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이야기 - 정동 이성계의 사랑·고종의 야망이 살아 숨쉬는 곳, 정동길
hanjy9713
2023.09.14. 23:40조회 3
정동
이성계의 사랑·고종의 야망이 살아 숨쉬는 곳, 정동길
정동은 꿈의 흔적이 남은 곳이다. 19세기 후반 대한제국을 통해 부국강병을 꿈꿨던 고종, 최초의 근대 교육을 꿈꿨던 아펜젤러가 머물던 동네. 그리고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함녕전도 한 켠에 존재한다.
어떤 꿈은 달콤하기도, 어떤 꿈은 슬프고 아련하기도 하다. 정동은 꿈의 흔적이 남은 곳이다. 궁 근처에 부인을 묻은 이성계의 그리움, 을미사변의 충격으로 경운궁에 입궁해 대한제국을 꿈꾼 고종의 야망, 신식결혼과 신교육을 처음 접한 조선인들의 설렘이 녹아있다.
시청역 옆 덕수궁 돌담길로 이어지는 정동을 걸으면 마음 한 구석이 알싸해지는 것은 아마도 이루지 못한 누군가의 꿈 때문이 아닐까.
1. 정동의 유래-신덕왕후의 정릉이 있던 곳
신덕왕후의 정릉, 이를 파헤치고 이장시킨 태종
태조의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1396년 8월에 숨졌다. 이성계가 고려의 장군이었을 때 만났던 강씨. 사냥 중이던 이성계가 우물가에서 있던 강씨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자 강씨는 급하게 물을 마시다 체할 것을 우려해 버드나무 잎을 띄워 물을 건넸다는 일화는 아직도 회자된다. 강씨는 이성계의 두 번째 왕비가 됐다.
강씨는 조선 건국 초기 이성계가 정치 영역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고려의 권문세가였던 강씨는 집안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태조와 신덕왕후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조선 건국 4년 후인 1396년, 신덕왕후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죽은 왕비에 대한 애틋함을 간직하고 싶었던 태조는 왕비의 묘를 사대문 안에 들여놓게 한다. 당시 도성 안에 묘지를 써서는 안됐지만 태조는 무덤 공사를 강행한다. 신덕왕후의 묘는 '정릉'이라고 명명됐는데, 지금의 정동은 이 정릉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정릉은 현재 원 위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정동에서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사라져버렸다. 어떤 연유에서일까?
그의 묘는 1409년 양주(楊州) 사을한록(沙乙閑麓)으로 이장됐다. 태조의 아들 이방원이 왕위에 올라 눈엣가시였던 새어머니 신덕왕후의 묘를 이장시켜버린 것이다.
본래 도성 내에 묘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길 만큼 신덕왕후를 끔찍히 사랑했던 태조 이성계, 굳이 새어머니의 묘를 파헤쳐 지금의 정릉으로 이관하고 묘석을 분해해 청계천 주춧돌로 쓰게 만든 이방원. 이들 부자 갈등의 중심엔 정쟁이 있었다.
이성계의 첫째 부인의 소생이었던 이방원(태종)은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이 세자가 되자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는 세자 방석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권력을 위해 이복동생을 처단했던 그에게 신덕왕후의 릉은 다시 처단하고 모욕해야할 대상이었다. 그는 신덕왕후의 제사를 폐하고 즉위 9년(1409)에 정릉의 숲을 베어내고 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 자리로 릉을 옮겼다. 정릉에 있던 건물은 다른 건물인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했고 무덤을 없애버렸다. 석인은 땅에 묻어버렸고 이듬해엔 근방 청계천의 광통교의 돌다리로 사용했다.
정릉의 흔적은 현재의 정동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영국 대사관 혹은 구 러시아 공사관 근처라는 설만 있을 뿐이다. 조선 최초의 왕비였던 신덕왕후의 릉은 현종 10년(1669)에 신주가 종묘에 모셔지고 왕비로 복권되면서 현재의 성북구에 있는 정릉으로 회복됐다.
최초 정릉의 크기는 1만평으로 추론되고 태조가 지극정성으로 왕비를 생각하며 명복을 빌었다던 흥천사(興天寺)도 1510년 불교배척운동으로 불타 없어졌다. 정동을 가히 다 덮을 만큼 컸던 정릉과 흥천사. 이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점점 궁의 원형이 자리잡게 된다.
