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cent van Gogh의 혁신, 현대 기업의 전략으로 부활하다(DBR) Vincent van Gogh(1853-1890, Netherlands) #innovation
Article at a Glance – 전략, 혁신
강력한 경영혁신은 자신의 업을 재규정할 때 일어난다. 과거의 성공은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할 오늘을 결박하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인상파는 프랑스 황실이 정해 놓은 쇠창살을 거부했다. 고흐는 초기 인상파가 쌓아 놓은 담장을 부수고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한다. 미국의 ‘와와’도 편의점에 관한 고정관념을 거부한다. 후발주자였던 홈플러스는 발상의 전환으로 단숨에 국내 할인점 시장에서 강자로 부상했다. 모두 사고방식의 전환이 만들어낸 성과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5월3일부터 미술전이 열리고 있다. ‘인상주의, 그 빛을 넘어’라는 이 전시회는 8월 말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인상파 그림의 전당인 프랑스국립오르세미술관의 네 번째 국내 출품전이다. 인상주의의 태동, 후속 사조와 작가들의 등장, 변화의 태동지가 된 근대 도시 파리의 삶과 예술을 여러 갈래로 보여준다. 이제 인상파는 창조적 파괴의 상징이 됐고 고흐는 열정의 표징이 됐다. 인상파는 당대의 전통적인 화풍을 거부하고 혁신을 시도했다. 고흐는 남프랑스에서 꿈틀거리는 열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화폭에 담았다.
최근 편의점 브랜드 CU가 상장을 준비하자 4조6000억 원에 달하는 자금이 공모주 청약에 몰렸다. CU는 지난 20년 동안 일본 패밀리마트와의 합작을 마감하고 독자적인 브랜드로 거듭났다. 국내 편의점 사업의 경쟁구도는 더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편의점 브랜드 ‘와와(Wawa)’의 행보는 상당히 파격적이다. 미국 동북부에 근거를 두고 있는 ‘와와’는 연 매출 약 10조 원에 도달할 즈음 미국 동부 최남단 플로리다에 새로운 거점을 시도하고 있다.
국내 대형마트 사업 초반기는 춘추전국시대와 비슷했다. 홈플러스는 1997년 9월에 첫 매장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15개 국내외 할인점 브랜드가 40개의 점포를 열어 신시장을 석권하기 위한 격렬한 실험이 진행되던 와중이었다. 선발 브랜드 이마트는 수도권 선점에 이어 지방 소도시에 누구보다 먼저 진출한다. 후발주자 홈플러스는 경쟁이 비교적 덜한 영남지역을 전략적 요충지로 정하고 성장의 도약대를 준비한다.
강력한 경영혁신은 자신의 업을 재규정할 때 일어난다. 이미 굳어진 전통적 사고방식은 과거가 만들어낸 익숙함에 스스로를 가둔다. 그렇게 과거의 성공은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할 오늘을 결박하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경영자들이 만나는 감옥은 과거가 만들어놓은 생각과 사고방식의 쇠창살 안에 있다. 인상파는 프랑스 황실이 정해 놓은 쇠창살을 거부했다. 고흐는 초기 인상파가 쌓아 놓은 담장을 부수고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한다. 미국의 ‘Wawa’도 편의점에 관한 고정관념을 거부한다. 후발주자였던 홈플러스는 발상의 전환으로 단숨에 국내 대형마트 시장에서 강자로 부상했다. 모두 사고방식의 전환이 불러온 결과들이다.
이번 글에서는 인상파 고흐의 혁신, 미국 편의점 브랜드와 대형마트 홈플러스의 혁신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알아보고자 한다.
Gogh가 남쪽으로 간 까닭
Pablo Picasso(1881-1973)가 부럽다면 고흐는 애달프다. 피카소는 살아 있는 동안 화가로서 최고의 성공을 누렸다. Gogh는 죽은 뒤에야 명성을 얻었다. 피카소는 아흔 넘도록 장수를 누렸고, 고흐는 서른일곱에 생을 마감했다. 단명한 피카소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아흔의 고흐를 상상하는 것은 어색하다. Gogh만큼 시대를 뛰어넘어 열렬히 사랑받는 화가가 있을까? 고흐에 대한 팬덤현상은 불행하고 짧았던 그의 삶에 대한 안타깝고 애처로운 감정 때문인지 모른다.
정작 고흐 스스로는 불행하기만 했을까? 미술비평가들은 고흐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순도 100%로 행복하거나 불행한 삶은 없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행복과 불행도 영향을 받는다.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 편지 속 고흐의 독백이다. <그림 1>은 고흐가 최초로 도전한 유화 대작이다. <그림 1>을 그릴 때는 불행했다. <그림 2>를 그릴 때는 행복한 열정에 휩싸였다.
두 작품은 4년의 시간 차와 전혀 다른 공간 차로 그려졌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1885년 Netherlands Nuenen에서 탄생했다. ‘밤의 카페 테라스’는 1889년 프랑스 아를르가 배경이다. 고흐는 아버지가 있던 누에넨에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지도 1>은 고흐가 누에넨을 떠나 파리를 거쳐 프랑스 남단 지중해 연안 아를르(Arles)로 이동한 여정을 담고 있다. 구글 지도에서 운전거리를 따져보니 대략 1185㎞다. 한반도에서는 북한 신의주에서 남한 부산까지의 철도길이와 비슷하다.
