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성모님과 예수님 사이에 이루어진 특별한 소통 방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파스카 축제는 다른 그 어떤 축제나 명절보다 의미가 큰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파라오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에 대해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깊이 감사드리며 세세대대로 축제를 거행했습니다.
따라서 파스카 축제가 다가오면 운신이 가능한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축제를 지내러 이스라엘로 올라갔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축제 전후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그날이 오면 가정마다 파스카 음식을 차리고 예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전통과 율법에 충실했던 모범적인 유다교 신앙인이었던 요셉과 마리아도 파스카 축제가 다가오면 매년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다녀오곤 했습니다. 소년 예수님께서 12살되던 해 파스카 축제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해도 성가정 구성원들은 어김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순례 기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작지만 꽤 난감한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소년 예수님이나 마리아 요셉이나 양측 다 실수랄까 과실을 저질렀습니다.
12살 소년 예수님께서 축제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홀로 남아버린 것입니다.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말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책임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부모로서 귀가길에 인원 점검을 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소년 예수님께서 또래들과 어울려 잘 돌아오겠지, 하고 나자렛을 향한 하룻길을 걸어와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인지한 마리아와 요셉은 당혹해하며 사흘내내 아들 예수님을 찾아 사방팔방을 헤매다닌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갖은 걱정과 후회와 탄식 끝에 사흘만에 아들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아냈습니다. 놀랍게도 소년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둘째가면 서러워할 율법학자들 사이에 앉아 너무나도 태연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놀라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기도 했던 마리아는 애써 분노를 내리누르며 아들 예수님께 말을 건네고, 소년 예수님도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하시는데, 이 부분이 오늘날 우리 가정의 대화와 소통 방식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입장에서 소년 예수님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무럭무럭 성장한 예수님께서 12살 정도 되니, 슬슬 메시아성이 드러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예수님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도 늘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의 양육자로서 책임감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차피 메시아시니, 알아서 하시겠지? 당신이 뭐라고 말씀을 하시든, 다 맞는 말일테니,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있겠어?’라고 단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년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그의 영적 인간적 메시아적 성장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 48)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정말이지 특별한 한마디 말씀을 던지십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 49)
보십시오. 소년 예수님은 슬슬 자신의 메시아성을 드러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머니에게도 넌지시, 이제 제가 부여받은 인류 구원이라는 사명 수행을 위해 떠나갈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반응에 마리아께서 보인 태도를 보십시오.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였습니다. 침묵과 기도 속에 말씀에 담긴 참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셨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입장에서 정말이지 억울하기도 하고 이해하기 힘든 소년 예수님 12살 체험이었지만, 예수님의 태도를 또 한번 보십시오. 하실 말씀을 하셨지만, 더 이상 과하게 어머니를 몰아붙이지 않습니다. 소년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또 다시 20년 세월을 침묵과 기도 속에 살아가셨습니다.
마리아와 소년 예수님 사이에 오간 대화와 소통 방식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얼마나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지 모릅니다. 때로 분노가 일기도 했겠지만, 결코 분노하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하고픈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상호 동반자로서, 상호 교육자로서 두 분 사이에 언제나 넉넉한 완충 지대를 건설했습니다. 두 분 사이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심을 확신하며, 매사에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성모님의 마음은 찾는 마음이다
어제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티 없이 깨끗하신’이란 수식어가 붙습니다.
죄가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원죄까지도 없으시기에 ‘죄에 물들지 않은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죄가 없는 마음이란 어떠한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짓지 않게 만드는 분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영화 ‘블랙 스완’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의 뜻을 따라주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여인입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낳기 위해서 발레를 포기하였기에 자신이 어머니의 꿈을 이루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누군가와 깨끗하지 못한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집에서 하게 됩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니 어머니가 자신의 침대 옆에 있었습니다.
너무나 화들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다 본 줄 알았는데, 다행히 어머니는 눈을 감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밤새 자신의 침대 옆에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자신의 행위를 다 보았는지 몰라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죄를 짓는 꿈을 꾼 것이었습니다.
죄를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죄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반대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분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산 외가댁에 처음으로 간 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일단 어머니와 외가 친척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투리를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잘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외삼촌들에게 저를 맡기고 가신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잘못 들었거니 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어머니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어머니를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외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어머니는 밑에 층에서 목욕하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저를 버리고 간 줄 알고 무척 불안했었습니다.
외가댁은 목욕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를 찾던 제가,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니를 더는 찾지 않았습니다.
죄가 커지는 사춘기 때부터였습니다.
어머니가 계시면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안 좋은 비디오를 보다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화들짝 놀라 테이프를 빨리 빼곤
하였습니다.
부모의 법이 아니라 내 안의 법을 따를 때는 이렇게 부모를 찾지 않을뿐더러 그분이 함께 있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죄가 커질수록 부모를 찾는 마음이 식어갑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죄와 반대되는 법을 가지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예수님을 잃으셨습니다.
자녀를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찢어지듯 아플 것입니다.
자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 자녀를 찾습니다.
이사야서의 이 말씀이 꼭 성모 마리아의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밤새도록 당신을 그리는 이 마음, 아침이 되어 당신을 찾는 이 간절한 심정!
