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소리신문 양승록 기자 | dsr123@daum.net
● 일시 2014년 12월 22일
● 장소 구리시 엄두섭 목사 자택
● 대담자 조효근 들소리신문 발행인
신학교 때부터 철저히 영성 훈련을 시켜 내보내야 현장 목회가 탄탄해질 것을 강조
루터의 수도원 삶이 종교개혁 길로 나아가게…수도원 불필요하다는 인식은 아쉬움
요 근래 몇 년 근황을 듣지 못했는데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엄두섭 목사님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런데 사모님이 하늘나라로 갔다는 말씀을 하신다. 한 20일 정도 됐다고. ‘그분을 뵈어야겠다.’ 한파와 빙판으로 꽁꽁 얼어붙은 날씨·정국의 한복판에서 그분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그분의 허리가 더 굽어져 있었다. 걷기는 하셨지만 몇 년 사이에 영 불편하신 모습이셨다. 엄두섭 목사님은 은성수도원 설립자이다.
현재 그 수도원은 장로회신학대학 신학생들의 영성훈련을 하는 곳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엄 목사님이 한평생 예장(통합) 교단에 소속해 목회를 해오다가 60이 넘은 후 은퇴, 신교(기독교)에서 ‘수도원’이 절실하다는 인식 하에 퇴직금 등을 보태서 은성수도원을 설립했다.
손수 터를 닦고 바위를 옮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분이 만든 ‘토굴’(개인 기도실)에서 20년간 그 자신은 깊은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뜻있는 이들이 드나들었고, 그 중에서는 국내 곳곳에서 나름대로 수도원을 이루고 사는 이들도 나오고 있다. 올해 96세. 노구(老軀)의 어르신을 찾아 ‘오늘의 길’을 여쭈었다. <편집자 주>
▶ 그동안 찾아뵙지도 못했습니다. 사모님이 먼저 그렇게 가셔서 참으로 더 힘드시겠습니다.
= 그렇지요. 당뇨로 오랫동안 치료받으며 잘 지냈는데 마지막에는 탈진이 와서 의식도 다 잃어버렸어요. 집사람이 저보다 열 살 아래였고 한 70년 정도 함께 살았는데, 곁에 없으니 참 힘들지요. 생각하면 힘드니까 가능하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어요.
▶ 5년 전 뵐 때보다 몸이 많이 불편해 보이십니다. 저희 창간 32주년 행사 때 오셔서 영성강좌를 하실 때만 해도 건강해 보이셨는데요.
= 요즘은 아예 바깥 출입을 잘 못해요. 나갈 일이 있으면 양쪽에서 부축해야 가능합니다. 수도원 지을 때 바위 지어 나르고 하면서 다리에 무리가 갔나봅니다. 병원에 가니까 허리에서 잔뼈가 내장을 눌러 다리가 썩는다고 수술해야 한다고 해서 했는데, 그 뒤로 다리는 좀 나은데 허리를 이렇게 펴지 못하고 불편하게 되었어요.
▶ 식사는 잘 하십니까?
= 운동을 잘 못해서 그렇지 먹는 것은 문제 없습니다. 허리가 아프고, 잠을 잘 못 자는 편이고, 위가 부담스럽고, 조금 움직여도 숨이 찹니다.
▶ 예전에 집필을 간간히 많이 하셨는데 요즘도 글쓰기를 하고 계십니까.
= 시력은 괜찮은데, 멀리서 하는 얘기는 잘 못 알아 들어요. 글도 예전처럼 잘 쓰지 못하고, 강의 요청이 있으면 그것을 준비해서 가는 정도입니다.
▶ 96세신데 그만하면 건강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중국의 펑 유란은 제자들 놓고 95세에 강의를 했다는데, 저도 70이 넘고 보니 그건 만만치 않은 일 같습니다.
= 제가 1919년 생이니까 나이는 많이 먹었는데 몸이 불편하니까 여러 가지가 쉽지 않네요.
