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놀라운 꿈과 계획이다
♣ 하나님 손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급한 사정이 생긴 한 부자가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귀중품을 경매에 내놓았습니다. 그 소식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찬찬히 물건을 살펴보던 경매사는 가장 별 볼 일 없는 것부터 경매를 시작해야 전부 처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쪽 구석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만 잔뜩 쌓인 심하게 낡은 바이올린 하나를 먼저 꺼내 들었습니다.
먼지를 떨어내고 뚜껑을 열어 보니,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었습니다. 경매사는 바이올린을 경매 첫 물품으로 내놓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경매에 붙이니,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단돈 몇만 원에 넘기겠다고 해도, 아니 그냥 가져가라고 해도 관심조차 갖지 않았습니다. 경매장까지 와서 그런 폐품 악기를 사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대로라면 바이올린은 영락없이 쓰레기통 신세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쪽에서 한 백발의 노신사가 조용히 손을 들었습니다. 다들 왜 저런 바이올린을 돈 주고 사려는 건지 궁금하여 가만히 지켜보는데, 노신사가 앞으로 걸어 나와 바이올린을 살펴보게 해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습니다.
바이올린을 건네주자 노신사는 손수건을 꺼내서, 보물 다루듯 바이올린 이곳저곳을 정성스럽게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현을 조이고 음을 골랐습니다. 그 모든 동작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다뤄 본 사람의 솜씨였습니다. 금세 조율까지 마친 노신사는 바이올린을 들고 연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낡아 빠진 고물 바이올린에서 매우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바빠 죽겠는데 지금 뭐하는 거지' 하는 불만의 눈으로 지켜보던 사람들마저 바이올린 연주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연주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경매장이 아니라 음악회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넋을 잃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습니다.
연주를 마친 노신사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경매사에게 바이올린을 돌려주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경매사는 떨리는 손으로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렇게 낡고 초라한 바이올린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선율이 나오리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 바이올린, 이거 정말 보통 물건이 아니구나. 이걸 어떻게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겠어?'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고물 바이올린을 다시 경매에 붙였습니다. 처음에는 거저 준다고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기저기서 서로 사겠다고 나서는 통에, 결국 그 바이올린은 오백만 원에 팔렸습니다.
우리 인생 역시 고물 바이올린과 비슷합니다. 살다 보면 많은 사람이 우리의 인생을 연주해 보겠다며 다가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부모님입니다. 많은 부모가 자식의 인생을 돕겠다며 애를 쓰다가 실패합니다. 그러고는 그 탓을 자녀에게 돌리며 비난합니다. "넌 안 돼. 왜 그 모양이니? 하는 일이 늘 그렇잖아. 다른 애들 좀 봐라."
부모뿐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선생이, 때로는 지도자가, 때로는 연인이 자기 마음대로 연주해 보겠다며 우리 인생에 손을 댑니다. 하지만 대부분 시끄럽고 거친 소리만 내다가, "넌 틀렸어. 넌 안돼. 넌 그 정도밖에 될 수 없어"라고 말하며 우리를 무책임하게 내던지고 떠납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삶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어떤 꿈과 능력을 갖고 태어났는지, 얼마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지음 받았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우리 안에 얼마나 아름다운 악보와 선율이 있는지, 어떻게 해야 그것을 연주할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 삶이 망가져서 버려진 낡은 바이올린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릅니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낡은 바이올린도 그 가치를 아는 노련한 연주가의 손에 들어가면, 상상할 수도 없는 아름다운 선율을 내는 명기(名器)로 변화됩니다. 작은 악기 하나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여러분과 저는 어떻겠습니까?
