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66
7월29일[주님의 손님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25HKxvhzv8w
(김동현 플로렌시오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편히 쉬실수 있는 쉼터가 되고 있습니까?>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무한 리필 에너지 충전소 같은 집이 있었으니, 베타니아에 위치한 절친 라자로의 집이었습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15스타디온(약 2.8킬로미터) 떨어진 곳, 올리브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르내리실 때 마다 자주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숙식을 해결하곤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종종 벌어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껄끄럽고 날선 대화로 끝내신 예수님께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베타니아로 내려오셔서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그런 날 밤에는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와 마주 앉아 밤늦도록 포도주잔도 기울이셨습니다.
손님 맞이의 총 책임자는 언제나 마르타였습니다. 그녀는 엄청나게 먹고 마셔대는 제자들을 위해 빵을 굽고 또 구웠습니다. 하루 온 종일 지지고 볶았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사흘씩 앓아 누울 정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본당 성모회장으로 적격인 인물이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힘들고 굳은 일은 도맡아 하는 사람, 이웃의 필요성에 언제나 즉각적으로 응하는 사람이 마르타였습니다. 성격은? 착하고 성실했습니다. 그러나 때로 과격하기도 하고 쉽게 흥분도 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일행들 식사 준비에 바빠 죽겠는데, 동생 마리아를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를 발견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르타는 주저없이 예수님께 따집니다.“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복음 10장 40절) 마르타는 예수님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힘들 때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그분께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지녔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과 절친했습니다. 친한 오빠처럼 예수님을 각별히 신뢰했습니다.
그럼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동생을 향한 언니 마르타의 까칠하고 날선 발언을 통해 마리아의 성격을 대충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에 더딘 사람이었습니다. 살짝 ‘공주과’라고나 할까요?
산더미 같은 일감 앞에 언니가 쩔쩔 매고 있으면,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도와주는 것이 당연할텐데, 동생에게는 그런 ‘촉’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리아는 종종 존재 자체로 마르타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곤 했습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모든 것이 180도 바뀌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리셨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유일한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이제나 저제나 예수님을 목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면 만사 제쳐놓고 쪼르르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을 바라봤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세파와 존재의 무게에 지친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언제든 편안한 쉼터, 시원한 생수가 콸콸 샘솟는 오아시스가 되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언제나 고마우신 주님께서, 그리고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또 다른 예수님이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이 편히 쉬실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드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하루 죽음을 걱정했다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을 잃었다>
오늘은 본래 마르타 기념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와 오빠인 라자로도 함께 기념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어쨌거나 마르타는 마리아와 라자로와 함께 이해되어야 하는 인물이기에 잘 된 것 같습니다. 마르타는 라자로의 죽음에 대해 예수님께 탓을 돌리는 듯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치유자’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치유자를 넘어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었다면 오빠의 죽음에 그토록 고통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슬퍼만 하며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슬퍼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죽음에 잡혀있었던 것이 나쁜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주관자라는 믿음까지 도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생존의 문제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슬퍼하며 시간을 허비한 것입니다. 물론 생존은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돈도 중요합니다.
미국에서 소득에 따른 행복도를 조사한 연구에서 일정 소득 이상이 되면 소득은 더는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만 소득이 연봉 7만 5000달러, 한화로 약 8500만 원까지는 소득과 함께 행복도도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말은 생존을 위해 어느 정도 기반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온 신경이 돈에만 쏠린다는 것이고, 생존에 대한 걱정이 없을 때 돈은 더 이상 행복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도 분명 사랑을 실천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생명에 대한 권한을 자기 자신이 아닌 신에게 돌렸기 때문입니다. 가난하더라도 자기의 생존이 아닌 타인의 생존까지 신경 써 줄 수 있으려면 돈이 아니라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태석 신부님이 의사로서 생존을 위해 살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그분의 삶은 의미와 가치를 잃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모기가 피를 빨아 먹기 위해 다니는 삶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을 생존을 위해 살지 맙시다. 일단 오늘 죽어도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치 있는 일이 보입니다. 아니 가치 있는 일을 찾는다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는 죽음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백종원 씨는 증조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장사에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호프집을 인수해 장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장사의 맛을 조금씩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육군 간부식당 관리 장교로 군 생활을 마치게 되고 1993년 전역한 후 그는 다시 요식업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그때 요식업에 뛰어들어 사업을 잘하고 있던 백종원에게 들어온 또 다른 사업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한때 인기를 끌었던 목조주택 사업이었습니다. 100% 성공을 확신한 그는 그 사업에 모든 것을 겁니다. 하지만 1997년 IMF가 터질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던 것입니다. 그는 17억의 빚을 지게 되고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한국에서 자살하면 여러 사람에게 아픔과 피해를 줄 것 같아서 홍콩으로 건너갔습니다. 죽기 전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먹었는데 아이템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 음식의 ‘맛’ 하나가 죽음에 관한 생각을 몰아냈습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2년 동안 하루 4시간만 자며 쌈밥집과 포장마차를 함께 운영했습니다. 