▶ 한국기독교를 보실 때 기독교 안에도 수도원이 제도화됐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셨었는데, 수도원의 공식형태 조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 제가 포천 운악산의 은성수도원을 설립해서 수녀 몇 사람과 남자 수도자들 몇 사람을 배출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만 옥천에서 나실인수도원을 하고 있습니다. 수녀 4명이 시작해서 7명 함께 하고 있습니다. 원장이 하반신 마비인데도 머리가 비상하게 좋아서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버섯재배, 국수 제조도 하는 등 자립해서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가끔 갔었고, 허원식 할 때 가서 집례하기도 했어요.
▶ 말씀하시는 수도원들이 직간접으로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그 수도원들이 어떻게 이뤄져가고 있는지도 언론으로서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은성수도원에서 신학생들이 매주 20명씩 훈련받고 있다는데, 그 중 여학생 가운데 4명이 수녀가 됐다고 합니다. 목사안수도 받고 수녀가 된 4명이 올해 허원식을 한다며 설교자로 초청해 갔었는데, 참 대견했습니다. 검은 저고리에 치마 입고 있는 그들을 보니 마음이 기쁘고 좋았습니다. 은성수도원이라는 것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게 젊은이들이 뜻을 따라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 그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장로교단 중에서 가장 탄탄하다고 알려져 있는 통합 교단에서 그런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군요. 90 평생 일궈 오신 것이 이제 열매를 맺고 제자도 있으시고, 시설도 물려주시니 참 기쁘실만 합니다.
= 은성수도원 건물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많이 수리는 했지만요. 어쨌든 한국교회에도 베네틱도, 어거스틴 같은 성자가 나와야 합니다. 동광원의 이현필 선생처럼 풍부한 영성을 사모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 큰 나무 아래 많은 이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 신학교에서부터 수도원적인 교육과 훈련이 절실합니다.
= 내가 어느 신학교에 가서 교수들이 ‘기도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물어보니 사실이라고 합디다. 미국이나 외국에서 학위 받은 것 가지고 가르치는 것으로는 안됩니다. 실력과 함께 영성이 뒷받침 돼야 합니다.
수도원의 목적이 청빈, 순결, 순명인데 신학교에서부터 그런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이단 정통 등만 따지려 하지 말고 성자를 길러내는 일에 교단 차원에서 주력해야 합니다.
▶ 목사님께 배운 것을 잘 잇고 발전시켜서 앞으로 수도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 예전에는 수도원이라 하면 기독교에서도 적대시했으나 지금은 이해가 되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강원도 사창리에 수녀 2명이 조립식 2층 건물을 지어 청빈수도원을 하고 있고, 안양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교단을 만들어 남녀 수도회(성결수도회, 은총수도회)가 있습니다. 이들은 탁발도 한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남원에 동광원수도원이 있고, 광주에는 귀일수도원이 있어요. 그곳에서는 폐질환자들을 간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양시 계명산 수도원도 꽤 활발한 것 같아요. 감리교 목사, 천주교 신부 등을 강사로 초빙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저도 두 달에 한번 씩은 갔고요. 수녀들 몇 명이 잘 꾸려나가는 것 같습니다. 고양시 뒷산에 동광원의 사람들이 작년에 이현필 탄생100주년 기념관을 세우고 ‘헌신관’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불교 절간 비슷하게 고풍스럽고 아담하게 지었습니다.
▶ 최근에 유진벨(배유지) 재단의 4대째 자손인 인요한(존 린튼) 씨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한국기독교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질문하니까, ‘진리에 관심이 없다. 목사들이 낮아져야 하는데 자꾸 높이 올라가려고만 한다’고 비난했으며, 돈 밝히는 대형교회를 보면서 ‘우리 조상이 이런 걸 위해서 한국에 왔나’하고 질타하는 기사를 보고 참 부끄러웠습니다. 인요한의 아버지 휴 린튼(인휴) 목사는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나 섬과 산간 지역에서 600여 교회를 개척했을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이었지만 1984년 4월 11일 해질 무렵 교회 짓는데 쓸 자재를 차에 싣고 집을 나서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의 모습에서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개독교’라는 말은 ‘개××’라는 말인데 그런 말을 듣고 있는 우리 모두 패자인 듯합니다. 저도 나이를 먹을만큼 먹어서인지 마음이 더욱 무겁습니다.
