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2일(주)
* 시작 기도
주님...
레위의 아들들은 율법에 의하여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율법이 제정되기 전 곧 레위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을 때 아브라함은 영원한 대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1/10을 드렸습니다.
그로 인하여 레위의 제사장들도 멜기세덱에게 1/10을 드린 것 같이 되었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합니다.
율법에 의하여 사는 것이 아닌 영원한 새 언약 안에서 예수로 살기 원하오니 예수는 더 좋은 언약 곧 새 언약의 보증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 나아가는 자들을 주님은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이 죄인도 오늘 주의 날에 주님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내 안에 파레시아 곧 담대함이 넘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잠 15:16-33
제목 : 내가 갈 길은 오직 만물 위로 향한 생명의 길입니다.
16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7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19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20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21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하여도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
22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24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
25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26 악한 꾀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27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삶게 되느니라.
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30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31 생명의 징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
32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 나의 묵상
(24-25절, 표준새번역) 슬기로운 사람이 걷는 생명의 길은 위쪽으로 나 있어서, 아래로 난 스올 길을 벗어난다. 주님은 거만한 사람의 집을 헐어버리시지만 과부가 사는 곳의 경계선은 튼튼히 세워주신다.
24절의 번역의 주어는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다.
히브리어 원문 역시 생명의 길에 해당하는 ‘오라흐 하이임’이 문장 맨 앞에 위치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위쪽으로 나 있는 생명의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 나라이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
삼위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존재하셨다.
그렇게 존재하시는 삼위 하나님은 서로 교제와 사귐을 가지며 내재적 삼위일체로 계셨다.
또한 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을 만들어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을 언약하셨다.
그리하여 그 언약에 따라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마지막 날에 아담을 창조하신 것이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처럼 삼위 하나님의 세상 창조는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아담을 비롯한 오고 오는 모든 시대에 창조된 사람들은 아담과 같이 죄인으로 태어났다.
이를 가리켜 아담의 생명으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아담의 생명이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생명(Born of God)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비록 만들어진 생명(Made of God)일지라도 하나님 품안에서 사는 자로 말씀에 순종하는 자였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법 곧 계명을 주신다.
그 계명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절대로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으셨다.
아담은 하나님께 이 경고의 메시지를 직접 들었다.
아마도 아담은 그의 아내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이 계명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계명이 주어지자 마귀로 표상되는 뱀이 하와 앞에 등장한다.
그 당시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존재였다(창 3:1).
여기서 간교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룸’이다.
아룸은 가장 순전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창 2:25절에 나오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에서 ‘벌거벗다’와 동일한 말이다.
벌거벗다는 말은 히브리어 ‘아루밈’으로서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기 때문에 복수형 아루밈으로 쓰인 것이다.
따라서 단수형 아룸과 동일한 단어이다.
뱀이 하와에게 나타나 그를 미혹한다.
그 미혹의 수단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다.
뱀이 여자에게 정말로 하나님이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느냐고 묻는다.
이에 여자가 대답한다.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면서 그것을 먹으면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였다.
그 말을 받아서 뱀이 여자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것을 먹어도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분별할 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뱀의 말을 듣고 곧 그 나무를 보자 그 열매가 어찌 그리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워 보이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그의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하였다.
이처럼 아담이 지은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다.
그 죄를 지은 목적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구 곧 원욕이었다.
이 원욕을 헬라어로는 ‘휘브리스’라 한다.
문제는 아담 이후 오고오는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 이 원욕 곧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과 자기 의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 만물 안에서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왕노릇을 하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우상 섬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상 섬김은 불상을 만들어 섬기거나 단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상 중에 우상은 바로 ‘나’,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원욕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소문이 난 유대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을 들어보자.
너희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이 정말 많이 있다.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며 육신으로는 그리스도도 그들에게서 나셨다.
이처럼 그들이 받은 선물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나 바울은 나의 동족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너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것이다(롬 9:3).
너희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지만 너희들이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는 그 예수야말로 진짜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은 땅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고 강력한 어조로 독려하였다.