우리 안에 담긴 비밀을 아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삶을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는 오직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과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
제 인생도 낡은 바이올린 같았습니다. 저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볼 장을 다 본 인생인 줄 알았습니다. 제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깨지고 망가진 저를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이전에는 상상도 못한 멋진 선율로 저를 연주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뒤, 제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아름다운 시상(詩想)이 제 안에도 그렇게나 많이 존재하리라고는 이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감히 찾을 수도 없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귀하신 주님이 노련하고 부드러운 솜씨로 제 인생을 연주해 주시니, 그분을 향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쓸데없이 밥만 꾸역꾸역 먹는 저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이 제 안에 넣어 두신 귀한 것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찬송가에 실린 모든 곡의 가사가 전부 제 이야기였습니다. 주님을 향한 제 마음과 생각과 느낌이 그 모든 가사에 실려 있었습니다. 제 안에 갇혀 있던 고백들이 고스란히 찬송가에 담겨 있었습니다. 마치 누군가 제 머릿속에서 그 모든 가사를 베껴다 쓴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농담 삼아 한마디 해보자면, 저작권 침해로 고소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은혜로운 일이라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은 자기 계발 책이나 강연에서 부르짖는 '성취하라, 비전을 세워라, 정상을 정복하라' 따위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와 생각으로는 단 한 뼘도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꿈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가슴속에 간직해 오신, 우리를 창조하려고 마음속에 설계도처럼 그려 놓으신 우리의 '원래' 모습입니다. 저는 이것을 '원형'(原型)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란 맨 처음 그분이 계획하신 바로 그 모습, 즉 '원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거나 출세를 하거나 유명해지면, 우리는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급히 흘러가 버리고, 한 번 흘러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강물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보고 듣고 울고 웃는 모든 것은 금세 지나갑니다. 특히 눈에 보이는 것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렇게 제한적이고 순간적인 것이 우리의 원래 모습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형을 회복하시려고,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내주셨습니다. 주님의 핏값을 치르고서라도 얻어야 할 만큼 가치 있고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육신적인 외모나 세상의 가치 따위를 꿈꾸며 기뻔한다면, 이보다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마흔 살을 왜 '불혹"(不惑)이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농담이긴 하지만, 유혹하기도 그렇고 유혹받기도 그런 '슬픈' 외모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정말 좋아합니다.
장미꽃은 예쁩니다. 하지만 그렇게 예쁜 꽃도 시들면 추해집니다. 그렇다면 할미꽃은 어떨까요? 할미꽃은 활짝 피었을 때나 시들었을 때나 비슷합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타고난 외모 하나만 믿고서 뭇 이성의 애간장을 녹이고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자랑도 마흔 살이 되면 끝이라는 말입니다. 그때는 모두 불혹이 된다는 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외모는 평준화됩니다.
그리고 쉰 살이 되면 '학벌의 평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쉰 살 이상의 직장인은 '명퇴' 대상 일순위입니다. 고학력자일수록 더 그렇다고 합니다. 그때는 좋은 학벌이 오히려 저주가 됩니다. 학벌이 전부가 아닙니다. 돌아가신 모 기업의 회장은 초등학교도 못 나왔지만 수많은 박사들을 밑에 두고 부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순 살이 되면 무엇이 평준화될까요? 건강이 평준화됩니다.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게 운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 이분 몸 좋으시네" 라는 소리 좀 들어 보겠다고, 목숨 걸고 운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다 똑같아집니다. 오히려 저는 나이 지긋한 양반들이 이십대 청년 몸매를 하고 돌아다니시면, 부럽기보다 무섭습니다. 그냥 우아하게 늙는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잎새'는 소설 속에서나 아름다운 겁니다. 벌레 먹은 이파리 하나가 끝까지 안 떨어지고 버티면서 파르르 떠는 모양이, 현실에서 정말 아름답겠습니까? 이러면 서로 부담스러울 뿐입니다. 오는 때가 있으면 가는 때도 있는 법입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잠깐 들었는데, 거금을 주고 최신식 주름 제거 수술을 받았다며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답니다. 밤에 자는데 눈이 다 안 감긴다는 거였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밤에 자다 돌아누운 남편이 반만 감긴 아내의 눈을 본 광경을요.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남편에게 노이로제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가는 세월을 억지로 낑낑거리며 막으려고 하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삶의 목표가 이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번 태어난 인생은 때를 따라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 지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이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1:24-25)
우리 인생은 때가 되면 마르고 시드는 풀과 꽃 같습니다. 화끈하게 사랑을 불태우던 연인들도 때가 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돌아섭니다. 가진 게 많거나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하다못해 친구나 사돈의 팔촌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 때는) 어디에 가든 꿀리지 않고 잘 대접받습니다. 하지만 재물과 권력을 모두 잃어버리고 나서도 여전히 그렇게 대접받을 수 있을까요? 이러한 생각들을 해보면, 인생이 정말 비참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잘 나갈 때 오히려 더 겸손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철 지난 크리마스트리 같은 인생이 됩니다.
