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의자에 앉아 보셨습니까?
자투리 장작 몇개로 만들어진 이 불편한 의자 하나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진정한 나로 살고 있는가?
나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부자인가, 가난한가?
언제고 한번은 빈 손으로 돌아가야 할 길
그 외로운 길에 의자 하나 내어 준 사람이 있습니다.
미리 쓰는 유서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 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라도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를지라도 “네”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 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 걸 남길 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에도 혼자서 왔고 갈 때에도 나 혼자서 갈 수 밖에 없다. 내 그림자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삶의 지평을 걸어왔고 또 그렇게 걸어갈 테니 부를 만한 이웃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과 서로 왕래를 하며 살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생명 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랏빛 노을 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뇌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의 음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인간의 선의지(善意志) 이것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된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저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해서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괴(慙愧)의 눈이 멀고 작을 때에만 기억에 남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그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가 없고 말을 더듬는 불구자였다. 대여섯 된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을 고르는 척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 돈은 서너 가락치밖에 내지 않았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강한 엿장수였더라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자라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는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쫓고 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에는 가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관념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저녁으로 “신문이오”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나는 간단명료한 것을 따르고자 한다.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에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모란을 심어 달라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 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 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茶毘: 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왕자’가 사는 별나라 같은 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다 한 일들을 하고 싶다.
- 법정스님 <무소유> 79~83쪽
본래무일물.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산다는 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홀어머니의 외아들, 전남대상과 3학년 그해 겨울 그는 산으로 갑니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려우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은 또한 이 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트
대한불교조계종 초대종정을 지낸 효봉스님의 속명은 이찬형. 평양고보와 일본 와세다대학 법대를 졸업하고
평양복심법관으로재직 중 독립군에게 사형선고한 사건을 계기로 방황을 한다.
엿장수로 3년 간 유랑걸식을 하다가 금강산에 머물던 석두선사를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절구통 수좌' 란 별명. 금강산 법기암 주변에 토굴을 만들어 참선 매진한 지 1년 6개월만에 깨달음을 얻다.
석두 선사를 비롯한 당대 고승들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송광사에서 후학들을 제접했다.
1950년 8월, 당시 가야총림 방장으로 있던 당시 인민군으로부터 지켜낸 일화는 유명하다.
법정은 '미래사'에서 효봉의 제자가 된다.
법정은 통영의 '미래사'에서 중노릇을 시작했다. 1956년 나이 68세의 효봉은 더 깊은 안거에 들어가기 위해 사미승을 데리고 지리산 쌍계사로 들어갔다. 그는 탑전을 안거장소로 정한다. 데리고 간 젊은 사미승이 법정이다. 법정은 가슴이 뛰었다.
"네가 이놈아 얼굴의 중의 얼굴이다." 그러시더라고. (효봉제자 전 동국대 철학교교수 박완일 법사의 말)
잘 보신 거지. 중 노릇은 잘 했지. 법정스님이 모범적으로 깨끗이 했어."
효봉과 지낸 그 한철을 두고 법정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합니다. 법정사상의 모든것이 그 한 철에 시작된 무소유 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느날 노스승의 바랑속에서 비누조각 하나가 나옵니다. 너무 오래 되 거품도 나지 않는 비누. 스승은 말합니다. "중이 하나만 있으면 됐지 왜 두 개가 필요해"
어느 하루 설겆이를 하던 법정은 밥알 몇 알과 시래기 몇가닥을 흘리고 맙니다. 스승은 그걸 일일이 주워 찬물에 헹구더니 홀짝 마셔버립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어떠냐? 다음엔 함께 마시랴?"
"들어 오너라. 내가 잘못 가르쳐서 그렇다. 네 죄가 얼마나 크냐. 니가 장사해서 번 돈도 아닌데 신도들이 갖다 준 것인데 도를 닦아서 이놈아 부처가 되라고 신도들이 먹고 싶은 거 덜 먹고 입고 싶은 거 안 입고 갖다준 것을 그것을 함부로해서 되겠느냐?"
장 보러 갔다 오는 길.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공양시간을 넘겨버렸습니다.
