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 신부
예수님의 편가르기?
예수님이 벙어리 마귀를 쫓아낸 사건을 두고 사람들의 의견이 엇갈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일에 놀랐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님이 마귀의 힘을 빌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어떻게 마귀가 마귀를 쫓아낼 수 있겠는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지만 이 이야기를 멀리서 지켜본다면 우선 눈에, 그리고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한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하느님이 하시든, 마귀의 힘을 빌렸건 우리 눈에 정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에는 분명 어떤 힘이 작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의 내용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일이 내 손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곧잘 그 일에 흠을 내길 좋아하거나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말씀이 바로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 줍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편 가르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편이 아닌 사람들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두말 할 필요도 없고, 사랑하지도 못하고 사랑할 생각도 없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의 편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일에 대해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일어난 일의 가치를 의심함으로써 두 가지 죄를 동시에 저지르게 됩니다.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을 의심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과 함께 기적의 대상이 된 사람의 소중한 가치마저 무시하게 됩니다. 하느님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 사랑 역시도 어긴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편에 서지 않는 것 자체가 하느님을 반대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엉망으로 헤쳐 놓아 버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의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흔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과 자신이 느끼는 거리가 멀수록, 다른 말로 예수님이 멀게 만 느껴질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겨난 하느님 사랑의 일들에 시샘하거나 가치를 무시해 버리기 쉽습니다. 나에게 일어나거나 내가 하면 기적일 텐데, 내가 아니라서 마귀의 장난 정도로 보이고 무시하고 싶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당신 편에 서라고 우리에게 윽박지르시지는 않습니다. 진심으로 사랑을 믿고 사랑을 하려는 사람은 이미 당신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어려움을 보고 그 어려움을 함께 헤아리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닌 누군가라도 그를 도와준다면 그를 하느님의 손길로 마음으로 보아 줄 것입니다. 그들이 곧 예수님의 편, 사랑이신 하느님의 편입니다.
그래서 벙어리 마귀 들린 사람을 걱정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편이며 그래서 그들에게 마귀의 내어쫓김은 기쁨이고 그 사람에게 보내는 축복이 되었지만, 그 사람에게 관심도 없고 그냥 일어나는 기적을 쫓아다닌 사람에게 그것도 늘 예수님께 의심을 두던 사람에게 이 기적은 하느님을 모욕하는 기회가 되고 건강을 회복한 사람의 기쁨을 짓밟는 계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랑이란 말과 내가 얼마나 가까운가가 우리가 예수님의 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잣대입니다.
부산교구 정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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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원 신부
진지한 자기 반성이 필요한 신앙관
두 학생이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부모님들이 학교에 와서 선생님께 애원합니다. ‘선생님, 우리 애는 정말 착하고 좋은 아이입니다. 이런 일을 할애가 아닙니다. 나쁜 애들과 어울리다보니, 그 친구들의 꾐에 빠져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제발 이 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 말이 끝나기기 무섭게 다른 학생의 부모도 이와 똑같은 말을 선생님께 전합니다. ‘내 아들은 착하고 잘못을 저지를 애가 아닌데, 친구를 잘못만나 그런 잘못을 범했다.’ 참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 기준으로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시기, 질투, 욕심에 귀와 눈이 멀어 있을 때 우리 마음속을 보면, 자기가 특별한 일을 하면, 당연하고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그런 일을 하면 재수가 좋았거나, 우연히 하게 된 행동으로 보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 갇혀 자기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도, 상대방의 장점과 옳은 점을, 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복음의 예수님을 대하는 많은 군중들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쫒아 냅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악감정과 선입감을 갖고 있던 몇 사람은
그러한 기적의 은혜를 좋게 보아주고 기뻐하며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악의에 찬 중상을 해댑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사람에게서 쫓아내어 성한 사람이 된 것은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한 짓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능력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메시아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악한 마귀의 힘을 빌려 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어디 스스로 결론을 내어 보라는 것입니다.
“서로 싸우면 망하는 법이다.”는 자연 진리를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은 자기 위신을 지키고자 할 때 능력이 없어지면 솔직하게 상대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중상 모략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이들에 대한 칭찬보다는 험담을 쉽게 하는 경향이 우리들에게도 많다 하겠습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졌으면서도 서로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함께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치유기적의 바탕은 그 사람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도 누군가가 나보다 높다 낮다를 가지고 판단하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생각해 주며 서로를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위해주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시기했던 그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위해 짧은 기도라도 바칠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어떻겠습니까?
부산교구 김수원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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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기 신부
하느님의 손가락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부분에는 하느님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이 하느님에게 숨결을 받는 순간을 두 손가락의 만남으로 표현한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그 당시 유명했던 기도문 ‘창조주여, 오소서(Veni Creator)’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기도문에서 하느님 창조의 숨결을 하느님의 오른손가락으로(Tu, digitus Paternae dexterae) 표현한 데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유명한 작품이 그렇듯이 미켈란젤로의 하느님 손가락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생명을 시작하는 데 하느님의 어루만짐이 있었다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이 세상 만물에 대한 하느님의 어루만짐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러러 당신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4-5) 하느님께서 나를 어루만져 주시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어루만져 주신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함을 노래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까닭은 우리한테도 이 세상을 어루만지고, 이웃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손가락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하느님과 우리는 ‘손가락이 닮은’ 사이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만지고 보듬어 줄 능력이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을 포옹할 힘이 있다는 것이 하느님과 우리의 가장 닮은 점이 아닐까?
밖에서 다쳐 돌아온 아이를 쓰다듬고 안아주는 엄마의 모습에서, 실의에 빠진 동료의 등을 두드려 주는 모습에서, 아픔에 지친 환자에게 다가가 지그시 손 잡아주는 모습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픔에 잠긴 이웃을 안아주면서 우리는 가장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된다. 사람을 살리고 우리를 살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살리는 창조의 숨결이 짧은 어루만짐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세상의 악을 몰아냈다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어루만지신 그 손가락이 우리 편이라고 선포하신다. 오늘 하루, 어루만짐이 많은 날이었으면 좋겠다. 상처로 어두워진 마음, 분노와 미움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상처를 보듬어 주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지막이 기도하자. “주 우리 하느님, 우리 손이 하는 일 잘 되게 하소서”(공동번역 시편 90,17).
서울대교구 최성기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