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 앞에 서 본 사람만이 복음을 안다
♣ 복음의 깊은 진리 속으로 들어가라
이는 비단 베드로 형님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이 알려주지 않으시면, 주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 그리스도이신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우리가 복음을 깨닫게 되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든 일자무식이든 상관없이 주님이 원하시는 심령으로 준비되기만 하면, 누구나 다 위대하고 완전하며 영원한 복음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그 심령이 정직하고 가난하며 목마른 사람은 누구나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처지나 형편에 놓여 있는가, 어떤 과거를 가졌는가, 지금 상태가 얼마나 망가져 있는가,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가 등에 상관없이 누구나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오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은혜로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구원입니다. 여기서 '값없다'는 말은 '싸구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은, 믿는 시늉이나 하면서 영접기도 한 번 따라하면 끝나는 구원이 아닙니다. 제멋대로 살다가 문득 찝찝한 기분이 들 때만 찾아가서,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까지도 사해 준다는 약속을 재확인한 뒤에 마음 편히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구원도 아닙니다. 죄책감이나 처리하는 쓰레기 하치장 따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찬양받기 합당하신 분이며,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온 땅을 다스리며 주재하시는 생명의 주인이자 통치자이십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무릎 꿇고 경배하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복음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이 말은 그저 '공짜'로 나눠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도움을 받을 가치도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부어지는 복이기 때문에, 도저히 값을 치르거나 매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몹시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거나 흥분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눈곱만큼의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호의와 선물이 일방적으로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십자가 복음의 신비를 만나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부탁을 해도 우리가 하고, 궁리를 해도 우리가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무엇이 필요한지조차도 몰라서 요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생각조차 못하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고 완전한 복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저는 우리에게 복음이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손이 떨립니다. 이런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너무 아찔하고 끔찍합니다. 복음이 없었다면, 주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같이 끔찍한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서 저는 복음을 외칠 때마다 감격하고, 들을 때마다 영혼이 되살아나며, 기쁨이 샘솟고 신바람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신 한 번 말하지만 복음은 세례 문답이나 전도용 교리가 아닙니다. 죄책감 처리반이나 문제 해결사 따위도 아닙니다.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넘치는 영광과 능력과 축복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의 진짜 비밀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앵무새처럼 말만 따라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고 한 고백이라도 진리를 선포한 것이라면, 성령이 그 속뜻까지 깨닫게 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잘 모르고 따라갔어도 정확한 진리를 들었다면, 무조건 따라가 보니 어느 순간 바른 길에 들어서 있었다면 그것 또한 복입니다. 그와 반대로, 제 딴에는 옳은 것을 찾으려고 밥고 안 먹고 온 신경을 집중해서 갔더라도 그것이 전혀 엉뚱한 길이라면 큰일나는 겁니다.
솔직히 우리가 언제부터 주님에 대해 다 알고 만났습니까? '소경 무고리 잡듯' 어쩌다 뭔가 하나 붙잡았는데, 그게 주님 만나는 복 넝쿨이지 않았습니까? 시간이 있다고, 마음이 있다고 전부 다 복된 자리로 나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머리로 신경 써 가면서 사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은혜로 붙들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설명할 수 없는 은혜로 사는 겁니다. 교회에 다니게 된 것도 큰 은혜이지만, 교회 건물에만 머물지 말고 하늘 나라까지 가시기 바랍니다. 좋은 교회에서 좋은 목사님을 만나는 것도 큰 복이지만, 목사님을 통해서 예수님도 만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위로를 얻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해도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은 아예 안하는 것보다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말고 십자가 생명의 깊은 진리 속으로 들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 신앙의 기초는 오직 십자가
하나님이 만드신 모근 것은 분명한 원리와 원칙에 따라 조직되고 운영됩니다. 자연계에 자연의 법칙이 있듯, 영적 세계에도 영적인 법칙이 있습니다. 이런 원칙을 무시하고 행동하면, 그에 따른 결과를 고스란히 맞보게 됩니다. 다들 이 점을 잘 압니다. 그래서 엄청난 바보나 정신 줄을 놓고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영적인 법칙을 거스르려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건축 공사를 할 때는 제일 먼저 터와 기초를 견고하게 닦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집을 지어야 합니다. 아무리 시공 기일이 모자라도 "대충 살펴보니 여기는 지반이 튼튼한 것 같습니다. 적당히 땅만 파서 빨리 집을 지어야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건축가는 없습니다. 정밀 조사했다 치고, 튼튼하다 치고 집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는 건축가가 많나 봅니다. 부실하게 지어지는 건물들이 한국에 얼마나 많습니까? 반면에 미국은 건축 과정 하나하나를 중시합니다. 미국은 건축 허가를 받은 뒤에도 각 과정을 마칠 때마다 관할 부서에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기초 공사가 잘되었어도 공사가 설계도대로 되었는지 검사받지 않으면,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한국도 그렇게 해야 건물이 붕괴되는 일이 없을 텐데 말입니다. 