당신의 법이 세상에 빛나는 때 세상 주민들은 비로소 정의를 배울 것입니다.”(이사 26,9)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밤새 찾고, 아침이 되어서도 찾으려는 마음.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성모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와 반대되는 법이고 그 법대로 사는 것이 정의입니다.
오즈의 마법사에 자신에게 없는 심장을 찾겠다는 양철 나무꾼이 있습니다.
왜 심장을 찾으려고 했을까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하니 이미 심장이 생긴 것을 알았습니다.
찾으려는 마음이 이미 거룩한 마음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던 헬렌 켈러도 이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햇살을 향해 얼굴을 들어라.
그러면 그림자가 안 보인다.
해바라기가 그렇게 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의 어둠에 들지 않습니다.
죄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기를 원하지 않아서 그분의 법만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느님 나라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고 나니 결국 ‘아버지 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물으십니다.
죄에서 구원해 줄 예수님을 찾는 마음만 있다면
이미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한 것이고 또 벗어나고 있는 것이고 어쩌면 이미 아버지의 집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간절히 찾는 마음이 곧 성모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축일의 유래: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의 스승이요, 첫 번째 사도로 불리고 있다. 그는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기 20년 전부터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미 2월 8일을 마리아 성심 축일로 지냈다(1643년). 이후 교황 비오 7세는 성모성심을 축일로 지낼 수 있도록 청하는 모든 교구와 수도 단체에 허락하였다.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온 세상을 ‘마리아의 무죄한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등급을 올렸고, 날짜를 성모승천 대축일의 제8부인 8월 22일로 고정시켰다. 그러나 로마 전례 개혁은 다시금 지역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념일로 환원하고,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로 고정시켰다.
축일의 의미: 이 축일은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현존의 기쁨을 축하하는 것이다. 아울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에 주님이 거주하도록 안배하시어 거룩하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 자신도 하느님 영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마리아께 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그 목표로서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 루카 2,41-51: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유년기의 예수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를 완성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내는 루카에게 마리아가 이미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지혜와 파스카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님이 지혜 자체이며, 파스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사건의 배경은 구약의 파스카 축일이다. 구약의 파스카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의무적이었는데, 아마 12살이 그 규정 나이였던 것 같다.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은 구약의 파스카 예식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파스카 예절에 관한 것을 질문하고 가장 연장자가 파스카의 역사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는 학자들이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경탄하게 하는 지혜의 스승, 지혜자체로 보인다.
또 파스카적 용어를 통하여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의 고통과 기쁨을 미리 체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부활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2,41; 22,8.13), “사흘이라는 시간”(2,46; 24,46),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필요성”(2,49; 24,7)과 “이해하지 못하였다”(2,50; 24,25)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흘이라는 시간 개념은 성서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사흘 길을 걸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고래 뱃속에 사흘간 머물렀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사흘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개념은 고통의 최대치를 드러낸다. 사흘이란 의인들의 최대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소년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것은 의인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잃어버린 다른 어머니처럼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훗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의 고통을 미리 겪으셨다는 것을 아울러 미리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 꾸짖는 가운데 요셉을 아버지로 언급하는데 대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은 예수께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절ㄴ)는 진술은 신앙의 길을 걷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함’은 지혜의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있음, 내맡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목동들이 다녀간 이야기에도 나타난다(2,19). 거기에는 이 신비를 간직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묵상의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간직하였다”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또 이 이야기에서는 ‘찾다-발견하다.’는 신앙의 도식을 볼 수 있다. 불 신앙인은 찾아도 얻지 못하지만 신앙인은 찾으면 얻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열심히 찾는 마리아의 신앙을 묵상하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한 마리아의 신앙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너무나 자주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나 홀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그것을 나 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마리아는 사흘간의 고통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는다.
이것은 우리도 잘못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에, 즉시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갈 때에 비로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를 따르는 자세이다.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고 따르도록 노력할 때에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대한 더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은총을 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배우자와의 잦은 다툼으로 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를 친한 친구에게 말했는데, 그 친구가 집단 상담을 권유합니다. 그곳에 한 다섯 번만 나가보고서 결정하라는 것이었지요.
집단 상담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어려움을 인정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그래서 이혼할 수밖에 없음을 맞장구 쳐 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자기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들 대부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이유로도 이혼해요? 자매님이 더 잘못했네요.”
뜻밖의 대답에 자기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배우자에게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더 문제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자기 이야기만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상대방은 이야기의 확장이 싫어서 그냥 맞장구만 쳐 줄 뿐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함께 이야기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나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야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갖기 위해 우리가 모범을 삼아야 하는 분이 있습니다. 결코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으셨던 분,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은 관습에 따라 파스카 축제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축제가 끝나고 다시 돌아가다가 당시 열두 살이던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지요. 그리고 사흘 만에 성전에 율법 교사들과 토론하고 있는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마음이 얼마나 새카맣게 변했을까요?
더군다나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날 만도 합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자기 애타는 마음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이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나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는 마음을 품는 순간, 상대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뜻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그 마음을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2,51)
우리 앞에 닥치는
어떠한 고난과 슬픔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오래 오래
곰곰이 되새기다 보면
성모님의
티 없이 깨끗하신 마음을 닮아
자유로워진다네.
이것이
묵상기도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성모님의 기도법이라네.
복음말씀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