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 앞에 서 본 사람만이 복음을 안다
♣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 가라
저는 은혜를 받으면 그것을 표현하고 드러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는 도저히 그냥 못 넘어갑니다. 한번은 집회에 참석했다가 집에 아주 늦게 돌아왔는데, 역시나 아내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그런 일을 수도 없이 겪어 봤기 때문에 아내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표정으로 일어나 저와 마주 앉았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말에 아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저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니까 아내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귀찮은 일이었을 겁니다. 아내는 "당신은 훌륭한 전도자이시죠"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만족해서 넘어갔을 법한 대답이지만, 그날 제가 워낙 '센' 은혜를 받았기 때문인지 그 대답이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나는 지금 남편으로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묻는 거야."
그제야 잠이 확 깬 모양인지 아내는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5분이 넘도록 잠잠했습니다.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 솔직히 말해 봐. 앞으로 다시는 이런 질문 안 할지도 모르니까 지금 안 하면 평생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할지도 몰라."
아내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습니다. "남편인 당신에 대해 말하자면, 당신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에요."
어떤 말이 나오든 다 들어 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지만, 그 말은 정말 은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정말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자랑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모두 그렇다고 인정해 줍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에서 제가 가장 성경적인 남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아내가 저더러 무서운 사람이라고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곧 제가 성경적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이므로, 정말 끔찍했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표정을 보니, 많은 고민 끝에 나온 말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평소 꺼내지 못한 속내를 정직하게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한 이래 처음으로 저는 아내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습니다. "성경적인 남편이 되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에게 큰 죄를 지었어. 용서해 줘."
저는 어지간한 일에는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이냐 아니냐'의 문제에 대해서만은 곧바로 무릎을 꿇습니다.
아내의 말 한마디에 눈앞이 아찔했습니다. 죄에 찌들대로 찌든 '죄인 장아찌'처럼 살다 주님을 만났고, 감당할 수 없는 복음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그 감격에 매여서,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겠다는 일념 아래 무소유의 전도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가족을 돌보는 일에는 그다지 많은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아내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형수님이 일찍 남편을 여의고 주변에도 그런 여성도가 많았기 때문에, 부부가 둘 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둘이 손에 땀나게 붙잡고 돌아다니는 건 생각이 없는 짓이지. 아내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할 사역자가 아닌가.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배려하고 품으며 함께 사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더구나 저는 아내와 아이들이 남편이나 아버지인 제가 아닌,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따뜻한 위로나 격려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저희 가족이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전사로 강하게 담대하게 살도록 훈련시키고 싶었습니다. 또한 그것이 제가 가진, 가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제가 중요한 무언가를 빠뜨리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전사로 뿐만 아니라 그분의 '신부'로도 부르셨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던 겁니다.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 저는 감사하게도 제 자신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어떤 남편이며 어떤 아버지였는지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모습은 제가 원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더 좋은 남편과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받는 입장으로서는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많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제가 꽤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싶습니까? 앞에서 저는 사람에게 저마다 다른 자기 인식이 있고, 그에 따라 평가받기 원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내용은 각자 다르겠지만, 누구나 자신의 생각보다 더 낮게 대접받으면 상처받고 분노하며 힘들어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실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를 인식하고 있다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는 즉시 마음이 돌아설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때에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를 그 나름의 존재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내게 영향을 주는 존재라면 더욱 그래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하지만 주님은 신학적 논증이나 합리적 사고의 결과물로 나온 사상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인격입니다.
인격적 존재는 평면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되어 작용하는 입체적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필요에 의해 잠깐 만났다가 헤어지는 정도의 경험으로는 상대를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상 정보를 파악하고 대화로 마음을 나눌 뿐만 아니라 함께 살아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영이십니다. 육신이 되신 말씀, 곧 로고스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한낱 피조물인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시려고 기꺼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 분을 어떻게 신학적 소양이나 성경 지식으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머리로 그분을 알려는 것은 지극히 위험천만하고 천박한 발상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 말은 신학이나 성경 연구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논리와 사고만으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절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쥐뿔도 없고 별것도 아닌 인간이, 속이 훤히 보이는 계산으로 철학이니 신학이니 거들먹거리며 하나님을 안다고 자랑하는 모습이 정말 우습지 않습니까? 용쓰며 견뎌 봐야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이 말입니다. 백 년을 넘겨 산다고 해도, 그때쯤 되면 제정신도 못 찾고 오락가락하는 주제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안다는 말입니까? 자, 생각해 봅시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너무 어린 갓난아기 시절을 빼고, 철이 없어 깊게 생각하지 못했을 때를 빼고, 밥이나 먹는 시간 빼고, 나이가 들어 힘이 없을 때를 빼고, 그 외 이것저것 다 빼고 나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습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을, 그 짧은 인생으로 어떻게 온전히 알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지식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우리 머릿속에 콕 박히게 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전문가인 것처럼, 하나님을 잘 안다는 면허증이라도 딴 것처럼 오만하게 구는 죄인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일단 밥을 많이 먹여야 합니다. 밥심으로라도 기운을 차리게 한 뒤에 주님 만나게 하면 자기가 알아서 뒤집어집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시며 실존하는 인격입니다. 그래서 조사나 연구로는 그분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분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 쪽에서 그분을 먼저 알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전3:11-14)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살아 계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모세처럼 고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출33:18-19)
"주님 피조물인 제가 어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제 눈과 귀와 마음을 열어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 주소서."
