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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8. 묵상글 (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 창조의 완성인 구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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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8.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창조의 완성인 구원
인류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인류를 구원하십니다.
이 말은 인류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구원까지 하신다는 말이고,
인간을 창조만 하고 인간을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탁란하는 뻐꾸기 같은 새가 있고,
애를 낳고 돌보지 않는 못된 엄마가 혹 있기는 하지만
모든 동물과 모든 엄마는 낳기만 하고 키우지 않는 못된 짓을 하지 않습니다.
죽게 되기를 바라거나 불행하도록 자녀를 낳는 어미는 없다는 얘기이고,
살게 되기를 바라고 행복하도록 낳는다는 말이며,
사랑의 창조요 사랑의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피조물이 이러할진대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더 그러시겠지요.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구원 계획을 갖고 계셨으며,
무작정 인류를 창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을 오늘 독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자유의지로 죄를 지은 그 원죄 이래로
원죄에 물든 우리 인간을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실 구원 계획은
원죄 이후의 계획이 아니라 세상 창조 이전의 계획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기도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자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시어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동정녀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아담과 하와가 인류에게 죄를 가져왔다면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고,
마리아는 하와의 죄를 없애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원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원죄 이전에는 없었는데 원죄로 인해 생긴 계획이 아니라는 말이며,
인류의 원죄를 내다보고 세상 창조 이전에 세우신 계획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계획의 연장선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도
하와의 죄에 물듦이 없도록 미리 계획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흠 없는 여인이었기에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기에 합당하도록 하느님께서 흠 없는 여인으로
마리아를 창조하셨다는 것이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의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리아론이기도 하지만 구원론이며
구원론이기도 하지만 창조론이기도 하고,
사랑으로 비롯된 창조가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구원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려운 신학은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천지창조 이전부터 우리를 사랑으로 미리 선택하시고,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그 하느님의 사랑만 이해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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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8.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한국교회의 수호자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엄청 기쁜 날입니다. 우리는 <입당송>에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나의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화답송>에서도,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 하여라, 찬미노래 불러라.”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 환호송>에서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하고,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본기도>에서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정녀를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시어,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셨으며,
성자의 죽음을 미리 보시고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다.’
그리고 19세기의 저명한 학자이며 교부전문가인 헨리 뉴먼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에 관한 가장 오래된 초기부터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그녀가 바로 두 번째 하와라는 것이다.”
사실, 마리아가 ‘두 번째(새) 하와’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마리아도 하와처럼 죄 없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하신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라는 표현은 ‘의롭다’ 또는 도덕적으로 ‘선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죄 없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그래서 죽지 않는 존재이며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초대교부들은 하와가 인류의 타락에 고유한 역할을 했듯이, 마리아도 인류의 구원에 고유한 역할을 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와는 뱀의 말에 속아서 불순종과 죽음을 가져왔다. 그러나 동정 마리아는 믿음과 기쁨을 가져왔다.”(유스티누스). “하와를 통해서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통해서 생명이 왔습니다.”(히에로니무스). “사람을 속이기 위해 여인을 통해서 독약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은총 속에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여인으로부터 구원이 쏟아졌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사실 <창세기>에 따르면, 원죄를 짓기 전에는 ‘여인’으로 불렸고 범죄 후에 ‘하와’로 불리어집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가나안의 혼인잔치’와 ‘십자가 아래에서 마리아에게 요한을 맡기실 때’ 마리아를 “여인이여”라고 부르심은 마리아를 죄 없으신 ‘두 번째(새) 하와’로 부르심을 말해줍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마리아가 “새로운 하와”임을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창세기> 3장 15절의 ‘원복음’을 다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전승은 이 대목(창세 3,15)을 “새로운 아담”의 예고라고 본다. 그분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리 2,8) 아담의 불순종을 넘치게 보상한다. 한편, 많은 교부들과 교회학자들은 ‘원복음’에서 예고된 ‘여인’을 “새로운 하와”인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로 생각한다. 마리아는 최초로 그리고 특별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죄에 대한 승리의 은혜를 입은 분이다. 그분은 원죄에 전혀 물들지 않았고, 지상 생애 동안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그 어떤 죄도 범하지 않으셨다.”(411항)
이처럼, 예수님과 마리아를 ‘새 아담’과 ‘새 하와’로 여기는 것은 마리아가 죄 없이 잉태되셨고, 죄 없이 사셨다는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마리아의 부모님이 죄가 없었다는 것도 아니며, 아들에게 죄스런 본성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죄를 씻은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님께서 죄를 이기신 승리에서 흘러나온 ‘특별한 은총’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를, 곧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교종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 믿을 교리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 선언은 세 가지 사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곧 첫째로, 이 특전의 성격이 ‘마리아는 원죄로부터의 면죄되었다는 것’이요, 둘째로, 특전의 이유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셋째로, 이 특전의 방법은 ‘예수님께서 갈바리아에서 얻은 구원의 선행된 효과라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러기에, 이 “교의”의 선포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보편적인 구원으로부터 예외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을 미리 입으셨다는 뜻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 하와”인 마리아는 죄 없이 창조되어, 새 창조의 의로운 삶을 가리키는 ‘살아있는 표징’이 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가정을 되돌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2코린 5,17)이 되게 하셨습니다. 곧 성모님으로 하여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 열리기 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창조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여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지 죄를 용서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본래의 죄 없는 에덴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죽음이 없는 상태로 건너감이며,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해줍니다.
