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패러럴 어드벤처 -유아영- [10]

[위한]

패러럴 어드벤처 -유아영-

글쓴이 위한

"자, 이걸로 함께 하게 되었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상영은 웃으며 자신이 사인한 계약서를 아영에게 내밀었다. 아영 역시 웃으며 자신이 사인한 계약서를 상영에게 건넸다.

"저야말로, 아니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영의 옆으로는 에코스의 멤버들이 앉아있었다. 조금은 떨떠름한 얼굴을 한 멤버도 있었고, 그저 기쁨을 숨기지 않고 있는 멤버도 있었으며, 아무 감흥도 없는 얼굴을 한 멤버도 있었다. 그 중 기쁨을 숨기지 않던 멤버, 강우진은 웃으며 상영에게 악수를 건넸다.

"잘 부탁드립니다!"

상영 역시 웃으며 우진과 악수했다.

"리더로서 앞으로 멤버들을 잘 이끌어주세요."
"그, 그럼요!"

그런 그를 조금은 한심스럽게 쳐다보는 아영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

"리더에게 기대하는 건 좀 관두셨으면 좋겠네요."

선글라스를 벗으며 채환은 차갑게 말했다. 그의 말에 우진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리더로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멤버를 통제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하물며 애초에 리더의 존재감에 0에 수렴하는 에코스같은 경우에는 통제라는 단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

분위기를 깨보려 했던 것일까? 에코스의 또 다른 여성멤버, 지은은 어색하게 웃으며 상영에게 물었다. 자신들의 처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을 영입한 이유가 궁금한 이유도 있었고, 사실은 상영의 입에서 동정이 아닌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있기도 했다. 면전에 차가운 말을 내뱉을 사람 같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의외로 일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단호한 면이 있는 상영이었다.

"아영씨 때문이죠."

아, 지은과 우진, 그리고 형주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스쳤다. 자괴감, 씁쓸함, 그리고 치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감정도.

물론 이 팀이 아니라고 해도 어디서든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드러머 이채환의 경우에는 그런 사람들에 포함되지 않았다.

"같이 작업을 해 보신 분들이시니만큼 아영씨의 음반 프로듀싱 능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아영씨의 영입에 온 힘을 쏟았고 아영씨께서 제시한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전 에코스 멤버들과의 동반영입이었죠."
"네. 그렇군요……."

지은의 고개가 숙여졌다. 상영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는 걸 느낀 것인지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입이 아영씨를 위한 희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험이 있는 분들이니만큼 새로 작업하게 될 음반에서도 우리와 여러분, 그리고 팬들이 만족할 수 있는 훌륭한 음반이 만들어질 거라고 믿고 있어요. 거듭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 드리고 싶네요."
"말은 잘하시네요."

비꼬는 말투의 형주의 말에 상영의 눈이 형주를 향했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말투는 단호했다.

"이 계약은 강제가 아닙니다. 쌍방 간의 신뢰를 만들 수 없다고 판단되시면 저희와 계약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
"싫다는 분과 계약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영씨와의 계약조건에 여러분과의 동반계약이라는 조항이 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의에 의한 계약입니다. 부디 말씀드리는데, 팀간의 불화와 논란, 그리고 불만이 있으시다면 계약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형주의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계약 안할 리가 없잖아. 작지만 꿈을 다시 이어갈 수 있게 됐는데. 하지만 그 구명밧줄을 아영이 내밀어줬다는 사실에서, 고마움보다는 치욕이 더 컸다. 자신이 잘못됐다고 머리로는 판단하고 있지만 마음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 20살도 채 되지 않은 형주는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나이였다.

그런 형주의 마음을 보듯이 듣고 있는 아영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



"무슨 생각이야?"

상영의 기획사에서 나온 에코스. 주차장에 내려온 네 사람 중, 형주가 앞서가는 아영에게 그녀의 등 뒤에서 물었다. 모두의 걸음이 멈추고 두 사람을 향한다.

"형주야. 그만해."
"그, 그래. 계약했으면 됐지."

