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연일 강추위가 지속되는 주말에 글이 좀 길지만 편한 마음으로
읽어 보시길 ~~
[롯데그룹 이종규 대표이사 성공스토리]
이종규 사장은 롯데제과에 입사한 이래 줄곧 경리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다른 부서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그만큼 경리 업무를 매끄럽게 처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던 1981년의 어느 날, 간부직 직원의 승진 심사가 있었다.
그가 데리고 있던 직원이 업무처리 능력이나 인품에 손색이 없어서 승진을 시켜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담당 중역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진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 또한 돈이 없어 대학을 진학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처사는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도 경리부에 그대로 있다가는 앞길이 꽉 막혀버릴 것만 같았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그는 두 가지를 제안했다. 하나는 그 직원을 지방으로 전출시켜서라도 승진을 시키자는 것이었고, 자신도 다른 부서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두 가지가 다 받아들여져서, 부하 직원은 경남 양산으로 전출가서 승진했고, 그는 영업관리부로 가게 되었다.
☆고졸 학력의 벽을 깨라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면 간부가 될 수 없다는 담당 중역의 생각은 그의 가슴에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겨주었다. 학력의 열세를 극복하려면 대졸자보다 업무 능력이든 뭐든 모든 면에서 뛰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회사에 입사한 지 13년 동안 줄곧 경리 일만 해서 융통성이 없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은 사람이 영업 관리일을 잘해내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역시 한 번도 안 해본 영업관리 일을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인사 이동에 따른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다른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즉 전임자가 잘한 부분과 못한 부분을 구분해서, 잘한 부분은 자기 것으로 만들고, 못한 것은 고쳐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만 하면 새로 담당한 분야는 전임자의 업적과 비교해 볼 때, 6개월 이내에 반드시 차이점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영업관리부로 가서 제일 먼저 한 것은 인쇄 소모품 관리였다. 거래명세표, 정산서, 청구서, 거래처 카드 등등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하나 하나 따졌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정색을 하며, 그런 사소한 것까지 따지느냐면서 반발했지만, 그는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랬더니 일년이 지난 후 인쇄 소모품 인쇄량이 절반으로 줄어 일년에 수억 원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개선한 것은, 차량 운행에 따른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었다. 기사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운행일지의 서식에 공란이 없도록 모든 것을 기록하도록 하고, 출발지와 도착지에서는 거래처로부터 확인을 받도록 했다. 그랬더니 유류 비용이 절감되어 연간 5억 원이 넘는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업적으로 그는 부서 표창을 받게 되었고, 부서를 옮긴 지 일년도 안 되어 부장으로 승진했다. 직속 상사와 학력 문제로 마찰을 빚어 자리를 옮기게 되었지만 결과는 전화위복으로 나타난 것이다.
☆정든 롯데제과에서 직위해제 당하다
1991년 1월 25일, 이종규 사장이 롯데제과의 이사로 선임되고 2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2월달 판매촉진 회의를 하다가 사장과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품목별 목표 설정을 하는 과정에서 1000원짜리 MVP 초콜릿을 그는 10억 원으로 잡자고 했지만, 사장은 30억 원으로 설정하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모든 회사를 통틀어 1000원짜리 초콜릿의 연간 판매액이 100억 원 수준이었는데 어떻게 한 회사에서 그것도 한 달에 30억 원을 팔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사장의 목표 설정이 무리라는 것을 조목조목 설명했지만, 사장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계속 논쟁을 벌이다가, 사장의 지시대로 실행에 옮길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으로 교체하라고 말하고는 회의장을 나와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 일로 인해 그는 직위해제라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23년 동안 온 몸을 바쳐 가꾸어온 직장에서 타의에 의해 쫓겨난 것이다.그로부터 얼마 후, 그의 후임자는 사장의 뜻에 충복으로 움직여 1000원짜리 초콜릿을 무더기로 소매상에 깔았다가, 반품으로 인해 무려 수억 원에 가까운 상품을 수거해서 폐기 처분 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이 소식을 들은 이종규 사장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좀더 세련된 방법으로 윗사람을 설득하지 못한 자기 잘못도 컸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수억 원의 손해를 보게 만든 경영자의 책임도 막대하다고 생각되었다. 기업 경영은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한 번 해보고 잘못되어도 원상회복시킬 수 있다면 누구라도 경영자가 되어도 좋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경영자는 고독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많다고 그는 말한다.롯데제과를 떠날 때 그의 심정은 참담하기만 했다. 그러나 마냥 넋을 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시 그룹 부회장이던 신준호 대주주를 찾아가 직위해제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그를 필요로 하는 분야가 있다면 선처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새로이 얻은 보직이 호텔롯데 상임감사직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청량리 맘모스 백화점 인수에 참여하고, 롯데캐논 영업본부장으로 있으면서, 만년 적자에 시달리던 회사를 정상화시키는 한편, 급기야 롯데삼강의 대표이사로 취임하는 등 승승장구하게 된다.