"수행자가 시간을 지켜야지. 시간 내에 점심을 안줘? 오늘 나 점심 안 먹는다." 젊은 제자는 그 뒤로 괭이를 들고 나가 밭을 갑니다. 참회의 노동이었죠. 젊은 사미승의 괭이질은 한나절동안 계속됩니다.
해가 질 무렵 스승은 젊은 제자 앞에 국수 한 그릇을 내 놓습니다. 참회를 마치고 먹는 소박한 국수 한 그릇.. 그 국수 한 그릇에 법정은 또 한번 깨우칩니다. '僧笑' 중을 웃게 하는 음식. 불가의 승려만이 안다는 그 국수의 참맛을 법정은 그날 배웁니다.
덕조스님 법정 맏상좌의 말
"몸 무게 몇 Kg이냐? 이렇게 가끔 물으시거든요. 그 뜻이 뭐냐면 출가할 때 몇 Kg이냐. 출가했을 때 몸무게 보다 더 늘어나서는 안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셔요. 그게 뭐냐면 시주물을 많이 축냈다는 이야기를 하시거든요."
법정은 매 끼니를 먹을때마다 스스로 묻고 또 물었습니다.
五 觀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에 일어나는 욕심 버리고
육신은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위해 이 공양을 받습니다
법정은 갈수록 화려해지는 불교의 풍속을 가장 못견뎌했습니다. 중이 하나만 있으면 됐지 왜 두개가 필요한가. 죽비와도 같은 법정의 일갈이 세상을 깨웁니다.
"무책임한 말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어요. 나만 믿고 살라는 거에요. 중 믿을 것 못 돼요. 누가 되었던 자기 집도 버리고 떠나온 놈들을 어떻게 믿어. 언제 변할지 모르는데."
법흥스님 효봉제자. 송광사 회주의 말
"1964년에 불교신문에 글을 썼잖아요. 중이 돈이 아쉬우면 법당을 파 제낀다고. 법정칼럼 '중 노릇이 어렵다'에서요.
현장스님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의 말
"교회고 절이고 결국 돈 내라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법정스님은 돈을 내지 말라고 그래요."
[돈독이 올라서 그런다고] -법정스님
법흥스님의 말
"한국 불교가 말이야. 죽은 사람 염불이나 해 주고 돈 받아 먹는다. 장의 불교라고 들이 까고 그랬지."
혜총스님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장의 말
"종단을 비판하는 부처님 전 상서 도 쓰고 그러셨어. 그러니까 일하는 사람들은 가시와 같잖아. 지적을 하니까."
[시주물이 넘치고 있어요. 받았으면서도 감사한 줄도 모르고 고마워 할 줄도 몰라요. 또 그게 어디서 오는 줄도 모릅니다. 넘치는 물량은 결코 맑고 향기로울 수 없습니다.]
중이 됐으면 중답게 살지. 중답게 가자. 법정의 가르침은 오직 하나 그거였습니다.
'길상사' 서울 성북구'
길상사는 특이한 절입니다. 땅의 주인이 절의 부지로 써 달라며 법정을 지목하고는 10년을 조른 끝에 어렵게 만들어진 절입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절. 그러나 법정은 주지자리를 거부합니다.
[거사님들 늘 약을 보내주셔서 잘 공양합니다. 점심들 잘 했습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오."
신도들: "삼배하겠습니다."
법정스님: (일으켜세우며) "삼베는 여름에 입는 것이지. (일동 웃음)
-계속
노스님을 만나면 삼배를 올리는 게 불가의 관습이지요. 법정은 그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흔히 지칭하는 큰스님이라는 호칭도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 제 이름은 법정스님입니다. 법정큰스님이 아니에요(일동웃음) 그건 분명히 알아주십시오.]
자기를 낮추는 하심의 자세, 그거였습니다. 길상사를 지어놓고 그는 단 하룻밤도 이곳에서 자지 않았습니다. 일년에 두 번 법문을 마치면 서둘러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동국대 전 철학교수의 말
"세상을 떠날때까지 좋은 절의 주지를 해본다거나 불교 본부의 요직에 들어간다거나 이런 생각은 전혀 없던 사람이야."
