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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만사 스크랩 총기의 세계
실미도 추천 0 조회 185 13.09.16 20: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보병의 생명, 소총

군인이라고 하면 흔히들 보병을 떠올린다. 아무리 단추 하나를 눌러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세상이라고 해도, 결국 목표지점을 점령해야 전쟁이 끝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지상에서 전투하면서 적군의 도시와 주거지를 점령하는 것은 바로 보병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전쟁에서 핵심이 되는 보병에게 생명이자 가장 귀중한 친구는 무엇일까? 물론 소총이다(혹자는 소총이 아니라 삽이야말로 보병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하기도 한다). 21세기가 되었지만 역시 보병의 기본화기는 레이저 총이 아니라 탄환을 발사하는 소총이다.

 

소총의 발전과정.

소총의 발전과정.

소총의 역사


초기의 보병총기는 머스킷(Musket)이라는 전장식(煎裝式, 총구 앞으로 장전하는 방식) 개인화기였다. 머스킷은 총열에 강선도 없었고, 총구 앞으로 화약과 탄환을 넣고 부싯돌을 마찰시켜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장전하는 데 보통 1분 정도가 걸렸고, 비라도 오는 날에는 발사가 제대로 될지 도박을 걸어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오히려 화살보다도 사정거리는 짧고 명중률도 떨어졌다. 장점이라곤 궁수보다 머스킷 사수를 양성하는 것이 쉽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강선과 탄피가 채용된 소총이 등장하면서 드디어 보병화기는 명중률도 좋아지고 사정거리도 늘어나서 본격적인 살상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초기의 소총은 대부분 볼트액션(bolt action) 소총으로 한 발을 발사하고 나면 다음 탄환을 손으로 재장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런 문제는 M1 개랑드같은 반자동소총이 등장하면서 해결되었다. 그러나 더욱 혁명적인 무기는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선보인SIG44(Sturmgewehr 44)돌격소총 이었다. StG44 돌격소총은 기존의 소총탄보다 약하지만 권총탄보다는 강력한 탄환을 채용하여 휴대성을 높이고, 기관단총처럼 연발기능을 유지하고 살상능력을 극대화시켰다.

 

결국 StG44의 설계는 이후 냉전의 양대산맥인 미국과 소련의 주력소총M16과 AK-47에 그대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 M16과 AK-47은 지금까지도 세계시장을 양분하면서 대결을 계속하고 있다.

한편 최근 총기에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장비들이 장착된다. 야간에도 사격이 가능하도록 웨폰 라이트(총기장착용 플래시라이트), 적외선 조사기에 야간투시경이 장착되기도 한다. 한편 빠른 조준을 돕기 위해 레이저 조준기나 도트사이트(dot sight)도 장비된다. 게다가 세상도 좋아져서 이같은 장비 장착대는 ‘피카티니 레일(Picatinny Rail)’이라는 미군 규격에 맞게 생산되고 있다. 이런 레일시스템을 사용하면, 마치 레고 장난감처럼 필요한 부품을 총기에 끼워 맞출 수 있게 된다.


 

도트사이트, 조준경 안에 가상의 붉은 점이 표시되는 장비이다. 가늠자와 가늠쇠를 조준정렬하지 않고 빨간 점만 보고 쏘면 되어, 사격대응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다. <출처: (cc) Liftarn at Wikipedia>

도트사이트, 조준경 안에 가상의 붉은 점이 표시되는
장비이다. 가늠자와 가늠쇠를 조준정렬하지 않고 빨간 점만 보고 쏘면 되어, 사격대응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다.
<출처: (cc) Liftarn at Wikipedia>

 

 

 

그러나 현대적인 소총이라도 실제 전쟁에서 다른 무기에 비하면 적군에게 그다지 치명적이지 않다. 보통 소총은 3초 내에 탄창 한 개를 비워버릴 수 있지만, 실제로 1분 내에 4개 이상의 탄창을 비워 버린다면 대개 총열이 뜨거워져 작동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게다가 실전에서 보병이 휴대하는 탄환은 대개 탄창 12개 분량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현재 많은 국가들이 새로운 총기의 개발에 혼신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군의 자랑, K1A와 K2

 


광복 직후 국방경비대 시절, 우리 군은 일제가 남기고 간 38식과 99식 볼트액션식 소총이 주 무기였다. 그러던 것이 건군에 즈음하여 미제 M1 소총을 지급받기 시작하였다. 우리군은 무려 30만 정에 가까운 M1 소총을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았다. 그리고 월남전을 계기로 우리 군에도 M16이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1974년부터는 약 60만 정의 M16A1 한국형(콜트 603K 모델)이 국내에서 면허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요즘 예비군 훈련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한민국제 M16 소총들이다.


M16의 면허생산이 끝나가자 우리 군은 드디어 국산 소총을 개발하여K1A 기관단총과 K2 소총을 주 무장으로 구축하였다. 특히 1984년부터 생산이 시작된K2 소총은 M16소총의 가스직동방식(Gas Direct Action) 대신에 AK47에서 채용한 가스피스톤 방식을 채용하여 야전신뢰성을 향상시켰다. 한 마디로 K2 소총은 M16과 AK47의 장점을 조합하여 만든 소총이다.

 

 

K1과 K2 소총은 부품간의 호환성 또한 우수하여, K1의 윗총몸과 K2의 아랫총몸은 서로 결합될 수도 있다. 해외에서도 우수한 실전무기로 평가받고 있는 K1/K2 콤보는 현재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피지 등의 국가에서도 채용되고 있다. 한편 부가장비를 장착하는 추세에 맞추어 K1/K2를 개량하려는 시도가 줄을 잇고 있다. 특히 피카티니 레일 부가장비 장착대가 채용되면서 K1 기관단총은 전혀 다른 모양으로 바뀌고 있다. 한편 우리 군이 채용한 K 시리즈의 보병화기로는 K3 5.56mm 기관총, K4 40mm 고속유탄발사기, K5 9mm 자동권총, K6 12.7mm 중기관총, K7 9mm 소음기관단총 등이 있다.

 

 

 

대한민국 국군의 ‘K 시리즈’ 보병무기체계.

대한민국 국군의 ‘K 시리즈’ 보병무기체계.

개인화기의 혁명, K11 복합형 소총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소총을 만들기 위해 여러 나라들이 눈물 나는 노력을 해오고 있다. 특히 군사대국 미국이 보여준 노력은 안쓰러울 정도이다. 미국은 무려 40년 이상 채용해온 M16을 대체하기 위하여 20년 넘게 노력해왔다. 1980년대 중반 ACR(Advanced Combat Rifle) 사업에 3억 달러, 90년대 중반 OICW(Objective Individual Combat Weapon) 사업에 1억 달러 가량을 써가면서 상당한 시간과 예산을 소진했지만 결과물은 아직도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정말 놀랍게도 우리나라에서 미국도 풀지 못한 OICW 차세대 소총의 해답이 나왔다. 바로K11 복합형 소총이다. 2000년부터 개발이 시작된 K11은 2006년 10월 시제품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약 16개월의 운용시험평가 끝에 전투용 적합판정을 받고 2008년 6월에 실전배치가 결정되었다. K11은 OICW 등 미래형 소총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모두 달성하였다. 특히 사거리 컴퓨터로 제어되는 공중폭발탄을 운용할 수 있어 적의 밀집병력이나 은폐/엄폐한 병력에 대하여 뛰어난 살상력을 자랑한다.

 

 

 

개인화기의 미래, K11 복합형 소총. <자료제공: 방위사업청 대표 블로그>

개인화기의 미래, K11 복합형 소총. <자료제공: 방위사업청 대표 블로그>

사실 소총의 가장 큰 적은 벽이나 엄폐호 등과 같은 차폐물이다. 차폐물 뒤에 숨어 있는 적에게는 어떤 소총탄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K11은 표적의 3~4m 상공에서 폭발하는 20mm 공중폭발탄을 채용하여 소총의 한계를 극복하고 살상력을 증대시켰다. 또한 K11은 2배율의 주야조준경과 사격통제장치 등 첨단장비들을 내장하여, 밤과 낮을 지배하는 강력한 소총으로 자리 잡게 된다. 또한 이중총열구조를 채택하여, 별도의 방아쇠로 운용되는 K201 유탄발사기와는 달리 소총 자체의 방아쇠 하나로 5.56mm 소총탄과 20mm 공중폭발탄을 모두 발사할 수 있다. 게다가 미국의 차세대 소총에서 채용했던, 반자동식유탄발사기를 배제하고 볼트액션방식을 채용하여 부피와 중량을 줄이는 방안을 선택했다.


K11은 실전배치가 결정된 이후에 해외 수출까지도 성공했다. 우리 원전을 채택했던 UAE가 K11의 첫 고객이 된 것이다. 물론 이렇게 강력한 K11이 모든 병사에게 지급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분대당 2정씩 배치된 K2/K201 유탄발사기를 교체하여 일선에 투입될 예정으로, 2010년 6월 22일에 초도생산분이 출고되어 방위사업청으로 납품되었다. 당장 아프간에 파병되는 병력에게 지급될 것이라고 하니 앞으로의 활약을 지켜보자.

 

대당 1000억 원이 넘는 고성능 전투기가 수백 킬로미터를 단숨에 날아가 발당 수 억이 넘는 미사일로 표적을 정확히 파괴시킬 수 있는 21세기에도 수십만 원짜리 소총으로 무장한 보병은 여전히 전쟁에서 꼭 필요한 존재로 대접 받는다. 표적을 파괴하는 것은 첨단무기만으로도 가능하지만, 목표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일은 여전히 보병의 영역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시작된6.25 전쟁도 그 어떤 전쟁보다 보병의 비중이 컸던 전쟁 중 하나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산이 많은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은 그만큼 보병이 활약할만한 공간을 많이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따발총? 다발총? PPSh-41!


6.25 전쟁에 참전했던 국군 노병들의 회고담에서부터 30여 년 전 수많은 시청자들을 흑백 브라운관 TV 앞에 불러 모았던 드라마 ‘전우’에 이르기까지 북한군 보병의 휴대 무기를 묘사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총이 속칭'따발총' 이다.

 

 

구 소련의 PPSh-41 기관단총. 6·25 당시 북한군 보병사단은 흔히 ‘따발총’이라 불리는 이 기관단총을 2,100여 정 정도씩 보유했다.현재 국내의 각종 안보 기념관에 20정 이상이 남아있다.

구 소련의 PPSh-41 기관단총. 6·25 당시 북한군 보병사단은 흔히 ‘따발총’이라 불리는 이 기관단총을 2,100여 정 정도씩 보유했다.
현재 국내의 각종 안보 기념관에 20정 이상이 남아있다.

‘따발총’의 정체는 다름 아닌 PPSh-41라는 구 소련제 기관단총(Submachine Gun)이다. PPSh-41은 다른 소련 무기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간단한 구조로 대량생산에 용이해 제2차 세계대전 중 수백 만 정이 생산됐을 만큼 소련군의 베스트셀러 기관단총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북한군 보병의 주력 무기처럼 흔하게 등장하지만 실제로 북한군 보병의 주력 총기는 아니었다. 6.25 개전 초반을 기준으로 약 1만여 명 내외로 구성된 북한군 보병사단에서 권총만 휴대한 장교들이 1300여 명, 보병소총은 5900여 명, 기병소총은 2150여 명, ‘따발총’은 2100여 명의 병력이 휴대했다. 이처럼 ‘따발총’의 보유 비율이 높지 않았음에도 주력 소총보다 더 널리 알려진 이유는 그만큼 무척이나 인상적인 무기였기 때문이다.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도 PPSh-41처럼 탄창에 무려 71발의 총알이 들어가는 소총이나 기관단총은 흔하지 않다. 71발이라면 짧은 교전에서는 탄창 교환 없이도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수량이다.

 

또한 북한군에는 사단 자동총중대 등 장교를 제외한 중대 전투원 전원이 PPSh-41로 무장한 별도의 부대가 존재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연대 정찰 소대 등 일선에서 작전하는 부대일수록 PPSh-41의 무장 비율이 높았던 점도 국군 노병들의 머릿속에 PPSh-41의 기억이 강하게 남은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전쟁 당시 국군 공식 문서에는 여러 발을 연속해서 쏠 수 있다는 의미로 ‘다발총(多發銃)’이라고 표기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따발총’의 ‘따발’은 ‘다발’(多發)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PPSh-41 기관단총에서 총알이 들어있는 원형의 드럼 탄창 모양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머리에 짐을 얹을 때 사용하는 ‘또아리’의 함경도 사투리가 ‘따발’인데, 둥글게 생긴 드럼 탄창이 ‘따발’처럼 보여서 ‘따발총’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것이다.
 


북한군의 주력 소총 M1891/30 모신-나강


너무도 유명한 ‘따발총’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실제 6.25 당시 북한군의 주력 소총은 M1891/30모신-나강이었다. 6.25 당시 북한군 흑백 사진 속에 총검을 달면 사람 어깨 높이만큼이나 길어 보이는 소총이 바로 M1891/30이다. 제식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M1891은 제정 러시아 시절인 1891년에 처음으로 개발된 소총이다. 러시아군 장교였던 세르게이 모신이 개발한 소총에 벨기에의 총기 설계자였던 나강이 제안한 장전 방식을 결합한 이 소총은 간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잔고장이 없고 신뢰성이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제정 러시아 시절인 1891년에 처음 개발된 M1891 모신-나강 소총은 제1·2차 세계대전까지 소련군의 주력 소총이었고,6·25 당시에도 북한군의 주력 소총이었다.

제정 러시아 시절인 1891년에 처음 개발된 M1891 모신-나강 소총은 제1·2차 세계대전까지 소련군의 주력 소총이었고,
6·25 당시에도 북한군의 주력 소총이었다.

러시아를 계승한 소련은 1930년 M1891 보병총의 총열 길이를 80.2cm에서 73cm로 줄이고, 조준기를 신형으로 교체했다. 이 개량형이 바로 M1891/30이다. M1891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 개량형 모델이 많지만 작동방식이볼트액션식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볼트액션식 소총이란 사격을 한 후 손으로 장전손잡이를 당겨 노리쇠를 움직여 탄피를 배출해야만 다음 탄환을 쏠 수 있는 구조의 총을 의미한다. 북한군이나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이 PPSh-41 같은 기관단총을 대량으로 운용한 이유도 바로 주력 소총인 M1891이 연속 반자동 사격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국군의 주력소총 M1 개런드

“처음 지급받은 M1 소총을 받아 보니 너무 무거웠어요. 이걸 가지고 다니면서 어떻게 싸우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같은M1 개런드 소총의 무거운 무게에 대한 불만은 6.25 전쟁에 참전했던 국군 노병들에게 흔히 들을 수 있는 레퍼토리 중의 하나다. 하지만 M1개런드 소총의 무게 4.3kg은 당시 다른 나라의 주력 소총에 비해 특별히 더 심하게 무거웠던 것은 아니다. 4kg가 넘는 소총이 흔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M1개런드 소총은 미국 스프링필드 병기창의 민간인 기술 책임자인 존 켄티우스 개런드에 의해 1936년 개발됐다. M1 개런드 소총은 군에서 주력으로 사용한 제식 소총 중 최초의 반자동 소총이라는 점에서 소총 역사에서 특기할만한 존재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를 기준으로 다른 나라에도 반자동 소총은 있었지만 M1개런드처럼 제식 소총으로 대량 보급된 사례는 거의 없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주력 제식 소총이자, 6·25 당시 국군의 주력 소총이었던 M1 개런드 소총. 흔히 ‘M1 소총’이라고 부른다.
소총 밑에 탄환 8발이 묶인 클립 3개가 보인다. <출처: (cc) Curiosandrelics at Wikipedia.org>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99식 소총, 소련의 M1891 모신-나강 소총 등은 모두 볼트 액션 방식이었다. 이 방식의 소총은 탄환 1발을 사격한 후 노리쇠를 수동으로 후퇴시켜 탄피를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M1 같은 반자동식 소총은 사격 후 자동으로 탄피가 배출되어 방아쇠만 당기면 다음 탄환을 사격할 수 있다. 6.25 당시 북한군의 주력 소총도 볼트액션식의 M1891/30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반자동식이었던 M1개런드는 나름 그 시기에는 고성능의 소총이었던 셈이다. 1949년 7월 당시 우리 군이 보유한 M1 개런드 소총의 총량은 4만2636정이었다. 6·25전쟁 중 한국군의 병력 규모가 꾸준히 늘어났지만 미군이 47만여 정을 추가로 제공, 전쟁 내내 국군 주력 소총의 자리를 지켰다.

 


가벼움의 미학, 카빈 소총


카빈소총은 1930년대 후반 전투부대 요원이 아닌 전투 지원·전투 근무 지원 부대용으로 주로 지급할 목적으로 개발됐다. 카빈의 무게는 2.49kg이고 길이도 90.37cm로 M1개런드 소총보다 20cm 정도 짧다. 이런 짧은 길이와 무게 덕에 휴대성이 좋아 큰 인기를 끌었다. 카빈소총의 카빈(carbine)은 원래 특정 소총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은 기병용 소총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는 소총을 보병총과 기병총(카빈)으로 구별, 제작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애당초 보병총과 기병총을 별도로 제작하기도 했고 혹은 발사 장치는 동일한 구조를 가진 소총을 길이만 다르게 제작해 구분하는 경우도 흔했다. 20세기 이후부터 전장에서 말을 타는 기병이 점차 사라졌지만 일반 소총보다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은 총은 여전히 기병총이라고 부른다. 굳이 분류하자면 M1개런드 소총은 보병총, 카빈은 기병총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카빈소총’이라고 부르는, 미군 카빈(=기병용) 소총의 대표적 모델인 M1 반자동식 소총

흔히 '카빈소총' 으로만 부르지만 원래 미국의 카빈소총은 M1·M1A1·M2·M3 등 네 종류가 있다. ‘M1카빈’이 표준형으로 반자동식이다. M1A1은 개머리판이 접혀지는 접철식인 점이 다르고, M2는 연발 사격이 가능한 자동식 소총이다. 카빈과 M1개런드 소총은 구경(7.62mm)은 동일하지만 화력 차이는 컸다. M1 개런드 소총용 탄환의 탄피 길이는 63mm이지만 카빈 소총용은 33mm에 불과하다. 총구 에너지도 뚜렷하게 차이가 나서 카빈용 탄환이 1074줄(J)로 M1개런드 소총탄 3663줄의 3분의 1에 불과해 전형적인 소총보다는 기관단총에 가까운 특성을 지녔다. 카빈은 ‘가벼움의 미학’을 가진 총이었지만 탄환 자체의 에너지가 M1 개런드 소총의 3분의 1에 불과하므로 사거리도 짧고 관통력도 떨어지는 것이 약점이었다.

 

특수부대의 장비

전투의 전문가 집단이 모인 특수부대는 본질적으로는 최정예의 경보병이다. 따라서 이들의 무장과 장비는 기본적으로 보병과 유사하지만, 이들이 수행하는 임무의 특성에 따라 좀더 특수화되고 정예화된 무장과 장비를 사용한다. 손쉽게 말해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껏 만든 명품 장비들을 사용하는 것이 특수부대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특수부대는 여러 가지 시험적인 장비들을 실제로 사용해본 뒤 채용여부를 결정한다. 이들이 이룩한 성과는 군 전체나 경찰의 장비 선택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한마디로 특수부대는 각종 최신 무기·장비의 테스트 파일럿인 셈이다.

 

 

미 특수부대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M4 카빈과 액세서리. 이렇게 특수부대에서 시험되고 발전된 M4 소총은 미 정규군의 표준 장비가 되었다.

미 특수부대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M4 카빈과 액세서리. 이렇게 특수부대에서 시험되고 발전된 M4 소총은 미 정규군의 표준 장비가 되었다.

특수부대의 개인 화기

특수부대는 어떤 총을 사용할까? 보병의 주화기는 소총이지만, 특수부대는 단축형 소총을 애용한다. 헬기를 통해 레펠하강을 하거나 항공기에서 낙하산으로 강하를 하는 특성상 짧고도 휴대가 간편한 총기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총기로는 M4 SOPMOD 카빈이나 AK47S, AK74U, SIG552, G36K 등이 있다. 이렇게 간편한 단축형 소총에 대한 수요가 높아져 최근에는 일반보병들도 기다란 M16소총 대신에 M4 카빈을 휴대하게 되었다.

M4 SOPMOD 카빈 (위), SIG552 (아래)

M4 SOPMOD 카빈 (위), SIG552 (아래)

30년 이상 각국 특수부대의 사랑을 받아온 기관단총 MP5

30년 이상 각국 특수부대의 사랑을 받아온 기관단총 MP5

기관단총 역시 특수부대가 애용하는 무기이다. 기관단총은 보통 60cm 이하의 짧은 길이로 휴대가 간편하지만, 9mm 파라블럼 등 권총탄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정거리가 100m 이내로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관단총을 사용하는 이유는 CQB(Close Quarter Battle: 내부소탕) 등 대테러 임무 때문이다. 과다한 관통력을 가진 소총탄은 범인을 뚫고 나가 인질을 다치게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비관통탄환을 사용할 수 있는 기관단총을 사용하게 된다. 대표적인 기관단총으로는 9mm 탄환을 사용하는 MP5나 우지(Uzi)가 있다.

 

장거리의 목표물과 교전하기 위해서는 저격총이 사용된다. 저격총은 과거 볼트액션식이 선호되었지만 다수의 적에 대하여 유효한 공격을 가하기 위해서 최근에는 반자동식도 애용된다. 레밍턴 700 시리즈의 볼트액션 소총이나 SR-25 반자동저격소총이 대표적인 무기이다. 또한 저격총에 준하는 정확성과 사거리를 지닌 지정사수소총 역시 장거리 교전이 잦아진 대테러전쟁에서 본격적으로 지급되기 시작했다. M14 DMR이나 M39 EMR 등이 이런 종류의 화기에 해당한다. 한편 장거리교전이 강조되면서 사정거리가 1km가 넘는 저격총들이 모든 특수부대들에게 채용되기 시작했다. .338 라푸아탄이나 .50 BMG탄을 채용한 저격총들이 바로 이런 무기체계로, 전자로는 어큐러시 인터내셔널의 AWSM이, 후자로는 바렛 M82A1/M107 반자동소총, 맥밀란 Tac-50 볼트액션 저격총 등이 유명하다.

 

권총 또한 특수부대의 상징과 같은 무기이다. 세계의 특수부대는 대부분 모든 대원들에게 권총을 쥐어준다. 보통 정규군에서 권총은 장교나 지원화기 사수에게 자위용으로 지급되며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무기다. 하지만 특수부대에서는 보조화기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CQB 등 협소한 공간에서의 교전이나 주화기의 탄창 교환시에 대원들이 무방비상태가 되지 않도록 활용한다. 대표적인 권총으로는 미군이 사용하는 M9 베레타 모델 92FS 자동권총이 있고 또한 글록 17이나 시그 P226과 같은 화기가 유럽을 중심으로 애용되고 있다.

 

특수부대에서는 정규군과 달리 권총의 활용도가 높다. 사진은 베레타 92FS.

특수부대에서는 정규군과 달리 권총의 활용도가 높다. 사진은 베레타 92FS.

장거리에서 저격하는 것도 특수부대의 장기 중 하나이다. 사진은 Mk13 저격총.

장거리에서 저격하는 것도 특수부대의 장기 중 하나이다. 사진은 Mk13 저격총.

특수부대의 공용 화기

 

특수부대라고 개인화기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M2 중기관총이나 Mk19 유탄발사기와 같은 공용화기도 매우 중요한 화기로 활용된다. 과거에는 단순히 지원화기로만 치부되던 이런 무기체계들은 최근 대테러전쟁을 통하여 아프간과 이라크 등지에서 특수부대의 주요한 무기체계로 떠올랐다. 드높은 산악지대나 넓은 사막에 배치된 적군은 보통 아군으로부터 1km를 넘는 경우도 잦다. 이때 소총보다 훨씬 긴 사정거리를 갖춘 공용화기는 매우 중요한 무기체계가 된다.


한편 차량이나 강화진지를 파괴하기 위한 화기도 애용되는데 구형이지만 휴대성이 뛰어난 M72 LAW 대전차로켓이나 칼 구스타프 M3 무반동총(84mm)이 애용된다. 심지어는 미군 특수부대는 이라크 전에서 재블린 대전차미사일로 적 전차와 장갑차를 격파하면서 1개 사단의 전진을 저지한 일도 있다.

 

미 육군 레인저 등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칼 구스타브 84mm 무반동총

미 육군 레인저 등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칼 구스타브 84mm 무반동총

 

특수부대의 개인장비

특수부대는 보병의 개인군장에 있어서도 트렌드를 선도한다. 최근에 전 세계적으로 채용되고 있는 MOLLE(‘몰리’로 발음) 군장결속방식 일체형 방탄조끼도 실은 미 SOCOM(통합특수전사령부)에서 BALCS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채용된 데서 유래한다. 2008년부터 미 육군이 채용한 해체식 방탄조끼인 IOTV(Improved Outer Tactical Vest)도 실은 특수부대가 애용하던 CIRAS 해체식 방탄조끼를 보급형으로 만든 것이다.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차이나 칼라의 군복을 유행시킨 것도 특수부대이다. 방탄조끼나 장비조끼를 입고 활동하는 특수부대의 특성상 불필요한 주머니를 줄이고 운동성을 최대한 강조한 ‘특수전 강습전투복’이 1990년대부터 미군 특수부대에서 채용되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이런 모양의 군복은 미군 전체로 까지 확대되었다. 우리 군이 채용하는 신형 디지털 군복도 특전사에서 최초로 도입하기 시작하여 전군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런 차이나 칼라 디자인에 바탕하고 있다.

 

비상상황에서 손쉽게 벗을 수 있는 해체형 방탄조끼도 특수부대에서 먼저 도입, 검증한 장비. 사진은 특수부대에서 사용하는 해체형 방탄조끼 CIRAS

비상상황에서 손쉽게 벗을 수 있는 해체형 방탄조끼도 특수부대에서 먼저 도입, 검증한 장비. 사진은 특수부대에서 사용하는 해체형 방탄조끼 CIRAS

헬멧이나 군복의 모양도 특수부대에서 검증된 디자인이 전군으로 확대·보급된다. 사진은 특수부대용 MICH핼멧을 개량해 전군에 보급된 ACH 헬멧

헬멧이나 군복의 모양도 특수부대에서 검증된 디자인이 전군으로 확대·보급된다. 사진은 특수부대용 MICH핼멧을 개량해 전군에 보급된 ACH 헬멧

 

 

 

샷건

즉 산탄총이란 탄환이 흩어지도록 발사하는 총기를 말한다. 보통 총이란 정확히 목표물에 명중해야 하는 것이 본래 역할인데 왜 흩어지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총기의 역사를 살짝 훑어볼 필요가 있다.

 

 

(위) 샷건의 대명사 레밍턴 870 모델. 펌프액션 방식. 경찰과 군에서 널리 사용되어 왔다.(아래) 군용 산탄총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쓴 윈체스터 M1897 ‘트렌치 건’. 펌프액션 방식.

(위) 샷건의 대명사 레밍턴 870 모델. 펌프액션 방식. 경찰과 군에서 널리 사용되어 왔다.
(아래) 군용 산탄총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쓴 윈체스터 M1897 ‘트렌치 건’. 펌프액션 방식.

 

샷건의 역사

보통 총기의 역사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머스킷이다. 머스킷은 총열 앞으로 장약과 탄환을 넣는 방식이어서 장전에 시간에 많이 소요되었고 명중률도 형편없었다. 15세기에는 이런 머스킷으로 사냥을 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멈춰 있는 표적을 맞히기도 어려운 머스킷으로, 날아다니는 새나 뛰어다니는 들짐승을 잡는 것은 아주 운이 좋거나 사격술의 최고 경지에 이른 사람뿐이었다. 날아다니는 새를 총으로 잡는 사격수를 가리켜 ‘스나이퍼’라고 일컫게 된 유래만 봐도 그러하다.


하지만 인간에게 불가능은 없는 법. 탄환을 한 발 넣는 대신에 여러 발의 작은 탄환을 넣어 발사하면 탄환들이 흩어지면서 날아가는 새도 비교적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작은 탄환을 샷(shot) 또는 벅샷(buckshot)이라고 불렀고, 이런 샷을 발사하는 총을 파울러(fowler)라고 불렀다. 즉 파울러는 새를 잡기 위한 용도로만 만들어진 총기였다.


한편 파울러보다 총열이 짧은 블런더버스(Blunderbuss), 즉 나팔총이 등장했다. 나팔총은 총구부분이 나팔처럼 벌어져서 넓게 산탄을 퍼뜨릴 수 있어서 근거리에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평가되었다. 이에 따라 해적이나 수병이 애용하는 총기가 되었다. 이런 파울러와 블런더버스는 결국 샷건(shotgun), 즉 산탄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샷건의 종류

샷건은 작동방식에 따라 크게 펌프액션, 브레이크액션, 레버액션, 그리고 자동(반자동) 등으로 나뉜다. 그 내용은 간단히 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물론 이런 4가지 분류가 모두는 아니다. 단발방식이나 볼트액션의 엽총도 있고, 펌프액션과 반자동이 혼합된 비넬리 M3 같은 모델도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탄환을 장전하는 반자동 산탄총도 실전에서 매우 유용하다. 사진은 M1014 샷건으로 훈련 중인 미 해병대원의 모습.

스스로 탄환을 장전하는 반자동 산탄총도 실전에서 매우 유용하다. 사진은 M1014 샷건으로 훈련 중인 미 해병대원의 모습.

클레이나 수렵 등에 애용되는 쌍열의 산탄총. 가운데를 꺾어서 탄환을 장전하는 중절식 브레이크액션 방식이다. <출처: ? Commander Zulu at Wikipedia>

클레이나 수렵 등에 애용되는 쌍열의 산탄총. 가운데를 꺾어서 탄환을 장전하는 중절식 브레이크액션 방식이다. <출처: ? Commander Zulu at Wikipedia>

 

자위 무기에서 공격무기로

샷건이 생활도구로 자리 잡은 나라가 있다. 바로 미국이다. 식민지 개척 시절부터 샷건은 모든 개척민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존수단이었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던 신세계에서 샷건은 수많은 사냥감들을 식량으로 만드는 수단이었다. 더 나아가 토착민들의 기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 되었다. 샷건은 사격술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한발씩 탄을 장전하여 쏘는 것보다는 여러 발의 탄환을 넣어 한꺼번에 쏘는 것이 더욱 목표물에 적중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독립전쟁에서 조지 워싱턴 장군은 머스킷에 탄환을 1개만 넣어 쏘는 대신 커다란 탄환 한 발에 3개에서 6개의 벅샷을 넣어서 영국군에게 쏘게 했는데, 이런 장전방식은 ‘Buck and Ball(벅 앤 볼)’이라고 불렸다.

 

사거리는 짧았지만 본격적인 군용소총이 개발되기 전까지 산탄총은 군대에서 폭넓게 사용되었다. 특히 윈체스터 M1897 같은 펌프액션 샷건이 등장하면서 군대의 근거리 전투능력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이런 전투용 산탄총이 본격적인 활약을 펼친 것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트렌치건(Trench Gun)이라고 불린 펌프액션 산탄총들은 짧은 크기 덕분에 참호 안에서도 조준하면서 기동하기 편리했고, 근거리에서 살상 효과는 뛰어났다. 미군 병사들은 원거리에서 효과적이지만 근거리에서 쓸모 없는 스프링필드 볼트액션 소총보다 트렌치건을 더욱 선호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도 샷건은 활약을 계속했다. 남태평양의 정글에서 미 해병대는 샷건으로 일본군을 섬멸해나갔다. 한편 샷건은 대공포사수의 훈련용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사수들은 이동하는 트럭에서 역시 이동하는 클레이 표적을 맞추면서 사격구역을 예측하는 훈련을 했다. 물론 자동소총이 발전하면서 샷건은 더 이상 보병의 주력 무기로 선호되지 않으나, 뛰어난 살상능력으로 근접전이나 기지 경비와 같은 임무 등에는 아직도 활용되고 있다.

 

(위) 레버액션식 샷건인 윈체스터 M1887. 레버를 아래위로 움직여 장전한다.(아래) USAS-12. S&T대우(舊 대우정밀)에서 생산되었던 완전 자동 산탄총.

(위) 레버액션식 샷건인 윈체스터 M1887. 레버를 아래위로 움직여 장전한다.
(아래) USAS-12. S&T대우(舊 대우정밀)에서 생산되었던 완전 자동 산탄총.

 

대태러임무에서 다시 각광받는 샷건

한편 1970년대부터 시작된 대테러임무의 열풍으로 인하여 샷건은 다시 군으로부터 각광받고 있다. 다만 그 범위는 대테러임무라는 분야로 매우 한정되었지만, 그 용도는 확장되었다. 더 이상 사람만을 쏘는 것이 아니라, 잠기어 있는 출입문을 개방하거나 최루탄이나 섬광탄을 발사하는데 샷건이 활용되었다.

 

샷건은 대테러임무에서 출입문 개방 등에 자주 활용된다.

샷건은 대테러임무에서 출입문 개방 등에 자주 활용된다.

우리 군은 아쉽게도 샷건과는 인연이 깊지 않은 편이다. 707 특임대나 UDT/SEAL 특임대, 경찰특공대, 해양경찰특공대 등 대테러부대는 출입문 개방 등의 용도로 샷건을 운용하고 있다. 한편 우리 군에서 산탄총을 본격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요원들이 공군에 있다. 바로 배트맨이다. BAT(Bird Alert Team)은 산탄총을 사용하여 새들을 쫓아보내면서 공군기지의 버드 스트라이크 사고를 방지하고 있다.

 

한편 산탄총은 라이엇건(Riot gun)이라고 불리면서 시위진압 등에 사용된다. 강철제 벅샷 대신에 고무탄을 넣은 비살상 탄환을 활용하면 최소한 사망의 위험은 지극히 감소되는데, 이외에도 최근에는 빈백 라운드(Bean bag round; 콩주머니 탄환)나 바톤 라운드(Batton round; 몽둥이 탄환) 등과 같은 에너지성 비살상무기가 더 애용된다. 여기에 더하여 전기충격기를 산탄 형태로 만들어 발사할 수 있도록 고안된 제품까지 나오고 있다.

 

AK-47

역사를 바꾸는 총은 무엇일까? 브라우닝 M2 기관총, M16 소총, 글록 권총 등등 다양한 의견들이 있겠지만 현재에도 역사를 바꾸고 있는 소총이 하나 있다. 바로 AK-47이다. 1947년 등장한 AK-47 소총은 60년이 넘은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꾸준히 사용되고 있으며, 무려 1억 정이 넘게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냉전에서 소말리아 해적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의 크고 작은 분쟁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AK-47 소총이 함께 했다.

 

 

현대사의 분쟁에 빠지지 않는 총. AK-47.

현대사의 분쟁에 빠지지 않는 총. AK-47.