<그림 1>이 그려진 시기, 고흐의 연애는 실패했고 청혼은 세 번이나 거절당한다. 1885년 3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그해 4월에 완성됐다. 그때 마음은 어땠을까? 고흐는 프랑스 Paris에서 인상파의 세례를 받는다. 화가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남프랑스 Arle로 향했다. 아를르 시절 고흐는 작품 200점을 쏟아냈다. 이틀에 한 점씩 완성한 셈이다. 틀에 박힌 파리 살롱의 화풍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그림 1>에서 묻어나는 유럽 북부의 음울한 색상은 <그림 2>에서 지중해의 눈부신 색감으로 바뀌었다. 환경과 관점의 변화는 작품세계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인상파의 도전
파리 살롱전에서 10년째 낙방하자 Jules Holtzapffel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살롱의 심사위원들이 계속 나를 거부했다. 따라서 나는 재능이 없다. 나는 죽어야 한다.” 1866년 일이다. 당시 파리 살롱전은 황실 미술부가 관장했다. 살롱전에 나갈 화가들은 자신이 그린 유화 두세 점을 마감일까지 제출했다. 심사단은 몇 주에 걸쳐 차례로 그림에 투표를 했다. 심사에 통과하지 못한 그림에는 ‘R’이라는 탈락표시(rejected)가 찍혔다.
파리 살롱전의 심사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작품은 원근법과 익숙한 예술적 전통을 따라야 했다. 현미경 수준으로 정밀하고, 제대로 마무리가 돼야 했으며, 형식에 맞게 표구돼야 했다. 서사적인 그림에서는 정확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분위기의 장면을 만들어야 했다. 당시 파리 시민들이 정서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주제와 표현방식이 권장됐다.
1865년경 Édouard Manet(1832-1883) 주위에는 젊은 화가들이 모여들었다. 대담하게 드러나는 붓터치, 원근감을 단순화시키는 독창적인 공간처리, 당시 제도권의 화풍과 타협하지 않고 새로운 재능을 발휘하고 싶은 화가들이었다. 모네, 시슬레, 르누아르, 바질, 세잔, 피사로. 이들은 살롱전 심사위원들의 기준을 따르는 대신 1874년 별도의 전시회를 개최한다. 인상파 탄생의 배경이다. 남들이 세운 기준을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기준을 만들어 나갔다.
인상파 탄생 배경에는 기술 발전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60년대에 튜브물감이 대량 생산됐다. 화가들은 튜브물감을 들고 화실을 벗어나 야외로 나갔다. 유화제작의 모바일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동식 이젤, 접이식 팔레트, 야외용 화구함이 등장했다. 바람, 햇살, 풍광이 생동하는 현장에서 튜브물감은 진가를 발휘했다. 인상파 화가들은 튜브물감의 초기 수용자들이었다. 르느와르는 튜브물감이 없었다면 인상파도 없었을 것이라 단언했다. 화가들은 화실 밖으로 작업공간을 확장했고 인상파는 살롱전 너머에서 새 지평을 열어갔다.
지방 편의점의 도전
‘Wawa’라는 편의점이 있다. 탄생지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작은 마을로 필라델피아에서 가깝다. 펜실베이니아의 지명은 원래 ‘윌리암 펜(Penn)의 숲(sylvania)’에서 유래했다. 퀘이커 교도였던 윌리암 펜은 종교적 신념대로 노예제도, 인종차별, 전쟁에 반대했다. 원주민과의 유대를 중시했던 퀘이커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졌다. 와와(Wawa)는 인디언 원주민의 언어로 ‘캐나다 기러기’를 뜻한다. 원래 농장으로 사업을 시작했던 ‘와와’의 창업주도 퀘이커교의 신념을 실천하고 있다.
점포 수 600개를 넘긴 ‘와와’는 특이한 기록을 여럿 보유하고 있다. <Forbes>가 선정한 미국 비상장기업 매출 순위 40위에 올랐다. ‘와와’의 2013년 말 매출은 한화로 10조 원에 달한다. ‘와와’는 2008년 미국에서 커피판매 랭킹 8위에 올라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Starbucks, Dunkin's Donuts, McDonald's, 버거킹, 웬디스, 세븐일레븐을 바짝 뒤쫓고 있기 때문이다. 매장 수 1만∼2만 개를 자랑하는 골리앗들과 비교하면 더욱 놀라운 숫자다. 2008년 미국 세븐일레븐의 점포 수는 6000개였고 ‘와와’는 587개였다.
‘와와’의 점포당 평균 매출은 세븐일레븐의 15배에 달한다. 600개의 점포 중에서 절반가량이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다. 주유소와 편의점이 통합돼 있는 미국에서 ‘와와’의 점포유형은 특이하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특이한 것은 ‘와와’ 스스로 자신들의 업을 ‘테이크아웃 레스토랑’이라고 정한 것이다. <그림 3>은 ‘와와’ 제1호점의 흑백사진이다. 큰 글씨로 ‘푸드마켓’이라고 적어 놓았다. 탄생부터 식음 분야의 차별화에 초점을 맞춘 것은 그들이 농장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와와’가 남진을 택한 이유
창업 후 50년 동안 ‘와와’는 창업 근거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델라웨어, 버지니아 지역에만 선별적으로 출점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반경 150㎞ 안에 전체 점포의 70%가 몰려 있다. 2009년 금융위기로 미국 경제가 얼어붙었지만 ‘와와’는 계속 성장을 기록했다. 금융위기가 진정되자 ‘와와’는 50년 역사에서 가장 특별한 결정을 내린다. 미국 최남단 플로리다에 향후 100개의 신규 점포를 출점하겠다고 밝혔다.
필라델피아에서 플로리다 올랜도까지는 운전거리로 약 1600㎞다. 자동차로 14시간30분의 거리다. 필라델피아에서 올랜도까지 운전을 한다면 95번 고속도로를 이용한다. 중간지대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가 있다. 왜 중간지역을 모두 건너뛰어 동부 땅끝에 해당하는 플로리다 지역을 제2의 전략지로 선택했을까?
Sunbelt는 미국에서 기온이 가장 높은 지역을 말한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제목이 어울리는 지역이다. <지도 3>에서 붉은색이 진하게 표시된 지역이 바로 선벨트 지역이다. <지도 3>에서 파란색으로 나타나는 북부 Snowbelt의 반대의미로 만들어졌다. 선벨트는 서부의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해서 멕시코 접경 텍사스를 지나 동부의 플로리다로 이어진다. 미국에서 선벨트는 단지 여름철 폭염과 겨울철 온난한 기후만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미국 인구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상징한다.
