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초기 예배모범과 그 역사 연구 들어가는 말 선교의 기적이라고 자랑하는 한국교회 설교와 예배에 대한 교육은 과연 누구에 의해 시작됐을까? 한국 최초 신학교육의 요람지였던 평양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을 담당했던 교수는 누구일까? 이러한 질문의 해답으로 지목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곽안련 목사(Charles Allen Clark)이다. 곽안련은 1878년 5월 14일 목수였던 아버지(William Oliver)와 청교도의 후예였던 어머니(Lillian Caroline)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2년 9월 22일 한국의 땅 제물포로 입국하여 1922년 평양신학교의 교수로 봉직하기 위하여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그는 교회를 세우고 사랑하고 섬기는 목회하는 목사의 길을 20년 동안 걸었다. 그가 1906년 승동교회의 담임을 하였으나 그의 목회 무대는 실로 넓었다. 그가 품고 있었던 끊임없는 전도의 열기는 150여 개의 교회들을 개척하기에 이르렀으며, 자신이 당회장으로 성례를 집례해야 했던 교회가 매년 20여 교회였다. 어떤 해는 150여 교회를 책임을 지고 순회하였고 그런 때는 그의 절대적인 교통수단이었던 말 위에서 거의 시간을 다 보내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40년간(1902~1941) 한국교회를 섬기면서 실천신학을 이 땅에 심었던 사람이다. 1907년 한국의 장로교회는 최초로 7명의 훈련된 목사를 배출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1907년 대부흥운동의 여파로 급성장하고 있었으나 목회자가 부족한 상태였고 목회자의 자질 또한 문제인 상태였다. '목사필휴'(牧師必携, 서울 : 남양인쇄소, 1948)를 펴냈으니 이 책은 초대교회의 목회 지침서였던 것이다. '목사필휴'에서 그가 제시한 기초적으로 예배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갖춰야 할 내용들을 살펴보면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이는 그의 실천신학 교육이 매우 철저히 다뤄졌으며 그 교육을 받은 우리의 초기 목회자들의 자질이 매우 우수했음을 입증하기도 한다. 목회자의 지침서로서 '목사지법'은 한국교회 초기에 출판돼 목회현장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 지 36년 후인 1955년에 '곽안련 기념 출판위원회'에서는 '목사지법'을 현대어로 새롭게 정리하고 수정 보완해 '목회학'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목사필휴'는 단기 4281년(1948)에 3판, 5년 후 단기 4286년(1953) 7월에는 부산에서 5판을 단기 4292년(1959)에는 8판을 하였으니 목회자들에게는 '필휴'라고 하겠다. 필자는 '목사필휴'를 1948, 1953, 1959년 판을 애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언어를 가지고 말을 하며 글을 쓰는 가장 위대한 존재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배하는 복을 받았으니 예배다운 예배를 하여야겠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 가운데는 국적이 없는 신조어 우리 어법에 맞지 않는 말들 그리고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말들이 수없이 많다. 이것은 130년 전 선교 초창기 성경과 찬송가 등을 번역할 때 우리 어법과 문화를 고려하였지만 부족한 것이 많았고 오역한 결과라고 하겠다. 또 다른 종교나 무속신앙의 용어를 걸러내지 않은 채 그대로 도입하였고 특히 외래어와 외국어를 잘못 이해를 하거나 남발하는 것도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우리의 옛 선조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초대교회를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숨어있는 역사들 속에 아름다움을 더듬어본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잠언 25장 11절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 하셨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35절에는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에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헌법 개정판(2014년 3월 10일 개정1쇄) '예배모범'을 중심하여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 자료를 근거하였고 계속 보완하려고 하니 독자들께서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샬롬! 주후 2021년 6월 20일 김병화 제1장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 1.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의무이니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 대로 그 날을 거룩히 지킴에 구애가 없게 하라. (출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 31:13-17)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을지니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니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2.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 회집으로나 개인적으로 선행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 (출 20: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출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3. 먹을 것까지도 미리 준비하고 이 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출 20:10)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4.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저희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함으로 공동 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 (계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행 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고전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5. 개회 때부터 일심 단합함으로 예배 전부에 참여하기 위하여 정한 시간에 일제히 회집함이 옳고 마지막 축복 기도할 때까지 특별한 연고 없이는 출입함이 옳지 않다. 주) 개회는 회의를 시작할 때 개회이다. 예배는 회의가 아니다. 축복 기도할 때까지는 '축복'(정치 제7장 교회 예배 의식 11항) 할 때까지는 축복으로 제45회, 제96회, 제100회 총회(합동)가 결의하다.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엡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6. 이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 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 날 남은 시간은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며 묵상하며 성경 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경건하고 사랑하며 은혜로운 일을 행함이 옳다. 주일 예배 1) 종용히 묵도로 예배를 시작하며 단정하고 경건한 태도로 엄숙히 예배하여야 한다. 주) 묵도는 기도(정치 제7장 교회 예배 의식 1항, 합동) 묵도는 일제 강점기 때 통치자였던 일본인들은 기독교 교회에 대하여 그들의 숭배 대상인 신사에 먼저 절을 하고 난 다음에 너희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강압적인 명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예배 전 신사에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순서를 넣었다. 