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ado(Tsushima) Belongs to Korea! 실제 대마도가 오래 전 우리 땅이었다는 기록은 사료에 많이 등장한다. '세종실록' 1419년(세종 1년) 7월 17일조에는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했으니, 본래 우리 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對馬爲島, 隷於慶尙道之�林, 本是我國之地, 載在文籍, 昭然可考)"는 상왕 태종(太宗)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태종은 이어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았는데, 왜인(倭人) 중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소굴을 삼은 것" 이라고 말했다. 같은 책 1444년(세종 26년) 4월 30일조에는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라는 기록이 등장하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만든 '팔도총도' 등 많은 지도들에도 대마도는 조선 영토로 표시돼 있다. 고려시대부터 대마도 영주였던 종씨(宗氏)는 한·일 양국 사이에서 중계 무역의 이득을 취하면서 왜구의 본거지를 이루기도 했다.조선은 1419년(세종 1년) 1만7000명의 군사로 대마도를 정벌한 뒤 영토로 편입하거나 직접 세금을 거두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으나 이곳이 경상도에 예속된 속방(屬邦)이라는 의식을 계속 지니고 있었다. 15세기에 대마도는 계속 조선에 조공을 바쳤고, 16세기까지도 대마도주는 정기적으로 조선 국왕을 알현하는 사신을 보내 조선으로부터 관직을 임명 받았다. 일본이 정식으로 대마도를 직할지로 편입한 것은 19세기 후반 메이지(明治) 정부 때의 일이었다. 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 49.5km... 반면, 대마도와 일본 규슈(九州)는 147km나 떨어져 있다. 대마도 주민들은 1950년대 초반까지 저녘 때 배를 타고 부산에 와서 술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놀다가 이튿날 아침에 돌아 갔다고 한다. 이후 오랫동안 부산∼대마도 간 뱃길이 끊겼으나 1999년 정기여객선이 운행되면서 대한해협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KTX)가 개통되면서 대마도는 서울에서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섬이 됐다. 대마도에는 산고양이, 말, 고려꿩 등 일본열도에서는 볼 수 없는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고 이 섬의 웬만한 사찰에는 신라불, 고려불 또는 조선의 범종이 모셔져 있다. 쓰라린 민족사의 현장도 도처에 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처형당한 박제상의 순국비, 조선 숙종 때 조난당해 목숨을 잃은 조선역관사(譯官使) 108명을 기리는 역관사비, 왜놈들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버틴 면암 최익현의 순국비 정략결혼으로 대마도주(島主) 가문으로 출가한 덕혜옹주(고종황제의 딸)의 결혼기념비 등...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서에도 기록돼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어느순간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또한 16세기에 조선 조정이 펴낸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 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시켰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팔도총도, 동국조선총도 등 조선시대에 제작된 대부분의 지도는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는 (우리 영토는)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했다.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했다. 대마도는 고유한 '대한민국의 영토'입니다![조선방역지도]조선 전기에 제작된 한국 전도(韓國全圖). 《동국지도》 계통의 지도이다.557년(명종 12) 또는 58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이회의 《팔도지도》보다 두만강과 북동부 지방을 많이 수정하였으며만주(滿洲)와 쓰시마섬[對馬島(대마도)]을 한국의 영토로 표기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1930년대에 입수하였다.국보 제248호.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조선팔도지도]18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정상기의 <동국지도>의 수정본 계열에 속하는 전도(全圖)이다.18 ~ 19세기로 이어지는 조선전도의 발달과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지도이다.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대동여지전도]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소축척으로 줄여 만든 약 92만분의 1의 우리나라 전도.김정호의 제작으로 추정하고 있다.현대식 축척으로 환산하면 1:162,000이며 22개의 첩본으로 이루어져 휴대하기에 편리하다. [조선국 지리도 중, 팔도총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한 1592년 일본의 ‘조선국지리도’중 ‘팔도총도’. 현존하는 지도는 1872년 재모사한 것이다. 지리적 개념이 부족해 독도(우산도)가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졌지만 명백한 조선 영토로 돼 있다. 이렇게 많은 역사적 고증자료가 확실하게 있슴에도 정부는 우리영토를 왜국이 점령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묵인할 것인가? 이제 우리도 교과서에 체계적인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여 후손에게 교육해야 하며, 일순간 강탈 당한 우리의 소중한 영토를 되찾는 일에 조금의 소홀함이 없이 강력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Demado(Tsushima) Belongs to Korea!
Demado(Tsushima) Belongs to Korea!