부를 누려서 행복한 게 아니라 이자를 감당하기 시작하니까 행복했다고 합니다. 이후 1998년 한신포차, 2005년 새마을 식당, 2006년 빽다방과 홍콩반점 등 여러 사업을 성공시키며 빚을 청산하고 지금은 요식업계 최정상에 올라 있습니다. 물론 문어발식으로 주위 소상공인들을 힘들게 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꿈이 있어 보입니다. 아마도 홍콩에서 맛보았던 그 음식 때문에 이런 삶의 가치가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철학은 “맛있는 음식을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자.”입니다. 또 한국의 요식업을 세계화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는 구독자 500만 명이 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튜브 채널은 적자라고 합니다. 자신의 요리 비법을 온 세상에 공개하면서도 그것으로 돈을 벌지는 않는 것입니다. 만약 생존만을 위했다면 이런 비법을 공개하지 않고 사업 아이템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의미와 가치는 ‘나눔’에 의해 실현될 수밖에 없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생존의 문제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생존과 가치, 혹은 의미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 살지 말아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생존을 위해 살면 가치 있는 삶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생존과 무관하게 살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생명이요, 부활로 믿으면 됩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그것은 자유이지만 일단 믿으면 그분이 존재하시던, 존재하시지 않던 삶은 가치에 집중하게 되고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코끼리에 쫓겨 정신없이 도망을 치다가 나무에 걸려 있는 칡덩굴을 잡고 매달렸습니다. 그 아래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고, 우물 속에는 큰 뱀 세 마리가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검은 쥐와 흰쥐는 매달려 있는 이 칡덩굴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데, 입 주위로 끈적한 액체들이 떨어졌습니다. 맛을 보니 꿀이었습니다. 칡덩굴 사이에 있는 벌집에서는 꿀이 한두 방울씩 그 사람의 입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죽음에 직면한 처지를 잊고 그 꿀을 받아먹었습니다. 밤낮으로 우리는 생존의 위협을 받습니다. 세속-육신-마귀의 뱀 세 마리는 더욱 나를 두렵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우리 위에서는 성령의 꿀이 떨어집니다. 그 맛을 보면 죽음에 대한 모든 공포를 잊게 됩니다. 생존을 위해 사나, 오늘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사나 사는 것은 똑같습니다. 오히려 내일이 없다고 사는 사람의 삶이 더 물질적으로도 윤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부활이요, 생명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하루는 무엇을 해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아낌없이 나누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치 있는 삶은 죽음에 대한 걱정이 줄어들수록 커집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1,19-27: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축일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쉬고 계실 때에, 마르타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던 마리아에게 자기 일 좀 거들어 주게 하라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보고,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1-42)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마르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고 동생 마리아는 관상생활의 모델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성녀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장면을 보고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타는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21-22절)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예수님은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절) 하시고 라자로를 살려 주시면서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 라는 말씀을 하셨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은 “지금 여기서”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지금 내가 사는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구원이 단지, 내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다음 결정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구원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죽은 다음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을 주시는 그분을 믿고, 따르면서, 즉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지금 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하느님의 뜻 때문에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삶, 죽으려 노력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이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기 전에 이미 고통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혹은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탄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이때 우리도 “예, 주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 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부활은 바로 구원의 체험이며 그럼으로써 부활 신앙을 올바로 전할 수 있을 것이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강물이 어는 겨울에도 어느 한 곳에는 숨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야 공기가 통하고, 그래야 물고기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모이기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긴급조치가 있었고, 유신헌법이 있었고,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외롭고 지친 사람들이 찾아가던 곳이 있었습니다. 과도한 공권력을 피해서 찾아가던 곳이 있었습니다. 인권이 꽁꽁 얼어붙어 있던 시절에 숨구멍과 같은 곳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명동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찰에 쫓기던 학생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힘없던 노동자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찾아오던 곳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이 학생들을 잡아가려거든 먼저 나를 잡아가시오, 그 뒤에는 사제들이 있고, 그 뒤에는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숨구멍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에게도 ‘숨구멍’같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불면증 때문에 힘들어 하셨을 때 기도해 주시던 수녀님들이 있었습니다.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소임을 다하던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수녀님과 신부님들이 있었기에 김수환 추기경님은 존경받는 이 시대의 어른이 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께도 ‘숨구멍’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집에 머물면서 식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숨구멍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니코데모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도 예수님께는 ‘숨구멍’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사이며, 유대인들의 지도자였습니다.