온난한 겨울 날씨는 수많은 은퇴자를 미국 남부지역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라틴계 미국 인구는 이미 흑인을 추월한 지 오래다. 선벨트의 일부 대도시에서 라틴계의 인구비율은 30∼50%를 넘기고 있다. 가톨릭 신자들이 대부분인 라틴계는 낙태를 꺼리고 다산을 축복으로 여긴다. 이민자들이 더 많이 합류하고 대가족을 이루니 미국에서 가장 인구성장이 빠른 지역이 됐다. 값싼 노동력이 풍부하고 장기적으로는 남미로 진출하기 위한 중간지대의 역할도 하고 있다. 인구성장세, 풍부한 노동력, 남미로의 가교역할이 선벨트의 매력이다.
Special WaWa
미국 선벨트가 모든 기업들에 희망의 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선벨트의 특징은 모든 기업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와와’의 전략적 판단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일부 ‘와와’ 고객들은 팬덤현상을 보여준다. 따로 팬카페를 만들고 페이스북에 100만이 넘는 열성 지지층이 만들어져 <뉴욕타임스>와 <ABC< SPAN>뉴스>가 따로 보도를 했을 정도다.
편의점에 충성고객이란 단어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편의점이란 눈에 먼저 띄고 가까우면 찾게 된다. 브랜드를 굳이 따져 더 먼 곳을 찾는 경우는 드물다. 2014년 4월 <뉴저지신문>은 ‘와와’ 창립 50주년 기념으로 소비자들이 ‘와와’를 찾는 이유를 물었다. 모두 5171명이 답했다. 커피(21.9%), 주유(18.9%), 샌드위치(16.4%), 무료 ATM 수수료(11.1%), 아침식사(8.2%), 간단한 스넥(7.2%), 담배(5.2%), 복권(3.4%) 순으로 답했다. 53.7%가 먹고 마시는 이유로 ‘와와’를 찾고 있다.
‘와와’ 경영진은 독특한 경영전략을 펼쳐가고 있다. 연간 한화 1조5000억 원에 달하는 ATM 수수료를 포기하는 대신 소비자들의 방문과 이로 인한 연관 판매를 유도해왔다. ‘와와’의 커피는 10∼20가지로 진열돼 고객이 직접 따라 마시도록 설계했다. 호기(Hoagie)라는 이름을 가진 샌드위치는 10가지가 넘고 터치스크린으로 주문하면 즉석에서 만드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스무디 같은 즉석 음료도 반응이 좋다. 손님의 취향대로 주문할 수 있는 즉석 메뉴가 강점이다.
심층조사에서 고객들이 ‘와와’를 찾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커피도, 샌드위치도, 공짜 ATM 수수료도 아니라고 밝혀졌다. 편의점의 편리성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와와’를 찾는 걸까? 고객들은 ‘와와’의 사람들이 좋아서 ‘와와’를 찾는다고 답했다. ‘와와’ 직원들과의 친밀한 관계형성이 ‘와와’ 마니아를 만들고 있다. ‘와와’ 지분의 30%는 직원들의 몫이다. ‘와와’는 창업 후 100년 넘게 지역 생산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편의점 사업에 진출한 50년 동안 지역 브랜드와 더불어 성장해왔다.
100년에 걸쳐 작은 동네에서부터 평판을 쌓아온 저력이 금융위기의 한파마저 넘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2011년 허리케인 아이린(Irene)이 미국 동부를 강타할 때 ‘와와’ 경영진은 모든 매장의 문을 이틀 동안 닫기로 했다. 직원들을 일찍 귀가시켜 가족들을 돌보도록 배려했다. ‘와와’ 마니아들은 “와와라면 그럴 만 해!” 하고 반응했다. 경영진이 임직원의 안녕과 행복을 적극 챙기니 임직원들의 근무만족도가 높아졌다. 지역 소비자들은 ‘와와’ 매장에서 매뉴얼에 나와 있는 친절이 아니라 자기 회사를 사랑하는 진심 어린 친절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와와’의 시도는 과학적 경영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와와’는 1997년부터 와튼경영대학원 산하 GIS연구소에 매출 예측 모델링을 의뢰했다. 기존 점포의 매출액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변수를 반영해 신규 점포의 예상매출액을 미리 점검한 뒤에 출점 여부를 결정해왔다. 10년 넘게 장기투자하며 매년 예측식을 고도화하고 있다.5 2005년에는 SAP의 비즈니스인텔리전스 솔루션을 도입해서 사내 분석역량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선발자의 선점포석
유통사업은 입지산업이다. 신세계그룹을 이끌어온 구학서 회장의 진단이다. “유통업은 입지선점이 가장 중요한 입지산업이다. 이마트는 점포를 120개까지 늘릴 수 있는 입지를 이미 선점해 놓고 있다. 제조업에서는 신제품과 서비스로 역전이 가능하지만 유통업에서는 좋은 입지를 먼저 확보한 기업을 따라잡는 것이 매우 어렵다.”6
국내 대형 할인점은 이마트가 선도해왔다. 외환위기 당시 신세계는 보유 중이었던 카드사 매각대금 3000억 원을 대부분 신규 입지를 확보하는 데 투자했다. 본격적으로 격화될 미래의 경쟁구도를 내다보고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입지를 선점한 것이다. 초창기 수도권에 주력하던 이마트 출점지는 후발 경쟁자들이 시장에 진입해 대도시 중심으로 경쟁이 격해지자 인구 20만∼30만의 지방 중소도시에 과감하게 진출했다. 미리 확보해둔 입지가 있었기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동일 시장에서 모든 기업이 선도자가 될 수는 없다. 후발주자가 경쟁에 진입하면 선도자의 지위는 도전받는다. 방어전을 치러야 한다. 새로운 사업에 선발주자가 되는 것만으로 우월적 지위가 영속된다면 business는 참 쉬울 것이다. 후발주자들의 도전은 거세고 집요하며 창의적이며 때론 위협적이다. 경쟁은 언제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전략과 전술의 창의적 구사는 늘 새로운 생각과 관점을 요구한다.