 

 

돌격소총의 등장


AK-47의 등장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독소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2년 말 소련군은 독일군의 최신형 돌격소총인 Mkb42를 처음으로 대하게 되었다. 소련군은 연발기능을 유지하면서도 따발총보다 사거리가 긴 ‘돌격소총’이란 종류에 눈독을 들였다. 독일의 Mkb42 돌격소총과 미군이 공급한 M1 카빈소총을 놓고 고민하면서 어떤 것을 바탕으로 국산소총을 만들지 고민하고 있었다. 1945년 수다예프가 개발한 AS-44 소총이 시험적으로 채용되기도 했지만, 5kg이 넘는 무게 때문에 결국 전군에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여기서 미하일 칼라시니코프가 등장한다. 소련군 전차부대의 부사관이던 칼라시니코프는 1942년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이후에 기관단총의 설계안을 상부로 올리면서 주목을 받아 총기개발자로 임명되었다. 그가 개발한 AK-1 소총은 소련군 주력 자동소총의 후보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어 1946년 시험평가를 거쳤다. 내부 구조의 설계는 M1개런드를 참고하였다고 한다. 이후 AK-1의 문제점을 보완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AK-47(Автомат Калашникова[압토마트 칼라시니코바] 47)이다. AK-47 소총은 다른 후보 총기들과 치열한 경쟁 이후에 1949년 소련군의 제식 총기로 선정되었다.

 

독일군의 Mkb42 돌격소총. 이후의 모든 돌격소총에 막대한 영향을 준 총이다.

독일군의 Mkb42 돌격소총. 이후의 모든 돌격소총에 막대한 영향을 준 총이다.

AK-47 이전에 소련군이 실험 배치한 AS-44소총. 너무 무거운 무게로 인하여 정식으로 채용되지 못했다.

AK-47 이전에 소련군이 실험 배치한 AS-44소총. 너무 무거운 무게로 인하여 정식으로 채용되지 못했다.

 

 

AK-47 소총은 모두 80여 개의 부품으로 구성되는데, 그중에서 가동부품은 8개에 불과하다. 이렇게 구조가 간단하다 보니 생산 단가도 저렴하고 운용하기도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총기의 정확성은 애초에 소련군이 요구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정확성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실전에서 믿을 수 있는 총기를 당장 선정하자는 것이 소련군의 결정이었다. 이렇게 제식화가 결정된 AK-47 소총은 소련군뿐만 아니라 공산권 전체로 펴져 나가게 되었다. 심지어는 북한도 58식 보총(보병이 사용하는 총기라는 뜻)이란 명칭으로 AK-47을 1958년부터 자체 생산하기 시작했다.

 

AK-47 소총을 개발한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1949년의 사진.

AK-47 소총을 개발한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1949년의 사진.

북한은 이미 58년부터 AK-47을 도입, ‘58식 보총’이라는 이름으로 자체 생산했다.

북한은 이미 58년부터 AK-47을 도입, ‘58식 보총’이라는 이름으로 자체 생산했다.

 

 

역사를 쓰기 시작하다


AK-47 소총은 공산주의 정권을 지키고 확산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1960년대에 AK-47 소총은 제3세계 혁명의 아이콘이었다. 수많은 AK 소총들이 공산게릴라들에게 공급되어 새로운 공산정권의 수립을 위해 활용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베트남이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소련과 중국에서 생산된 AK-47 소총을 지원받아 남베트남군 및 미군과 싸웠다. M-16과 AK-47의 역사적인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때이다.

 

한편 AK-47은 아랍 민족주의 군사활동을 선도해왔다. 이스라엘과 싸우는 아랍 국가들은 대부분 AK-47을 사용해왔고 이런 과정에서 이슬람 극렬분자 및 테러리스트들의 주 무장으로 AK-47이 공급되었다. 결국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를 비롯하여 2008년 뭄바이 테러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테러사건에서 AK-47은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20여 년간 AK 소총은 발칸반도, 아프리카 등지에서 인종학살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AK-47은 제3세계 혁명의 아이콘이었다. 미군은 베트남전쟁에서 AK-47 소총의 위력을 실감한다.

AK-47은 제3세계 혁명의 아이콘이었다. 미군은 베트남전쟁에서 AK-47 소총의 위력을 실감한다.

AK 소총은 70년대 이후로는 이슬람 무장세력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사진은 2011년 5월 사망한 오사마 빈 라덴의 사격장면.

AK 소총은 70년대 이후로는 이슬람 무장세력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사진은 2011년 5월 사망한 오사마 빈 라덴의 사격장면.

 

 

AK 소총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그 누구라도 1시간 만에 사격법을 숙지할 만큼 단순하다는 데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아이들조차도 쏠 수 있는 총이라는 얘기까지 있는데, 실제로 아프리카의 소년병들은 8~9살의 나이부터 AK 소총을 들고 쏘는 법을 배운다고 한다. 게다가 간단한 구조로 인하여 별다른 정비가 없이 어떤 환경에서라도 반드시 발사된다는 장점으로 인하여, 모래먼지가 가득한 사막에서부터 금방 얼음이 어는 극지방까지 어느 지역에서도 선호되는 총기가 바로 AK-47이다.

 

최근 AK-47은 해적의 무기로 주목받고 있다. 얼마 전 종신형을 선고받은 소말리아 해적 모하메드 아라이도 AK-47 소총을 석해균 선장에게 발사하면서 언론의 시선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해적들뿐만 아니라 해적을 막기 위해 배에 탑승하는 무장보안요원들도 AK 시리즈 소총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빈자와 약자의 선택 AK-47


AK-47 시리즈의 소총은 전 세계에 약 1억 정 이상이 생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AK-47 시리즈 소총들은 사유재산권이 인정되지 않던 구소련에서 만들어져 특허권의 제약 없이 전 세계에서 그 설계도가 뿌려졌다. 따라서 어느 나라에서 얼마만큼 AK소총이 생산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기도 어렵다. AK 소총은 그 간단한 구조로 인하여 아프간이나 파키스탄 등지에서는 심지어 대장간에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만들어지고 시중에 풀리다 보니 AK 소총은 그 가격도 매우 저렴한 편이다. 합법적인 시장에서는 중고가격이 500불 내외로 거래되고 있다. 냉전 후 물량이 넘쳐나던 시기에 아프리카의 암시장에서는 AK-47이 한 정당 6불 또는 닭 한 마리와 바꿔서도 구할 수 있는 지경이었다. 이러다 보니 AK 소총은 불법 총기 시장의 주요품목이 되기도 했다. 특히 총기 상인들에게는 현금처럼 통용되기도 했고, 총기의 나라 미국에서는 수많은 연쇄살인범이 선호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AK 소총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저렴하게 살 수 있고 손쉽게 훈련시킬 수 있어서 ‘빈자와 약자의 무기’로 명성이 높다.

AK 소총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저렴하게 살 수 있고 손쉽게 훈련시킬 수 있어서 ‘빈자와 약자의 무기’로 명성이 높다.

AK-47이 사용하는 탄환인 7.62x39mm 탄.

AK-47이 사용하는 탄환인 7.62x39mm 탄.

 

 

AK-47 소총이 사용하는 탄환은 7.62x39mm 탄으로, 통상 ‘7.62mm 러시안’으로 불린다. 7.62mm 러시안에는 기본형인 M43 탄환 및 M67 탄환, 중국제 철심탄환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특히 M67탄은 내부를 비워놓음으로써 적군이 피격됐을 때 파편이 더욱 잘 퍼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살상력을 높인 것으로 유명하다. 7.62mm 러시안은 NATO에서 사용하는 7.62x51mm 탄(‘7.62mm NATO’로 구분함)과 비교하면 파괴력이 약하나, 현재 우리 군이나 미군의 주력인 5.56x45mm탄에 비하면 탄자의 무게도 8그램으로 2배 이상 무겁고 파괴력도 뛰어나지만, 500m의 사거리까지 정확히 사격할 수 없다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결국 소련군도 미군처럼 탄환의 크기와 중량을 줄인 5.45x39mm탄을 채용하여, 새로운 탄환을 쓰는 AK-74 소총이 지금까지 러시아 등의 주력소총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AK-47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명중률이다. 해외의 모 다큐멘터리 채널에서는 AK-47 소총은 보통 200m에서 사람의 몸통을 제대로 맞추기도 어렵다는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AK 소총에 익숙한 사수라면 200m에서 표적을 명중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AK 소총이 정밀하지 않다는 잘못된 상식은 미디어와 게임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조총

“군대의 무기에 있어 조총(鳥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린아이도 항우(項羽)를 대적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참으로 천하에 편리한 무기다.” 1675년(숙종1년) 조선의 영의정이었던 허적(1610~1680)이 남긴 말이다. 어린아이도 조총을 가지고 있으면, 천하장사 항우라도 이길 수 있다는 이 말은 조선 후기 사람들이 조총이라는 무기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조선 지방군들만 10만 4000정 보유

조총(鳥銃)이란 무기 이름은 새를 쏘아 맞힐 수 있을 만큼 성능이 좋은 무기란 뜻을 가지고 있다. 원래 1460~1480년대 사이 유럽에서 처음 개발된 무기로 1543년 포르투갈을 통해 일본에 전해지면서 동아시아 세계에 첫선을 보였다. 그 직후인 1550년대를 전후해 중국 명나라에도 전해졌다. 조총은 화승(火繩)을 이용해 화약에 불을 붙여 탄환을 발사하는 화승식(Matchlock) 총의 일종이다. 동아시아에 조총을 처음 도입한 시기에 유럽은 아케부스(arquebus, 아르케부스) 방식의 화승총에 뒤이어 상대적으로 크기가 더 크고 화력이 강한 머스킷(Musket) 방식의 화승총을 이미 운용했다. 일본과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의 조총은 크기나 위력 면에서 기본적으로 아케부스에 더 가까운 화승총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조총의 위력에 충격을 받았다. 사진은 일본의 조총 발사 재현 행사의 모습. <출처: (cc) Corpse Reviver at wikipedia>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조총의 위력에 충격을 받았다. 사진은 일본의 조총 발사 재현 행사의 모습. <출처: (cc) Corpse Reviver at wikipedia>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한 해 전인 1591년 대마도주가 조선 국왕 선조에게 선물로 보내면서 처음 전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치명적인 무기로서 조총의 위력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해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조선군이 연패하게 되자, ‘무서운 무기’로서의 조총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된다.

 

임진왜란 중 노획한 일본 조총을 모방해 국내 제조에 성공하면서, 대량 보급의 길이 열렸다. 2007년 발견된 조선 시대 충청도 속오군의 병적기록부를 보면 1600년대 후반 충청도 병사 중 76.5%가 조총이 주특기일 정도로 조총 무장 비율이 높았다. 1896년을 전후한 대한제국 무기재고표를 보면 조선의 구식군대가 보유하고 있던 조총의 수량이 서울과 함경도 병력을 제외하고도 10만 4,028자루로 되어 있어 그 어떤 무기보다 수량이 많다. 또한 조총용 탄환인 연환의 보유량은 2,156만 8,291발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수치를 고려하면 중앙군을 포괄한 조선 후기 전체 군대의 조총 보유량은 20만 자루에 육박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총은 조선 후기의 대표무기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초기 큰 피해를 준 조총은 조선 후기 조선군의 주력 무기로 거듭나게 된다. 사진은 조선 시대의 조총. 조총은 화승총의 일종이다.

임진왜란 초기 큰 피해를 준 조총은 조선 후기 조선군의 주력 무기로 거듭나게 된다. 사진은 조선 시대의 조총. 조총은 화승총의 일종이다.

 

명중률, 휴대성 면에서 월등했던 조총


조총이 탄생하기 이전의 휴대용 화약 무기들은 대부분 크기만 작게 만들었을 뿐 대포와 유사한 형태에 나무자루를 부착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유럽의 수포(Hand Gun)나 우리나라의 승자총통 같은 이런 초기형 화약 무기들은 별도의 점화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불이 붙은 심지를 화약이 저장된 총신 내부로 밀어 넣어야 사격이 가능했다. 이런 원시적 화약무기들은 점화를 한 다음에는 조준할 새도 없이 발사되었기 때문에 높은 명중률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였다.


조총은 방아쇠를 당기면 불이 붙은 화승이 화약접시 속으로 들어가 점화용 화약에 불을 붙이고, 이 불이 총열 내부의 발사용 화약에 옮겨 붙어 탄환을 발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화승은 매우 천천히 타 들어가므로 일단 불을 붙인 상태로 대기하다가 내가 원할 때 방아쇠를 당겨 사격을 하는 것이 가능했다. 우리나라 일부 사극에서는 조총의 화승을 마치 도화선처럼 묘사해서, 화승이 다 타들어가서 화약으로 불이 옮겨 붙기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으로 재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총은 방아쇠를 당기면 불이 붙은 화승이 점화용 화약이 들어있는 화약접시 안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발사 메커니즘이 자동으로 시작되는 구조이므로 이 같은 드라마의 장면은 실제 조총의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조선 시대 조총의 세부 모습.

조선 시대 조총의 세부 모습.

 

 

또한 조총은 수포와 달리 열전도율이 낮은 나무로 금속제 총신의 아랫부분을 감싸고, 뒷부분에는 개머리판과 유사한 형태의 나무 부속까지 부착해 현대 소총과 유사한 수준의 휴대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금속제 총신에는 표적을 직접 조준하기 위한 간단한 구조의 가늠쇠와 가늠자도 있었다. 이런 구조 때문에 조총은 가슴·어깨·뺨 등에 보다 안정적으로 고정시킨 다음, 적을 정확하게 조준한 상태에서 내가 원하는 시점에 사격할 수 있었다. 그 차이는 혁신적이어서 적을 소리로 놀라게 하는 ‘신기한 무기’에 가까웠던 휴대용 화약 무기는 조총 출현 이후부터 ‘무서운 무기’이자 ‘잔인한 무기’로 돌변했다.

 

 

구경 13~16mm급이 가장 흔해


현재 전해오는 조선 시대 조총 중 구경이 가장 작은 것은 7mm급 정도, 최대급은 25mm급이고 가장 흔한 유형은 13~16mm급이다. 길이는 90~140cm 정도이며, 무게는 4kg 이하가 대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일본 조총의 유효사거리는 30~50m 수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관통력, 명중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수치일 뿐 무기 자체의 성능상 한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인 조총일 경우 200m 이상의 거리라면 사람을 살상하는 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조준한 목표를 맞춰 신체상의 손상을 입힐 수 있는 유효사거리는 100m 이내이며, 숙련된 사격자일 경우 100m 이내라면 10발 중 8~9발은 사람의 상반신에 명중시킬 수 있다고 한다. 실제 구경 9~16mm급에 3~6몬메(11.25~22.5g) 탄환을 사용한 일본의 표준형 조총으로 실험한 결과를 보면 30m정도에서는 확인 사살이 가능한 수준이고, 50m부터는 대략 표적을 맞추긴 해도 탄착점이 조금 분산되는 경향이 있다.


다만, 일반적인 조총보다 구경이 더 큰 조총도 있고, 혹은 일본의 대통이나 우리나라의 대조총, 천보총처럼 완전히 별개의 무기로 간주되는 화승총 계열의 총들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표준형 조총보다 사거리나 관통력 면에서 더 위력이 강한 사례도 많다는 점은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선 시대 사격 절차는 총 14단계

1603년에 나온 [신기비결]은 조총의 사격 절차를 총 14단계로 구별하고 있다.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세총(洗銃) : 총을 씻는다. (총열 내부를 청소하는 단계)
2. 하화약 (下火藥) : 총구를 통해 발사용 화약인 신약(身藥)을 넣는다.
3. 이삭장 송약실(以朔杖,送藥實) : 꽂을대(삭장)로 신약을 안으로 밀어 넣는다.
4. 하연자(下鉛子) :총구를 통해 납탄환(연자)을 넣는다.
5. 이삭장 송연자(以朔杖,送鉛子) : 꽂을대로 탄환을 안으로 밀어 넣는다.
6. 하지(下紙) : 총구를 통해 종이를 넣는다.
7. 송지:(送紙) : (꽂을대로) 종이를 안으로 밀어 넣는다.
8. 개화문(開火門) : 화문을 연다. (화문은 점화용 화약이 들어가는 약통, 일명 화약접시의 덮개 역할을 한다)
9. 하선약(下線藥) : 화문으로 점화용 화약인 선약(線藥)을 넣는다.
10. 요화문 사문약 하합어신약(搖火門,使門藥,下合於身藥) : 총을 흔들어 점화용 화약과 발사용 화약이 섞이게 한다.
11. 잉폐화문(仍閉火門) : 화문을 닫는다
12. 용두안화승(龍頭安火繩) : 용두에 화승을 부착한다.
13. 청령 개화문(聽令,開火門) : 명령에 따라 화문을 연다.
14. 준적인 거발(准賊人,擧發) : 적을 겨누고 사격한다.

 

점화용 화약이 담겨있는 약통은 접시 같은 모양이어서 뚜껑에 해당하는 화문을 닫지 않으면 점화용 화약이 바람에 날릴 염려가 있다. 선약을 넣은 후 11단계에서 화문을 닫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발사 직전에는 다시 화문을 열어야 한다. 14 단계에서 방아쇠를 당기면 그 다음 단계는 자동으로 진행된다. 방아쇠를 누르면 용두에 물린 화승이 열린 화문을 통해 약통 안으로 쑥 들어간다. 이때 점화용 화약에 불을 옮기게 된다. 점화용 화약에 붙은 불은 총신 내부의 발사용 화약으로 순식간에 옮겨붙어 총신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나면 탄환이 발사가 된다.

 

 

거리 100m에서 뺨에 대고 조준 사격

현대 소총 사격술에서는 개머리판을 어깨에 견착시키는 방법을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유럽에서 화승총이 출현한 초기에는 개머리판 내지 이와 유사한 부속을 뺨, 가슴 등에 붙여서 사격하는 방법도 사용했다. 일본식 조총 사격술에서는 조총의 개머리판을 뺨에 붙여 쏘는 법을 흔히 사용했다. 일본학계에서는 뺨에 부착해서 사격하는 방법이 사격 속도는 느리지만 사격 정밀도는 더 높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각 사격방법의 차이와 장단점에서는 아직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이 같은 일본식 사격술은 우리나라에서도 사용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시대 조총의 개머리판의 길이와 형태를 보면 일본과 마찬가지로 어깨보다는 뺨에 고정시킨 상태로 사격하기에 적합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조선 후기의 병서인 [병학지남주해兵學指南註解]의 ‘조총방법’(鳥銃放法)이란 항목을 보면 당시 사격술에 대해 “총은 마땅히 뺨에 붙여야 하고, 조성(가늠자)으로 전조성(가늠쇠)을 마주하고, 전조성으로 표적을 향하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병학지남주해]에는 ‘머리, 팔, 앞무릎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설명도 있는데, ‘앞무릎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구절은 조선 군대의 표준 사격 자세가 일본의 슬대(膝臺), 현대의 ‘무릎 쏴’ 와 비슷한 자세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기록이다.

 

유럽에서는 화승식 총을 운용할 때 일반적으로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신속한 동시 일제 사격’을 대단히 강조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오히려 사격이 다소 지연될지라도 정확한 조준을 강조했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의 병법서인 [진법언해]를 보면 “조총 총구를 적의 가슴을 향해 겨누고, 말을 탄 적이면 말머리를 겨누라’고 지시한다. 또 “적이 많이 몰려와도 그 가운데 하나를 겨누어야지 마구 쏘아서는 안 된다”는 설명도 적혀 있다. 즉 조선군 조총수들은 적이 보병이면 가슴을 조준하고, 적이 기병이면 말머리를 조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적이 많아도 지향 사격을 하기보다는 그중에 한 명만 조준해서 사격하는 것이 원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군도 사격 속도보다는 정확한 조준 사격을 강조하는 방식의 사격법을 썼던 것이다.


조선 말기 화가인 김준근이 그린 풍속도 중 포수 그림. 팔에 화승을 감는 모습이나 화약을 담은 약통을 가슴에 매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말기 화가인 김준근이 그린 풍속도 중 포수 그림. 팔에 화승을 감는 모습이나 화약을 담은 약통을 가슴에 매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조총 사격 사거리는 훈련, 시험 때마다 적용하는 기준이 약간씩 달랐다. 조선 후기를 기준으로 수군이 실전에 적용한 사거리는 [수조규식](水操規式, 조선시대 수군 규범)을 기준으로 각종 총통은 200보(약 240m), 조총은 100보(약 120m), 활은 90보(약 108m)로 되어 있다. 즉 조총은 활보다는 더 멀고 총통보다는 가까운 거리에서 적을 향해 사격했던 것이다.

 

 

조선 조총수는 5단 연속 사격이 기본

조총으로 대표되는 초기형 총들은 중요한 약점이 있었다. 첫째는 너무도 느린 발사속도, 둘째는 이에 따른 근접전에서의 취약성이다. 두 번째 약점의 경우 창병 등 다른 병종의 도움을 받거나 총에 총검을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극복하는 것이 세계사적인 흐름이었다. 첫 번째 약점인 발사 속도가 느린 문제는 기계적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해결법이지만 이 같은 기술적 혁신은 훨씬 훗날에야 가능했기에 17세기 무렵에는 총병을 3열, 혹은 5열로 나눠 앞열이 사격할 때 뒷열에서 미리 장전 준비를 해서 차례로 연속하는 사격법으로 속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접근법이었다.

 

일본에서는 1575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나가시노 전투에서 ‘3단 철포’ 방식의 사격술을 최초로 도입, 다케다(武田)군 기병대를 무찔렀다는 견해가 한때 널리 받아들여졌다. 오늘날은 오다가 이 같은 전술을 창안한 것이 맞는지 여부, 당시 일본 조총부대가 연속사격 같은 체계적인 전술을 구사할 만큼 조직화되고 훈련되어 있었는지 여부 등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같은 논란과 별개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3단 연속 사격 방식을 채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임진왜란에 당시 명군의 각종 기록과 문서를 모은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을 보면 1593년을 기준으로 왜군이 ‘조를 나눠 번갈아 쉬고 나가는 법(分番休迭之法)’을 썼다고 되어 있다. 또한 명나라 말기의 중국의 화약무기 서적인 [신기보神器譜]는 임진왜란에 참전하고 철군한 명나라 군대가 교대로 조를 나눠 화약무기로 타격하는 법(火器更番?打)을 썼다고 되어 있다.

 

 

중국 [군기도설]의 조총윤방도. 중국에서는 1600년대 초반에 조총 3단 사격이 보편화됐다.

중국 [군기도설]의 조총윤방도. 중국에서는 1600년대 초반에 조총 3단 사격이 보편화됐다.

조선 후기 조총 5단 사격 개념을 보여주는 조총윤방도. 좌우 2명씩 5열로 도열해 있다. 제일 앞줄이 사격하고 뒤로 물러나면 그 다음 열이 사격을 하는 식으로 연속사격을 한다.

조선 후기 조총 5단 사격 개념을 보여주는 조총윤방도. 좌우 2명씩 5열로 도열해 있다. 제일 앞줄이 사격하고 뒤로 물러나면 그 다음 열이 사격을 하는 식으로 연속사격을 한다.

 

이런 기록만으로는 이것이 조총의 연속 사격법을 지칭하는 것이 애매하지만 1638년 명나라에서 간행된 병서인 [군기도설軍器圖?]에서는 조총 3단 연속 사격 개념을 그림으로 넣어놓고 ‘조를 나눠 번갈아 나아간다 (分番迭進)’라고 설명해 놓아 [경략복국요편]에 나오는 설명이 조총 3단 연속 사격임을 지칭하는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나라에서는 늦어도 1600년대 중엽 이후 조선 후기 표준교범으로 사용되어온 [병학지남]에 조총 5단 사격 개념을 보여주는 그림이 포함되어 있어 이미 이때부터는 체계적인 조총 연속 사격 개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조총 장전 속도를 높이기 위해 조총 1발 사격에 필요한 화약과 탄환 등을 별도의 작은 통에 수납해서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재장전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도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목적으로 나무로 만든 약관 20개를 휴대하기도 했다.

 

M-16

한눈에 봐도 장난감 같은 총이 있다. 총 전체가 플라스틱으로 감싸여 있고 무게는 3kg에도 이르지 않는다. 반동도 약해서 소년이 쏠 수 있을 정도지만 그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된다. 이 총기가 경량자동소총의 기준을 새로 만든 M16이다.

 

 

M16 소총은 동·서 냉전시절 서방의 자유를 지키는 상징이었다.

M16 소총은 동·서 냉전시절 서방의 자유를 지키는 상징이었다.

새로운 총기를 찾아라! M14는 답이 아니었다.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M1 개런드 소총을 채용하면서 세계 최초로 반자동소총을 보병의 제식무기로 채용했다. 미군은 한발 더 나아가 경량에 자동으로 사격이 가능한 소총을 제식소총으로 채용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이런 실패의 결과, 미군은 한국전쟁에서 커다란 손실을 입고 말았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미군의 M1 개런드 소총은 적절한 해답이 아니었다. 8발짜리 탄창의 M1 개런드 소총은 아무리 능숙한 사수라도 1분에 58발을 쏘는 것이 한계였다. 아무리 열심히 적군을 맞히더라도 결국 부대는 뒤로 밀려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은 M1 개런드 소총(위)의 후계 기종으로 M14 소총(아래)을 채용하면서 강력한 장거리 소총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지만, 이는 실전에서는 문제였다.<출처: Public Domain>

미군은 M1 개런드 소총(위)의 후계 기종으로 M14 소총(아래)을 채용하면서 강력한 장거리 소총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지만, 이는 실전에서는 문제였다.
<출처: Public Domain>

 

결국 이것은 보병에게 어떤 총을 쥐어줄 것인가 하는 사상에서 기인했다. 미군은 전통적으로 소총에서 긴 사정거리와 정확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M1 개런드도 그러하였으며, M1 소총 이후에 미군이 채용한 자동소총인 M14도 마찬가지였다. M14소총은 1957년에 제식 채용되었다. 7.62mm NATO탄을 사용하며, 사실상 M1 개런드 소총을 자동소총으로 만들고 20발 탄창을 붙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M14는 물론 뛰어난 소총이었지만, 긴 사정거리와 정확성을 추구한 결과 길고 무거워질 수 밖에 없었다. M-14는 이후 이 길이와 무게에 발목을 잡히게 된다.

 

 

유진 스토너가 개발한 AR-10, M16의 원형이 된 소총.

유진 스토너가 개발한 AR-10, M16의 원형이 된 소총.

 

 

 

제식 채용된 M16 소총(M16A1 모델).

제식 채용된 M16 소총(M16A1 모델).

 

비슷한 시기인 1955년, 천재적인 총기설계자인 유진 스토너가 AR-10이라는 소총을 완성하였다. 7.62mm 탄을 사용하는 AR-10은 경량화에 중점을 둔 총기였다. 강화플라스틱과 항공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 무게는 3.3kg 정도에 불과했다. 1956년 미 육군은 AR-10을 시험 평가했지만, 설계방식만큼이나 혁신적인 외관을 갖고 있던 탓에 손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자 1958년 AR-10을 더욱 소형화한 AR-15이라는 소총이 만들어졌다. 500야드 거리에서 강철헬멧을 관통할 수 있는 22구경 소총을 개발해달라는 미 육군의 의뢰에 따라 개발된 것이다. AR-15는 ‘.223 레밍턴’이라는 소구경 경량 탄환을 채용하여 총기 무게와 사격 시 반동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하지만 보수적인 미군 수뇌부는 AR-15를 채용하지 않았다.

 

AR-10에서 AR-15로, 그리고 M16으로

 

미국이 군사지원 및 실전테스트용으로 보낸 AR-15로 훈련중인 남베트남군. 결과는 긍정적으로 AR-15는 베트콩 사이에서 ‘검은 총’으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이 군사지원 및 실전테스트용으로 보낸 AR-15로 훈련중인 남베트남군. 결과는 긍정적으로 AR-15는 베트콩 사이에서 ‘검은 총’으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혁신적인 총기를 개발했던 아말라이트사는 미군에 판매가 좌절되자 AR-15의 권리를 미국 최대의 총기제작사 콜트에 매각했다. AR-15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던 콜트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총기를 판촉 하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육군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지만 군 전반에서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1961년 미 공군 참모총장인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AR-15를 기지 방어용으로 8만 정 도입하고자 했고, 1962년 ARPA(국방과학연구소)에서는 1천 정의 AR-15를 구입하여 베트남에 군사지원물자로 보내 그 성능을 시험 평가했다. 베트남으로 보내진 AR-15의 실전 성과는 미군 특수부대원들에 의해 분석되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엄청난 살상력으로 인해 이 총에 사살된 적군 병사들의 사진은 1980년대까지 군사기밀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았다고 한다.

 

1963년 미 국방부는 드디어 AR-15를 구매했다. 미 공군이 4군 중 가장 먼저 신형소총을 채용하여, 1963년 말부터 AR-15는 M16이라는 군 제식명칭을 부여받았다. 한편 미 육군은 XM16E1이라는 개량형을 발주하여 베트남 전쟁에 투입하였다. 결국 이 총기는 M16A1이라는 명칭으로 미군의 제식소총으로 채용되었다. 그런데, ‘획기적인 신무기’라던 M16도입은 베트남 전쟁 초기에 커다란 실패로 비춰졌다. 대부분의 소총이 전투 중에 고장불량을 일으켜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M16 스캔들’은 미 의회의 국정조사까지 거쳤는데, 대략 아래의 문제가 지적되었다.

 

1) M16은 실제와는 달리 청소가 필요 없는 총으로 알려졌다.
2) M16을 지급하면서 총기 소제 교육이 없었고, 심지어는 예산절감을 이유로 소제 도구까지도 지급되지 않았다.
3) 일선에 시험평가시에 사용된 탄약과 다른 종류가 보급되어 총기 소제의 필요성이 늘어났다.
4) 총열과 약실에 크롬 도금이 안 되어 있어 총기 내부가 오염 등에 취약했다.
5) 노리쇠 전진장치가 없어 실전에서 총기고장시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

 

이에 따라 노리쇠 전진장치 도입 등 몇 가지 개량이 이루어졌으며, ‘소총을 열심히 닦아야 한다.’는 결론에 따라 총기소제도구가 제공되고, 교육이 강화되면서 점차 문제가 마무리되었다.

 

 

 

M16은 베트남 전부터 미군에 정식 채용되었다. 초기에는 작동 불량을 일으키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M16은 베트남 전부터 미군에 정식 채용되었다. 초기에는 작동 불량을 일으키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M16의 작동불량 문제를 조사한 결과 이를 방지하려면, ‘소총을 열심히 닦아야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M16의 작동불량 문제를 조사한 결과 이를 방지하려면, ‘소총을 열심히 닦아야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진화를 거듭하는 M16


원래 M16은 미군이 야심 차게 개발하던 차세대 보병무기인 SPIW(특수목적 개인화기)를 채용하기 위한 과도기 소총이었다. 그러나 AR-15에서 진화한 M16은 과도기에 그치지 않고 진화를 계속했다. 노리쇠 전진장치 등 개선사항이 반영된 M16A1이 이미 베트남전쟁에서는 주력소총이 되었다. M16의 길이를 줄인 XM177 시리즈가 등장하여 베트남 전쟁에서 특수부대원들에게 애용되었다. 이외에도 M203 유탄발사기를 장착한 모델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우리 군도 월남 파병을 통하여 2만7천 정의 M16을 공여 받았을 뿐만 아니라, 1974년부터는 아예 면허생산을 시작하여 무려 60만 정에 가까운 M16 소총이 생산되었다.

 

 

 

우리나라는 M16을 베트남전부터 채용했다. 사진은 베트남전에서 어린이를 구출하는 백마부대 장병의 모습.

우리나라는 M16을 베트남전부터 채용했다. 사진은 베트남전에서 어린이를 구출하는 백마부대 장병의 모습.

우리나라는 M16을 60만 정이나 면허 생산하여 사용했다. 현재도 M16은 예비군의 주력 화기로 쓰인다. 사진은 M203유탄발사기를 장착한 모습.

우리나라는 M16을 60만 정이나 면허 생산하여 사용했다. 현재도 M16은 예비군의 주력 화기로 쓰인다. 사진은 M203유탄발사기를 장착한 모습.

 

한편 M16의 도입으로 NATO 회원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들은 5.56x45mm 탄환을 제식 채용하게 되었고, M16과 유사한 개념의 경량 자동소총들이 각국에서 개발되었다. 그리하여 5.56mm는 NATO 표준탄환으로 채택되었는데, 미군의 M193탄환이 아니라 벨기에에서 개발한 SS109탄환이 선정되었다. 살상력이 높은 신형탄환은 미국에서도 M855란 이름으로 채용되었고, 이 신형탄환을 발사할 수 있는 M16이 등장했다. 바로 M16A2이다. 미 해병대는 1982년 M855탄과 M16A2를 도입하여 전군에서 가장 최초로 A2 모델을 도입했다. 물론 육군도 M16A2를 제식 채용하여 파나마전쟁이나 1차 걸프전에서 M16A2는 주력소총이 되었다.

 

M16A2는 총기의 발사방식에서 자동기능을 제거한 대신 3발씩 발사가 가능한 3점사 기능을 채용하여, 전투시 탄환낭비를 막고자 했다. 3점사 기능은 반면에 긴급한 상황에서 자동으로 발사할 수 없다는 단점 때문에 많은 원성을 사기도 했다. 이에 따라 점사 기능을 제거하고 원래대로 안전-반자동-자동 방식으로 발사되는 M16A3 모델이 나왔고, 미 해군의 SEAL팀이나 기지보안병력 등이 채용하기도 했다.

 

M16의 전설은 21세기에도 계속된다


한편 피카티니 레일이라는 총기결속기구가 등장하면서 M16은 또다시 진화한다. 바로 M16A4의 등장이다. M16A4는 A2와 동일하지만, 그 유명한 운반손잡이가 제거되는 총몸을 가지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여기에 M5 레일 총열 덮개가 결합되어 M16A4 모듈러 보병무기체계로 진화했다. 한편 2010년부터는 미 육군에서 M16A2를 대신하여 M4 카빈이 주력소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 M4 카빈도 결국 M16의 파생형이다. 약 80%의 부품이 M16A2와 호환될 정도다. M16의 전설은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다.

 

 

 

M16A2, NATO 표준의 SS109탄환에 맞추어 진화한 모델이다. 총열 덮개가 둥글고 길이가 약간 길어진 점이 외관에서 눈에 띤다.

M16A2, NATO 표준의 SS109탄환에 맞추어 진화한 모델이다. 총열 덮개가 둥글고 길이가 약간 길어진 점이 외관에서 눈에 띤다.