건축이라는 분야만을 보더라도, 검증도 없이 '괜찮을 거야'라는 가정만으로 집을 지을 수 없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목구멍까지 들어찬 욕심 때문에 싸구려 자재로 대충 급하게 지은 집은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괜찮을 거라고 열심히 자기 세뇌를 해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무너질 집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씨앗은 땅에 뿌려져 썩어야만 열매 맺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 법칙입니다. 이 법칙을 무시하는 건 미친 짓입니다. 땅에 뿌리지도 않은 씨앗이 싹을 틔우길 기다리는 것은 아주 흉악하게 미친 짖입니다. 자연의 법칙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복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다 '치고' 그 위에 믿음이라는 집을 지으려고 하거나 예수님이 내 구주라고 '치고' 그 위에 신앙을 쌓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천하에 없는 귀한 걸 갖다 놓아도, 실재가 되지 않은 기초는 금방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한동안은 괜찮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 지식을 쌓고, 세례 받은 경험을 쌓고, 교회 다닌 연수를 쌓고, 직분을 쌓고, 여러 가지 영적 체험까지 쌓으면 분명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보일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맨 처음 슬쩍 넘어간 기초, 믿었다 '치고' 쌓아올린 기초는 여전히 부실한 상태 그대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자기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참 생명이 아니고서는 견딜 수 없는 풍랑을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7:27)
주님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을 비교하여 말씀하십니다(마7:24-27). 어느 쪽의 집을 짓기가 더 쉬운지, 더 빨리 지을 수 있는지를 따져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더 집의 기초로 삼을 만큼 튼튼하고 견고한가'입니다. 신앙의 집 역시 견고하고 변함없는 주님의 십자가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 십자가의 마음을 품으라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믿는 셈 '치고' 교회 다니며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독교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핵심이자 본질이며 원리인 십자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성경 이야기나 교리, 교계 정보 같은 것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보고 주워들어서 많이 알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본질이자 핵심인 십자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동이 없는 겁니다. 집을 지을 때도 기초 공사를 탄탄히 하는 법인데,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신앙의 집을 이토록 어처구니없게 대충 짓는다는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한국 교회에는 이런 그리스도인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천 년 전,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찾아오신 주님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역의 핵심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기적을 일으키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죄에 대해 상담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 다양한 일을 하셨지만, 그 초점은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병을 치료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어서, 진료소를 차리거나 왕진을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어디서 무얼 하든 그저 그분의 길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셨습니다.
사복음서에는 주님이 늘 습관처럼 하시는 말씀이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 때가 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때'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입니다(요13:1, 17:1). 이처럼 주님의 모든 관심은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그분의 삶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십자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십자가를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 역시 십자가를 삶의 중심으로 삼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지식과 신앙과 마음의 중심에 십자가가 견고하게 서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십자가와 별로 상관없이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언급 없이 그저 성령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십자가가 빠진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십자가 없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천 년 전 유대인들 또한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분의 인기에 놀랐으며,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에 감동받았습니다. 권세 있는 말씀에 도전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저 하나의 종교적 해프닝으로 치부되고 말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병이어 기적에서 사람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주님이 행하셨던 대부분의 기적에는 수혜자와 구경꾼이 따로 있습니다. 맹인이 눈을 떴을 때, 사람들은 그저 구경만 했습니다. 고작해야 "어, 맹인이 눈을 떴네?"라며 반응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은 달랐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따라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들은 지치고 굶주려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남자 오천 명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생각해 봤을 때 여자와 아이까지 포함하여 최소한 1만 5천에서 2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을 겁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하나도 빠짐없이, 물고기와 떡을 배 터지게 먹었습니다. 그 증거는 남은 열두 광주리에 있습니다. 먹겠다는 사람이 있는데도 음식이 남았을 리가 없습니다. 더 먹으라고 해도 먹지 못해 남긴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적은 수혜자와 구경꾼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경험한 기적입니다. 덕분에 공생애 3년 중에서 이때만큼 예수님의 인기가 치솟은 적이 없었습니다. 매우 흥분한 군중은 당장이라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자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자! 기다릴 게 뭐 있어? 지금 당장 왕으로 모시자!"