국내 인구는 50대20대30으로 분포한다. 서울·경기·인천을 합친 수도권이 전체 인구의 50%를 차지한다. 대전·광주·부산·울산·대구 5대 지방광역시의 인구는 전체의 20%, 강원·경상·전라·충청·제주를 모두 합산하면 전체의 30%에 해당된다. 선발주자 이마트는 국내에서 가장 큰 시장인 수도권을 선점하기 위해 최초 10개 매장 중 6개를 수도권에 포진시킨다. <표 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마트는 서울시 도봉구 창동에 소재한 물류창고를 첫 번째 실험장으로 만들었다. 수도권을 선점하기 위해 일산, 안산, 부평, 분당, 안양에 연달아 매장을 열고 멀찍이 제주, 남원, 부산, 김천에 지방형 매장을 실험한다.
Homeplus가 남쪽으로 간 까닭
홈플러스는 매우 뒤처지는 후발주자였다. 홈플러스가 제1호점의 문을 연 1997년 9월 초순에 이미 영업 중인 대형마트는 무려 40개에 달했다. 이마트 9개 점(표 1), 킴스클럽(강남점, 야탑점, 과천점, 인천점, 일산점), 2001아울렛(당산점, 분당점, 안산점, 중계점), 월마트(남부점, 인천점, 일산점), 까르푸(중동점, 일산점, 둔산점), 하나로클럽(양재점, 파주점), 그랜드마트(신촌점, 화곡점), 빅마트(북부점, 주월점), 코스트코(대구점, 양평점), LG마트(일산점), 메카마트(동래점), 탑마트(진주점), 해태마트(광주점), 대한통운마트(전주점), 리치마트(양주점)가 앞서 시장에 진입했다. 그야말로 대형마트의 춘추전국시대였다.
출점 순서로 따지면 40등으로 출발한 홈플러스의 전략적 행보는 남녘에서 시작된다. 2001년 영등포점을 열기 전까지 서울시 진입을 뒤로 미룬다. 초반기 사업에서 홈플러스는 2가지 이유로 영남지역을 테스트베드로 정한다. 첫째는 새로운 한국형 할인점을 실험하기 위해서다. 매장형태, 제품구색, 차별요인을 실험하고 다듬기 위해서였다. 수도권에서 제일 멀리 떨어졌지만 안정적인 배후인구를 가진 영남지역을 선택했다. 둘째는 수도권에 비해 경쟁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홈플러스는 영남거점 확보 후 수도권 진입으로 도전하고 이마트는 수도권 수성과 중소도시 선점으로 응전한다. 홈플러스는 매장형태에서도 선택적 대형화를 추구한다. 서울의 첫 매장인 영등포점의 경우는 1만5030㎡로 할인점 평균 영업면적 1만㎡의 1.5배를 선택했다. 넉넉한 주차장, 편안한 고객동선, 더 많은 제품구색(SKU·Stock-Keeping Unit)으로 인접 할인점보다 경쟁우위에 서고자 했다.
서로 다른 초반기 입지전략은 두 브랜드의 생각 차이를 보여준다. 이마트는 교외지역 매장비율이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훨씬 높았다. 브랜드 파워가 강하기 때문에 부동산 비용이 높은 도심을 벗어나 교외지역에 매장을 만들어 고객을 끌어당기는 중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상권을 만들어간다는 전략이다. 반면, 홈플러스는 역발상을 시도한다. 부동산 비용이 높지만 도심 한복판 중심상업지구에 들어갔다. 초기비용이 높은 대신 고객방문이 용이하고 면적당 매출액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업을 바라보는 생각 차이
인상파는 프랑스 황실이 주관하는 살롱전(Salon de Paris)의 심사기준을 거부했다. 오랜 전통으로 굳어진 좋은 그림의 요건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독자적인 전시회를 개최했다. 인상파의 첫날 관람객은 기껏 수십 명에 불과했다. “이런 짓은 정신병자들이 길에서 주운 돌을 diamond라고 우기는 것처럼 웃기는 것이다.” 비평가들은 인상파의 시도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황실주관 살롱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작가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고흐는 그림 파는 사람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변신했다. 파리에서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만의 독창적인 창작세계를 만들기 위해 몰입한다. 아버지와 머물던 네덜란드의 도시를 떠나 1185㎞ 남하를 선택한다. 고흐는 초기 인상파들의 작풍을 뛰어넘어 꿈틀대는 붓의 흐름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작가로 산 10년 동안 전력을 다해 폭포처럼 자신의 열정을 캔버스에 쏟아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 그는 행복한 창조자로 생동감 속에 살았을 것이다.
‘와와’는 편의점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부했다. ‘테이크아웃 레스토랑’이라고 스스로의 업을 재규정했다. 농장경영이라는 태생적 조건을 강점으로 전환해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지역 커뮤니티와 동반성장하며 직원들이 행복한 기업문화를 정착시켰다. 직원들의 만족감은 매장에 잠깐 머물다 가는 고객들에게도 전염됐다. 고객들의 고단한 하루하루의 일상에 작은 활력을 불어넣는 특별한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지역언론은 이를 두고 ‘격려의 체험(Cheers experience)’이라고 호평했다.7 금융위기에 더 큰 자신감을 얻어 창업지역의 테두리를 박차고 1500㎞ 남진을 선택했다.