M16A4. 총몸에서 과거 M16의 상징인 운반손잡이가 사라진 점이 큰 변화다. 대신 레일이 달려, 다양한 액세서리를 결합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

M16A4. 총몸에서 과거 M16의 상징인 운반손잡이가 사라진 점이 큰 변화다. 대신 레일이 달려, 다양한 액세서리를 결합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

 

 

 

  1. M16A1 제원

    제작사: 콜트, 해링턴 & 리차드슨, GM 하이드라매틱 디비전
    전장 : 100.6 cm
    총열 : 길이 50.8cm / 6조 우선
    중량 : 2.97 kg (탄창 제외)
    사용탄환 : 5.56x45 mm 탄
    최대사거리 : 2,653 m
    유효사거리 : 460 m
    발사율 : 분당 최대 750발, 지속발사시 분당 12~15발

기관단총

‘기관단총’은 ‘기관총’과 어떻게 다를까? 기관총(機關銃)이란 영어로는 machine gun이라고 부른다. 기계장치에 의하여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연속으로 나가는 총을 말한다. 반면 기관단총은 영어로 submachine gun이라고 부르는데, 기관총과 비슷한 구조이지만 조금 더 작은 총을 뜻한다. 기관총처럼 기계장치에 의해 연발발사가 가능하지만 ‘Sub-’라는 말이 붙어있는 만큼 매우 작고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총을 말한다.

 

 

기관단총의 제왕이라 불리는 MP5 기관단총. 사진은 MP5-N모델. <출처: heckler-koch>

기관단총의 제왕이라 불리는 MP5 기관단총. 사진은 MP5-N모델. <출처: heckler-koch>

 

 

기관총과 기관단총은 용어는 비슷해도 그 역할은 전혀 다르다. 기관총은 보통 강력한 탄환을 사용하며, 경기관총이라 해도 통상 무게가 10kg 정도에 이른다. 정밀한 사격보다는 막강한 연발사격능력을 바탕으로 적이나 지역을 제압하는 것이 기관총의 용도이다. 반면 기관단총은 보통 권총탄환을 사용하며, 3~4kg의 가벼운 무게로 근접한 거리에서 교전하는 것이 용도이다.

 

 

기관단총의 역사


제1차 세계대전 이전만 해도 개인이 휴대하는 무기는 권총과 소총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의 소총은 한발을 쏘고 다시 장전하는 단발소총이었고, 전체 길이도 길어서 휴대가 불편했다. 권총은 편리했지만, 총열도 짧고 사정거리는 기껏해야 50m도 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연발로 소총탄을 쏠 수 있는 기관총이 등장했지만, 워낙 크고 무거워서 개인이 운용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있다. 권총에 개머리판을 장착하고 총신을 늘려서 연발로 사격하는 총기를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반자동 사격을 위해서 개발된 권총을 가지고 연발화기를 만드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개발자들은 사고를 전환했다. 권총탄을 쏘는 기관총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총과 비슷하거나 짧지만 권총탄을 연발로 발사할 수 있는 초소형 기관총, 즉 기관단총이 탄생했다.

 

 

베레타 모델 1918.

베레타 모델 1918.

초기의 기관단총으로는 이탈리아의 베레타 모델 1918(Beretta 1918), 독일의 MP18, 미국의 톰슨 기관단총(Thompson submachine gun, 톰프슨 기관단총)을 들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1918년에 개발한 베레타 모델 1918 은 탄창을 위에서 삽입하는 형태로 무게는 3.3kg에 전체 길이는 1m 정도로 9mm 탄환을 발사하는 휴대용 연발화기였다. 베레타 모델 1918은 이전에 있던 빌라르페로사(Villar-Perosa)라는 총을 기반으로 개발된 것이다. 빌라르페로사는 권총탄을 연발로 발사할 수 있는 총이었으나, 개인 휴대용 화기는 아니었다.

 

독일의 MP18도 역시 1918년에 제식화된 기관단총이다. MP18은 무려 3만5천 정 이상 생산되면서 전선에서 맹활약을 하여 기관단총의 위력을 실전에서 최초로 보여준 총이다. MP18의 활약은 엄청났다. MP18을 든 독일병사들이 참호에 뛰어들어 연발로 탄환을 흩뿌리자 연합군 병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MP18에게 호된 홍역을 치룬 연합국들은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자 베르사이유 조약을 통해 독일이 경량자동화기를 개발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다.

 

 

MP18 기관단총.

MP18 기관단총.

1차대전 직후에 발매된 톰슨 기관단총은 미국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기관단총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 물건이 나오는 통에 군대는 커다란 고객이 되지 못했다. 이후 톰슨 기관단총은 경찰용으로 세일즈를 하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톰슨은 민간시장에서 호평을 받으며 판매되었는데, 특히 금주법이 시행된 이후에 마피아들이나 은행강도의 무기로 호평을 받게 된다. 특히 ‘공공의 적 1호’인 존 딜린저(John Herbert Dillinger, Jr. 1903~1934)는 톰슨 기관단총을 애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맹활약한 기관단총


1차대전 이후에 다양한 총기들이 개발되었다. 특히 보병이 개인적으로 휴대할 수 있는 연발화기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소총탄을 연발로 발사하는 자동소총의 개발은 여전히 기술적인 장벽에 부딪혔다. 그 대신 이미 능력이 입증된 기관단총에 대한 개발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기관단총은 보병들의 기본화기로 자리잡게 되었다.

 

 

톰슨 기관단총을 든 존 딜린저.

톰슨 기관단총을 든 존 딜린저.

독일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MP40 슈마이저 기관단총.

독일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MP40 슈마이저 기관단총.

 

대표적인 기관단총 중 하나가 바로 MP40 슈마이저(Schmeisser)이다. MP40은 간단한 구조로 인하여 생산하기 쉬웠고, 아프리카 전선 같은 척박한 곳에서도 고장률이 낮은 편이었다. 9mm 권총탄을 사용하여 유효사거리는 100m에 불과했고, 소총에 비해 파괴력이나 정확도가 현저히 떨어졌지만,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던 독소전쟁 등에서 매우 유효한 무기로 평가되었다.


한편 MP40보다 더욱 높은 명성을 날렸던 총기가 있다. 우리에게 ‘따발총’이라고 알려진 PPSh-41 기관단총이다. MP40처럼 프레스 제작으로 생산된 PPSh-41은 평균생산시간이 7.3시간에 이를 정도로 짧았고, 전쟁말기까지 무려 600만 정이나 생산되었다. 특히 7.62x25mm 토카레프 권총탄을 사용하는 PPSh-41은 사정거리가 150m에 이르러 독일군의 MP40보다 우수했다. 독일군은 심지어 노획한 PPSh-41을 MP717로 부르고 제식으로 채용하기까지 했다.

 

 

구소련의 PPSh-41 기관단총, 일명 ‘따발총’.

구소련의 PPSh-41 기관단총, 일명 ‘따발총’.

 

생산성이 높은 기관단총들은 따로 있다. 영국이 개발한 스텐(STEN) 기관단총이다. 독일의 공격으로 한창 수세에 몰려있을 때 생산이 시작된 스텐 기관단총은 당시 생산시설과 자원이 극도로 부족했던 영국의 상황을 반영한 ‘빈자의 기관단총’이었다. 생산단가가 낮고 만들기 쉬운 기관단총으로 설계되어 생산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5시간에 불과했으며 모두 450만 정이 생산되었다. 파이프를 붙여 만든 것 같은 외양으로 ‘배관공의 악몽’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한편 미군은 2차대전 이전부터 톰슨 기관단총을 배치하기 시작했으나, 전쟁이 발발하자 좀더 단순한 형태의 M3 기관단총을 보급했다. M3는 생긴 모습 때문에 ‘기름총(Grease Gun)’ 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으며, 부족한 톰슨을 대체하여 주력 기관단총의 자리를 차지했다.

 

 

스텐 기관단총을 쏘는 윈스턴 처칠.

스텐 기관단총을 쏘는 윈스턴 처칠.

 

 

세계대전 후의 기관단총

2차 대전 이후 다양한 기관단총들이 등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기관단총으로는 MP5우지(Uzi), MAC10 등이 있다. 1950년에 등장한 우지(Uzi)는 1954년부터 이스라엘군 특수부대의 무장으로 채용되었으며, 이후에는 전군의 무장으로 채용되었다. 특히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 커다란 활약을 한 우지 기관단총은 이후 세계의 수많은 군, 경찰로부터 사랑받는 기관단총이 되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현대적 화기의 물결 앞에서 우지는 더 이상 현역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한편 기관단총으로 현대사를 장식한 또다른 총은 바로 MAC10 기관단총이다. 전체 길이가 30cm 남짓인 이 초소형 기관단총은 기관단총이라기보다는 권총에 가까운 총기이다. 이 기관단총은 군용으로서 성공하지는 못했다. 작은 크기지만 막강한 화력을 갖추어 오히려 어둠의 세계에서 각광받는 총기가 되었고, 갱스터나 첩보조직의 화기로 환영받았다.


마지막으로 기관단총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MP5를 빼어놓을 수 없다. 1966년 등장한 MP5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기관단총이다. MP5는 폐쇄노리쇠 작동방식 덕분에 정밀한 사격이 가능하여, 군/경찰에서 가장 사랑받는 기관단총이 되었다. 특히 1980년 이란 대사관 인질구출작전(작전명 님로드)에서 영국 특수부대 SAS가 MP5를 사용하는 장면이 BBC 방송으로 전세계로 퍼지면서, MP5는 특수부대의 상징과도 같은 총기가 되었다.

 

 

우지 기관단총은 6~70년대 가장 인기가 높은 기관단총이었다. 사진은 레이건 대통령 암살시도 이후 우지를 들고 상황을 통제중인 대통령경호관의 모습.

우지 기관단총은 6~70년대 가장 인기가 높은 기관단총이었다. 사진은 레이건 대통령 암살시도 이후 우지를 들고 상황을 통제중인 대통령경호관의 모습.

MP5 기관단총은 대테러부대나 경찰특공대 등 특수임무를 맡은 부대들이 애용한다.<제공: 양욱>

MP5 기관단총은 대테러부대나 경찰특공대 등 특수임무를 맡은 부대들이 애용한다.<제공: 양욱>

 

 

 

기관단총의 미래


현재 기관단총의 미래는 밝지 않다. 이미 자동소총돌격소총이 보편화되면서 기관단총은 더 이상 보병제식무기로서의 위상은 없어진 지 오래이다. 기관단총은 대부분 9mm 권총탄을 사용하여 사거리가 짧으며, 살상력도 낮은 편이다. 특히 방탄조끼가 보편화되는 현대전장에서 기관단총은 더 이상 범용화기로서 역할을 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MP5 같은 기관단총은 대테러임무와 같은 특정 상황에서 쓰일 수 있다는 특수성 때문에 아직도 현역을 지키고 있지만, 이마저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오히려 카빈이 기관단총으로 분류되기도 하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의 대부분의 특수부대들이 MP5를 버리고 M4 CQBR(짧은 총열을 채용한 M4 소총)을 채용하는 추세는 기관단총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반증이다

 

돌격소총

세상에 총기를 구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가운데 유독 독특한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돌격소총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군용 소총은 크고 무거웠다. 5kg에 육박하는 무게에 직경 7mm 내외의 탄환을 사용하는데다가, 대부분 수동으로 한발씩 장전하거나 자동으로 장전을 하더라도 기껏해야 한 발씩 발사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한편 연사로 엄청난 화력을 제공하는 기관총은 엄청난 무게로 인하여 혼자서 운용할 수 없었다. 휴대가 가능한 경기관총이라고 해도 10kg에 이를 정도였다. 결국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기관총이라는 컨셉으로 기관단총이 등장했다. 기관단총은 3~4kg의 가벼운 무게로 휴대하기 편리했지만, 권총탄을 사용하여 사거리가 100m에도 이르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연발사격능력과 사정거리의 한계를 절충할 수 있는 보병의 개인화기가 필요했다.

 

 

돌격소총의 원조인 StG44(Strumgewehr 44). ‘돌격소총’의 어원이기도 하다. <출처: public domain>

돌격소총의 원조인 StG44(Strumgewehr 44). ‘돌격소총’의 어원이기도 하다. <출처: public domain>

 

기관단총처럼 편리하지만 더 강한 위력을 가진 총이 필요하다

이런 필요성을 절묘하게 해결한 총기가 2차 세계대전의 전란 속에 독일에서 등장했다. 당시 독일군의 보병 전투는 기관총을 중심으로 구사되고 있어 볼트액션 방식의 소총이 오히려 보조화기였는데, 그만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소총은 너무 길어서 장갑차 등에서 활용할 수 없었기에 기관단총이 지급되었지만, 독일군은 사정거리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

 

연사능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독일군 수뇌부는 새로운 보병화기의 개발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최초로 개발된 것이 Gewehr 41 반자동 소총이었다. 볼트액션처럼 수동으로 장전하지 않고도 소총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막상 실전에서는 고장이 끊이지 않았다. 한편 경기관총이나 자동소총의 개발도 동시에 추진되었다. 그러나 8x57mm 소총탄의 강력한 반동 때문에 반동제어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무게 역시 만만치 않았다.

 

 

StG44는 기관단총과 같은 연사성능에 전투에 적절한 사정거리를 갖춘 획기적인 보병화기였다.

StG44는 기관단총과 같은 연사성능에 전투에 적절한 사정거리를 갖춘 획기적인 보병화기였다.

 

최초의 돌격소총 StG44, 이를 계승 발전시킨 AK-47

결국 독일은 기존의 틀 밖에서 생각했다. 소총탄환은 너무 강하고, 권총탄환은 너무 약하다면, 그 중간의 탄환을 새로 만들면 될 터였다. 총기회사들은 이미 1930년대부터 이런 탄환을 개발하고 제안했지만, 독일 육군이 반대했었다. 그리고 1941년 육군은 드디어 새로운 탄환의 개발을 승인했다. 새로운 탄환은 생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기존의 8mm 소총탄을 바탕으로 길이를 줄였다. 이리하여 새로운 탄환이 등장했다. 새로운 탄환을 바탕으로 새로운 총기도 개발되었다. Mkb42, 즉 자동카빈(Maschinenkarabiner) 모델 42가 개발되었으나, 히틀러가 모든 신무기의 개발을 중지시키자, 이 계획은 사장되는 듯 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의지를 굽히지 않고 기관단총 개발의 명목으로 더욱 개량된 MP43을 개발했다. 이런 독일군의 의지에 히틀러도 생각을 바꾸어 드디어 신병기인 StG 44, 즉 돌격소총(Strumgewehr) 모델 44가 등장하게 되었다.

 

StG 44는 당대의 우수한 병기에서 그치지 않고 소총의 미래를 보여주는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StG 44는 소련에서 AK-47이 등장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AK-47은 단순한 구조와 간편한 사용방법으로 보병전투의 향방을 바꿔놓았다. 돌격소총이 드디어 보병의 제식무기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StG44의 우수한 성능에 착안하여 소련은 1947년 AK-47을 개발하여 보병주력화기로 채용하게 되었다.

StG44의 우수한 성능에 착안하여 소련은 1947년 AK-47을 개발하여 보병주력화기로 채용하게 되었다.

 

소구경 소총탄으로 돌격소총을 더욱 발전시킨 M-16

한편 소련과 대항하던 서방의 경우에는 상황이 달랐다. 강력한 소총탄환을 사용하는 자동소총이 주류였다. 미국은 M14 소총을, 영국은 FN FAL 소총을, 그리고 독일은 G3 소총을 각기 채용했다. 이들 소총은 모두 7.62x51mm NATO 탄환을 사용하여 사정거리는 5~600m에 이르렀다. 하지만 무게는 보통 4~5kg이었고, 탄환 역시 무거워 20발 들이 탄창을 사용했다.

 

긴 사정거리를 자랑하는 서구의 자동소총과 다루기 편리한 소련의 돌격소총은 196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대결을 펼치게 된다. AK-47의 베트콩과 치열한 실전을 벌인 미군은 자신들의 주력 보병화기인 M14가 전투에 적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군에게도 돌격소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이나 소련과는 다른 방법을 취했다. 소총탄의 길이를 줄인 탄환을 채용하는 대신에, 아예 작은 크기의 탄환을 새롭게 설계했다. 그리하여 5.56x45mm 탄환이 등장했다. 그리고 총기로는 미래지향적인 외관에 플라스틱 총열 덮개와 개머리판을 채용한 획기적인 돌격소총이 채용되었다. 바로 M16이 등장한 것이다.

 

 

5.56mm 소구경 탄환을 채용한 M16 소총.

5.56mm 소구경 탄환을 채용한 M16 소총.

 

M16이 등장함에 따라 개인의 전투력도 현저히 달라졌다. 과거 7.62mm 탄환과 M14소총의 시절에는 전투시 휴대 탄환량이 180발에 불과했지만, 경량의 5.56mm 탄환과 M16 소총이 채용되면서 휴대 분량은 240발까지 증가했다. 한편 탄환이 작아지면서 사거리는 400m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보병에게는 충분한 교전거리였다. 미국의 소구경 탄환 채용은 거꾸로 소련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련은 7.62x39mm 탄환을 사용하던 AK-47을 개조하여 신형 소구경 탄환 5.45x39mm을 사용하는 AK-74를 선보였다. 이렇게 소구경 고속탄환을 사용하는 추세가 굳혀지면서 현대적인 돌격소총의 특징이 완성되었다.

 

M16의 등장 이후 돌격소총은 전 세계적으로 보병무기의 표준으로 서서히 자리잡아 가기 시작했다. 특히 5.56mm 탄환이 NATO 표준으로 선정되면서 다양한 소총들이 등장했다. HK33, FN FNC, SIG SG540 등 M16에 필적할 만한 우수한 소총들이 개발되었다. 대한민국의 K1과 K2 역시 이런 맥락에서 등장하게 되었다.

 

 

80년대 이후 5.56mm 돌격소총은 7.62mm 자동소총을 대신하여 세계 각국의 보병주력소총으로 자리잡게 된다. 사진 맨위로부터벨기에의 FN FNC, 독일의 HK33, 스위스의 SG540, 이탈리아의 베레타 AR70/90, 이스라엘의 갈릴 AR 돌격소총이다.

80년대 이후 5.56mm 돌격소총은 7.62mm 자동소총을 대신하여 세계 각국의 보병주력소총으로 자리잡게 된다. 사진 맨위로부터
벨기에의 FN FNC, 독일의 HK33, 스위스의 SG540, 이탈리아의 베레타 AR70/90, 이스라엘의 갈릴 AR 돌격소총이다.

 

 

불펍식 소총의 등장 ? 새로운 설계 방식

한편 전혀 새로운 설계방식의 돌격소총들도 등장했다. 불펍(Bullpub)이라고 불리는 형태의 돌격소총이 등장한 것이다. 불펍이란 급탄과 격발 등 동작이 방아쇠 뒤쪽의 개머리판 부분에서 이루어지는 소총의 종류를 말한다. 이런 불펍 방식은 총기의 작동부를 개머리판에 수납하게 되어 재래식 총기와는 달리 낭비되는 공간이 없게 되고, 이에 따라 같은 총열길이에도 총의 전체 길이가 짧으며 무게 또한 줄어들게 된다.

 

불펍소총은 이미 1948년 영국에서 시험용으로 개발된 바 있었지만, 1976년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 AUG(Armee Universal Gewehr; 다목적 육군 소총)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실전배치가 되었다. 이후 프랑스가 FAMAS를, 영국이 SA80(L85A1/2) 소총을 채용하면서 본격적인 불펍소총의 시대가 열렸다. 이렇게 다양한 돌격소총들이 등장하면서 80년대부터 세계 각국의 주력소총 자리를 돌격소총들이 점령해나갔다.

 

 

돌격소총이 본격적으로 채용되면서 유럽에서는 불펍방식의 소총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사진 위로부터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 AUG, 프랑스의 FAMAS F1, 영국의 L85A1이다.

돌격소총이 본격적으로 채용되면서 유럽에서는 불펍방식의 소총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사진 위로부터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 AUG, 프랑스의 FAMAS F1, 영국의 L85A1이다.

 

모듈화와 레일 시스템의 적용

한편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돌격소총은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한다. 피카티니 레일 시스템이 미군의 M16/M4 소총에 채용되면서, ‘레일 시스템’이 차세대 소총의 표준으로 자리 잡기에 이른 것이다. 레일 시스템은 표준규격으로 총기의 결합장치를 만들어, 조준경, 레이저 조준기, 전술용 조명장치 등 다양한 부품을 장착할 수 있는 규격장비를 말한다. 손쉽게 말해 레고블록처럼 원하는 대로 필요한 부품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레일시스템의 채용에 따라 심지어는 유탄발사기나 산탄총까지도 총기에 자유자재로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조준경, 레이저 표적 지시기, 전술 조명장비 등 각종 부가장비를 붙인 현대의 돌격소총.

조준경, 레이저 표적 지시기, 전술 조명장비 등 각종 부가장비를 붙인 현대의 돌격소총.

피카티니 레일에 더하여 총기 자체도 모듈러 형식으로 바뀌어, 마치 조립식처럼 총기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FN SCAR(Special Operations Forces Combat Assault Rifle)이다. SCAR의 경우에는 5.56mm 돌격소총과 7.62mm 자동소총으로 교체가 가능하며, 총열 또한 10인치, 14.5인치 18인치로 교체가 가능하다.

 

 

현대적인 돌격소총들은 강화플라스틱 재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하여 무게를 줄이면서도 다양한 부가장비를 장착 가능 하도록 레일시스템을 장착하고 있다.사진 맨위로부터 FN SCAR, 부쉬마스터 ACR, CZ 805 BREN, F2000T 돌격소총이다.

현대적인 돌격소총들은 강화플라스틱 재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하여 무게를 줄이면서도 다양한 부가장비를 장착 가능 하도록 레일시스템을 장착하고 있다.
사진 맨위로부터 FN SCAR, 부쉬마스터 ACR, CZ 805 BREN, F2000T 돌격소총이다.

소재면에서도 합성수지(즉 플라스틱)와 같은 재료들이 더욱 많은 부분에 적용되어 돌격소총을 가볍게 만들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구성도 높아졌다. 슈타이어 AUG에서부터 G36, FN F2000, FN SCAR, CZ 805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총기들이 플라스틱 소재를 채용함과 동시에 피카트니 레일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의 돌격소총은?

우리나라에서도 피카티니 레일을 채용한 K-2C 소총이 등장했다. <출처: S&T Daewoo>

우리나라에서도 피카티니 레일을 채용한 K-2C 소총이 등장했다. <출처: S&T Daewoo>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K-1/K-2가 주력화기로 사용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우수한 돌격소총임에는 틀림없으나, 피카티니 레일의 채용, 모듈러 성능의 활용 등에서 개선의 여지가 남아있다. 최근에는 피카티니 레일시스템을 채용한 K-2C가 등장하기는 했지만, 21세기의 추세를 주도하는 새로운 돌격소총의 등장을 기대해볼만 하다.

 

당연한 이치겠지만 무기는 평화 시보다 실전을 치르는 과정을 통해 더욱 빨리 진화가 촉진되는 물건인데, 군대의 최소 단위인 병사의 기본 화기인 소총도 이러한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현재 어느 군대를 막론하고 돌격소총(Assault Rifle) 혹은 자동소총(Automatic Rifle)이라 불리는 고성능 소총을 기본 화기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돌격소총인 AK-47은 세상에 등장한지 이미 60년이 넘었을 정도지만 상당 수 국가의 정규군은 물론, 무장 투쟁을 벌이는 반 정부 게릴라나 심지어 폭력 조직들도 장비하고 있을 정도다. 그것은 돌격소총이 현재 시점으로 볼 때 가장 발달된 소총이라는 의미다.

 

 

StG44(Sturmgewehr44).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개발한 소총.돌격소총이라는 말은 이 총의 이름에서 나왔다.

StG44(Sturmgewehr44).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개발한 소총.
돌격소총이라는 말은 이 총의 이름에서 나왔다.

 

돌격소총의 아버지, StG44

그런데 이렇게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돌격소총은 탄생 이후 기본적인 메커니즘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탄생한 전차나 전투기들이 현재 퇴물이 된 점을 생각한다면 실로 대단하다 할 수 있다. 물론 돌격소총의 기계적 원리와 사용 목적이 지금이나 그때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획기적인 개선이 이뤄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한편으로 탄생시점 기준으로도 시대를 앞설 만큼 성능이 좋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돌격소총이라 정의가 내려진 총들도 따지고 보면 갑자기 짠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고 그 이전에 있던 여러 종류 소총들의 단점을 개량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돌격소총의 아버지로 자타가 공인하는 명품이 있는데, 바로 제2차 대전 말기에 독일군이 사용한 StG44(Sturmgewehr44)다.

 

Kar98k를 사용하고 있는 독일군 병사(1942년). Kar98k는 정확도와 파괴력은 좋았으나 연사력이 부족했다.

Kar98k를 사용하고 있는 독일군 병사(1942년). Kar98k는 정확도와 파괴력은 좋았으나 연사력이 부족했다.

MP40 기관단총을 든 독일 병사. MP40은 연사력은 좋았으나 사거리와 파괴력이 부족했다.

MP40 기관단총을 든 독일 병사. MP40은 연사력은 좋았으나 사거리와 파괴력이 부족했다.

 

독일군의 전술

제2차 대전 내내 독일 보병의 기본 소총은 Kar98k이었는데, 1898년 개발된 Gew98가 그 원형일 만큼 오래 전에 개발된 무기였다. 저격용으로도 사용될 만큼 정확도, 파괴력 등이 좋았지만 쏠 때마다 노리쇠를 일일이 작동시켜야 하는 볼트액션 방식이어서 연사능력이 결여되었다. 결국 전쟁 초기에 독일군은 MG34, MG42같은 고성능 기관총이 분대의 화력을 담당하고 각개 병사들의 소총은 보조 화기의 형태로 운용하였다.

 

그런데 이런 소부대 전술은 진지에 틀어박혀 방어에 나설 때는 문제점이 크게 보이지 않았지만 적진을 향하여 돌격할 때 곤란한 점이 많았다. 연사력이 좋은 기관총은 너무 무거워서 기동력이 떨어지고 Kar98k은 한 번 발사하면 다음 발사 준비를 위해서 잠시 돌격을 멈추어야 했다. 한마디로 독일군의 트레이드마크인 전격전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려고 일부 병력을 연사가 가능한 MP40같은 기관단총으로 무장시켰으나 사용탄약이 권총탄이라 사거리와 파괴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피아간에 얼굴이 보일 정도의 근접전에서는 기관단총이 위력을 발휘했지만 대다수의 교전 상황에서 그리 효과적이지 않았다. 또한 보병의 기본 장비가 이리저리 나뉘는 것도 유지보수에 결코 좋은 것이라 할 수는 없었다.

 

Kar98k. 독일의 볼트액션 소총. 한발 쏠 때 마다 노리쇠를 당겨주어야 한다.

Kar98k. 독일의 볼트액션 소총. 한발 쏠 때 마다 노리쇠를 당겨주어야 한다.

SVT-38. 구 소련의 가스 작동식 반자동 소총. 방아쇠만 당기면 다음 발이 발사된다.

SVT-38. 구 소련의 가스 작동식 반자동 소총. 방아쇠만 당기면 다음 발이 발사된다.

 

드러난 문제점 ? 소련 소총에 충격 받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1941년 가을까지 독일군은 가히 천하무적이었다. 특히 1940년에 있었던 프랑스 침공전은 전격전의 백미였다. 지난 제1차 대전 당시에 4년 동안 400여만의 사상자를 내며 돌파에 실패했던 서부전선을 무려 7주 만에 완벽히 평정하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신속하게 전쟁을 마무리 짓다 보니 내재된 문제점을 미리미리 개선할 기회를 놓쳤다.

 

흔히 제2차 대전 당시에 독일군이 사용한 무기는 품질이 좋다고 막연히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잘나가던 1941년 이전에는 독일군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한수 아래로 얕보던 소련군이 보유한 T-34 전차에 경악하였던 것처럼 결코 독일군의 무기가 최고는 아니었다. 이런 뼈아픈 사실은 소련을 침공한 이후 전쟁이 길어지자 서서히 드러났고 소총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소련군이 사용하던 SVT-38, SVT-40 같은 반자동소총에 일선의 병사들은 충격을 받았고 공공연히 노획된 소련군 무기를 즐겨 사용할 정도였다.

 

 

 

StG44의 개발 초기 모델인 Mkb42(H). 미국 스프링필드아머리국립사적지의 소장품.

StG44의 개발 초기 모델인 Mkb42(H). 미국 스프링필드아머리국립사적지의 소장품.

 

새로운 소총의 탄생

결국 기관단총의 연사력과 소총의 파괴력을 함께 갖춘 보병용 화기가 요구 되었는데 생각만큼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이런 난제를 풀기 위해 복수의 총기 회사가 새로운 개념의 소총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때 해넬(Haenel)社는 체코슬로바키아제 ZB vz.26 경기관총의 발사 메커니즘을 이용하여 Mkb42(H)로 개발 부호가 명명된 새로운 가스 작동식 소총을 1942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그해 11월 8,000정의 시험용 초도 물량이 동부전선에 공급되었는데, 병사들의 반응이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쉽게 들고 다닐 수 있으면서도 정확도가 높은 경기관총, 바로 그것이었다. 더불어 일선의 요구에 따라 탄피배출구로의 오염물 흡입을 막기 위한 덮개와 조준경 부착을 위한 레일이 추가되었는데 오늘날 최신 돌격소총들도 이런 구조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정작 시대를 선도할 새로운 소총이 탄생하였음에도 보급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히틀러의 명령 때문이었는데, 그렇게 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독일군은 마우저(Mauser)탄이라 불린 7.92x57mm 규격의 탄을 표준 소총탄으로 사용하였다. 마우저탄은 위력이 좋지만 발사 시에 충격이 커서 기관총이 아닌 소총에서 연사하면 반동으로 인하여 사격이 용이하지 않았다. 따라서 새로운 소총에서는 쿠르즈(Kurz)탄이라 불린 7.92x33mm 단소탄을 사용하였지만, 이는 개발자들의 편의에 따른 것이지 독일군 정책권자들이 사용을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1943년 10월 저격용으로 사용 중인 StG44의 모습. <출처:(cc) Deutsches Bundesarchiv>

1943년 10월 저격용으로 사용 중인 StG44의 모습. <출처:(cc) Deutsches Bundesarchiv>

 

총통을 속이고 완성된 총

히틀러의 개발 금지 명령은 독일군 전체의 탄 보급을 우려해선 내린 결정이었지만, 일국의 국가 원수가 소총의 개발에도 일일이 관여하였을 만큼 나치 독일은 경직된 사회였다. 결국 총통의 엄명으로 Mkb42(H)의 양산은 중지될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 개발자나 일선에서 볼 때 너무 아쉬운 결정이었다. 그런데 Mkb42(H)을 한번 맛 본 일선에서 추가 공급을 계속 요구하자 관계자들은 대담하게도(?) 비밀리에 개발을 지속하였다.

 

기존 기관단총의 개량형인 MP43이라 속이면서 편법적으로 제작하였는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안 히틀러가 격노하여 프로젝트 중지를 재차 명령하였다. 하지만 일선에서의 요구가 끓이지 않자 1943년 3월 무소불위의 총통도 결국 양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MP43을 일부 개량하여 1944년에 생산된 모델이 MP44이고 이를 돌격소총(Sturmgewehr)이라 명명하면서 이때부터 StG 44로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본격 제식화된 StG44는 길이 940mm, 무게 5.22kg그리고 유효사거리가 300m였다. 이를 Kar98k과 비교한다면 금속을 많이 사용하여 무게가 많이 나갔고 유효사거리가 반에도 못 미칠 만큼 짧았다. 하지만 당시 보병간의 교전이 대부분 300m 내에서 벌어져,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분당 600발 가까이 되는 연사속도는 비교불가의 대상이었고 이것이 바로 StG44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1944년 아헨전투 당시 모습 StG44를 든 병사가 보인다. <출처:(cc) Deutsches Bundesarchiv>

1944년 아헨전투 당시 모습 StG44를 든 병사가 보인다. <출처:(cc) Deutsches Bundesarchiv>

StG44를 사용 중인 1955년의 동독 무장경찰. 전후 흩어진 StG44가 세계 곳곳에서 사용되었다. <출처:(cc) Deutsches Bundesarchiv>

StG44를 사용 중인 1955년의 동독 무장경찰. 전후 흩어진 StG44가 세계 곳곳에서 사용되었다. <출처:(cc) Deutsches Bundesarchiv>

 

시대를 앞선 명품, StG44

StG44는 앞에서 알아본 것처럼 개발과정 중에 우여곡절 등으로 너무 늦게 제식화되고 물자부족 등으로 말미암아 약 42만정만 생산되었다. Kar98k가 1,400만정 넘게 생산되었다는 고려한다면 극히 적은 수량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각개 병사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적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지만 의미 있는 역할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아니 StG44가 본격적으로 일선에 공급된 1944년 이후에 독일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 한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디서나 빛을 발하는 것이 진정한 명품이듯이 짧은 활약기간 동안 StG44는 근접전, 장거리 저격, 점사, 연사 등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만능소총으로 그 명성을 길이 남겼고 전후 총기 개발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때문에 StG44는 총기사의 걸작으로 불리며 지금도 사용 중인 AK-47이나 M-16같은 대표적 돌격소총의 아버지로 평가 받고 있다. 특히 프레스 가공에 의한 제작 기술은 소련이 1950년대 후반(AKM)에 가서야 구현할 수 있었을 정도로 앞선 테크닉이었다. 한마디로 당대를 뛰어넘는 무기사의 걸작이었다.

히틀러의 전기톱

 

1998년 개봉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 Saving Private Ryan]의 첫 장면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이처럼 전쟁의 잔인성을 실제에 가깝도록 묘사한 영화는 그 당시까지 그리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화제의 장면은 1944년 6월에 있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이 가장 크게 피해를 입었던 오마하 해변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독일군이 여러 수단을 사용하여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고 있었지만, 영화에서 그린 것처럼 해변에 상륙한 미군들에게 많은 피해를 안겨준 무기가 벙커 속에서 쉴 새 없이 난사되던 독일군의 기관총이었다. 바로 MG42(Maschinengewehr42)였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뿐만 아니라 2차대전 내내 독일과 마주한 상대에게 가장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MG42(Maschinengewehr42) 기관총.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사용한 기관총이다.연사 속도가 높아 독특한 발사음을 내서 ‘히틀러의 전기톱’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MG42(Maschinengewehr42) 기관총.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사용한 기관총이다.
연사 속도가 높아 독특한 발사음을 내서 ‘히틀러의 전기톱’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지난 전쟁의 기억


그전에도 존재하고 실전에서 많이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기관총이 최고의 살상무기로 악명을 날린 것은 제1차대전 당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최초의 중(重)기관총이라 할 수 있는 맥심(Maxim) 기관총은 동맹국이건 연합국이건 상관없이 최전선에서 거점 방어를 위한 화력지원용 병기로 널리 사용되면서 참호전의 꽃으로 그 명성을 길이 남겼다. 특히 상대편 참호를 향하여 달려드는 공격군들이 기관총 세례를 받고 죽어나가는 것이 전선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당시까지만 해도 맥심 기관총은 별도로 편제된 기관총 중대에서 운용하던 중화기였다. 그 이유는 기관총 자체의 무게만도 30Kg가까이 나가는 중량물인데다가 부속장비로 인하여 대개 4~6인이 팀을 이뤄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신속한 이동과 배치가 쉽지 않아 최 일선 부대와 동시에 작전을 펼치는데 제약이 많았고 따라서 중대 이하의 제대에서 보유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려웠다.