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 구원사업의 협력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린 마리아도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께 바라는 것이 있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서 향유를 준비하였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도 예수님께 ‘숨구멍’같은 사람들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위해서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게도 ‘숨구멍’ 같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언제나 저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어머니가 있습니다. 늦은 밤에도 저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남들이 혹 저를 비난할지라도 어머니는 저를 믿어 주셨습니다. 제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저보다 더 잘 아셨습니다. 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그곳에서도 어머니는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실 것입니다. 저와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머든지 미리 해야 하는 업무 스타일이기에 처음에는 매우 힘들었다고 합니다. 직원들이 저를 도와주었기에 맡겨진 일들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러 가면 뒤에서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의를 챙겨주시는 분들도 있고, 간식을 챙겨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신문사의 창고 정리를 해 주시고, 음식을 챙겨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에 있는 한국 신부님들도 제게는 ‘숨구멍’ 같은 분들입니다. 제가 뉴욕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팬데믹의 터널을 함께 지나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출세, 성공, 권력의 패러다임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숨구멍’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쁨>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4-46)
여기서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는, 뜻으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들은 ‘기쁨’은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비슷하다.”입니다. ‘밭에 숨겨진’이라는 말과 ‘다시 숨겨 두고서는’이라는 말은, ‘기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는, 뜻으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들은 ‘기쁨’은 좋은 진주를 찾던 상인이 그 진주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비슷하다.”입니다.
하늘나라는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관한 복음을 들었을 때 누구나 똑같은 기쁨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듣더라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사람만이 기뻐하고,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라는 말과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라는 말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의 ‘온 삶’을 다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던 어떤 부자 청년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16.21-22)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 청년에게 ‘밭에 숨겨진 보물’을, 또는 ‘값진 진주’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기뻐하기는커녕 슬퍼하면서 떠나갔습니다. 보물을 발견했는데도 왜 기뻐하지 않았을까? 그는 영원한 생명을, 또는 하느님 나라를 원하긴 했지만, 갈망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그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슬퍼했을까? 둘 다 가질 수는 없고,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슬펐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면 세속의 재물을 포기해야만 하는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텐데, 예수님의 답변은 명확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이 말씀을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에 적용하면, 밭에 숨겨진 보물을 차지하려고, 또 값진 진주를 차지하려고, 가진 것을 다 처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처분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차지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면 자신의 목숨을, 또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쳐야 합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가 주는 영원하고 큰 기쁨을 얻기 위해서, 기꺼이(기쁨으로) 자신의 목숨과 인생 전부를 바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바치는’ 그 일은 절대로 슬픈 일이 아니고, 그 일 자체도 ‘기쁜 일’입니다.>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7-50)
‘그물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종말의 심판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물에 ‘온갖 종류의 고기’가 들어 있는 모습은 밭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는 ‘가라지의 비유’와 비슷합니다. 심판에 관한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와 똑같습니다.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는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에도 있습니다. ‘그물’을 인간 세상으로 볼 수도 있고, 교회 공동체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 세상은 의인들과 악인들이 섞여 있는 세상입니다. 종말의 심판 날이 되면 의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악인들은 멸망당할 것입니다. 그물을 교회 공동체로 생각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이 되어서 교회에 속해 있다고 해도 구원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1)
요한 복음서 11장은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마지막 표징이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예시합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과 마르타의 대화는 부활에 관한 생각과 함께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냅니다.
마르타는 말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믿는 이들도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고,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다른 의미로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유일한 관계 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도 함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힘을 넘어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도 믿음을 통하여 그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마르타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믿으며 이렇게 화답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게 합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새로운 삶을 얻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
(2)
요한 복음은 다른 복음보다 대화를 중요하게 보여 줍니다. 등장인물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일상적인 대화를 넘어 신앙의 견지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라자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잠기시어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인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마르타를 만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르타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표현은 마르타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안타까움을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죽음을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르타의 생각은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함께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 줍니다.
