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되지 않아 서서의 홀어미가 허창에 이르렀다.
조조는 그녀를 후하게 대접한 뒤 말했다.
"듣기로 아드님 서원직은 천하의 기재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야에서 역적 유비를 도와 조정에 반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아름다운 구슬이 진흙 속에 떨어진 격이니
그를 기르시느라 들이신 성의가 참으로 애석합니다.
번거롭겠지만 아드님에게 글을 내리셔서 허도로 불러들이도록 하십시오.
제가 천자께 상주하여 반드시 무거운 상이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좌우에 명하여
먹, 벼루, 붓 종이를 가져오게 했다.
그 아들에 그 어미라 할까,
겉으로 보기에는 늙어빠진 할멈에 지나지 않았으나
서서의 어머니는 역시 여는 아낙과는 달랐다.
가져온 문방사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만히 조조에게 물었다.
"유비는 어떤 사람입니까?"
"탁군의 보잘것없는 무리로 망령되어 스스로를 황제의 아재비라 칭하고 다니는 자입니다.
신의란 조금도 없어 이른바 '겉으로는 군자요 안으로는 소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가 슬며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서서의 어머니가 소리 높여 조조를 꾸짖었다.
"너는 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그토록 거짓과 속임이 심하냐?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유현덕이 중산정왕의 후예이며
효경황제 각하의 현손 임을 들어 왔다.
뿐이랴, 아래로 몸을 굽혀 선비를 대하며
스스로를 낮추어 사람을 기다리니 그 어진 이름이 세상이 이미 널리 알려진 바다.
어린아이며, 늙으니, 소치는 목동과 나무꾼까지도 모두 그를 알거늘
네 어찌 그처럼 진정한 당세의 영웅을 함부로 헐뜯어 말하느냐?
내 아들이 그를 돕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주인을 찾은 셈이다.
거기 비해 너는 비록 말로는 한의 숭상이라 하나 실은 한의 역적이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유현덕을 역신으로 몰며
나로 하여금 밝은 데 있는 자식을 어두운 곳으로 끌어들이게 하니 될 법이나 한 일이냐?
그만큼이라도 몸이 귀하게 되었거든 스스로 부끄러워 할 줄도 알아라!"
그러고는 마침과 아울러 눈앞에 놓인 벼루를 들어 조조를 쳤다.
무거운 돌 벼루는 얼결에 피했으나 조조의 노여움은 컸다.
곧 좌우를 돌아보며 무사들에게 소리쳤다.
"저 늙은 것을 끌어내다 목을 베어라!"
☆☆☆
그때 정욱이 급히 나서서 조조를 말렸다.
"서서의 어미가 승상의 노기를 짐직 더 돋우는 것은
그렇게 하여 승상께 죽음을 당하려는 속셈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승상께서 죽이신다면
승상께서는 즉시로 의롭지 못한 이름을 얻을 뿐만 아니라
서서 어미의 덕을 높여주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또 그 어미가 그렇게 죽는다면
서서는 반드시 힘을 다해 유비를 도와 원수 갚음을 하려들 것이니
결코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차라리 그 어미를 이곳에 머물게 하여
서서로 하여금 몸은 그곳에 있어도 마음은 항상 이곳을 걱정하도록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리되면 서서는 비록 유비를 돕는다 해도
그 어미 때문에 힘을 다 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뒤의 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마침내는 서서가 이곳으로 와서 승상을 돕게 할 계책이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
성난 중에도 정욱의 말을 듣고 나니
조조도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거기다가 정욱에게 달리 서서를 불러들일 계책이 마련되어 있다면
구태여 그 어머니를 죽여 원한을 살 필요는 없었다.
이에 조조는 서서의 어머니를 죽이지 않고
외진 곳에 옮겨가 정욱으로 하여금 돌보게 했다.
정욱은 그날부터 매일 서서의 어머니를 찾아 문안을 드리고
자신과 서서는 일찍이 형제의 의를 맺은 사이라 속였다.
뿐만 아니라 정말로 그녀를 받들기를 친어머니 모시듯 하며
맛난 음식과 좋은 옷가지를 자주 보냈다.