“죄를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다 주었지만, 은총은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로마 15,21)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하늘에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히브12,23)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새로움으로 태어난 피조물로 축복을 입게 되었으니, 한없는 기쁨으로 “성모님의 노래”인 오늘 입당송의 다시 불러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나의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입당송)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
주님!
당신 말씀을 품고, 은총이 가득합니다.
당신 사랑을 품고, 은총이 가득합니다.
그 말씀에서 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그 사랑에서 제 생명이 솟게 하소서.
제가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언제나 함께 계시는 당신이 진정, 저에게는 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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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8.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세상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또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돈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돈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만들고 결정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을 따르기보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아기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더군다나 천사는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며 명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늙은 나이에 임신한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을 전하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자유의지로 응답하였습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처녀가 임신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구세주의 잉태는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잉태되고 또 태어나셔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응답을 통하여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앞으로 닥칠 일을 고민했더라면 아마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배가 불러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믿어주기나 할까요?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쫓겨나든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한 것은 곧 자신의 모두를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을 차지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래도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순명의 모범을 보이시고 실제로 구원을 이루셨으니, 우리도 일상 안에서 성모님을 생각하며 단호한 결단과 더불어 온전한 봉헌의 삶으로 하느님께 한 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겸손과 순명으로 하느님을 잉태 하셨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며,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다시 오실 것이므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의 구원이 성취될 것입니다”(성 루도비꼬). 오늘은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겸손과 순명으로 예수님을 낳으신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께 나아가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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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8.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외부로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갈 때면 꼭 가지고 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노트북’입니다. 노트북으로 매일 강론을 준비하고, 복음묵상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노트북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고, 음악을 듣기 때문입니다. 노트북이 충격에 약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노트북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닙니다. 8년 동안 노트북을 잘 보관하던 가방의 지퍼가 고장 났습니다. 가방 자체는 제가 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노트북을 위해서는 8년 동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노트북 가방을 정리하고, 새로이 노트북 가방을 마련했습니다. 넷플렉스에서 ‘신앙의 표징’이라는 다큐를 보았습니다. 유럽의 교회에는 예수님과 관련된 ‘성물(聖物)’을 보호하는 성당이 더러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쓰셨던 가시관’입니다. 예수님께서 쓰셨던 가시관은 아름답게 금으로 장식된 보관함에 있었습니다. 금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보관함이 필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쓰셨던 ‘가시관’을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보물’인 가시관이 사라질 뻔 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난 2019년 4월 15일에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화재가 있었습니다. 이때 ‘가시관’도 화재로 사라질 뻔 했는데 소방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무사히 구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노트북 가방과 가시관 보관함은 그 자체로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노트북과 가시관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우리는 오늘의 본기도에서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자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시어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동정녀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성모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어린 아기 예수님을 기르셨기 때문입니다. 노트북을 위한 노트북 가방처럼, 가시관을 위한 보관함처럼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거처가 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깨끗한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이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모님이 신앙인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범일까요? 우리는 오늘 그것을 복음에서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것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비록 그것 때문에 심한 고통을 받을지라도, 비록 그것 때문에 죽음에 이를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들 또한 성모님의 믿음을 본 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래서 성모님을 자모이신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우리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전구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는 과달루페에서, 루르드에서, 파티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주 단식하라는 것입니다. 자주 성체를 모시라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정성껏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들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깨끗한 몸과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보여주었던 참된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참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티 없고 흠 없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의 시작을 알려 주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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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8.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우리 민족 모두가 성모님의 품 안에서 신앙을 키워가고 있음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이라는 말 안에 들어있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미리 그리스도의 길을 마련하셨고 그래서 성모님 마리아의 탄생은 필연적으로 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여인도 이미 준비하셨다는 뜻입니다. 티 없이, 원죄 없는 상태로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원죄 없으신 성모님, 즉 모든 것을 준비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우리의 수호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신앙과 그 신앙의 길을 돌이켜보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준비하셨는지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은총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 신앙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시고 그것을 필요한 순간에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의 선물 상자 안에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모님도 이것을 이미 하시고 자신의 원하는 것을 청하기보다는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늘 찬양하고 찬미하셨습니다.