제자 형님들도 같이 설치면서, 여기저기에서 자기 사람을 모았을 겁니다. 형님들의 야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아시죠? 그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예수님이 자신들의 발을 씻겨 주시던 그 자리에서 누가 더 크냐며 싸운 분들입니다. 자신의 스승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전날 밤에 말입니다. 생각할수록 정말 짜증나는 선배님들입니다. 어디 가서 선뜻 자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주님 말씀을 몹시 안 듣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어쨌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날에도 큰 난리가 났을 겁니다. 예상컨대 아마도 베드로 형님이 가장 설쳤을 겁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긁어모아 놓고서 선교 운동했을 겁니다. "저분이 왕이 되시면, 가장 바로 옆자리에 앉을 사람이 접니다! 그러니 저를 밀어주십시오. 여러분!" 이에 사람들은 베드로 형님의 이름을 연호했을 겁니다. 아니, 사실은 열두 제자가 전부 그랬을 겁니다. 조용한 성경이었다는 안드레나 도마 형님까지도 사람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 모든 상황을 가만히 보시던 예수님은 안 되겠다 싶으셨을 겁니다. 그대로 두면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아서, 정신 줄 놓고 주책 떠는 제자들을 얼른 모아 배에 태워 다른 동네로 보내 버리셨습니다. 제자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안 됩니다, 주님! 지금 정말 중요한 타이밍이에요"라고 빌었지만, 주님은 "빨리 가라! 당장!" 이라고 호통 치며 쫓아 버리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열광하는 군중도 모두 해산시키셨습니다. 이처럼 오병이어의 기적은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열광한, 대단한 기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등 떠밀려서 겨우 집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보고도 믿기지 않는 놀라운 기적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 그 밤에 잠이 왔겠습니까? 결국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동네 사람들까지 다 깨워 예수님 앞으로 다시 몰려왔습니다. 어제의 몇 배나 되는 무리였습니다. 이제 바로 부흥입니다. 쫓아 보내도 더 많은 숫자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부흥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주님과 우리의 정서가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부흥이 일어났는데도 주님은 전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처럼 훈훈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데, 오히려 찬물을 확 끼얹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요6:26-27)
이렇게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분위기를 깨 버리시니까, 열광해서 몰려든 군중이 욕을 하며 돌아갔습니다. 열두 제자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돌아섰습니다. 그렇게 다들 가 버리고 난 뒤, 예수님이 열두 제자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6:67)
예수님은 숫자 놀음에 대해 언제나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수보다는 그 중심을 보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지만, 그들은 영혼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배고플 때 떡과 생선을 먹여 주는 메시아만을 보고 열광했습니다. 지금처럼 이천 년 전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를 채워 줄 메시아를 바랐고, 원하는 것을 채워 주지 않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습니다.
♣ 세상에서 가장 비싼 '예수님짜리'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입니다. 그중 많은 사람이 가난이나 질병, 정서적 고통, 사랑받고 싶은 욕구나 용납받고 싶은 욕구 등의 다양한 필요 때문에 교회에 나옵니다. 물론 저는 이런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며, 그런 문제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필요를 채운다고 복 받은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 필요만 채우면 정말 행복해질까요? 돈 문제만 해결되면 평안해질까요? 병만 나으면 다 괜찮아질까요? 예수님께 몰려든 군중은 당면한 문제만 바라보았습니다. 그 이상의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빵과 생선을 배부르게 얻어먹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복음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빵 한 조각에 울고 웃는 인생이 되고 만 겁니다.