[골목,이야기] 꿈의 흔적이 있는 정동…①이성계의 꿈 '신덕왕후를 향한 사랑'이 있던 곳
정동 변천 과정
1392년 조선 건국, 강씨 신덕왕후로 책봉(조선의 첫 왕비)
1396년 신덕왕후 사망
1397년 지금의 정동에 정릉 설립
1408년 태조 승하
1409년 정릉, 도성 밖으로 이관
2. 월산대군 후손의 저택이 임시 궁이 되다
월산대군 후손의 저택이 임시 궁이 되다
그렇게 정동은 정릉의 '정'자가 남아 조선시대부터 정동으로 불리우기 시작했다. 정동이라는 정식 명칭이 지도상 붙은 건 1913년에서 1914년 무렵 황화방 대정동, 소정동에서 정동으로 바뀌었을 때부터다.
앞서 조선시대 때 행정구역 황화방에 속한 정동은 명문 귀족들의 저택이 들어오기도 했다. 김종서, 퇴계 이황, 김장생, 신의겸 등의 저택이 있었다고 한다. 궁의 형태를 잡아간 것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타버리자 서울로 돌아온 선조가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 후손의 저택을 행궁으로 정한 것이 그 시발점이었다. 왕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593년 때부터였다.
조선 왕조는 경복궁 서쪽 아래에 있는 황화방 지역의 이 정동을 가끔 임시 거처로 쓰기 시작했다. 광해군과 영조도 다녀간 적이 있다. 경운궁 이름은 광해군이 지었다고 한다.
임금이 머무르기 시작한 경운궁. 궁은 시대상황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처음에는 경운궁(慶運宮), 고종이 왕위에서 물러나 고종이 머무를 때는 지금의 명칭인 덕수궁(德壽宮)이 됐다.
덕수궁 변천 과정
1593년 선조 26년 월산대군 후손의 저택을 임시 행궁으로 결정
1769년 영조 45년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 임시 거둥
1895년 고종 32년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이어
1900년 광무 4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명명
1911년 상황이 된 고종(순종 즉위) 기거, 덕수궁으로 개칭
3. 고종, 열강들 틈 사이에서 황제를 꿈꾸다
고종 황제
궁궐과 빈민촌락이 뒤섞여 있던 정동이 또 한번 바뀐 건 개화기 초 19세기 후반부터였다. 당시 세계는 영국,프랑스,독일 등 서구의 열강들이 제국주의 정책으로 식민지 쟁탈전을 펼칠 때였고 조선도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청이 아편전쟁으로 기세를 잃고, 절대로 넘어올 것 같지 않던 러시아가 베이징조약을 통해 연해주쪽으로 진출할 무렵의 1860년대.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흥선 대원군의 개혁정치도 끝이 나고 22세부터 대원군의 품에서 벗어나 직접 통치를 시작한 고종. 그는 정동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한제국의 원대한 꿈을 꾸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1895년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에게 살해되자(을미사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된다(아관파천). 현재 정동의 고급 빌라 옆에 하얀 탑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러시아 공사관이 바로 그 역사의 무대였다.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러시아 공사관은 흰색 벽면과 아치형의 입구가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소실된 공사관 터는 민들레만 무성히 나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정사각형 구조로 3층까지 올라간 탑의 회색빛 벽은 흐린 날의 구름을 비추는 것처럼 애잔하다.
본디 더 넓었던 이 러시아 공사관 터에서 고종은 어떤 고민을 했던 것일까? 탑 근방에는 덕수궁을 연결하는 비밀통로로 추정되는 땅굴도 남아있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던 땅굴. 왕후가 살해당하고 조선의 운명이 열강의 손바닥 위에 놓여있던 상황에서 고종은 결심하게 된다.
그는 러시아도 미국도 일본도 청의 것도 아닌 조선 만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다. 경운궁으로 환궁해 황제임을 선포한 것이다.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대한제국임을 공포했다. 그러나 8년 뒤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 대한제국의 꿈을 펼쳐보이기도 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만 것이다.
고종이 거닐었던 마지막 흔적이 남아있는 덕수궁. 단아한 단청과 단정한 목재들로 지어진 조선 건물도 있고 서양식 이오니아와 로코코풍의 건축기법이 들어간 서양식 건물도 있다. 가장 화려한 건물은 석조전이다. 고종의 계획 하에 영국인 건축가 하딩이 설계한 석조전은 한국 최대의 서양식 건물이다. 안을 들어가보면 화려하게 코팅된 적갈새의 목재와 황금 도색이 된 고풍스러운 영국식 가구들, 순백의 천장이 낯설만큼 아름답다.