오늘은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며 이것을 알고 늘 찬미와 감사로 삶을 살아가신 성모님을 닮아 가는 오늘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극복와 굴복
어린이용 그림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그리고 직관적인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책에 실려있던 그림 한 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린이가 가운데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천사가
왼쪽에서는 악마가 속삭입니다.
어린아이의 눈 골뱅이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 남은 과자 앞에서 말입니다.
어린이용 책이지만 성인인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한쪽에서는 천사가, 한쪽에서는 악마가
늘 우리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갈등합니다.
극복과 굴복
어쩌면 오늘도 극복과 굴복 사이에서 우리는 골뱅이 될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천사 쪽인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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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8.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신부님께서 쓰신 책에서 동창 신부님 이야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동창 신부님께서는 아주 젊은 나이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판정을 받고 큰 충격을 입어서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고 합니다.
“왜 내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하는가! 앞으로 할 일이 창창한데!”
이런 말을 자주 내뱉으면서 더 나아가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힘든 투병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계룡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자칭 도사를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어떤 말기 암도 완치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으신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곳에 몇 달 머물면서 암이 더 심해져서 다시 치료받던 병원으로 돌아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도사는 죽음의 문턱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절박한 사람을 현혹하여 돈을 뜯어내는 사기꾼이었습니다. 동창 신부님께서는 자신의 무모한 집착으로 무속인에 빠진 것을 자책하고 후회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절박함에서 우리는 판단력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잊는 것입니다. 평생 하느님만을 사랑하겠다면서 사제가 된 분 역시 예외가 아니었지요. 그렇게 우리 인간은 모두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그러나 오로지 주님 안에서만 참된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봉헌합니다. 성모님께서도 절박한 순간이 참 많으셨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도 그러했습니다. 당시에 처녀가 아기를 갖게 되면 간음했다면서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아기를 가졌다고 하면, 약혼자였던 요셉은 또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그 절박한 순간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으시기에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런 상황이라면 주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저 같으면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내일 다시 찾아오세요.”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아셨던 성모님이셨지요.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절박할 수 있는 순간을 은총의 순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성모님과 같은 믿음을 갖추고 있을까요? 절박함이 또 하나의 희망이 순간일 수 있음을 믿음을 통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를 하느님과 더 닮게 만들어주는 행위입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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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8.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모님 예찬
-지혜, 찬미, 순종-
“새로운 노래를 주께 불러드려라.
묘한 일들 당신이 하시었도다.“(시편98,1ㄱㄴ)
오늘 성모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 화답송 후렴이 참 흥겹고 은혜롭습니다. 하루종일 끊임없이 부르고 싶습니다.
“알마 레뎀토리 마텔,
꽤 펠비아 챌리 폴타 마네스, 엩 스텔라 마리스.”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 영원으로 토인 하늘의 문, 바다의 별이시여.)