한국의 위인들 중 원효라는 고승이 ‘진속일여(眞俗一如)’, 참과 거짓은 하나라는 말을 했지요. 거룩함과 속된 것은 하나라는 말이지요. 내가 참(거룩)에 속했더라도 이것 때문에 속된 것을 제압하든지 거룩을 뽐내든지 하지 말고 그 속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한국교회를 보면 홍수에 떠밀려 있는 강물처럼 보입니다. 답답합니다. 뛰어나가 강단에 서지도 못하고, 고함도 못치시니 새해 한국교회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이 지면을 통해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제가 교회 목회는 40여 년 한 것 같습니다. 목회 하면서도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말하기에는 너무 부분적이지 않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도생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실현하게 되었습니다. 불교나 가톨릭 등 어느 종교를 보아도 수도원 형태가 다 있습니다.
수도원과 세속의 교회가 충돌하지 않고, 수도원이 영성의 수원지(水源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이나 프랜시스 등 성인들 모두가 수도원에서 깊은 영성 훈련을 했습니다. 신교(기독교)는 수도원 없이 500년간 내려오고 있는데 이렇게 약한 모습인 것은 바로 영성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은성수도원에 있을 때 와서 훈련 받고 가곤 했는데, 그 정도의 짧은 시간으로 영성이 삶에 반영되기 힘든 것이었음을 실감했습니다.
일본 니시다 텐코(西田天香:1872-1968)의 일등원(一燈園) 공동체에 가보니 손자가 회장이 되어서 수도원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자손들과 사람들이 탁발수도 하면서 화장실 청소하고 남의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몇 만평 되는 야산에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참회생활>이라는 그의 책을 번역해서 가져갔더니 무척 좋아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일등원 얘기를 소개해 봤지만 소화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유명한 원로목회자들이 ‘내 탓’이라고 말들은 하는데, 모두 말뿐이고 아무런 대책 없이 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제 생각에는 오시다라는 사람의 얘기가 귀감이 됩니다. 그분은 동경대 철학과를 나와서 천주교 신부가 되었지만 시골에 가서 농부 옷을 입고 씨를 뿌리고 심으며 벌레를 잡아주며 평생 성직자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성찬식을 할 때는 자기가 지은 농산물로 지지미를 지져서 떡을 대용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이 형이상학이거나 관념 등은 기독교 아니라고 합니다. 허공에 떠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그의 책에서 실감이 나는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실생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실천해야 합니다. 두 벌 옷, 전대, 지팡이 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의미가 무슨 뜻인지 깊이 새겨서 실천해야 합니다. 청빈, 순명, 순결 등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다 버리며 사는 한국기독교는 희망이 없습니다.
진정한 기독교가 되려면 실제 신학교가 형이상학적인 가르침보다는 수도원의 영성훈련을 가르쳐서 그 안에서부터 수도원적인 인물을 길러내 목회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독교가 살아납니다.
성 프랜시스는 독신 남녀를 위한 수도회뿐 아니라 가정이 있는 이에게도 수도원 생활을 허락해주는 제 3의 재속(在俗)수도회를 허락했습니다. 위대한 것이며 파격적이었고, 수도적인 천재의 발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때도 가능했던 재속수도회를 이어 오늘의 기독교에서도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습니다. 젊은 목회자들이 그것을 조직해서 하고 있는 곳들이 있는데 이것이 확산됐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나에게도 일종의 형이상학이나 관념이었던 부분이 많았습니다. 실생활에서 머리 깎고 신발 벗고, 닭고기도 안 먹는 등의 수행을 했지만 ‘밖’에서 보이는 형식인 부분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내면적 실천이 많이 약했습니다. 부인과도 해혼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순하고 어디 나서지 않는 여인이어서 결정을 못했습니다.
