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미국이 서울과 똑같아요.
뉴저지에서 김숙자
8월 8일 아침 10시 2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노부부는 새벽 5시부터 서둔다.
위 아래층 문단속부터 하고, 어제저녁 밤늦게 먹은 식탁 위의 과일과 음식을 정리하고......,
새벽 6시에 여의도에서 큰아들, 연신내에서 막내아들 내외가 동시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순식간에 큰 가방 10개를 대문 밖으로 내놓고 각자의 차에 나누어 옮겨 싣는다.
노부부와 딸은 기내에 들고 들어갈 짐을 확인한다. 노트북 컴퓨터 세대, 손가방 넷. 핸드백,
나는 이 짐 중에서 큰아들이 사준 노트북 컴퓨터와 사진기를 소중히 챙긴다.
큰아들은 며칠 전에 컴퓨터를 새로 구입해서 연희동 집으로 부쳐주었다. 그리곤 틈틈이 집에 와서는 미국에서 자유롭게
활용하도록 프로그램을 새로 깔고, 각종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작업할 수 있도록 가르쳐준다,
또 사진기도 새로 사주고 작동방법을 가르쳐 준다.
난 오래전부터 큰아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며 시려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상한 고질병이 생겼다.
할미는 딸네 가족과 급하게 공항버스를 타기위해 큰길가로 나온다. 선잠을 깬 손자들은 졸랑졸랑 제 어미를 쫓아간다.
살던 집을 빈집으로 모두 놔두고, 이른 새벽에 아이들을 데리고 서둘러서 집을 떠나는 것이,
꼭 빚쟁이가 되어 아무도 모르게 도망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새벽 골목길이라 그런 것일까?’
6시 45분, 연희동 큰길가 정류장엔 리무진 공항버스를 목전에 두고, 총알택시가 우리 앞에 선다.
택시기사는 차고지가 인천공항이라며 공항버스 요금으로 안전하게 공항까지 가겠다고 한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총알택시에 올랐다. 그리고 천천히 달리라고 신신당부한다.
남편과 두 아들도 짐을 차에 싣고 영종도 인천공항으로 갔을 것이다.
택시기사 덕분에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에 공항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만났다.
그 많은 짐을 두 아들이 다 부쳐주었고,
노부부는 딸네 가족과 아시아나 항공기로 인천공항을 오전 10시 20분에 출발하였다.
13시간 40분을 날아서 미국 John F, Kennedy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8월 8일 오전 11시 40분이다.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 늦게 도착한 셈이다. 서울 시각은 밤 12시 40분이다.
깊은 잠에 빠져있을 시각에 우리는 비몽사몽,
몽롱한 상태에서 열 개의 큰 가방과 작은 짐들을 챙기고 세관 신고를 한다.
출구 앞에는 남편의 지인과 목사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커다란 카트에 짐을 실은 Porter와 함께 공항 밖으로 나오니 한낮의 더운 열기가 얼굴을 감싼다.
그러나 한국처럼 끈끈하지는 않다.
커다란 주차장엔 태양열에 반사된 수십 가지의 색깔의 차들이 꼭 조개껍데기를 엎어놓은 것처럼 주차되어 있다.
조사장님과 목사님은 Porter의 도움을 받아 차에 짐을 옮겨 싣는다.
딸은 목사님 차에 실은 짐과 함께 우리가 일년 반 동안 살 집으로 갔다.
조사장님은 외손과 노부부를 태우고 뉴저지 힐튼 호텔로 출발한다.
할미와 외손들을 하루 유숙할 호텔에 내려놓고, 남편과 조사장님은 먼저 간 딸과 합류하여 짐을 옮길 것이다.
우리 가족에게 집을 인계하는 최 판사댁은 내일 오전 11시 반 비행기로 한국으로 들어간단다.
두 집은 한국으로, 미국으로 역사가 뒤바뀌는 하루 동안의 짧은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 가족은 호텔에서 오늘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내일 최 판사댁이 떠나고 비워놓은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하루 머물 이 호텔은 1996년도 여름방학 때, 막내아들과 미국 동부와 서부를 여행하면서 묵었던 호텔이다.
이 호텔의 부사장이 남편의 학교 후배여서 우리는 서울에서 미리 예약을 해 둔것이다. 피곤하지만 옛날을 회상하며 호텔라운지를 살펴본다. 호텔과 건물 주변은 18년 전에 보았던 옛 모습 그대로이다.