그러나 마르타의 믿음은 여전히 부활에 대한 믿음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녀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지막 부활 때에 일어날 일로 받아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것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설명을 들은 마르타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마르타의 믿음은 이미 우리에게 대단해 보입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믿음이 한층 더 깊어지는, 예수님을 좀 더 알아 가는 마르타를 보여 줍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하신 당신의 아드님이시자 부활과 생명이신 분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는 이렇게 우리를 더 깊고 굳은 믿음으로 이끌어 줍니다. 믿음은 성장합니다.
=====================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은 라자로 이야기(요한 11,1-44 참조)의 중반부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으며 주님의 부재에 실망을 드러내었던 마르타가 주님의 현존과 말씀으로 변화되어 믿음을 고백하기에 이르는 내용입니다.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어릴 적 제 아버지는 성묘를 가시거나 상갓집에 가시면 절을 한 번만 드리셨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아버지를 따라 하였고 천주교 신자인 이웃들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께, 다른 친구들은 절을 두 번 하는데 왜 우리는 한 번만 하느냐고 여쭈었습니다. 아버지는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오늘 복음 말씀을 들려주시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니 한 번만 절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영원한 삶’에 대한 첫 번째 교육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로 대표되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현존과 함께 ‘지금’,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이 단순한 이상이나 약속,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현존 안에서 체험되는 실재임을 경험한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 형제처럼 우리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신앙을 삽시다.
=====================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 않을 수도 없고, 하기 싫다고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반면에 하고 싶은 일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하고 싶은 일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해야만 하는 일이 행복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은 지옥과 같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달라도 지옥이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해야 하는 일을 묵묵히 참아 내며 견디는 가운데 그 나름의 의미와 행복, 재미를 찾아낼 때입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입니다. 요한 복음은 라자로의 죽음에 관한 예수님과 마르타의 대화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복음 대신 오늘 선택할 수 있는 루카 복음은 두 성녀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는 다양한 방법을 보여 줍니다.
루카 복음에서 마르타는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해야 하는 일이 있기에 하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이 쌓입니다.
동생 마리아를 보니,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 같아 보여 속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마르타가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분의 말씀을 더 듣고, 그분께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마르타도 충분히 자신이 바라던 일,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하고 싶고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은 생각에 늘 남과 비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현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듭니다.
예수님의 협조자로, 교회의 협조자로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분명히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것이고 바라는 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임과 역할이 부담과 짐으로 다가올 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왜 이 일을 시작하였는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고자 이 일을 시작하지는 않았는지, 또한 지금 이 일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는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것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음을 기억하고 현재의 일에 최선을 다하였으면 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 사랑 고백을 해야 한다>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입니다. 꼭 말을 해야 하느냐?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이심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일(루카10,40)에 있어서도 그랬고, 오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하며 오빠를 굳이 낫게 해 달라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특별한 개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이 현재 사건이며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려줍니다. 또한 믿음 안에 있는 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을 포함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오늘로부터 생명을 누리는 것이요, 지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 없이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고백함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의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입술에 익숙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전한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히브11,6)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루치아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예이며 또 하느님께 받은 최대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도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만큼 사랑하십시오! 우리 믿음의 고백은 말로나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옛날, 어느 마을에 벼농사를 짓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짓는 벼농사가 옆집 농사보다 안 되고 있음을 눈으로도 쉽게 구분할 수 있었지요. 벼의 크기 자체가 옆집과 비교할 때, 너무 작고 보잘것없었던 것입니다. 이 청년은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그렇게 땀을 흘리며 정성을 다해 농사를 지었는데도 다른 집의 농사보다 부족했으니 말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자기의 경험 부족을 놀릴 것만 같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들 몰래 밤마다 나가 자기 집 벼를 살짝살짝 위로 뽑아 올린 것입니다.
아침에 자기 집 벼를 보면 이제 흐뭇해졌습니다. 옆집보다도 훨씬 커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왔습니다. 이 청년의 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수수 한 번에 다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잔머리로 흥한 자, 잔머리로 망한다.”
실제 우리 말 속담에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잔머리를 많이 굴리는 사람은 노력이 없기에 쉽게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선 벼처럼 뿌리가 얕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잔머리로 될 것이 아닙니다.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하는 일, 특히 사랑의 길에 충실할 때 주님께 제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편하고 쉬운 넓은 길이 아닌, 불편하고 어려운 좁은 길로 가라는 예수님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열렬히 환대하였지요. 특히 마르타는 정성껏 시중을 들었고 마리아는 주님 말씀을 경건하게 들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라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마지막 표징이면서, 당신의 부활을 예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마르타와의 대화를 통해서 부활에 관한 당신 생각과 자기 신원을 확실하게 드러내십니다.
