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시론
2. 거짓말을 하든지 죽든지 / 이승훈
시론시에서 노래되는 것들은 현실도 아니고 현실이 아니 것도 아니다.
<답장>에서 나는 글쓰기. 시쓰기에 대한 나대로의 사유을 노래했고,
시의 후반에서는 추신형식으로 답장을 쓴던 날의 내 근황을 다소 엄살을 섞어
노래했기 때문이다. 섞는다는 것, 혼합성, 복수성이 문제다.
나는 이 글의 제목을 <비빔밥 시론>이라고 붙인다. 그렇게 붙일 수 있고 붙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체질적으로 일식이 마음에 들지만 일식은 비싸고, 이상하게 비빔밥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그동안 난 연구실에서 잡채밥을 시켜 먹고 지냈다. 원래는 아내가 도시락을 싸주기로 했지만
이 핑계 저 핑계로 한번도 도시락을 제대로 얻어먹은 적이 없고, 아내도 도시락 싸기가 귀잖을 것이고,
중국집에서 시켜 먹는 잡채밥은 불결할 때가 많고, 그래서 배탈로 고생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비빔밥은 잡채밥과 다르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비빔밥을 맛있게 먹은 건,
지금은 앓고 계시지만, 젊은 시절 진주 처가에 갔을 때, 장모님이 사주신 진주 비빔밥을 먹었을 때이다.
비빔밥은 밥도 아니고 반찬도 아니고 밥과 반찬의 경계가 모호할 뿐 아니라 재료들을 섞고, 비비고,
만드는 과정이 먹는 과정보다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비빔밥은 완성된 것도 아니고 개방적이다.
모든 음식은, 김밥이나 주먹밥까지도, 완성된 다음 먹는 것이지만 비빔밥은 내가, 당신이,
우리가 만들며 먹는다. 만든 다음 먹는것이 아니가 만들며 먹고, 무엇을 만드는지 모르고 먹는다.
독자의 참여를 요구하는 시라고 할까? 그리고 완성이 아니라 만드는 과정, 생성이 중요하고,
그런 생성이 무슨 단일한 세계가 아니라 복수성, 파편의 세계로 뒹구는 것도 중요한 점이다.
비빔밥에서는 안과 밖이 섞이고 밥과 반찬이 섞이고 당신과 내가 섞이고 시와 비시가 섞인다.
섞임의 미학이다. 이런 복수성의 세계는 이른바 2항 대립체계, 위계질서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무의미가 있고, 철학이 있다. <답장>에서 나는 시쓰기의 대한 나의 사고를,
그러나 쓴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이며 나를 나에게서 분리
시키고 두 개의 나를 만드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쓴다는 것은 나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종이 위에 나를
버리고 나는 하나의 차이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쓴다는 것은 계속 쓴다는 것은 나를 계속 연기시키는
일입니다 종이 위에서 나는 계속 연기됩니다 나는 이미 내가
아닙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무수한 텍스트 밝은 방 속에 드
러나는 이 흔적!
그러나 쓴다는 것은 산다는 뜻입니다 글 속에만 내가 있으므
로 나는 내가 아니고 동시에 나입니다
오오 그러나 쓴다는 것은 내가 언어이며 타자라는 사실이고
타자의 타자가 나라는 사실이고 이 나는 무수히(글을 쓰는
만큼)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사막입니다 계속 쓴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고 방랑이고(아무튼 시작도 끝도
없지요)
처럼 노래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 시는 여기서 끝내야 겠습니다> 라고 썼다.
끝이라고? <깨닫는 일이 방랑이고>는 끝이 아니라 휴식이고 연속이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글을, 시를, 문장을 끝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끝은 연기된다.
이런 내용이 노래된 다음 이 시는 형의 편지 고마웠다는 내용, 쓴다는 것은 업이라는 말,
지난밤엔 <내일의 시> 동인들이 마련한 출판기념회(인사동 누님 국수집)에서 술을 너무 마셔
하루종일 앓았다는 내용이 나오면서 끝난다,
시론시라지만 다시 읽어보면 이 시에는 세개의 코드가 들어 있다.