아직 수도원의 길을 가는 이들의 숫자는 적지만 여기저기서 시도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기독교가 건실하게, 세속적이고 부패한 목사들이 아니라 수도사적인 모습으로 진력해 나간다면 분명히 현장 교회에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 진정한 교회가 되려면 수도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의 교회로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교회가 새로워지는 방법이 없을까요? 사고를 쳐서 범법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숙하거나 반성의 기미조차 없이 버젓이 공적 활동에 나서는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입니다.
= 신학교부터 고쳐야 합니다. 풍부한 영성을 가진 자라면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머리로 인식하고 가르치는 것 가지고는 백마디 말로도 감동을 얻지 못합니다. 신학생 숫자가 많고 적은 것보다는 제대로 영성 있는 성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목회자를 배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틴 루터는 어거스틴 파의 수도사로 10여 년간 몸담았습니다. 수도원에서부터 감화 받아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수녀 가운데 한 명과 결혼하면서 수도사는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종교개혁 하면서 개혁은 됐는데, 교회가 세속화 된 것은 바로 이런 영향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는 루터도 버린 수도원 우리도 필요 없다면서 500년간 수도사 없이 내려오니까 타락하고 범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목회했던 곳 중 600명 모이는 교회에 장로 12명이 있었는데, 북한 평북 출신들이었습니다. 그곳에 함경도 출신은 제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수석장로가 의사였는데 이화여대 나온 자를 첩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첩이 만년 여전도회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수도원 영성 얘기 할 토양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와는 내용이 좀 다를 수 있겠지만 기독교 전체가 그런 분위기라면 어떤 교회가 그같은 것들과는 상관이 없다고 자신할까요.
▶ 루터 때문에 기독교가 수도원을 악의 화신으로 보게 됐다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루터의 제자들이 수도원 마룻장 파헤친 일은 신부나 수녀들이 사생아 시체를 감춘 것 찾기였습니다. 그리고 수도원과 수녀원을 폐쇄시키고 신부와 수녀들에게 시집 장가 가게 하고, 놈팽이에게 수녀들을 시집보내고자 했던 일 등 정신적인 멸시로 수도원과 수녀원을 죄악시하며 교회와는 관계없는, 마치 범죄 기관시 했으니 그 저주가 오늘의 기독교에 불행을 가져온 의미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8년 후인 1525년 토마스 뮌처가 농민반란을 하다가 7월에 농민군 10만5천여 명이 루터와 로마제국교회 주교와 영주들의 합동 작전에 전멸하는 사태에 부딪힙니다. 루터가 외친 만인제사의 원칙을 지켜내려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그 와중인 1525년 6월, 곧 농민군 전멸 1개월 전에 카트리나 수녀와 결혼합니다. 농민들이 만인제사의 정신을 실현하려 애쓸 때 루터는 신혼생활을 즐긴 셈이 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처럼 기독교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데, 목사님께서 더욱 강건하셔서 더 깊은 사상으로 지도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저 자신은 나이의 지배를 받아 내가 늙었다, 무엇을 하겠나 걷지도 못하는데… 하고 생각하는데 외부에서는 그렇게만 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고맙고 또 책임도 느낍니다. 한국기독교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제일 먼저 주창한 자로서 말이지요. 그러나 수도생활이 곳곳에서 일어나 생활에서 그 영성이 발휘된다면 한국교회뿐 아니라 사회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힘드실 법도 한데, 세 시간 가까이 꼿꼿하게 앉아계시는 모습을 뵈니 마음이 놓입니다. 2015년 2월 초에는 서울 상도동으로 이사하신다니 서울에서 찾아뵙겠습니다.
= 네 저도 많이 반가웠습니다. 책 많이 쓰시고 총명 유지하셔서 한국교회를 잘 이끄시는 언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에서 자주 뵙지요.
정리 양승록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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