결국 롯데제과에서 쫓겨난 것이 계기가 되어 부산롯데호텔 대표이사 그리고 롯데햄,롯데우유 대표이사가 된 것이지만, 아무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타고난 성실성과 끈기, 그리고 어릴 적의 가난을 잊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기 때문에 위기 상황을 항상 기회로 만들었던 것이다.
☆스님이 심어준, 성공에 대한 신념
이종규 사장은 경남 창영의 가난한 농가의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꿈을 갖는다는 것조차 꿈꿀 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게를 지고 땔감을 해오면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일년에 쌀밥을 먹는 날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가난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의 어머니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같이 농사를 짓자고 했다. 자식들을 가르쳐 놓으면 하나씩 외지로 공부하러 떠나는 자식들이 그리워 막내아들인 그에게는 조상들이 묻혀 있는 고향을 지키면서 살자고 했던 것이다. 그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말을 따르는 것이 효자라고 생각해서 어머니의 농사일을 도우며 한 해를 보냈다.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못자리를 하고 있는데 스님 한 사람이 다가와 그의 생년월일과 생시 그리고 이름을 묻더니, 이 아이는 앞으로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스님은, 이 아이는 어릴 적에는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지만, 청년기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집단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낼 아이이니 열심히 글 공부를 시키라는 것이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이종규 사장의 어린 가슴에 희망의 싹이 텄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스님의 말을 되새기면서 좌절하지 않고 성공 의지를 다져왔다고 한다. 일년 동안 농사일을 돕고 난 후, 그는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어머니를 졸랐다. 최소한 영어의 알파벳이라도 알아야 농약을 구분해서 사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는 중학교에 진학했고, 배움에 목마른 그에게 학교 생활은 꿈과 같이 흘러갔다.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꾼이 되기로 어머니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또 일년을 집에서 농사를 지었다. 어머니와 한 약속도 약속이지만,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고, 다른 형제들은 누구도 농사를 짓겠다고 하지 않으니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보리밭 김매기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초등학교 후배인 여학생이 교복에 하얀 칼라를 하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보는 순간, ‘이것이 내 인생의 전부일 순 없다’라고 생각되어 그 길로 마산으로 향했다. 상업학교를 나오면 취업이 쉽게 된다는 주변의 말을 듣고 마산상고에 원서를 넣었다.고등학교 시절부터 그의 성실과 노력은 꿈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취방은 다리를 뻗고 잘 수 없을 정도로 좁고, 겨울에는 방안에 물이 얼 정도로 추웠지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행복해 했다. 교내 은행업무를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한푼 두푼 모아 학비를 대고, 수학여행을 포기한 돈으로 주판을 마련해 주산 기능시험에서 1급 자격을 따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군에 입대했다. 그는 “먹고 자는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라고 회상한다.제대 직후, 과자 만드는 회사는 망할 염려가 없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에 롯데제과에 입사한 이래, 그는 롯데에서만 35년을 일해오고 있는 영원한 롯데맨이다.