주님이 우리 심령을 밝혀 주셔야만, 성령의 빛으로 깨닫게 하실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 성령을 의지하라
성경은 인격적 존재의 또 다른 특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 (고전2:11)
나 자신의 속마음은 내 영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본심을 아는 사람은 오직 한 명, 나 자신뿐입니다. 따라서 자발적으로 마음을 열고 드러내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상대의 인격적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또 다른 인격적 존재이신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2:11)
하나님의 영, 그분의 영원하신 성령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유일한 존재이십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2:9-12)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음은 우리의 사고와 상상력으로 풀어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수준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수준으로 복음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토록 놀라운 복음을 형편없는 종교 나부랭이로 전락시켜, 소원 성취용 싸구려 주문 따위로 팔아먹었습니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복음을 실제로 경험해 본 사람이 적습니다. 경험했다는 사람조차도 십자가를 죄의식이나 죄책감을 해결해 주는 쓰레기 하치장 정도로 취급하기 일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기껏해야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인 기독교의 창시자, 또는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는 존재 정도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기가막힌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소중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알게 해주시려, 그분의 마음 깊은 곳까지 통달하시는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진리의 성령이 친히 오셔서 성경 말씀을 풀어 주시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해도 성령의 역사 없이 설교자의 '말'만 전하면,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하게 됩니다. 제아무리 뛰어난 화술을 가진 사람이 달려들어 설득해도 하나님이 움직이지 않으시면, 그 말에 결코 설득당하지도 뒤집어지지도 않습니다. 우리를 낳아 준 부모 역시 우리 마음을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의 고집이 얼마나 고래 심줄처럼 질긴지 잘 알지 않습니까? 애당초 변화되기엔 틀려먹은 죄의 '장아찌'들입니다. 본질부터가 바뀔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만약 인간이 자기 힘으로 조금이라도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교육, 이데올로기, 철학, 혁명 ...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죄인인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토록 인간은 변화될 수 없는 비극적 존재입니다. 그런 인간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지막 소망이 되셔서, 우리 안에 놀라운 혁명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 존재 자체를 모조리 바꾸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의인되게 해주셨습니다.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존재인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창기인 우리를 신부 삼으셨습니다. 추하고 더러운 세속적 존재인 우리를 거룩한 하늘 백성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는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 안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누구도 꿈꾸지 못할, 아니 꿈꿀 수조차 없던 놀라운 역사를 가져왔습니다. 주님은 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교회를 통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 성령이 주시는 지혜
이토록 놀라운 일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주님은 크고 위대한 참 신이며, 참 인간이십니다. 또한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려는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살아 계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머리와 말로는 설명이나 이해가 불가능한 분입니다.
열두 명의 제자를 불러 모으신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그들과 함께 울고 웃고 먹고 마시며 생활하셨습니다. 삶을 통해 그분을 직접 보여주시고 그 생명을 나눠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단편적인 방법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크고 위대한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교과서적으로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일정 기간 교육을 하고 시험을 치르는 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알기에는 강의식 교육의 학습 효과가 높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주님은 제자들을 직접 현장으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제자들 삶의 한가운데에 들어오셔서, 보여 주고 느끼게 해주고 직접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으시고 말씀 그 자체를 살아 내셨습니다. 말씀이 그들에게 실재가 되고 능력이 되도록, 진리 그 자체를 경험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어느 덧 3년 반의 시간이 흘러 사역을 마무리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에 도착하신 주님은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3)
이전까지는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으셨던 분이 갑자기 자신에 대한 여론이 어떤지 물으십니다. "요즘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뭐라 하느냐? 안 좋은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것도 같던데?"