법흥스님의 말
"그게 중의 본분이지. 그거 욕심부리면 탐욕심 아니요?"
동국대 전 철학교수의 말
"그 정도는 되야 도를 통하든 못하든 하루를 하든지 한달을 하더라도 중 된 맛이 있고 의미가 있는 거 아니요?"
'녹은 쇠에서 생긴것인데 결국 그 녹이 점점 그 쇠를 먹는다. -법구경-
녹에게 잠식당하지 않는 쇠를 벼리듯 법정은 산속에 은거합니다.
불일암, 전남 순천시
맏상좌는 스승의 암자를 지키고 있습니다. 스승의 유해가 뿌려진 후박나무 아래에 꽃을 놓아두는 것으로 제자의 하루가 시작됩니다.
덕조스님. 법정 맏 상좌가 꽃을 후박나무 아래에 놓는다. 그리고 막 피어난 매화꽃 한송이.
"스승이 좋아하던 향기 입니다."
PD의 물음
"왜 앞으로 안 들어가고 뒤로 들어가세요?"
"스님이 계시니까.(미소) 스님이 계시니까. 스님이 계신다고 생각이 들어서 뒷문을 이용하는 거에요."
기워 신은 스승의 고무신 한켤레 깨끗이 닦아 매일 아침 댓돌에 올려 놓습니다. 스승은 아직도 여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요즘은 매화꽃이 피어서 스님이 좋아하는 매화꽃을 올립니다. 매화향기가 좋으니까 당신께서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
스승은 이 향기를 마셨을까요?
*직업은 보수와 별개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갖게 만듭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해고된 실업자의 편지에 답장한 내용.
[이제 피기 시작한다, 피기 시작 해.]
법정이 처음 이곳으로 오던 날, 텅빈 절 터에서 홀로 피어 그를 맞아주던 꽃들입니다.
[내가 처음 여기에, 1975년 4월 19일에 왔거든. 그때 비가 내리더라고. 텅 비어 있고 그런데 이 벚나무가 그때는 크지 않았어. 조그마했는데 활짝 피어 있더라니까. 그러니까 아주 정답더라고. 아이고, 이 벚꽃 나하고 같이 살아야겠구나! 또 우물에 가서 물 맛을 바가지로 물을 먹었더니 아주 물맛이 좋아. 그래서 여기가 내가 살 만한 곳이구나.. ]
이곳에서 17년. 마흔 셋에 들어가 예순살까지. 한 승려의 생애에서 가장 절정의 수행기간이었습니다. 이곳에 와 맨 처음 만든 작품이 바로 이 의자입니다.
암자의 모든 것은 그 의자를 닮았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 만을 두고 그 이상의 것은 단 하나도 들이지 않았습니다. 시주 물건을 축내지 않고 먹을 것 또한 직접 지어 먹었습니다(연꽃 피고).
뭐든 너무 많아 탈이 나는 세상. 법정은 늘 말했습니다.
'뱃속에는 밥이 적어야 하고, 입 안에는 말이 적어야 하며 마음속에는 일이 적어야 한다.'
그는 홀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한곳 흐트러짐이 없었지요.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예불을 올리고 승려로서의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현장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의 말
"스님의 손을 보면 여러분이 굉장히 놀랄거에요. 글 쓰는 선비의 손이 아니라 완전히 노동으로 단련된 농부의 손과 똑같습니다." (루카신부님의 거칠던 손이 생각난다. 상대적으로 빌로드같던 박ㅊㅇ주사의 손. 신부님이 말하셨지. "웬 손이 이렇게 보드라워?" 그때 나도 약간은 부끄러웠다. 그 루카신부님은 지금 가톨릭국제병원 대표로 전근한 것을 근자 인터넷으로 알았다.)
그 농부의 손이 참된 중의 손이었습니다. 제자 하나가 지옥 한 칸이라. 그는 제자를 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승려가 된지 30여젼이 되는 53세에야 첫 제자를 받았으니 보통 고집이 아닙니다. 중이 남의 시중을 받는다는 것 자체를 그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윤청광 작가 '고승열전' 저자의 말
"젊은이가 도인이 되겠다고, 도를 닦겠다고 머리를 깍고 들어왔는데 인생을 다 포기하고. 그런데 이 늙은 중 심부름이나 해서 되겠느냐? 늙은 중 뒤치다꺼리나 시켜서야 되겠소? 도를 닦고 공부하게 해야죠."