이 대화를 통해 마르타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별한 관계에 있었으니 미리 오셔서 라자로를 고쳐 주신다면 슬픔도 없었을 것이 아닙니까? 충분히 예수님께 실망하고 원망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실망하지 않고 또 원망도 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주님께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서 불평불만과 원망으로 일관된 모습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늘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이었습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으로만 생각하는 잔머리에서 벗어나,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라며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처럼>
요한 11,19-27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그때에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처럼>
나날이
주님처럼
사는 사람은
나날이
주님처럼
죽을 것입니다
나날이
주님처럼
죽는 사람은
나날이
주님처럼
살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원히
주님처럼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치지 말라고 다그치시는 주님>
원래 마르타 축일이었던 것이 2021년부터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 삼 남매의 축일이 되었습니다.
왜 마르타의 축일이 삼 남매의 축일로 바뀌었는지 교황청 경신 성사성의 이유를 듣지 못해 알 수 없지만 그 의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사랑이 사랑을 북돋우고, 믿음이 믿음을 북돋우며, 성덕이 성덕을 북돋운 좋은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삼 남매는 서로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북돋우고 그래서 서로 성덕도 북돋워 서로 성인이 되게 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삼 남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서로 그러했고, 클라라의 자매들도 서로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불길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작은 불씨와 하나의 불꽃은 약한 바람에도 꺼지지만 작은 불씨와 불꽃이라도 여럿이 모이면 큰불이 되어 바람이 오히려 불꽃을 키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대한 가족의 사랑과 믿음을 커지게 한
또 다른 요소가 바로 라자로의 죽음입니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큰 시련을 통해서 큰 믿음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죽기 전에 주님께서 오셨으면 살릴 수 있었는데 늦게 오심으로 인해 죽게 되었어도 마르타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았고, 주님의 능력 곧 죽은 자기 오빠도 살릴 수 있는 주님의 능력도 믿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믿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은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안 것은 아무리 죽을병이라도 주님은 고치실 수 있다는 것과 주님의 청을 하느님께서는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아는 정도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앎은 머리로 안 것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그가 한 경험으로 안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그동안 일으키신 수많은 기적을 그라고 모를 리 없지요.
그러니까 알기에 의심치 않는 정도의 믿음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정도로 그치지 않고 믿으라고 다그치십니다.
그치지 말라는 것이 다그치는 것이 아닙니까?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믿으라는 주님의 다그치심에 마르타는 주님을 믿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란 말이 있지요. 백 척이나 되는 장대 꼭대기에 서서 한 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백천간두에 서 있는 것만도 위태로운데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라니 죽으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렇게 해야 진일보하고,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을 날고 하늘로 오를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것이 본래 그렇습니다. 백척간두에서 하느님께 나를 거는 것입니다. 백척간두에서 하느님께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우리는 아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주님의 다그치심에 믿음이 한 걸음 올라선 마르타와 가족을 보고 본보기 삼는 우리입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 환대와 섬김의 사랑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1.6)
오늘 화답송 시편 34장이 참 은혜롭습니다. 화답송 시편처럼 주님 찬미의 맛으로, 기쁨의 맛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공동체입니다. 아마도 최고의 미완의 예술작품이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일 것입니다. 늘 부족한 공동체 삶에도 강론에 참 많이 주제로 사용했던 공동체 영성입니다. 삶은 여정임을 확인할 때 앞에 반드시, “더불어(together)”를 붙여 더불어의 여정임을 강조했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공동체의 중요성일 것입니다. 주님 중심의 환대와 상호보완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35년 동안 여기 요셉 수도 가정 공동체에서 정주하면서 점차 분명해지는 사실은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일 것입니다. 지금도 2년전에 써붙인 글귀가 여전히 집무실 게시판에 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몸담고 살아가는 수도가정공동체입니다.”
평생 탐구하고 배워야 할 가장 큰 스승인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입니다.
오늘 기념일의 명칭이 참 깁니다.
“주님의 손님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입니다. 2021년 1월 26일, 그러니까 2년전 그동안 마르타 기념일로 지내던 축일을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삼남매 성인을 기리는 축일로 바꾸니 얼마나 풍요로운지 이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업적입니다. 개인이 아닌 더불어의 공동체성이 잘 드러나는 축일입니다. 경신성사성의 발표문중 핵심을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주 예수님은 베타니아의 집에서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의 가족 정신과 우애를 경험하셨고, 이런 까닭에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다고 말한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너그러이 환대를 베풀었고,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온순하게 경청했으며, 라자로는 죽음을 굴복시키신 분의 명령으로 무덤에서 즉시 나왔다.”