 

 

 

맥심 기관총을 사용 중인 1930년대 소련군 사진. 맥심 기관총 운용에 필요한 인원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맥심 기관총을 사용 중인 1930년대 소련군 사진. 맥심 기관총 운용에 필요한 인원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조약의 틈새를 이용한 개발


이런 이유로 중기관총은 주로 참호에 고정하여 사용하는 방어용 무기였는데, 이것은 참호전이 공격자가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돌격소총처럼 연사력과 화력이 좋은 무기를 공격하는 보병들이 휴대할 수 없었으므로 당시에는 당연히 기관총을 난사하는 방어자가 훨씬 유리하였다. 때문에 종전 후 승전국들이 베르사유조약으로 독일의 군비를 제한 할 때 이렇듯 방어전의 맹주인 중기관총의 보유를 금지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비록 조약으로 말미암아 독일은 탄띠급탄식 중기관총의 개발과 보유는 금지 당하였지만 탄창식 경기관총의 개발은 가능하였다. 독일은 이러한 맹점을 파고들어 탄창식 기관총의 개발과 더불어 한편으로 중립국 스위스의 총기회사를 인수하여 현지에서 유사시 탄띠식으로도 개량이 가능한 기관총의 개발에 나서게 되었고 독일의 재무장 선언 전인 1934년 이를 비밀리에 제식화하는데 성공하였다.

 

MG34(Maschinengewehr34).<출처: (cc) Deutsches Bundesarchiv>

MG34(Maschinengewehr34).
<출처: (cc) Deutsches Bundesarchiv>

MG42(Maschinengewehr42).<출처: (cc) Deutsches Bundesarchiv>

MG42(Maschinengewehr42).
<출처: (cc) Deutsches Bundesarchiv>

 

새로운 기관총의 탄생


이렇게 탄생한 기관총이 MG34(Maschinengewehr34)인데, 겉모양만 놓고 보더라도 맥심 같은 중기관총과는 거리가 멀었다. 쉽게 휴대할 수 있어 사수와 부사수 정도의 적은 인원으로도 일선 소부대에서 편리하게 사용이 가능하였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기관단총이나 경기관총이 흉내 낼 수 없는 강력한 화력과 연사력을 자랑하였다. 하지만 실전에 투입하자 예기치 못한 불편한 점들이 일선에서 보고되었다.


공랭식이었으므로 MG34는 총열을 자주 교환해 주어야 했는데 구조가 불편하여 야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더불어 먼지나 진흙 등의 가혹환경 하에서 쉽게 오작동을 일으켜 신뢰성이 저하되고는 하였다. 거기에 더불어 복잡한 생산 공정으로 인하여 단가가 높아 대량 보급하기에도 부적합했다. 곧 MG34의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는 사업이 요하네스 그로스푸스(Johannes Grossfuss AG)의 주도로 착수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소화기를 소개한 동영상. 미군이 교육 자료로 만든 영상으로, 마우저 Kar98k소총, MP40, MG34, MG42를 소개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을 접목한 신개념의 기관총


이때 독일군 당국은 신형 중기관총의 개발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는데 이것은 이후 SAW(분대지원용 자동화기)와 같이 현대의 다목적기관총에도 적용되는 규칙이 되었다. 첫째, 경기관총처럼 휴대하기 편하면서도 중기관총만큼의 화력을 갖추어야 한다. 둘째, 생산단가를 최대한 낮추고 대량생산에 적합하여야 한다. 셋째, 보수 및 총열교환이 편리하고 악조건에서도 쉽게 사용이 가능하여야 한다.


이러한 목표를 세워두고 새로운 기관총을 개발 중이던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폴란드 엔지니어인 에드발트 슈테케(Edward Stecke)가 개발하여 기관총의 구조를 단순화하고 연사속도를 증대시킬 수 있는 ‘롤러 잠금장치(Roller Locking System)’ 기술을 확보하게 되었다. 독일은 이를 적용함으로써 화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처럼 독일의 최신예 기관총은 스위스나 폴란드처럼 외국의 기술을 적용시켜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호헨잘츠부르크성에 전시된 MG42 <출처: (cc) Andrew Bossi>

오스트리아의 호헨잘츠부르크성에 전시된 MG42
<출처: (cc) Andrew Bossi>

MG42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킨 롤러 잠금장치.<출처: (cc) Edmond HUET, DCB Shooting, Quickload>

MG42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킨 롤러 잠금장치.
<출처: (cc) Edmond HUET, DCB Shooting, Quickload>

 

경이적인 발사속도


1942년 새롭게 탄생한 기관총은 탄창, 탄띠를 겸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MG34의 장점을 그대로 갖추었고, 더불어 총신의 구조를 개선하여 과열된 총열을 30초 이내에 신속히 교환할 수 있었다. 더불어 대량 생산이 가능한 프레스 공법을 이용하여 도입 가격을 대폭 낮추는데 성공하였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역사상 최고의 기관총 중 하나로 명성이 드높은 MG42가 탄생하였다. MG42는 쇼트 리코일(Short Recoil) 방식에 롤러 잠금장치가 결합되면서 보병이 휴대하는 화기로는 경이적인 분당 최대 1500여 발을 발사할 수 있었다. 현재 주력 기관총인 M60이나 M249이 분당 1000발 이하인 점을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놀라운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발사 속도로 말미아마 특유의 소음이 발생하였는데, 연합군 장병들은 이를 빗대어 MG42를 '히틀러의 전기톱(Hitler's buzzsaw)'으로도 불렀다.

 

 

 

MP34, MG42, MP40의 발사소리를 비교한 동영상. 미군이 교육자료로 만든 동영상의 일부이다. MG42는 빠른 발사 속도로 특유의 소리를 낸다.

 

다목적 기관총의 효시


하지만 가장 큰 장점이 분대 급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휴대가 편리하다는 점인데, 이 때문에 기관총이 방어용뿐만 아니라 공격용 무기로도 사용 될 수 있었다. 전쟁 중반에 등장한 MG42는 항상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이 이와 맞먹는 분대 지원화기나 소대 지원화기가 없었던 다수의 적을 압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진지에 구축된 MG42는 방어용 무기로도 최고의 성가를 자랑하였다. 한마디로 오늘날 다목적 기관총의 효시였다.

 

 

 

MG42의 7.62mm NATO탄 버전인 MG3를 사용하고 있는 독일군.사진은 1999년의 훈련 장면으로 MG42의 우수성으로 보여준다.

MG42의 7.62mm NATO탄 버전인 MG3를 사용하고 있는 독일군.
사진은 1999년의 훈련 장면으로 MG42의 우수성으로 보여준다.

 

비록 상대적으로 늦은 전쟁 중반기에 등장하였지만 현재까지도 최고의 기관총으로 평가될 만큼 그 명성을 날리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고 총 40여만 정이 생산되어 종전까지 최일선에서 독일군 함께 하였다. 현재 독일연방군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주력 기관총으로 사용중인 기관총이 MG3인데, 엄밀히 말해 7.92x57mm 마우저 탄을 사용하던 MG42를 7.62×51mm NATO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한 것이다. 그만큼 MG42는 패전국에서 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기를 뛰어넘어 계속 사용되는 무기사의 명품이라 할 수 있다.

 

M2중기관총

전시나 냉전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무기의 발전 속도는 대단하다. 예를 들어 순항미사일 같은 정밀 타격용 무기들만 하여도 10년의 간격을 두고 발생한 걸프전과 이라크전을 비교할 때 정확도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었을 정도다. 이처럼 그 어떤 상업 제품 못지않게, 아니 능가할 정도로 무기의 발전 속도가 빠른 이유는 간단하다. 좋은 무기를 가진 쪽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M2 중기관총. 브라우닝이 개발했으며, 0.5인치(12.7mm) 탄환을 사용하여, M2브라우닝(M2 Browning) 혹은 캘리버 50기관총(.50 caliber Machine gun), MG-50(.50구경 기관총이라는 의미)이라고도 한다.

M2 중기관총. 브라우닝이 개발했으며, 0.5인치(12.7mm) 탄환을 사용하여, M2브라우닝(M2 Browning)
혹은 캘리버 50기관총(.50 caliber Machine gun), MG-50(.50구경 기관총이라는 의미)이라고도 한다.

 

살벌한 신무기 경쟁에서 100년 현역을 바라보는 기관총

만일 교전 중인 양측 부대원들의 능력이 대등하다면 무기의 우열은 승패의 결정적 요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무기 또한 소비자에게 선택되기 위해 치열한 성능 경쟁을 벌인다. 왜냐하면 사용 목적을 배제하고 본다면 무기 또한 엄연한 상품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좋은 품질의 무기는 계속하여 생산되고 성능이 뒤진 무기는 자연스럽게 도태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탄생한지 오래된 무기가 최신 무기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법칙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토록 살벌한 경쟁에서 무려 100년 가까이 사용되고 있는 스테디셀러 무기가 있다. 흔히 캘리버 50이라 불리는 M2 중기관총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사실 무기는 고사하고 일반 상품에서 조차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 예다. 이 총이 처음 세상에 선보였을 때에는 미사일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미사일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지금도 M2는 일선에서 사용 중이다.

 

M2 중기관총을 삼각대 위에서 사격하는 모습.

M2 중기관총을 삼각대 위에서 사격하는 모습.

M2 중기관총을 차량에 장착하여 사용 중인 모습.

M2 중기관총을 차량에 장착하여 사용 중인 모습.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선에서 요구한 새로운 기관총

M2는 1918년 전투기용 기관총으로 처음 설계되었다. 제1차 대전 당시 전투기에 장착하였던 기관총은 빅커스(Vickers)나 MG-08 스팬다우(Spandau)같이 8mm이하 구경의 소총탄을 사용한 것들이었다. 이들은 연사력이 좋았지만 파괴력이 부족하여 공대공 전투로 적기를 격추시키려면 많은 명중탄을 작렬시켜야 했다. 하지만 기동력이 뛰어나고 속도가 빠른 적기에 계속하여 탄을 명중시키기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적은 수의 명중탄만으로도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기관총이 요구되었다.


개발을 의뢰 받은 브라우닝(John M. Browning, 1855-1926)은 자동화기의 아버지라 불린 총기 역사 최고 장인 중 하나지만 군 당국의 요구 사항에 많은 고민을 하였다. 파괴력을 늘리려면 탄과 이를 발사할 수 있는 기관총의 크기를 크게 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격 시 충격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되 정확도는 좋아야 하고 또한 비행기에 충분히 장착할 만큼 무게도 적당하여야 했다.

 

수랭식 시절의 M2 중기관총. 함정 위에 장착한 모습.

수랭식 시절의 M2 중기관총. 함정 위에 장착한 모습.

P-47 전투기에서 M2 중기관총(항공용 버전)을 쏘는 모습.

P-47 전투기에서 M2 중기관총(항공용 버전)을 쏘는 모습.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무기

바로 이때 독일군이 전쟁 말기에 대물저격용으로 사용한 마우저 1918 탕크게베어(Mauser 1918 T-Gewehr) 소총은 좋은 힌트를 주었다. 브라우닝은 당시 존재하던 전차나 장갑차량을 관통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만 보병들이 휴대(사실 18kg이라서 너무 무겁고 사격시 반동이 심하여 사수들이 부상당하는 경우가 많아 일선에서 그리 반기지는 않았지만)할 수 있었던 T-Gewehr 소총의 13.2mm 구경 탄환을 기존 M1917 기관총에 장착하는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많은 예기치 못한 문제점이 드러났고 제작은 난항을 겪었다. 바로 그때 미군 병기국에서 12.7mm 구경의 새로운 탄환을 개발하였는데 브라우닝 개발팀은 이를 이용하여 실험을 재개하였고 마침내 1921년 새로운 수랭식 중기관총을 만들어 냈다. 그것이 바로 M1921이었는데 곧바로 미군 당국에서 채택하였을 만큼 성능에 만족하였다.

 

M2 중기관총 2정을 결합하여 함정에 장착한 모습.

M2 중기관총 2정을 결합하여 함정에 장착한 모습.

M2 중기관총 4정을 결합하여 대공 무기로 사용하는 모습.

M2 중기관총 4정을 결합하여 대공 무기로 사용하는 모습.

 

공랭식으로 변신, 표준 중화기로 거듭난 M2

최초 M1921은 전투기용으로 개발되었으므로 보병이 휴대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장비는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M1921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라 제1차 대전 당시 전선의 주역으로 등장한 기관총들 대부분은 상당히 무거워서 3~4명 이상의 병사가 운용하였고 진지의 거치대에 장착하여 사용하는 방어용 무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제1차 대전을 거치며 기계화, 차량화 부대가 속속 등장하면서 육군도 무거운 중화기를 손쉽게 탑재하여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M1921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부대에 적합한 무기였다.

 

그런데 M1921을 일선에서 운용해 본 결과, 물에 의한 냉각 방식은 무게만 늘릴 뿐임을 알게 되었다. 공기만으로 충분히 냉각시킬 수 있음이 입증되자 총열 부분을 약간 개량하여 공랭식으로 개량이 이루어졌는데, 1933년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M2다. 공랭식 M2는 일선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기존의 M-1921은 빠른 속도로 M2로 개량되었다. 이후 항공기는 물론, 전차, 장갑차를 비롯한 모든 기동 장비와 군함에도 표준 중화기로 탑재되었다.

 

M2 중기관총은 M1 에이브람스 전차 포탑에도 장착된다(사진 왼편의 기관총).

M2 중기관총은 M1 에이브람스 전차 포탑에도 장착된다(사진 왼편의 기관총).

소형 전투정의 주 화력은 M2 중기관총이 맡는다.

소형 전투정의 주 화력은 M2 중기관총이 맡는다.

 

100년을 이어온 성능

M2의 외형적 특징 중 하나가 HB(Heavy Barrel-굵은 총신)다. 이는 공랭식으로 개조하면서 방열 효과를 높이기 위해 생겨난 특유의 구조인데, 이 때문에 M2HB라고 불리게 되었다. 브라우닝이 만든 총기답게 노리쇠를 반동으로 후퇴전진 시키는 쇼트 리코일(Short recoil)방식으로 작동하고 12.7×99㎜ 전용탄을 사용한다. 최대 유효사거리는 1,830m이고 분당 최대 600발을 발사할 수 있는데 91m 거리에 있는 22.2mm 장갑판을 관통할 수 있는 파괴력을 보유하였다.


M2는 총열이 몸통에 회전식으로 결합되어 있어서 총열을 교환할 때 시간이 많이 걸리고 게이지를 이용하여 두격(노리쇠와 총열의 삽입부 사이)을 매번 조정하여야 번거로움이 따라다녔다. 기관총은 사격 시 총열을 자주 교환해주어야 하는데 이는 M2의 커다란 약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단점을 개량하여 총열교환을 탈착식으로 할 수 있는 모델이 M2/QCB(Quick Change Barrel)인데 현재 M2를 개량한 국산 K6 중기관총도 이러한 형태다.

 

M2 중기관총의 뒷 부분. 엄지로 누르는 형태의 방아쇠 등이 보인다.

M2 중기관총의 뒷 부분. 엄지로 누르는 형태의 방아쇠 등이 보인다.

M2 중기관총의 우측면 세부, 방금 사격을 끝낸 모습이다.

M2 중기관총의 우측면 세부, 방금 사격을 끝낸 모습이다.

 

다양한 사용 범위와 뛰어난 전과

M2는 제2차 대전부터 본격적으로 맹활약하였는데, 한마디로 미군이 있는 곳에 반드시 M2가 함께 하고 있을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소임이 끝난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 월남전쟁은 물론 현재까지도 당당히 실전에서 사용되고 있을 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더불어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이나 원조를 받은 수많은 나라에서 표준 화기로 활동하였고 현재도 사용 중이다.


원래 기관총은 대인용이라기 보다는 강력한 화력으로 일정 지역을 제압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화기다. 특히 M2는 적 장비 격파를 목적으로 탄생하였다 보니 정확도보다는 파괴력에 중점을 둔 기관총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M2는 정확도가 상당한 총기인데 대인 저격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67년 월남전쟁에서 미 해병대의 저격수였던 카를로스 헤스콕(Carlos N. Hathcock)은 광학조준경을 장착하여 2,250m 거리에 있는 적을 저격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는데 이후 35년간 최장 저격기록으로 남았을 정도였다.

 

헬리콥터에 장착된 M2 중기관총의 항공용 버전(GAU-18/A).

헬리콥터에 장착된 M2 중기관총의 항공용 버전(GAU-18/A).

진지를 지키는 M2 중기관총.

진지를 지키는 M2 중기관총.

 

최초에 너무 잘 만들어서 더 이상 개선할 필요가 없다

M2는 일반 보병들이 휴대하여 사용하기에 불가능할 정도로 무겁고 총열 교환을 자주 하여 주어야 한다는 약점이 있으나, 최초에 너무 잘 만들어서 더 이상 개선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잘 만들어진 기관총이다. 최신 무기의 습득에 남다른 욕심이 있는 미군 당국도 무게를 줄여 보는 등 개량 형 개발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였고 이를 완전히 대체할 새로운 중기관총 프로젝트(OCSW)를 추진하였으나 지지부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M2 중기관총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현역에서 활동할 것으로 예상된다.

 

 

 

M2 중기관총은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버텨온 무기이다.

M2 중기관총은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버텨온 무기이다.

 

멀쩡한 핸드폰이 싫증이 난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지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제품이 단종 되는 경우가 허다한 요즘 시대에, 그것도 최신식이 판치는 무기의 세계에서 M2 중기관총의 생명력은 실로 대단하다. 복엽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시절에 만든 기관총이 100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 최 일선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의 대상이라 할 것이다. 만일 M2가 생명체였다면 최신무기라고 뽐내는 놈들 앞에 가서 이렇게 외쳤을 것 같다. "물렀거라! 내가 큰 어른이다"

 

맥심 기관총

1914년 9월, 프랑스가 마른(Marne)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독일의 맹공을 간신히 막아낸 후 전선의 곳곳에는 상대를 견제하기 위한 참호가 깊게 파여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치 상황은 잠시고 전쟁 초기의 치열한 기동전이 곧바로 재현 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하지만 여기저기에 파여진 참호들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방어 진지로 변하였고 어느 틈엔가 제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방어를 위한 구조물인 참호는 전선이 고착화되었음을 의미하였고 이때부터 전쟁의 대부분은 양측이 만들어 놓은 참호선 사이에서 벌어졌다. 장장 4년 동안 수백만의 양측 병사들이 이곳에서 사상 당했을 정도로 싸움은 참혹했다. 전투에 많은 무기들이 동원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기관총은 최고의 살인기계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독일군과 연합국 모두 같은 기관총을 사용하였다. 바로 모든 기관총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맥심(Maxim) 기관총’이었다.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양측 모두에서 사용되며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맥심 기관총사진은 맥심 기관총을 시험하는 발명자 하이람 맥심.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양측 모두에서 사용되며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맥심 기관총
사진은 맥심 기관총을 시험하는 발명자 하이람 맥심.

 

작은 생각에서 출발한 총기사의 이정표

제1차 대전을 계기로 많이 부각되었지만 사실 맥심 기관총은 당시 처음 등장한 신무기는 아니었다. 이를 만들어낸 하이람 맥심(Hiram S. Maxim)이 1883년에 특허를 출원하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던 무기라 할 수 있다. 미국 태생으로 영국으로 귀화한 발명가 맥심은 사격 시에 발생하는 반동을 이용하면 탄환을 자동으로 재장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런 작은 아이디어는 총기 역사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웠다.


당시 대부분의 총은 수동으로 재장전하는 형태였으므로 연사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전투에 많은 인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였다. 계속 방아쇠를 당겨 쏘는 반자동총이나 개틀링건(Gatling Gun)처럼 일부 연사가 가능한 총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수동식이었고 사용이 불편하였다. 연구 끝에 맥심은 새로운 개념의 총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고 이를 맥심 기관총이라 명명하였다.


발사에서 장전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자동화되었으므로 사수는 오로지 목표물만 바라보고 사격만 하면 되었다. 이 때문에 맥심 기관총은 현대식 자동화기 또는 기관총의 효시로 보는데, 이전의 개틀링건 방식과 달리 탄띠급탄식을 채택하여 분당 최대 650발의 발사속도를 가졌다. 이는 숙련된 50명의 사수가 발사하는 소총의 화력과 맞먹는 것이었을 만큼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경이적인 수준이었다.

 

맥심 기관총의 도면. 반동을 이용하여 다음 탄환을 장전·발사하는 최초의 기관총이다.

맥심 기관총의 도면. 반동을 이용하여 다음 탄환을 장전·발사하는 최초의 기관총이다.

1895년 제작된 초기 형태의 맥심 기관총.

1895년 제작된 초기 형태의 맥심 기관총.

 

이미 시현된 무서운 화력

처음에는 개인이나 식민지 정부 등에서 시험 삼아 구입하였고 1888년 11월,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에라리온에서 원주민 탄압에 처음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정작 군 당국에서는 이 혁신적인 화기에 대해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아 맥심은 판매를 위해 직접 유럽 각국을 돌며 시범을 보여야 했다. 시범을 본 많은 이들은 빠른 발사 속도에 경악하며 관심을 표명하였고 속속 구매의사를 보였지만 정작 주문량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1889년 최초로 도입하였지만 대량 채용을 거부하였던 영국군의 생각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기관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맥심 기관총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적어도 5~6명의 인원이 필요했고 수랭식 시스템을 채용하였음에도 종종 과열로 문제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강력한 화력을 인정하지만 일선에서 보병들이 사용하기에는 곤란한 무기로 판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맥심 기관총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1893년 짐바브웨에서 원주민의 항거가 벌어졌는데 4정의 맥심 기관총을 보유한 불과 50여 명의 경비대가 무려 4천여 명의 원주민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한마디로 학살이었고 이것은 제1차 대전의 비극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특히 정규전이었던 1905년 러일전쟁 당시에 1정의 러시아군 맥심 기관총에 일본군 1개 대대가 도륙되기도 하였다.

 

 

 

러일전쟁의 여순 전투에서 공격하는 일본군을 도륙한 러시아군의 사진. 이 전투는 맥심 기관총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줬다.일본이 결국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일본 군의 인명피해는 러시아 군보다 훨씬 컸다.

러일전쟁의 여순 전투에서 공격하는 일본군을 도륙한 러시아군의 사진. 이 전투는 맥심 기관총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일본이 결국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일본 군의 인명피해는 러시아 군보다 훨씬 컸다.

 

피아 모두가 채택한 기관총

동시기에 맥심 기관총의 효용성을 깨달은 여러 나라들이 라이선스 제작에 들어갔는데 그 중 가장 앞장섰던 나라가 독일이었다. MG08 스팬다우(Spandau)라 명명된 독일형 맥심 기관총은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썰매모양의 거치대등을 장착하는 식으로 일부 개조가 이루어졌지만 기본적인 사양은 동일하였다. 그 결과 1914년 제1차 대전 발발 당시에 독일은 총 10만정의 맥심 기관총을 장비한 최대 보유국이 되었다.


또 하나의 군사대국인 러시아군도 같은 방식으로 맥심 기관총을 라이선스 생산하였다. 러시아용은 별도의 제식 소총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약실이 개조되었고 이런 저런 사양 개조로 가장 무거웠던 맥심 기관총으로 불렸는데 이것이 PM M1905기관총이다. 제1차 대전 당시에는 이를 좀 더 개량한 PM M1910이 대량 사용되었는데 이후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군에 공급되어 우리와 악연이 있다.


맥심의 모국이기도 했던 영국도 애용하였지만 제1차 대전 직전에 보병대대당 2정만 배치하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경쟁국에 비해 홀대를 받았다고 할 수도 있다. 영국군이 제식화한 모델은 맥심 기관총의 가장 큰 단점인 무게를 반 정도로 대폭 줄인 비커스(Vickers)기관총이었다. 현대식 기관총과 비교한다면 이것 또한 무거운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여타 국가의 맥심 기관총과 비교한다면 훨씬 다루기 용이하였다.

 

독일이 라이선스 생산한 MG08 스팬다우 기관총.

독일이 라이선스 생산한 MG08 스팬다우 기관총.

PM M1910 기관총. 소련(러시아)판 맥심 기관총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가,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이 썼다. 사진은 제2차 대전의 모습.

PM M1910 기관총. 소련(러시아)판 맥심 기관총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가,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이 썼다. 사진은 제2차 대전의 모습.

 

맥심 기관총이 지배한 죽음의 경쟁

1914년 인류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지옥을 현실에 만들어 내었다. 제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희생이 그토록 컸던 점은 무기의 발달에 비해 전쟁을 지휘하는 이들의 생각이 너무 고루하였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나폴레옹 시대의 공격 제일 사고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돌격명령을 받고 적진을 향해 뛰쳐나간 병사들이 상대편 참호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속수무책 당하는 것이 전선의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오늘날 같으면 기갑장비를 이용하여 참호선을 돌파하는 작전을 펼치겠지만 당시만 해도 포격 후 보병이 돌격하는 방식 외에 마땅히 구사할 전술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포탄의 비를 퍼부어도 상대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였고 이렇게 살아남은 방어자들은 포연을 헤치고 돌격하는 공격자가 사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름이 조금씩 다를 뿐인 맥심 기관총에 의해서 무명의 병사들은 하염없이 숨져갔다.

 

 

 

맥심 기관총의 영국판 경량형, 비커스 기관총을 쏘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영국군 병사.

맥심 기관총의 영국판 경량형, 비커스 기관총을 쏘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영국군 병사.

 

참호를 파고 전선이 고착화되자 맥심 기관총의 위력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너무 무거워 공격 시에는 재빠르게 옮겨 다니며 지원할 수 없었지만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에 나섰을 때는 다가오는 적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알을 퍼부어대는데 적격이었던 것이었다. 당연히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렇게 참호전과 더불어 맥심 기관총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학살을 뜻하는 대명사로 바뀌어 갔다. 바로 죽음의 경쟁이었다.

 

 

  1. 맥심 기관단총 제원 (초기형)
    중량 27.2kg(냉각 용수 제외) / 전장 108cm / 총열 67.3cm / 탄약 .303 British / 작동방식 리코일(recoil)

콜트 45권총

과학 기술의 발전은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특히 우리 삶과 가장 밀접하게 된 IT분야는 일일이 변화를 쫓아다니기 힘들 정도인데, 그렇다보니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라는 신조어까지 생겼을 정도다. 불과 10년 전에 이동 통신과 결합한 손바닥만한 컴퓨터로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정보를 실시간 검색을 할 수 있고 의견도 자유롭게 올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새로운 기술이 가장 빨리 실용화되는 분야 중 하나가 바로 무기인데, 그 이유는 단순명료하다. 남이 보유하지 못한 나만의 무기가 장차에 있을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일이 역사적 사례를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무기가 있다. 이른바 콜트 45(Colts .45)로 더 많이 알려진 M1911권총이다. 제식번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탄생 100주년이 넘었는데, 놀랍게도 아직도 일선에서 애용되고 있다. 미군의 경우 1985년 M9 권총을 채택하기 전까지 공식 권총이었고 국군도 지난 1988년 K5권총을 제식화하기 전까지 사용했다. 그리고 현재도 상당량이 군경에서 사용 중이다.

 

 

M1911 자동권총. 콜트가 제작하고 0.45인치 구경의 탄환을 사용하여 흔히 ‘콜트 45(Colt .45)’로 불린다.<출처: (cc) Sam Lisker>

M1911 자동권총. 콜트가 제작하고 0.45인치 구경의 탄환을 사용하여 흔히 ‘콜트 45(Colt .45)’로 불린다.
<출처: (cc) Sam Lisker>

 

리볼버 이후 새롭게 등장한 스타일의 권총


군경용으로 오래 사용되던 권총은 서부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리볼버(revolver)였다. 이 스타일은 조작이 간편하고 신뢰성이 좋아 현재 우리나라 일선 경찰들도 사용하고 있지만 단점 또한 많다. 리볼버의 가장 특징이 회전식 원형 탄창인데 대부분의 모델이 6발 정도의 탄환을 장전할 수 있어 장탄량이 적은 편이다. 더불어 탄환을 재장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점은 치열한 교전 중에 특히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여 19세기말 들어 자동권총(automatic pistol) 등장하였다.

 

자동권총은 탄창을 삽입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탄약의 교환이 용이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대용량의 탄창도 사용할 수 있다. 더불어 방아쇠를 당겨 탄환을 발사함과 동시에 가스 압력으로 노리쇠를 후퇴시켜 탄피를 배출하고 스프링의 반동으로 노리쇠가 원위치할 때 탄창에 적재된 탄환을 약실에 밀어 넣는 사격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총기의 구조가 리볼버에 비해 복잡하지만 신속한 연사가 가능하다.

 

자동권총에는 방아쇠를 당길 때만 단발로 사격이 이루어지는 반자동식과 연속적으로 탄환이 발사되는 완전자동식이 있는데, 완전자동식은 이후 기관단총의 탄생을 불러왔다. 이 때문에 독일에서는 기관단총을 기관권총(MP-Maschinenpistole)이라 표기할 정도다. 1893년 등장한 보어하르트(Borchardt) C-93을 최초의 자동권총으로 보는데 이 모델은 루거(luger) 08의 원형이 되기도 하였다. 후속하여 등장한 마우저(Mauser) C96같은 모델은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기도 하였지만 자동권총은 20세기에 들어서 급격히 발전하였다.

 

마우저 C96(Mauser C96). 대량으로 사용된 첫 자동권총이다.1896년에 등장하여 1백만정 이상 생산되었다.  <출처: (cc) M62 at Wikimedia.org>

마우저 C96(Mauser C96). 대량으로 사용된 첫 자동권총이다.
1896년에 등장하여 1백만정 이상 생산되었다.
<출처: (cc) M62 at Wikimedia.org>

루거 08(Luger 08). 1908년 독일군이 제식화했다. 최초의 자동권총인 보어하르트(Borchardt) C-93과 작동방식이 유사하다.<출처: Photo by AdamsGuns.com>

루거 08(Luger 08). 1908년 독일군이 제식화했다.
최초의 자동권총인 보어하르트(Borchardt) C-93과 작동방식이 유사하다.
<출처: Photo by AdamsGuns.com>

 

전설적 인물, 브라우닝이 설계


자동권총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자 수많은 총기 제작사들이 개발에 뛰어들었다. 마침 1903년 미 육군 당국이 새롭게 채택하여 사용할 권총을 공모하자 수많은 국내외의 총기 제작사들이 경쟁에 참여하였다. 이때 콜트(Colt)사는 흔히 '자동화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존 브라우닝(John Browning)이 설계한 M1900을 내놓았다.

 

 

 

콜트 M1900. M1911의 원형에 해당하는 권총이다.0.38인치/9mm 권총탄을 채택했다. 혁신적인 구조를 가졌으나탄환의 위력 부족이 지적되어 군용으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출처: Photo by AdamsGuns.com>

콜트 M1900. M1911의 원형에 해당하는 권총이다.
0.38인치/9mm 권총탄을 채택했다. 혁신적인 구조를 가졌으나
탄환의 위력 부족이 지적되어 군용으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출처: Photo by AdamsGuns.com>

 

쇼트 리코일 방식의 이 모델은 슬라이드를 도입한 최초의 권총 중 하나다. 지금 대다수의 권총들이 채택하고 있을 정도로 혁신적인 구조였다. 그러나 처음 채택하였던 .38 ACP탄(0.38인치, 즉 9mm 구경 권총탄)의 위력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낀 군 당국의 거부로 채택이 불발되었다. 그러자 콜트는 강력한 .45 ACP탄(0.45인치, 즉 11.43mm 구경 권총탄)을 사용하도록 하여 위력을 높이고 성능을 대폭 개량한 모델을 선보였는데 이것이 바로 총기 역사의 전설이 되어버린 M1911이다. 당국의 호평을 받고 공식 권총으로 선택된 M1911은 즉시 전군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제1, 2차 대전은 물론 한국전쟁, 월남전쟁 등을 거치며 베레타의 M9권총이 채택된 1985년까지 일선에서 맹활약하였다. 따라서 M2 중기관총보다 육군의 제식무기로는 활동 기간이 짧지만, 9mm탄을 사용하는 M9의 화력이 미흡하다고 여기는 해병대 특수전 사령부 소속 부대, FBI같은 경찰조직들은 아직도 M1911을 사용하고 있다. 더불어 M1911은 민간에도 대량 유포되었는데 지금까지 약 200만정 정도가 생산된 것으로 알려졌고 여러 회사에서 라이선스 생산하였다.

 

 

 

분해된 M1911A1의 모습. 구조가 간단명료함을 알 수 있다.

분해된 M1911A1의 모습. 구조가 간단명료함을 알 수 있다.

 

전쟁의 적국에서도 인정한 성능


M1911의 명성이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2차 대전 당시 독일이 이를 사용했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지금도 세계적인 방산 업체인 노르웨이의 콩스버그 그루펜(Kongsberg Gruppen)이 전쟁 전에 M1911을 라이센스 생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0년 독일이 노르웨이를 점령한 후, 소량이기는 하였지만 기존 제작 시설을 이용하여 독일군 용도로 당시 적국인 미국의 M1911을 생산하여 공급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새롭게 독일육군병기국(Waffenamt)의 주관 하에 제작하였다는 표식과 더불어 미국 콜트사가 원특허권자라는 문구는 그대로 새겨 넣어, 아무리 전시라 해도 특허권이 보호된다는 전통을 지켜(?) 주었다. 오래 동안 존재하다 보니 M1911은 이처럼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따라다닌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다른 무기들과 비교한다면 M1911의 위대함이 어떠한지 더욱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이처럼 M1911이 아직까지도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의 개량이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지 않았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무기로써 권총이라는 물건은 그 용도가 극히 제한적이므로 어느 정도 이상의 성능만 달성하면 충분히 사용 가치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살상 도구인 무기가 성능이 좋다는 것을 굳이 반길만한 사항은 아니라 할 수 있다.

 

 

 

M1911은 1924년 약간 변경되어 M1911A1이 되었다.내부 구조의 변화는 거의 없고 실전 경험을 반영, 외관을 약간 개선한 정도이다.

M1911은 1924년 약간 변경되어 M1911A1이 되었다.
내부 구조의 변화는 거의 없고 실전 경험을 반영, 외관을 약간 개선한 정도이다.

 

막을 내리지 않은 이야기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그동안 많은 기술의 발전이 있어, M1911이 최고의 권총이라는 명성을 계속하여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M1911이 뛰어난 권총이기는 하지만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후 등장한 유명한 권총들은 이러한 단점을 개선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선 M1911이 장탄수가 7발(약실에 1발 장전시 8발)로 적다는 점이 문제였는데 이는 M1911의 고유 단점이라기보다는 대구경탄을 사용하는 권총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였다.

