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교회에 관하여-5
제3절 역사적 고찰-1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역사적으로 변질하기도 했습니다.
1. 초대 교회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변증가들, 예를 들면 로마의 클레멘트, 익나시우스, 폴리갑, 순교자 저스틴 등은 교회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인 성도들의 교통이라고 바르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2세기 후반부터 교부들은 분파들과 이단들에 대항하여 교회의 외적 일체성과 한 교구를 맡은 성직자인 주교(主敎)의 역할을 점점 더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터툴리안의 제자이며 3세기 중엽 카르타고의 주교이었던 키프리안은 처음으로 감독교회의 교리를 발전시켰습니다.
키프리안의 교회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교회는 외적 조직을 가진 단일체이다. 즉 교회는 감독 위에 세워진 것이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2) 이 가견적, 즉 보이는 교회는 하나의 기원으로 시작되므로 특별한 일체성을 갖는다.
3) 이 일체성은 특히 감독을 중심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감독 없이 교회 없고 교회 없이 구원 없다. 감독은 교회원을 박탈, 회복시키는 권세가 있다. 정당한 감독에게 불순종하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4) 교회가 하나이니 세례도 하나며, 가톨릭교회 밖에 있는 교회의 세례는 무효다.
5) 감독은 교회 안에 있고 교회는 감독 안에 있다. 따라서 감독과 더불어 있지 않은 자는 교회 안에 있지 않다.
6)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7) 감독직은 사도적 전승에 따라 세워진다. (이에 따라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하는 교황주의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주장을 근거로 교회의 유형적 일체성에 의한 전 세계적 교회라는 개념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천주교회적 오류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2세기의 몬타누스파, 3세기의 노바시안파, 4세기의 도나투스파 등은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에 강하게 반대하며, 교인들의 성결성(聖潔性)이 참 교회의 표지라고 보려는 경향을 나타냈습니다.
a. 몬타누스파
몬타누스는 이교의 제사장이었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주후 155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성령에 지배되었다며 방언과 예언을 하기 시작했고, 요한복음에 약속된 성령이 바로 자기를 통해 말씀하신다고 선언했습니다. 주로 소아시아의 프리지아에서 활동하여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을 통틀어 ‘프리지아 사람들’이라 불렀습니다.
처음에 이 운동은 영적 부흥 운동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엄격한 삶을 요구하고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지며, 새 예루살렘의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려는 활기찬 신앙 운동으로 출발했습니다. 다시 말해 몬타누스 운동은 당시 교회의 무기력한 모습과 침체된 영적 상태에 대한 자기 각성의 목소리로 시작했던 운동이었습니다. 몬타누스는 타락한 교인들의 생활을 성결하게 바꾸기 위해 금욕생활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자신도 금식을 엄격하게 지켰고 결혼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세례 후에 범하는 죄, 특히 간음죄는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하면서 이것은 순교로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급진적인 그의 주장은 큰 울림이 되어 하나의 교회개혁 운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을 한다는 프리스길라와 맥시밀라라는 두 여인이 몬타누스에게 합세하면서 이 운동은 예언 활동으로 치우치게 되었고, 성령에 의해 자신들이 새 시대를 개척하는 주인공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시대를 성부의 시대인 구약시대, 성자의 시대인 신약시대, 그리고 그 후에 예언자 몬타누스가 예고하는 성령의 시대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계시의 시대가 끝났으며, 곧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선전했습니다. 많은 추종자가 그들의 말을 듣고 마지막 날을 맞이하기 위해 한 장소로 모였고, 실제로 새 예루살렘이 하늘 지평선 위에 드리워진 환상을 보았다고 선전했습니다.
몬타누스 운동이 북아프리카로 확산하면서 207년경에 당시에 가장 비범한 라틴 기독교 신학자였던 터툴리안이 몬타누스의 엄격한 금욕생활이 마음에 들어서 몬타누스의 추종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을 강조한 이 성령 운동은 성경을 벗어난 예언과 계시를 말함으로써 이단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결국 몬타누스와 두 여인은 추종자들로부터 재림주나 메시아처럼 숭배받는 우상이 되었고,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b. 노바시안파
로마의 학식 있는 장로 출신이었던 노바시안은 교회의 변절자들에 대해 관용과 용서를 해야 한다는 도나투스파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변절자는 교회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에 의해 생성된 노바시안파의 회원이 되려면 매우 엄격한 자격 기준이 요구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입교인은 세례를 받아야 했고, 세례 이후에는 짓는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으므로 결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서약을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죄를 범했다고 해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죽음이나 투옥과 고문 같은 핍박을 견딜 수 없어 배교한 자들도 회개하면 다시 교회원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노바시안은 로마교회의 감독직을 고사하고 그의 동조자들과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고 스스로 감독이 되었습니다.
노바시안의 신학적 입장은 그의 저술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240년경에 쓴 것으로 보이는 <삼위일체에 관하여>라는 그의 저작에는 “아들은 항상 아버지 안에 계셨으며, 그 밖에서 아버지는 항상 아버지가 되지 않았다.”라고 하면서 삼위일체론을 부인했습니다.
로마 황제 데시우스의 대박해 때에 변절했던 자들을 받지 않다가 후에 재세례를 베풀고 받아들였습니다.
c. 도나투스파
주후 284년부터 305년까지 로마제국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시기에 성직자를 포함한 많은 기독교도가 극심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기독교를 저버렸습니다.
기독교도는 칙령에 따른 로마제국의 박해에 대해 세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버린 '배교자', 신앙을 지킨 '고백자',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킨 '순교자'입니다.
배교자 중에는 로마제국의 박해에 직접 가담하여 숨어있는 기독교인을 색출하고 처형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성경을 불태우고, 교회 건물을 훼손하는 활동에 참여하였는데, 그중에는 기독교인 색출을 도왔던 주교급 기독교 성직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인임을 고백하고 저항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재산을 몰수당한 후에 투옥되거나 노역형, 태형,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들 중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박해 이후에 교회를 다시 세우며 고백자와 순교자로 존중받았습니다.
309년 로마제국의 박해가 끝나고, 313년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북아프리카 지역 교회는 배교자들을 구분하며 배교 행위에 따라 출교, 제재, 용서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과정 가운데 신앙을 지켰던 고백자들 가운데 용서를 수용하지 않고 배교자 전체를 출교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파가 등장했습니다.
급진파였던 도나투스파들은 배교자 색출과 처분을 강력히 주장하며, 기존 교회에서 자신들이 구별된다고 여기며 급진적인 분리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배교자를 받아들인 보편교회 전체를 죄악이 물든 타락한 교회로 보고 자신들만이 유일한 순수한 교회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보편교회는 도나투스파의 극단적 주장과 논리, 교회의 용서하는 행동을 죄악시하는 행태로 인해 이단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극단적인 폭력을 지향하는 집단도 나타났는데, 이들을 키루쿰켈리온파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반대하고 배교자를 용서하자고 주장하는 기독교도들에게도 폭력을 가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도나투스파의 문제를 지적하고, 배교자 용서를 주장했던 신학자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암살할 계획까지 세우고 실행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이들은 배교자를 받아들인 보편교회를 부정하였으나,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전통은 보편교회를 따랐으므로 신학적인 교리를 변개하거나 새롭게 제정한 이단은 아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4세기 보편교회가 교회제도를 정립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까운 알렉산드리아 주변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카르타고, 지금의 튀니지 지역에 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자체 주교를 이어가며 독자적인 교회의 모습을 유지하며, 카르타고의 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다가 이슬람 세력이 카르타고를 점령한 6세기 이후 카르타고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며 흩어져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