뒤늦게 국내 대형마트 시장에 뛰어든 홈플러스는 전략적 사고의 위력을 잘 보여준다. 한국 소비자들은 창고형 할인점의 제품박스만 가득했던 삭막한 진열대를 좋아하지 않았다. 홈플러스가 시도한 것은 백화점 같은 매장 분위기였다. 그래서 백화점에나 있던 문화센터도 제일 먼저 도입했다. 매장의 활력소를 확보하고 고객들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카센터, 레스토랑, 미용실, 치과, 약국, 세탁소도 도입했다. 이제 거의 모든 대형마트의 표준이 됐다. 그들의 신선한 실험은 서울에서 400㎞ 떨어진 남쪽 지방에서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관점의 차이는 IQ 80점의 차이에 준한다. (Perspective is worth 80 IQ points). 컴퓨터 과학자 Alan Kay가 남긴 명언이다. 더 유명한 명언도 있다.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인상파와 고흐는 과거보다는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쪽으로 움직였다. ‘Wawa’와 홈플러스의 실험도 유쾌한 성과를 남기고 있다. 누구든 새롭게 보고 새롭게 생각하면 창의적인 성취의 도약대가 만들어질 것이다. 남쪽이든, 동쪽이든, 어디든 새로운 생각의 공간을 찾아보자. 인상파 화가들의 미술전도 좋다. 신윤복, 김홍도, 김정희, 훈민정음 해례본이 전시된 간송문화전도 좋다.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어디든 좋다. 송규봉, DBR, 154호 (2014년 6월 Issu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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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의 인상파도… 친구 Gauguin도… 천재 van Gogh를 완성시킨 ‘경쟁자’였다
Article at a Glance - 전략,혁신
Vincent van Gogh는 단지 엄청난 노력이나 대단한 천재성만으로 위대한 반열에 오른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의 화풍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는 걸 깨달은 뒤 곧장 파리로 달려가 인상파 기법을 배우고 그것을 넘어서며 그들과 경쟁했다. 말년에는 고갱과 경쟁하고 협력하며 자신의 업적을 완성했다. 경쟁을 통해 스스로를 발전시킨 모범 사례인 셈이다.
경쟁은 빠른 발전과 개선을 가능케 하고, 여러 호르몬을 배출해 몸에 쾌락을 주고, 두뇌를 활성화시키며 혁신을 이끈다. 물론 경쟁자 수가 지나치게 많거나 경쟁의 강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부작용도 생긴다. 자칫 제로섬 게임으로 치닫거나 파괴적 경쟁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기 쉬운 현대의 기업들은 Gogh와 Gauguin의 건설적 경쟁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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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12월 말 프랑스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인 아를의 지역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12월23일 일요일 밤 11시30분경, 네덜란드 출신의 Vincent van Gogh라는 화가가 윤락가 1번지에 나타나 라셸이라는 여인을 찾아서 그녀의 손에 다음과 같은 쪽지와 함께 그의 귀를 쥐어주었다. ‘이 물건을 소중이 간직하시오.’ 그러고는 사라졌다. ‘불행한 광인’의 소행일 수밖에 없는 이 해프닝을 접한 경찰은 이튿날 아침 침대에서 간신히 목숨이 붙어 있던 그를 찾아냈다.”
이 사건은 미술사에서 아주 유명하다. 반 고흐가 아를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던 고갱과 다투다가 일어난 일이다. 그날 반 고흐는 자신이 마련한 집에 고갱이 온 지 두 달 된 기념으로 오랜만에 저녁식사를 같이하자고 청했다. 술이 한두 잔 들어가다 보니 의견 차이가 생겼고 그간 쌓였던 감정이 폭발해 커다란 싸움으로 변했다. 사실 고갱은 반 고흐만큼 공동 작업에 열의가 없었다. 순전히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미술상인 반 고흐의 동생 테오로부터 고정 수입을 약속 받고 아를에 왔던 것이다. 이성적인 고갱은 감정 기복이 심한 반 고흐와 성격적으로 맞지 않아 힘들었다. 결국 고갱이 떠나겠다고 하자 고갱과 함께 작업하는 것을 더 원했던 반 고흐는 폭발했다. 뛰쳐나가는 고갱을 따라가 자해하겠다고 위협했으나 고갱은 아랑곳하지 않고 반 고흐를 뿌리치고 집을 나갔다. 그 즉시 반 고흐는 집에 들어와 면도칼로 자신의 왼쪽 귀를 자르고 고갱을 찾아 나섰다. 아마도 고갱이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어야 했는데 그걸 하지 못한 귀를 탓한 것 같다.
반 고흐에게 고갱은 이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었다. 반 고흐는 고갱을 초대해서 두 달 동안 지내면서 커다란 영감을 받았고 자신의 그림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사실 반 고흐에게 동료는 외로움을 잊거나 교우를 나누는 것 이상의 역할을 했다. 반 고흐는 친구들과 교류하고 경쟁하며 자신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고흐에게 ‘동료’가 갖는 의미
1853년 네덜란드의 시골 마을 준데르트에서 태어난 반 고흐는 목사 아버지 아래 화목하고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20대 후반까지 그림을 그리지 않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며 다양한 일을 경험했다. 대가족이었는데 삼촌 세 명이 모두 미술상이었다. 16세 때 반 고흐는 한 삼촌의 도움으로 미술품중개회사에서 견습사원으로 일하게 됐다. 헤이그와 런던에서 일하며 20세까지 능력을 발휘해 유망한 미술상으로 커나갔다. 하지만 우울증과 고독감으로 종교에 빠지면서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직장생활을 그만뒀다. 여러 곳에서 선교활동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전도사도 해봤지만 마음의 갈증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자 미술상을 하고 있던 동생 테오의 권고에 따라 화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27세의 나이에 그림을 처음 시작한 반 고흐는 들어가는 미술학교마다 적성에 맞지 않아 금방 그만두고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농부들의 삶을 스케치하며 그림 실력을 키워나갔다. 네덜란드에서 그림을 배우던 시절 네덜란드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주로 농촌의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이 무렵 반 고흐의 우상은 농부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던 밀레였다. 1885년 고흐가 그린 초기 대표작 ‘감자 먹는 사람들’은 그림을 배운 지 4년밖에 안 된 화가가 그렸다고 하기에는 완성도가 매우 높은 작품이었다.