 

더불어 구조를 단순화하기 위해 채택한 싱글액션 방식도 종종 안정성에 많은 문제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위급시 빠른 사격을 위해서는 해머를 코킹한 상태로 안전장치를 걸어야 했는데 이는 종종 오발사고를 부르는 원인이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초탄을 발사할 때 해머를 코킹하거나 슬라이드를 당겨줘야 하므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리고 너무 강력하다는 점은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M1911은 경찰들이 치안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위력이 과하다 할 정도로 살상력이 크다. 대구경탄을 사용하므로 반동이 크고 이 때문에 무게가 여타 권총에 비해 무거운 편이어서 휴대와 조준이 힘들고 정확한 연사가 힘들다. 따라서 M1911을 능숙하게 사용하려면 사전에 연습이 많이 필요하다.

 

해머가 코킹된 상태의 M1911. M1911은 싱글액션 방식으로 해머가 코킹된 상태가 아니라면 발사가 안된다.  니켈 도금된 경기용 모델이다.<출처: (cc) RegBarc at wikimedia.org>

해머가 코킹된 상태의 M1911. M1911은 싱글액션 방식으로
해머가 코킹된 상태가 아니라면 발사가 안된다.
니켈 도금된 경기용 모델이다.
<출처: (cc) RegBarc at wikimedia.org>

슬라이드가 후퇴 고정된 상태의 M1911장전된 탄환을 모두 발사하면 자동으로 슬라이드가 후퇴 고정된다. 라이선스 생산된 민간용 커스텀 모델이다.

슬라이드가 후퇴 고정된 상태의 M1911
장전된 탄환을 모두 발사하면 자동으로 슬라이드가 후퇴 고정된다.
라이선스 생산된 민간용 커스텀 모델이다.

 

이처럼 장점 속에 숨어 있던 여러 단점들로 인하여 서서히 최고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있지만 탄생 이후 70여 년이 넘게 미군의 제식화기였고 아직도 일부에서 사용 중이라는 자체만으로도 M1911이 대단한 권총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콜렉터들의 수집품으로써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오랫동안 곳곳에서 사용되지 않을까 추측이 된다. 과연 그 끝이 어디일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1. M1911A1 제원
    중량 1,105g / 전장 210mm / 구경 11.43 mm (0.45인치) / 탄약 .45 ACP / 작동방식 반동작동식, 클로우즈 볼트 / 유효사거리 62 m / 장탄수 7(탄창)+1(약실).

톰슨 기관단총

제1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참호전은 필연적으로 백병전을 불러왔다. 대개 백병전이라면 총알이 떨어져서 벌이는 최후의 격전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당시에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 가장 큰 이유는 보병들이 휴대했던 소총이 볼트액션식이어서였다. 이 방식은 다음 사격을 위해 노리쇠를 일일이 당겨야했는데 참호 내에서 벌어지는 근접전에서는 이런 시간조차도 없었다. 따라서 총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창이나 몽둥이로 사용하는 일이 수시로 반복되고는 하였다.


결국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근접전에서 신속히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 결과 기관단총이 등장하였다. 기관단총을 가진 부대와 그렇지 않은 부대와의 근접전 결과는 뻔하였다. 전쟁 후반기에 참전한 미국도 기관단총을 필요로 하였지만 그전에 전쟁이 종결되었다. 미국은 총에 관해서는 탁월한 기술력을 가진 대표적인 나라지만 생각만큼 새로운 형태의 총을 만들기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미국 병기국에서 근무하였던 존 톰슨(존 톰프슨, John T. Thompson) 예비역 준장은 전쟁 이전부터 기관단총의 필요성을 느끼던 인물이었다. 그는 전선의 상황을 접하고 1917년부터 기관단총 제작에 들어갔는데 종전 후인 1919년에서야 겨우 완성을 볼 수 있었다. 이 총은 비록 때를 놓쳐 뒤늦게 등장하였지만 다음 전쟁에서 미군 병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기관단총으로 명성을 얻었다. 바로 톰슨 기관단총(톰프슨 기관단총, Thompson Submachine Gun 이하 톰슨)이다.

 

 

1928년형 톰슨 기관단총. 알카트라즈 박물관 소장품.

1928년형 톰슨 기관단총. 알카트라즈 박물관 소장품.

 

새롭게 개척한 역사


최초가 무엇이냐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지만 기능상으로 처음 구현된 기관단총이 이탈리아의 빌라-페로사(Villar-Perosa),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기관단총이 독일 MP18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 더해 기관단총(SMG-SubMachine Gun)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이 바로 톰슨인데, 그만큼 톰슨은 기관단총 역사와 관련하여 결코 떼어놓을 수 없다. 그리고 이처럼 초기에 탄생하였음에도 20세기 중·후반까지 애용된 걸작이기도 하다.


톰슨도 여타 기관단총처럼 권총탄을 사용하였는데 연사력을 중시한 휴대용 무기다 보니 기술적으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 현재도 사용 중인 콜트(Colt)사의 M1911 권총용 45ACP탄(11.43×23mm)을 이용하였는데 존 톰슨은 이 총탄의 개발에도 관여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효사거리가 100~150m에 불과하였고 50m가 넘으면 명중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한마디로 얼굴을 알아 볼 수 있는 상대에게나 사용할 수 있었던 무기였다.


기관단총은 작동 원리상 기관총과 같았는데 존 톰슨은 당시 기관총의 고질적 문제인 엄청난 무게를 줄이는데 고심하였다. 당시 자동화기들은 크게 리코일, 가스작동, 블로우백(Blowback)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그는 구조가 간단한 블로우백이 소형 자동화기에 적합하다고 결론짓고 그중에서도 당시 새롭게 등장한 블리쉬 락(Blish Lock) 기술을 접목한 블로우백 방식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한마디로 실전에서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설계된 새로운 형태의 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슨은 탄창을 제외하고도 무게가 5kg 가까이나 되었다. 여담으로 톰슨의 고질적인 단점 중 하나가 기관단총답지 않은 무거운 무게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톰슨과 더불어 전선을 누빈 독일의 MP40 기관단총이나 소련의 PPSh-41(따발총)이 4kg 이하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톰슨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군납에서 좌절을 겪다


이렇게 탄생한 최초의 톰슨이 단 40정만 시험 생산된 M1919였다. 처음 군부대에서 시범 사격을 보였을 때 분당 1,500발의 엄청난 발사속도를 자랑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였지만 정작 전쟁을 막 끝낸 군 당국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우선 전쟁 막바지에 참전한 미군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참호전 경험이 짧아 기관단총에 대해 그다지 목말라하지 않았고 거기에다가 납품가가 너무 비쌌다.


아무리 단순화 하였어도 볼트액션 소총에 비해 구조가 복잡하였고 쇠를 일일이 깎아서 만든 제작 공정은 어쩔 수 없이 가격의 상승을 가져와 일선 보병들에게 충분히 공급되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결국 자칫하면 톰슨은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흐지부지 사라질 수도 있는 운명이었다. 오토 오디언스(Auto-Ordnance Company)라는 제작사까지 차렸던 존 톰슨은 군납이 좌절되자 민간 판매를 고려하였다.


1921년 M1919를 개량한 M1921을 민간에 판매하였는데 엉뚱하게도 갱들이 톰슨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마피아 같은 갱들이 구입하여 범죄 행위에 사용하면서 톰슨이 명성을 얻게 된 것이었다. 이전에 갱들은 마치 서부개척 시대처럼 권총이나 산탄총 같은 고전적인 무기를 주로 사용하였다. 바로 이때 엄청난 속도로 난사할 수 있는 톰슨의 등장은 한마디로 혁명이었다.

 

한 손에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은행강도 존 딜린저.

한 손에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은행강도 존 딜린저.

‘공공의 적’으로 지정된 유명한 범죄자이다.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FBI 국장 존 에드가 후버.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FBI 국장 존 에드가 후버.

강력 범죄에 대항하는 경찰에게도 톰슨 기관단총은 좋은 무기였다.

 

씁쓸하게 얻은 유명세


갱들 간에 싸움이 벌어진다면 대부분 근접전이므로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총탄을 날리는 쪽이 절대 유리하였다. 1927년 알 카포네가 이끄는 갱단이 톰슨을 앞세워 상대 조직을 무참히 제거하면서 유명세가 하늘을 찔렀다. 더불어 갱들은 톰슨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자체 개량에 나섰는데 대표적인 것이 연사 시 반동을 줄여주기 위해 장착한 컴펜세이터(Compensator)였다.


드럼탄창이 특징적인 M1921은 이후 1920~1930년대 갱들을 상징하는 모습이 되었고 총소리가 타자기 소리와 비슷하다며 시카고 타자기(Chicago Typewriter) 또는 제작자 이름을 따서 토미건(Tommy Gun)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후 톰슨하면 제일 먼저 갱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대부’같은 영화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당연 소품이 되기도 하였다.


당연히 이런 사실을 개발자 존 톰슨도 알게 되었고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에 몹시 분노하였다고 전한다. 나치를 격퇴하려는 일념에서 AK-47이라는 기념비적 총을 만들어 낸 미하일 칼라시니코프가 정작 테러 단체들이 AK-47을 사용하는 모습에 실망하였던 것과 같았다. 어쨌든 이처럼 민간에도 판매하고 대외 수출에도 나섰지만 가장 커다란 시장인 군 당국에 납품 시도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드럼탄창이 인상적인 1928년형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영국군(1940년).

드럼탄창이 인상적인 1928년형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영국군(1940년).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처칠 영국 수상(1940년).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처칠 영국 수상(1940년).

 

진화 그리고 기회


1923년에 새로운 45구경 레밍턴-톰슨 총탄을 사용하여 화력과 사거리를 늘리고 멜빵, 대검을 장착할 수 있도록 개량된 모델을 육군에 제안하였지만 이번에도 소총을 선호하던 보수적인 군부의 결정으로 제식화기가 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명품은 어디 가도 빛이 나듯이 드디어 1928년에 개량된 M1928모델 일부 물량이 1930년 미 해군과 해병대가 정식으로 채용하면서 본격적인 신화가 시작되었다.


원래부터 무거운 것이 단점이었던 톰슨은 M1928부터 오히려 무게가 더 늘었는데 그 이유는 발사 속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연사가 기관단총의 생명력이기는 하지만 약간 속도를 줄였다하더라도 실전에서 크게 문제가 없는 반면 정확도와 조작성이 향상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노리쇠 뭉치의 왕복거리를 늘이거나 무게를 무겁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톰슨은 무게를 늘이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국의 중립은 파기 되었고 참전이 개시되었다. 그런데 톰슨은 미국의 참전 이전에 영국, 중국 등에 제공을 목적으로 이미 대량 생산되고 있던 중이었다. 이처럼 명성을 얻고 있었던 톰슨을 미군이 대량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였다. 이때 부여 받은 정식 군용 제식부호가 M1이었는데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이 모델부터 작동방식이 단순 블로우백 방식으로 바뀌었다.


더불어 일반 탄창만 사용할 수 있는 등의 일부 개량이 이루어졌는데 그 이유는 대량 생산과 제작비 절감을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전쟁에 사용되기 위한 가장 적합한 형태로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1943년부터 개량형인 M1A1이 사용되었는데 교전 중 사진에 찍힌 대부분의 톰슨이 바로 이것이다. M1A1 모델은 톰슨의 최종 형이었고 이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도 사용되었다.

 

 

톰슨 M1A1. 대량 생산에 적합하도록 변경된 형태이다.

톰슨 M1A1. 대량 생산에 적합하도록 변경된 형태이다.

 

시대상을 대변한 기관단총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슨은 주력 화기가 아니었다. 제2차 대전 당시 미군의 표준화기는 M1 개런드였고 이와 더불어 M1 카빈이 보조 화기로 사용되었다. 아무리 연사력이 좋다고 하여도 사거리가 짧고 파괴력이 약한 기관단총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톰슨은 근접전에 특화된 무기로만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대장이나 분대장 같은 일선 지휘관이나 정찰대 같이 경무장이 필요한 사병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오토 오디언스에서 제작되던 톰슨은 전쟁이 발발하며 공급 물량이 딸리자 콜트를 비롯한 여러 회사에서 라이선스 생산되었다. 이들 제작사를 통하여 총 170만정이 생산되었는데 미군의 주력 화기였던 M1 개런드 소총이 약 625만정, 제2차 대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기관단총인 독일의 MP40의 생산량이 약 100만정 생산되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결코 적지 않은 수량임을 알 수 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 당시 톰슨 기관단총을 사용하는 미 해병대원.

1945년 오키나와 전투 당시 톰슨 기관단총을 사용하는 미 해병대원.

톰슨 기관단총의 광고 전단. ‘범죄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총’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톰슨 기관단총의 광고 전단. ‘범죄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총’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미군 외에도 여러 연합군에 공여되었는데 이때 소련이나 중국에 흘러들어간 일부 물량을 한국전쟁 당시에 공산군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야간 전투 시에 같은 총소리로 말미암아 피아식별에서 문제가 생기자 미군은 톰슨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M3 그리스건(M3, "Grease Gun")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제2차 대전 말기에 등장한 M3 그리스건은 생산비나 제작 시간 등에서 톰슨보다 유리하여 점진적으로 대체되던 중이었다.


톰슨은 처음부터 전선의 경험과 필요에 의해 탄생하였고 거대한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맹활약하였던 미국의 대표적인 무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암울한 기운이 엄습하던 1920년대 미국의 이면사를 상징하는 흉기이기도 했다. 전선에서는 적과 싸우기 위해서 반면 도시에서는 대치하고 있던 경찰과 갱들이 함께 사용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였다. 어처구니없던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1. 제원 (M1A1형)
    중량 4.8kg(탄창 제외) / 전장 810mm / 총열 267mm / 탄약 .45 ACP / 작동방식 지연식 블로우백.

우지 기관단총

 

우지 기관단총(Uzi Submachine gun).

 

1981년 3월 30일, 워싱턴DC의 힐튼 호텔 앞에서 총성이 울렸다. 존 힝클리(John Hinckley)의 RG-14 리볼버에서 발사된 총탄이 날아간 곳에는 당시 초강대국 미국의 최고 권력자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이 서 있었다. 기자 틈에 숨어있던 저격범은 대통령이 나타나자 앞으로 달려 나와 여섯 발의 총탄을 연이어 발사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레이건의 심장 12cm 옆을 통과하였고 레이건은 쓰러졌다.

미국 대통령 경호원이 우지 기관단총을…

더불어 대통령을 가까이서 수행하던 백악관 대변인, 경호원, 경찰 등도 피격되었는데 다행히도 신속한 의료 조치 덕분에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즉각적인 대응으로 범인은 체포되었다. 이후 정신병자로 밝혀진 저격범은 무죄선고를 받는 대신 보호소로 보내졌지만 미국은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취임한지 불과 69일 밖에 안 된 새 대통령을 잃을 뻔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은 하나의 총을 전 세계인들에게 뚜렷이 각인시켜 주었다. 범인이 사용한 RG-14도 좋은 가십거리였지만, 그보다도 총성이 울리는 순간 대통령 경호원들이 옷 속에서 꺼내 들은 총이 더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바로 우지(Uzi) 기관단총이었는데, 미국 대통령 경호에 사용된다는 것은 그만큼 성능이 뛰어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우지 기관단총은 총기의 강국인 미국에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 저격 사건 당시 경호원이 꺼내 들은 우지 기관단총.

1951년에 개발? 의외로 오랜 역사

개발 초기인 1958년 우지 기관단총을 휴대하고 행진하는 이스라엘군.

 

‘미국 총기 협회(NRA)’의 정치적 영향력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미국만큼 총기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나라도 드물다. 당연히 총기 역사에 뚜렷이 기록된 수많은 유명 총들이 만들어졌는데 그렇다 보니 미국의 관이나 군에서 미제 이외의 총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조차 어려웠다. 그럼에도 대통령을 경호하는 최정예 요원들이 우지 기관단총을 사용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나자 이 총에 대한 관심이 새삼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미국 대통령의 경호에 사용된다면 막연하게 최신식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지 기관단총은 1951년에 개발된 총이었다. 따라서 사건 당시에 이미 탄생한지 30년이 지난 구닥다리여서 저격 사건과 관련 없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일부 범죄 조직들까지 사용하고 있을 만큼 많이 퍼져 있던 기관단총이었다. 사실 총기는 애당초에 잘 만들어졌다면 상당히 오래 동안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는 대표적 공산품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총은 기본 기능에만 충실하면 된다. 따라서 M2 중기관총이나 M1911 권총 같은 경우는 탄생한지 한 세기가 넘도록 애용되고 있는 것이다. 우지 기관단총이 이스라엘의 IMI와 라이선스를 받은 여러 총기 회사에서 현재도 양산 중이라는 사실만 생각한다면 성능에 대해서는 자타가 공인할 만큼 뛰어나다는 뜻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 정도의 성능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는 의미다.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탄생한 총

우지 기관단총은 이스라엘의 현역 군인이던 개발자 우지엘 갈(Uziel Gal)의 이름을 딴 것이다. 창군 당시 이스라엘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1948년 제작한 Cz25 기관단총을 수입하여 사용하였는데 얼마 가지 않아 체코슬로바키아가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고 친 아랍주의 노선을 걷자 완제품 및 부품 조달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독자 개발에 나섰고 이때 갈이 제안한 모델이 경쟁에서 채택되었다.

우지를 개발한 우지엘 갈(Uziel Gal, 1923-2002).

 

갈은 이스라엘 독립 운동 당시에 비밀리에 총기 조달 업무들을 담당하여 식민지 정부에 의해 투옥 당하기도 하였을 만큼 총기에 해박한 인물이었다. 마침 그는 1948년의 아랍-이스라엘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Cz25 기관단총을 개량하는 작업을 벌이던 중이었다. Cz25 의 오픈 볼트, 블로우백 방식은 연사속도를 높일 수 있지만 충격에 약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툭하면 오발사고가 일어나 총을 휴대한 병사들이 사상 당하기 일쑤였다.

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1951년 안정성이 강화된 새로운 기관단총을 만들어 내었다. 우지 기관단총은 대용량 탄창을 손잡이 끼워 사용하는데 사실 이런 구조 때문에 권총과 모양이 비슷하다. 하지만 유효 사거리가 200m여서 여타 기관단총처럼 근접전에서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후 등장한 미니 우지(Mini Uzi)나 마이크로 우지(Micro Uzi)같은 경우는 외관만 놓고 본다면 조금 큰 권총이라 할 만할 정도다.

그러나 보기와 달리 탄창을 제외한 무게가 3.5kg이어서 가볍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접이식 개머리를 채용하여 이를 접었을 때 총의 길이가 47cm에 불과해서 휴대가 상당히 편리하여 기갑병이나 공수부대원에게 적합하였다. 더구나 분당 600발의 뛰어난 연사력은 근접전에서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였다. 대부분의 우지 기관단총은 원래 9x19mm 파라블럼탄을 사용하지만 다른 종류의 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된 모델들도 있다.

브라질 해군 특수부대원들이 우지 기관단총을 사용하는 모습.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영화 [레지던트이블 3-인류의 멸망](2007)의 포스터. 주인공이 우지기관단총을 들고있다.

 

이후 수 차례 벌어진 중동전에서 명성을 떨쳐 우지 기관단총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오픈 볼트 임에도 명중률이 양호하고 생산이 편리한데다 값싸고 잔 고장이 없다는 강점 덕분에 지금까지 약 1,000만 정 이상이 생산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서방의 대표적인 돌격소총인 M16의 생산량이 800만 정 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은 곳까지 우지 기관단총이 퍼졌다.

미국 대통령 경호대가 사용할 만큼 우지 기관단총이 가진 장점은 테러리스트들이 선호하는 무기가 되어버린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커다란 소총과 달리 감추기 쉽지만 권총과 비교가 되는 않는 강력한 화력은 실내 같은 근접전에 가장 적합한 무기로 인식되면서 비행기 납치나 인질극 같은 대형 테러 범죄에 자주 이용되었다. 그렇다 보니 영화 속에서 나오는 총격전의 단골 소품으로 등장할 정도다.

 

이 때문에 종종 아랍계 테러범들이 유태인들을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기도 하였다. 근래에는 군경 특수부대에서 클로즈드 볼트 방식을 채용하여 명중률을 높인 MP5를 많이 사용하는 관계로 우지 기관단총의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은 그만큼 우지 기관단총이 탄생한지 오래된 구형 기관단총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엄청난 생산량에서 유추 할 수 있듯이 세계 곳곳에서 앞으로도 오랜 기간 우지 기관단총이 사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제원
탄약 9x19mm 파라블럼 외 / 작동방식 단순 블로우백, 오픈 볼트 / 총열 260mm / 전장 650mm / 중량 3.7kg / 유효사거리 200m

 

리볼버

리볼버는 실린더의 회전을 이용한 연발 권총이다.
사진은 대한민국 경찰의 공식 권총이던 S&W 모델10 리볼버.

 

‘총’이라는 놀라운 물건이 등장하고 나서 무기의 주류는 바뀌었다. 그러나 당시 총이라는 것은 장약을 넣은 다음 탄환을 넣고 발사하는 전장식 화기여서 재장전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 장전하는 동안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면 한 번에 여러 발을 발사할 수 있는 총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처음 등장한 해결책이 총열을 늘리는 것이었다. 총열이 2개 이상으로 늘어나면 2번 이상 장전하지 않고도 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리하여 한꺼번에 여러 발의 총알을 쏘는 덕풋(duck foot, 오리발) 피스톨과 같은 물건이 등장하기도 했다.

 

장전 없이 여러 발을 사격할 수 있는 총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리볼버가 탄생했다.
사진은 덕풋 피스톨(위)과 페퍼박스 권총(아래)이다.

돌려야 산다? ? 돌려서 계속 쏘자는 발상

한편 탄환과 장약을 미리 장전해놓았다가 필요에 따라 돌려가며 쏜다는 개념, 즉 리볼버도 이런 개발의 와중에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페퍼박스’ 총이었다. 페퍼박스 총은 총열 자체가 회전하면서 탄환을 발사하는 방식으로 리볼버의 효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 페퍼박스 총은 초기에는 방아쇠를 발사한 이후에 손으로 총열을 돌려야만 했다. 그러던 것이 장전쇠를 돌리면 총열이 돌아가는 싱글액션 기구가 발명되고, 방아쇠를 당기면 총열도 같이 돌아가는 더블액션 기구까지 발명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총열을 1개로 줄여서 무게를 줄이고, 장약과 탄환이 장전된 약실을 원통형으로 만들어 회전시키는 설계가 등장했다. 이것이 바로 과도기형 리볼버(Transition Revolver)로 리볼버의 직접적인 조상에 해당한다.

그러나 실전에서 쓸 만한 리볼버는 19세기가 되어서야 등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새뮤얼 콜트가 1836년 내놓은 콜트 패터슨 리볼버였다. 콜트 패터슨 리볼버는 퍼커션 캡, 즉 뇌관방식을 채용한 권총으로 최초에는 5연발로 발매되었다. 아직은 탄피가 개발되기 전의 시대인지라 여전히 전장식으로, 원통형 약실에 탄환, 장약, 뇌관을 미리 장전해놓고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즉 원통형 약실 자체가 탄피로서 역할을 한 것으로 재장전을 위해서는 총의 일부분을 분해해야만 했다. 콜트 패터슨 리볼버의 또 다른 특징은 방아쇠가 총몸에 숨겨져 있다가 장전되면 발사준비가 되는 구조라는 점이다. 드디어 쓸 만한 연발총기가 등장했지만 콜트 패터슨은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콜트는 약 4년의 기간 동안 5천 정도 못 되는 리볼버 권총과 소총 등을 생산하고는 도산해버렸다.

콜트 패터슨 리볼버(사진 위)의 등장으로 리볼버의 시대를 개막했고,
콜트 워커 리볼버(사진 아래)는 리볼버를 군용 총기로 정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콜트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했다. 1844년 텍사스 레인저 대원 14명이 80여 명의 코만치 인디언과 교전을 하여 그 절반을 사살하거나 부상시켰다. 바로 이때 레인저 대원들이 사용하던 것이 바로 콜트 패터슨 리볼버였다. 이를 계기로 콜트 리볼버는 다시 부활했다. 특히 텍사스 레인저 출신의 새뮤얼 워커 대위의 의뢰에 따라 미 육군을 위한 새로운 리볼버가 개발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워커 모델 1847 콜트 리볼버(약칭 ‘콜트 워커’)였다.

리볼버의 시대가 열리다

콜트 패터슨의 0.36인치 구경 탄환 대신에 콜트 워커는 0.44인치 탄환을 6발 장탄하여 파괴력을 높였고, 총열을 9인치로 늘려 명중률도 향상시켰다. 콜트 워커 리볼버는 1847년 멕시코 전쟁에서 커다란 활약을 한 이후, 여러 가지 변형들이 미군에 의해 채용되었다. 또한 서부개척이 시작되면서 많은 민간인들이 콜트의 리볼버를 사갔다. 콜트의 명성은 유럽에도 알려져 런던에 콜트사에 공장이 생기기도 하는 등 리볼버의 전성시대를 콜트가 열어갔다.

이렇게 연발총기로서 놀라운 성공을 거둔 리볼버는 전술까지도 바꾸어놓았다. 전투의 첨병인 기병대는 세이버(기병도)와 기병총을 사용했지만 총기의 화력은 보잘것없었다. 오죽하면 남북전쟁의 명장 로버트 리 장군의 아버지이자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헨리 리 장군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기병대의 화력은 기껏해야 순진한 수준이다.” 그러나 연발 발사가 가능한 리볼버가 기병대의 총기로 채용되면서, “순진”했던 화력은 “잔인”할 정도로 향상되었다.

 

리볼버의 등장으로 기병대는 세이버에 의존한 단순한 돌격을 탈피하여
유효한 화력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일례가 미스켈 농장 총격전이다. 1863년 4월 남군의 존 모스비 대위가 이끌던 69명의 레인저가 150명 병력의 북군 기병대에게 매복을 당했다. 세이버를 휘두르며 과감하게 돌진하던 북군 기병대는 말에 타고 있던 남군 레인저가 쏟아내는 리볼버 권총탄 세례에 무릎을 꿇었다. 교전결과 북군은 9명 전사, 15명 부상에 82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남군은 전사 1명, 부상 3명에 그쳤을 뿐이다. 북군은 세이버 돌진이라는 구식 전술에 의존했던 반면, 남군 레인저는 리볼버 2정을 항시 휴대하면서 마상 사격을 통하여 화력과 기동성을 확보하면서 절대 다수의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다

한편 리볼버는 탄피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더욱 현실적인 총기로 거듭났다. 1857년 스미스 앤 웨슨(Smith & Wesson 이하 S&W)이 탄피를 사용하는 최초의 리볼버인 모델1을 발매했고, 1873년에는 드디어 콜트의 탄피형 리볼버인 싱글액션아미 모델이 나오면서 뇌관식 리볼버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이렇게 현대적인 리볼버가 등장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었다. 바로 어떻게 장전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탄피형 리볼버 시대를 개막한 스미스 앤 웨슨 사의 모델1 리볼버.

리볼버의 전설이된 콜드 싱글액션아미(Colt Single Action Army)
<출처: (cc) Hmaag at Wikimedia.org>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던 콜트 싱글액션아미의 경우에는 고정 실린더방식을 채용했다. 아예 생산할 때부터 실린더, 즉 원통형 약실을 총몸에 고정시켜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고정실린더 방식은 45구경탄 같은 강력한 탄환을 발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탄환을 한 발씩 넣어야만 하기에 재장전이 엄청 느리다는 단점이 있었다.

한편 실린더가 고정되지 않는 설계방식의 리볼버도 등장했다. 총기의 가운데를 꺾어서 실린더를 개방하는 중절식(Top Break) 리볼버가 등장했다. 중절식 리볼버는 고정실린더 방식에 비하여 매우 빠르게 장전할 수 있었다. 특히 스피드로더나 문클립을 사용하면 재장전에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다만 총몸이 꺾이는 설계방식이라서 구조적으로 취약했기에 강력한 탄환을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대표적인 중절식 리볼버로는 영국의 웨블리 리볼버와 S&W 모델3 리볼버를 들 수 있다. 특히 S&W 모델3는 전설의 총잡이 와이어트 어프가 OK목장의 결투에서 사용했던 총으로 유명하다.

리볼버의 재장전 시간을 줄이기 위하여 중절식 리볼버(사진 왼쪽)가 등장했고,
이후 스윙아웃 실린더 리볼버(사진 오른쪽)가 주류가 되었다.

 

리볼버를 장전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해답은 바로 스윙아웃(Swing-out) 실린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실린더를 측면으로 열리게 하여 빠른 재장전이 가능했고, 힌지를 사용하여 총몸의 강성을 유지함으로써 강력한 탄환도 발사할 수 있어 중절식 리볼버의 단점을 극복하였다. 그리하여 콜트사의 M1889 리볼버를 기점으로 이후의 수많은 리볼버들이 스윙아웃 실린더를 채용하였으며, 현재까지도 리볼버 장전방식의 표준이 되고 있다. 이렇게 불과 4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리볼버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현대적인 총기로 성장했다.

리볼버의 약실이 손쉽게 개방되면서 문클립(왼쪽)과
스피드로더(오른쪽)를 사용하여 빠른 재장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리볼버 vs 자동권총

이렇게 연발권총의 시대를 개막한 리볼버였지만 20세기 초에 이르면서 강력한 적수를 만났다. 바로 자동권총이었다. 발사 반동 등 여러 가지 원리로 작동하는 자동권총은 초기에는 신뢰성이 문제가 있었지만 진화를 거듭했다. 한편 리볼버는 더블액션과 스윙아웃 실린더의 채용 이후에는 뚜렷한 발전이 없었다. .45 콜트나 .38 스페셜과 같은 탄환들이 사용되면서 살상력이 높아졌고, 20세기 초기의 방탄조끼를 격파하기 위하여 1930년대에 357 매그넘 탄환이 등장한 정도였다. 결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리볼버는 M1911A 거버먼트 모델이나 P-38 발터, P-35 하이파워 등 자동권총에게 군용권총의 일선을 빼앗기게 되었다.

1950년대부터는 44매그넘과 같은 강력한 리볼버가 등장하여 인기를 끌기도 했다.
사진은 영화 [더티 해리]의 포스터.

 

물론 S&W 모델10 “밀리터리 & 폴리스”와 같은 명총은 오랜 기간 군용 및 경찰총기로서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또한 소위 스너비(Snubby)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소형 리볼버들이 사복경찰관이나 스파이들에게 애용되기도 했다. 한편 1955년에는 S&W에서 44 매그넘 탄환을 사용하는 모델 29를 발매했으며, 이것이 영화 [더티 해리 Dirty Harry]에서 캘러한 경위가 사용하던 44 매그넘 리볼버였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로 리볼버는 미국이나 유럽 등 경찰시장에서도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1986년 발생한 마이애미 총격전으로 인하여 은행강도 2명에서 FBI요원 8명이 압도당하고 2명의 사망자까지 내게 되자, 리볼버는 경찰용 총기로서 입지를 크게 상실했다. 리볼버는 보통 6발의 장탄수에 불과했지만, 자동권총은 복열(double column)탄창을 채용하여 한 탄창에 15발 정도 휴대가 가능해져 그 인기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결국 콜트사는 1999년 이후로는 수집가들이 찾는 ‘전설의 명기’ 콜트 싱글액션아미를 제외하고는 리볼버를 생산하지 않게 되었고, 현재는 미국의 S&W, 스텀루거, 브라질의 토러스 등이 대표적인 리볼버 제작사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리볼버가 설 자리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자동권총이 대체할 수 없는 리볼버만의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리볼버는 탄환을 장전한 상태로 오랜 기간 놓아두어도 된다. 자동권총의 경우 장전한 상태로 발사하지 않고 오랜 기간 놓아두면 탄창의 스프링 압력이 줄어들어 차탄 공급이 안 되는 등 작동상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리볼버는 약실에 탄환을 넣어둔 채로 몇 개월이 지나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더블액션의 묵직한 방아쇠 압력으로 인하여 오발의 위험도 적은 편이다. 공포탄을 발사하면 다음 탄환 장전이 안 될 수도 있는 자동권총과는 달리, 리볼버는 탄환의 문제로 발사가 되지 않더라도 방아쇠만 당기면 다음 탄환을 발사할 수 있어 언제나 믿고 사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실제로는 총기를 발사할 일이 많지 않은 이들에게 리볼버는 이상적인 총기이다.
사진은 대한민국 경찰의 새 공식 권총 S&W 모델60.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실제로는 총기를 발사할 일이 많지 않은 이들에게 리볼버는 이상적인 총기이다. 가장 대표적인 직업군이 경찰이다. 근무시간 내내 총격전에 시달리는 영화 속의 경찰관과는 달리 실제 경찰관들 가운데 훈련을 제외하면 근무 중에 총을 쏴본 사람은 드물다. 미국에서도 3%에 불과할 정도라니, 우리나라 등 경찰의 총기 사용이 드문 나라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이유로 총기를 준비된 상태로 오래 보관해야만 하는 이들에게 리볼버는 여전히 매력적인 총기이다. 현재 우리나라 경찰은 S&W 모델 10 4인치 모델을 사용하다, 더욱 경량화된 S&W M60 3인치 모델로 교체 중이다.

 

루거 P08

루거 P08 권총. 연합군 사이에서 전리품으로 인기가 높았다. <출처: ? www.adamsguns.com>

 

전쟁 영화를 보면 교전 직후 점령지를 수색하여 전리품을 챙기는 장면이 종종 그려진다. 가끔 고가의 귀중품을 습득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대방의 무기 노획이 주목적이다. 그 이유는 차후에 적들이 무기를 재사용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필요할 경우 아군이 활용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아군이 사용하기 곤란한 노획 무기는 추후 적들이 재사용하지 못하도록 즉시 파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적의 무기나 장비라면 일단 보유하려는 경향이 많다. 그 중 모든 사병들에게 지급되지 않지만 휴대가 편리하며, 가지고 있다고 특별히 손해 볼 것이 없는 권총이 대표적이다. 원래 노획무기는 부대가 관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실전에 투입된 많은 병사들을 일일이 통제하기는 힘든 법이다. 더구나 권총의 경우는 참전 기념물로 습득하려는 경우도 많다.

‘뭐 굳이 무기를 기념물로 가지려 할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전쟁이라는 시공간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현상이다. 어쩌면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기를 원하고 이를 기념하고자 하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제2차 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 투입되었던 미군들이 전리품으로 갖고 싶었던 독일군 무기라면 단연코 루거(Luger) P08 권총이었다.

 

뭔가 특징적이었던 루거의 모습

P08이 최고의 전리품으로 대접받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생각보다 고장이나 오발이 자주 발생하여 독일군내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았던 점을 생각한다면 굳이 무기로 재사용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실화를 바탕으로 2001년 제작된 유명한 TV시리즈인 [밴드 오브 브라더스 Band of Brothers]에서 이를 노획하여 자랑하고 다녔던 병사가 어이없게 오발로 목숨을 잃는 모습이 나왔을 정도였다.