이런 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물으셨습니다. 평소 이런 데에만 관심이 많던 제자들은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말을 신나게 쏟아 놓습니다.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16:14)
제자들의 말을 종합해 볼 때, 당시 예수님은 유대 사회에서 최소한 세례 요한 정도의 선지자로 인정받고 계셨던 듯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선지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존경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로 인정받으려면, 그 사람이 하늘로부터 보냄 받았다는 확증이 있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늘로부터 온 선지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주님이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고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사회에 유익을 끼치는 종교입니다. 교회에만 가면 사람들의 도덕 수준이 높아집니다. 교회에 다니면 시민 정신이 함양됩니다. 교회에 나갔더니 사람이 착해지고 집안도 행복해졌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정직하고 깨끗합니다. 기독교는 수준 높은 고등종교입니다"라는 식의 평가인 셈입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기독교는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잔뜩 흥분해서 떠들어 대는 제자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시던 예수님은, 화제를 바꿔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5)
여기에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복음은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자기들이 기독교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잡다한 이야기로 기독교를 평가합니다. 미국은 국민 정서에 기독교가 기반으로 깔려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교회 출석과 상관없이 기독교에 익숙하고 거부감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기' 자도 모르고 교회 문턱에도 못 들어가 본 사람들 중에도 데이비드(다윗), 폴(바울), 피터(베드로) 같은 성경 인물의 이름을 가진 이가 많고,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기독교에 대해 알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중에서 한 번이라도 교회를 다녀 본 사람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복음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람들의 그러한 생각에 개의치 않으십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2:14)
하나님은 영이시며, 진리도 영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사람은 그것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은 왁자지껄 떠들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대답이 터져 나왔습니다. "예레미야라고 하던데요", "엘리야라고도 했어요", "또 다른 선지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 앞에서는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때, 베드로 형님이 나섰습니다. 그런데 형님 입에서 나온 대답은 평소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베드로 형님은 헛손질이 많은 사람입니다. 가슴은 뜨겁지만 아는 게 없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갈 텐데 꼭 먼저 서두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크게 망신당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무조건 완벽할 필요는 없음을 명확히 잘 보여 주는, 그래서 우리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그런 형님입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평소와 달랐습니다. 자기가 직접 생각한 것을 얘기할 때는 눈빛이 또렷하고 말도 분명하게 끝맺는데, 그날의 모습은 좀 달랐습니다. 그런데 더 희한한 것은 그럼에도 그 대답이 매우 정확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
그야말로 베드로 형님의 최초 '홈런'이었습니다. 나무랄 데가 없는 대답을 한 겁니다. 그러나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형님이 할 만한 대답이 아닌 데다, 겉으로 보기에도 뭔가 남의 말을 전하는 듯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형님의 대답에 예수님이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16:17)
이 말은 곧 베드로 형님이 제정신으로 그렇게 대답한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알려 주셔서 그렇게 대답했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대답하게 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겁니다.
♣ 온전히 성령을 의지하라
그 증거는 다음 장면에서 곧바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개 보면, 자기 생각이 아니라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전할 때는 더 볼 것도 없이 곧바로 그다음에 고스란히 들통 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학교 다닐 때 커닝하는 녀석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적이 늘 하위권에 머무는 녀석이 있었는데, 한번은 등수가 엄청나게 올랐답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얻은 성적이라면 아주 좋을 텐데, 가만히 보니까 일등 하는 친구 옆에 앉아서 시험을 본 것이었습니다. 분명 커닝이 맞는데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을 찾을 수 없자, 선생님은 그 녀석을 따로 불렀습니다.
"네가 이번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더구나. 성적이 아주 잘 나왔어.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봐. 특히 수학 20번 문제는 전교에서 단 세 명만 정답을 맞혔을 정도로 매우 어려웠는데, 네가 그걸 풀었다니 정말 놀랍고 신기하구나. 혹시 이 문제를 지금 다시 한 번 풀어 볼 수 있겠니?"
자, 그 뒷이야기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커닝을 하더라도 좀 생각해 가면서, 사정을 봐 가면서 적당히 해야지 않습니까? 어떻게 일등 하는 녀석의 답안지를 일점일획까지 틀림없이 고스란히 베껴버린답니까. 커닝도 수준 있게 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만년 꼴찌가 일등과 똑같은 성적을 냈으니 들통 날 수밖에요. 실력이라는 것이 꾸준히 쌓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답을 맞혔는데 그 답을 얻는 과정을 모른다면, 남의 것을 그대로 베꼈다는 소리밖에 안 됩니다.
우리도 교회의 세례 문답이나 성경공부 시간에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이 대답을 정확히 잘합니다. 그러면 저는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
"그 말은 당신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그 말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이때는 선뜻 대답을 못합니다. 커닝한 아이처럼 머리를 긁적이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다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 여태까지 교회 다니는 동안 뭐하신 겁니까?"
