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강 강의 소감입니다.
강위원(41세) 강사님은 1989년 고등학생 신분이면서 전교조 활동을 지원하다 구속되고, 제적되고, 상경하여 고학을 하다 다시 광주로 돌아와 전남대 국문과에 진학한다. 전교조 활동 경험 때문에 학생운동은 조용히 뒤에서 돕겠다고 결심하던 그를 흔들어놓은 것은, 1994년 벌어진 우루과이라운드 쌀 수입 개방 반대 싸움이었다. 광장에 나가 눈물을 흘리며 “우리 부모님들을 생각하며 상경해 싸우고 있는 친구들을 위해 기말고사를 1주만 늦추자”고 마이크를 잡은 것이 시작이었다. 국문과 학생회장을 거쳐 전남대 총학생회장, 5기 한총련 의장을 맡았다. 그에게는 잠재울 수 없는 뜨거운 피가 끓고 있었다.
강사님은 사회복지 시설에서의 봉사활동을 계기로 사회복지 실천 경험을 살려서, 대학시절의 동지 부부들과 함께 농촌복지 공동체를 꿈꾸었다. 2007년에 지역조사를 하고, 2008년에 농촌의 재생과 부흥을 위한 농촌공동체 ‘여민동락 공동체’(전남 영광군 묘량면 소재)를 출발 시킨다. 묘량면은 강위원 원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여민동락공동체는 여럿이 함께 만드는 즐거운 세상이라는 뜻으로 지역주민과 함께 행복을 나누는 ‘복지 너머의 복지’를 지향한다.
지금까지의 강의는 귀농 ·귀촌에 대하여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강의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 강의하신 강위원 강사님께서는 “협동조합시대의 마을리더와 지역복지 -여민동락공동체를 중심으로-”라는 강의안을 준비 하셨다. 언뜻 보기에 지난 유신시대의 “새마을 운동”이 생각난다. 새마을 운동은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농촌의 현대화를 위해 시작된 범국가적 시행 운동으로, <근면.자조.협동>을 기본 정신으로 농촌의 근대화, 환경개선, 지역의 균형적인 발전, 그리고 의식개혁을 목표로 하여 근대화 시킨다는 취지의 1971년부터 전국적 범위에서 전개된 정부주도의 풀뿌리 지역사회 개발운동 이라 불리운 운동이다.
매체 자료에 의하면 유신정부는 1971년부터 1984년 13여년간 새마을 운동에 총 물량 7조2천억(연평균 5천177억원, 정부 57%, 주민11%, 민간단체 32%)을 투입하였는데, 용도별 투자내역은 생산기반 22.2%, 소득증대 42.8% 복지환경 27.5%, 정신계발 2.8%, 도시및공장 새마을운동 4.7%다. 새마을운동의 성과로는 하천정비, 교량건설, 수리시설확충, 농경지확장 등을 통한 식량자급기틀 마련, 농어촌전화(電化), 농가소득 증대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새마을 운동의 대대적인 홍보를 위하여 방송매체, TV, 학교, 교과서, 마을스피커 등을 동원했다. 실로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투입된 대단한 사업이었으며 성과였다.
반면, 2007년 도시생활에만 익숙했던 세 부부가 ‘농촌복지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데 의기투합 했다. 시작할 때의 결심은 이렇다. 복판보다는 가장자리에서, 중심보다는 변방에서 보다 우직하게 사회적 실천을 하며 살자. 강 대표는 말한다. “터전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남들이 가지 않은 곳으로 가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국가의 지원과 보조 없이 재정적 독립을 이뤄야 활동의 독립, 정치적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고향인 묘량면으로 들어왔다. 세 부부 가운데 제일 처음 묘량면으로 내려온 권혁범 여민동락공동체 센터장은 “복지의 자연력, 재생력을 믿는다. 때문에 복지는 민·관뿐 아니라 마을주민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며 “마을주민이 서로가 서로를 먼저 챙기면 농촌은 사람 살만한 곳으로 바뀐다. 우리 공동체는 이를 위한 중간 역할을 하며 사회 안전망을 형성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1. 전남 영광 묘량면에서 여민동락공동체가 생겨난 이유이자 존재의 목적은 자립형 농촌복지 실현이다.
2. 여민동락공동체는 과거 농촌의 두레와 품앗이 형태를 복원·재생함으로써 농촌을 다시 살만한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
3. 문제의식은 역시 ‘건강한 어르신들을 더욱 활기차게 하는 복지’란 무엇일까라는 고민에서 나왔다.
4. 영광군 묘량면은 50대에서 60대 초반의 장년층이 주도적으로 농업에 종사하고 65세 이상의 어르신들은 경제활동에서 소외되어 있는 상태였다. 여민동락공동체는 건강한 어르신들에게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2009년 할매손 모싯잎 송편공장을 설립해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착수했다 여민동락 할매손 모싯잎 송편공장 마을기업은 공장과 다르다. 원래의 주업인 자기 농사를 지으면서, 또 마을의 대소사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 시작은 노인복지이었지만 방역소독을 하면서 주민들과 관계를 맺고, 폐교위기의 작은 학교를 살리기 위해서 귀농/귀촌운동을 일으켰고, 교회와 협력하여 청소년학습지원센터를 운영하였다. 노인복지에서 아동청소년복지, 지역복지, 문화복지로 확정한 것이다.
6. 십시일농을 마을 단위로 진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여민동락공동체는 올 해부터 농민들의 생산물과 도시민들을 연결하는 장터역할을 시범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는 도시민들의 밥상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나아가 살림을 위해 일자리가 필요한 귀농 귀촌인의 안전한 농촌 정착에 있어서도 의미 있는 대비책이 될 수 있다.