대림 제1주일부터 2월1일까지 잠자리에 들기전 끝기도후 부르는 라틴어로 시작되는 성모 찬송가로 마감하는 행복한 하루입니다. 이어 이른 밤 잠깨면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본후 집무실에 들어와 부르는 만세육창의 평화의 기도가 또 행복한 하루를 엽니다. 늘 불러도 늘 좋고 새로운 만세육창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오늘은 정말 반갑고 기쁜, 사랑하올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모님” 대축일입니다. 어제 대축일을 앞둔 12월7일 성 암브로시오 기념일에 저희 수도형제 3명은 참 좋은 선물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오창선 고백신부님의 사제수품 50주년 행사에 영광스럽게 초대되어 지극한 환대와 선물도 가득 받았습니다. 정말 이런 환대와 선물은 생전 처음입니다.
말그대로 오창선 신부님을 통해 오늘 대축일을 맞이하는 성모님께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참으로 치밀하고 섬세한 배려의 사랑에 감격했습니다. 이런 초대는 저희 수도승들에게는 생전 처음이고, 명동 파밀리아채플에서도 미사도 처음이요, 명동 프란치스코홀에서의 축하연도 처음이었습니다.
미사끝무렵에 참석한 내빈 사제들의 소개가 있었고 사제중 저는 연령상 위에 속한 까닭인즉 일찍 제 이름을 불렀고 좌석 뒤쪽에 두 수도형제와 함께 있던 저는 벌떡 일어나 “저, 여기 있습니다!”하여 우레같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뒤늦게라도 “저와 함께 온 안마르꼬 수사님과 백요셉 수사님입니다!” 용기를 내어 소개하지 못했음이 내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떠날 무렵 오창선 시몬 신부님께 감사인사를 전했습니다.
“신부님, 잔치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삼 초대가 은총의 선물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오고 싶어도 초대해 주셨기에 올 수 있었지 초대받지 못했으면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과연 초대받은 손님답게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사 전례에 참석하는지 반성했습니다. 며칠전 교황님은 주요 추기경 9인 회의에서 교회의 여성적 차원에 대한 나눔이 있었고 교황님의 모두 발언에서 크게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교회는 여자입니다(The Church is woman). 만일 우리가 여자가 무엇인지, ‘여성임의 신학(the theology of womanhood)’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교회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의 남성화는 해결되어야할 큰 죄입니다.
세계적 신학자 예수회원인 한스 우르스 폰 발다살 말처럼 교회는 베드로적 또는 성직자 차원과 마리아적 또는 신비적 차원으로 두 차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적인 요소가 베드로적인 요소보다 더 중요합니다. 남성다움이 없는 신부인 교회, 여성인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여자입니다.”
정말 교회에 대한 참 심오하고 아름다운 정의입니다. 여자가 없다면 교회도 수도원도 존속하지 못할 것입니다. 수도원만 봐도 봉사자들 미사봉헌자들 예물 봉헌자들 대부분 여자들이지 남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제 집무실을 찾는 경우도 남자들은 거의가 빈손이지만 여자들 손에는 꼭 선물이 있습니다. 새삼 수도원을 사랑하는 자매님들 얼굴에서 저는 성모님 얼굴을 봅니다.
제대보 레이스에 보면 십자가가 열넷입니다. 레이스를 봉헌한 루시아 자매님의 설명에 감동했습니다. “수사님들 현재 열셋이기에 한분 더 오라고 열넷 십자가를 수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는 수도성소를 지망하는 네레오 형제가 함께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이또한 대축일을 앞둔 성모님의 선물로 생각되었고 좋은 수도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참 듬직해 보이네요!” 덕담도 했습니다. 참 성모님의 은혜가 고마워 자주 부르는 어머님 은혜라는 노래도 성모님 은혜로 바꿔 2절까지 만세육창후 불렀습니다.
“높고높은 하늘이라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높은 게 또 하나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넓은 게 또 하나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성모님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 것 같애.”
말그대로 성모님 대축일 불러 드리는 축가요 오늘 자주 부르려 합니다. 성모님 선물에 대한 자랑이,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본받고 싶은 성모님 덕을 나눕니다.
첫째, 지혜입니다.
