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수
3시간 ·
【평화의 벗 최창모 교수를 애도하며_박노해 시인】
나눔문화의 오랜 평화의 벗,
최창모 교수(건국대학교 명예교수)가
향년 66세로 지난 1월 6일 소천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보적인 히브리 문명 전문가이자
실천하는 지성인이었던 최창모 교수는
2003년 전쟁의 이라크에 뛰어든
박노해 시인의 곁으로 달려가
함께 평화활동을 펼쳤습니다.
그 이후로 팔레스타인, 시리아 쿠르드,
에티오피아, 수단 등 박노해 시인이 갔던
위험한 분쟁현장에 그가 함께 있었는데요.
최창모 교수를 떠나보내며
박노해 시인이 쓴 애도의 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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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모 교수님이 돌아가셨다. 히브리 학자로 우리 정신문화를 풍요롭게 하고, 많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읽고 배우고 겪은 깨달음을 아낌없이 물려주고, 곧고 선한 마음씨로 늘 자상하고 유쾌한 웃음을 전하던 좋은 벗이었다. 그는 나눔문화와 함께 ‘글로벌 평화활동’에 큰 족적을 남긴 선구적 지성인이었다.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빈곤, 군사독재와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숨가쁘게 경유해온 이 풍진 세월의 현대사에서, 우리 한국인은 국제사회의 도움과 원조에 힘입은 바 컸으나 우리의 시야는 분단된 반도 안의 긴급한 문제 안에 갇혀 있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시작된 ‘반전평화운동’은 한국인이 세계 각지에서 부당하게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인류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3년 3월 17일 새벽 3시,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 선포 직후 나는 혈혈단신 전쟁의 바그다드를 향해 떠났다. 무모한 결단이었으나 그래야만 했다. 우리 인생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영혼의 부름에 따라야만 할 때가 있다. 그로부터 인생의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마는 결단의 때가 있다.
모처럼 안식년을 받아 예루살렘의 수도원에서 일생의 저작을 쓰고자 했던 최창모 교수는 나눔문화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달려와 주셨다. 민주화 투쟁 시절 유학을 떠나 함께하지 못했던 빚진 마음과 낯선 중동의 전쟁터에 뛰어든 ‘저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했다.
그날로부터 75일 동안 그와 나는 동숙을 시작했다. 전쟁 통에 내 가방이 분실되어 뒤늦게 찾는 바람에 최 교수님의 속옷과 칫솔까지 함께 쓰는 생활이었다. 폭격으로 봉쇄된 이라크 국경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요르단 암만에서의 하루하루는 피가 마르는 날들이었다.
어떻게든 바그다드로 가는 길을 찾느라 수척하고 예민해진 나를 최 교수님은 집요하게 설득해 가나안 광야로 데려갔다. 구약시대 역사의 현장을 거닐며 큰 시야와 긴 호흡을 가다듬어야 앞으로 닥칠 전쟁의 현장도 잘 헤쳐 나가리라는 말 없는 배려였다. 나는 불타는 정적의 광야를 거닐면서 “비록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내 안에 전쟁이 살지 않기를”이라는 기도문의 시를 수첩에 적고 가슴에 새겨왔다.
드디어 바그다드로 들어가던 날, 나는 최 교수님과 작별의 포옹을 나눴다. “저 먼저 갑니다. 최 교수님, 부디…” 목이 메어 차문을 닫는 순간, “아니오! 저도 같이 갑니다!” 눈물과 모래먼지로 얼룩진 최 교수님이 외쳤다. “사모님이랑 아이들을 생각하세요. 안됩니다.” 나는 단호하게 그를 떠밀었다. 눈물을 닦고 난 최 교수님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낱 사람인 제가 그 사람을 어떻게 지켜요. 아이들 앞날의 생을 사람인 제가 어떻게 돌봐요. 하느님이 가호해 주실 겁니다. 자, 밤길 공습이 심해질 테니, 출발합시다.”
바그다드에 도착하자마자 최 교수님과 나는 밤을 새워가며 평화활동 작전을 짰다. 각국의 평화활동가와 탐사기자와 접촉해 정보를 모으고 이라크의 정파 지도자와 유력 인사들을 찾아 만나고, 언론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이라크 정세와 사람들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우리는 전쟁의 참상과 절망 속에서도 자치위원회를 만들어 마을을 재건하고 앞날의 비전을 진지하게 물어오는 청년들을 만나며 ‘희망찾기’에 주력했다. 나눔문화 회원님들이 이라크 현장까지 전해준 성금으로 희망의 나무를 심고 바그다드 외곽의 빈민지구에 아이들의 학교를 세우는 계획에 착수하기도 했다.
전쟁터에선 먹을 물과 음식이 급선무였다. 최 교수님은 나의 통역을 하는 틈틈이 어디론가 가서는 시든 오렌지 한 개, 덜 상한 빵 조각과 대추야자 한 줌을 구해와 “중동에선 뭐든 먹어야 삽니다. 자, 내 앞에서 다 삼키세요”라며 마치 어미 새가 먹이를 물고 와 새끼 입에 넣어주듯 그렇게 챙기셨다.