1886년 반 고흐는 동생의 권유로 파리로 옮겨 활동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인상주의 화풍을 배우며 후기 인상파 화가들인 베르나르, 로트레크, 쇠라, 시냐크 등과 교류한다. 이때부터 어두웠던 그림이 밝은 색으로 바뀐다. 인상파 동료들의 색감이나 기법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의식이 강했던 반 고흐는 이들의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건 뭔가 찜찜하다고 생각했다. 이러던 차에 고갱의 그림을 접하게 된다. 반 고흐는 고갱의 그림에서 인상파에게서 부족한 요소를 발견했다. 이때부터 고갱과 의식적으로 친하게 지내며 그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1888년 반 고흐는 인상파의 중심지인 파리를 떠나 남쪽의 아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마음에 맞는 동료들과 화가들의 공동체를 꾸리려고 했다. 우선 동생 테오에게 부탁해서 고갱을 아를로 오게 만들었다. 고갱은 반 고흐가 마련한 집에서 기거하며 일체의 비용으로 한 달에 한 점의 그림을 테오에게 보내는 조건이었다. 두 사람은 아를에서 똑같은 대상을 그리며 서로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반 고흐는 고갱에게 자극받으며 영감을 얻었다. 고갱은 그에게 꼭 필요한 스승이자 동료이며 경쟁자였다. 고갱과 헤어진 후 독특한 화풍을 완성한 반 고흐는 생 레미에 있는 정신병원과 파리 근교의 오베르쉬즈우아즈에서 매우 많은 그림을 그렸다. 점점 심해지는 정신병 발작으로 고통받다가 결국 1890년 37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반 고흐는 어려서부터 외로움을 심하게 탔기에 정에 약했다. 조금이라도 친절하게 대해주면 여인과는 나이와 상관없이 사랑에 빠졌고 남자들과는 친구가 됐다. 런던에서 미술상으로 일할 때 친절한 하숙집 딸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거절당했다. 집에서 그림 공부를 할 때 집에 놀러 온 이종사촌 누나에게는 아들까지 있었지만 그녀를 짝사랑했고 상처받았다. 얼마 후 집을 나와 남자에게 버림받고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여인을 만나 정을 주게 됐다. 그녀는 딸이 있었고 임신한 몸이었다. 부모의 반대로 그녀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반 고흐에게 말을 걸었던 열두 살 많은 옆집 노처녀에게 사랑을 느꼈다. 이 역시 양가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파리에서는 카페를 하던 열 살 많은 여성과 한동안 사랑을 나눴지만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생기며 결국 상처로 끝났다. 반 고흐는 이토록 외로움을 잘 탔기에 우정을 나눌 화가 동료들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성적이었지만 고집과 자의식이 강했기에 동료들에게 일방적으로 영향받지는 않았다. 그는 동료들을 넘어서서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던 반 고흐는 비교적 빠른 시간에 자신의 화풍을 완성했다. 시기별로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던 동료들과의 경쟁과 자극이 그를 그토록 빠르게 발전시켰다. 고흐를 키운 건 팔 할이 경쟁이었다.
시기별로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던 동료들과의 경쟁과 자극이 그를 그토록 빠르게 발전시켰다. 고흐를 키운 건 팔 할이 경쟁이었다.
경쟁의 효과
반 고흐의 경우처럼 경쟁은 빠른 성과를 가져온다. 경쟁과 협력은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두 축이다. 특히 경쟁은 인간사회뿐 아니라 생태계에서도 자연스레 나타나는 현상이다. 생물학, 사회학, 경제학 등에서 경쟁이 집단과 사회를 진화하게 하고 발전시킨다는 사실은 하나의 공리가 됐다. 경쟁의 효과를 광범위하게 언급하는 것은 불필요하므로 여기에서는 경쟁이 창조와 혁신으로 이어지는 경우에 한정해서 다뤄본다.
첫째, 경쟁은 빠른 발전과 개선을 가능하게 한다.
우선 경쟁은 모호함을 없애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신생기업이 선진기업을 경쟁상대로 삼아 모방하는 이유는 발전 방향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고흐 역시 필요할 때마다 동료 화가들이 있었기에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좀 더 빨리 정립할 수 있었다. 아마 고흐가 동료들과 교류하지 않고 끝까지 혼자서 그림을 그렸더라도 감정을 화폭에 담아내는 표현주의 회화 스타일을 결국에는 완성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상당히 오래 걸렸을 게 틀림없다. 게다가 경쟁은 몰입을 도와준다. 기록 경기인 달리기나 빙상에서 두 사람 이상을 같이 달리게 하는 이유가 경쟁 상대를 보며 기록을 단축시키라는 취지다. 즉 경쟁은 쉽게 몰입하게 해 빠른 발전을 가져온다.
둘째, 경쟁은 여러 호르몬을 배출하게 해 몸에 쾌락을 주고 두뇌를 활성화시킨다.
이런 상태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혁신이 가능해진다. 운동선수들이 극심한 경쟁 상태에 놓이면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이 분출돼 사람을 흥분시키고 힘이 나도록 만든다. 경쟁할 때 사람들의 몸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런 호르몬은 사람을 들뜨게 만들어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초콜릿을 먹거나 연인의 손을 잡을 때 나오는 호르몬 역시 도파민이다. 핵심은 이것이 경주에서 1등을 하고 임무를 성공리에 마무리했을 때 나오는 보상이 아니라 결과를 얻으려고 경쟁할 때 얻는 보상이란 사실이다. 이처럼 경쟁은 그 자체로 쾌락이나 행복감을 주기 때문에 돈이 필요 없는 부자들이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되면 두뇌가 활성화돼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들이 나와 새로운 혁신을 낳게 된다.