변경된 축일 명칭이 얼마나 합당한지 감탄하게 됩니다. 베타니아의 성녀 마르타, 성녀 마리아, 성 라자로 가정 공동체는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교회 공동체의 모범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수도 가정 공동체 역시 베타니아 삼남매를 닮아 주님을 중심으로 한 사랑의 환대와 상호섬김의 공동체입니다. 제가 삶의 좌표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좌우명 고백기도시 한 대목을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참 많이 강조했던 영원한 현역의 평생 주님의 전사요, 영원한 현역의 평생 주님의 학인이요, 평생 주님의 형제에 대한 삼중 신원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주님의 전사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 공동체에 몸을 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전우애, 학우애, 형제애가 창조적 긴장 가운데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이상적인 사랑의 수도가정 공동체임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강조할 바 사랑입니다. 사랑의 공동체요 사랑의 전사, 사랑의 학인, 사랑의 형제 이것이 우리의 삼중 신원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중심인 사랑의 주님은 우리가 닮아가야 할 영원한 사랑의 모델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가 강조하는바 사랑이요, 늘 들어도 새롭고 공감이 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이런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순수한 사랑, 이타적 사랑, 집착없는 이탈의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바로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평생 선택하여 배우고 훈련하여 습관화해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역시 사랑 공부에도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배움입니다. 평생 배움터에서 평생 겸손히, 한결같이 평생 배워야 할 사랑의 배움터인 공동체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환대의 사랑, 경청의 사랑, 상호섬김의 사랑, 상호보완의 사랑을 배우는 우리들이요 이런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공부중의 평생 공부가 하느님 사랑 공부입니다. 그리하여 수도자의 기본적 자질을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이라 정의합니다.
우리는 우선 무엇보다 오늘 주님의 삼남매 공동체로부터 환대와 섬김의 사랑을 배웁니다. 관상의 사랑으로 주님을 환대하고 섬기는 마리아요, 활동의 사랑으로 주님을 환대하고 섬기는 마르타가 환상적 조화를 이룹니다. 또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마르타로부터는 주님의 신원을, 성녀의 신앙 고백을 배웁니다. 다음 주님과 마르타의 대화가 우리에겐 늘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는 참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은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주님은 마르타는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귀한 진리입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단절된 영혼의 죽음, 영원한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일 때 영원한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 엄밀한 의미에서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장 두려운 병이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의 병이라 하는 것입니다. 마르타가 우리의 고백을 대변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얼마나 주님을 깊이 섬겨온 환대와 섬김의 성녀, 사랑의 활동가 마르타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영광스럽게도 이런 사랑의 주님을 환대하여 우리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의 한몸 공동체를 이뤄 살게 하시고, 한결같이 당신 사랑의 전사. 사랑의 학인, 사랑의 형제로 살게 하시며 날로 당신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11,26b)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11,19-27)은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친구 라자로가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빠를 잃은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을 맞이한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니,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11,25-26)
"믿습니까???"
십자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생명을 되찾으신 예수님을 믿으면 이제와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오늘 독서(1요한4,7-16)는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4,7.8-9)
서로 사랑합시다! 내 방식대로, 내 좋을 대로 사랑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방식대로,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대로 서로 사랑합시다!
우리를 위한 죽음인 십자가 죽음을 이기신 분,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께 대한 믿음이 있어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있어야 예수님처럼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uQy1aWrV_4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 27)
가장 아픈
관계는
믿음이 깨져버린
우리의
관계입니다.
믿음 하나로
이 길을
걸어갑니다.
믿음의
예수님께
우리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믿음으로써
들어가는
믿음의 문은
언제나
오늘의 우리를
다시 보게
합니다.
믿음은 기대감이
아니라 깊어가는
사랑입니다.
마음이 무너져야
믿음은
살아납니다.
우리의 가족이
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삶의 모든 것은
믿음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삶과 죽음
모두를
믿음으로
봉헌합니다.
이별과 단절
결핍과 절망을
믿음으로
치유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가족의 아픔을
치유하는
믿음입니다.
가정과 가족
형제를 위한
믿음으로
한 몸 아끼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힘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가족이 되고
가정이 되고
형제가 되어
서로를 살립니다.
먼저 우리의
믿음을
구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
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