철 지난 크리스마스트리를 본 적이 있습니까? 시간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햇볕이 쨍쨍한 여름까지 내버려 둔 크리스마스트리.
이제, 크리스마스트리가 빠진 성탄절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때는 이보다 더 멋진 게 없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지나고 나면 그처럼 볼품없고 거추장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금종과 은종에는 먼지가 한가득 쌓여 있고, 금줄과 은줄은 축 늘어진 게 정말 꼴불견입니다.
게다가 정리할 때 보면, 자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 장식 중에서 본래 나무에서 나온 건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다른 데서 남을 것을 갖고 와서 붙여 놓은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잘생긴 외모 역시 지나고 보면 내 것이 아닙니다. 학벌이나 지위, 명예는 어떻습니까? 왕년에 이랬고 저랬고 하면서 침까지 튀기며 떠들어 대지만, 이것 역시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전부 다른 데서 갖다가 붙인 겁니다. 시간이 흘러 철이 지나면 떼어 내야 합니다. 지금 회장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앞으로도 영원히 회장 노릇할 수 있습니까?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다 떼어 내고 나면, 비쩍 말라비틀어진 나무 하나만 덩그러니 남습니다. 생명이 없는 모든 것은 이렇게 비참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땅히 바라볼 것을 보지 못한 채, 이런 허망한 것들을 삶의 최고 가치에 두고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꿈을 보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더 망가지고 더럽혀지기 전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정한 가치를 보여 달라고 기도애햐 하지 않겠습니까? 창조 전에 하나님이 꿈꾸셨던 원래의 진정한 모습, 그 무엇으로도 꾸미지 않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첫 사람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첫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뭔가를 더 꾸미거나 덧붙여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놀랍고 영광스러운 원형을 회복시키기 원하십니다. 그것을 위해 주신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영광스러운 복음을 통해 원형을 회복한 사람은 참 생명, 진정한 본질을 찾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에서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참된 인생을 당당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4)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2-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3-6)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복음을 정면으로 체험하고 깨닫는 사람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도 이토록 영광스러운 복음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 하나님이 우리 속에 심으신 무한대 가능성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복음이며, 주님이 그토록 간절히 주고 싶어 하는 것도 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가장 큰 비극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면 무엇으로 자신을 채워야 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진정한 만족을 찾아 끊임없이 표류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 인생의 엑스파일을 열어 놀라운 꿈과 비전을 우리 가운데 제시하고 성취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사망과 원수의 저주에서 우리를 건져 내어, 그분의 꿈꾸시던 원형으로 온전히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구원은 죄를 용서하고 지옥에서 건져 내는 수준을 뛰어넘어,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하신 원래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주님이 여러분 안에 어떤 가능성을 넣어 두셨는지, 여러분에게 어떤 꿈을 주셨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한 번 정하신 뜻은 결코 바꾸지 않고 성취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완벽한 뜻을 오해하고 왜곡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착각은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여기며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신학은 아주 중요하고 가치 있는 학문이지만, 그만큼 위험성도 있습니다. 좁디좁은 인간의 철학적 사고 안에 무한하게 크신 하나님을 쑤셔 넣으려는 무리한 행동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피조물의 한계에 갇혀서 그렇게 생각하는 신학자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은 죽었다'며 그분의 사망을 선고했습니다. 성경과 고고학 자료를 철저히 분석하고 연구해 보니, 하나님이 죽으셔야 말이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세상을 떠났을 것이고, 사후에 그가 어디로 가게 됐는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한 그는 죽었고, 그가 죽었다고 한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8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사상가였던 볼테르 역시 대표적인 무신론자입니다. 당시 그는 50년 뒤에는 교회가 사라지고, 100년 뒤에는 기독교 자체가 사라질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교회와 기독교는 오히려 더 부흥했고, 그가 살던 집은 성경을 찍어 내는 인쇄소로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해 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 전능자이십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1:11)
자신의 뜻과 선택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는 존재, 이것이 바로 전능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꿈꾸고 계획하신 모든 것은 현실이 되어 나타납니다. 그 어떤 것보다 분명한 현실 말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렘33:2)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대로, 주님은 자신의 뜻대로 일을 준비하고 이루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처럼 자신을 결정을 계속 번복하며 딴소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이고, 내 계획은 그게 아니었는데 ...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내가 잘못 생각했다. 미안하다", "일이 내 생각대로 되질 않는구나. 네가 이해해다오." 주님 사전에 이런 말은 없습니다. 뜻하신 바를 변경하거나 보류하거나 미루시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찌 하나님을 전능자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전능자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능히 역사하여 일을 이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까?