스포츠에서 어떤 종목의 최고로 뛰어난 운동선수들은 같은 지역 출신일 경우가 많은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장거리 달리기는 대부분 케냐 선수들이 잘하고, 단거리는 자메이카가 잘한다. 비즈니스에서도 한 산업에서 글로벌 1위 기업은 대개 비슷한 지역에 몰려 있다. 독일과 일본의 자동차산업, 한국의 전자산업, 미국 실리콘밸리의 IT 등이 그렇다. 이들은 모두 대기업이 경쟁한 결과이면서 거대 규모 경쟁의 결과지만 전혀 다른 경우도 있다. 미국 인디애나 주의 월소(Warsaw)는 기껏해야 주민이 1만3000명을 조금 넘는다. 그런데 이 작은 도시에 정형외과 의료제품 분야에서 세계 1, 2, 3위 기업들이 다 모여 있다. 정형외과 분야에 있어서 세계의 수도인 것이다. 침머, 드 퓌, 바이오멧이 여기에 있는데 이 회사들에서는 엉덩이, 무릎, 다른 관절을 대체할 수 있는 정형외과용 의료보조기구를 생산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분야 세계 4위 기업인 스트라이커 역시 이곳에서 멀지 않은 미시간 주의 남서부에 위치한 캘러머주(Kalamazoo)에 있다는 것이다. 이웃하고 있는 이 기업들은 생겨날 때부터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다. 때로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고 때로는 적대적으로 경쟁하기도 했지만 결국 서로 간의 경쟁이 각자의 경쟁력을 향상시켰다. 경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의지가 혁신을 가져왔고 이윽고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게 됐다. 경쟁이 빠른 발전을 가져왔고 어느 순간 혁신으로 도약하게 만든 것이다.
경쟁의 부작용
경쟁이 항상 긍정적인 효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부작용도 있다.
경쟁이 혁신에 미치는 효과를 다룬 연구는 대부분 경쟁과 혁신 사이에 거꾸로 된 U자형 관계가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가령 유럽의 경제학자들(Carlin, Schaffer, Seabright, 2004)은 동구권 등 사회주의 경제가 시장경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기업 간 경쟁이 성장과 혁신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지 살펴봤다. 예상할 수 있듯이 독점기업이 지배하는 산업은 혁신이 저조해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경쟁하는 기업이 늘어날수록 혁신이 증가했으나 경쟁하는 기업의 수가 3개를 넘어서면 다시 혁신이 줄어드는 결과를 보였다. 경쟁은 기업에 혁신을 가져와 시장의 크기를 키우지만 지나친 경쟁이 일어나면 혁신으로 시장의 파이를 키워 이익을 얻는 것보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게 더 쉽기 때문에 파괴적인 경쟁으로 돌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경쟁과 집단 창의성을 연구(Baer, Leenders, Oldham, Vandera, 2010)한 결과도 이와 비슷하다. 경쟁이 어느 수준까지 증가하면 창의성은 올라가지만 어느 수준을 넘어서서 극한 경쟁으로 치달으면 창의성이 오히려 급격히 떨어진다. 어느 정도의 경쟁은 개선과 혁신을 가능하게 하지만 지나친 경쟁은 행위자들이 경쟁에 너무 집착하게 돼 시야가 좁아지고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는 위기 이론으로도 설명되는데 극심한 경쟁은 위기 상황을 만들어 정보처리가 경직화되고 의사결정의 중앙집중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창의성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요컨대 경쟁을 통해 상호 발전하면서 시장의 크기를 늘려가지 않고 남의 것을 가져오는 제로섬 게임이 되면 경쟁은 제살 깎아먹기식으로 변질된다. 그러면 유연성은 줄어들고 경직돼 혁신이 싹틀 여지가 사라지게 된다. 성숙기에 처한 비즈니스에서 극심한 가격경쟁이나 점유율 빼앗기가 나타나 모두를 패자로 만드는 경우를 자주 봐왔다. 이런 현상은 비단 기업계나 인간사회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최근 공룡 연구자들이 주장한 새로운 학설이 이와 관련된다.
초기 귀여운 도마뱀이었던 공룡은 멸종하기 전 대부분 무섭고 화려한 모습으로 진화했다. 기존 학설은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함이라는 설명이다. 초식 공룡인 트리케라톱스가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무시무시한 육식 공룡과 싸워 이기자니 몸집도 커지고, 적에게 위협적인 모습으로 변했으며, 강력한 무기가 되는 뿔이 공격적인 모습으로 진화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다른 학설이 제기됐다.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런 뼈가 공격용으로 적절하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네 발로 활동하는 트리케라톱스가 몸집이 큰 두 발 공룡을 뿔로 공격해 쓰러뜨린다 하더라도 거대한 공룡에게 깔릴 수 있어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등부터 꼬리까지 몸 전체를 삐죽삐죽한 골판으로 무장한 스테고사우루스 같은 공룡도 마찬가지다. 등에 난 골판이 실제로는 너무 얇아 공격용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지적이다. 포식자에게는 이 골판이 무기가 아니라 과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새로운 학설은 포식자와 싸우기 위함이 아니라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과장되게 진화됐다고 설명한다. 공작의 꼬리 날개나 사슴의 무성한 뿔처럼 공격보다는 과시용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할 확률로 보면 이성에게 잘 보이는 게 훨씬 합리적이다. 집단 생활을 하는 거대한 몸집의 공룡에게는 포식자를 만나서 싸울 경우보다 동료 수컷과 짝을 놓고 경쟁할 때가 훨씬 자주 발생한다. 그래서 오히려 싸움에는 불필요한 과장된 장식이 달리게 된 이유가 성 선택(Sexual Selection) 학설로 설명됐다. 이런 근시안적 내부 경쟁으로 공룡은 거추장스러운 골판이나 거대한 목주름, 무거운 뿔이 생겨났고, 오히려 생존에 지장을 받게 됐다.