이것이 묵도라는 것이다. 제94회 합동총회는 묵도를 불가하다고 결의하다. 묵상기도의 준말이 아니다. 철야기도를 철도라 하지 않는다. 2) 이상한 동작과 경건하지 못한 태도로 찬송이나 찬양을 인도하여 예배의 신성함을 손상하지 말아야 한다. 주) 예배당에서 성극과 유희하는 것은 가히 합당하지 못하므로 당회가 신중히 처리하도록 하였다.(합동, 1953, 제38회 총회 결의) 3) 주일예배 시간에는 예배와 성례 외에 다른 예식은 다른 날에 행하되 가급적 간단히 행함이 옳다. 4) 주일예배 시간에 어떤 개인을 기념, 축하, 위안, 치하하는 예배를 행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께만 예배하여야 한다. 주) 임직식과 예배는 분리해야 한다. 결혼식, 장례식, 임직식, 승진감사, 헌당식 등은 하지 않는다. 1부 예배는 인도자, 2부 임직식은 사회자가 하면 마음껏 축하도 박수도 하며 불신자가 인사나 축사 등을 할 수 있다. 주) 성전봉헌식과 임직식의 예물증정 순서 교회에 먼저 하고, 목사에게, 다음 직분자에게 한다. 5) 예배당 구내에 개인을 위하여 송덕비나 공로 기념비나 동상 같은 것을 세우지 않는다. 주) 한국교회가 136년 전 첫 주일예배 한국교회가 첫 주일예배를 드린 날은 1885년 6월 21일이다. 한국교회 첫 주일예배는 미국 북장로회 제1호 한국 선교사인 헤론 가족의 입국을 환영하는 저녁식사 자리 후 알렌 선교사의 집에서 드려졌다. 알렌과 헤론 선교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의 기초를 닦은 의료선교사들이었다. 1882년 한미조약 체결로 이 땅에 선교사들의 입국이 허용되었다. 그리하여 1884년 알렌 의사가 들어왔고, 그 이듬해부터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그들은 주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 종사하여 한국민으로부터 신임도 얻었고 환영도 받았다. 그러나 기독교 포교는 여전히 금지된 상태에 있었다. 선교사들은 합법적으로 포교할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모든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미조약에 의해 합법적이고 안전한 종교적 자유는 서양인들을 위한 외인 예배를 드릴 수 있으되 그것도 지정한 거주지에서만 허용되었다. 그리하여 1885년 6월 25일 주한 선교사들은 '알렌' 의사의 집에서 최초의 주일 집회를 가졌는데, 이것이 외국 선교사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한국 당에서의 최초의 공식 주일 예배였다. 알렌 선교사는 당시 일기에 '우리는 오늘(21일) 저녁 8시 이 땅에서 첫 공식 주일예배를 드렸다'며 헤론 선교사 부부, 스크랜턴 선교사의 어머니, 알렌 선교사 부부가 예배에 함께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초기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를 세웠던 언더우더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중원에서 성례식을 집례했던 만큼 제중원 신앙공동체는 한국교회의 역사'이다. 주) 1901년 조선인 장로들도 참여하여 '조선예수교공의회'를 조직하다. 주) 1901년 5월 15일에 '평양신학교를 설립 개교'하다.(설립자 마포삼열<Marfet Samuel> 박사이었다) 주) 1907년 9월 17일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미국장로회조선독노회'를 조직하다. 주일아침 성경공부 우리네 선배들은 독노회(獨老會) 때부터 주일 아침에는 꼭 성경공부를 했다. '주일에는 아침 10시쯤 하여 형제자매가 다 칠팔 명씩 각각 반을 나누어 공부를 하였다'(제5회 독노회록 52쪽 황해도 대리회 보고서)고 했다. 총회 시대로 들어와서도 주일 오전에는 성경공부를 하였다(제1회 총회 회의록 16쪽 전도국 제주교회 보고서). 초대교회 때는 오전에는 성경공부만 하고 예배는 오후에 드렸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 증거로서 1914년 제3회 총회시 남만주전도형편보고서에 '궁벽한 곳에 있는 교회에는 강원도 형제들이 들어가 사는데 주일을 각근히 지키는 데 육<六>자 표가 있음으로 이유를 물은즉, 첫 점은 주일 아침 공부한 점이요, 건너 그은 점은 오후 예배를 본 것이요, 좌편 점은 주일 저녁 예배를 본 것이요, 우편 점은 삼일 예배 본 것이라 하오며'(동 회의록 12쪽)라고 기록돼 있다. 그 후에도 주일 아침 성경공부는 총회 때마다 계속해서 보고되었다. '주일 아침 공부에 참예한 이가 많사오며'(제4회 총회회의록 51쪽 평남노회 보고서), '주일 오전 공부한 이가 장년 9천3백 여인과, 유년 4천4백여명이 평균 회집이고'(제8회 회의록 93쪽 평북노회 보고서), '매주일 아침은 주일공과대로 공부하고'(제10회 회의록 92쪽 함북노회 보고서, 99쪽 산서노회 보고서)라고 하였다. 현대 교회가 외형은 화려한데 말씀(성경공부)이 부족하다. 새해를 맞아 전국 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고, 사도적 신앙으로 돌아가길 소망한다. 그것이 교회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이다. 초대교회 주일 예배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초기에 어떤 형식으로 주일예배를 드렸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찾기가 어렵다. 다만 1910년 평안북도 선천군 염수동예배당에서 모인 제4회 독노회 회의록 26쪽을 보면, 각 교회에서 대리회(지금의 노회)에 보고하는 식양 별지 6문(問) 회집 평균수 난에 1, '오전 공부인 수 몇이뇨? 2, 오후예배인 수 몇이뇨? 3, 밤 기도회인 수 몇이뇨?'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초대교회 주일은 오전에는 주로 성경공부를 하고 오후엔 예배를 드리고 밤에는 기도회를 가졌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 한 예로 1960년 경북 안동읍 서부교회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 확인됐다. 서부교회는 출옥 성도이며 제38회 총회장을 지낸 이원영 목사께서 시무했던 교회다. 주일 오전 10시에 모여 12시까지 성경공부를 하고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 사이 2시간 동안은 심방과 전도에 시간을 바치었다. 오후 4시경에 주일예배를 마치고 귀가하여 저녁식사 후 다시 예배당에 모여 밤 예배를 가졌다. 그리하여 주일이면 온종일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었다. 참으로 초대교회는 사도시대의 교회와 같이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와 말씀의 묵상과 친교에 힘을 다하였다.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니 교회는 날로 부흥하였다. 한국인 최초 김창식, 김기범 목사안수 한국인으로 최초의 목사 안수는 감리교에서 나왔다. 미감리회 선교부는 1901년 5월 14일 오후 2시 서울 상동교회에서 김창식과 김기범 두 사람을 집사목사(執事牧師)로 안수하여, 입교 예식과 결혼식 거행권을 부여하였다. 그 후 김창식 목사는 1904년부터 1910년까지 평북 영변지방 감리사로 6년간 시무하였고, 1912년 3월부터는 평양지방 감리사로 헌신하였다. 그가 평안도의 운산, 영변, 덕천, 개천, 양덕, 맹산 등과 원산, 충북의 제천 등지에 새로 설립한 교회는 48개나 된다. 또 경기도 수원지방 순행목사(1910~1921)와 혜주교회 담임목사(1921~1924)로도 시무하였다. 김기범 목사는 1901년 5월 연안구역을 담임하였고, 1903년 5월 제물포교회를 맡아 1905년 6월까지 3년 동안 시무했다. 그러나 감리교의 엡윗청년회가 을사조약(1905년) 이후 항일운동에 가담하였다 하여 해체될 때, 김 목사도 일제의 탄압으로 교회를 떠난 것으로 보인다. 장로교의 경우는 1907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노회(독노회)에서 그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한석진, 서경조, 양전백, 길선주, 방기창, 이기풍, 송인서 등 7인이 처음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최초 장로교 목사 7인 1907년 6월 20일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한 7인의 초대교회 목사님들이 황무지와 같은 곳을 개척하여 한국교회를 오늘의 세계적 교회로 부상시킨 우리 한국교회의 초석들이다. 그런데 그들 이름이 그렇게 다들 좋았다. 