대부분 과일에는 씨가 있습니다. 사과 속에도 당연히 씨가 있습니다. 혹시 사과 한 개 속에 몇 개의 사과씨가 들어 있는지 아십니까? 아마 먹느라 바빠서, 씨앗의 개수를 셀 겨를이 없었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사과 안에 씨앗이 몇 개나 들어 있는지 알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과를 하나 사서 쪼개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과씨 속에는 몇 개의 사과가 들어 있을까요? 씨앗 속에는 사과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일까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그 안에는 사과가 들어 있습니다.
예전에 한 모임에성 이 질문을 하자, 어떤 자매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아주 당당하게 "백 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이 너무 황당해서 웃음을 참느라 숨넘어갈 뻔했지만, 그런 대답이라도 해준 게 어디냐 싶었습니다.
저는 다시 "어째서 그리 정확하게 백 개라고 대답하시는 건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자매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웃기만 했습니다.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되면, 사과가 대략 백 개쯤 열릴 거라고 생각한 건가요?"
"네."
"그러면 백 개의 열매를 맺은 사과나무는 그 이후에 그냥 말라 죽을까요?"
이 말에 자매님이 놀라더니,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아니요, 이듬해에도 사과가 열리겠네요."
사과씨를 반으로 쪼개 봐도 그 속에는 사과가 없습니다. 사실 씨앗 속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이는 대로만 따진다면, '사과씨 속에는 사과가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사과씨 속에는 분명히 사과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실재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보이는 것만이 실재는 아닙니다. 더 크고 근본적인 실재는 보이지 않는 것 중에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사람의 외모를 들 수 있겠죠. 우리가 누군가에게 부담을 느끼는 것은 대개 그 사람의 외모 때문입니다. 솔직히 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외모가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내면세계, 즉 마음의 중심이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외모보다 더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 존재하는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사과씨 속에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적합한 환경과 조건만 갖춰지면, 그 생명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여건이 허락하는 한 무한정 뻗어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조그마한 씨앗 하나 속에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사과나무와 사과가 들어 있는 셈입니다. 천하의 어떤 존재가 그 작은 씨앗 속에 그토록 풍성하고 놀라운 미래의 꿈과 계획을 완벽하게 저장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외에는 없다 이말입니다. 할렐루야!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스펄전 목사님은 도토리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도토리 하나 안에 우주를 만들어 놓으셨다." 그런데 크기로만 봐도 우리가 사과나 도토리보다 몇백 배 더 크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 안에 주님이 그분의 꿈과 비전을 마음껏 설계하고 대자인해 놓으셨다면,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질 겁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해 온 지혜, 천하를 호령했던 영웅들, 세상을 뒤바꾼 발견과 발명, 업적과 작품 등은 모두 첫 사람인 아담 속에 있었습니다. 천하를 뒤흔들었던 왕과 정치인, 군인, 학자, 과학자 모두 아담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인류가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담 한 사람 안에 집적해 놓은 분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우리 인생을 계획하고 디자인하시면서 품으셨던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적합한 환경과 조건이 갖춰지면 결국에는 발아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조건만 맞으면, 그것이 충족되기만 한다면 원래의 우리 모습을 회복시키기 원하시는 그분의 꿈이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