지혜의 성모님, 동정 마리아입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참으로 주님을, 주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면 저절로 지혜도 따릅니다. 오늘 창세기 하와느 이점에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분별의 지혜가 부족했기에 뱀의 유혹에 빠졌고 이어 아담도 죄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하여 “너 어디 있느냐?” 물었을 때 숨어버린 아담입니다. “왜 나무의 열매를 먹었느냐?” 책임을 추궁할 때 이들의 변명과 핑계가 가관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었습니다.”
하느님과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아담이요 신뢰 관계는 무너졌습니다. 무지의 악이 정말 무섭고 두렵습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지혜의 결핍이 이런 관계 파괴의 죄를 짓게 했습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먹었습니다.”
하와 역시 똑같이 무책임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없으면 탐욕과 교만앞에 속수무책입니다.
하와의 무지를 일거에 만회한 새 하와인 성모님이 참 고맙습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은 겸손과 지혜뿐임을 깨닫습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이 지혜요, 끊임없는 참된 회개를 통해 주님을, 주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할수록 우리는 성모님처럼 겸손과 분별의 지혜도 선물로 받습니다.
둘째, 찬미입니다.
찬미의 성모님, 동정 마리아입니다. 제2독서 에페소서 찬미가는 얼마나 좋습니까! 그대로 성모님은 물론 초대교회 신자들, 그리고 우리의 심정을 반영하는, 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또 우리의 복된 신원을 확인 하는, 그리하여 우리 수도자들이 매주 월요일 저녁기도때 마다 바치는 찬미감사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느 말마디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성모님 마음에 꼭 들으셨을 찬미감사가입니다. 아, 우리는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닌 이미 세상 창조이전에 하느님께 선택된, 불림 받은 성소자임을 깨닫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성인성녀들, 형제자매들과 함께 끊임없이 바쳐야 할 하느님 찬미찬양의 감사가입니다.
도대체 이런 찬미찬양의 기쁨과 행복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 찬미찬양의 기쁨으로, 맛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여기서 샘솟는 사랑과 지혜요, 무지에 대한 궁극적 처방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평생 저녁성무일도 끝무렵에 성모님과 함께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
셋째, 순종입니다.
순종의 성모님, 동정 마리아입니다. 순종에 앞서 거룩한 사랑의 침묵이요 경청이요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대로 감지되는 성모님 모습입니다. 참으로 눈밝으신 하느님은 겸손히 당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시골 나자렛에 숨겨진 삶을 살고 있는 침묵과 경청, 겸손의 동정 마리아 성모님을 찾아나섭니다.
“은총이 가득한 마리아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얼마나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동정 마리아 성모님인지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속내의 비밀을 다 털어놓습니다. 이런 성모님이 계시기에 하느님도 참 행복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일방적으로는 일하시지 못합니다. 전능의 무능이라는 역설의 진리입니다. 어떻게? 묻는 마리아에게 소상히 설명하십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정말 거룩한 사랑의 침묵, 경청, 겸손의 동정 마리아를 선택하신 하느님의 혜안이 놀랍습니다. 이어지는 동정 마리아 성모님의 응답에 하느님은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성모님의 믿음은 이런 순종을 통해 절정에 도달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응답이 나오기전 온 세상이 쥐죽은 듯 깊은 정적의 침묵에 싸여있었다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주석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비롯하여 모든 천사들, 지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참으로 조마조마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에 인류의 구원이 달렸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리아를 떠나니 하느님은 기뻐 춤추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랑의 지혜입니다.
사랑의 찬미입니다.
사랑의 순종입니다.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동정 마리아 성모님을 닮아 날로 지혜와 찬미, 순종의 사람이 되어 성령충만, 사랑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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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8.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할 수 있으니>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믿을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믿을 수 있으니
우리는 믿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희망할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희망할 수 있으니
우리는 희망합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사랑할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사랑할 수 있으니
우리는 사랑합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일어설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일어설 수 있으니
우리는 일어섭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나아갈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나아갈 수 있으니
우리는 나아갑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품을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품을 수 있으니
우리는 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베풀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베풀 수 있으니
우리는 베풉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함께할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함께할 수 있으니
우리는 함께합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어울릴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어울릴 수 있으니
우리는 어울립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살릴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살릴 수 있으니
우리는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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