구약시대의 인물들 이름은 다 그 시대에 각각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을 상징하는 이름들이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회(1907) 졸업생들은 전부 7명인데 그 이름들이 유난히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길선주(吉善宙, 40세) 목사 온 세상이 선한 세상이 되어야 길(吉)하고 복된 세상이 된다는 뜻으로 초대 목사의 이름으로는 선교 의지가 강한 이름이었다. 한학자, 성서학자로도 이름이 높았다. 1908년 3월 1일에 한국인 목사로서는 최초로 세례식을 집례했다. 1907년 부흥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전국을 누비면서 부흥회를 인도해 가는 곳마다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3.1운동 민족지도자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옥중생활의 수난을 겪었다. 2. 양전백(梁甸伯, 39세) 목사 지역을 가지고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이름이다. 전(甸)은 옛날 왕성지역 오백리 이내의 땅을 의미한 것인데 아주 빼어난 훌륭한 땅으로, 여기서는 한국 땅을 의미할 수 있다. 그 땅이 우리 주님이 우두머리(伯)가 되시는 곳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한국을 지탱하는 대들보가 된다는 이름이다. 한국을 지탱하는 동량 곧 들보가 바로 주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북 구성 출신으로 김이련, 김관근 부자의 전도로 신앙인이 되었다. 1902년에 장로가 되었고, 1905년 신성중학교의 설립위원, 대동고아원의 원장을 역임했으며 선천북교회의 목사로 시무했다. 3.1운동 당시 민족지도자 33인 중 한 사람으로 민족 운동에 크게 헌신했다. 3. 한석진(韓錫晉, 41세) 목사 한국을 향해서 지은 듯한 이름이다. 한국은 주석과 같이 보배로운 것을 잘 지키고 그것을 가지고 '진'(晉) 곧 나아가기도 하고 조절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를 보석이라고 생각하면 그 이름은 기독교를 잘 지키고 그것으로 우리 생을 조절도 하고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고 있었던 한국 학생들을 위한 목사로 파송된 일이 있다. 졸업생들 중 유일하게 상투를 자른 신식 목사였다. 의주에서 세례 받았고, 평양의 마펫 선교사 밑에서 전도 일을 보았다. 1894년 그를 체포한 평양 감사 민병석이 사형선고를 내렸으나 신앙지조를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졌다. 당재의 가장 총명한 교계 지도자로서 한국 고유의 인습을 바로잡아 계습 타파와 남녀 차별 철폐 등에 막대한 공을 남겼다. 4. 서경조(徐景祚, 58세) 목사 초대 한국교회에서 처음 성경을 번역하고 전국에 성서를 보급한 서상륜의 동생이다. 그런데 그 이름은 찬란한 햇빛이 비출 때에 이 세상이 평온하고 행복하다는 뜻이다. 그는 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와 함께 동사목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종교적 감수성이 강한 인물로서 만주에서 예수 믿고 귀국한 형 서상륜의 전도를 받아 곧 신자가 되었다. 형제는 의주에서 기독교 박해가 있자 황해도 솔내로 피신했으며, 그곳에서 열심히 전도해 한국 최초로 여덟 칸짜리 예배당을 건축하고, 전도에 크게 성공했다. 언더우드(H.G. Underwood) 선교사의 내한 소식을 들은 서경조는 곧 상경해 1887년 세례를 받고 1900년 장로가 되었으며, 목사가 된 후 한 때 새문안교회에서 봉직했다. 경실련 전 사무총장, 기윤실 활동을 하고 있는 서경석 목사(서울대 법대, 장신대 신대원 졸, 나눔과기쁨 이사장)가 이 분의 손자이다. 5. 송인서(宋麟瑞, 40세) 목사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신앙고백서를 써서 그것이 미국 북장로교 총회록에 부록으로 기록되어 남은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나라가 크게 된다는 것은 그 나라가 빛난(麟) 모습을 갖추고 상서로운 일이 겹칠 때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로 빛나고 백성들이 다 상서로운 처지에 있게 될 때에 나라가 커진다는 그런 뜻이다. 평양 출신으로 마펫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었다. 1907년 목사가 되었으며 평남 일대에 교회를 개척하는 공을 남겼다. 6. 이기풍(李基豊, 40세) 목사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제주도에 선교사의 자격으로 파송되었던 인물이다. 그래서 지금 제주도에는 '이기풍기념관'이 있다. 그의 이름은 당장 우리 눈에 뜨인다. 곧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널리 퍼지고 풍부하게 될 때 이 나라가 커진다는 뜻이다. 1893년 이래 평양거리에서 전도하고 있는 마펫 선교사의 아래턱을 돌로 때려 상처를 낸 불량배이다. 그러나 회개해 목사가 되었으며, 그 후 제주도에 건너가 모진 고난을 다 겪으면서도 전도 사역에 종사해 제주도민 교화의 위대한 공을 남겼다. 1921년 총회장을 역임했고, 일본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끝내 1942년 6월 20일에 순교했다. 7. 방기창(邦基昌, 58세) 목사 역시 기독교로 인해 나라가 번창하게 되면 바로 그 때에 우리나라가 나라다운 나라가 된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는 이 나라는 기독교가 번창하게 되어 있는 나라라는 뜻도 된다. 그는 1907년 독노회 창설 당시 그 부회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1901년 평양신학교가 개교되면서 김종섭 장로와 함께 최초 입학생이 되었다. 평양신학교 졸업생으로 목사안수를 받은 7명은 개화 도상의 역경이 중첩한 한국 사회의 한 가운데서 최대의 역량을 십분 발휘해 초기 한국교회를 순수한 복음으로 선정하는 데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최초로 축도한 한인 서경조 목사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 제1회 졸업생은 일곱 사람이었다. 이들은 1907년 9월 17일 하오 2시에 평양 장대재 예배당에서 회집한 제1회 예수교장로회 대한노회에서 목사로 장립을 받았다. 당시 검사위원(현 고시부원)은 목사 14인으로 하되 리눌셔 씨는 신학을 묻고 안이와 씨는 정치를 묻고 젼위렴 씨는 셩회사기를 묻고 긔일 씨는 셩경래력을 물은 다음 우죵셔 씨의 동의 문답을 종결지었다. 노회장 마삼열 씨가 목사장립의 여부를 물으니 배위량 씨가 목사장립하기를 동의하여 가로 결정하였다. 이시오 그날 하오 7시 30분 동노회에서 한국 최초로 목사 장립하니 서경조, 방긔챵, 리긔풍, 길션주, 송린셔, 량뎐백, 한셕진 제씨였다. 장립받은 목사들에게 긔일 씨는 바울의 온유와 인애와 베드로의 긍휼과 겸손으로 부탁하였고 리눌서 씨는 디모데후서 1장 14절에 기록된 말씀으로 부탁하였고 셩셔공회 대표 민후 씨는 극품 신약성경을 선사하였다. 목사 장립 후 셔경죠 씨의 축복기도로 폐회하니 서경조 씨는 최초로 축도한 한인 목사가 되었다.(제1회 독노회록 8-11쪽) 제2장 교회의 예배 의식 1. 예배시간이 되거든 예배당에 들어가 각기 좌석에 앉되 단정하고 엄숙하며 경건한 모양을 지키며 자기와 목사와 그 참석한 모든 사람과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로 복을 빌라. (딤전 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예배시간에는 모든 사람이 엄숙한 태도와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목사가 '낭독'하거나 인증하는 성경 밖에 다른 것을 읽지 말 것이다. 합당치 못한 모든 행동을 일체 하지 말 것이요, 어린이들은 부모가 데리고 있는 것이 좋으니 한 가족이 하나님의 집에 같이 모여 앉는 것이 가장 마땅하며 주일학교 예배회로 따로 모일 때는 교역자나 당회원이 반드시 출석 인도하라. (렘 36:8)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무릇 선지자 예레미야의 자기에게 명한 대로 하여 여호와의 집에서 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낭독하니라' 우리나라 최초 교회 - 널다리골교회 1894년 평안남도 평양에 설립된 장로교회이다. 미북장로교 선교사 마펫(S.A. Moffet, 馬布三悅)이 1893년 평양에 도착해 선교부를 설치하고 최치량이 경영하는 주막에서 전도를 시작했다. 