이라크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에 나는 최 교수님과 폭넓고 긴 시야로 나눔문화의 평화활동을 이어갔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쿠르드, 전쟁의 레바논, 아프리카 수단과 에티오피아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힘겹고 위험한 여정을 함께했다. 그 나이에, 그 거친 환경에서, 그 적은 예산으로, 날이 선 긴장을 감내하며 실수 하나 없이 그 많은 일을 함께해줄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나에게 최창모 교수님은 ‘눈물의 사제’이자 ‘우는 은총’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타인을 위해 이렇게 눈물이 많은 남자를 본 적 없다. 그는 폭격으로 불탄 집 앞에 망연히 앉아있는 할머니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울고, 부상당한 소녀와 굶주린 아이와 학살당한 이들의 흙무덤 앞에서 오열하고, 이스라엘군이 베어버린 팔레스타인의 천년 된 올리브나무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나는 그 참담한 현장의 사람들 앞에서는 울지 않는다. 그러나 최 교수님은 내가 언제 홀로 몰래 우는지, 고문후유증을 어떤 신음 속에 견뎌내는지를 아는 극소수의 사람이었다. 그렇게 최교수님은 내가 억누른 눈물을 울었다.
팔레스타인에서 평화활동을 하던 중에 이스라엘군의 장갑차가 우리를 포위하고 총구를 겨눈 적이 있었다. 격노한 최 교수님이 “이 가련한 청년들아, 너희가 지금 무례하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소리쳤다. 지휘관인 듯한 청년장교가 최 교수님에게 몰래 속삭였다. “명령이 떨어지면 발포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시간을 끌어볼 테니 어서 가세요. 근데 뛰면 안 돼요. 아시겠죠.” 나는 최 교수님을 앞세우고 등으로 방어하며 걸어나갔다. 퍼뜩 상황을 느낀 최 교수님이 “박 선생님, 내 앞에 서요, 빨리요” 하며 나를 감쌌고 나는 “시간이 없어요. 얼른 내 앞으로 와요” 다급히 그를 내 등으로 막았다.
그러자 이 백면서생 최창모 교수가 뭐라고 했던가. “아이 참, 죽고 사는 문제는 하늘 일이지만, 우리 죽어도 멋지게 죽읍시다. 박 선생님, 우리 나란히 가다 죽읍시다.” 그러더니 유유히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생사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지상의 마지막 노래를 같이 부르곤 했다.
그렇게 지나온 10여 년 세월을 나는 최창모 교수님과 함께 눈물 흐르는 지구의 골목길에서 많은 일들을 해올 수 있었다. 목마른 땅에 생명의 우물을 파고 공동 작업장을 세우고 고아들의 도서관을 세우고 난민촌에 학교를 세우고 파괴된 삶터에 희망의 나무를 심고 눈 맑은 청년 지도자를 찾아 자립 자율의 기반을 세웠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 평화활동의 대가로 그는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중동에서는 이스라엘 쪽이라고, 이스라엘에서는 아랍 쪽이라고, 또 기독교에서는 이슬람 쪽이라고, 이슬람에서는 기독교 쪽이라고 배척당하기 일쑤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학과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그는 제자들을 지키기 위해 캠퍼스에 농성 텐트를 치고 힘겹고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더 아프고 힘없는 이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울음을 삼켜왔을 것이다.
이제 그가 돌아가신다. 그가 살아온 한 생을 돌아가신다. 살아온 날들을 거슬러 오르며 여기 지구에 탄생한 날을 넘어 그를 여기에 데려다 놓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여정에 오르고 계신다. 그가 안고 울어준 이들이 그를 어루만지며 울어줄 것이고 그가 분노한 사악한 자들이 그의 빛 앞에 숨고 물러설 것이다. 사랑이 많고 선한 일을 행해온 그에게 앞서 간 의인과 성현들이 애썼다고, 잘 살아냈다고, 잘 바쳐왔다고, 자신의 생을 완주한 그를 안아줄 것이다. 그의 걸음이 끝난 자리에서 나는 더 분투하고 정진하며 남은 일을 해나갈 것이고 남김없이 다 바치다 어느 날 나 또한 앞을 향해 쓰러져 갈 것이다.
최창모 교수님이 돌아가신다. 이제 ‘눈물의 사제’직을 벗고 ‘웃음의 소년’으로 돌아가소서. 이제 ‘순명의 전사’복을 벗고 ‘자유의 여행자’로 돌아가소서.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이 도열하여 눈물과 미소로 애도하고 그를 알게 될 모든 이들이 그의 ‘우는 은총’과 ‘헌신의 아름다움’을 전해 받으며 그 이름을 기억하기를.
코로나 격리 속에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곁에서 그를 지키신 사랑이 많은 아내 황영자님과 자녀 최형욱님 최형인님 최나경님에게 하느님의 위로와 가호가 있기를.
최창모 형, 편히 돌아가 오르소서!
2022년 1월 8일
당신과 18년을 동행해온 나눔문화 연구원들과 함께
박노해 시인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