(롬 9: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바울 역시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여느 유대인들과 다름없이 만물 안에 갇힌 하나님을 믿는 자였다.
그래서 그에게 주어진 율법을 잘 지키되 그 의에 흠이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지켰다.
육체를 신뢰할 정도로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는 율법(신 21:23)에 따라 나무 십자가에 죽은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잡아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에 대한 열심이 있어서 다메섹까지 그들을 잡으러 갔던 것이다.
이 정도로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열심이었던 바울이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에서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만난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일이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를 박해하던 것이었음을 깨닫고 이제는 자신과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자기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의 동족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를 원하고 또 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육신적으로 행하던 자였다.
그는 당연히 음부로 들어가야 할 자다.
그런데 그가 영적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어 음부 곧 스올을 떠나 생명의 길인 위 곧 만물 위로 올라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자가 나아갈 길이 바로 만물 위로 향하는 생명의 길이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그런 원욕과 교만을 가진 자는 뱀과 하와의 교제에서 나누는 대화처럼 언약의 주체이신 여호와를 빼버리는 자이다.
하나님은 창 2장에서 당신을 계시하실 때 항상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를 넣어서 말씀하신다.
창 2:4,5 여호와 하나님이, 7절 여호와 하나님이, 15절 여호와 하나님이 등이 그렇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에 ‘여호와’라는 신명(神名)이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한 말씀이며 이 세상이 다 하는 그 날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그 날까지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의 표현이다.
그래서 그러한 원욕 곧 교만한 자의 집은 허시되 과부의 지계는 반드시 정하신다고 하신다(25절).
그 언약의 하나님의 이름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오늘 25절의 히브리어 문장 한 가운데 ‘여호와’라는 이름이 들어간다.
교만한 자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자를 과부로 제시하였다.
사실 과부는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자의 상징이다.
과부 말고 또 고아나 나그네가 이런 부류에 속한다.
이들은 그야말로 힘없고 연약한 자들의 상징이다.
이들은 교만하여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자들의 놀잇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세상의 힘이나 권력은 이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놀잇감으로 사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보호하시되 끝까지 지켜주신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고아요 과부이며 나그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그런 연약한 자로만 남지 않는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은 세상이 변할 것이다.
한 마디로 주객전도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어제의 강자가 오늘의 약자가 되고 어제의 약자가 오늘의 강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물리적인 그런 차원의 일이 결코 아니다.
어디까지나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전형이다.
나는 과연 이 시대의 원욕으로 가득한 교만한 자인가, 아니면 연약하여 이리저리 짓밟히며 쫓겨 다니는 고아요 과부이며 나그네인가?
나는 끊임없이 힘이 세고 큰 강자로 살기 원하였다.
물론 대놓고 교만한 자는 아니었을지라도 그런 자가 되기 원한다는 것은 숨겨진 교만 그 자체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교만한 자라고 손가락질 할지라도 내 위치가 높아지고 명성이 높아지면 그런 소리는 쏙 들어갈 것이라 생각하여 그런 자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고 나도 그 자리에 올라가기 위하여 애를 썼던 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진짜 그런 고지에 올라간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부한 자가 된다는 것은 나의 삶 자체가 교만에 젖어 있는 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나는 복음을 통하여 땅에서 부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고아요 과부이며 나그네와 같은 자가 되었음을 믿는다.
그리하여 내가 믿는 그리스도를 만물 안에 가두어버린 우상으로 섬기지 않고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 믿는다.
사울이 바울이 된 것처럼, 나의 생명이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졌고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음도 믿는다.
내가 갈 길은 오직 만물 위로 향한 생명의 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만물 안에 가두어버리는 악을 행하였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 믿음으로 착각하며 살았던 나의 인생입니다.
이제 지나간 때는 그것으로 족한 줄 아오니 거기에 매몰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가던 길이 잘못된 것을 안다면 그 순간, 그 길에서 돌이켜 아버지 집 곧 만물 위에 있는 그 나라로 방향을 틀고 나아가게 하소서.
나는 연약하여 의지가 금방 꺾이고 넘어집니다.
나의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그 나라까지 도달하는 주님의 은혜를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거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음으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