그후 4~5명이 모여 예배하게 되었으며 장소가 협소하여 널다리골(板洞)에 있는 홍종대 소유의 기와집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이 널다리골교회가 장대현(章臺峴)교회의 시작이 되었으며, 선교사들은 이 교회가 평양에서의 중심이 되고 최초의 교회가 된다고 하여 중앙교회 또는 제일교회라고 불렀다. 선교사 마펫이 전도를 시작하면서 그의 집에는 밤마다 돌이 날아드는 수난을 겪었다. 어느 날은 서문통에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는 어려움도 당했다. 이러한 시련을 극복하여 마침내 믿음의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1894년 1월에 22명의 학습 교인을 세우게 되었으며, 7명이 세례교인이 되었다. 또한 이동승을 최초의 영수로 임명하여 시무하게 했다. 이영언을 교사로 세우고 학생들을 모집하여 사숙을 시작했다. 이것이 후에 숭실학교로 발전했다. 1899년에는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R.J. Thomas, 崔蘭軒)를 참수했던 박춘권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와 회개하고 선교사 마펫에게 세례를 받는 놀라운 일이 있었다. 신자의 증가로 예배당을 신축하기로 하고 광고하자 3,000여원이 헌금되어 총공사비 7,000여원을 들여 장대현 언덕에 72간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소래교회 설립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세워진 한국 최초 자생 교회인 소래교회(사진)의 설립연도에 대해서 1883년 설, 1884년 가을 설, 1885년 봄 설, 심지어 1887년 설에 이르기까지 여러 주장과 기록이 있다(기독교문사 기독교사전 p.535). 그중에서 1883년 설이 가장 큰 지지를 받고 있다. 그 근거로는 평양신학교 교수회에서 교수논문집으로 발행한 신학지남 제7권 제4호(1925년 10월 발행) 103~122쪽 '徐景祚의 信道와 傳道와 松川敎會設立歷史'란 서경조 목사의 기고문에서 '1883년 계미년 장연 송천동에 이주하게 된지라 이때에 백씨는 심양에 들어가 라목사에게 수세하고 매서직분을 받고 조선경성에 이주하시고'(동 p.105)라는 항목이 있다. 또 하나 한국교회사 연구가 이찬영 목사의 저서 '한국 기독교회사 총람' p.p128~129에 '필자가 1962년 2월에 백령도 부흥회 인도차 갔을 때 백령도 중화동교회 당회장 허간 목사가 소장하고 있던 송천교회 당회록을 친히 목도하였는데, 교회연혁을 기록하면서, 설립이 1883년 5월 16일이라고 되어 있었다. 허간 목사님은 6.25사변 전까지 송천교회 당회장으로 시무하시다가 전쟁 때문에 송천교회 당회록을 휴대하고 백령도에 와 계신 때였다'라고 기록을 남기고 있다. 무릇 역사란 '누가 말 하더라'는 설(說)을 넘어 물질 증거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위에서와 같이 평양신학교 교수 논문집 신학지남과 소래교회 당회록을 통해서 1883년 설을 믿는다. 조선 최초의 기독교인, 최초 장로, 최초 순교자 백홍준 존 로스는 존 매킨타이어와 함께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파송된 중국 선교사였다. 먼저 중국에 왔던 알렉산더 윌리엄슨 선교사가 있었는데, 로스는 그에게 조선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면서 로스는 조선에 대한 마음을 간직한 채 1874년 10월, 만주의 고려문을 드나든다. 고려문은 조선과 중국이 자유롭게 물물교환을 하던 곳이었다. 존 로스 선교사는 그곳에서 조선인들에게 한문성경을 가지고 전도했는데,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성경책을 비롯한 서양문물을 거부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럼에도 로스로부터 한문성경을 받았던 한 50대의 조선 상인이 있었다.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 아들이 성경을 2~3년간 읽고 공부한 후 존 매킨타이어를 찾아가 더 깊이 공부하기도 한다. 그 아들이 백홍준이다. 백홍준은 1876년, 존 로스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고향인 평안도 의주에 돌아가 복음을 전하려 한다. 로스가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의주에 들어가는데, 백홍준은 성경을 그대로 들이다 3개월간 감옥에 들어간 적이 있다. 이에 백홍준은 성경을 한 장씩 뜯어내어, 시장에서 산 책과 함께 묶어서 들어가 통과했다. 백홍준은 성경을 숨겨둘 장소가 마땅치 않아 태우거나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 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을 표백시킨 물을 마시는 자마다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성경을 태운 재를 입는 자마다 크게 성장하리라.' 그렇게 백홍준은 몰래 전도하며 의주뿐만 아니라 강계, 부성, 삭주 등 전도의 지경을 넓혀간다. 1885년에는 약 18명이 예수를 믿어 백홍준 집에서 예배를 드린다. 1887년 9월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14명의 세례교인과 함께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창립할 때 백홍준은 최초의 장로로 추대되기도 한다. 1892년에는, 백홍준이 존 로스를 비롯한 외국인들과 만난 게 드러나 봉천 감옥에 들어간다. 그리고 2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 순교한다. 백홍준은 조선 최초의 기독교인이자 조선인 최초의 순교자가 된다. 한국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 목사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본격적으로 선교하기 이전에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찾은 선교사들이 몇 있다. 그중 조선 땅에 귀한 피를 뿌리고 순교한 사람은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托馬浚 또는 崔蘭軒) 목사가 유일하다. 그는 1840년 9월, 영국 웨일즈(Wales) 지방 라야다(Rhayada)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토마스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에서 대학과정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회보다는 선교에 뜻을 둔 토마스는 목사안수를 받은 후,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갓 결혼한 부인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해 가을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일을 겪기도 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다, 현지 런던 선교회 책임자들과도 뜻이 맞지 않자 토마스 목사는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산동성 지푸 세관에 취직하였다. 그곳에 주재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의 알렉산더 윌리엄슨 목사를 만난 그는 선교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토마스 목사는 우연히 한국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산동성으로 피난 온 천주교 신자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에게서 한국 천주교회 박해의 소식을 들은 그는 한국 선교의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단 세관에 사표를 내고 한국 선교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 한국으로 가는 배가 있었다. 그가 이 배를 타고 많은 양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한국의 서해안으로 떠난 것이 1865년 9월이었다. 그는 황해도 연안 창린도에 도착하여, 약 두 달 반을 머물면서 섬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는 한편, 한국어를 배우면서 열심히 전도한 후 중국으로 돌아갔다. 기회를 다시 찾고 있던 토마스 목사는 때마침 미국 상선인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무역을 위해 한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1866년 7월, 그는 이 배의 통역 겸 안내자로 동승하여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던 한국으로 다시 향하게 되었다. 