사람의 마음은 간악하다. 형주는 아영이 결코 형주가 그녀에게 욕을 하거나 모욕을 준다고 해도 아영이 기획사에 말해서 다른 멤버를 빼달라느니, 그 계약 조건을 없던 일로 해달라느니 하지 않을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아영은 형주가 그런 마음으로 자신에게 이렇게 삐딱하게 나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서로의 마음을 서로가 알고 있는 상황이다. 삐딱한 형주의 마음이 아영은 그저 가슴 아플 뿐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사근사근 대할 필요는 없겠지. 아영은 얼굴에 얼음처럼 차가운 가면을 두르며 형주의 말을 받았다.

"아무 생각 없어."
"우리가 불쌍했어?"

피식- 비틀린 웃음을 입가에 그린다.

"갈 데 없는 강아지를 빗가에 내놓은 기분이었어?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나보지? 웃기지 마!"
"너야말로 웃기지 좀 마."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아영은 형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계약하지 말지 그랬어? 아까 대표이사님께 계약 못하겠다고."
"그, 그건!"
"지금 나한테 그런 불만을 털어놓는 건 내가 절대로 너, 아니……."

그렇게 말하며 아영은 다른 멤버들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우진과 지은의 얼굴이 찔끔하며 놀란다. 채환이야, 둘의 싸움을 멀리서 관망할 뿐이다.

"우리 팀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네가 부탁한다면 나 역시 대표이사님의 의견과 같아. 싫은 사람을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거야. 내가 직접 대표이사님께 말씀드릴게. 그러길 원해?"
"크윽……."

차가운 눈이 형주의 전신을 훑었다. 그 눈이 형주의 눈과 마주했을 때 형주는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걸 전부 꿰뚫는 듯한 느낌에 필사적으로 그녀의 눈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듯 그녀의 눈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형주가 이렇게 삐딱하게 나오는 건지 그 이유는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아영이었지만 팀을 위해서도 계속해서 이렇게 삐딱한 반항심을 표출해낼 형주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았다.

"반항아 연기는 나중에 드라마 섭외가 들어오면 그때 가서 해. 자존심이 상한다는 건 알겠지만 지금 넌 내가 내미는 손길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야. 내게 굴욕을 주고 싶다면 네가 꿈꾸고 바라던 대로 톱스타가 되고 나서 하지 그래? 그때까지 굴욕을 참아. 그 정도 참을성도 없다면… 결국 넌 거기까지인 거야."

냉랭한 그녀의 말에 형주의 눈 가득 분노가 차올랐다. 저번에도 이랬다. 늘 언제나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서 모욕을 주는 그녀다. 정말 다 그만둬버리고 싶지만 그럼 정말 갈 곳이 없어진다. 다른 소속사로 갈 수도 없을테고, 혼자서 방송계로 진출할 수 있을 리 없다. 이곳저곳 찔러보다가 결국 세월이 흘러 모든 걸 체념하게 되면 과거의 인기 록밴드 출신이라고 소개되며 밤무대 나이트나 전전하며 살아가겠지.

두 눈을 들어 눈앞의 아영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내려다보는 듯한 눈. 재능있는 자의 눈이다. 알고 있다. 그녀가 만드는 음악, 연주하는 소리, 하물며 분명히 뛰어나야 할 보컬까지 그녀는 모든 면에서 재능이라는 이름으로 형주 자신을 압도한다. 아영이 기타를 치고 있는 건 누구보다는 기타 연주에 뛰어나기도 하지만 딱히 포지션이 없는 지은과 형주 자신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녀가 노래를 부른다면?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보다 5배는 더 사람들이 즐겨듣고 2배는 더 많이 팔리는 음반이 되리라. 질투나고 부러우며, 또한 원망스럽다. 그녀로 인해 잡게 된 기회지만 그 끝없는 재능이, 결코 따라가지 못할 그 능력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운 그다. 아영은 알 수 없겠지. 하나에 목숨을 걸면서도 모든 부분에서 자신을 뛰어넘는 재능을 가져 그걸 하찮게 보는 재능있는 자의 시선을.