불일암으로 오기 전 그는 불교신문의 주필로 세상의 주목을 받던 승려였습니다. 서슬 푸른 기개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죠. 어느 날 그 모든 것을 덮고 은거한 법정.
법정은 침묵했습니다.
은거에 든지 일년. 마침내 『무소유』가 나옵니다. 그 책 한권이 몰고 온 충격은 컸습니다. 지금까지 총 판매부수 330만부. 무소유는 당장에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무소유 본문 중에서
그때가 1976년, 바야흐로 개발시대 였죠. 전국의 땅값이 몇배 이상 오르며 너도 나도 부자가 되겠다며 매달리던 시대. 그 욕망과 탐욕의 덩어리 속으로 법정은 아주 작은 이야기 몇 개를 던져 놓습니다.
파르스름한 삭발자국 선명하던 산승시절 그를 괴롭힌 건 다름아닌 책에 대한 갈증이었습니다. '책을 보고싶다' 장 보러 나간 길에 참지 못하고 『주홍글씨』 한 권을 사 봅니다. 스승의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부처의 법을 공부하는 자가 웬 잡생각인가?" 그는 당장에 부엌으로 달려가 아궁이 속에 책을 던져버립니다. 책에 대한 집착 그 또한 지식의 (최불암의 불완전한 발음으로 알아들을 수 없었슴) 아집 하나가 깨어져나갑니다.
잊지 못한 이야기가 또 하나 있지요. 어느 해 여름 법정은 난초를 선물받습니다. 외로운 수행자 생활에 벗하나가 생겼습니다. 볕이 뜨거울까 날이 찰까 법정은 온갖 정성을 바쳐 난을 키웁니다. 편백수림을 걷는 법정의 모습. 법정은 난초를 마당에 내놓은 채 잠시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구름이 걷히고 뜨거운 햇살이 내려 쬐기 시작합니다. 법정은 허둥지둥 암자로 돌아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난초는 시들어버렸습니다. 그 순간 번개처럼 드는 깨달음 하나. 집착이었습니다. 하나를 가지면 하나에 얽매인다. 법정은 결심합니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깉은 걸 터득한 셈이었다.
법정이 제자들에게 늘 말하는 것 또한 버리기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떤 가톨릭 수도원에서는 한 달에 두 차례씩 사물을 스스로 공개하는 규칙이 있다네. 그러니까 그 말이 무슨말인가 하면 남 앞에 내놓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가질것만 가지라는 거지. 갖지 않는 것이 부자거든. 많이 가질수록 가난한 것이고. 그런 도리를 알아야 하는데 그래야 자유롭지.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덕조스님 맏상좌(젊을 때는 단아하고 수려했던 그, 나일 먹어서 좀 살이 붙어 그렇네ㅜ)의 말
"뭘 계속 쌓아 둔다는 것 자체를 당신이 불편해 하신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버리고 떠나기죠. 뭐라도 좀 쌓이면 정리하고 없애버리는 성품이시거든요."
현장스님의 말
"겨울에 떨어진 것을 쓰고 계시면 다녀간 사람마다 뜨개질을 해서 하나씩 보내와요. 그러면 겨울에 한 10개 20개 생기거든요. 그것을 그대로 쓰고, 큰 절 스님들한테 내려보내주고.."
하나가 있으면 됐지 왜 두개가 필요한가!
법정은 이 양은 대야 하나를 평생 썼습니다. 물건 하나의 쓰임이 43년 입니다.