약 일 주일 후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당도하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계속 강 상류로 거슬러 평양성으로 항진하였다. 배가 머물자, 평양 감영의 문정관(問情官)이 등선하여 목적지, 항해의 목적 등을 묻자, 토마스 목사는 서툰 우리말로 통역을 하였다. 문정관들은 우리나라는 외국과의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퇴각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강 깊이 항진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제너럴 셔먼호는 무역선답지 않게 중무장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정관 중군(中軍) 이현익을 억류하고 강압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렇게 되자 강변의 병졸들과 성민들이 물러가라고 고함을 치면서,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위협을 느낀 제너럴 셔먼호에서도 소총과 대포로 응사를 시작하였다. 이런 와중에 홍수로 불었던 대동강 물이 줄어들고, 서해의 썰물 때가 되자 강물이 급격히 줄어 제너럴 셔먼호는 강바닥에 좌초하고 말았다. 평양감사 박규수의 명에 따라 군은 상류에서 작은 배 여러 척을 연결하고 그 위에 나무를 쌓아 불을 붙인 신탄선(薪炭船)을 떠내려 보냈다. 이 신탄선이 제너럴 셔먼호에 닿자 배가 불타기 시작하였다. 불이 크게 번지자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강으로 뛰어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병졸들이 뭍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죽였다. 토마스 목사도 더 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 성경 몇 권을 품고 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쳐 나왔다. 강변에 이른 토마스 목사를 퇴교(退校) 박춘권이 칼로 쳐죽였다. 이로써 토마스 목사는 한국 초기 선교 역사에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개신교 성직자 순교자가 되었다. 토마스 목사는 품고 온 성경을 강변 여기저기에 뿌렸다.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도 한 권을 주었으나 받지 않자 그대로 모래사장에 던지고, 순교의 길에 들어섰다. 박춘권은 자기 칼을 맞고 죽어가는 서양 사람이 건네주는 책을 받지 않았으나, 상황이 끝나고 돌아갈 때, 하나를 주워 집으로 가져갔다. 갖고 간 성경을 정독한 그는 후에 예수를 영접하고 독실한 신자가 되어, 안주(安州)교회 영수(領袖)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때 군중 속에 열두 살 난 소년, 최치량이 있었다. 그는 토마스 목사가 흩뿌린 성경 세 권을 주워 갖고 있다가 한 권을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에게 주었다. 박영식은 그 성경을 한 장씩 뜯어 벽지로 발라 썼다. 후에 박영식의 집터에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세워졌다. 토마스 목사를 죽인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가 박영식의 집에 들었다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진실한 교인이 되었다.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레널즈(W. Reynolds, 李訥瑞)의 조사(助事)가 되어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성경번역에 큰 공헌을 하였다. 토마스 목사는 박춘권의 칼을 맞아 죽었고, 그 시체는 토막 나 강변에서 불태워졌다. 제너럴 셔먼호의 닻줄은 평양 동문에 걸려, 해방되던 1945년까지 남아 있었다. 토마스 목사는 기독교 목사로서 조선 땅에 최초로 순교의 피를 흘리고 죽어갔는데, 이때가 1866년 9월 2일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이렇게 숨져갔지만, 그가 전해 준 복음은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그가 순교한 대동강 물을 마신 평양 성민 다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평양은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때까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 목사를 기념해 설립된 교회 한국교회는 1927년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토마스 목사가 묻혀 있는 쑥섬에 1천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다. 1932년에는 토마스 목사의 이름 첫 스펠 'T'자 모형으로 토마스 목사 기념 예배당이 건립됐다. 고대 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고,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말했다. 한국교회는 1930년대부터 6.25사변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공산당에 의해 순교의 길을 걸었다. 일제 말엽에는 신사참배 거부로 주기철 목사를 위시하여 적어도 50여 명의 목사들이 순교의 영광의 관을 썼다. 이들 귀한 순교자들의 피를 먹은 한국교회는 무성한 숲이 되어, 주님이 명령한 귀한 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이 일은 토마스 목사로부터 비롯된 순교자들의 고귀한 순교의 피의 은덕이라 말해야 마땅하다. 최초 여성 집사 한영신(1887. 7. 22 ~ 1969. 2. 20)은 장로교 권사, 여성 독립운동가, 교육가로 경기도 인천 축현에서 한정학과 김경성 사이의 장녀로 출생했다. 17세 때 김익호와 결혼, 21세 때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의주 양실여학교 졸업 후 장대현교회 유치원 교사로 봉직했다. 3.1운동 당시 평양 만세 시위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른 후 동년 6월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도왔다. 이로 인해 3년간 옥고를 치렀고 옥중에서 남편과 사별했으며, 출옥하여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설립에 참여했고 동 교를 졸업했다. 그 후 장대현교회 최초 7인 여성집사로 피택되어 봉직했고, 15년간 동 성경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해방 후 월남해 남대문교회에 출석하여 김치선 목사를 도와 300만 부흥운동 강사로 활약했다. 당시 초대 유급 전도사로 순회 전도했으며, 전국여전도회 사업을 지휘했다. 말년에 남대문교회 권사로 봉직하며 전도에 헌신했다. 그는 1923년 총회가 여집사 제도를 채택한 이듬해 최초로 전국 교회 7인 여성집사를 선택할 때 이에 포함되어 장대현교회 집사로 봉직했다.(평양노회에서 녀집사 직무를 문의한 일은 본 헌법 뎨 6장 5항의 지졍한 대로 실행할 일 각기 당회에서 작정한대로 하기로 함. 1923년 9월 8일 신의주, 죠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뎨 12회 회의록 35쪽)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한동일이 그녀의 외손자이다. 최초 남녀 권찰 현문사에서 출판한 <대국어사전>에 권찰(勸察)을 '기독교의 한 교파인 장로교에서 신자의 가정 사항을 조사하는 직무, 또는 그 사람'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교회 입장에서는 '권면하고 살핀다'는 내용도 첨가했으면 좋을 것 같다. 현금 우리 교회 안에서 권찰은 대부분 여성도들이 맡고 있다. 그래서 아예 권찰은 여성도들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남녀 권찰을 세워 교회를 진흥시킨 일이 있다. 