오래전에 깊은 산골에는 '화전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무서워한 그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일부러 찾아 들어가,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산 위를 지나가던 비행기에서 갑자가 보따리 하나가 뚝 떨어졌습니다. 보따리를 풀어 보니, 만 원짜리 지폐가 한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정말 완전히 횡재한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세상과 떨어져 산 지 워낙 오래된 탓에, 그 사람은 그게 돈인지 몰랐습니다. 그는 이 물건을 어디에 써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화장실 휴지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뻣뻣한 종이를 대체 어디에 써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불쏘시개로 써 봤는데, 기름을 먹인 종이라 그런지 불이 아주 잘 붙었습니다. 결국 그는 지폐를 전부 불쏘시개로 사용했습니다. 아까우십니까? 오히려 아무 데도 못 쓰고 버리는 것보다는 그렇게라도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런데 만약 여러분의 가족 중 한 분이 이런 짓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장 못하게 붙들면서 통곡하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이러지 마세요. 어쩌다 이렇게까지 망가지셨어요?"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아예 교회에 안 나오는 것보다는 빵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병이라도 고치려고 나오는 게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이 어떤 복음입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실 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실 이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천사를 대신 보내거나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하나를 골라도 됐을 겁니다. 그 외 다른 방법도 많았을 겁니다. 지혜가 많으신 하나님이 그것 하나 생각해 내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하신다는 말입니까? 왜 굳이 그 방법을 사용하셔야 했다는 말입니까? 우리 같은 죄인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신다니요?
양심에 비추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뭔가 찝찝하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습니까? '대체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심각하고 끔찍한 죄인이기에 하나님 아들의 핏값까지 필요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주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서도 그저 빵이나 바라는 한심한 인간들이라면 그냥 배 터지게 먹고 죽으라고 빵 공장이나 세워 주시면 그만일 텐데, 십자가가 웬 말입니까! 정신 치료가 필요했다면 그저 심리학자들이나 많이 모아 주시면 됐을 텐데, 어떻게 십자가 복음을 베푸셨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대단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터럭만큼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대강 믿고 대강 사는 예수쟁이'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 크신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사랑했으면, 하나뿐인 아들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흉악한 살인범을 살리려고 하나뿐인 제 자식까지 죽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미친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크신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더럽고 냄새나는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없는 죄인인 나를 매우 사랑해서, 어떤 방법으로든 구원하고 싶어서 하나뿐인 아들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만약 '대체 내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이기에,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단 말인가!' 하고 한 번이라도 고민해 봤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살 수 없을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짜리'입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말할 때, 십 원짜리라고 하는 것은 십 원을 주고 샀기 때문입니다. 오억 원을 주고 샀으니까 오억 원짜리입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값으로 치르고 사셨다면, 우리는 예수님짜리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비난하고 무시해도, 그래서 엄청난 자기 비하에 빠져 있더라도 내가 예수님짜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사실 하나와 정직하게 제대로 부딪혀 본다면, 이것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홀랑 뒤집히고도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너무 강퍅한, 저주받은 죄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는 그렇게 많은 눈물을 쏟으면서,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사랑 앞에서는 눈물은커녕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합니다. 불륜에 음란과 폭력이 난무하는 TV 드라마나 영화, 삼류 소설을 볼 때는 그렇게도 눈물바람을 하면서, 십자가의 보혈을 찬양할 때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습니다. 평생 그렇게 살다 돌아가실 분이 정말 징글징글하게도 많습니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들을 때는 가슴이 뛰고 웃음이 나오고 눈물도 흘리면서, 십자가 앞에서만은 그저 무덤덤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저는 평소에 잘 안 울어요. 눈물을 잘 안 흘리는 체질이거든요" 라고 변명만 하시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런 체질입니다. 이런 분들은 아주 정확하게 지옥 체질입니다. 더 연구해 볼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분들은 나중에 지옥 가게 되더라도 놀라지 말고 두려워 마십시다.
지옥에 간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가슴 철렁하십니까? 그러나 십자가 앞에 한 번도 제대로 서 보지 않았다면, 그 누구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목사, 아니 목사 할아버지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아주 큰 직분을 갖고 있다 해도 그렇습니다. 천국은 그렇게 쉽게 허락되는 곳이 아닙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
마지막 때, 주님을 부르는 자라고 해서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한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얼마나 두렵고 끔찍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을 꼭 지켜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도 언젠가는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면 사람만 잃으면 되고, 부도를 맞으면 돈만 잃으면 됩니다. 하지만 신앙에서 사기를 당하면 큰 일 납니다. 신앙이 부도 맞으면, 그대로 영영 끝장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대해서만큼은 속아도 안 되고 대충 믿어서도 안 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기초 위에 세워져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입니까? 주님을 믿으려고 열심히 애쓰면서 노력하다 결국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가난하고 정직한 심령으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서십시오. 믿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 내용만 제대로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주님의 놀라운 복음, 그 영광과 소망을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시면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 외에 다른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