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꿈과 계획이다
♣ 메이드 인 하나님
이사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사28:24-29)
하나님은 '파종'을 비유 삼아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씨앗만 보고도 그것이 어떤 열매를 맺고 어떤 특성이 있는지 잘 아는 농부들의 지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쌀을 원하는 사람은 벼를 심고, 사과를 원하는 사람은 사과씨를 심는다는 겁니다. 씨앗만 봐서는 어떤 열매가 열릴지 알 수 없는데도, 농부는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으며 어떻게 자라날지 훤히 꿰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농부는 씨앗의 종류와 특성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씨를 뿌릴 줄 압니다. 땅을 깊게 파서 묻기도 하고 물에 그냥 뿌리기도 합니다. 고랑을 파서 뿌리기도 하고 거름과 함께 묻기도 합니다. 익은 곡식을 타작하는 방법도 각양각색입니다. 성경은 이 모든 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일개 농부에게도 자신에게 주어진 씨앗을 다루는 지혜가 있는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원형을 꽃 피울 방법을 모르시겠습니까? 각각의 다양한 씨앗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그분이 꿈꾸고 계획하신 일을 성취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이 이뤄지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꿈이 꽃을 피울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너는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잖아. 너 같은 녀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네가 뭘 할 수 있겠어?"라고 몰아붙인다 해도, 우리는 절대 실패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결코 실패자일 수 없습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시118:22-23)
버림받은 인생도 주님을 만나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아름다운 성전의 머릿돌로 멋지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토록 엄청나게 놀라운 하나님의 꿈,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괜히 에수님이 십자가에서 핏값을 지불하셨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저 같은 인간은 최하위 말단 천사 하나로도 충분히 대속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사실은 그것도 과분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아니 하나님 자신을 저를 위해 내주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제 어디를 보고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별 볼일 없는 저 때문에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긍정적 태도와 적극적 사고방식에 큰 점수를 줘서 제 자신을 좋게 봐 준다고 해도, 그래도 이건 답이 안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를 존귀히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핏값까지 치르고 사실 만큼, 내 상상 이상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43:1-2)
예전에 저는 제 태생을 원망했습니다. 망해 버린 술집 아들로 태어난 것이 너무 억울하고 분했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머리까지 좋은 사람도 많은데, 나는 왜 이렇게 억세게도 재수 없는 인생인가 싶었습니다.
그런 제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죄악으로 엉망진창 되고 슬픔과 좌절, 고통으로 얼룩진 인생이지만, 너는 나의 보배롭고 존귀한 아들이다. 내가 알 속에 있는 너를 꺼내어, 네가 상상도 해본 적 없는 꿈을 싹 틔우게 할 것이다."
주님은 깨지고 망가진 제 인생을 건지셨습니다. 천하고 보잘것 없는 제 안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를 담으셨습니다. 그 이후 제 영혼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은혜롭게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아름다운 꿈과 계획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 저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저처럼 가방끈 짧고 모자란 사람이 어찌 주님의 전도자로 사역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런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에게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창조 전부터 계획하신 원형을 차근차근 이루실 것입니다. 당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께 반응해 보시기 바랍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3-6)
시대와 세대를 넘어 수많은 사람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 왔습니다. 언뜻 보면 멋있게 느껴지지만, 사실 이는 근본부터 잘못된 질문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에 나와 보니 '나' 였던 거지, 자기가 원하는 외모와 재능, 성격을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이 말입니다.
어쨌든 모든 사람은 자신에 대한 특정한 상(像),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야'라는 자기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기 인식을 진리로 철석같이 믿고,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것을 무시하거나 짓밟으려고 하면, 강하게 반발하고 분노하며 어떻게 해서든 인정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신이 원하고 생각하는 만큼 인정받으려는, 자아의 집요한 투쟁이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앞서 얘기했듯, 어린 시절 저는 늘 욕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아버지를 너무 무서워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절 부르시면 대답은커녕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소 같은 자식, 소 같은 놈"이라며 야단치셨습니다. 저는 제가 정말 소 같은 놈인 줄 알았습니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래, 나는 소다. 그래도 나에게는 소 같은 뚝심이 있다!'며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습니다만, 제 자존감은 완전히 짓밟혀 버린 상태였습니다. 저는 정말로 제가 소처럼 과묵하고 내성적인 줄 알았습니다. 제 안에 형성된 자기 인식을 철석같이 믿은 겁니다.
내성적인 제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원래 저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순수한, 아주 순수한 사람입니다. 집회 때 푼수 짓 하는 건 예수 믿고 나서 바뀐 모습이라 이겁니다. 제 말을 온전히 믿어 주시길 국민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이처럼 저는 심각한 자기 비하와 자학,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꼭 성공해서 제 존재 가치를 입증해 보이겠다는 열의에 불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름 모를 들꽃 한 송이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들꽃을 들여다보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바로 묵상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하염없이 들꽃을 들여다보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워낙 험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꽃 같은 것도 감상할 여유나 기회가 없던 저의 지난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꽃이라고는 기껏해야 장미나 백합밖에 몰랐는데, 그런 꽃들을 바라보며 '나는 이런 꽃은 될 수 없겠지? 나는 잡초밖에 안 되는 인생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그 시절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저는 길가의 들꽃도 달리 보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들꽃은 셀 수 없이 많은 꽃잎이 빼곡하게 겹쳐져 만들어진 꽃입니다. 백합보다 들꽃을 만드는 데 훨씬 더 손이 많이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백합 천만 송이와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걸작인 셈입니다. 저는 늘 제 자신이 들꽃처럼 한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들꽃도 한 치의 모자람 없이 하나님께 지음 받은, 장미와 백합으로 결코 대신할 수 없는 아름답고 귀한 꽃이었습니다.