그 증거로 1920년 10월 경성 안동예배당에서 회집한 제9회 총회 때 전남노회 상황보고서 교회 형편 3항에 '각 교회 남녀권찰을 세워 구역마다 교우를 심방하고 낙심자를 권면하며 혹 병들어 고생 받는 형제자매가 있으면 그 집에 임시 기도회를 열고 때때로 기도하며 위로함으로 새 은혜를 입어 병 나음을 얻고 열심히 믿는 이도 많사오며'(동 회의록 90쪽)라고 기록되어 있다. 1923년 9월 신의주교회 예배당에서 회집한 제12회 총회 때 서백리아노회 보고서 교회 형편 5항에 '해삼위 신 한촌에 있는 신뼈벽 씨는 노국 중학교를 졸업한 후 노국 관청에서 10여 년 동안 시무하는데 아편을 수십 년간 먹다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진실히 회개한 후에 교회의 권찰이 되었고 그 후에 총회에서 전도인으로 피택되어 지금은 서백리아노회에서 관청교섭위원으로 피택되어 각처로 다니면서 봉쇄하였던 예배당 문을 열고 예배를 보게 하고 또 안반다반으로 파송한 일이오며'(동 회의록 107쪽)라고 기록되어 있다. 권사(勸師)의 유래 장로교의 권사제도가 언제부터 있었는지에 대해 명백한 기록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1910년 9월 18일 평북 선천군 염수동예배당에서 회집된 제4회 독노회록 24쪽에 각 교회가 대리회에 보고하는 서식 문(問) 2조 10항에 '녀 권사 몇 사람이뇨'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봐서 1910년 이전부터 권사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권사를 한문으로 표기할 때 權師, 權事, 勸士, 勸事 등 다양하게 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아니다. 우리 헌법에서는 '勸師'로 쓰고 있다(헌법 153쪽). 수년 전 헌법을 수정할 때 勸事로 고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勸師로 확정해 가결하였다. 권사는 여신도 중 만 45세 이상 된 입교인으로 행위가 성경에 적합하고 교인의 모범이 되며 본 교회에서 충성되게 봉사하는 자로 공동의회에서 투표수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권사는 안수 없는 종신직원으로서 정년(70세) 때까지 시무할 수 있다. 단 은퇴 후에는 은퇴 권사가 된다. 또 당회가 다년간 교회에 봉사한 여신도 중에 60세 이상 된 입교인으로 행위가 성경에 적합하고 모범된 자를 명예권사로 임명할 수 있다. 권사는 당회의 지도 아래 교인을 방문하되 환자와 환난을 당하는 자와 특히 믿음이 연약한 교인들을 돌보아 권면하는 자로 제직회 회원이 된다(헌법 정치 제3장 교회직원, 제3조 3항). 백과사전과 국어대사전에 '권사' 표기 백과사전에 권사(勸師, exhorter)란 교회에 전도와 봉사 그리고 권면의 사역을 감당하는 직책의 사람이다. 이 직분은 장로교회에는 원래 없었다. 미국 감리회에서 사용한 것을 한국감리교에서 사용하였고 후에 장로교에서 여성의 최고 직분자로서 칭호를 주게 되었다. 국어대사전에는 권사를 勸士로 표기하였다. 예배 부문의 용어 ① 강단에 십자가 부착 → 불가(합동, 제42회, 제44회, 제74회, 제100회) ② 예배당에서 성극과 유희하는 것은 가히 합당치 못하므로 당회가 신중히 처리하기로 하다.(합동, 제38회) ③ 묵도 → 불가(합동, 제94회). 일제강점기 때 통치자였던 일본인들은 기독교 교회에 대해 그들의 숭배 대상인 신사에 묵도로 절을 하고 난 다음 너희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강압적인 명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예배 전 고개 숙여 예를 표하는 순서를 넣었다. 이것이 묵도라는 것이다. ④ 사회자 → 결혼식, 장례식, 임직식, 회의(합동, 제93회) ⑤ 인도자 → 모든 예배(합동, 제83회, 제86회, 제93회), (통합), 집례자(성결). 주) 1948년판 곽안전 저, '목사 필휴'(牧師 必携)에도 '인도인'(引導人)이다. ⑥ 집례자 → 성찬식, 세례식(합동, 제86회, 제93회) ⑦ 헌금 → 봉헌 ⑧ 찬송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은혜받기 위한 찬양은 '부르겠습니다.' ⑨ 사순절 교독문 → 사용 불가(합동, 제83회, 제84회, 제102회, 고신) <사순절> (1) 사순절은 부활절 전날 밤까지 40일간 이어지는 로마교회가 정한 행사이다. (2) 종교개혁은 사순절을 완전히 폐지하였다. (3) 칼빈은 사순절 기간에 금식은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고 하였다. (4) 칼빈은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킴이 널리 퍼졌다고 개탄하였다. (5) 사순절 기간에 로마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최고 예배가 고기를 금하는 것으로 여겨 고기는 금지시키고 다른 단 것들을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먹었다. 오히려 더 성대히 고기와 다른 음식을 먹기 위해서 금식하였다고 칼빈은 지적하였다. (6) 사순절을 지키기로 하면 우리도 로마교회처럼 사순절 기간에 금식을 해야 하고 또 고기를 그 기간에 먹지 않게 되며 그러면 고기 먹은 것을 위해 사육제를 열 것이다. (7) 긴 40일간에 걸쳐서 사순절 금식과 고기 금지 등을 하고 철야를 하게 되면 신자들이 이런 경절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게 되므로 양심이 심히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8) 사순절을 교회의 경절로 지키게 되면 로마교회가 지키는 많은 다른 교회 경절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9) 사순절과 다른 절기들을 로마교회의 습관대로 지키게 되면 이 모든 것의 원형이며 모(母)교회인 로마교회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이 폐지한 사순절을 우리 한국교회가 로마교회로부터 받아서 부활시키고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 사순절은 우리 한국교회가 교회 경절로 받아서 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고난주간을 오래도록 지킴으로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은혜롭게 시행해 왔다. ⑩ 제사, 제물 → 예배, 예물 ⑪ 제단 → 성단 ⑫ 기도로 폐회합니다 → 기도 후 마치겠습니다 ⑬ 예배의 시종을 의탁하옵고 → 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⑭ 사도신경 하시겠습니다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 ⑮ 주기도문 암송하시겠습니다 →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 있을지어다(합동, 제45회, 정치 제7장 11항 축복, 고신, 개혁, 대신) 축복기도 '축복기도'의 줄인 말이 '축도'가 아니다. '철야기도'를 '철도', '사도신경'을 '사경', '성경낭독'을 '성독', '신앙고백'을 '신백'이라고 하는가? 중국 한문에도 없는 말이다. 인간학의 극치 '간절히 축원합니다'는 비성경적 장로교가 제일 성경적 교단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편이다. 우리 합동의 전통이 있다. 이를 가리켜 그 교단의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장로교의 정체성이 있다. 합동교단의 정체성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도리는 합동교단의 특성이 있다. 합동교단의 예배 특성이 무엇인가? 신약성경에서만 무려 54회나 '있을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축도를 '축원합니다'라고 하는가 하면 그것도 부족하여 목사 자신의 마음을 끼워넣어 '간절히 축원합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인 축도를 인간인 자신이 도둑질하는 행위라고밖에 할 수 없다. 합동총회는 1912년 총회를 설립한 이후 헌법을 수정 또는 개정한 바가 있으나 예배모범 중에서 예배의 '축도'에 관해서만은 변함없이 '있을지어다'라고 결의하였다. 예배의 축도는 옛날에도 지금도 그리고 주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있을지어다.'로 선언하며 그 전통을 후손들에게 전승할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가리키는 축도의 모범이요 하나님의 방식이다. 장로회 신조 1조에는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라고 기록된 것을 그대로 신종해야 한다. 그래야 장로교의 교인이요 성경의 권위를 좇은 참 신자인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교회들, 특히 유명한 목회자들이 하나님께 대한 서약, 성경의 거룩한 가르침을 저버리고 있다. 