황제를 꿈꾼 고종. 대한제국의 자주를 꿈꿨지만 현실은 뼈아팠다. 이미 조선의 재정은 파탄난 상황이었다. 고종은 중명전에서 외교권이 박탈당하는 을사늑약을 겪었음에도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 세계 각국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려 했지만 이마저도 결국 무위로 끝나고 만다.
1910년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1910년 대한제국은 허무하게 멸망했다.
고종은 이후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덕수궁에 계속 머물다 함녕전에서 1919년 쓸쓸히 승하한다.
일본의 야망은 컸고 강대국은 숨통을 조여왔으며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기고만장한 일본에 맞설 패가 대한제국에는 없었다.
[골목,이야기] ② 강력한 대한제국을 꿈꾼 고종의 꿈
정동 변천 과정
1895년 을미사변
1895년 아관파천
1897년 고종 대한제국 선포
1904 러일전쟁 일본 승리
1905년 을사늑약, 헤이그 특사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황제자리 물려줌, 경운궁이 덕수궁으로 불림
1919년 고종 승하(독살), 3·1운동 발발
4. 최초의 근대식 학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개화기, 근대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오던 곳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이후 고종과 명성왕후는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조선의 핵심인 한양도성의 왼편에 1883년부터 1901년까지 서구 공사관들이 건물을 지었다.
개화기, 1880년부터 1920년까지 정동은 외국 문물이 들어오던 일종의 관문이었다. 각 나라 대표 외교관들이 공사관으로 와 조선의 정세를 살폈다. 감리교 선교사들은 교육시설과 병원을 지었다. 배재학당(1885), 이화학당(1886), 장림성당(1892), 정동제일교회(1897) 등이 지금의 정동 돌담길 주변에 자리잡았다. 기와집과 초가집 일색이었던 한양의 평범한 동네 정동은 이렇게 개화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아 갔다.
이중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이 지은 학교 두 곳은 우리나라 보통 교육의 전신이 됐다. 미국 북감리교 소속의 선교사 아펜젤러는 정동 34번지 인근을 매입해 최초의 학교인 배재학당과 최초의 근대식 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다.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주시경, 나도향, 김소월 등이 배재학당을 거쳐갔다.
배제학당 본교 건물 및 정동 풍경.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사진자료
아펜젤러와 같은 날 서울에 들어왔던 또 한명의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은 배재학당이 세워진 이듬해 조선 최초의 여자 학교인 이화학당을 세우고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배재학당은 영어를 배워 정계에 진출하려는 정치엘리트들과 청운의 꿈을 꾸던 청년들로 넘쳐났지만 이화학당은 그렇지 않았다. 여자가 교육을 받는 것에 대해 터부시하던 당시의 봉건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이화학당 수업 중 체조과목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보수적인 집안에서는 '여자가 체조를 하면 육체가 부덕해진다'며 며느릿감에서 이들을 제외시키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직선거리로 250m, 도보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했던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개화기, 구한말 등 격변의 시기를 거칠 때 두 학교의 학생들은 근대 교육을 받으며 조국을 위한 꿈을 키워갔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꿈도 비슷했던 까닭일까. 이 두 학교 중간에 위치했던 정동제일교회 예배당에서 학생들이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일화도 전해져오고 있다. 당시 남녀의 연애는 조선 사람들이 경악할 파격적인 일이었다. 급박한 나라 정세, 새로 배우는 모든 교과서들, 그리고 동지들을 보며 그들은 앳된 꿈을 키워갔을 것이다.
현존하는 교실은 1915년에 지은 심슨홀(현재 이화박물관)만 남아있다. 일제식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에는 100년도 더 이전에 교실에서 울고 웃던 여학생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댕기머리를 한 채 정동교회로 예배하러 가는 사진, 과학 실험실에서 비커를 쥐며 깔깔 웃고 있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골목, 이야기] ③ '정동에서 처음 교복을 입어보다' 근대 문물의 창구
정동 변천 과정
1883년 미국 공사관 개설, 독일 공사관 개설
1885년 아펜젤러가 배재학당 설립
1885년 러시아 공사관 개설
1886년 스크랜튼 대부인이 이화학당 설립
1890년 시병원 설립
1892년 영국공사관 설립
1892년 장림성당 설립
1897년 정동제일교회 설립
1898년 프랑스 공사관 개설
1901년 벨기에 영사관 개설, 이탈리아 공사관 개설
1903년 손탁호텔 설립
5. 80년대 6월항쟁의 시발점, 성공회 성당
성당에서 종이 마흔 두 번 울렸다. 1987년 6월 10일.
