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현충일이 다가왔다. 항일독립운동을 걸쳐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가문의 수난사가 아닌 날이 없다. 언제쯤 다시 일어나 명맥을 이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6.25전쟁으로 우리집에는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일제에 대항하다 증조부가 이름없이 돌아가시고 9살이었던 조부를 살리기 위해 일본인들의 만행을 피해 안동시 일직면 원리에서 안동시 길안면 금곡리로 첩첩산중으로 숨어 들어왔다. 우리에게 잘알려진 미스터션사인 촬영지인 안동시 길안면 묵계서원 앞산의 만휴정 첩첩산중 뒷쪽에 용담사가 있는 소일마을이다. 이곳은 옛날 퇴계학파의 적통을 이은 대산이상정의 외증손 정재류치명의 학행과 언행을 기록하기 위해 정재집 편찬을 위해 안동의 유림들이 머물렸던 안동 일직과 안동 임동면 수곡의 중간 정도의 위치이다. 이곳에서 문집간행을 마무리하기위해 긍암 이돈우가 나의 할배 대은 이수영이 지나면서 미스터션사인 촬영지 만휴정에도 글을 남겼다. 그런데 이 골짜기 첩첩산중에 일제치하시 나의 증숙부님도 일본인들이 보기싫어 항일의 의미로 안동시 일직면 금곡리 용담사가 있는 마을로 오셨다. 그래서 안동 일직에는 큰집인 증백부네와 증숙부님의 두 아들중 막내아들만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6.25전쟁이 일어났다. 북한군이 이 첩첩산중으로 들어올거라고는 생각도 못할 정도의 오지중 오지인곳인데 북한군이 들어왔다.
북한군은 마을사람들을 겁박하고 음식이나 말을 듣지않는 사람들은 죽이는 것을 밥먹듯이 하는 그런 만행을 저질렸다. 나의 숙부 이원복은 갓난아기 여동생이 밥달라는 소리 조차 듣기 싫었는지 소리내었다고 가족 전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통을 주었고 결국 북한군에 대항하다 젊은 나이에 혼인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또한 마을의 훈장으로 학문의 깊이가 높았고 인심이 좋았던 나의 증숙부네는 안동김씨 도평의공파의 종택이자 임진왜란시 명재상 서애 류성룡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한 만취당종택과 인연이 깊어 윗대에서 혼인이 있었고 또 혼사를 위해 마을에 오셨고 증숙부네는 살기가 편안 좋은 곳이라고 증숙부와 재종조 전이실 이인구할배는 장녀를 의성 사촌마을 만취당종가에 시집보내셨다.
그래서 아들하나를 두었는데 그 아들이 현재의 의성사촌마을 만취당 종가의 종손이다.
늘 인심이 좋아서 남한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편하게 살기를 바라고 보낸 만취당종택은 늘 끊임없는 제사가 일년에도 수시로 자주 있는곳이었다. 그럴때마다 외가에서는 솔잎도 따고 온갖 제수준비를 돕는다고 늘 바쁘게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 온 북한군들은 자기들이 불을 피울때는 가문대대로 내러오는 엄청나게 많은 몇트럭에 해당하는 한문문집이나 서적 가문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은 불피우는 도구인지 불온서적으로 여겼는지 알 수는 없지만 문집이나 기타는 불을 피워 소각하였고 또한 자기들에게 순종하지 않은 이들은 죽이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래서 현재의 의성김씨 도평의공파 대종택 만취당종가의 현재의 종손의 부친과 모친은 6.25전쟁으로 인해 돌아가셨고 현재의 종손만 외딴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북한군들은 집들도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우리집도 불에 타서 모든 것이 사라졌고 의성 사촌마을 만취당 종가의 외가도 이때 불에 타서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래서 일까? 6.25전쟁 날짜만 다가오면 늘 빨갱이라는 글자에 분노하였고 나의 집과 재종조의 집이 모두 불타서 전쟁이후는 지금껏 이전 나누어주고 베푼 원인이 복이 되어 돌아왔는지 이웃집의 도움을 받았고 그렇게 힘을 합쳐 그곳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