장로교는 신조와 같이 무엇이든지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기피하고 사람들의 귀에 달콤하게 '축원합니다', '간절히 축원합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장로교의 범주에서 벗어난 일탈이요, 장로교의 목사님을 스스로 저버리는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있을지어다 정치 제7장 교회 예배 의식(儀式)에는 축복(정치 제7장 예배 의식 11항)으로 되어 있다. 축복으로 합동 제45회, 제96회, 제100회 총회가 결의하다. 주) 1948년판 곽안련 저, '목사 필휴(必携)'에도 '축복'(祝福)이다. 기도와 축도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먼저 영광을 돌리고 받은바 은혜를 감사하고 지은 죄를 자복한 후 자기의 일체 소원을 간구하는 일(예배모범 제5장 2절)로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로 마쳐야 한다(요 14:13~14). 한편 축도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공회에서 장립 받은 목사가 예배가 끝날 때에 두 손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대표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기도이다(예배모범 제6장 5절). 1960년 9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모인 제45회 총회에서 예배 끝의 축도를 '있을지어다'(고후 13:13)로 일치하게 실시키로 가결했다(제89회 총회 촬요 및 요람 제18쪽). (일반 기도와 축도는 구분되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간구하는 것이고 축도는 하나님을 대표하여 축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도(祝禱)라고 한다. 축도는 축복기도(祝福祈禱)의 준말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더러는 기도를 드리다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로 마치지 아니하고 연계해서 축도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아니다. 기도는 기도로 마치고 축도는 따로 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선 2000년 9월 경남 진주교회에서 모인 제85회 총회에서 헌금기도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로 끝맺지 않고 바로 축도로 들어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 총회 산하 교회가 올바르게 기도케 해 달라는 부산중노회의 헌의에 대하여 총회는 예배모범대로 하기로 가결하였다(합동, 제89회 총회 촬요 및 요람 35쪽). 서울대성교회 박윤식 목사는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면 그대로 믿은 인물이었다. 합동총회에서 축도에 대해 결의하기를 성경대로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결의하였다는 사실을 박윤식 목사에게 전하자 그는 그 다음주일 예배 끝 축도시간에 "여러분, 한국의 제일 보수인 합동교단에서 축도는 '있을지어다'고 하도록 결의하였으므로 이 시간 이후에 축도는 '있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아니하는 것은 이단이에요. 이단은 성경에 있는 것을 아니하는 것이 이단입니다."라고 선언하고 "성경에 '있을지어다'가 44번이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1번, 요한복음 3번, 로마서 3번, 고린도전서 1번, 고린도후서 1번, 갈라디아서 3번, 에베소서 2번, 빌립보서 3번, 골로새서 2번, 데살로니가전서 2번, 데살로니가후서 2번, 디모데전서 3번, 디모데후서 3번, 디도서 2번, 빌레몬서 2번, 히브리서 2번, 베드로전서 2번, 베드로후서 1번, 요한2서 1번, 요한3서 1번, 유다서 2번, 요한계시록 2번"이라고 말하고 "성경에 있어요. 성경에 있는대로 하는 것이 축도입니다. 성경대로 아니하는 '축원합니다'고 하는 것은 이단이에요."라고 선언하고 축도를 성경대로 하였다. ⑰ 기도와 축복을 같이 하는 경우 기도를 한 후 축복을 한다. ⑱ 성의 가운 ⑲ 예배 시 목사와 장로의 가운 착용 해 당회 결정(합동, 제89회) (20) '로만 칼라'(roman collar), 또는 '로만 칼라 셔츠' 최고의 적그리스도 종교인 로마 천주교의 사상과 정신을 완강하게 거부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며 교황에게 절대 복종하겠다는 상징이며 독신으로 살겠다는 표시이다. (21) 대예배 주일예배(통합), 주일낮예배(성결, 대신), 주일공동예배(성결), 저녁예배(대신) 대예배 사용금지, 소예배와 중예배가 없다. (22) 삼일예배 수요일 저녁예배 (23) 열린 예배 열린 집회(통합), 사용 불가(대신) (24) 영시예배, 자정예배 송구영신예배 (25) 여 목사와 여 장로의 강단 등단 불가(합동, 제85회) (26) 예배 본다, 봐 준다, 드려주다 예배한다(대신) '아버지께 참 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27) 예배시간에 박수 혹 찬양 후에 박수를 하는데 설교나 기도 후에도 해야 하는가? (28) 예배시간에 절 찬양하려고 가족이나 구역원들이나 각 부서 임원들이 차려 경례까지 구령을 하고 찬양하기 전에도 후에도 두 번이나 절을 하는데 인도자나 기도자나 설교자나 찬양대원들도 절을 두 번이나 절을 해야 하는가? 제3장 예배 때 성경 봉독 1. 예배 때에 '성경 봉독'은 공식 예배의 한 부분이니 반드시 목사나 그밖의 허락을 받은 사람이 봉독한다. 주) 1948년판 곽안련 저, '목사 필휴'에도 '낭독'(朗讀)이다. 1928년 9월 8일 대구부 신뎡례배당에서 모인 제17회 총회록 7쪽에도 '낭독'이라 기록되었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행 15:21)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눅 4:16,17) 2. 신구약 성경은 청중으로 알아듣게 하기 위하여 한글 성경을 '낭독'한다. 주) 천주교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1977. 부활절 초판)와 바른성경(2008. 10. 11. 초판)은 강단 사용 불가하다(합동, 제99회 총회 결의) 3. '봉독'할 성경 장절은 목사의 의향대로 작정할지니 유익한 줄로 생각할 때는 그 읽는 중에 어떤 부분을 해석함도 옳으나 성경을 읽든지 찬송하든지 기도하든지 강도하든지 각 절차의 시간이 서로 적당하게 하고 결코 모든 것이 합하여 너무 짧든지 너무 지루하게 하지 말라. 성경과 성서 최초의 한글성경은 1882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선교사 로스(J. Ross)가 번역하고 만주 문광서원에서 간행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이다. 계속해서 1887년에는 신약전서 전체가 번역되어 최초로 묶어진 '예수셩교젼셔'가 출간되었다. 1900년에는 한국성경번역자회에서 신약전서를 간행하여 1906년에 한국 최초의 공인성경으로 인정받았다. 필자는 '예수셩경젼셔'를 1986년에 발행한 복쇄(複刷)판을 소장하고 있다. 1910년에 이르러 성경번역위원회가 구약 전체의 번역을 완성하였고 그 이듬해 구약전서를 묶어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11년 신구약이 합쳐진 최초의 성경전서가 나왔다. 이는 1906년 공인된 신약성경과 1910년 번역이 완성된 구약성경을 한 권으로 묶은 것으로 서울 대한성서공회가 발행하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하였다. 또한 1906년에 유성준 장로가 편집하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한 최초의 국한문 혼용성경이 나왔으며 1910년에는 카우만이 편집한 한국 최초의 관주성경이 동양선교회 간행으로 중국 상해에서 인쇄되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사역(私譯) 신약성경은 1919년 대한기독교회 창시자 펜윅(M.C. Fenwick)이 번역하여 원산 대한기독교회가 발행하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하였다. 대한성서공회가 1923년에 발행한 대한성서공회사 제9쪽 범례를 보면, '성경'은 일반적인 성경의 총칭으로 사용하고(예: 성경사업, 성경번역, 단편성경 등) '성서'는 공회 기구명칭에만 사용한다(예: 성서공회, 성서위원회, 성서주일 등)고 되어 있다. 주) 우리 총회는 1977년 총신 강당에서 회집한 제62회 총회에서 '성경'을 '성서'라고 호칭하지 않기로 가결한 바 있다. 주) 1항에 봉독이 두 번, 2항에 낭독, 3항에 봉독, 일관성이 없다. 