루거 P08. 토글 액션이라는 작동방식 때문에 모양새가 독특하다. <출처:(cc) P. Mateus>

 

그렇다면 무기라는 측면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P08의 인기의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많은 자료에는 독일군 고급 장교들만이 착용하였던 무기라서 그랬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이 권총을 노획하였다면 독일군 장교를 사살 혹은 포로로 잡았다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의미하므로 많은 미군 병사들이 가지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총을 잡았을 때의 그립(grip)감이 상당히 호평을 받았다. 한마디로 폼 나는 모양새였다.

우리와 달리 총기의 보유와 사용이 자유로운 미국인들에게 권총은 하나의 문화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미군 중에는 군대에 오기 전에 이미 여러 종류의 총을 잡아보았던 이들이 많았고 따라서 새롭거나 쉽게 접하지 못했던 권총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랐다. 비록 모든 독일군 장교들이 P08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외형적인 면에서 독일군을 상징할 만한 독특한 점이 있어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루거P08의 토글이 접힌 모습.

루거P08의 내부 구조도

미군도 사용을 검토했던 권총

루거 08의 개발자인 게오르그 루거

 

제2차 대전을 상징하는 권총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P08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1898년 독일의 총기 제작사인 루드비히 뢰베사(Ludwig Loewe & Co)의 게오르그 루거(Georg Luger)가 만들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기존의 권총을 계량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893년 후고 보어하르트(Hugo Borchardt)가 반자동 보어하르트 C-93(Borchardt C-93) 권총을 개발했는데 구조가 너무 복잡하고 무거웠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여 탄생한 권총이 바로 P08으로 토글 액션(Toggle action)이라 불리는 특수한 쇼트 리코일(Short recoil)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런데 이 새로운 권총에 대해 처음 관심을 보였던 곳은 독일이 아니었다. 1900년 스위스 육군이 7.65mm 파라블럼 탄을 사용하는 P1900 모델을 3,000정 구입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납품 사례다. 비슷한 시기에 불가리아에도 1만정이 판매되었는데 민수용이었다고 알려진다.

재미있는 것은 후에 미군들이 혈안이 되어 수집하러 다녔지만 미군용으로 채택될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1903년 미 육군 당국은 차기 권총 후보들로 P1900과 9mm 파라블럼 탄을 사용하는 P1902 모델을 각각 구매하여 테스트하였다. 심사 끝에 자국산 콜트(Colt)를 채택하면서 미군 납품은 무산되었지만, 이후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재미있었던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생각된다.

7.65mm 파라블럼 탄을 사용하는 P1900 형.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호전에 특화된 무기로...

이처럼 해외에서의 호평과 달리 정작 독일에서는 1904년 해군에 의하여 겨우 제식화되었다. 해군용 모델은 105mm 총신을 가졌는데 1905년 독일의 식민지였던 동아프리카와 서남아프리카에서의 저항 진압에 사용되면서 처음으로 실전에 데뷔하였다. 그렇지만 독일군의 핵심인 육군에서는 1908년에서야 채택하였고 이때 비로소 P08이라는 제식 부호를 얻게 되었다. 명성에 비한다면 자국 내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아 시작은 이처럼 상당히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대량 생산되어 독일군에 납품된 P08은 제1차 대전 당시에 참호전에 적합한 무기로 유명해지면서 갑자기 명성을 떨쳤다. 참호전이 일상화되자 보병들이 적진까지 들고 뛰어간 소총들은 검이나 몽둥이 용도밖에 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속사가 가능한 권총은 좁은 곳에서 적과 근접하였을 때 사용하기 편리한 무기로 등장하였다. 막연히 고급 장교용 무기로 생각하던 P08이 이처럼 최전선의 사병들도 애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P08용으로 32발을 탑재할 수 있는 트롬멜(Trommel) 탄창이 등장하였고 이를 장착한 P08은 마치 기관단총처럼 사용되었다. 이후 최초로 전선에 투입된 기관단총인 MP18이 P08과 같은 9mm탄을 사용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재미있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기관단총처럼 자동 연사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수의 능력에 따라 속사가 가능하였고 30발이 넘는 장탄량은 상대보다 많은 이점을 제공하여 주었다.

근접전을 위해 트롬멜 탄창과 개머리판을 장착한 P08 <출처 : (cc) Kar98 at Wikimedia.org>

 

P08은 발사 후 복좌 장치가 후방으로 접히면서 탄피를 배출시키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탄환을 장전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특징은 이물질의 총기내 유입을 불러와 툭하면 고장을 내는 원인이 되었고, 신뢰성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더불어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1922년 9mm탄의 사용이 금지되며 7.65mm탄용으로 P08이 일부 생산되었으나 고가의 제작비로 말미암아 더 이상 양산이 되지 않았다.

성능보다 모양으로 얻은 유명세

발터(Walter) P-38. 루거P08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 권총이다.<출처 :? www.adamsguns.com>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독일군은 재무장하면서 새롭게 개발된 발터(Walter) P38을 표준 권총으로 채택하였다. 이처럼 P08은 도태될 운명이었지만 전쟁이 거대해지고 무기의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부족한 수량을 보충하며 전쟁 말까지 사용되었다.일부 자료에는 1945년까지 P08이 생산되었다고는 하는데, 제2차 대전 당시에 사용된 대부분이 1922년 이전 생산된 재고물량이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구시대의 무기가 되어버린 P08이 최일선에서 활약하기는 어려웠다. 형식적으로 무장을 하는 고급 장교, 해군 승조원, 공군 조종사 그리고 점령지를 관리하는 후위 부대에서 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적에게 포위된 고급 장교들이 명예를 지키려 자살하는 데 사용하는 무기로 인식되면서 연합군 병사들 사이에서는 P08이 본의 아니게 독일군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기가 되어버렸다.

 

P08은 명중률이 높고 장탄수가 많다는 장점을 갖추지만, 툭하면 작동이 불량일 만큼 신뢰성에 너무 문제가 많아 오래 전에 사라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시대 상황이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만들었고 그로인해 성능에 비해 명성을 얻은 권총이 되었다. 덕분에 종전 후에는 군경용으로서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하였음에도 콜렉터들에게 골동품으로 인기가 많다. 어쩌면 이처럼 눈요기 감으로나마 볼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인 멋진 외형이 P08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생각된다.

미니건

미니건 발사 모습.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몸집과 위력을 가진 총이다.

 

사람이 범하는 흔한 실수 중 하나가 단지 첫인상이나 이름만으로 진정한 능력을 오판하는 경우다. 무기에도 마찬가지인데, 이를 역이용해서 일부러 오판을 유도하기 위해 엉뚱하게 작명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Tank(전차)’는 개발과 배치를 은밀히 하기 위해 새로운 무기를 물탱크로 위장하였던 과정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반면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이름으로 인해 그 위력을 제대로 잘못 생각하게 만든 무기도 있다.

 

미니건(Minigun). 미 육군은 M134, 공군은 GAU-2/A(개량형은 GAU-2/B, GAU-17)등으로 다르게 부른다. 이름이 다르나 거의 같은 총이다. <출처 : (cc) Stahlkocher at Wikimedia.org>

결코 작지 않은 무기. 미니건

영화 [터미네이터 2]에서 미니건을 발사하는 T-800(아놀드 슈왈제네거 분) <출처: 영화 [터미네이터2 - 심판의 날](1991)>

 

바로 M134 미니건(Minigun)이다. 단순하게 구경이 작으면 총, 반대로 크면 포라고 부르지만 총과 포를 구분하는 방법은 아직도 격렬하게 논쟁 중일만큼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 보니 ‘Gun’은 우리말로 총 또는 포로 다양하게 해석이 된다. 그런데 문구 전체를 놓고 해석하다 보면 총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특별히 포를 ‘Cannon’이나 ‘Ordnance’이라 표기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관념적으로 ‘건(Gun)’을 총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무기 체계에 대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미니건’이라고 말하면 그냥 ‘작은 총’ 또는 ‘권총’ 정도로 생각한다. 미니건을 접하지 못한 현역 군인들조차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왕왕 있을 정도니 잘못된 판단이라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어감과 달리 M134 미니건은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총이다. 구경으로 판단하자면 분명히 총이지만 능력으로 보자면 작은 대포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정도로 강하다.

미니건이 일반인에게 큰 인상을 준 것은 아마 영화 [터미네이터 2]에서였을 것이다. 영화에서 T-800(아놀드 슈왈제네거 분)는 미니건을 난사하여 포위한 경찰 부대를 완전히 제압하는 위력을 보여주었다.

미니건의 원형 - 전투기를 위한 괴물, 벌컨

공대공 미사일의 등장 이전에 기관포(중기관총)는 공중전을 위한 전투기의 유일한 무장이었고 현재 최신 전투기에도 장착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공대공 전투는 목표물이 지나갈 공간에 기관포를 난사하여 탄막을 치는 것이 가장 좋은 요격 방법이었다. 따라서 빠르게 난사할 수 있으면서도 한방만 제대로 맞아도 상대에게 크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기관포가 전투기에게 필요했다.

하지만 빠른 연사 속도와 파괴력이 강한 대구경을 하나의 무기에 함께 담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다. 구경이 클수록 파괴력도 비례하지만 난사하기 힘들고 포구 속도가 감소하며 포신 수명도 짧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전투기에 탑재하기 위해서 크기도 제한을 받았다. 결국 연사와 파괴력이 균형을 이루고 크기도 적당한 기관포들이 사용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미국은 구경 12.7mm의 M2 브라우닝 기관포를 주로 사용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전후 고속 비행이 가능한 제트기가 주력이 되자 전혀 다른 형태의 무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예전보다 더 빠른 발사 속도를 가진 새로운 화기가 요구된 것이었다. 미국은 1950년부터 제너럴 일렉트릭(이하 GE)의 주도로 전투기용 신형 화기 개발에 착수했지만 발사 속도를 무작정 늘리기가 곤란하다는 한계에 봉착했다. 개발팀은 다수의 총구를 회전시켜 교대로 사용했던 개틀링건(Gatling Gun)에 주목하여 이를 응용하여 난제를 해결했다.

 

그렇게 탄생한 괴물이 바로 M61 벌컨(Vulcan)이다. 벌컨은 총열마다 노리쇠가 별도로 장착되어 총열이 회전하면서 지정된 위치에 오면 발사가 되는 방식이다. 따라서 총신이 6개라고 한 번에 모두 총알이 발사 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총신에서 총알을 발사하는 동안 나머지 5개의 총신은 냉각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 총열 교환을 거의 필요 없다는 것이 장점이다.

 

M61 벌컨(Vulcan), 20mm 탄을 사용한다. 이를 7.62mm 탄을 사용하도록 경량화한 무기가 미니건이다.

새로운 전쟁과 새로운 무기

이후 벌컨은 미제 전투기의 고정무장으로 급속히 제식화되었고 방공포를 비롯한 지상용 화기로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뛰어난 성능 못지않게 발사를 위한 부가 장비 등으로 인하여 상당히 무겁고 커다란 무기이기도 했다. 제트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전술 작전기의 동체가 커지면서 벌컨을 그나마 전투기에 탑재할 수 있었지만 작은 전투기나 지상 이동 장비에 탑재하는 데에도 애로가 많았다.

바로 그때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고 헬리콥터가 새로운 전쟁 수단으로 급속히 대두되었다. 전선이 애매모호하고 이동로가 극히 제한된 베트남에서 헬리콥터를 이용해 병력을 신속 전개하여 적의 거점을 타격하고 즉시 철수하는 형태의 전혀 새로운 전쟁 기법이 도입된 것이다. 그런데 헬리콥터를 병력 수송용 또는 기관총을 장착하여 방어용 및 화력지원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GE는 M61을 소형화하는데 착수했다. 벌컨이 사용하는 20mm탄 대신 당시 총기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7.62x51mm NATO탄을 사용하면 경량화 된 작은 벌컨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그 정도면 헬리콥터 등에 충분히 장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고 벌컨보다 약할지 모르지만 엄청난 연사력을 그대로 구현한다면 기관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화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베트남전에서 미니건은 각종 헬기에 장착되었다.

미니건은 지상 공격기 AC-47에 장착되어 위력을 선보였다.

무서운 악마

‘미니건’으로 명명된 소형 벌컨은 미 공군을 시작으로 1963년부터 납품이 개시되었다. 대 지상공격기인 AC-47에 최초로 장착되어 무시무시한 위력을 선보였고 그 소문은 전군에 곧바로 퍼져 나갔다. 분당 최대 4,000발을 난사하는 엄청난 연사능력은 공격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트럭 같은 장비가 순식간 화염에 휩싸여 터져나가곤 했는데 이는 같은 구경의 탄을 사용하는 기관총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단순히 생각한다면 M60 기관총 6정을 한 곳에 집중하여 사격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지만 위력과 효과는 그 이상이었다. 미니건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곧바로 미 육군에서도 M134라는 이름으로 이를 채용하여 헬리콥터에 장착하기 시작했다. AH-1 같은 공격헬리콥터는 물론 UH-1, OH-58 같은 다양한 종류의 헬리콥터에 탑재한 미니건은 밀림 속에 적들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이라면 무지막지한 총탄의 불벼락을 날렸다.

밀림은 교전 중에 좋은 방어막이 되어 주었다. 이론적으로 기관총이나 자동소총의 화력은 나무를 관통하여 숨어 있는 상대를 공격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니건으로부터 보호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재미를 본 육군은 미니건을 트럭이나 지프 같은 기동차량에 장착하여 보병을 근접에서 지원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야말로 하늘이건 땅이건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불을 토해내는 무서운 악마였다.

 

차량에 탑재된 미니건

미니건은 해군에서 함정의 근접 방어용으로 사용된다.

많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과한 무기

하지만 모든 총기가 그렇듯이 미니건 또한 장점만 있을 수는 없었다. 처음 언급한 것처럼 작은 대포를 표방했지만 결국 기관총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12.7mm탄을 사용하는 M2 중기관총보다 화력이 약하여 장갑차량이나 엄폐물을 완벽히 제압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밀집된 대규모 보병부대나 밀림처럼 대략적인 목표지점을 난사하는 용도 외에는 사용하기 힘들었다. 대인 공격용으로만 사용하기에는 너무 사치스러운 무기였다.

미니건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무지막지한 발사 능력은 사실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했다. 불과 5분이면 보병 1개 대대가 사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기관총탄을 소비해버리니 지상군이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헬리콥터 같은 경우는 작전을 마치고 기지로 귀대하여 즉시 보급이 가능하지만 전선을 옮겨 다니는 지상군에게는 이 정도의 탄 보급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탄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은 미니건은 그냥 무거운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더불어 전기 동력을 이용한 발사 시스템도 문제여서, 탄이 있다 하더라도 전기가 소모되거나 동력 계통이 고장 나면 사용할 수 없었다. 소말리아 내전 당시 반군 지역에 블랙호크가 추락하면서 동력 계통이 고장이 났는데 이 때문에 몰려오는 적들을 보면서 미니건을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발생했을 정도였다. 대인저지용으로 특화된 무기가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 사용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미니건은 지상에서 일반 부대가 쓰기는 어려운 무기다. 사진은 특수부대에서 미니건을 사용하는 모습.

 

M134에 고무된 GE가 보병부대가 휴대하고 다닐 정도로 축소한 XM214 마이크로건(Microgun)을 개발했지만 군 당국에서 채용을 거부한 이유도 이런 단점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현재 미니건은 헬리콥터의 지상 제압용도 외에 요새화된 참호나 특수부대의 지원화기 등의 극히 제한적인 임무에만 투입되는 신세로 입지가 바뀌었다.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성능이 필요 이상으로 과하면 많이 사용되기 어렵다는 점을 M134 미니건은 보여주고 있다.

 

제원
탄약 7.62×51mm NATO / 급탄 벨트급탄 / 작동방식 전기 동력식 / 중량 25kg / 발사속도 분당 4,000발 / 총구속도 853m/s / 유효사거리 1,000m

 

HK G11 돌격소총

총은 탄생 이후 지금까지 화약을 폭발시켜 얻은 에너지로 탄환을 발사하는 상당히 단순한 구조를 유지하여 왔다. 그것은 아무리 디자인이 바뀌고 성능이 추가되었더라도 숟가락이 그 고유의 모양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원리와 비슷하다. 그렇다 보니 좋은 평가를 얻은 총들이 태어난 지 수 십 년이 되었어도 일선에서 사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만큼 생각보다 발전이 더딘 무기이기도 하다.

혁신적인 무탄피 소총, HK G11

HK G11 브로셔 <출처: Heckler &Koch>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총이 사용될 수 있는 환경이나 목적이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까지는 하늘에서 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지금은 전투기 없이 전쟁을 벌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총은 당시나 지금이나 거의 동일한 목적에 사용된다. 물론 세부적인 기능은 많이 향상되었지만 다른 무기와 비교한다면 그 발전 정도는 더디다고 볼 수 있다.

레이저 총처럼 지금과 전혀 다른 획기적인 총은 SF영화에서나 묘사된다. 언젠가 그런 상상 속의 총이 등장은 하겠지만 수십 년 전에 개발 된 총들이 일선에서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쉽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이와 같이 보수적인 총의 세계에서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은 혁신적인 소총이 있었다. 마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래의 총 같았던 주인공은 헤클러 앤 코흐 G11(Heckler & Koch G11, HK G11) 돌격소총이다.

레이저 광선이 나올 듯 한 획기적인 겉모양

HK G11은 일단 모양부터 보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우리가 막연하게 머릿속에 총이라고 생각하는 물건이라면 적어도 이러이러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오래 된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렸기 때문이다. 교전 중에 HK G11를 들고 적을 제압하려 한다면 이를 총이라 생각하여 순순히 손을 들고 항복할 적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치 영화 속에서 레이저 광선을 발사하는 총과 유사해 보이는 획기적인 겉모습을 가졌다.

지금 보아도 신선한 모습이지만 사실 HK G11은 1960년대 말부터 개념 연구가 이루어졌고 1980년대까지 개발이 진행되었던, 생각보다 오래된 돌격소총이다. 이처럼 생각보다 오랜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HK G11이 낯선 이유는 정식으로 제식화되지 못하여 양산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습과 달리 기능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정식 채택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특이한 모습처럼 HK G11은 당대의 첨단 기술이 결합된 상당히 미래 지향적인 총이었다. 물론 레이저를 발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탄피를 없앤 혁신적인 무탄피 소총이었다. 정확히 말해 무탄피를 전혀 새로운 개념으로 볼 수는 없지만 HK G11은 최초의 무탄피 소총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만큼 총기 역사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운 새로운 개념의 소총이라는 의미다.

G11의 내부 구조도 <출처: Heckler & Koc(상), (cc) Bojoe at Wikimedia.org (하)>

탄피로 인하여 바뀐 전쟁

사실 총이 탄생하였을 당시에는 탄피라는 개념이 없었다. 화약을 약실에 밀어 넣고 탄자를 그 앞에 위치시킨 후 화약을 터뜨려 발사하였는데, 머스켓(Musket)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당연히 발사가 까다로웠고 시간도 많이 걸려 효율적이지 못하였다. 그러한 단점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탄피가 등장하였다. 화약을 담은 탄피로 탄자를 감싸자 총탄의 보유와 휴대가 편리하였고 총에 삽탄하는 시간도 단축되었다.

화약과 탄자가 일원화 되면서 기계적으로 뇌관을 충격하여 쉽고 빠르게 화약에 불을 붙이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한때 총의 상징이던 심지나 부싯돌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방아쇠가 차지하게 되었다. 당연히 사격의 준비와 발사에 걸리는 시간과 절차가 엄청나게 단축되었다. 한마디로 탄피는 총의 성능이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원동력이었고 현재 대부분의 탄환은 이러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탄피가 사용되면서 예전보다 많은 자재가 필요하게 되었고 탄피의 무게만큼 총과 관련한 부속물의 무게도 증가되었다. 어쩌면 이점은 비단 총뿐만 아니라 무기 전반에 걸친 문제라 할 수도 있다. 많은 기술이 접목되며 무기의 성능이 향상될수록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마디로 이제는 천문학적인 경제적 부담 없이 군비를 갖출 수도, 전쟁도 할 수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

 

원래 머스켓처럼 초기의 총은 탄피가 없던 탄환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무탄피가 전혀 새로운 개념은 아니었다. <출처 : (cc) Michal Ma?as>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금속제 탄피들
<출처 : (cc) Commander Zulu at en.wikipedia>

생각보다 오래 걸린 개발

HK G11은 너무 많은 장점들로 말미암아 그 동안 잊고 있던 탄피의 단점을 파고들면서 개발이 이루어졌다. 독일의 총기 명가인 ‘헤클러 앤 코흐’의 엔지니어들은 무거운 탄피를 없애면 탄환의 무게는 물론 크기도 줄일 수 있어 더 많은 탄환을 보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약실에서의 탄피 추출 및 축출 과정이 생략되므로 총의 무게도 줄일 수 있고 반면 빠른 연사가 가능하리라 판단하였다.

하지만 탄피를 사용하였을 때 누리는 장점은 그대로 살려야 했다. 적어도 현재까지 사용하는 총의 성능보다 뒤 떨어진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탄피는 사격시 발생하는 고열을 일차적으로 방출하는 중요한 역할도 담당한다. 따라서 탄피가 없다면 총의 온도는 급속히 올라가 화약이 그대로 열에 노출되어 방아쇠를 누르지 않았는데도 총탄이 발사되는 쿡오프(Cook-Off) 현상을 가져 올 수도 있다.

더불어 약실에서 타버린 화약재를 비롯한 찌꺼기들도 골치 거리였다. 탄피가 있어도 각종 이물질로 인하여 총구가 막히는 경우가 흔할 정도인데 무탄피라면 이로 인한 부작용이 더욱 클 것이 불을 보듯 뻔하였다.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새로운 소총을 만들 수 없었고 때문에 개발 기간이 장장 20년이나 걸렸다. 처음에는 총의 메커니즘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지만 결론은 탄약이었다.

 

HK G11의 프로토타입<출처 (cc) : Bojoe at Wikimedia.org>

무탄피 탄환 DM11 개발

헤클러 앤 코흐는 ‘다이나밋 노벨(Dynamit Nobel)’사와 합작으로 무탄피 탄약인 DM11을 개발하였다. 서방 표준인 5.56×45mm NATO탄 보다 작은 4.73x33mm였는데, 한마디로 탄피를 제거한 만큼 크기가 축소된 형태였다. DM11은 탄피 대신 화약으로 탄두를 감싸고 뒤에 뇌관을 장착된 형태였다. 처음에는 빈번히 쿡오프 현상이 발생하여 애를 먹였는데 충격에는 민감하지만 열에는 강한 새로운 장약을 개발하면서 난제를 해결하였다.

DM11 덕분에 개별 병사가 휴대할 수 있는 탄약량이 1.5배 정도 늘어나고 45~50발 탄창을 사용하여 효율이 배가 되었다. 더불어 불펍(Bullpup)식 디자인을 채용하여 현대 돌격소총 중 가장 빠른 수준인 분당 2,200발(3점 사 기준)을 발사할 수 있었다. 개발국인 서독은 진지하게 제식화를 고려하였고 M16A2의 대체 돌격소총을 원하던 미국도 관심을 보였다. 이처럼 HK G11은 최신식이라는 타이틀을 부여 받을 자격이 있을 만큼 성능이 뛰어났다.

G11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4.73x33mm DM11 무탄피탄 <출처: Heckler & Koc(좌), (cc) Drake00 at en.wikipedia (우)>

미완의 대기

하지만 결국 그 정도에서 사라지는 비운의 소총이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DM11의 가격이 기존 탄환의 30배 이르는 엄청난 수준이어서 보병용 제식화기로 쉽게 유지하기에 곤란하였다. 대량 생산한다 하여도 오로지 HK G11용으로만 사용될 수밖에 없어 가격을 낮추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더불어 1990년대 냉전의 종식은 국방비의 감축을 불러와 새로운 소총의 도입을 주저하도록 만들었다.

거기에 더불어 소총으로 생각하기 힘들만큼 너무 앞선 디자인이 군부가 거부감을 들도록 만들었다는 후문도 있다. 하다못해 백병전에 부적합하다는 주장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 군부는 최신의 무기를 원하면서도 일반적으로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특징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마디로 HK G11은 총기의 역사를 선도할만한 뛰어난 걸작이었음에도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나서 미완으로 생을 마친 총기라 할 수 있다.

제원
탄약 4.73×33mm 무탄피 DM11 / 작동방식 가스 작동식 / 전장 750mm / 중량 3.6kg / 발사속도 분당 470발(자동) 분당 2000발(3점사) / 유효사거리 400m

 

슈타이어 돌격소총

슈타이어 AUG 돌격소총을 들고 훈련하는 군인. 슈타이어 AUG는 탄창이 개머리판에 붙어 있는, 불펍 방식을 채택한 소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유와 보관이 엄격히 제한되기 때문에 총을 상당히 낯선 물건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스포츠나 레저 용도가 아닌 인마살상용의 고성능 소총을 다루어 본 사람이 인구 대비하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들 중 하나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병역의무가 있어 남자들이라면 대부분 총기의 분해, 결합과 사격은 일생에 한번 이상은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한다면 징병제가 아닌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평생 동안 총을 만져본 경험이 전혀 없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불펍? 낯선 방식의 총

하지만 군을 경험하고 총을 사용해봤다고 세상에 있는 모든 총을 경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제식 총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그러나, 특수 병과의 군인들은 임무에 특화된 다른 총을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군 전체로 본다면 다양한 종류의 총을 운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종류의 총기를 운용하는 우리나라에서도 불펍(Bullpup) 방식의 총은 상당히 낯설다.

불펍은 급탄, 격발 행위가 개머리판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을 말하는데, 대개 탄창이 방아쇠 뒤쪽에 있어서 외관상으로 쉽게 구별이 가능하다. 사실 낯선 만큼 정규군용 제식화기로써 불펍총의 역사는 1977년 탄생한 슈타이어 AUG 돌격소총(Steyr AUG Assault Rifle)을 시초로 하고 있으므로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슈타이어 AUG A1. 제식화기로 처음 채택된 불펍 소총. 기본형이 총열 길이 50.8cm에 총 전체 길이가 79cm이다. 총열 길이가 같은 M16A1에 비해 20cm가량 짧다. <출처: (cc) steyr-mannlicher>

장점은 짧다는 것, 의외로 새로운 방식은 아냐

불펍 방식이 신기한 것 같지만 간단하게 생각한다면 자동권총이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메커니즘 상으로 전혀 새롭거나 혁신적인 기술은 아니다. 사실 1901년 시험적으로 만들었던 소니크로프트(Thorneycroft) 볼트액션식 카빈 소총을 최초의 불펍 소총으로 보기 때문에 오래 전에 이미 개념 정립이 끝난 상태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수시로 다양한 종류의 불펍 소총을 시험적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최초의 불펍 소총인 1901년의 소니크로프트(Thorneycroft) 볼트액션식 카빈 소총

 

그만큼 불펍이 다른 방식의 소총과 비교하여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불펍 소총은 총의 뒤편에서 사격 행위가 일어나므로 총열을 길게 만들 수 있다. 총열이 길면 유효 사거리가 길어지면서도 소음은 감소시킬 수 있다. 반대로 총열을 일반소총 수준의 크기로 유지한다면 상대적으로 총의 전체 길이는 짧아져 총의 크기와 무게를 축소시킬 수 있고 당연히 휴대가 편리하다.

총의 무게는 가벼울수록 휴대가 편리하지만 명중률 등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반동을 충분히 흡수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 저격총처럼 대개 정확도와 파괴력이 큰 소총은 반발력이 커서 총의 무게로 이를 상쇄시키지만, 사용의 편리성을 고려한다면 무작정 총을 크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때 기술적인 방법으로 반동을 줄이기도 하는데 불펍 방식은 격발이 몸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므로 반동 제어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슈타이어 AUG A1의 개량형인 A2. 상부에 피카티니 레일을 채택했다.406mm(16인치)총열의 카빈 모델로, 총 전체 길이가 69cm에 불과하다. <출처: (cc) steyr-mannlicher>

단점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력 총기로 오랫동안 채택되지 않았고 지금도 특별하게 취급 받는 이유는 그에 못지않게 단점도 많기 때문이다. 우선 가늠자와 가늠쇠의 사이가 짧아 조준이 부정확해 질 수밖에 없는데 AUG같은 경우는 스코프를 장착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이로 인하여 생산비용이 커졌다. 또한 사격 시에 얼굴 부근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탄피배출구도 좋은 소총이 되기에는 부적절한 구조다.

또한 무게 중심이 뒤쪽에 쏠려 있다 보니 휴대가 불편하고 총의 모양도 불균형하게 생겨 백병전에서 사용하기 곤란하다. 돌격소총의 등장 이후 백병전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최후의 전투방식이라며 보수적인 전술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불펍 방식의 소총은 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라 할 수 있다. 초기의 불펍식 소총은 이처럼 단점이 많이 눈에 띄어 제식화되기 어려웠다.

 

슈타이어 AUG를 사격하는 모습. 스코프가 달려있고, 탄피 배출구가 바로 얼굴 옆에 있는 점을 볼 수 있다. 스코프는 가격 인상 요인이며, 탄피배출구 위치는 급할 때 왼손으로 잡고 쏘기 고약하다.

슈타이어의 도전

따라서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Steyr Mannlicher)가 1970년대 초에 자국군용으로 사용할 새로운 돌격소총인 AUG(Armee Universal Gewehr 육군 다목적 소총)를 불펍식으로 개발하겠다고 한 선언은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때까지도 불펍식 돌격소총은 비관적인 견해가 커서 슈타이어가 불가능한 도전에 뛰어든 것 아니냐는 전망이 우세하였다. 더구나 오스트리아 국내 수요만을 생각한다면 외국에서 좋은 총을 수입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였다.

오스트리아는 20세기 초까지 세계사를 좌지우지하던 열강 중 하나였지만 제1차 대전 후 나라가 완전히 해체되었고 이후 나치 독일에 강제 합병 당하였다가 제2차 대전 후에 영세중립을 조건으로 간신히 독립한 약소국이었다. 따라서 군대의 규모도 적어서 FN-FAL을 라이선스 한 StG58을 그 동안 제식소총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제식소총을 국산으로, 그것도 모두가 꺼려하는 불펍식으로 만든다는 것은 일견 무모해 보였던 것이었다.

반면교사로 삼았던 대상

그러한 모든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제작에 나섰지만 슈타이어는 한때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 군대에 다양한 각종 총기를 공급하여 온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뛰어난 기술력도 보유한 제작사였다. 특히 StG58을 라이선스 생산, 공급하면서 앞으로 사용될 새로운 차기 소총이 갖추어야 할 조건과 기능에 대해 나름대로 개념 연구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즉 AUG는 결코 갑자기 나타난 산출물은 아니었다.

정식명칭이 StG77인 AUG에게는 프랑스의 FAMAS라는 반면교사가 있어 개발부터 이를 적극 참고하였다. AUG는 탄피배출구를 사수의 필요에 따라 변환할 수 있도록 하였고 조준경을 달아 명중률을 높였으며 총기 전방에 그립을 달아 총의 무게를 적절히 분산하였다. 덕분에 FAMAS의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던 반동을 잡을 수 있었고 당연히 명중률이 높일 수 있었다. 시제품을 실험한 야전에서의 평가도 대만족이어서 즉시 제식화되었다.

프랑스의 FAMAS 소총. 슈타이어 AUG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개발했으나, 한해 더 늦은 1978년에 채택되었다. <출처: (cc) David Monniaux>

슈타이어를 세계적인 총기 제작사 반열에 올려

슈타이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쉽게 개조할 수 있도록 AUG에 모듈화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덕분에 AUG는 카빈, 경기관총, 기관단총 등의 다양한 변형이 등장하였다. 또한 영세중립국임에도 5.56mm NATO탄을 사용하도록 제작되었는데 이는 개발 당시부터 수출까지 염두에 두었다는 의미다. 어차피 소련의 소총으로 통일되어 있는 동구권에 새로운 규격의 총을 팔 수 없었으므로 그 반대편의 틈새시장을 노린 것이었다.

슈타이어 AUG A3. 피키티니 레일을 대폭 확대, 다양한 엑서세리 부착이 가능하다. <출처: (cc) steyr-mannlicher>

 

개발 당시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일부에서는 비관적인 전망도 내놓았지만 AUG는 한 세대 앞선 돌격소총이라는 명성을 들을 만큼 성공작의 반열에 올랐다. 시대의 흐름에 때맞추어 채용한 5.56mm탄과 오히려 우려가 되었던 불펍 방식 덕분에 반동을 쉽게 제어할 수 있었고 총의 크기와 무게도 상당히 양호한 돌격소총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덕분에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도 여러 나라에서 앞 다투어 채용하였다.

자국군용으로 공급하기 위해 라이선스 생산을 한 오스트레일리아와 룩셈부르크를 비롯하여 약 20개국 이상이 군경용으로 사용 중에 있으며 반자동으로 개조되어 민수용으로 사용되는 AUG도 상당수 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영국 SAS를 비롯한 많은 대 테러 기관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 활용도와 정확성이 최고 수준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덕분에 슈타이어는 일약 세계적인 총기 제작사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슈타이어 AUG는 여러 국가에 수출되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새로운 시대를 열은 개척자

AUG는 한마디로 그 동안 개념 정도로만 여겨지던 불펍 소총의 진정한 시대를 열은 개척자라 할 수 있다. 사실 총이라는 무기는 본연의 목적에만 충실하면 되므로 그 모양새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쉽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고 성능까지 좋으면 그것만으로도 최고의 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AUG처럼 좋은 성능에 독특한 외관과 구조까지 가졌다면 그야말로 미래형 총기라는 명성을 얻기에 자격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다.

 

제원
탄약 5.56x45mm NATO, 9x19mm 패러블럼 / 작동방식 가스작동식, 회전노리쇠 / 전장 790mm / 중량 3.6kg / 발사속도 분당 680~750발 / 유효사거리 300m

 

007의 권총들

제임스 본드의 총. 월터 PPK(Walther PPK) 스테인레스 모델.

 

스타일리쉬한 수트를 입은 한 남자가 등장해서는 세계 최악의 악당을 해결해나간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총은 월터 PPK 자동권총. 살인면허번호 007을 가지고 전 세계의 평화를 지켜온 첩보원, 제임스 본드가 은막에 등장한 지 50년을 기념하여 007이 들고 싸운 총기의 세계를 살펴본다.

오리지널 제임스 본드 권총, 베레타 418

제임스 본드는 원래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이라는 영국 소설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안 플레밍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정보부 중령으로 첩보의 세계를 가까이서 살펴보았다.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를 최대한 실제와 똑같이 디테일하게 묘사하고자 했다. 그래서 좋아하는 칵테일은 보드카 마티니이고 원작 속에서 그가 들고 다니던 권총은 베레타 418 모델이다.

베레타라고 하면 요즘에는 미군이 사용하는 M9 권총(92FS 모델)과 같은 대형권총을 떠올리지만, 2차대전 전후의 베레타는 소형권총으로 더욱 유명했다. 특히 베레타 418 모델은 무게가 350g에 불과하여 호신용으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가벼운 무게로 이탈리아군 고위장성이나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 장교들이 애용하기도 했다.

