 3번 내림 마 장조 "영웅" 작품번호 55 (1805년)
교향곡 4번 내림 나 장조 작품번호 60 (1807년)
교향곡 5번 다 단조 "운명" 작품번호 67 (1808년)
교향곡 6번 바 장조 "전원" 작품번호 68 (1808년)
교향곡 7번 가 장조 작품번호 92 (1813년)
교향곡 8번 바 장조 작품번호 93 (1814년)
교향곡 9번 라 장조 "합창" 작품번호 125 (1824년)
교향곡 10번 내림 마 장조 Biamonti.838 (1824년) (미완성 원고로 남겨졌지만 베리 쿠퍼에 의해 1악장만 완성된채 출판됨)
피아노곡, 실내악곡
베토벤의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음악의 신약성서라고 부름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작품13 '비창'
피아노 소나타 11번 B flat장조 작품22 '화려한 대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 14번 C#단조 작품27-2 '월광'
피아노 소나타 15번 D장조 작품28 '전원'
피아노 소나타 17번 D단조 작품31-2 '템페스트'
피아노 소나타 21번 C장조 작품53 '발트슈타인'
피아노 소나타 23번 F단조 작품57 '열정'
피아노 소나타 24번 F#장조 작품78 '테레제를 위하여'
피아노 소나타 25번 G장조 작품79 '뻐꾸기'
피아노 소나타 26번 E flat장조 작품81a '고별'
피아노 소나타 29번 B flat장조 작품106 '함머클라비어'
피아노 소나타 33~35번 WoO.47 no.1~3 '선제후'
바가텔 F단조 WoO.57 (Grove Op.170) "재미있는 안단테 (Andante Favori)"
바가텔 A단조 WoO.59 (Grove Op.173) "엘리제를 위하여"
그외 바가텔 24곡 (Op.33 no.1~7, op.119 no.1~11, Op.126 no.1~6)
디아벨리 왈츠 주제에 의한 33개의 변주곡 C장조 작품120 (바하의 골트베르그 변주곡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대작)
총 21곡의 피아노 변주곡 작곡
그외 미뉴에트,가보트,캐논,론도,전주곡,폴로네이즈,군대행진곡 4곡, 피아노 4중주 등의 다수 소품 작곡
피아노 3중주 7번 B flat장조 작품97 "대공" (피아노 3중주곡 역사상 최고의 명곡)
총 11곡의 피아노 3중주 작곡
현악 4중주 16번 F장조 작품135 포함 총 16곡의 현악4중주와 푸가1곡 작곡
바이올린 소나타 5번 F장조 작품24 "봄"
바이올린 소나타 9번 A장조 작품47 "크로이처" (총 10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작곡)
첼로 소나타 3번 A장조 작품69 (첼로 소나타 역사상 최고의 명곡, 총 5곡의 첼로 소나타 작곡)
미사, 오라토리오, 칸타타와 기타 성악곡
《미사 C장조》작품번호 86
《장엄미사 D장조》 작품번호 123
오라토리오《감람산 위의 그리스도》작품85
칸타타 《영광의 순간》작품136 외 다수의 칸타타 작곡
콘서트 아리아 《오, 무정한 자여》 작품65 (20여곡의 콘서트 아리아 작곡)
100여곡 이상의 성악을 위한 캐논 작곡
가곡 《그대를 사랑해》 WoO.123
가곡 《아델라이데》작품46
영국 민요를 주제로 한 가곡 300여곡 작곡 및 일반가곡 200여곡 작곡
오페라 《피델리오》작품72 (그외 미완성 오페라인 《베스타의 불》이 있음)
관현악곡, 협주곡
교향시 <<웰링턴의 승리>> 작품번호 91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E flat장조, 작품73
(세계 3대 피아노 협주곡 중의 하나, 총 7곡의 피아노 협주곡 작곡, 0번 E flat장조 WoO.4와 6번 D장조 미완성 협주곡 있음)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61
(세계 3대 바이올린 협주곡 중의 하나, 베토벤이 직접 플룻 협주곡과 피아노 협주곡으로 편곡한 곡도 있음)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삼중협주곡 C장조 작품56
피아노,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C단조 작품80
극음악 <<코리올란>> C단조 작품62(총 11곡의 극음악 작곡)
극음악 <<아테네의 폐허>> 작품113 (베토벤의 터키행진곡은 4번째 나오는 부수음악임)
극음악 <<에그몬트>> F단조 작품84 * 발레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작품43
대 푸가 자필본
2005년 10월 13일, 공식적으로 179년 된 베토벤의 자필 악보가 2005년 7월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Wynnewood의 Palm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한 사서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다. 이 악보는 115년간 분실된 상태였는데, 이 악보는 소더비 경매에 2005년 12월 1일 경매에 붙여져 195만 달러에 팔렸다. 전화로 경매에 참가하여 낙찰 받은 사람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24] 이 악보는 원래 1890년 목록에 올라와 있었고, 베를린에서 열린 경매에서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의 한 사업가에게 낙찰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의 딸은 1952년에 그것과 모차르트의 〈판타지아〉를 포함한 다른 자필 악보를 펜실베니아 주의 한 교회에 주었다. 어떻게 그 베토벤의 자필 악보가 도서관의 소유가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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