"그래. 고맙네.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납니다. 유아영씨."

비꼬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형주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함에 서러워서 눈물이 흘렀다. 그의 눈물에 아영의 차가운 가면에 균열이 생겼다.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애절함이 가식이 아님을 안다. 자신에게 느끼고 있는 질투라는 감정이 가슴에 와 닿았다. 능력을 각성하면서 세상 만물의 소리를 듣게 된 만큼 그에 대한 감성도 깊어지고 넓어진 그녀다. 차가운 얼음의 가면으로 자신을 방어하지만 그녀 역시 차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요. 앞으로는 말 잘 듣고 짖으라면 열심히 짖는 착한 형주가 되겠습니다. 앞으로 버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형주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세워져 있는 자신의 바이크에 올랐다. 그런 그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여 아영이 손을 뻗었다.

"형주……."
"부르지 마!"

막 헬멧을 쓰려던 형주의 얼굴이 아영을 향해 거칠게 돌아섰다. 마치 안광이 뿌려질 것 같은 강렬한 시선에 아영은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이름 부르지 마요. 아직 할 말이 남으셨나봐? 내 아부가 좀 부족했나? 아니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아, 탄식의 한숨이 나온다. 아영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일까? 꼬여도 너무 많이 꼬여 도저히 풀릴 매듭이 보이지가 않는다. 차가운 냉정의 가면이 깨져가는 것을 느낀다. 결국 그녀도 소리치고 말았다.

"왜 이렇게 꼬였니? 왜 이렇게 삐딱해?"

가면이 깨진 아영의 얼굴에선 슬픔이 가득했다. 결코 다른 멤버들에게 치욕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이들과 함께하는 걸 다짐한 게 아니다. 물론 동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들과 음악을 하는 게 그녀로서는 아직까진 제일 편했다. 놀라운 재능이 있긴 하지만 그녀가 프로듀싱한 음반은 이제 겨우 2개. 그 모든 앨범을 함께 작업한 멤버들과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은 것이 그녀의 마음인 걸 왜 몰라주는 걸까?

"그럼 내가 그만둘까? 내가 밴드에서 빠지고, 그냥 너희들만 밴드로 나갈래? 그러면 돼? 난 앨범 프로듀싱만 하고, 그냥 그렇게?"
"하. 그게 가능할 리……."
"할 수 있어!"

아영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막 비꼬려던 형주의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너희들 이미지가 어떻든지 간에 내가 없어도 에코스 3집이 만들어지고 그걸 내가 프로듀싱하면 히트시키는 건 간단해. 내기할까? 1, 2집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둘지 아닐지?"

그녀의 표정에는 단호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하늘을 보고 저게 하늘이 아니면 뭐냐,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다. 아영은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고개를 들고 서 있을 힘조차 없다.

"그걸 원하면… 그렇게 해. 형주 네 의견에 따를 테니까. 대표이사님은… 내가 설득할게."
"아, 아영아!"

지은이 아영의 팔을 붙잡았다. 망가져가는 팀의 균열을 어떻게든 이어보려는 몸짓이지만 팀 내에서 그녀의 존재란 아영에 비해 너무나 미흡했다. 형주도 마찬가지지만 그가 가지는 독기가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뿜던 아영을 이렇게 힘들게 했으니 그는 칭찬해줘도 좋으리라.

"걱정 마. 떠난다는 게 아냐.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안 받으면 그만인 거야. 그걸 원하는 거지?"

아영의 눈이 형주를 향하자 형주가 시선을 피했다. 어떤 부분에선 정곡을 찌른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아영의 팔을 붙잡았던 지은 역시 흠칫 하고 그녀의 손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그녀 역시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에코스의 얼굴마담으로 쇼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버라이어티에 출연해 대중 앞에 많이 노출되고 개인기를 연습하고, 말도 안 되는 콩트에서 우스꽝스럽게 넘어져도 많은 사람들은 에코스 하면 역시 유아영을 떠올렸다. 뮤지션으로서의 이미지와 신비스런 이미지. 방송을 시작하면서부터 단 한 번도 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고서 그런 이미지를 완벽히 구축해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그녀.