 

소설 속에 묘사된 제임스 본드의 베레타 418에는 스파이다운 개조가 가해져있다. 우선 플라스틱 손잡이를 제거하고 “스켈리톤(Skeleton)” 손잡이를 채용했다. 또한 테이프를 손잡이에 감아서 미끄러짐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그립 세이프티(손잡이를 쥐어야 권총이 발사되는 안전장치)까지 테이프를 감아놓아 언제나 사격이 가능한 상태로 두었다는 것이다.

베레타 418(Beretta 418) 권총.

소설 속에서 제임스 본드가 개조한 모습을 재현한 베레타 418 권총.

팬의 제안으로 등장한 S&W 센테니얼 리볼버

하지만 이렇게 스타일리쉬한 베레타 418 권총은 결국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1956년 제임스 본드 소설의 팬이 이안 플레밍에게 편지를 보내 이의를 제기했던 게 계기가 되었다. 총기 전문가이자 퇴역군인인 죠프리 부스로이드(Geoffrey Boothroyd) 소령은 25구경 베레타 권총을 사용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그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디자인의 권총인 S&W 센테니얼 에어웨이트(S&W Centennial Airweight) 리볼버를 본드의 총기로 제안했다. 이외에도 부스로이드 소령은 스미스웨슨 357 매그넘이나 월터 PPK 등 다양한 총기가 본드 소설에 등장하도록 조언하기도 했다.

소설의 현실성을 중시하던 플레밍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센테니얼 리볼버가 본드 소설 [죽거나 살거나 Live and Let die]부터 주력총기가 되었다. 1953년 처음 선보였던 센테니얼 리볼버는 치프스페셜이라는 J프레임 리볼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휴대용 소형 리볼버였다. 특히 해머가 총몸에 숨겨진 구조여서, 주머니나 총집에서 총을 꺼내면서 옷자락에 총기가 걸리는 일이 없었으며, 총몸이 강화되어 내구성도 높아졌다. 이안 플레밍은 부스로이드 소령의 조언에 감사의 뜻으로 그를 자신의 소설에 출현시켰다. Q부서의 총기관리관 부스로이드 소령, 바로 Q가 이렇게 등장한 것이다.

팬의 제안을 수락하여 변경된 007의 권총, S&W 센테니얼(Smith & Wesson Centennial) 리볼버.

월터 PPK

영화 속의 제임스 본드는 새로운 아이콘을 선택한다. 바로 월터(Walther, 독일식 원 발음으로는 ‘발터’) PPK이다. 본드의 총기로 선택된 PPK는 1931년 개발된 경찰용 권총이다. PPK란 Polizei Pistole Kurz의 준말로 말 그대로 짧은 경찰 권총(Police Pistol Short)이란 뜻이다. 원래 PPK 이전에 독일 경찰을 위해서 PP라는 권총이 등장했는데, 이 PP라는 권총의 길이를 줄여서 휴대성을 높인 것이 바로 PPK였다. PPK는 7.65 mm 권총탄(.32 ACP라고도 불림)을 사용해왔다. 대표적인 권총탄환인 9 x 19 mm 파라블럼탄에 비해 미약한 에너지를 가졌지만 지근거리에서 충분히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 있는 탄환이었다.

월터 PP (Walter PP). 길이 170mm. <출처 : (cc) Michael Sullivan>

월터 PPK(walter PPK). 길이 155mm. <출처 : ? http://www.adamsguns.com/>

 

PPK는 작고 뛰어난 성능으로 많은 이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군과 경찰에서 인기가 높아, 특히 루프트바페(공군) 조종사들이 애용했으며, SS대원은 물론이고 나치당 간부들도 PPK를 애용했다. 무엇보다도 히틀러가 소지하던 총기도 PPK로, 결국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 PPK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PPK는 우리 역사와도 무관치 않다. 실제로 우리나라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에서도 PPK를 사용했었으며, 10.26 사건날 밤에 발사된 총도 바로 PPK였다.

 

PPK는 냉전시절 실제로 스파이들에게 사랑을 받던 권총이었다. 미국의 CIA나 영국의 MI6, 독일의 BND, 프랑스의 SDECE, 이스라엘의 모사드 등 주요한 첩보기관들의 요원들이 애용하던 것이 바로 PPK 권총이었다. PPK는 전체 길이가 16cm에 불과했지만 탄창에는 7.65mm 탄환 7발을 들어가서 소형 권총치고는 화력도 약한 편도 아닌데다가, 총기의 외관설계도 꽤나 유려한 편이었다. 그러나 PPK가 사랑받은 이유는 멋져 보이는 외관 때문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독일이 보유하고 있던 PPK 권총이 대량으로 시중에 풀렸는데, 이런 권총들은 등록번호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PPK를 쓰면 소유자가 누구인지 추적하기도 어려웠고, 시장에 많은 총이 풀려 가격도 쌌기 때문에 한 번 쓰고 버리기에도 부담이 없는 권총이었다. 결국 첩보원들이 PPK를 사랑한 것은 당시에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총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초기의 본드 영화에서는 PPK와 PP를 잘 구분하지 못하여 제임스 본드가 PP를 들고 활약하는 일도 있었다. (source/ Ion Production)

로저 무어는 제3대 제임스 본드로서 PPK를 가장 잘 활용한 캐릭터였다.

일선에서는 PPK가 물러나고...

PPK는 이후 7.65mm 탄 이외에도 380 ACP 탄을 채용하게 되었다. 특히 9x17mm 규격의 380 ACP 탄은 9mm 파라블럼탄의 장약을 줄여놓은 것으로, 단순블로우백 기능을 사용할 수 있는 한계의 탄환으로 알려져 있다. 파괴력은 25 ACP나 32 ACP보다 월등하지만, 여전히 군/경찰용 탄환으로는 파괴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지만, 호신용 권총시장에서는 꽤나 인기가 높은 탄환이다. 007의 PPK 권총도 최초의 영화 속에서는 7.65mm 탄환을 사용하지만 최근 영화를 보면 380 ACP를 사용한다.

 

영화 [007 네버 다이]부터 [007 카지노로얄]까지 본드는 P99 권총을 사용해왔다.

영화 속과는 달리 실제로 PPK권총에 소음기를 달려면, 특수한 총열(Threaded barrel)을 사용해야 한다. <출처 : tornado-technologies.com>

 

영화를 보면 본드의 PPK에는 가끔씩 소음기를 장착하여 사용한다. 그러나 영화와는 달리 소음기를 장착하려면 Threaded Barrel이라고 하여 총열 앞부분이 튀어나와 이 부분에 나사선이 깎여있어야 한다. 보통 이런 나사선 총열의 경우, 나사선을 감싸는 뚜껑을 씌우지 않고 발사하는 등 사용시 관리에 부주의할 경우 총열이 터지는 경우도 있다.

 

한편 영화에서와는 달리 PPK는 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실제 일선에서 점차 물러나게 된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1974년 3월 20일에 있었던 영국 앤 공주의 납치기도 사건이다. 당시 앤 공주의 경호를 담당했던 경찰관은 PPK 권총으로 납치범을 제압하고자 했지만, 총기는 작동하지 않았고 결국 범인이 쏜 총에 맞았다. 주변사람들의 사투 끝에 범인은 붙잡혔지만 PPK의 명성에는 금이 갔다.

 

영화 [007 죽느냐 사느냐]에서는 44 매그넘을 들고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월터 P99 및 다른 권총들의 등장

제임스 본드가 영화 내내 PPK를 쓴 것은 아니었다. 영화 [007 죽느냐 사느냐 Live and Let Die](1973)에서는 스미스 & 웨슨 M29 44매그넘 리볼버를 사용하여 막강한 파괴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 [007 옥토퍼시 Octopussy](1983)나 [007 네버세이 네버어게인 Never Say Never Again]{1983)에서는 월터의 또 다른 총기인 P5가 PPK 대신 본드의 권총으로 잠시 선정되기도 했었다. P5는 2차대전 당시의 P38 자동권총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개조하여 만든 9mm 자동권총으로, 서독의 경찰용 총기선정사업을 위해 만들어졌던 모델이다.

월터 P5 권총. 잠시 본드의 권총으로 주연을 차지 한 바 있다.

월터 P99(Walter P99). 플라스틱 프레임 권총이다.

 

그러나 진정한 총기의 변화는 90년대에 일어났다. 영화 [007 네버 다이 Tomorrow never dies]에서 제임스 본드는 PPK를 버리고 월터가 내놓은 새로운 플라스틱 프레임 권총 P99를 선택했다. P-99는 글록과 같은 현대적 플라스틱 프레임 권총에 대항하기 위해 월터가 새롭게 발매한 권총으로, 영화에서의 맹활약과는 달리 실제 군과 경찰에서는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권총을 제외하면, 본드가 사용했던 가장 대표적인 총기는 AR7 소총을 들 수 있다. AR7은 원래 미 공군 조종사의 서바이벌 라이플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접이식 소총으로, 아웃도어 시장에서 비상용소총으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영화 [007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에서는 이 소총이 마치 강력한 저격총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AR7은 22LR 탄환을 발사하는 근거리용 총기이다.

 

AR7 서바이벌 소총이 초기 영화에 사용되며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러나, 007에게는 PPK가!

돌아보면, 1대 숀 코네리에서 6대 다니엘 크레이그까지 모든 제임스 본드가 PPK를 사용했다. 제5대 007인 피어스 브로스넌이 잠시 P99를 사용했지만, 결국 6대 크레이그는 [007 퀀텀 오브 솔러스](2008)에서 다시 PPK를 들었다. 007의 50주년작인 [007 스카이폴]에서는 새로운 PPK가 등장했다. 새롭게 등장한 나이 어린 Q는 레이저가 달린 시계나 볼펜폭탄을 주는 대신 007에게 지문인식장치가 달린 PPK 권총을 선사했다.0.01초의 차이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총잡이에게 지문인식을 위한 스캔을 할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PPK를 들고 있는 제임스 본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흐뭇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드 팬의 본능이다.

 

[007 스카이폴](2012)에서는 지문인식형 월터PPK가 제임스 본드의 총으로 나온다.

 

 

SKS반자동소총

사실 새로운 무기의 등장이 무조건 반가운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무기의 원초적인 목적이 살상과 파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싸움에서 이기려는 자가 좋은 성능의 무기를 보유하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아무리 미세하더라도 무기의 성능이 차이가 난다는 것은 곧바로 승패와 관련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전쟁의 무서움을 알면서도 더 강력한 무기를 얻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만들어 진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성능이 훌륭한데도 불구하고 더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순식간 사라져 간 무기들도 많다. 마치 우사인 볼트 시대에 2위 그룹들처럼 도태된 무기의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SKS(Samozaryadnyj Karabin sistemy Simonova) 반자동소총은 시대를 잘 못 타고 태어난 가장 대표적인 무기라 할 수 있다.

좋은 성능이었지만 돌격소총에 밀려 도태된 SKS 반자동소총

독일의 착각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소련을 기습침공 하였다. 크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로 보기도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사상 최대의 전쟁이라 할 수 있는 독소전이 발발한 것이었다. 소련(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Great Patriotic War)’이라 부르는 이 전쟁에서 사망한 이들만 양측 합쳐 최소 2,500만으로 추산되고 있으니 그 어마어마한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4년간 벌어진 이 전쟁의 승자는 소련이었지만 피해는 오히려 더 컸다.

 

독일이 개전 6개월 만에 점령한 영토를 소련이 완전히 탈환하는데 3년이 걸렸을 만큼 대부분의 전투가 소련 땅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역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최초 독일군의 진격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6개월 동안 독일은 너무 많은 포로들을 감당할 수 없었을 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대승을 연속적으로 거두었다. 더구나 이러한 독일의 공세 시기에도 병력을 포함한 수적인 전력은 독일의 열세였다.

그렇다 보니 최고 지휘부뿐만 아니라 일선 사병들도 소련군의 무능을 비웃고는 했다. 소련군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보유하고 있는 무기가 구닥다리여서 감히 독일군을 맞상대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길어지고 소련군이 전열을 정비한 후 전선이 서서히 정체되자 독일은 이것이 착각임을 깨닫게 되었다. 소련 무기의 성능이 상상외로 뛰어났던 것이다.

특히 소련군의 반자동소총은 독일군 병사들에게 충격이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게도 인기가 많았던 소련의 SVT-40 반자동소총 <출처: (cc) Drake00 at Wikipedia.org>

인기가 많았던 반자동소총

독일의 소부대 전술은 기관총을 주력으로 삼고 소총이 보조 화력을 담당하는 것이었지만 일일이 한 발씩 장전하여 격발하는 볼트액션식 소총인 Kar98k로 무장한 독일군에게 반자동으로 연사가 가능한 소련군의 SVT-40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물론 소련군 모두가 반자동소총을 보유한 것이 아니었고 주력은 여전히 볼트액션식인 모신나강(Mosin-Nagant)이었지만 반자동소총을 가진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의 교전에서 누가 유리한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당연히 노획한 SVT-40은 일선 독일군 병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무기가 되어 버렸다. 이처럼 예상과 달리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선에서 반자동소총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자 독일은 1943년 G43 반자동소총을 개발하여 제식화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독일은 재무장을 시작하였을 때 G35같은 반자동소총을 이미 개발한 경험이 있었지만 그다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정식 채택하지 않았던 상태였다.

이처럼 독일이 급하게 반자동소총을 만들도록 만들었을 만큼 소련군의 SVT-40이 끼친 영향은 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반자동소총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미국의 M1 개런드와 달리 SVT-40은 그다지 성공한 반자동소총이 아니었다. 정작 일선 소련군은 명중률이 낮고 유지 보수가 힘들다며 모신나강을 선호하는 경향이 컸다. 따라서 종전과 동시에 소련군 제식 화기 명단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독일이 서둘러 개발한 G43 반자동소총. 그만큼 독일이 소련군이 보유한 반자동소총에 대해 느꼈던 인상이 강렬하였다.

새로운 총탄을 기반으로 탄생하다

SVT-40, SKS같은 걸작 반자동소총을 비롯한 다양한 총기를 개발한 시모노프(가운데 인물)

 

하지만 앞으로 더 이상 볼트액션식 소총이 전선의 주역이 될 수 없음은 확실하였다. M1에서 충분히 알 수 있듯이 보다 편리하게 연사가 가능한 소총이 장차전의 대세였고 당연히 소련도 내부적으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SVT-40을 대신할 새로운 반자동소총이 필요하였다. 마침 SVT-40을 개발하였던 시모노프(Sergei G. Simonov)는 1943년부터 기존 소총의 단점을 개선한 새로운 반자동소총을 개발 중이었다.

SVT-40의 고질적인 문제는 사격 시 반동이 심하고 고장이 잘 난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이는 총보다 총탄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SVT-40은 모신나강과 동일한 7.62x54mm탄을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반자동으로 연속 사격을 할 경우 종종 무리가 발생하였던 것이었다. 바로 이때 소련이 한창 개발 중이던 새로운 경기관총용 탄환으로 탄생한 7.62×39mm탄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시모노프는 이를 이용하여 1945년 SKS 반자동소총을 만들었다. 총신 상부의 실린더에 가스를 보내 노리쇠를 후퇴시키는 가스작동식이었는데 화약이 감소된 탄을 사용하다 보니 파괴력은 조금 줄었지만 그다지 문제되는 수준이 아니었고 유효사거리도 동일하였다. 여기에 대용량 탄창을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10발 클립도 사용할 수 있어 범용성을 높였다. 절삭가공 방식으로 생산하여 대량생산에는 불리하였지만 내구성이 좋았다.

 

10발 들이 클립을 이용한 삽탄하는 모습 <출처: (cc) Stephen Z at frickr.com>

냉전 초기를 장식한 반자동소총

군 당국으로부터 시제품이 신뢰성과 내구성이 최고라는 대 호평을 받았고 1946년부터 제식화기로 대량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동구권에 급속히 공여되었으며 여러 나라에서 카피 생산을 하였다. 특히 중국은 ‘56식 소총’이라 명명하여 주력 소총으로 채택하였다. 전 세계에서 생산된 수량이 약 1,500만 정으로 추정되는데 제2차 대전 당시에 사용된 SVT-40의 생산량이 160만 정이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SKS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중국판 SKS인 ‘56식 소총’

 

자료마다 상이하지만 상당수의 SKS가 한국전쟁 당시에 공산군에 공급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당시 아군도 M1을 사용하였으므로 공산군이 이를 사용하였다고 하여도 특별히 전력 우위를 점유하였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북한도 ‘63식 소총’이라는 이름으로 카피하여 오랫동안 사용하였을 만큼 SKS의 주요 사용자였다. 이처럼 SKS는 한국전쟁이나 월남전쟁처럼 여러 지역 분쟁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대표적인 소총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뛰어난 소총이 불과 2년 만에 소련군 제식 무기에서 내려오는 수모를 겪었다. 결정적인 결함이 뒤늦게 발견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 시쳇말로 함께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대상이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었다. 총기 역사를 바꾼 AK-47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사실 1944년 독일군이 전선에 등장시킨 StG44는 앞으로 보병용 소총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알려준 시금석이었다.

 

중국 의장대가 사용 중인 SKS

너무나 짧았던 전성기

같은 시대에 AK-47이 있었다는 것은 SKS에게 한마디로 불행이었다. 흠잡을 데 없이 좋은 총이었지만 반자동소총이 돌격소총과 함께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79년에 벌어진 중월전쟁(중국-베트남전쟁)이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면서 군 현대화에 실패한 중국군은 병력의 우위만 믿고 베트남을 전격 침공하였다

하지만 SKS로 무장한 중국군은 AK-47로 대응하고 나선 월남군에게 상당히 고전하여 비슷한 규모의 소부대간 교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는 경우가 흔했다. 결국 베트남 북부의 일부를 점령한 후 이겼다고 억지 선언을 하고 중국군이 철군하면서 전쟁이 끝나긴 했지만, 이는 중국에게 사실상 패배나 다름 없는 수모였다.

한국전쟁 당시의 전술에서 그다지 변화가 없던 중국군에 비해 이십여 년 동안 계속 된 월남전쟁을 끝낸지 얼마 되지 않았던 베트남군은 실전 경험과 전술 운용에서 앞섰고 홈그라운드의 이점도 있었다. 여기에 더해 무기 측면에서도, 같은 총탄이라도 어떤 총에서 사용하는 가에 따라 승패가 바뀔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AK-47로 무장한 베트남군. AK-47을 든 베트남군은 SKS로 무장한 중국군을 상대로 잘 싸웠다.

 

소련군이 채택한지 불과 2년밖에 되지도 않았던 SKS를 과감히 도태시켰던 것도 이런 가시적인 기능 차이 때문이었지만 SKS가 아직 일선 보급량이 많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만일 일거에 교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물량이 보급되었다면 소련군의 AK-47 채택이 생각보다는 늦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제2차 대전 당시에 태어났다면, 아니면 AK-47이 10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한 시대를 충분히 풍미하였을 만하였던 소총이 바로 SKS다. 그런데 만약 돌격소총이 탄생하지 않고 현재 보병들의 주력소총이 반자동이었더라도 전쟁이 덜 잔인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창과 칼로 싸우던 시대에도 잔인한 살육이 수없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전쟁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고 힘의 우위를 앞세워 군사적으로 남을 도발하는 것이 범죄인 것은 어떤 무기를 들던 마찬가지다.

 

제원
탄약 7.62x39mm M43 / 작동방식 쇼트 스트로크 가스 피스톤, 틸팅볼트 / 전장 1,117mm / 중량 3.85kg / 발사속도 분당 40발 / 유효사거리 500m 

 

브라우닝 자동소총

M1918A2 브라우닝 자동소총 (BAR)

 

1917년 4월, 그 동안 중립을 지키던 미국은 제1차 대전 참전을 전격 결정하였다. 즉시 동원령이 하달되었고 그 해 10월이 되었을 때 무려 150만의 원정군이 대서양을 건너가 프랑스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막상 당장 전선에서 독일과 싸움을 벌이기에는 문제가 많았다.제1차 세계대전 참전은 이후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신호탄이 되었지만, 정작 당시에는 제대로 된 총기가 그리 변변치 않았던 것이었다.

참전은 했으나 적절한 총기가 부족

20세기 초까지 미국은 그냥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고립주의 정책을 구사하며 외부의 문제에 말려드는 것을 최대한 회피하였다. 더구나 거대한 대서양과 태평양은 만약에 있을 수도 있는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미국을 보호하는 최고의 방패였고 당연히 해군의 위상이 컸다. 반면 육군은 무기의 질이나 군비의 규모가 세계의 질서를 주도한 당시 유럽 열강에 비한다면 상당히 부족한 편이었다. 따라서 미군은 처음 접한 참호전에서 상당히 고전하였다.

적진으로 달려가려면 상대가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강력한 화력으로 기선을 제압하여야 하는데 그런 무기가 없었다. 결국 프랑스군의 Mle1915 쇼샤(Chauchat) 같은 경기관총을 사용했지만 만족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부개척사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전통적인 총기 강국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뛰어난 자동화기를 전선에 등장시켰다. 바로 M1918 브라우닝 자동 소총(M1918 BAR-Browning Automatic Rifle)이다.

새로운 총의 필요성을 알아 본 엔지니어

M1918은 약자인 BAR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바’라고 발음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비에이알’이라 부른다. 제식부호에서 알 수 있듯이 1918년에 제식화되었지만 개발은 이전에 시작되었다. 총의 이름이기도 한 미국의 전설적인 총기 제작자 브라우닝(John M. Browning)이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기 전인 1917년에 제작을 완료하였고, 미군 당국의 시험에서 대 호평을 받아 생산이 이미 결정되었던 상태였다.

 

전설적인 총기 제작자인 존 브라우닝(좌)이 그가 설계한 BAR를 들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미군은 M1903 스프링필드(Springfield)를 제식 소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M1903은 이전에 30년이 넘게 사용하던 크레그(Krag-Jorgensen) 소총을 급속도로 대체할 만큼 만족스러운 성능을 보여주었지만, 브라우닝은 볼트액션 방식의 근본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할 것임을 예측하였다. 따라서 기존 7.62×63mm 스프링필드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연사력이 뛰어난 자동소총을 개발하면 상당히 효과적일 것이라 판단하고 오래 전에 제작에 나섰던 것이었다.

 

일부 자료에는 브라우닝이 오늘날 돌격소총 같은 혁신적인 소총을 구상하였다고도 하는데, 당시 기술로는 상당히 이루기 힘든 난제였다. 7.62mm탄은 파괴력은 좋지만 사격 시 반동이 심하여 자동화기에서 사용하려면 충격을 충분히 흡수하고 발생하는 열을 견딜 수 있도록 몸체와 총열이 커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BAR중에서 가장 가벼웠던 모델인 M1918마저도 7.25kg이어서 일선 보병들이 편하게 다루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미군이 20세기 초에 사용하던 M1903 스프링필드(Springfield) 소총과 7.62×63mm 스프링필드탄. <출처: (cc) Curiosandrelics at Wikimedia.org>

짧았던 참전 하지만 강렬한 인상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8년 2월, BAR을 들고 있는 프랑스에 배치된 미군 장교의 모습. 그는 다름아닌 BAR의 발명자, 존 브라우닝의 아들 이다.

 

하지만 미군의 참전이 이루어지고 나서 한참 후인 1918년 2월에서야 양산이 개시되었고 그 해 9월에서야 처음 실전에 투입되었는데 총 85,000정도가 일선에 공급되었다. 11월에 독일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으니 M1918이 전선에서 활약한 시기는 정작 그리 길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막바지에 있었던 뮤즈-아르곤 공세 당시에 이를 사용한 일선 부대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에 BAR의 명성은 오히려 더욱 커졌고 변신도 이루어졌다. 갱들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던 대공황직전의 1920년대~1930년대에 민수용으로 판매된 BAR가 미국 갱들이 선호하는 무기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연사력과 파괴력이 좋아 상대 조직을 제거하는데 안성맞춤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보다 의미 있는 변화는 BAR를 소부대 지원화력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군 내부에서 벌어졌다.

기관총의 역할을 담당하다

M1918의 각 변형들

 

당시 여러 나라의 군대는 볼트액션식 소총만으로 구성된 부대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정작 절실히 필요할 때 화력을 투사하기 힘들다는 점이 결정적 약점이었는데, 특히 돌격에 들어갈 경우 곤란한 점이 많았다. 따라서 분대나 소대 지원용으로 기관총을 도입하는 실험을 하였는데 기관총 자체가 워낙 중량의 화기라서 일선 보병들과 속도를 맞추어 이동하는데 어려움이 컸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경기관총이나 독일군이 대성공을 거둔 MG34같은 다목적 기관총이었다. BAR의 장점을 눈 여겨 본 미군 당국은 이를 경기관총 용도로 사용하는 방안을 고려하였다. 미군은 제2차 대전의 위기가 서서히 고조되던 1937년에 양각대가 부착되고 개머리판이 개조된 M1918A1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1940년에는 반자동 사격 기능이 제거된 M1918A2가 미군의 제식 분대지원화기로 채택되었다.

이 모델은 분당 약 400발의 저속사격과 분당 약 600발의 고속사격 기능만 있었는데 실제로는 탄창을 일일이 교환하면서 그렇게 발사하기 어려웠다. 이처럼 화력을 염두에 두고 개조가 이루어지다 보니 무게가 9kg까지 늘어나 말 그대로 경기관총 수준이 되어 버렸다. BAR가 분대지원화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엄밀히 말해 총열 교환이 되지 않아 지속 지원사격이 불가능하므로 경기관총은 아니었다.

60여 년을 일선에서 활약한 명작

무엇보다도 20발이라는 적은 장탄량으로 말미암아 기관총의 역할을 완전히 담당하기 힘들었다. 소부대간 교전이 벌어질 경우 BAR가 독일군의 분대지원화기인 MG42기관총에 비해 절대 열세였지만 소총처럼 사수 혼자서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이동과 사용이 훨씬 편리한 장점이 있었다. 또한 미군 보병들 대부분이 반자동식 M1소총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소부대간 대결에서 독일군에게 밀리지는 않았다.

사실 미군도 고성능의 M1919기관총을 운용하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독일 기관총에 비하여 무거웠다. 따라서 일선 부대에서 별도의 준비 없이 소총처럼 즉시 사용할 수 있고 화력도 강한 BAR에 대한 인기가 높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렇게 호평을 받은 BAR는 제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맹활약하였고 7.62×51mm NATO탄에 맞게 변환된 모델은 베트남 전쟁에서도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에 사용 된 M1918A2 BAR

 

BAR가 일선에서 내려오게 된 것은 M60기관총 때문이었다. 현재도 일선에서 주력 기관총 중 하나로 사용되는 M60의 위상을 고려한다면 오랫동안 그 위치를 차지하였던 BAR의 위상을 조금이나마 반추할 수 있을 것 같다. 제1차 대전에서 처음 선보였던 총기가 기관총이 아니면서도 기관총 역할을 담당하며 60여 년 가까이 일선에서 활약한 사실만으로도 BAR는 상당히 흥미로운 총이라 할 수 있겠다.

 

제원(M1918A2 기준)
탄약 7.62mm×63mm (.30-06 Springfield) / 작동 가스 작동식, 틸팅 볼트 방식, 오픈 볼트 / 전장 1214mm / 중량 8.8kg / 발사속도 분당 300-450발(저속), 분당 500-650발(고속) / 유효사거리 548m

 

모신나강 소총

모신나강 M1891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기습 침공한 독일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불과 석 달 동안 민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등에서 놀라운 대승을 거두며 무려 300만에 가까운 소련군을 순식간에 붕괴시켜 버렸다. 인류가 벌인 전쟁사상 보기 드문 승전의 기록이었다. 독일군 선두부대는 모스크바를 향해 질주했고 소련의 최후는 멀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10월이 되자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지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는 겨울이 빨리 찾아온다는 것을 알았지만 독일군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독일 기상대가 그 해 겨울은 그리 춥지 않을 것이라는 예보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1년 유럽을 휩쓴 추위는 40년만의 혹한이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었고 신나게 달려가던 독일군도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혹한은 사람도 움츠러들게 만들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무기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총이나 대포 같은 화기도 툭하면 작동을 멈추었다. 그런데 이틈을 타서 반격에 나선 소련군은 쉬지 않고 사격을 가해 왔다. 그들의 무기는 바로 모신나강(Mosin-Nagant) 소총이었다. 그 동안 구닥다리라고 폄하하던 소련군의 소총이 모든 것이 얼어붙은 혹한에도 문제없이 불을 뿜어대자 독일군은 당황했다.

제1차 대전 당시 모신나강 소총으로 무장한 제정 러시아군. 모신나강 소총은 구식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독일군을 놀라게 했다.

오래되었지만 좋은 소총

모신나강은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 시절에 제작된 소총으로, 2차대전 당시 독일군 보병이 주력 화기로 사용하던 Kar98k와 비슷한 시기에 탄생하였다. 물론 처음 제작된 당시의 소총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변형과 발전이 있어왔다. M2 중기관총이나 M1911 권총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총기는 단지 오래 전에 탄생했다고 구식으로 치부할 수 없다.

모신나강은 독일군의 Kar98k에 비해 무게도 많이 나가고 더 길어 외관은 투박해 보였다. 1차대전에서의 교전 경험과 독소전 초반의 승리 덕분에 일선의 독일군은 소련군의 능력과 무기를 은연중 폄하했다. 더구나 슬라브족이 열등한 인종이라고 세뇌 당하다시피 한 보통의 독일군 병사들은 소련군이 좋은 무기를 사용한다는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엄밀히 말해 착각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독일군이 거둔 승리는 무기보다는 작전의 탁월함과 소련군 지휘부의 무능이 함께 어우러진 결과였다. 독일군의 생각과 달리 소련군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 그 중에서도 최전선 병사들이 직접 사용하는 무기의 품질은 상당히 우수했다. 모신나강 소총도 그러한 무기 중 하나였다.

 

다양한 종류의 모신나강 시리즈

패전에서 얻은 경험

1877년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제국은 또 다시 전쟁을 벌였다. 꾸준히 동방으로 진출하려던 러시아와 동방의 터줏대감이던 오스만투르크제국은 1770년대에 처음 충돌한 후 무려 100년 동안 싸움을 벌였는데, 이것이 여섯 번째였다. 대체로 러시아가 승리했지만 이번에는 최신식 윈체스터(Winchester) 소총으로 무장한 투르크군의 공격에 러시아의 피해가 컸다. 전후 러시아는 이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소총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제1차 대전 당시 방어전에 돌입한 러시아군. 백병전을 대비하여 커다란 검을 장착한 모신나강 소총의 모습이 마치 창과 같다.

 

러시아군의 세르게이 모신(Sergei Mosin) 대위는 벨기에 출신의 총기 엔지니어인 레옹 나강(L?on Nagant)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소총 제작에 나섰다. 그들은 30구경 탄을 탄창이나 클립을 이용하여 장탄하는 방식으로 연사력을 높이려 했다. 이렇게 제작한 소총을 곧바로 군 당국에 보내 실험에 들어갔는데, 상당한 호평을 받아 즉시 제식화가 결정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최초의 모델이 M1891이다.

외관은 당시까지 러시아군이 사용하던 베르단(Berdan) 소총과 유사했지만 성능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볼트액션 방식이어서 단발로 쏘아야 했지만 5발을 장탄할 수 있어 숙련된 사수는 빠르게 연사 할 수도 있었다. 7.62×54mm탄을 사용하여 유효사거리가 550미터로 길었고(조준경 사용시 750미터 이상) 파괴력도 양호했다. 비록 기다란 총신 때문에 휴대가 불편했지만, 총검을 장착했을 때는 마치 창과 같아 백병전에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가장 큰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1899년 중국에서 발생한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을 진압하려 8개국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때 러시아는 M1891을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했고, 이후 1905년 발발한 러일전쟁 당시에 많은 수의 모신나강 소총을 투입했다. 이처럼 탄생과 동시에 실전을 거친 모신나강 소총은 조준기, 노리쇠, 방아쇠 등에 개량이 이루어졌고 곧이어 발발한 1차대전과 적백내전을 거치면서 일선 장병들의 기본 화기로 애용되었다.

그렇다 보니 여타 소총과 비교하여 많은 종류의 파생 형이 등장했다. 특히 1907년에 등장한 기병용 M1907 카빈은 총신이 28.9센티미터나 짧아졌다. 하지만 초기에 모신나강은 의미 있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사실 소련군조차도 이 총의 장점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모신나강은 간단한 구조 덕분에 신뢰성이 좋아 악조건에서도 쉽게 사용이 가능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혹한의 날씨에도 무난히 작동했다.

한마디로 모신나강은 러시아 환경에 가장 잘 맞는 소총이었다. 2차대전 당시에 소련군 보병의 기본무장이었던 M1891/30은 전쟁 전인 1930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되었는데, 현존하는 대부분의 모신나강은 바로 이 모델이다. 전후에 총기사의 명품인 AK-47이 기존 소총과 기관단총을 일거에 대체하며 기본화기로 채택되면서 일선에서 퇴장했지만 누가 뭐래도 모신나강은 역사상 가장 컸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소총이었다.

저격수의 전설을 만든 모신나강

전설적인 소련의 저격수 자이체프와 그가 사용한 모신나강 소총

54명을 저격한 로자 샤니아(Roza_Shanina)와 그녀의 모신나강 소총

모신나강은 사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좋다 보니 저격용으로도 좋았다. 대규모 기동전에서는 이런 효과를 볼 수 없었지만 전선이 교착되거나 엄폐물이 많은 시가전 등에서 저격수의 역할은 컸다. 흔히 ‘원샷 원킬(One shot, One kill)’이라는 말로 설명할 만큼 저격용 총은 정확도와 파괴력이 생명인 무기다. 2차대전 당시에 소련군은 전쟁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저격수를 배출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애용한 총이 바로 모신나강 소총이었다.

2001년 개봉한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소련군과 독일군 저격병의 숨 막히는 대결을 묘사했다. 이 영화 주인공의 모델인 실존 인물 바실리 자이체프(Vasily Zaytsev)가 사용한 무기가 바로 모신나강 소총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242명을 저격했다고 하는데, 이때 사용한 탄환은 불과 243발이었다고 전한다.

단순함의 미학

모신나강 소총은 특수목적용 일부 모델이 1965년까지 제작되었을 만큼 장기간 생산되었는데 총 3,700만 정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산한다. 오랫동안 사용하다 보니 2000년 이후에 발발한 이라크 전쟁에서도 등장했다. 모신나강은 가혹한 조건에서 무리 없이 작동하는 만큼 어쩌면 단순함의 미학이 가장 빛난 소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에 북한군이 보유한 주력 화기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다지 눈길을 주고 싶은 소총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특이한 모양의 단축 형 모신나강

 

제원
탄약 7.62×54mm R / 작동 볼트액션 / 전장 1318mm / 중량 4.05kg / 발사속도 분당 15발 / 유효사거리 550m

 

발터 P38

발터 P38 <출처: ? http://www.adamsguns.com/>

 

제1차대전은 권총의 재탄생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가 오래된 무기이기는 했지만 그 동안 권총은 전투용으로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사거리가 짧고 파괴력도 부족한데다가 정확성도 좋지 않아 최전선에서는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간의 참호전이 계속되고 좁은 공간에서 피아가 엉켜 싸우는 일이 반복되자 권총은 훌륭한 전투용 무기가 되어버렸다.