[골목,이야기] ④ 1987년 6월 10일, 종이 42번 울리더니… 6월 항쟁 진원지, 정동 성공회성당
종이 마흔 두 번 울렸다. 서울시 중구 정동 서울주교좌성당에서. 6월 항쟁은 성당 종루의 종소리와 함께 1987년 6월 10일 시작됐다.
쥐도 새도 모르게 정권에 끌려가던 때였다. 하루 전 9일엔 이한열 연세대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박종기 당시 서울주교좌성당 주임사제는 국민운동본부의 발대식을 위한 자리를 제공했다. 임원진들은 2박 3일 성당에서 먹고 자며 국민대회를 준비했다. 결국 종을 울리고야 말았다. 1987년 6월29일 국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덕수궁 함녕전에서 북쪽으로 100m 가량 뒤에 있는 주황 지붕의 이국적인 건물이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다. 10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 성행했던 건축 양식인 로마네스크. 저 먼 유럽에서 석재와 둥근 아치 구조를 가진 건축물이 이곳 정동에 서게 됐다. 1911년 서울주교좌성당의 3대 주교가 된 마크 트롤로프. 한옥의 모습이었던 장림성당의 자리에 영국 성공회의 건축양식으로 건물을 짓게 된다.
영국식만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 왕립 건축학회 회원 아더 딕슨 건축가가 설계한 성당은 기하학적으로 대칭적인 석조가 특징인 로마네스크 양식도 들어있지만 한국의 단아한 나무 창틀, 그리고 단아한 기와들이 섞여 있다. 성당 본당 안으로 들어가보면 둥근 아치 형의 구조물과 한옥 같이 단아한 목재와 착해보이는 장식들이 안정감을 준다. 명동성당의 화려함과는 또 다른 소박함이다.
이 성당의 완공을 간절히 원했던 마크 트롤로프는 완공을 지켜보지 못하고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한 손에 성당을 든 모습의 동판을 몸 위에 두고 성당 지하에 묻혀있다. 성당 완공(1996) 이후에도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될 때도 지하에서 성당을 지탱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시청역과 광화문역 사이 덕수궁 돌담길의 꺾어진 모서리 부분을 지나면 다홍빛 지붕의 주교좌 성당을 만날 수 있다.
서울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성당
5. 덕수궁 돌담길
연인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이별의 돌담길, 사실은 잊혀진 꿈의 공간
"비내리는 덕수궁 돌담장길을 우산없이 혼자서 거니는 사람 무슨 사연 있길래"(진송남 '덕수궁 돌담길')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이문세 '광화문 연가')
하늘 모르게 뻗는 빌딩 사이로 갑자기 거짓말처럼 낮아지는 곳. 정동길의 돌담길과 100년도 더 된 교회와 학교 그리고 덕수궁 등을 걷다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한다. 무언가가 멈춰져있는 것만 같다.
멈춰진 풍경 속에서 예술가들은 여러 영감을 얻었나보다. 이영훈 작사의 이문세 노래 '광화문 연가'와 진송남의 '덕수궁 돌담길'은 외로운 행인, 그리고 세월의 무상함을 이야기한다.
시청역 11번 출구 쪽의 서울시립미술관이 일제시대 때 재판소였다는 것은 조금만 서울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1995년까지 대법원이었던 이 곳. 그렇기 때문에 이혼하러 오는 남녀가 돌담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나왔다고 한다.
이별의 길로 한정 짓기엔 정동은 꿈의 흔적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있다. 대한제국으로 부국강병을 꾀했던 고종의 꿈, 마음속 해방을 꿈꾸던 앳된 학생들, 다른 세상을 꿈꿨던 선교사들. 그리고 신덕왕후를 잊지 못했던 이성계의 사랑.
시청과 광화문 일대 서울의 중심에 자리 잡은 정동. 즐비한 빌딩 사이에서 더 낮아 보이는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곳곳에 남겨진 애잔한 꿈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
덕수궁 돌담길
자료제공
[네이버 지식백과] 정동 - 이성계의 사랑·고종의 야망이 살아 숨쉬는 곳, 정동길 (골목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