7. 여민동락공동체는 처음부터 협동조합의 원칙과 취지에 맞게 설립됐고, 지금도 그 헌법대로 활동하고 있다.
첫째, 노동과 생산을 통하지 않은 모든 외부의 기부와 후원은 반드시 그 십분의 일을 쪼개, 더 가난하고 후미진 지역과 단체와 시설에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둘째, 국가의 보조금과 인건비 지원을 받지 않는다. 다만, 국가의 보조금과 인건비는 재정적 독립과 경제적 자립을 완벽하게 이룬 뒤에,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는 규모의 감당 가능한 자금만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셋째, 아이들을 도시로 유학 보내지 않는다. 마을공동체 활동의 기본은 지역에 ‘사는’ 것이고, 동시에 지역사회의 작은 시골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주민들과 함께 더불어 교육과 문화를 살려가야 온전히 주민들과 어울릴 수 있다.
넷째, 농촌주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밥을 먹으며 농부로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마을활동가 혹은 지역운동가라 자칭하면서 주민들 속에서 ‘헌신’만 하는 게 아니라, 이웃으로 함께 살며 주민들의 살림 모양을 닮아가고 농민들에게 여쭙고 의논하고 부탁하면서 온전히 마을구 성원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8. 여민동락공동체의 구체적인 전략은 각 마을 단위에서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는 주민을 발굴하여 사업을 함께 구상하고 궁극적으로 주민들이 직접 주체가 되어 운영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여민동락공동체는 지역 주민이 주도적으로 사업을 이끌어 나가기 전까지 사업의 기획, 조직의 구성, 마케팅, 유통 등에서 일종의 인큐베이팅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9. 여민동락 공동체에 대한 가장 큰 궁금증은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보장하느냐다. 강 대표는 “후원과 노동·생산을 통해서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0. 강위원 강사님은 지난해부터 광주 광산구 노인복지관 관장을 맡고 있다. 여민동락에 이어 도농복합공동체, 아파트 밀집지역에 도시형 공동체를 만드는 실험을 1년째 하고 있다.
11. 굴비와 소금, 원자력 발전소로 유명한 영광에서 다소 낙후되었던 묘량면이 바뀌고 있다. 이 중심에는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운영되는 자립형 비영리민간단체인 여민동락공동체가 있다.
12. 농촌문제의 근본에는 8% 밑으로 추락하고 있는 우리 농민 인구의 급감이 도사리고 있다. 그마저 농촌 고령화 인구가 50%를 넘어서고 있으니, 농촌의 공동화를 대비한 귀농귀촌의 활성화까지 포함해 농업농촌을 위한 다양한 대안이 고루 갖춰져야 할 일이다.
13. 언제나 그랬듯이, 길을 내는 사람이 늘 선구자이다. 선구자의 길은 낙관의 상상력이 결정적이다. 주민의 선의를 믿고, 협동과 공생의 대의를 잃지 않으면, 반드시 그 상상력은 현실이 되는 법이다. 결코 무늬만 그리다가 혹은 흉내만 내다가 그만두고 마는 여느 지자체와는 달라야 한다. 조급하지 않게, 멀리 보며 오래가야 한다. 그 시작과 끝은 오로지 목표가 하나이다. 주민들의 평화와 행복, 본래부터 존재하던 마을의 공동체성과 자연력을 복구해가는 관계의 완성이다.
14. 세 부부가 한 가정을 이루는 일만으로도 태산을 옮기는 일만큼 버거웠음을 고백한다. 도시문명에 갇혀 있던 껍질을 깨고 새살을 돋우는 일은 갈등과 눈물의 연속이었다. 농촌살이의 고유한 문화와 규칙을 각성하는 과정도 차라리 혼란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나랏돈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지갑부터 열어 먼저 나누자는 원칙, 스스로 농민이 되어 밭 한 평이라도 노동하고 경작하자는 소신, 복지 안에 갇힌 복지가 아니라 지역민의 일원이 되어 지역일체형 생활공동체를 만들자는 철학을 이뤄가는 일 모두, 솔직히 말하자면 고행이자 수행이었다.
15. 여민동락 공동체는 이제 걸음마를 뗐다. 앞으로 홀로서기의 그 성숙과 완성은, 오롯이 동행하는 벗들의 힘으로만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누군가로부터 존재 깊숙한 사랑과 믿음을 온몸으로 확인받으며 사는 여민동락은, 멋진 세상을 만드는 먼 길 내내 행복할 것이다. 묘량면 여민동락공동체 세 가족의 의기투합에서 시작한 공동체의 식구는 이제 14명으로 늘어 났다. 시골에서 보기 드문 초등학생도 25명으로 늘어났다. 자연스럽게 찾아드는, 그래서 그대로 녹아드는 지역민이 늘어나는 시골마을이 많아졌으면 한다. 24기 이연이 올림
첫댓글 아멘!
참으로 아름다운 공동체![~](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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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문을 읽는 저마저 행복해 집니다
그 따스함이 오래도록 무궁 무진 할찌어다
정말 읽을때마다 감탄하는 강의소감입니다
한번 더 강의를 들은 듯 합니다.
강의 소감 멋집니다^^
현장체험 1박2일 기간중 여민동락공동체 견학이 더욱 기대됩니다.^^ 24기 화이팅!
기대됩니다. 다음 글이. ㅎㅎ
잘 계신지요? 그런 말씀은 많이 부담 됩니다. 본대로 느낀대로 적는다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