딸의 가족이 머물 방과 노부부의 방에 짐을 옮겨놓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시차 때문에 머리가 빙빙 돈다.
남편과 딸은 우리 가족이 머물 집에 짐을 옮겨 놓고 저녁 늦게야 호텔로 왔다.
남편은 푹 절은 파김치처럼 피곤이 온몸에 스며있는 모습이다.
13시간의 비행에, 시차에, 끼니도 제 때에 챙기지 못한 하루였으니 오죽하겠는가?
지금 그 집은 얼마나 복잡할까? 내일 떠날 그들의 짐, 우리의 짐......,
집의 시설이 궁금하지만, 묻지를 않는다. 기대 이하의 시설이라도 지금에서야 별 도리가 없지 않는가?
앞으로 일년 반 동안 한 달에 1,700$씩 지급하는 임대료의 총금액을 머릿속으로 계산해 본다.
한국시간으로 밤을 꼬빡 새운 우리 가족은 이른 새벽 시각이지만, 저녁식사를 하려고 한다.
호텔 라운지에서 안내를 받은 ‘감미옥‘이란 한국식당으로 갔다.
지금부터 미국 팁 문화의 적응과 이해가 필요하다.
호텔 보이가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것부터 식당에서 식사 끝나기까지의 모든 서비스는
모두 우리가 내야 할 비용의 10~15%를 더 지급해야 한다.
팁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우린 꼭 헛돈을 날리는 것처럼 아깝고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호텔 안내자는 식사를 다하고 연락하면 우릴 Pick Up하러 올 것이란다.
이것도 갈 때와 올 때의 두 번의 팁을 주어야 한다.
‘감미옥’에서 40분을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자리를 잡은 우리 가족들,
그 넓은 홀엔 가족끼리, 친구끼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교민들이 가득 모여서 식사를 한다.
육개장, 설렁탕, 수육, 비빔밥 등 한상 가득 놓은 음식을 먹는 교민들을 보고,
일곱 살의 큰손자가 미국에 대한 첫 느낌을 말한다.
“할머니, 미국이 서울과 똑같아요.”
어디를 가나 한국 사람들은 만원!
필요할 것 같아서 챙겨온 몇 가지 식품들이 무색할 정도로
한아름 마트엔 각종 한국산 물품들이 가득가득 진열 되어 있다.
몇 가닥씩 묶어놓은 열무가 여리고 부드러워 보인다.
풀무원두부를 두 모씩 묶어 세일한다. 큰 병속에 담긴 종갓집김치가 농익어 보인다.
서울서도 자주 먹는 광천 김 상자가 눈에 띈다. 시식코너도 있다.
식당음식 메뉴의 가격표엔 바지락 칼국수의 가격이 10$이다.
ㄱ자의 모양으로 중국집, 일식집, 한국식당이 늘어서 있다, 센터에는 넓게 식탁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다.
주로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젊은 아기엄마들이 유모차에 아기를 두고 식사를 한다.
애써 가지고 온 고춧가루와 마늘 다진 것이 무색할 정도로 건 고추와 마늘다발이 커다란 광주리에 소복소복 쌓여있다.
식당가. 떡집, 서울에서 자주 사먹던 이름이 낯설지 않은 파리바케트의 빵집, 삼성전자제품이 가득 전시되었고,
쇼핑하러온 교민들이 분비고 있었다,
한국의 큰 홈쇼핑 센터를 그대로 옮겨놓은 곳 같은 뉴저지의 H’마트의 풍경이다.
우리 가족이 머물 집은 건물의 외관도 허술하고,
내부도 단조로운 아주 오래된 연립주택 같은 건물 수십여 채가 늘어서 있는 아파트 대단지이다.
그러나 띄엄띄엄 있는 동간의 넓이는 굉장히 넓다. 역시 땅이 넓은 나라임을 실감한다.
길가에 늘어선 아름드리 가로수(상수리나무)밑동들은 옹이 지어 용틀임하는 모습이 고택의 동네임을 입증한다.
2층으로 된 동 한곳엔 모두 네 집이 산다.
우리 가족은 101동 2층 3호에 짐을 풀었다.
어느 곳이든 이사를 간 빈 집은 어설프기 마련인데,
집안의 벽은 온통 하얀색을 페인팅 하여 꼭 병원의 병실처럼 보인다.