봉독(奉讀)은 백성의 상소장을 신하가 임금에게 읽어드리는 것이요, 낭독(朗讀)은 청중들에게 읽어드리는 것이다(합동, 정치 제7장 교회 예배 의식 3항). 설교를 하려고 성경을 낭독하는 것은 청중들에게 읽는 것이지 하나님께 읽어드리는 것이 아니다. 주) 성경에 봉독은 없고, 낭독이 18회나 있다.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신 31:11) 이외에도 수 8:34, 수 8:35, 스 4:18, 스 4:23, 느 8:8, 느 8:18, 느 9:3, 느 13:1, 렘 36:6, 렘 36:8, 렘 36:10, 렘 36:13, 렘 36:14, 렘 36:15, 렘 36:21, 렘 36:23 등에 있다. 성경 부문의 용어 ① 하나님 하느님은 부당(합동, 제62회) ② 성서, 성경주일 성경(합동, 제62회, 제93회) ③ 성경봉독 성경낭독(정치 제7장 3항) 봉독은 백성의 상소장을 신하가 임금에게 읽어드리는 것. 성경은 낭독이다(출 24:7, 신 31:11 등 18회, 봉독은 없다). ④ 시편 장 절 시편 편 절 ⑤ 룻기서, 욥기서, 잠언서, 아가서 룻기, 욥기, 잠언, 아가 ⑥ 성구 용품 ⑦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복(성경에 185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창 1:22) ⑧ 바른 성경 강단사용 불가(합동, 제99회) ⑨ 셀라 교독할 때는 읽지 않는다. 제4장 시와 찬송 1. 예배당에서 공동으로나 혹 한 가족끼리나 시와 찬미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모든 신자의 마땅한 본분이니 성경에 합한 말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언사를 사용하라. 주) 찬미는 기독교에서 부르는 찬양이다.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을 기리어 칭송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를 때는 정성으로 하며 그 뜻을 깨달으며 곡조에 맞추어 주께 우리 마음을 다해야 할지니 음악의 지식을 갖추어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동시에 또한 우리 음성으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옳고, 교우는 반드시 찬송가를 준비하여 함께 찬송하는 것이 마땅하다. 주)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함이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시 7:17) 3. 공식 예배 때에 찬송은 목사가 조심하여 정할 것이나 가급적 적당하게 하여 교인 전체로 찬송하는 실력을 얻게 함이 옳다. 주) 최초의 찬양대 한국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면서 찬송가가 소개되었다. 1892년 존스(G.H. Jones) 선교사와 로드와일러(L.C. Rothweiler)가 공역한 감리교 전용의 한국 최초의 찬송가로 <찬미가>가 간행되었다. 이어 1894년에 언더우드(H.G. Underwood) 선교사가 악보가 수록된 <찬양가>를 간행해 찬송가 소개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후 각 교회의 예배 시에는 필히 찬송가를 불렀다. 현대적 의미의 찬양대가 조직되기는 1910년경 평양 장대현교회의 '찬양대'가 그 효시로 기록되어 있다. 1900년대 초 원산과 평양에서 일기 시작한 대부흥운동은 찬송가의 열의를 더욱 증가시켰고 예배 시 찬양에도 큰 발전을 가져왔다. 또한 이 부흥운동 시기에 많은 교인들이 전도대를 조직, 가두에 나가서 북을 치며 찬송을 부르고 전도하였다. 이로써 화음이 조화된 합창은 아닐지라도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제창하는 찬송소리가 교회와 거리마다 넘쳐흘렀다. 본격적인 성가합창운동은 1909년 내한하여 평양숭실학교 교사로 시무하던 모우리(E.M. Mowry) 선교사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는 장대현교회 찬양대를 조직하고 그 지휘자로 4부 합창 훈련을 시켰다. 이것이 곧 한국 최초의 찬양대이다. 이어 1920년대에는 숭실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성가합창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음악전도대를 조직하여 북부지역의 도시를 순회하며 전도를 위한 합동공연을 펼쳤다. 또 모우리 선교사가 조직한 밴드부의 활약도 한국 기악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기독백과) 주) 찬송가 변천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면서 맨 처음 불러진 찬송가는 '예수 사랑하심은'이다. 그 찬송가가 책으로 발간되기는 많은 세월이 흐른 뒤였다. 1) 찬미가(讚美歌)1: 1892년 감리교에서 간행된 찬송가집. 편자 및 발행자는 존스(G.H. Jones)와 로드와일러(L.C. Rothweiler). 발행처는 미감리회. 초판은 곡조 없이 39매 책으로 냈다. 한국에서 발행된 최초의 찬송가이다. 2) 찬미가(讚美歌)2: 한국인이 편집한 최초의 찬송가. 1905년 발행. 편집자는 윤치호(尹致昊), 발행인은 김상만(金相萬). 4*6판 16면에 수록 찬송 15곡. 3년 뒤인 1908년 재판되었다. 1장에 '황제폐하송' 14장에 '애국가'가 실려 있다. 민족 신앙이 응축된 찬송집이다. 3) 찬미가(讚美歌)3: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교단 전용 찬송가로 1911년에 발행됐다. 편자는 왕거린(Mrs Theodora S. Wanqerin). 발행자는 오버그(H.A. Oberg). 발행처는 시조사. 4) 찬숑가(讚頌歌): 한국 최초의 장로교 감리교 연합찬송가로 1908년 발행됐다. 편집자 재한복음주의 선교부 통합 공의회 찬송가 위원회. 발행처 재한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공의회(18년 이후는 조선예수교서회). 인쇄처 요코하마복음인쇄소. 5) 찬양가(讚揚歌) : 한국 최초의 악보 있는 찬송가로 1894년 발행했다. 편자 및 발행자는 언더우드(H.G. Underwood)이며, 발행처는 예수성교서회당. 서양식 5선 악보가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으며 장로교 전용 찬송가로 쓰였다. 7곡의 한국인 저작 가사가 실려 있다.(기독교사전) 주) 한국 교회 찬송가 2006년 11월 13일 한국 교회 100주년 기념관 소강당에서 21세기 찬송가 출판 감사예배가 거행됐다. 한국의 첫 찬송가는 1892년 북감리교 선교부 존스(G.H. Jones)와 로드와일러(L.C. Rothweiler)가 간행한 <찬미가>였다. 이 찬미가는 수형본(手形本)으로 당지(唐紙)에 39매, 총 30장의 감리교 전용 찬송가였다. 한국 최초의 악보 있는 찬송가는 1894년 언더우드(H.G. Underwood)가 간행한 <찬양가>이다. 128면에 수록된 찬송이 117곡으로 서양식 5선 악보가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으며 장로교 전용 찬송가로 쓰였다. 1895년에는 북장로교 선교부 그레함 리(G. Lee)와 기포드 부인(Mrs. M.H. Gifford)이 <찬셩시>를 편집 간행하였는데 56면 수록곡 54곡이었다. 1899년에는 카나다 출신 독립 선교가 말콤 펜위크(M.C. Fenwick)가 독자적으로 <복음찬미>를 편집 간행하였다. 1903년에 대영국종고성공회에서 <셩회숑가>를 발행하였고, 1907년에는 김상만이 <찬미가>와 동양선교회의 <복음가>가 발행되었다. 계속해서 1908년 호가두(許嘉斗) 편의 <구세군가>와 장감 연합 <찬숑가>, 1924년 뮈텔 편집 발행 <죠션어셩가>가 간행되었다. 1931년의 <신뎡찬송가>, 1935년의 <신편찬송가>에 이어 1949년에는 장․감 ․성 연합으로 합동 <찬송가>가 간행되었다. 1962년 예수교장로회(고신․예장총회)가 간행한 <새찬송가>, 1967년 찬송가위원회(예장통합)의 <(개편)찬송가>가 나왔으며 1983년에는 한국찬송가공회 간행으로 <(통일)찬송가>가 출판되었다. 찬양 부문의 용어 ① 성가대→찬양대(성가대는 일본신사를 노래하는 성가단에서 온 말이요, 성경에는 성가는 없고 찬양이 80여 회 나온다) ② 성경과 교리와 신학적으로 잘못된 찬송: 582장 김재준 작사(1901~1987년) '어둔 밤 마음에 잠겨' 부르지 않기로(김재준 목사직 파면, 합동, 제38회, 제73회, 제93회 총회 결의) ③ 신작 찬송가→부르지 않기로(합동, 제79회 총회 결의) ④ 특송→찬송 ⑤ 준비찬송→사용불가(통합), 예배 전 찬송(성결․대신) 주) 1934년판 곽안련 저, '목사 필휴'에도 '찬양대'이다.(계속) http://ikidok.org/ca_ssues/detail.php?aid=1628213090 |
출처: 대한 에스라 성서 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장기용 (연구원 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