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냈어요! 바쁘게 사느라 오늘에야 문득 당신 생각이 났어요. 나는 그동안 두 아이들 키우면서 살아왔지요. 여름이 수십 번이나 지나고도 또 지나가네요. 구겨진 내 얼굴을 보니 과연 나도 탱탱하던 시절이 있었던가 싶네요.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요! 어색한 질문 같지만 홀로인지 아니면 지금도 동반자가 있는지요?.
애들은 결혼해서 잘 살아요. 큰아들 정우는 서울에서 게임개발자로, 작은아들 정국이는 뉴질랜드에서 알콩달콩 신혼생활을 하고 있어요. 정우 결혼 때 아빠한테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안타까운 소리를 하더군요.
"우릴 찾지 않는 아빠는 필요 없어요. 엄마면 족해요."
강경하게 말하는데 퍽 당황했어요.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이었어요. 내색은 안했어도 하늘아래 이 땅 어디에 계실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을거에요. 지금까지도 엄마아빠가 왜? 헤어졌는지 나도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모르는 비밀스런 만남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당신 참 무심했어요. 애들한테만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요.
다시 옛 생각이 뭉게구름처럼 떠오릅니다. 당신이 가정을 팽개치고 딴살림을 차리고 있을 때, 나 참 힘들었어요. 산후 후유증으로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 되었을 때. 오히려 위로를 받아야 할 내가 배신당한 기분으로 하루하루가 고역이었어요. 이럴 바에야 맘 편히 사는 게 났다고 생각했지요. 결국 합의이혼을 했지만요.
우리가 헤어진지도 아득한 옛날이 되었네요. 82년 5월이었으니까. 그 때 참 싱그러운 봄날이었는데... 여덟 살 세살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뛰어놀 때였지요. 남편 없이는 살아도 아이들 없이는 못살 것 같아 내가 키우겠다고 했던 게 참 잘 한 것 같아요. 솔직히 애들 의지로 살았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애들이 있어 힘을 낼 수 있었고, 남자 없이도 살 수 있었습니다. 애들이 참 올곧게 컸거든요. 세월은 마음을 바꾸어놓더군요. 원망과 미움대신 용서하고 행복을 빌어줄 수 있도록 말에요.
아이들은 티 없이 잘 자랐어요. 손자들을 키워주신 어머니는 4년 전 103세에 돌아가셨어요. 무엇이 그리도 못 미더워 치매가 올 때까지 사셨는지, 어머니한테 늘 죄송했습니다. 내가 신장염으로 사경을 헤맬 때도, 열악한 생활전선에서도, 어머니는 나와 손주들 뒷바라지에 애 많이 쓰셨습니다. 어머니는 그저 이 딸이 안쓰러워 희생만 하시고 떠나셨습니다.
황혼 즈음에서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우리의 인연이 그렇게 짧을 줄 알았다면 차라리 만나지를 말 것을...... 부질없는 생각도 했습니다. 자식에게 불행의 씨앗을 남기는 꼴이 된 것 같아 늘 애들한테 미안해하며 살았어요. 오죽하면 "엄마 이제 그만 미안해 해도 돼요."라고 했을까요. 다행히 저희들 앞가림까지 잘 해주니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이제는 내 할 일도 끝났다 싶으니 새록새록 당신이란 사람이 궁금해져요. 이 세상에 지금 계시는지, 생뚱맞게 궁금해졌습니다. 그토록 잊었던 당신을 말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서로의 갈 길로 가자며 냉정하게 돌아섰는데. 자그마치 32년이나 지났는데 말에요. 그 때 이해를 좀 더 할 걸. 애들을 봐서라도 참을 걸. 하는 후회 섞인 생각도 했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징조이겠지요. 한번쯤은 어찌 지내나 찾아보고 싶은 생각도 들 때가 있어요. 언젠가 딱 한번 꿈에서 대문을 두드리며 당신은 큰애 정우를 불렀어요. 처음이자 마지막 꿈이었어요. 당신과 결혼해서 한번도 '여보' 소리를 못해봤는데 ‘여보’라고 호칭을 붙여보겠습니다.
여보! 우리의 인연은 이렇게 되었지만 살아 계시다면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었으면 좋겠어 요. 아이들의 앞길을 위해서라도요. 나는 이미 다 용서했어요. 당신의 건강은 어떤지가 제일 궁금해요. 나는 일 년 전 교통사고로 고생을 많이 했어요. 본의 아니게 애들까지 놀라게 했어요. 다행히 완치돼서 활동할 수 있고, 취미생활도 하면서 잘 지내요. 나이 들수록 건강에 신경이 쓰입니다. 육신건강도 챙겨야겠지만 마음 건강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돼요. 그러니 당신도 평안한 마음으로 사세요. 자식에 대한 미안함은 대신 행복으로 빌어줘요.
밤이 깊어가네요. 부디 몸 건강하세요.
당신의 아내였던 사람올림
첫댓글 인생을 살다보면 후회 되는 일들도 있고 상처로 남은 슬픔도 누구에게나 있는 거구나 함을 글을 읽으면서 느꼈습니다.
힘들고 외로울 때도 많았을 텐데도 꿋꿋하게 잘 이겨내시면서 자식들 잘 키우셨으니 앞으로의 삶은 좀 더 홀가분하게 여유를 가지면서 건강하게 사시길 바라겠습니다.
부끄러운 글 읽어주시어 감사합니다.
용서는 자신을 위한 행동이라는 말이 맞는 거 같습니다
세월속에서 자식을 키워내고
용서를 실천하시는 님
아름답습니다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누구나 어느 누구나 한번쯤은
이리 생각을 정리 하고 싶을 껍니다~
그리고 그게 터닝포인트가 될수도 있고,,
올려 주신 글 .. 맘이 찡 하네요 ~
앞으로도 지금 오늘처럼 건강하게
글도 쓰시고,
지금처럼 봉사도 다니시고 그저 행복하소서~~~
따듯한 말씀에 힘을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조물주가 인간을 설계 시공하기를...
뒤를 보기 보다는 앞을 보기에 더욱 편리 하도록 되어있는 까닭을...
좋은 날들이 두어 걸음 앞에 잔뜩 마련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그것들에 취하기에도 남은 시간이 현저하게 아까운 날,
곧 비구름이 지나갑니다.
지금은 화사한 원피스에 마른 운동화를 준비하셔야 할 때~^^
좋은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화사한 원피스에 마른 운동화..^^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 이러케님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면 주제넘으리라 생긱됩니다.
하지만 남편 없이 아이들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는 저도 조금은 알 것 같네요.
아무리 미워도 아이들의 아빠이고 자신의 남편인데 어찌 생각이 나지 않겠습니까.
지난 세월을 돌이켜 아쉽지 않은 사람 또한 몇이나 될까요. 그래도 아들 둘 훌륭하게
키우셨으니 자랑스런 어머니십니다. 당당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조언에 감사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용서는 청하는 자 보다는~
용서를 먼저 하는 자가 위대하다지요.
위대한 이러케님이 며칠간 내리던 비가 그치고 나타난
뭉게구름처럼 아름답게 보입니다.
자알 봐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은 편히 눈물보이면 안되는 시간인데
우연히 본 글에 눈물이 맺힙니다.
두 아드님 훌륭히 잘키우시고
역시 어머님은 위대하신분입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요
부끄러운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쏭님처럼 갑자기 눈물이 핑..^^ 이 글을 쓰실 때 마음이 확 와 닿아서...엉엉엉
로드님의 말씀처럼..이제는 화사한 원피스에 마른 운동화를 준비하셔야 할 듯 싶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