32평 정도의 공간엔 커다란 거실과 작은 거실(식당), 두 개의 방과 욕실, 부엌, 다섯 개의 작은 창고가 있다.
부엌과 욕실을 제외하곤 모두 마루가 깔렸다.
발을 옮길 때 마다 삐걱거리는 곳이 몇 군데가 있다.
이 아파트 단지는 주거 바닥면적의 70% 이상을 카펫을 깔아야 한단다.
집안에서도 신을 신고 다니는 이유와 이들의 주거 생활 문화가 이해가 된다.
서울에서 가끔 층간 소음 때문에 이웃과 큰 마찰이 기사화된 사연을 읽은 적이 있었다.
남의 일처럼 관심을 두지 않던 일이 내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있다.
더구나 밤낮이 뒤바뀐 손들이 안정을 찾고, 이 환경에 적응되려면 최소한 한 달은 지나야 될 듯싶은데......,
외손자들은 조용한 편이지만, 아래층 러시아인과 중국인 부부가 산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남편과 딸은 며칠 동안을 생활용품 전문 매장을 찾아다니며
소음을 방지할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해서 집안을 꾸며 놓는다.
밤과 낮이 뒤바뀐 손들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소파에 오르며, 재잘거리고 형제간에 우의가 돈독하다.
그럴 수밖에 이곳에서 어울릴 수 있는 상대는 저의 형제뿐이니,
작은손자 진호는 말이 많고 목소리도 크다. 형에게 장난을 청하며 앞서려고 한다.
‘쿵쿵’
아래층에서 작은 신호가 온다. 단잠을 깨운다는 불만의 표시다.
온 식구들은 무서운 감독관이 되어 쥐 방울만 한 아이들 둘을 놓고,
뛰지 말거라.
발꿈치 들고 걸어라.
큰 소리로 말하지 않기.
물건을 던지지 말기.
아이들은 서울에서는 듣지 않았던 말을, 또 어른들은 자주 하지도 않던 주의를 매일매일 잔소리하고 있다.
‘날 잡아서 Wine이라도 한-두 병 사서 내려보내며 통사정을 해야 할까?’
이렇게 고난의 날도 흘러서 미국이 서울과 똑같다고 느꼈던 손자들도 지금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을 하고 있다.
집에서도 각별히 조심을 하며 걸음걸이도 달라진다.
학교나 유치원에서도 하루하루 다르게 그들의 영어를 이해하고 사용하며
한국과 다른 미국의 세계를 아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작은 손자는 트림하고는
“Excuse Me!”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린다.
TV 만화를 보고는 할아비, 할미에게 설명한다. 스승이 따로 없다.
새로운 것을 빨리 배우고 적용할 수 있는 그들이 이 할미의 스승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2000년 7월, 남편이 뉴욕의 농협 America 사장으로 발령받곤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남편따라 미국에 왔었다.
사무소 직원은 뉴저지의 곳곳을 안내한다.
관사가 있고, 모든 생활 편의가 마련된 여건에서 방학이 되면 이곳에서 여유롭고 풍요로운 생활을 3년 동안을 누렸다.
그 시절을 회상한다. 모두 흘러간 세월이지만, 행복했던 옛 세월이 그리워진다.
세월은 노부부의 몸과 마음을 늙고 나약하게 바꿔 놓았지만, 뉴저지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노부부가 14년 전에 살던 이곳을 딸과 손자들을 돌보려고 다시 올 줄을 누가 예상했으랴.’
노부부는 다시 찾아온 이곳에서 한 촉의 촛불이 되어보자고 손을 맞잡아본다.
일년 반 동안 불빛을 밝히기 위해 모두 녹아버리는 촛농,
딸과 외손자들은 먼 훗날 이곳을 다시 찾아왔을 때, 이렇게 말하리라.
“어, 역시 미국은 한국과 많이 다르네.”
2014년 11월 28일 뉴저지에서 Kim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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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숙자 작가님 잘 계시지요 여울목에 찬조금까지 주시고 감사합니다
곱게 내리신 좋은 글에 머물러 갑니다
알차고 행복한 주말 보내십시요
눌 행운을 기원합니다.
정성껏 내리신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김숙자 선생님, 좋은 글을 잘 감상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날씨에 늘 건강 유의하시고
평안하고 행복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