부러웠다.
형주는 초등학생 때부터 아이돌로서 연습생 시절을 거쳐 온 터라 뮤지션보다는 연예인으로서의 마인드가 더 강했지만 아영을 만나고 나서부터 귀가 트여버렸다. 연기도 시켜주면 할 테지만 연기자보다는 가수로서의 욕망이 더 강한 그였다. 그런 그가 가수가 아닌 딴따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건 참 견디기 힘든 시선이었다.

지은은 더 했다. 그녀는 애초에 연예인을 준비하던 사람이 아니다. 그냥 공부 못해 간 대학, 학교에서 사귄 친구를 꼬셔 취미로 시작한 동아리 활동이 연예 활동까지 확대되어 버린 경우였다. 끼도 없고, 감각도 없다. 하지만 방송가의 화려함은 알았다. 대접해주고 떠받들어 준다. 하지만 자존심은 있다. 그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건 아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가진 재능도 부럽고, 그녀가 구축한 이미지도 부러웠다. 그녀가 없어진다면 그녀가 가진 록밴드의 여성 멤버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연한 인간의 욕망이리라. 아영은 자신의 차를 향해 걸었다. 그 중간에서 우진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 역시 아영에게 남들에게 말 못할 피해망상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채환을 지나쳐갈 때 그가 아영의 어깨를 잡았다.

"너 너무 힘들어 보여."
"……."
"혼자 너무 애쓰지 마라."

자신과 상담해도 괜찮다는 의미일까? 아영은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



아영은 차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실컷 달리고 싶었다. 엄마 얼굴도 보고 싶고, 아빠 얼굴도 보고 싶었다. 그녀의 차는 어느새 톨게이트를 넘어 경부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있었다. 이대로 부모님 댁에 들러 얼굴이나 보고 싶었다.

소속사에도 부모님 댁 연락처는 알려드리지 않았었기에 그 분들은 자식 소식도 모르고 계실 거다. 신문이나 TV, 라디오랑은 담을 쌓고 사시는 분들이니까. 그냥 뒤뜰에서 키우는 배추에 물주고, 키우는 강아지들과 고양이들과 노시며, 작은 정원을 가꾸는 게 하루 일과인 분들이신데. 자식이 온다면 맨발로 달려 나와 주실 것이다.

서울을 빠져 나오고 하남을 지나 호법을 향해 가던 지점이었다. 굉장한 속도로 그녀의 뒤를 따라붙는 트레일러가 있었다. 아영은 아직 눈치 채지 못한 상황. 곧 트레일러는 굉장한 경적을 울리며 그녀와 같은 차선 바로 뒷자리까지 따라 붙었다.

"뭐지?"

아영의 눈이 사이드 미러를 향했다. 대낮임에도 라이트를 켠 채 계속해서 빵빵거리며 경적을 울리는 트레일러. 옆 차선도 모두 비어있어 추월하면 되겠건만 차는 계속해서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따르고 있다? 아니,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찌푸려졌다.

엑셀을 밟으며 속도를 높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옆 차선으로 옮겨간 그녀의 뒤를 따라 역시 그녀의 뒤로 차선을 옮기는 트레일러. 이쯤 되면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나쁜 일을 겪은 지 아직 3주도 채 지나지 않았다.

"설마……."

그녀는 다시 오른 발에 힘을 주고서 속도를 올렸다. 100km를 넘어가던 속도계가 어느새 150km를 가리키고 있었다.

쾅쾅하고 귀를 울리는 경적 소리. 애초부터 청각이 민감한 그녀로서는 그 경적소리가 더욱 괴로웠다. 대체 뭐야? 그때 트레일러가 어느새 옆 차선으로 자신의 차를 추월하려 하고 있었다. 대체 누가? 아영은 이 빠른 속도에도 운전자, 혹은 조수석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해 창문을 내렸다.