[자기 주거공간 같은 것은 될 수 있으면 단순해야 한다고. 공간이 단순해야 어떤 광활한 정신공간을 지닐 수 있어요. (불일암 내부, 열린 문으로 조계산봉이 멀리 보인다.) 이것저것 가구 같은 것을 잔뜩 늘어 놓으면 그 안에 틀어박혀서 개운치가 않아요. 눈에 띄는 것이 많아서. 근데 아무것도 없는 빈 방에 있으면 전체적인 자기, 온전한 자기를 누릴수가 있다고. 무엇인가를 갖게 되면 거기에 붙잡힌다고. 말하자면 '가짐'을 당하는거지. 그런데 될 수 있는 한 가진것이 적으면 홀가분해요. 매인데가 없으니까. 텅빈 상태에서 충만감을 느끼는 거예요.]
(도심의 비계와 안전모 쓴 인부 하나. 낡은 나무의자)
'법정의 의자' 는 다시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 뭘 더 가지려하는가?
'본래무일물'
소유의 유혹에서 벗어난 곳에서 진정한 자유는 찾아 온 것인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계속
(법고치는 소리) 흙탕물 속에 피어난 연꽃과 같이, 간소하고 단순한 수행자의 삶은 그대로 글이 되었습니다. 법정은 어려운 법문을 말하지 않습니다. 쉽고 간결한 글, 그 글이 일으키는 감(? 개시키)화는 넓고 깊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우리말을 사랑했습니다.
윤청광 작가의 말
"우리말을 그렇게 사랑하셨어. 우리말 우리글을. 그래서 특징이 초등학교 안 나온 사람도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 그러니까 한글만 알아도 글을 다 알아보게 썼죠. 국어사전 펼칠 필요 없어요."
'향기로운 과일이 삶이라면
그 안에 들어있는 씨는 죽음
씨 없는 과일이 없듯이
죽음이 없는 생은 없습니다.'
生也一片 浮雲起 死也一片 浮雲滅 浮雲自體 本無實 生死去來 亦如然 -서산대사의 해탈 시 |
법정의 필력을 가장 먼저 눈여겨 본 사람은 '운허'였습니다. 결력하게 독립운동을 하다 출가했던 '耘虛' (김맬 운)
우리나라 최초로 불경번역 작업을 시작한 '동국역경원'을 세운 사람이 바로 '운허'입니다. 1960년 법정은 운허의 부름을 받고 역경사업에 뛰어 듭니다. 수 많은 책이 그의 손을 거처 나옵니다.
박종린 동국역경원 위원의 말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나온 불교사전입니다. 운허스님께서 이 작업을 하셨고 이 사전작업을 하는데 법정스님께서 참여를 하셨습니다."
어려운 불교용어를 사전으로 (? 저저 발음보소 ㅉ~으이그) ... 불교사전. 역경은 최고의 불사였습니다. 초기 경전 수타니파타를 최초로 번역한 이도 법정입니다. 가장 방대하다는 화엄경을 정수만 모아 펴내기도 했죠. 그의 역경사업은 13년 동안이나 지속됩니다. 『선가귀감』, 『숫타니파타』, 『불타 석가모니』, 『밖에서 찾지말라』
현각스님의 말
"대장경 안에 갇혀 있던 것. 절에 갇혀 있던 불교를 완전히 우리사회 구석구석에 심어 준 스승이구나!"
(해인사 경남 합천군)
법정이 역경에 매달린데는 한 사건이 계기가 됐습니다. 해인사 강원시절 장격각을 구경하고 나오던 한 보살이 법정 곁을 지나며 투덜댑니다. "팔만대장경이 있다더니 웬걸, 빨랫판만 가득하더라~" 그 얘기에 상당히 충격을 받으셨대요.
[아, 부처님의 소중한 말씀도 내용을 모르는 사람한테는 빨랫판으로 보이는구나. 그러면 이 소중한 말씀을 우리가 호흡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해야겠다.]
역경원 위원의 말
"
그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번역되지 않는 불경은 대중에게 한낱 빨래판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 충격이 법정을 재촉했습니다."
一燈能除千年暗
一智能滅萬年愚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앤다.
- ‘六祖法寶壇經’ 懺悔참회편).
'운허'만이 아닙니다. 구한말부터 한국불교를 이끌어 온 수 많은 스승들이 법정의 재능을 인정하고 기특하게 여겼습니다.