실제 대마도가 오래 전 우리 땅이었다는 기록은 사료에 많이 등장한다. '세종실록' 1419년(세종 1년) 7월 17일조에는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했으니, 본래 우리 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對馬爲島, 隷於慶尙道之�林, 本是我國之地, 載在文籍, 昭然可考)"는 상왕 태종(太宗)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태종은 이어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았는데, 왜인(倭人) 중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소굴을 삼은 것" 이라고 말했다. 같은 책 1444년(세종 26년) 4월 30일조에는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라는 기록이 등장하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만든 '팔도총도' 등 많은 지도들에도 대마도는 조선 영토로 표시돼 있다. 고려시대부터 대마도 영주였던 종씨(宗氏)는 한·일 양국 사이에서 중계 무역의 이득을 취하면서 왜구의 본거지를 이루기도 했다.조선은 1419년(세종 1년) 1만7000명의 군사로 대마도를 정벌한 뒤 영토로 편입하거나 직접 세금을 거두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으나 이곳이 경상도에 예속된 속방(屬邦)이라는 의식을 계속 지니고 있었다. 15세기에 대마도는 계속 조선에 조공을 바쳤고, 16세기까지도 대마도주는 정기적으로 조선 국왕을 알현하는 사신을 보내 조선으로부터 관직을 임명 받았다. 일본이 정식으로 대마도를 직할지로 편입한 것은 19세기 후반 메이지(明治) 정부 때의 일이었다. 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 49.5km... 반면, 대마도와 일본 규슈(九州)는 147km나 떨어져 있다. 대마도 주민들은 1950년대 초반까지 저녘 때 배를 타고 부산에 와서 술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놀다가 이튿날 아침에 돌아 갔다고 한다. 이후 오랫동안 부산∼대마도 간 뱃길이 끊겼으나 1999년 정기여객선이 운행되면서 대한해협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KTX)가 개통되면서 대마도는 서울에서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섬이 됐다. 대마도에는 산고양이, 말, 고려꿩 등 일본열도에서는 볼 수 없는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고 이 섬의 웬만한 사찰에는 신라불, 고려불 또는 조선의 범종이 모셔져 있다. 쓰라린 민족사의 현장도 도처에 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처형당한 박제상의 순국비, 조선 숙종 때 조난당해 목숨을 잃은 조선역관사(譯官使) 108명을 기리는 역관사비, 왜놈들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버틴 면암 최익현의 순국비 정략결혼으로 대마도주(島主) 가문으로 출가한 덕혜옹주(고종황제의 딸)의 결혼기념비 등...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서에도 기록돼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어느순간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또한 16세기에 조선 조정이 펴낸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 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시켰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팔도총도, 동국조선총도 등 조선시대에 제작된 대부분의 지도는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는 (우리 영토는)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했다.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했다. 대마도는 고유한 '대한민국의 영토'입니다![조선방역지도]조선 전기에 제작된 한국 전도(韓國全圖). 《동국지도》 계통의 지도이다.557년(명종 12) 또는 58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이회의 《팔도지도》보다 두만강과 북동부 지방을 많이 수정하였으며만주(滿洲)와 쓰시마섬[對馬島(대마도)]을 한국의 영토로 표기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1930년대에 입수하였다.국보 제248호.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 49.5km... 반면, 대마도와 일본 규슈(九州)는 147km나 떨어져 있다.
[조선팔도지도]18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정상기의 <동국지도>의 수정본 계열에 속하는 전도(全圖)이다.18 ~ 19세기로 이어지는 조선전도의 발달과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지도이다.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대동여지전도]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소축척으로 줄여 만든 약 92만분의 1의 우리나라 전도.김정호의 제작으로 추정하고 있다.현대식 축척으로 환산하면 1:162,000이며 22개의 첩본으로 이루어져 휴대하기에 편리하다.
[조선국 지리도 중, 팔도총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한 1592년 일본의 ‘조선국지리도’중 ‘팔도총도’.
현존하는 지도는 1872년 재모사한 것이다.
지리적 개념이 부족해 독도(우산도)가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졌지만 명백한 조선 영토로 돼 있다.
이렇게 많은 역사적 고증자료가 확실하게 있슴에도
정부는 우리영토를 왜국이 점령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묵인할 것인가?
이제 우리도 교과서에 체계적인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여 후손에게 교육해야 하며,
일순간 강탈 당한 우리의 소중한 영토를 되찾는 일에
조금의 소홀함이 없이 강력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펌)
첫댓글 맞아요 대마도는 우리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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