미칠 듯한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때린다. 눈조차 뜨기 힘들지만 그녀는 간신히 고개를 창 밖으로 내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굳는다.

테도 찌그러지고 렌즈도 다 깨져버린 안경을 쓰고, 잔뜩 떡진 머리카락이지만 그 얼굴만은 생생했다.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그녀보다 훨씬 높은 트레일러 조수석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아영아. 잘 지냈어? 키키키킥."

사라져버렸던 유형택, 그가 트레일러에 타고 있었다.



◈



정상이 아냐. 아영의 눈이 겁에 질렸다. 정상이 아니다. 그의 눈에 번들거리는 저 광기는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다시금 엑셀레이터에 힘을 준다. 뽑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녀의 신차가 시원하게 앞으로 뻗어나간다. 그와 동시에 트레일러도 앞으로 치고 나갔다. 멀리 차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고속도로라 다행인건지 불행인거지, 시원하게 뻗은 도로는 아무리 트레일러와 자동차의 추격전이라 해도 사고 위험은 적어보였다. 그렇게 방심하던 순간 그녀의 차선의 차가 머뭇거리기 시작한다. 뒤에서 경적을 뿜으며 달려대는 트레일러에 당황한 탓이다.

"칫!"

그녀의 핸들이 격하게 꺾인다. 단숨에 차선 두 개를 넘는 그녀. 그러면서도 속도는 줄이지 않는다. 제법 운전에 능숙한 아영이었다. 하지만 트레일러의 운전자는 그렇지 않은 듯 머뭇거리던 차의 옆면을 그대로 치며 달려왔다. 거대한 트레일러는 끄떡없이 달려오고 있지만 부딪힌 자동차는 고속도로 위에서 그대로 스핀이 걸리며 몇 바퀴를 지면에서 회전하게 그대로 차체가 뒤집어지고 말았다. 마치 물에 돌을 던지면 그 돌이 튀기 듯 차가 도로 위로 튕겨져 오른다.

"안 돼!"

사이드 미러로 그 광경을 본 아영의 눈이 살짝 감겼다. 나 때문인가? 자책하고 있을 시간도 잠시, 트레일러는 무서운 속도로 쫓아와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섰다. 운전자는 누구지? 하지만 운전석이 너무 높아 보이지 않는다. 조수석 자리로 얼굴을 내밀기엔 너무 위험하다.

쾅! 드디어 트레일러가 부딪혀 왔다. 온 몸의 장기가 흔들리는 충격에 토할 것 같았다. 다행히 핸들만은 놓치지 않고 붙잡고 있던 아영은 왼쪽으로 핸들을 꺾으며 트레일러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트레일러가 더 빨랐다. 어느새 운전석 부분이 자신의 앞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진해봤자 충돌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렇다면!

끼이이이이-익!
아영이 단숨에 브레이크를 밟자 스키드 마크(Skid Marks : 타이어가 미끄러진 자국)가 생기며 그녀의 차가 뒤로 죽 물러나는 듯 보였다. 그녀와 같은 차선으로 달려오던 뒷차에서 들려오는 경적 소리. 좀 알아서 피해줬으면 하는 아영의 마음을 알아준 것인지 옆 차선으로 간신히 피해내는 차량.

"야, 이 미친놈아! 운전 똑바로 안 해?!"

차 안에서 외치는 소리가 아영의 귓가로 똑바로 전달된다. 죄송해요, 라고 작게 사과하고는 아영은 다시 단숨에 엑셀을 밟았다. 단숨에 타이어에서 연기가 일어나며 앞으로 내달리는 아영의 차량. 트레일러의 오른쪽으로 빠져나갔다. 트레일러 역시 잠시 멈추었다 그녀가 앞으로 튀어나가자 마자 바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



"아, 이것 좀 곤란하게 됐는데?"

차량 한 대와 트레일러 한 대. 그리고 그런 그들을 상공에서 관찰하고 있는 헬기가 있었다. 그 헬기 안에서 밑의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릭 카니발. 그의 이름이었다.