혜총스님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장의 말
"자운스님이 해인사 주지를 하셨어요. 그래서 특별히 자운스님 방을 비워서 법정한테 드리고 자운 큰스님께서는 밑에 명월당으로 나하고 같이 내려가셨어요. 그 쓰시던 방을 주시구... 그리고 번역도 자운스님이 맡기셨구요."
통영 '미래사'에 두 스님의 비가 있습니다. 법정의 스승이었던 효봉과 그 효봉의 스승이었던 석두화상의 비 입니다. 한글로 된 특이한 비석. 뭔가 다르지요?
법흥, 효봉제자. 송광사 회주의 말
"비문은 동국대 '서경수 비문 짓다'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비문은 법정스님이 지은 거에요. 그리구 석두스님의 비문이 있는데 효봉스님의 은사스님, 그걸 법정스님이 둘 다 지은 거예요. 둘 다 짓고서 이름은 서경수, 법정스님이 본인 이름으로 안 하고 남의 이름으로.."
정작 법정의 글이 더 빛을 발한 건 그의 수필집입니다. <아름다운 마무리>, <맑고 향기롭게>, <무소유>, <인연이야기>, <홀로 사는 즐거움>, <오두막 편지>, <물소리 바람소리>, <텅빈 충만>, <버리고 떠나기>,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말과 침묵>, <서 있는 사람들>, <산방한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법정이 펴낸 수필집이 20여권. 승려생활 56년. 역경~~(?)까지 합치면 그는 거의 1년에 한권 꼴로 책을 펴낸 셈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몰아세운걸까요?
[스님이 산중에서 혼자사는데 도대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내가 그것을 듣고 스스로 많이 반성해. 그렇겠구나.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지? 근데 가끔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기뻐한다고. 즐거워하고. 또 그런 걸 볼 때 뭐 이런식으로 살아도 세상에 큰 폐가 되지는 않겠구나. 이런 생각도 해서 스스로 만족하지 않지만 우선은 이런 식으로 살고 있고 내가 세상을 모른 체하지 않고 그냥 내가 자연에서 얻어 들은 어떤 삶의 교훈이라든가. 자연의 신비라든가 아름다움을 그때그때 기회있을 때마다 말로 글로 전하고 있는 것으로 밥값의 일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스님의 말
'밥값의 일부', 그것은 일종의 회향(일정기간 수행하여 선근과 공덕을 쌓으면 그것을 이제 다른 사람에게 올리어 자타가 함께 깨달음의 성취를 기하는 것), 작은 것을 돌이켜서 큰 것을 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잖아요. 그런데 회향이라는 것은 이 복이 나에게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거에요. 내가 지은 작은 선업이 공덕이 나 아닌 모든 이웃에게 돌아가서 이웃들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또 하나는 내가 언젠가는 번뇌를 벗어나서 깨달음을 이를 수 있게 해주고 또 내가 내 몸을 벗어날 때는 정념을 잃지 않고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게 해주십시오 하는 마음이 '회향의 마음'이거든요.
법정은 불자들에게 늘 회향정신을 강조했습니다. 얻었으면 주라는 것입니다.
[어, 진짜 기도는 오늘부터예요. 그동안 내가 백일동안 열심히 간절한 마음에서 닦은 기도의 공덕을 그 저력으로 오늘부터 회향하는 거에요. 그래서 기도한 사람하고 안 한 사람하고 다릅니다. 내가 진짜 바른 기도를 했다면은 오늘부터 내가 이웃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가. 거기에서 기도를 잘하고 못하는 것이 판가름이 납니다.]
2004년 하안거 결제 법문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친절'입니다. 작은 친절과 따뜻한 몇 마디 말이 이 지구를 행복하게 한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은산철벽'이라. 얼음으로 덮여 은산이고 강철로 막힌 철벽이라했습니다. 허나 모기가 ~(쇠?살?)를 뚫듯 뚫고 뚫으면 그 길이 열린다 했습니다. 용맹정진. 긴 겨울이 지나면 꽃비가 내린다는 깨달음의 아침이 오겠지요.
대나무 숲... 구도의 길은 아직도 까마득한데 스승은 가고. 산사에는 이제 그가 없습니다. 그런 오늘 한 사람이 불일암으로 오릅니다. "스님! 스님, 저 왔습니다."
