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황혼에 이르러 새삼스레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노라면 생활의 궁핍을 온전히 떨친 것은 80년대 들어서가 아닌가 싶다. 목구멍에 풀칠하기 급급했던 고난의 세월은 드디어 끝났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취미활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것이다. 직장 안에서도 일과 후 당구나 볼링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산악회와 테니스클럽 같은 동호인 단체까지 생겨났다. 산악회가 매달 부산 인근 산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오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고 그 덕분에 찾은 산이 천성산이었다. 산이 그리 높지 않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부부모임에서도 천성산을 올랐다.
계절을 달리하여 봄철과 여름 가을을 두루 올랐지만 천성산에서 탄성을 지를 정도의 비경을 만난 기억은 없다. 어느 땐가는 천성산에서 사진 찍는 일에 몰입하다가 일행을 놓쳤던 악몽도 잊히지 않는다. 당황한 나머지 경사가 급한 미타암 코스로 정신없이 하산하는데 자갈이 많은 산길은 미끄러웠고 먼지까지 풀썩풀썩 이는 바람에 진땀을 뺐었다. 천성산을 처음 접한 건 이보다 앞선 70년대 중반이었다. 갓 서른을 넘긴 그때는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펼쳤던 농어촌전화사업도 거의 마무리단계였다. 농어촌 어디라도 전기가 들어가지 않은 집이 있으면 샅샅이 찾아내어 일소하는 이삭줍기나 다름없는 업무였다.
업무를 통해 산전수전 다 겪었을 옆자리 선배는 현장이 천성산 중턱 벽지라는 점을 들어 두 사람이 함께 나가야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인력이 부족했던 때라 결국 혼자서만 현장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시외버스를 내려 서류에 나온 주소를 물어 드문드문 인가가 있는 산 초입까지는 무난히 당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혼자서 출장한 걸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은 갈수록 첩첩산중으로만 이어지고 서류에 나온 ‘밀밭부락 7호’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렇다고 어디 물어볼 데도 없었다. 눈앞엔 쨍쨍 내려쬐는 햇볕 아래 인적 없는 산길뿐이었다.
길은 무성하게 웃자란 잡초에 뒤덮여 자주 사라졌고 사위는 괴기할 정도로 적막하여 머리카락이 저절로 쭈뼛쭈뼛 섰다. 그럴 때 바로 옆 숲에서는 인적에 놀란 장끼가 푸드덕 치솟아 오르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꿩도 나만큼이나 놀랐을 터이니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 번째로 천성산 자락을 밟은 건 벼 베기 작업이었다. 산에서 무슨 벼를 베느냐 하겠지만 해마다 벌어지는 행사였고 적어도 당시로선 업무에 우선하는 일이었다. 해마다 추수기가 되면 자매결연으로 맺은 천성산 자락 노전암 앞 천수답을 찾아가 추수를 돕는 대민지원이었다.
버스 한 대로 오갔으니 동원된 일꾼은 사오십 명은 되었지 싶다. 어린 날의 고향을 떠오르게 했던 벼 베기 작업이 이제 아득한 옛 추억으로만 남았다. 천성산 자락 천수답 벼 베기에 나서던 무렵은 대한민국으로선 역사에 획을 그은 대격변기였다. 부마민중항쟁으로 10.26과 12.12가 연달아 벌어졌고 남도 땅에선 북조선 군사들과 합작한 무장폭동이 일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대혼란 속에서도 컬러TV가 출시되어 방송을 시작했고 경제는 꺼질 줄 모르는 호황을 이어갔다. 적막한 인생황혼을 보내며 지척에 젊은 날의 체험이 깃든 산이 있어 이처럼 추억여행을 하게 된다.
꼭 산을 오르지 않더라도 차를 몰고 주변을 지나치면 주마등처럼 지난날이 떠오르는 산이다. 거주하는 지역엔 유달리 산이 많다. 천성산을 비롯하여 영축산 천태산 오룡산 오봉산 대운산으로 둘러싸여 지명에까지 산이 붙었다. 이들 산 중에서도 웹사이트에 등산기가 자주 오르는 산은 천성산이다. 국토의 남단인데도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 사람들까지 즐겨 찾는다는 걸 인터넷은 알려준다. 날을 잡아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에 비하면 지척에 사는 나는 마음만 먹으면 반나절에도 오르내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천성산은 시원한 계곡과 기암괴석이 들어차 제2금강산으로도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산세를 자랑한다. 철따라 피어나는 진달래와 철쭉 그리고 억새까지 장관을 이루어 언제 오르더라도 등산객이 끊이지 않는 걸 볼 수 있다. 경자년 새해에도 통과의례처럼 일출명소를 찾는 사람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며칠 전 영상으로 받은 간절곶 풍경 몇 컷을 직접 만나보려고 집을 나섰다. 해돋이행사에 사람들이 대거 몰리면서 한반도 내륙에서 가장 빠른 해돋이가 어디인가를 두고도 지역 간 경쟁이 뜨겁다.