☆이제까지 받은 월급 봉투 안 버려
이종규 사장은 가난에 몸부림치면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정도 잘 살게 된 지금도 그는 어릴 적의 가난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사장이 된 지금도 소파같이 푹신한 의자에 앉는 것을 거부한다. 몸이 편해지면 마음이 나태해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일반 사원 시절에 앉았던 하이테크 의자에 앉아 집무를 보고 있다. 직장 생활 35년의 증표로 그의 엉덩이에는 시커멓게 맺힌 굳은살이 생겼고, 그것을 그는 직장 생활에서 얻은 훈장 같은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오랫동안 그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가난한 자신을 부끄러워해본 적이 없다. 부당한 돈은 천금을 준다 해도 안 받았고, 정당한 대가로 받은 월급에 자족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그는 월급 봉투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도 그는 이제껏 받아온 월급 봉투와 명세서를 한 장도 빠뜨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롯데제과에 처음 입사했을 때 받은 사령장과, 1만3400원이라고 쓰여진 첫 월급 봉투를 보면서 감회에 젖기도 한다. 그는 월급 명세서를 자기 자신의 한달 동안의 노력과 땀의 결정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젊은 직장인들이 월급 봉투를 받지 않고 통장으로 급여를 받으면서 , 쥐꼬리만한 월급이라고 불평하는 것을 보면 아주 못마땅해 한다. 자기의 월급에 불평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모아온 월급 봉투를 후손에게 물려주려고 하고 있다. 그가 살아온 흔적인 월급 봉투를 보면서 삶의 지표로 삼는다면 어떤 보물보다 가치 있는 유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커피와 담배값 아껴 여의도에 아파트 사다
그는 커피와 담배를 안 한다. 왜냐 하면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루 한 갑의 담배값과 한 잔의 커피값을 합쳐 월급에 대입해 보았다. 그랬더니 월급의 13.4퍼센트가 담배·커피값으로 나간다는 계산이 나왔다. 즉 한 달에 4일 간은 담배·커피값을 벌기 위해 일한다는 계산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매일 커피 한 잔과 담배 한 갑을 피운다고 생각하고, 그 돈에 해당하는 금액을 돼지 저금통에 넣기로 했다. 그가 입사한 1968년엔 담배값이 30원, 커피값이 30원이었다. 커피값이 오르면 오른 만큼, 담배값이 오르면 역시 그만큼 꾸준히 저축을 했다. 그렇게 해서 저금통이 가득해지면 은행에 정기예금을 들었다. 그러기를 10년 6개월 했더니 저축한 액수는 400만 원이 넘었다. 당시 여의도에 34평형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분양 가격이 1700만 원이었다. 그가 1978년에 장만한 아파트 가격의 1/4은 담배값과 커피값에서 나온 것이다.
☆고졸 출신의 말단사원에서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올라
1968년 6월 롯데제과에 말단사원으로 입사한 지 30년째인 1998년 3월, 그는 롯데그룹 계열사인 롯데삼강 정기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로 선임되어, 샐러리맨의 꿈인 정상의 자리(CEO)에 올랐다. 그러나 롯데삼강은 한 해 전인 1997년에 93억 원의 적자를 기록한, 롯데그룹의 대표적인 불량기업이었다.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는 다시 꿈에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 문에도 가보지 못한 말단사원으로 입사해 대표이사라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니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습니다. 주어진 회사를 초일류의 정상기업으로 만들어 그룹에 보답하고 명예롭게 은퇴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죠.”그런 각오로 그는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리하여 2000년 롯데 삼강은 300여억 원의 흑자로 돌아섰고, 2000퍼센트가 넘던 부채 비율이 72퍼센트로 낮아졌다.
호텔롯데부산의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길때 그는 35년 동안의 회사 생활을 마무리 생각으로 마음을 비우고, 적극적인 노력과 성실성만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나는 앞으로 호텔롯데부산의 모든 임직원들과 함께 하는 동안 나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어나갈 생각입니다. 아름답다는 의미는 언제나 그것이 지닌 값어치에 충실할 때에 나타난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의 철학이 그랬듯이, 결코 내 개인의 영달과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직장이라는 한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정열을 쏟아부으려고 합니다.”기본에 충실하고, 원칙을 지키며, 실천하는 데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진 이종규 사장, 그의 인생의 성공에 박수를 보냅니다.
2021년 1월 10일,
기본에 충실하고, 원칙을 지키며, 실천하는데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신념을 가진 이종규 사장, 그의 인생의 성공을 본받아 내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 보는 주말 아침에!
코로나19와 한파경보가 내려진 강추위에 한 주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평안한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