하나는 이만식 시인의 시, 하나는 내가 쓴 시론, 하나는 내 근황이다.
하나의 메시지 속에 두 개 이상의 코드가 들어 있는 것은 비빔밥과 비슷하고,
나는 이런 형식을 복수성의 미학이라고 불러본다. 문제는 시론이다.
이 시에 나오는 시쓰기에 대한 생각은 그동안 낵가 영향을 받았다면 받았다고
할 수 있는 데리다의 철학에 빚을 지고 있다. 언젠가는 갚아야 할 것이다.
데리다의 철학에 기댔다고 창피할 건 없지만 자랑할 것도 못된다.
이런 형식, 이른바 복수성의 형식은 박상배 형에게 주는 편지 형식의 시
<기차를 향한 배고픔> (현대시, 1996년 1월호), <끄노에 대한 단상> (시와 반시, 1996년 봄호),
<거짓말을 하든지 죽든지> (현대시학, 1996년 4월호)에도 나타난다.
거짓말을 하든지 죽든지 이런 형식은 시라는 동일성 개념을 해체하고 막힌 것을 뜷고
김수영 시인이 쾌활한 마음으로 <누이야 장하고나>라고 외칠 때 같은
그런 세계를 지향한다. 문제는 내 시론이다.
시를 쓸 때 고독이 문제지만(고독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때와 지금이 다르지만)
나는 두 개의 자아로 분열된다. 두 자아는 시를 쓴는 나와 시 속의 나를 뜻한다.
시를 쓸 때 나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며,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무수한 내가 존재하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나는 담배를 피운다>고 시를 쓴다.
그러나 시를 쓰는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느다. 그렇다면 이 나,
시 속의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시 밖의 나는 누구인가?
쓴다는 것은 나를 버리는 행위이다. 시를 쓸 때 나는 종이 위에 나를 버리고
혹은 버려지고, 나는 하나의 차이로 존재한다. 시 속의 나는 시 밖의 나를 버릴 때 태어난다.
<담배를 피우는 나>는 종이 위에만 존재하지만, 그런 점에서 시를 쓰는 나의 투사이며
버림이며 죽음이지만, 이 나는 나가 아니다. 이 나는, 지금 이 종이 위에서 담배를 피우는
나는 지금 시를 쓰는 나와 다르고, 따라서 두 자아 사이엔 차이가 존재한다.
나는 없고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라는 글에서 나는
<나도 없다. 나는 시를 쓸 때, 말할 때 태어날 뿐이다>고 말했다.
김준오 교수는 이런 나의 진술을 <모든 텍스트에 선행하는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저자의 개념을(곧 주체 중심주의)텍스트 시간 속에서만, 텍스트를 읽을 때만 존재하는 생산자,
그것도 필사자 또는 편집자의 개념으로 대치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을 재진술한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정곡을 찌른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언술행위의 주체가 없이는 이 속의 나, 곧 언술 내용의 주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시쓰기를 <나를 지우기>로 규정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하면 그때 나는 언술행위 주체로서의 나와
언술내용 주체로서의 나의 관계를 있음 / 없음의 관계로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이 점이 지금도 미진한 구석이고), 지금 이 글에서 말하듯 두 자아가 차이,
연기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언술행위가 주체와 언술 내용의 주체는, 내가 생각하기로는,
앞뒤의 관계가 아니라 동시적 관계, 말하자면 두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주체는 있으면서 없다고 할까? 아무튼 그런 관계, 데리다식으로는 차연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나>라고 하지만 그 <나> 는 모두 언어 속에서만 존재하고, 언어의 본질은 차연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는 앞으로 좀 더 공부해야 할 부분이다.
(계속)
첫댓글 시.... ^^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가 아닐까 ? 그리 생각하기에 시를 쓰는 마음은 늘 언제 어디서나 위대하다라고 말하고 싶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