그것도 언제나 공손하고 정성스런 쪽지와 함께였다.
충의에는 철석같은 서서의 어머니도 여자라 그런지 정에는 약했다.
정욱이 워낙 정성을 다해 받드니 절로 고마워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음식이며 옷가지와 함께 쪽지가 올 때마다 그녀도 쪽지를 써서 답을 보냈다.
그런데 정욱이 노린 것은 바로 그 쪽지였다.
그걸 통해서 서서 어머니의 필적을 손에 넣은 정욱은
그 필적을 흉내내어 편지 한 통을 쓴 뒤 믿는 사람을 불러 가만히 말했다.
"너는 이 편지를 가지고 지름길로 달려가
신야에 있는 선복이란 이에게 몰래 전하도록 하라"
이에 그 심부름꾼은 급히 신야로 달려가 선복의 군막을 찾았다.
군막을 지키던 군사는
고향집에서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이 있다는 걸 선복에게 전했다.
그러잖아도 홀로 두고 온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던 선복은
급히 그 사람을 불러들였다.
"너는 누구냐"
아무리 보아도 낯선 얼굴이라 서서가 물었다.
정욱의 심부름꾼이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저는 영천 역관의 주졸로서 노부인의 말씀을 받들어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품안에서 글 한 통을 꺼내 바쳤다.
☆☆☆
선복이 반가운 마음으로 뜯어보니 눈에 읽은 필적이 나왔다.
'근자에 네 아우 강이 죽어
나는 사방을 둘러봐도 가까운 피붙이 하나 없는 늙은이가 되고 말았다.
슬프고 참담하여 눈물로 나날을 보내는데
문득 조승상이 사람을 보내 나를 허도로 불러들였다.
가보니 조승상은 네가 조정에 반역한 죄를 들어
나를 가두려 하였으나 다행히 정욱 등이 힘써 구해 주었다.
하지만 아직은 온전히 놓여난 것이 아니다.
네가 와서 항복해야만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으니
너는 이 글을 받는 즉시로 달려오기 바란다.
너를 낳아 기를 이 어미의 은공을 생각해서라도
이 밤을 넘기지 말고 달려와 효도를 보전토록 하라.
그 뒤 천천히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나 지으며 살 수 있는 길을 찾는다면
너와 이 어미 모두 큰 화를 면할 수 있으리라.
지금 내 목숨은 가는 실오라기에 매달린 것과 같으니
오직 바랄 것은 너의 구원뿐이다.
다시 수다스레 당부하지 않더라도 부디 빨리 돌아오너라'
☆☆☆
물론 정욱이 그 어머니의 필적을 흉내내어 거짓으로 쓴 것이었으나
워낙 빈틈없는 흉내라 선복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거기 담긴 기막힌 내용 때문에 눈물만 샘솟듯 할뿐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울고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간신히 정신을 추스른 선복은
어머니의 편지를 가지고 유비를 찾아갔다.
"저는 원래 영천 태생으로 이름은 서서이며 자는 원직이라 합니다.
어떤 일로 쫓기게 되어 이름을 지금 쓰고 잇는 선복으로 바꾸어 썼던 것입니다"
선복은 먼저 자신의 참 이름부터 밝혔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유비에게 다시 그를 찾아오게 된 경위를 밝혔다.
"전에 듣기로 유표가 어진이를 불러들이고
좋은 선비를 찾는다기에 특히 그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나 얘기를 나누어 본즉 유표는
아무 짝에도 쓰일 데 없는 인물이기에 글을 써서 작별인사를 대신하고 떠났지요.
그리고 그날 밤 수경선생 사사휘의 장원에 묶게 된 나는
그분에게 유표를 찾아갔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수경선생은 내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걸 몹시 꾸짖으신 뒤
제게 말했습니다.