들꽃의 귀함을 깨닫는 순간, 제 안의 자기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잘나고 뛰어난 사람이 와도, 전 세계 인구를 다 모은다고 해도 저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왜 이전의 저는 제가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들꽃을 통해 이 사실을 깨달으니, 정말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로 완벽하게 지으시고, 온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망해 버린 술집 아들로만 영원히 살다 죽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저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거나 아메바처럼 어딘가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제게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나온 곳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에게서 나셨고,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에게서, 증조할아버지는 고조할아버지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렇게 올라가면 어디까지 갈까요? 아담까지 가 닿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아담을 만드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분명히 저는 망해 버린 술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제 아버지는 저를 이 땅에 보내기 위한 '통로'였고, 술집은 그저 '환경'이었을 뿐입니다. 제가 어떤 통로로 이 땅에 왔건 저는 분명히 '메이드 인 하나님'이더라 이 말입니다!
누가 만들었는가? 누구에게서 나왔는가? 인간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저는 왕족의 혈통인 누구네 가문 몇 대손입니다"라며 어깨에 힘주는 사람은 무엇을 자랑하는 겁니까? 자기는 좋은 파이프에서 나왔다며 자랑하는 겁니다. 물론 파이프 중에는 질 좋은 것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겁니다. 금으로 된 것도 있고 구리로 된 것도 있고, 철로 만들어서 녹슬어 버린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파이프는 어디까지나 통로일 뿐입니다. 거쳐 온 길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혹시나 불쾌하시더라도 제 말을 계속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오물이 흘러나오는 파이프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수도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황금으로 만든 파이프라고 해도, 더럽고 냄새나고 썩은 게 흘러나오면 하수도인 겁니다. 하지만 녹이 슬었어도 생수가 흘러나오면 무슨 파이프입니까? 생수 파이프입니다.
그러니까 혈통이나 집안 배경을 자랑하는 건 정말 우스운 겁니다. 말이 안 됩니다. 어떤 파이프인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보다는 무엇이 흘러나오는지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초라하고 망가진 파이프라고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원형이 흘러나오면, 그분의 생명 파이프가 된다는 말입니다.
♣ 당신은 최고의 작품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 존재한 모든 사람은 조상이나 가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슴에서 나온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작품, 그것도 걸작입니다(엡2:10).
필요한 건 오직 하나, 때를 만나는 것뿐입니다. 알이 부화될 때를, 씨앗이 싹 틔울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 역시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 두신 때가 차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을 만나고 복음을 경험하며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원형이 풍성하게 꽃을 피우고 열매 맺어 그분의 영광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을 창조하셨을까요? 사업을 하고 싶은데 일손이 모자라서, 머리 좋고 수완 좋은 고등동물을 하나 만드셨을 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이 갖고 계신 모든 복을 함께 나누고 누릴 존재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복에 목마른 존재가 아니라 복으로 충만한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이 말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2-3)
하나님은 우리가 복된 존재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드러내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에 목마른 존재가 아니라 복덩어리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복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역사도 우리를 복으로 충만한 존재로 되돌리신 작업입니다. 죄와 사망의 저주로 하나님의 원형을 잃어버리고 나서 우리는 복에 목말라 죽는 존재로 변질되었습니다. 존재 자체가 복이었던 원형을 생각해 보면, 정말 비참하게 망가진 겁니다. 이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하나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한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또 다른 목적이자 가장 근본적인 복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 안에선 영원히 기뻐하며 주님과 교제하도록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선악과 사건으로 타락하면서 우리는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관계하며 사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그분과 영원히 사랑의 교제를 나눌 존재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 나온 것처럼, 주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이토록 완벽하게 지으신 주님이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시는 '여호와 이레'이심을 온전히 신뢰하며 "아멘"으로 화답하면, 억지로 쥐어짜는 신앙생활에서 졸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해보겠다며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태초부터 우리 안에 준비해 놓으신 그분의 영광과 능력과 복을 자연스럽게 충만히 드러내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러니 어떻게 주님을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만이 우리의 만족이 되시며, 주님만이 우리를 채우실 수 있습니다. 엄마를 간절히 기다리며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는 젖먹이 아이처럼,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행복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경말씀에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를 가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요15:1-5). 주님은 신랑이시공 우리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신랑은 신부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2:10)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아2:16)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62:4-5)
이것이 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입니다. 어떻게 창조주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세상 어떤 종교에 이런 신이 있겠습니까?
나무가 가지를 통해 열매를 맺듯, 주님은 우리를 통해 그분의 생명과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사과나무의 영광인 사과 열매가 가지를 통해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은 남이 대신해 주거나 감당해 줄 수 없는, 각 사람만의 몫입니다. 전 세계 60억 인구를 죄다 뒤져 봐도 내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60억 인구가 전부 몰려온다 해도 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취함 같이, 주님이 우리를 그분의 유일하고 완전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매우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이 놀라운 꿈과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베푸신 것이 바로 십자가 구속의 역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