앤연이 묘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무소유를 읽고 법정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 법정은 아버지같은 사람이었습니다.
"1학년 2학기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스님 꼭 대학을 다녀야 합니까?
문현철 초당대학교 교수의 말
"대학을 안 다니고도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질문을 한 번 불일암에 올라가서 드린 적이 있어요. 제 형편을 뻔히 알고 계시는데 덤덤히 들으시더라구요. 들으시면서 "베토벤을 한번 가보" 라고 하셨습니다."
'광주 광역시 동구' "베토베0ㄴ" 1982 오월~
법정이 말한 베토벤은 광주에 있는 고전음악감상실. 법정이 가끔 들러 차 한잔을 마시던 곳입니다.
"베토벤에 가 봐라!" 가 보니 법정스님이 놓고 간 장학금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법정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창구였습니다.
베토벤 고전음악감상실 사장의 말
"스님이 오셔가지구 아르바이트 생 중에 어려운 학생들 있으면 예기하라고. 장학금을 좀 도와주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그때 조선대간호학과 다니던 학생하고 여기 손님으로 드나들었던 문현철 교수님, 그 시절에는 대학생이었는데, 그 학생이 떠올라서 연결해서 제가 두번 장학금을 받아다가 준 적이 있어요."
문현철교수의 말
"1학년 2학기 등록금부터 4학년 졸업할 때까지. 제가 대학교 3학년 올라갔을 때 한번은 주변에 어렵게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는지 물어보시더라구요. 저는 많죠. 그랬죠. 고등학교 후배들 친구들이 같은 대학 다니면서 항상 등록금 납부 철이 되면 학교를 그만둘것이냐 이렇게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죠.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그랬어요.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됐는데 베토벤에서 사장님이
"스님께서 그러셨는데 현철이가 어려운 친구들 몇 명 더 있으면 추천해보라고. 그래서 제가 4명인가 5명인가를 추천했습니다. 제 주변에. 그 친구들 대학 졸업할때까지."
그 돈은 모두 그가 글을 써서 번 돈이었습니다. 등록금철이 되면 출판사에 인세를 채근하기도 했죠.
샘터사 사장 김성구의 말
"요새 같이 학기초에 그때도 직접 전화를 거셔서 채근을 하시는 거에요. 왜 빨리 인세를 안 주느냐? 그래서 처음엔 이제, 그런 전화를 받으면 당황이 되잖아요. 우리가 무슨 인세를 안드릴것도 아니고 당연히 때가 되면 다 드리는데. 왜 스님께서 직접 전화까지 걸어서 인세 채근까지 하시나. 스님이 왜 돈을 밝히시는가! 뭐 그런 생각까지도 했죠."
『무소유』 출판 후 그가 처음으로 받은 인세는 오십만원이었습니다. 그는 그 돈을 뜯어보지도 않고 봉투 째 장준하의 유족에게 전합니다.
김희숙 故 장준하 미망인의 말
"큰 딸 아이 시집을 보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어. 정말 속상해서 그냥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그냥 있으니까 법정스님이 오셨어요. 오시는데 그냥 아무 말씀 안 하고 누런 봉투 그냥 척 주고 돌아서서 , 스님, 스님 찾아도 불러도 그냥 뒤도 안돌아보고 달아나셨어. 그게 오십만원이에요. 원고료 받은 것 그대로 갖다 주고 간 거예요. 그 50만원 가지구 큰 딸을 시집보냈어요."
그의 모든 인세는 그렇게 써여집니다.
단 한 곳 속가의 가족들에게 만은 무서울 정도로 냉정했습니다. 홀어머니의 외 아들. 그는 집안의 장손이었고 작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대학까지 보냈는데 출가를 해버렸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박성직 사촌동생의 말
"유구무언이죠. 거기에다가 어떻게 무슨 말을 하겠어요. 허허~ 속만 상하시고 약주를 좋아하시니까 약주 좀 하고 그러셨지요(너털웃음).