처음 강릉 정동진이라고 했다가 포항 호미곶으로 바뀌나 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울산 간절곶이 되었다. 그런데 간절곶보다 4분이나 빠른 해돋이장소가 천성산이라고 한다. 그동안 발표한 일출이 빠르다는 장소들은 언론이 착각하여 오보한 것이라고 일축했다. 한국천문연구원 P박사가 정확한 공식에 의해 찾아낸 곳이 천성산 정상이라며 산출한 근거까지 내미는 데는 반론할 여지가 없다. 10여 년 전 양산으로 이주하자 새해 첫 새벽에 천성산 정상에서 시민들에게 떡국을 대접한다는 홍보가 요란했다.
떡국행사는 인구로 따져 양산이 도내에서 창원 김해 다음가는 도시가 되도록 국립대학과 대학병원 등을 유치하면서 그 기틀을 만든 시장이 주관하는 자리였다. 난 그런 인기영합주의 행사가 마뜩찮아 떡국 먹는 행사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떡국을 나눠먹다가 불상사가 일어날까를 우려했다. 지난날 나이키미사일포대가 주둔했던 정상 주변에 많은 양의 대인지뢰를 매설해 놓고 제대로 제거하지 못해 그동안 여러 차례 발목절단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곳 산은 양산시에서 천성산 제1,2봉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는 원적산과 원효산이었다.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온 1천명 승려를 화엄경으로 교화하여 그들 모두를 성인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산의 이름까지 바꾸게 했다. 신라 문무왕 13년,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참선에 들어가 중국대륙을 바라보는데 당나라 태화사 절에서는 1천 대중이 장마로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 속에 묻힐 위험에 처해 있었더란다. 원효는 즉시 하늘로 판자를 날렸다. 태화사 대중들은 공중을 날아오는 이상한 판자를 보려고 모두 법당을 뛰쳐나온 순간 뒷산이 무너져 내려 법당을 덮쳤다. 그 판자에는 원효가 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한다元曉擲板救衆고 적혀 있었다.
1천 승려들은 원효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고 원효가 그들이 머물 곳을 찾아 내원사 부근에 이르자 산신이 나타나 현재의 산신각 자리에서 사라졌단다. 이에 원효는 이곳에 내원사를 비롯한 89개 암자를 지어 1천명 제자를 머물게 하고 천성산 정상 부근에 큰 북을 달아놓고 제자들에게 설법하였다. 이후 원효 밑에서 수도한 1천명 제자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1천명이라는 숫자는 근거 없는 전설이어서 학계에서조차도 단순히 많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는 시각에 널찍한 천성산주차장에서 십리쯤 되는 내원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기암괴석과 아름드리 소나무가 아름다운 계곡이 이어졌다. 갑자기 비가 많이 쏟아졌을 때 경보를 발령하는 재난경보설비와 문자메시지 보내는 장비까지 계곡에 들어선 게 보인다. 이제 우리도 선진외국처럼 재난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 내원사 정문 쪽은 대대적인 증축공사를 벌이느라 막혀 있었다. 저녁공양을 준비하는지 비구니 서넛이 절 마당을 바쁘게 오가다가 늙은이가 공사장을 카메라에 담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들이 말을 붙여오지 못하도록 얼른 흐르는 찬물을 받아 마시는 척 바가지를 입에다 갖대 대었다. 내원사는 6.25동란 때 불탄 것을 1958년 재건하였고 지금도 수십 명 비구니들이 상주한다. 내원사 비구니들 중 지율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지금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지율이 내원사를 알리는 데는 공헌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국가에 저지른 막대한 손해를 유야무야하고 넘어간 것은 아직도 나라가 선진국에 제대로 안착하지 못했다는 걸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겠다.
경부고속철도 터널공사는 개발이냐 환경이냐의 문제로 정부와 환경단체의 갈등을 빚은 대표적인 국책사업 중 하나였다. 정부가 추진한 고속철사업은 1992년 노선결정 후 서울-대구 간 경부고속철도 1단계 착공을 시작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1999년 고속철도가 관통할 천성산에서 산지 늪이 발견되면서 습지파괴를 우려하는 환경단체와 일부 종교단체의 반대로 이 구간 공사에 제동이 걸렸다.
천성산에는 20여개의 고산 늪지와 도롱뇽을 비롯한 희귀동식물 30여종이 서식하고 있었다. 중단된 공사는 2005년 11월 30일에야 겨우 재개되었다. 환경론자들은 경부고속철이 천성산 구간을 관통하게 되면 이 지역의 생태파괴는 불가피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반대의 중심에 비구니 지율이 있었다. 비구니는 문제가 되고 있는 천성산 구간 원효터널의 발파공사 중단시키기 위해 2003년 2월 1차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비구니가 5차까지 100일간 단식농성을 이어가면서 천문학적인 국고를 낭비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린 대통령은 부산시청 앞 농성장까지 지율을 찾아와 위로한답시고 쇼를 벌였다. 그는 국민을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시시때때로 대통령 못해먹겠다면서 백성들 혈압을 올리던 화상이었다. 당시 청와대가 그리도 한가했는지 나라 망치는 비구니나 격려하고 돌아다녔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 비구니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보다도 도롱뇽을 더 챙겼는데 천성산 도롱뇽은 터널이 생기고도 지금까지 무탈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나 있을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