"밥을 많이 주기에 꾸역꾸역 먹기만 했어요."
25녀 이상, 저는 오직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어디든지 달려가서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두 발로 서 있을 수만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든 거부하지 않고 주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닌 오직 복음을 통해 만났고,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공동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 덕분인지,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어지간히 잘 압니다. 한마디로 '사람 전문가'가 된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상대방의 말을 듣고 행동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 그림이 그려집니다. 입으로 하는 고백과 실제의 삶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수없이 봐 왔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고백은 온전히 맞는 답은 아닙니다. 내면으로부터 깨달아져서 고백한 것이어야 합니다. 천하에 둘도 없는 진리의 말씀을 얘기한다고 해도, 그 자신의 생명과 인생을 통해 얻은 고백이 아니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정신 줄을 놓아 버린 성도, 아무 생각 없이 신앙생활 하는 교인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라는 헬라어 단어의 뜻은 '구원자'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유대인들이 조상 대대로 기다려 왔으며, 지금도 기다리는 존재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구원자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 준 은행이, 물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를 건져 준 구조대원이, 죽을병에 거린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의사가 구원자입니다. 즉, 내가 처한 현재 문제에서 구해주는 존재가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처한 가장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는, 자신이 지금 어떤 구덩이에 빠져 있으며 어떻게 빠져 나와야 하는지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지금 어떤 상태에 있고, 무엇에서 건져져야 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분이 진정으로 우리의 구원자 되십니다.
우리는 항상 끝없는 내면의 목마름으로 헐떡입니다. 그래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맵니다. '이걸 사면 해결될까? 저걸 가지면 평안해질까? 이걸 해보면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될까? 저 사람과 함께라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평생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보고 듣고 느끼고 손에 잡히는 것에만 매달립니다. 사랑에 목을 매고, 돈을 버는 일에 미치고, 온갖 쾌락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 것들로는 우리의 갈망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에서 벗어나려면, '나는 누구지? 지금 어떤 구덩이에 빠져 있는 거지? 어떻게 해야 여기서 나갈 수 있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절반은 빠져나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비극은 이러한 문제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외곣으로 메시아를 부르짖으며 기다려 온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이 이미 오셨는데도 여전히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야. 이천 년 전에 로마 제국으로부터 비참하게 사형 당한 예수 따위가 어떻게 택함 받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수 있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리를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나사렛 예수? 그 무식한 자가 메시아라고? 우리는 그 따위 시시한 구원자를 기다린 적이 없단 말이야!"
지금 이 정도로 강하게 거부하는데, 그들의 조상은 어땠겠습니까?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당시 그토록 패역하고 완고한 세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서 살았으니, 베드로 형님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완벽한 고백을 해 놓고도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몰랐던 겁니다. 그제야 비로소 주님은 베드로 형님이 했던 고백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비밀을 열어 보여 주십니다.
그 이전까지 주님은 그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분의 때가 찰 때까지 기다리신 겁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되었고, 십자가의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 "그래, 베드로야. 정말 말 잘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맞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려 온 그리스도다. 그런데 내가 너희를 무엇에서 어떻게 구원할지도 아느냐?"
그러고는 제자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덧붙이십니다. "나는 며칠 뒤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구원자라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라니 말입니다. 자기 몸 하나 지키지 못하는 존재가 누구를 구원한다는 말입니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구원자가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니요?
커닝 수준이긴 하지만 정답을 맞혔던 베드로 형님은 그때까지 흥분 상태였습니다. 제자 생활 3년 만에 모처럼 홈런을 쳤으니 신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 주님이 죽음을 들먹이시니, 베드로 형님이 팔을 딱 걷어붙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어찌 그런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십시오. 주님 곁에는 늘 저 수제자 베드로가 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치열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떤 놈들이 덤벼도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의 털 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제가 지켜드릴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누군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감동이자 고마움 그 자체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번에도 우리 눈에 심히 비상식적으로 반응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가하는도다 하시고 (마16:23)
잘한다며 칭찬하실 때는 언제고, 기분 좋아서 주책 떤다고 호되게 질책하십니다. "네 이놈! 너는 지금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원하는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다! 베드로를 미혹한 더러운 사탄아! 당장 물러가라! 그리고 사탄의 꼬임에 맞장구친 베드로 너 역시 더는 떠들지 말고 조용히 뒤로 빠져 있어라!"
최고의 칭찬과 최악의 책망이 한 사람에게 쏟아졌습니다. 주님은 왜 이토록 심하게 베드로를 다그치셨을까요?
분명히 베드로의 고백은 훌륭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위에 교회를 세우고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온전한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어떤 구원자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남의 답안지를 그대로 베낀 것이 고스란히 탄로 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