그게 마음에 걸렸던지 그는 작은아버지의 고마움을 편지로 전하곤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게 가장 은혜로운 분은 작은 아버지시다. 나를 교육시켜 눈을 틔워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마을사람들에게 법정은 지독한 책벌레 그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희재 고향후배의 말
"우리는 책을 보면 읽고 쭉 넘어 가잖아요. 그 양반은 좋은 글귀 대목마다 노트에 다시 기록을 해요. 그 기록한 노트가 아마 이 정도는(키높이를 가리킴) 됐을 거에요. 다른 것으로는 아무것도 부지런한 것이 없는데 책 보는 것만 부지런했죠. 그리고 성격은 좋은 편은 아니였죠. 글쎄요, 좀 인간미가 없다고 할까. 좀 그랬어요.
언젠가 딱 한번 형편이 어려워진 사촌동생이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박성직 사촌동생의 말
"형제들이나 집안에는 일절 도움같은 건 없었습니다. 중이 무슨 돈이 있겠느냐. 그런 말을 하시면서 일언지하에, 다른 게 없으니까 거절하신 거죠. 그러니까 큰스님이 되었겠죠. 가족한테는 상당히 냉정하고 엄하셨어요. 우리도 어려워서 잘 부탁할 수도 없고..."
지금까지 법정이 받은 인세의 총액을 수십억원대로 추산합니다. 자신과 속가의 가족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엄격했던 사람. 그 돈은 모두 남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윤청광 작가의 말
"다 같이 물에 빠졌으면 남의 식구부터 구하는 것이 수행자 본분이지 자기 식구부터 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세속의 인연을 끊기 위해서, 가족들에게 돈 대주는 스님은 안 되는 거예요."
수십년을 입은 법정의 누더기 옷 한벌. 무소유로 살았던 그의 평생을 증명합니다. 그가 평생 소유했던 것은 딱 네가지입니다.
당장 읽을 몇 권의 책 그리고
한 ~(다기)의 차,
건전지로 듣던 음악
몇 평의 채마밭
그 네가지가 그가 소유해 본 전부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무엇보다 불편한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었습니다. 법정의 책이 유명해질수록 법정을 만나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습니다. 다 종교의 마음을 안고 찾아오는 이들이니 마다할 수가 없는 일이었지요.
현장스님의 말
"내가 다른 것은 다 버리고 놔 버릴수가 있었는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음은 가장 버리기 어려웠다." 이런 말씀을 하시거든요. 그래서 스님은,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가장 단순한 데서 찾죠. 가장 단순하고 절제 된 이런 삶 속에서 찾을 수가 있는데 공간을 당신의 철학에 맞게끔 정돈하고 사셨어요. 그리고 이런 것이 넘쳐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참지 못하고 바로 없애버리시지요. 그리고 그런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그 자리를 떠나 버렸죠."
즉시현금 갱무시절(卽是現今 更無時節)
법정 스님
卽是現今 更無時節(즉시현금 경무시절) 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
임제 선사의 어록 중에서 좋아하는 한 구절 '즉시현금 갱무시절' 이라고 쓴 족자를 걸어 놓으니 낯설기만 하던 방이 조금은 익숙해졌다.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는 말. 한번 지나가 버린 과거를 가지고 되씹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기대를 두지 말고,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최대한으로 살라는 이 법문을 대할 때마다 나는 기운이 솟는다.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다. 이 자리에서 순간순간을 자기 자신답게 최선을 기울여 살 수 있다면, 그 어떤 상황 아래서라도 우리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다른 시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삶과 죽음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전개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것이다. 또 누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잠 못 이룬다면, 그는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강물처럼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과거나 미래 쪽에 한눈을 팔면 현재의 삶이 소멸(消滅)해 버린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항상 현재일 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면 여기에는 삶과 죽음의 두려움도 발붙일 수 없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라.
출처 : 법정 스님 <산방한담>중에서
그 끝에서 법정은 불일암을 떠나 버립니다.
법흥스님의 말
"아, 사람 안 만나려고. <버리고 떠나기>라는 수필집을 남겨 두고 "나는 일체 송광사의 효봉스님 제사도, 구산스님 제사도 일체 공식행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버리고 떠나기>를 써 놓고 떠나게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