'지금 유예주께서 이곳 신야에 와 계신데 어찌 그를 섬길 줄을 모르느냐?'고,
그래서 저는 짐짓 미친 사람처럼 노래를 지어 불러 주공의 눈길을 끌었던 것입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지난 일을 되씹고 계십니까"
무언가 알지 못할 불안 때문에 굳어진 얼굴로 유비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서서가 문득 처량하면서도 송구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행히도 그때 사군께는 저를 어리석다 버리지 않고 무겁게 써주셨습니다.
그런데 방금 저의 늙으신 어머니가 조조의 간계에 빠져 허창에 갇혀 계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 않으면 늙으신 어머니를 해칠 것이라 하니
자식된 도리로 아니 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으로는 개나 말의 수고를 대신하여 사군의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고 싶으나
어머니가 저편에 사로잡혀 있으니 어찌 있는 힘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찾아 뵙고 제가 돌아감을 고해 올리려는 것입니다.
뒷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이 떠남을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
그러면서 늙은 어머니의 편지를 내놓는 서서의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그보다 더했다.
모든 일에 서서만 믿고 있던 그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모자간이란 하늘이 정한 도리로 묶인 사이니 원
직께서는 지나치게 이 유비를 위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먼저 늙으신 어머님을 구하신 뒤에
행여 라도 인연이 닿으면 다시 가르침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은 유비가
애써 안타까움을 감추며 말했다.
서서 또한 가슴이 아팠으나
늙은 어머니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 잠시라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곧 유비에게 작별인사를 올리고 떠나려 했다.
"빌건대 하룻밤만 더 묵어 내일 떠나도록 하십시오.
차마 이대로 보낼 수 없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유비가 문득 서서의 옷깃을 잡으며 말렸다.
☆☆☆
모자간의 일이 중하다 해도 그 동안 서서가 세운 공에 비해
너무도 해준 게 없음이 새삼 마음에 걸린 것이었다.
하룻밤 술잔치라도 크게 열어 그가 세운 공을 천에 하나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서서도 차마 이 같은 유비의 청마저 뿌리치지는 못했다.
서서가 짐을 꾸리려 물러난 뒤
손건이 가만히 유비에게 말했다.
"원직은 천하에 드문 기재인 데다가
신야에 오래 머물러 우리 군중의 허실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가면 조조가 틀림없이 그를 무겁게 쓸 것이니
우리로 보아서는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일이 됩니다.
주공께서는 마땅히 그를 붙잡아 두실 일이요,
결코 놓아 보내셔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면 조조는 반드시 그 어머니를 죽일 것이고
원직은 또 그걸 알면 반드시 원수를 갚으려 들것입니다.
그때는 이를 악물고 조조를 무너뜨리려 할 것이니
이는 비단 우리의 위태로움을 피하는 길일뿐만 아니라
원직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해 주공을 돕게 하는 방도도 됩니다"
그러자 유비는 손건을 타이르듯 대답했다.
"아니 된다. 다른 사람을 시켜 어머니를 죽이게 하고
그 아들을 쓴다는 것은 어질지 못한 것이다.
또 그를 붙들어 두는 것은
모자간의 도리를 끓는 짓이나 마찬가지로 의롭다 할 수 없다.
우리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질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일을 할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냉혹하고 비정한 정치의 장에서
윤리나 도덕을 앞세우는 것이 어리석은 것 같지만
실은 그것은 그것대로 훌륭한 정치적 책략이 될 수도 있다.
유비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으니,
그 자리에서는 물론 뒷날 그 얘기를 전해들은 사람 치고
유비의 인품에 감동하지 않은 이는 하나도 없었다.
이윽고 술자리가 금옥 같이 마련되자
유비는 자기 처소에 가 있는 서서를 불렀다.
"비록 금옥 같이 값지고 향기로운 술일지라도
늙으신 어머니가 갇혀 있음을 생각하니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습니다"
차려진 술상을 보고 서서가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유비 또한 쓸쓸한 목소리로 거기에 대꾸했다.
"이 유비는 선생께서 떠나신다는 말을 들으니
왼손 오른손이 다 잘린 듯 합니다.
비록 용의 간이나 봉의 골 같은 귀한 안주라도
또한 입에 달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리에 앉는데
다시 두 볼에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