 

주먹이 오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의 교전이다 보니 사거리나 정확도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작아서 휴대하기 편리하고 연사력도 뛰어난 권총에 대용량 탄창을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이 등장하자, 그야말로 권총에 날개를 달아 준 격이 되었다. 특히 32발의 트롬멜 탄창을 장착한 독일의 루거 P08의 위력은 조금 과장하면 기관단총 수준이었다. 이처럼 독일군 권총하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를 만큼 루거 P08의 유명세는 대단했다.

 

32발의 트롬멜 탄창과 개머리판을 장착한 루거 P08의 모습. <출처: (cc) Kar98 at de.wikipedia.org>

 

하지만 정작 독일군 당국은 좋은 권총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흙이나 먼지 같은 이물질에 툭하면 고장이 발생하여 야전에서 사용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뢰성에 문제가 많았고 더불어 단가가 비싸고 제작 시간도 길어 생산성도 나빴다. 단점이 파악되었으면 당연히 이를 개선한 새로운 권총이 나와야 했다. 그렇게 1938년 권총 역사에 커다란 획을 장식한 새로운 권총이 등장했다. 바로 발터 P38(Walther P38)이다.

새로운 권총의 조건

1935년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부정하고 독일의 재군비를 전격 선언했다. 그리고 그 동안 감시의 눈길을 피해 은밀히 연구하던 수많은 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본격 진행하게 되었다. 보유가 금지되었던 전차와 전투기를 비롯한 최신예 무기들이 속속 도입되었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주변국들이 놀랄 정도였다. 동시에 군부에서 불평 대상이었던 기존 무기에 대한 개량이나 대체 사업도 함께 개시했다.

여기에는 권총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선에서 툭하면 고장 나는 P08보다 좋은 권총을 요구했고, 이런 사정을 이미 잘 알고 있던 당국은 여러 총기 제작사에 새로운 제식 권총 개발을 의뢰 했다. 계획상으로는 기존의 P08을 모두 대체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여서 관련 업체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독일의 총기 명가인 발터 사도 그러한 경쟁 업체 중 하나였다.

 

새로운 권총의 개발 콘셉트는 간단했다. 야전에서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신뢰성이 좋고 제작비도 싸며 툭하면 발생하는 오발 사고를 막을 안전성만 확보하면 되었다. 물론 성능의 개량이 이루어지면 금상첨화였지만 권총의 기본적인 성능을 획기적으로 증대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도 100년 전에 개발된 일부 모델을 일선에서 사용할 정도로 권총은 목적이나 용도가 지극히 한정된 무기이기 때문이다.

 

P38의 원형인 AP(Armee Pistole 군용 권총). <출처: ? http://www.adamsguns.com/>

이미 개발했던 총

발터 사는 군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AP(Armee Pistole 군용 권총)를 이미 1936년에 개발한 상태였다. 약 55정의 초도 시험 물량이 제작된 AP는 내장 해머식으로 총의 슬라이드 측면에 안전장치인 디코킹 레버를 부착했다. 레버를 잠그면 슬라이드 작동 유무와 상관없이 해머가 코킹되지 않고 방아쇠는 계속 안전 상태를 유지하며, 레버를 해제하더라도 힘을 주어 방아쇠를 완전히 당길 경우에만 발사가 이루어졌다.

 

이를 시험해본 군은 상당히 호평했고 이에 고무 받은 발터 사는 개량 모델을 1937년 내놓으면서 HP(Heeres Pistole 육군 권총)이라는 자신만만한 명칭을 부여했다. HP는 독일군의 제식 탄환인 9mm 파라블럼탄을 사용했는데 몇몇 생산품은 실험적으로 .30루거 탄환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정식 채용 전부터 호평을 받은 HP는 약 3만 정이 생산되어 일부는 외국에 수출까지 되었다.

 

이처럼 제작사의 자신감이 가득 담긴 HP는 예상대로 독일군 당국의 시험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군의 요구 사항에 맞추어 약간의 개량을 거친 후, P38이란 명칭을 부여 받고 1938년 제식화되었다. P08의 고질적인 단점을 완벽히 개선한 발터 P38은 전쟁 기간 중 북아프리카의 사막, 러시아의 동토처럼 가혹한 전선에서도 문제없이 작동했다. 더불어 디코킹 레버와 AFPB(Automatic Firing Pin Block)라는 2중의 안전장치 덕분에 고질적인 오발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외부 충격으로 해머가 오작동 되지 않도록 파이어 링 후미에 장착된 AFPB는 오발사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이처럼 발터 P38은 성능은 물론 안전성까지 보장된 최고의 권총으로 특히 최초의 더블액션 방식 군용 권총이기도 했다. 방아쇠를 당겼을 때 공이 또는 공이치기가 후퇴했다가 전진하여 격발하는 더블액션 방식은 이후 현대 자동권총의 개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발터의 전작인 PP에서 전수 된 기술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싱글액션 방식으로도 사격이 가능하다.

 

P38과 홀스터 <출처: ? http://www.adamsguns.com/>

역사를 개척한 권총

더블액션은 약실 안에 탄이 들어있으면 곧바로 격발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리볼버와 달리 내부구조가 복잡한 자동권총에 적용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발터 사는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이를 자동권총에 적용하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콜트 M1911 권총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사격 시 총신이 위로 들리는 문제를 로킹 블록식 쇼트리코일 기술을 사용하여 최초로 극복했다.

 

발터 사는 이미 오래전에 더블액션 관련 기술을 확보하였고 1929년 제작한 PP권총에 이를 적용하여 경찰용으로 납품하기도 했다. 이 기술을 제작에 도입하면서 P38은 방아쇠만 당겨 속사가 가능하면서도 명중률이 뛰어난 최초의 더블액션식 군용 권총이 되었다. 한마디로 P38은 권총에 적용할 수 있는 혁신적인 모든 기술이 응집된 권총이라 할만 했다.

 

여담으로 P38 정도의 성능에 근접한 새로운 자동권총이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초 베레타 M92권총이 제식화하면서부터다. 그 정도로 P38은 시대를 앞선 무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혁신적인 신뢰성과 안전성 덕분에 P38은 자동권총의 기본 틀을 제시한 M1911, 198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글록과 더불어 자동권총의 역사를 개척한 3대 권총으로 뚜렷하게 자리매김했다.

 

발터 P38은 현재도 총기상의 주요 품목으로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출처: (cc) Rama at Wikimedia.org>

영원히 기록될 만한 권총

물론 P38에게도 단점이 없지는 않았다. 가장 고질적인 문제가 바로 생산성이었다. 워낙 정교하게 만들다 보니 많은 부품이 들어갔는데, P09가 45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반면 P38은 52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생산과 조립에 더 많은 시간이 들었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독일군이 원하는 수량을 제때 공급하기 곤란했고, 결국 독일군은 도태시키려던 루거 P08을 계속하여 함께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P38의 가격이 P08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 많은 부품이 쓰이고 제작시간도 더 걸린다면 가격이 비쌀 것이지만 정작 그렇지 않았다. 이런 아이러니한 결과는 발터 사가 원자재나 부품 조달에 있어 최신 경영기법을 도입하여서 그랬다기보다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독일은 무기나 군수물품 제작에 포로나 유대인처럼 강제로 동원한 노동력을 이용했었다.

 

P38은 여러 나라에 수출되거나 라이선스 생산되었고 독일에서는 2차대전 직후에 일단 생산을 중단했지만 군경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1957년 P1이라는 새로운 제식부호를 부여하고 2000년까지 꾸준히 생산했다. 이처럼 혁신의 집합체인 P38은 앞으로 새로운 권총이 등장하여도 그 권총이 화약을 사용하는 한 더 이상의 혁신적인 발전이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이론의 여지없이 총기 역사에 있어서 거대한 한 획을 그은 걸작이었다.

 

전후 P1이라는 이름으로 생산이 재개되어 독일연방군과 경찰에 납품이 되었다. <출처: (cc) Ralf Dillenburger>

 

제원
탄약 9×19mm 파라블럼 / 직동방식 쇼트리코일, 로크드 브리치 / 전장 216mm / 중량 800g / 유효사거리 25m / 장탄수 8 + 1(약실)

 

M60

M60 기관총. 접이식 양각대를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어 사격이 편리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사용하던 MG42기관총에 대해서 가장 강렬하게 인상을 받은 이는 바로 피해당사자인 연합군 병사들이었다. 특히 M1919나 BAR(브라우닝 자동소총)처럼 나름대로 훌륭한 지원화기를 보유했다고 자신만만하던 미군이 경험한 MG42의 뜨거운 맛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지옥이었다. 이처럼 너무나 심한 고통을 안겨준 적의 무기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부러움이었다.

 

미군은 즉각 MG42의 복제에 나섰다. 평시라면 자존심 때문이라도 자력 개발에 나섰겠지만 이보다 강력한 다목적기관총을 당장 만들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핵심은 7.92×57mm 마우저탄 대신 기존 미군의 제식탄인 7.62×63mm 스프링필드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개발 주체를 변경하면서까지 진행한 프로젝트는 6개월 만에 실패로 막을 내렸다.

 

미터법으로 표시된 치수를 인치법으로 변환하는데 실수하여 그랬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기술력이 부족하여 실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터득한 많은 노하우와 전후 패전국으로부터 노획한 여러 정보는 이후 새로운 기관총을 개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기관총이 현재 국군도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는 M60 다목적기관총 (GPMG-General-purpose machine gun)이다.

 

M60은 사격 훈련 중인 대한민국 해병대. 1974년부터 라이선스 제작하였을 만큼 우리나라도 M60의 주요 사용자였다.

본받을 대상

당초 당국의 요구는 한마디로 미군 규격에 맞는 MG42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목표를 쉽게 이룰 수 없었다. 우선 MG42가 일선의 보병들과 함께 이동하며 작전을 펼칠 수 있다는 점이 함부로 흉내 내기 힘든 부분이었다. 사실 경기관총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관총은 주로 거점에 거치해 놓고 사용하는 방어용 장비였다. 하지만 최전선에서 종종 사수들이 들고 공격에 나서는 MG42는 그러한 편견을 단번에 깨버렸다.

독일의 MG42 기관총. M60의 벤치마크 대상이 되었다.

 

물론 소총처럼 쉽게 휴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 기관총들에 비한다면 이는 대단한 발전이었다. 2차대전 당시까지 미군이 사용하던 M1919로는 그렇게 작전을 펼칠 수가 없어 보병들의 공격 시에는 BAR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하지만 MG42와 BAR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아무리 BAR가 좋다 하더라도 자동소총이었으므로 근본적으로 기관총의 역할을 대신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MG42는 싸게 대량으로 만들 수 있으면서도 성능이 좋았다. 그런 점에서 MG42는 대단한 히트작이었다. 그렇다 보니 나중에 개발에 나선 M60은 적어도 MG42가 가진 장점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했다. 당연히 MG42는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사실 경쟁 상대의 좋은 무기를 카피한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전쟁은 체면치레를 생각하며 벌이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독일의 기술을 발판 삼아 탄생하다

더불어 팔슈름야거(Fallschirmj?ger-독일 공수부대)가 사용하던 FG42 자동소총도 새로운 기관총의 개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FG42는 단가가 비싸고 구조가 복잡했으며 성능도 만족스러운 편이 아니어서 생산량이 5,000정 밖에 되지 않은 실패한 소총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가스작동방식과 소염기를 이용한 반동과 화염 축소 기술은 상당히 유용하였다. 이런 기술들을 이용하여 탄생한 초도 모델이 T-44였다.

 

독일의 MG42와 FG42를 참조하여 제작한 실험 모델인 T-44. 정식 제식화에는 실패하였지만 M60개발에 커다란 밑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조작이 불편하고 잔 고장이 많아 실패로 막을 내렸다. 가장 큰 문제는 탄띠를 장전하는 방식이었는데, 리시버 덮개를 상부로 변경한 T-161 모델을 개발하면서 난제를 해결했다.T-161을 실험한 미군 당국은 성능에 만족했고 마침내 1957년 M60이라는 제식명을 부여했다. 성능은 거의 비슷했지만 크기는 모방대상이던 MG42보다 약간 작아서 휴대가 더욱 편리했다. 굳이 차이라고 한다면 연사속도였는데 MG42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사실 MG42의 연사속도가 경이적일 정도로 빨라서 그렇지 M60의 분당 500~600발도 실전에서는 그다지 부족한 수준이 아니다. 연사속도가 빠를수록 탄 소비가 많아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과소비로 이어져 보급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다. 물론 기관총은 일정 지역을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원래 탄 소비가 많은 무기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난사하는 것도 올바른 사격 방법은 아니다.

 

M60은 경우에 따라 사수가 소총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도 있다. 따라서 소부대와 함께 움직이면 작전을 펼치기 용이하였고 그동안 분대지원화기 역할을 담당하던 BAR를 급속히 퇴출시켰다.

전환기의 모습

M60은 7.62×51mm 나토탄을 사용하는데 급탄은 100발이 장착된 탄띠에 의해 이루어진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접이 식 양각대를 부착하여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사격 정확도도 높다. 종종 진지 같은 고정 거점에서는 삼각대에 거치하여 마치 중기관총처럼 운용할 수도 있고 차량, 기갑장비, 헬리콥터 등에 장착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원래 탄생 목적처럼 최일선의 소부대에서 화력지원용도로 가장 많이 사용한다.

대개 사수, 부사수, 탄약 운반수 등 3인 1조로 운용되지만 종종 탄띠를 장착한 사수가 마치 돌격소총처럼 사격할 수도 있다. 영화 ‘람보’와 같은 액션물에서처럼 체격이 좋은 미군 병사들이 교전 중에 M60을 마치 소총처럼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휴대가 편리하여 미군은 1960년대 들어 이를 분대지원화기로 대량 공급했고 대신 오랫동안 활약하던 BAR는 일선에서 급속히 물러나게 되었다.

 

당시는 미군 당국이 한국전쟁의 경험에 힘입어 보병들의 제식화기를 신속히 교체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군은 별다른 변화 없이 한국전쟁에서도 M1과 BAR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이런 무장은 인해전술로 몰려드는 중공군에게는 역부족이었다.반자동과 부족한 장탄량을 가진 자동소총만으로 떼거리로 달려드는 중공군을 신속히 제압하기는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다목적기관총답게 M60은 차량이나 기갑장비에 장착되어 현재도 많은 수량이 사용 중이다.

 

월남전 당시 M60은 작전 환경이 열악한 정글에서 무난히 작동하여 사병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다.

장점과 단점

이때의 경험을 교훈 삼아 미군은 새롭게 제식화한 M14 전투소총으로 무장한 보병과 이들을 지원하는 M60을 조합한 소부대를 구성하였다. 모두 7.62mm 나토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보급도 문제가 없었고 비축해둔 탄도 충분했다. 하지만 무기의 진정한 성능은 실전을 통해서만 정확히 알 수 있는 법이다. M60은 생각보다 빨리 전쟁에 사용되었는데,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다.

 

M60은 고정된 거치 사격에서도 기관총 고유의 기능을 완수했고 병사들이 들고 뛰어 다니면서도 공격에 사용할 수도 있었다. 적어도 모델로 삼은 MG42에 못지않았다. 특히 교전거리가 짧고 은폐물이 많은 밀림에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육군뿐만 아니라 해병대와 한국군 등 동맹국 군대에게도 신속히 보급되었다. 그런데 하나 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총열이었다.

 

과열을 막기 위해서 분당 200발을 사격 시에는 2분마다 총열을 바꾸어야 했고 더구나 구조가 복잡하여 교환 시간도 길어 일선에서 많은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보다 5.56mm 나토탄을 사용하는 M16의 등장은 M60의 생존에 커다란 위협 요소가 되었다. M16 돌격소총으로 인해 M14가 급속히 퇴출되었고 이로 인해 탄 보급에 문제가 생겨 버린 것이었다.

 

M60은 총열이 쉽게 과열되고 교환이 어려운 단점이 있다. 거기에다가 5.56mm 나토탄을 사용하는 M16 소총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탄 보급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퇴출의 기로

바로 이때 M16과 같은 규격의 탄을 사용하는 M249가 등장했다. 굳이 일선 소부대의 사용 탄을 이리저리 나눌 필요가 없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경량의 분대지원용화기가 속속 등장하자 M60도 순식간 무거운 장비가 되어버렸다.거기에다가 사용이 편리한 M240의 등장도 M60의 입지를 흔들어 놓았다. 처음 등장 당시에는 상당한 기대를 모았지만 순식간 그 위치를 위협하는 경쟁 상대에 포위되어 버린 형국이었다.

 

M60의 자리를 위협하는 기관총들. 5.56mm 탄을 쓰는 M249(위)와 7.62mm 탄을 쓰는 M240(아래).

 

그런데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지 최근 들어 일선에서 5.56mm 탄의 위력 부족을 문제 삼아 7.62mm 탄을 사용하는 기관총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는 추세다. 때문에 아직도 상당 수량을 차지하는 M60이 새롭게 재조명 받고 있다. 하지만 이미 구시대의 유작이 되어버린 M60이 주력의 자리를 다시 차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어느덧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기관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5.56mm 탄의 위력 부족이 언급되면서 7.62mm 탄을 사용하는 M60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하지만 주력 화기가 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M60 제원
탄약 7.62×51mm NATO / 작동방식 가스작동식, 오픈볼트 / 전장 1,077mm / 중량 10.4kg / 발사속도 분당 550발 / 유효사거리 1,100m

 

경기관총의 아버지

ZB vz. 26 경기관총. 세계적 명성을 얻은 체코슬로바키아 경기관총이다.

 

사실 총은 칼이나 활처럼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무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투기나 전차처럼 몇몇 군사 강국만 독점해서 만들 수 있는 무기도 아니다. 웬만한 나라라면 카피를 해서라도 그럭저럭 총을 만들 수는 있는데, 의외로 군사 강국보다 좋은 총을 만들어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스라엘이 여기에 해당될 수 있겠지만 특이한 안보환경 때문에 국력에 비해 군사력과 무기 산업의 역량이 예외적으로 큰 경우라 할 수 있다.

총기의 강국 체코슬로바키아

이에 반하여 유럽의 소국인 체코슬로바키아(현재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벨기에, 핀란드 등은 국력이나 군사력이 작지만 총기 역사에 길이 남을 명품을 개발해낸 국가들이다. 특히 전통적으로 기계 공업이 발달한 체코슬로바키아는 뛰어난 여러 종류의 총을 개발하여 자국군을 무장시켰으며 많은 수가 해외에서 사용되어 명성을 드높였다. 그런데 체코슬로바키아제 총을 사용한 국가들 중에는 의외로 군사 강국들도 많았다.

그 중 ZB vz. 26(이하 ZB-26) 경기관총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체코슬로바키아산 총기의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탄생지인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해 제대로 사용된 적이 없는 비운의 기관총이었지만, 수많은 전쟁에서 주역으로 맹활약하였고 이후 탄생한 후속 경기관총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 희대의 걸작이었다. 한마디로 모든 경기관총의 아버지라 할 수도 있을 만큼 ZB-26은 뛰어난 기관총이었다.

 

훈련 중인 체코슬로바키아군 ZB-26 사수. 하지만 정작 조국을 위해 사용되지는 못하는 불운한 기관총이었다.

약소국에서 만든 기관총

제1차 대전은 기관총이 얼마나 무서운 무기인지 뚜렷이 입증시켰지만 휴대가 불편하여 주로 방어전에만 사용되었다. 따라서 쇼샤(Chauchat)같이 보다 가볍고 운반하기 쉬운 공랭식 경기관총의 탄생하여 일부 사용되었으나 성능은 상당히 미흡하였다. 종전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로노 조병창(Zbrojovka Brno) 소속의 엔지니어인 홀렉(V?clav Holek)은 휴대가 편리하면서도 성능이 뛰어난 새로운 경기관총의 개발에 나섰다.

 

그는 성공적이었던 BAR을 많이 참조하였지만 완성품은 전혀 차원이 달랐다. 신속한 교환과 원활한 급탄을 위해 탄창을 위쪽에 삽입하는 특이한 형태를 취하였다. 더불어 별도의 도구 없이 총열을 신속히 교환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이후 등장한 대부분의 기관총들이 따라 하였다. 이렇게 해서 1926년 신뢰성과 기능이 대폭 향상된 새로운 경기관총이 탄생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군 당국이 정식 채택하며 ZB-26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록 실전을 거치지 않았지만 좋은 무기는 곧바로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어서, 곧바로 해외에도 수출되었는데 처음에는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스웨덴 같은 유럽의 소국들이 이를 앞 다투어 구입하였다.이후 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 같은 남미와 중국 등도 이를 도입하였는데, 특히 20세기 이후 전쟁과 내전이 끊임 없이 반복되고 있던 중국은 ZB-26을 3만 정이나 수입한 최대 수입국이었다.

엉뚱하게 사용된 역사

ZB-26은 기계공업이 발달한 체코슬로바키아 무기답게 튼튼하게 제작되어 흙이나 먼지가 많은 야전에서의 신뢰성이 특히 좋아서 중국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더구나 구조가 비교적 단순하여 중국은 이를 무단으로 모방 생산하였을 정도였는데, 비록 성능은 미흡하지만 그래도 전투에 크게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중국보다 이를 무단 복제하여 대량으로 사용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중일전쟁 당시에 ZB-26을 노획한 일본군은 중국군이 자신들보다 좋은 성능의 경기관총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경기관총 개발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1935년 탄생한 것이 기존 30식 6.5x50mm탄을 사용하는 96식 경기관총이었고, 이를 보다 강력한 7.7x58mm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 99식 경기관총이었다. 이처럼 ZB-26은 무허가로 중국과 일본에서 생산되며 중일전쟁 당시 양측의 주력 병기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ZB-26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던 국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한 독일이었다. 독일은 MG26(t)이라는 독일군 제식명을 부여하고 ZB-26을 대량 사용하였다. 독일은 다목적 기관총의 효시로 인정받는 MG34와 역사상 최고의 기관총이라는 MG42같은 뛰어난 기관총을 보유하였지만 항상 물량이 부족하였다. 이때 점령지 체코슬로바키아의 고성능 ZB-26은 좋은 대안이 되었던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 입장에서는 대단히 통탄스러웠던 일이었다.

 

중국 국민당군이 사용 중인 모습

자신을 위해 사용되지 못하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제1차 대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슬라브계의 체크 족과 슬로바크 족이 주축이 되어 1919년에 독립한 나라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요한 산업 거점이었을 만큼 기계 공업이 발달하였던 체코슬로바키아는 독립 직후부터 훌륭한 여러 무기들을 자체 생산하였다. 어렵게 세운 국가를 자신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약소국의 결연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외적의 침략을 막기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작은 나라였다.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데텐란트(Sudetenland)가 1938년 독일에 강제 할양되었고 이후 나머지도 순차적으로 점령되었다.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만든 ZB-26은 정작 조국을 위해서 사용되지 못하였다. 반면 재군비 선언 후 급팽창한 독일군은 만성적인 무기 부족으로 고민이 많았으므로 당연히 성능이 좋은 ZB-26을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원이었던 관계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무기도 독일 권 공통 탄환이라 할 수 있는 7.92x57mm 마우저탄을 사용하였으므로 탄 보급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MG34, MG42보다 성능이 뒤처지지만 ZB-26은 이들과 급이 다른 경기관총이었다. 휴대하기 쉽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어 ZB-26은 속도를 중시하는 독일군의 새로운 전술 사상과 부합되어 전쟁 내내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브렌 기관총을 들고 돌격하는 영국군

영국에서 꽃을 피우다

하지만 ZB-26가 진정으로 꽃을 피운 곳은 영국이었다. 1930년 중반 영국군이 신형 경기관총 도입 사업을 시작하였을 때, ZB-26을 눈여겨보았던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영국 무관이 강력 추천하면서 후보 기종이 되었다. 심사 결과 당당히 채택되었고 .303브리티쉬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되어 1935년부터 라이선스 생산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브렌(Bren) 경기관총이다.

 

원 생산지인 브루노 조병창과 라이선스 생산한 영국의 엔필드(Enfield)조병창의 머리글자를 따서 명명한 것인데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영국군과 영연방군의 주력 지원화기로 맹활약했다. 그래서 세부 사양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독일군과 영국군이 같은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마치 제1차 대전 당시에 각기 다른 종류의 맥심 기관총을 가지고 교전을 벌이던 모습과 비슷하였다.

 

ZB-26을 사용하여 대공 사격 중인 중공군

 

한국전쟁 당시에도 같은 경기관총을 보유한 영국군과 중공군이 교전을 벌이는 경우가 흔하였다. 영국군 및 영연방군에게 브렌은 최고의 소부대 지원화기였다. 반면 중공군은 중일전쟁 당시 사용한 오리지널 ZB-26, 무단 복제 기관총,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96식, 99식처럼 다양한 형태의 ZB-26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구경만 약간 차이가 난다 뿐이지 피아가 모두 앞 다투어 사용할 만큼 ZB-26는 최고의 경기관총이라 할 만 했다.

이후 ZB-26의 최종 계승자라 할 수 있는 브렌은 7.62mm NATO탄을 사용할 수 있는 개량 형이 등장하여 포클랜드 전쟁과 1991년 걸프 전쟁까지 무려 60여 년간 현역에서 맹활약하였다. 한마디로 무기 역사의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칭하여도 결코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하나의 총이 지닌 역사만 놓고 본다면 이보다 더 기구한 운명을 겪은 총도 드물다고 할 것 같다.

 

제원
탄약 7.92 x 57mm 마우저 / 작동 가스작동식, 틸팅브리치블록 / 전장 1,150mm / 중량 10.5kg / 발사속도 분당 500발 / 유효사거리 1,000m

 

카빈소총

미군이 기존에 사용하던 M1903 스프링필드 소총을 대체하려 1936년에 제식화한 소총이 바로 M1 개런드(Garand)였다. 미군은 세계 최초로 반자동소총을 주력 제식 소총으로 채택하였고, 이것은 이후 2차대전에서 승리하는데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반자동소총은 구시대의 유물 정도로 취급 받지만, 적어도 2차대전 당시에는 이에 필적할 만한 소총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미군 병사들이 M1 개런드에 만족했던 것은 아니다. 군인이라고 반드시 총을 들고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어서 행정, 군수 등의 지원병과 뿐만 아니라 전투병과라도 포병, 기갑 같은 경우는 총을 들고 직접 교전을 벌이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이들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당연히 총을 보유해야 했는데, 무겁고 전장이 긴 M1 개런드는 휴대가 불편했고 너무 과했다.

 

반면 권총은 너무 사거리가 짧고 화력도 약했다. 기관단총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2차대전 초기에 미군이 사용하던 톰슨 기관단총은 비싼데다가 무겁기까지 했다. 결국 휴대하기 편리하고 웬만큼 화력도 좋으며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은 새로운 보조 소총이 필요했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따라 미군 당국은 새로운 경량 소총 개발에 나섰고 그 결과 M1 카빈(Carbine)소총이 탄생하였다.

기병대가 사용하던 총에서 유래

원래 ‘카빈’은 말을 타고서, 혹은 말을 이용하여 목적지까지 기동하여 싸우는 기병대가 사용하던 총을 의미한다. 인간이 말을 사용한 것은 약 1만 년 전인데 말보다 빠른 교통수단을 확보한 것이 불과 200년 밖에 되지 않았다. 당연히 말을 군용으로 사용한지도 오래되어서 일부 국가에서는 2차대전 당시까지도 기병대를 전투병과로 운용하였다.

 

그래서 기병대에 적합한 무기가 별도로 제작되었던 것이었고 이것은 총도 마찬가지였다. 말에 탑승해서 사용하므로 일단 휴대가 간편해야 했다. 그래서 대개 카빈은 기존 소총의 총신을 짧게 만드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사거리가 짧아지고 그만큼 파괴력 떨어지고 정확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통적 의미의 카빈도 기병의 퇴조와 더불어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미군 당국은 새롭게 개발된 소총이 비록 기병대용은 아니지만 마치 예전에 휴대성을 강조하던 카빈과 목적이 비슷하다고 판단하여 이름을 ‘M1 카빈’으로 명명했다. 그렇다 보니 M1 카빈을 대개의 카빈 소총들처럼 비슷한 시기에 제식화 된 M1 개런드를 단축시킨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반자동소총이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이 둘은 전혀 다른 별개의 소총이다.

 

M1 개런드와 M1 카빈. 반자동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둘은 전혀 별개의 소총이다.

탄으로 귀결된 해법

30구경 카빈탄(.30 Carbine) <출처: (cc) Dean Grua>

 

이처럼 새로운 소총에 대한 일선의 요구가 계속되자 군 당국은 유효사거리가 200~300미터 정도인 가볍고 다루기 쉬운 자동화 소총 개발에 나섰다. 결론적으로 총탄이 문제였다. 휴대하기 편리하게 크기를 기존 소총보다 작게 하면서도 권총탄을 사용하는 기관단총보다는 강한 화력을 발휘하려면 그에 맞는 새로운 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윈체스터(Winchester) 사가 탄약 개발에 나섰는데, 1906년에 시험 삼아 만들었던 .32WSL 탄을 바탕으로 했다. 반자동이나 자동 총기는 사격 시 발생하는 가스의 일부분을 노리쇠를 후퇴시키는데 사용하는데, 특히 WSL은 이에 적합하게 개발된 탄이었다. 윈체스터 사의 엔지니어인 퍽슬리(Edwin Pugsley)는 이를 조금 축소한 .30WSL을 1938년에 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30구경 카빈탄(.30 Carbine)이다.

그런데 현재 사용 중인 대부분의 자동소총용 탄은 기존 소총탄을 단축한 방식이지만 이와 달리 30구경 카빈탄은 권총탄을 늘린 형태였다. 그 이유는 원래 .32WSL이 톰슨(Thompson)이나 M3처럼 기존에 권총탄을 사용 중인 기관단총의 화력을 증대시킬 목적으로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적을 일격에 쓰러뜨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진다고 일선에서 불평이 있었을 만큼 권총탄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해병대와 궁합이 맞다

그런데 이 새로운 탄은 녹이 쉽게 슬지 않는 장점이 있어서 바다나 해안가에서 싸우는 해병대에게 적합했다. 육중한 군장을 둘러맨 체 상륙작전을 펼치고 경우에 따라 습한 밀림 속에서도 교전을 펼쳐야 하는 해병대에게 휴대하기 간편하고 총탄의 내구성도 좋은 M1 카빈은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그래서 M1 카빈은 제작 단계부터 해병대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다.

 

M1 카빈의 이전 모델이 윈체스터 M2(이후 1944년 개발된 M2 카빈과 별개임) 소총이었는데, 1940년에 실시된 미 해병대의 자동소총사업에 참여했다가 모래투성이의 환경에서 고장이 잘 나는 결함이 드러나 채택을 거부당한 상태였다.경쟁에서 탈락한 윈체스터는 틸팅 볼트(Tilting Bolt)대신 M1 개런드에 적용된 회전노리쇠 방식으로 구조를 변경하고 때마침 개발한 .30WSL 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M2를 개량했다.

이렇게 탄생한 개량형은 때마침 새로운 보조 소총을 원하던 육군을 만족시켰고 1941년 10월 ‘M1 카빈’이란 정식 제식명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대량생산에 들어가 1942년 중반 유럽 원정군에게 지급이 완료되었다. 가볍고 교환이 편리한 대용량 탄창이 일선에서 호평을 받았는데, 보조 병기로써 소요를 제기한 육군보다 처음부터 관심을 보인 해병대에서 더 많은 활약을 선보였다..

 

박격포처럼 중화기를 담당하는 병사들에게 휴대하기 편리한 M1 카빈은 상당히 훌륭한 제식 소총이었다.

이오지마 전투 당시 M1 카빈을 사용하는 미 해병대의 모습. 습기가 많고 이물질이 많은 장소에서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어 해병대에서 평이 좋았다.

맹활약 하지만 급속한 도태

이름처럼 M1 카빈은 작고 가볍기 때문에 밀림이나 시가전에서 상당히 유용했고, 특히 권총탄을 사용하는 기관단총에 비교한다면 파괴력이 월등히 좋았다. 이후 M1 카빈은 다양한 개량형이 등장했다. 주요한 것만 살펴보면, 완전 자동(Full Automatic) 사격 기능을 추가한 것이 M2이고, M3는 야간투시경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다. 완전 자동인 M2 카빈은 새로운 제식 소총의 대안이 될 만했다. 그렇다 보니 M2 카빈(M3 카빈 포함)의 성격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기관단총과 달리 M2 카빈이 사용하는 카빈탄은 비록 권총탄을 늘린 형태지만, 생각하기에는 소총탄을 축소한 것과 같다고도 볼 수 있으므로 돌격소총의 범주에 넣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 파괴력이 부족하고 원래 탄생 목적이 성능을 강화한 일종의 기관단총이기 때문에 카빈이 맞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제작사나 책자 등에서 굳이 세세히 분류를 했다 하더라도 정작 이를 들고 다니며 싸우는 당시 병사들에게는 그런 구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탄약의 차이로 말미암아 살상력이 차이가나지만 기본 제식화기인 소총은 병사가 임의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군에서 일방적으로 지급하는 것이므로, 돌격소총이니 카빈이니 하는 구분은 전혀 불필요했다.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를 사용하는 이들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M1 카빈과 그 파생형 소총들은 2차대전은 물론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에서도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완전 자동인 M2 카빈은 돌격소총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화력이 부족하여 더이상 진화를 할 수 없었다. <출처: (cc) Joe Mabel>

6.25전쟁 당시 미 해병대가 저격용으로 사용한 M3 카빈 <출처: (cc) Curiosandrelics>

아직도 살아있네

그러나 이를 기점으로 M1 카빈은 일선에서 급속히 도태했다. 총신이 짧다 보니 사거리가 짧고 명중률도 떨어졌지만, 무엇보다 화력이 부족하다는 결정적 단점은 극복하기 어려운 난제였다. 더구나 별도의 전용탄을 사용한다는 점도 군축 시기에 가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이러한 가운데 돌격소총이 제식 소총의 대세가 되자 M1 카빈은 더 이상 일선에서 사용하기에 부족한 화기가 되어버렸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 신뢰할 만한 기관단총이 없었던 미군 특수전 병력이 M16을 도입하기 전까지 M1 카빈을 일부 사용하기도 했지만, 1970년대 들어서 어느덧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M1 카빈은 수많은 물량이 우방국에 공급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전쟁 동안 100만 정이 넘게 공여 받은 우리나라는 현재 최대 보유국이다. 그렇다 보니 2015년까지 완전 대체하기로 예정되었지만 한국에서 M1 카빈은 현재도 예비군 훈련에 일부 사용 중인 역전의 노장이다.

 

제원
탄약 7.62×33mm (.30 카빈) / 작동방식 가스작동식, 회전노리쇠 / 전장 904mm / 중량 2.36kg / 발사속도 분당 50발 / 유효사거리 2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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