경쟁에서 창조로 나아가는 법
그러면 경쟁의 이점을 잘 활용해 창조와 혁신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반 고흐에게서 구체적인 방법을 배워본다.
첫째,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
혁신기업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높은 목표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높은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역량이 길러지기 때문이다. 물론 초기에는 성공체험이 중요하기 때문에 작은 성공을 이룬 뒤에 목표를 높이는 게 바람직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높은 목표를 추구해야 최고의 역량을 축적할 수 있다. 경쟁의 관점에서 보면 높은 목표를 추구하려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 반 고흐가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그는 농촌의 힘들고 가난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는 게 목표였다. 아마도 반 고흐가 살던 곳이 농촌이었고 목회자가 되려다가 화가로 전환했기 때문에 그림을 하나의 구원으로 생각했던 것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농부들의 고된 일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 소명의식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미술상을 하던 시절에 봤던 밀레의 전시회가 특히 기억에 남았기에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테오가 지금 파리는 인상파가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다고 편지로 알려줬지만 반 고흐는 그런 말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반 고흐가 그리려던 그림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반 고흐는 완성된 그림을 동생 테오에게 보냈지만 팔리기는커녕 사람들이 조그마한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가 동생에게 자신의 작품 판매에 소홀하다고 불평했을 때, 테오는 그의 작품이 너무 어둡고 유행하는 인상주의 그림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결국 반 고흐는 파리로 향했다. 파리에서 인상주의 그림을 접하고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그의 그림은 180도 달라졌다. 그림에 쓰는 색이 밝아졌고 개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 고흐가 네덜란드를 벗어나 세계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 오지 않았다면 그의 개성은 그토록 빨리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 경쟁자를 넘어서야 한다.
경쟁은 속도 대결이 기본이다. 빠른 행동과 과감한 실행으로 앞서가는 경쟁자를 이기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경쟁자를 이기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몰입하고 개선해서 발전하게 된다. 반 고흐는 파리에서 인상파 화풍을 빠르게 익혀나갔다. 그는 파리에서 200여 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인상파 화가가 운영하는 교습소에서 어린 친구들과 그림을 배우기도 하고 매일 화방에 들러 유행하는 그림을 구경하고 그것을 그린 화가들과 교류했다. 시냐크와 쇠라 같은 점묘파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기법을 흡수했다. 수많은 점을 찍어 표현한 점묘파 그림처럼 쇠붙이들처럼 짧은 선으로 붓질을 해서 이어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인상파 화가처럼 그릴 수 있게 되자 자신과 인상주의는 뭔가 어울리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에게는 새로운 혁신이 필요했다. 인상파를 넘어서게 된 것이다.
셋째, 경쟁자와 다르게 해야 한다.
경쟁자와 비슷해졌으면 그와 똑같은 것을 하지 말고 색다른 것을 추구해야 창조와 혁신으로 이어진다. 사실 1등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만 1등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현재 한국 기업이 당면한 현실이 이와 같다. 경쟁자와 다르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뭘 원하고 뭘 잘하는지 알아야 한다. 반 고흐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인상파 그림에서 부족한 점을 간파했다. 인상파 화풍은 감각적이긴 했지만 화가의 감정이나 사상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반 고흐는 사람 눈에 비치는 모양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감정 상태를 그림에 그대로 담기를 원했다. 그가 남긴 40점의 자화상이 모두 다른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것을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이런 시점에 고갱의 그림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고갱은 인상주의 화풍과 다르게 추상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는 풍경이나 사물을 본 후 그것을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해서 그렸다. 고갱과 교류하면서 반 고흐도 대상의 윤곽선을 굵게 그리는 등 고갱의 기법을 차용했고 상상력에 의해 대상을 변형시켜 그릴 수 있게 됐다. 자신의 화풍을 완성한 후에 반 고흐는 자신에게 영감을 줬던 화가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자신의 스타일로 여러 번 그리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반 고흐의 스타일이 탄생한 것이다. 그의 말기 그림은 사진으로 봐서는 직접 보는 감동을 느낄 수 없다. ‘모나리자’는 사진이나 그림이나 똑같지만 반 고흐의 그림은 실제로 봐야 인상적이다. 그림의 붓 터치가 이글거리며 찐득찐득한 게 마치 그림이 살아 있는 느낌을 준다. 그는 동료들을 넘어서 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화가가 됐다.
건설적 경쟁을 해야
반 고흐에게는 아를에서 고갱과 함께 작업했던 시기가 예술적으로 성취감이 가장 큰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똑같은 대상을 그리며 서로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카페 여주인인 지누 부인의 초상, 아를의 여인들, 유적지나 거리의 모습, 숲의 풍경 등을 서로 다르게 표현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 시기를 지나며 반 고흐도 고갱처럼 추상적인 요소를 가미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별이 빛나는 밤’이나 ‘까마귀 나는 밀밭’ 같은 말년의 대표작들은 고갱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성격 차이로 비극적으로 끝나긴 했지만 두 사람의 작업은 건설적인 경쟁이었다.
기업 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자칫 제로섬 게임을 하거나 극심한 경쟁에 매몰되기 쉽다. 그리 되면 자연스레 혁신은 줄어들게 될 것이고 파괴적인 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럴수록 여유를 갖고 건설적인 경쟁을 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 즉 남의 것을 빼앗아 오는 경쟁이 아니라 파이를 키우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쟁자에게서 눈을 돌려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에 열정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거기서부터 차별화와 혁신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병주, DBR, 159호 (2014년 8월 Issu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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