"요원들은?"
"서울에서 출발한 지 10분 지났습니다."
"빠르면 곧 도착하겠네. 그래도 저 추격을 막는 건 힘들어. 아영씨를 믿을 수밖에. 폭발물 설치는 어떻게 됐지?"
"완료했습니다!"
"타이밍 잘 맞춰라. 실수하지 말고."

릭은 그렇게 당부하고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쫓고 쫓기는 레이스 중이었다.

"조금만 더 고생해주세요. 아영씨."



◈



"아, 진짜! 날 지켜준다는 사람 다 어디 갔어!"

병원에 누워있는 블러디스트 레이언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영은 악에 받힌 고함을 내질렀다. 200km로 달리고 있는지 10분은 넘은듯 싶다. 속도는 꽤 높게 나오지만 연비가 별로 좋지도 않은 차량인데 기름 다 떨어지면 어쩌나 무섭기도 했다. 공포가 극에 달하니 이젠 또 무서운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계기판에 속도는 240km를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뒤처지지 않고 잘도 따라오는 트레일러다.

짜증나는 눈빛으로 사이드 미러로 트레일러를 확인하고 있을 때 눈부신 섬광이 터졌다. 그리고 그 순간, 트레일러가 뒤집히는 광경이 사이드 미러로 아영의 눈에 생생하게 비쳤다. 아영이 경악에 휩싸였다.

"맙소사!"



◈



"맙소사!"

릭의 얼굴에도 경악이 인다.

"뭐 심은 거야?!"
"C4입니다."
"얼마나?"
"100파운드입니다."
"많이도 심었다."

릭은 질린 얼굴로 완전 끊겨져버린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앞서 달리던 아영의 차 역시 멈춰진 상황. 다행이 그녀는 놀랐을 뿐 별 다른 충격을 입은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가서 아영씨에게 가던 길 계속 가시라고 말씀드려."
"네."

헬기가 착륙하고 릭의 옆에 있던 그와 같은 제복의 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헬기에서 내렸다. 릭 역시 헬기에서 내렸는데 그의 손에는 고풍스런 은색 검집에 들어있는 장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



똑똑.

아영의 차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시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그녀의 고개가 번쩍 쳐들렸다. 그녀가 당황한 눈으로 창밖을 보자 역시 당황한 눈빛의 한 남자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차문을 열고 아영이 내리자 남자와, 또 다른 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유아영씨."
"네?"

그녀가 당황해 바라보자 왠지 옷이 낯이 익다. 블러디스트 레이언과 자신의 병실에 왔던 릭 카니발이 입고 있던 제복과 같은 옷이었다. 그녀가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그 사람들 친구군요!"
"치, 친구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건 맞습니다."

친구라는 호칭에 당황스러웠을까? 한 남자가 쓰게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남자가 아영에게 말했다.

"일단 아영씨께서는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테러와 아영씨께서 연관되는 게 매스컴에 알려지면 좋지 않습니다. 아영씨께서도 그걸 원치는 않으시겠죠?"
"그거야……."
"가시는 길을 막는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뒤처리는 저희가 하도록 하죠. 자, 얼른 서둘러주세요."

다시 그녀를 그녀의 차에 태우는 두 사람.

"최대한 빨리 서울을 벗어나 계셔 주세요. 저희쪽에서 연락하겠습니다. 다른 곳으로 잠시 몸을 피해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 예."
"그럼 다음에 뵙죠."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는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몸을 옮겼다. 아영은 잠시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형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폭발한 트레일러에 타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광기 어린 눈동자도.

직감적으로, 아영은 이미 그가 인간이 아님을 깨달았다. 자신을 먹이로 보고 있는 눈빛에 과거에 본 그 괴물과 닮아 있어서 떠올릴 때마다 묘한 공포심을 느낀다.

"젠- 장!"

아영은 힘껏 엑셀을 밟았다. 이 장소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



멀리서 그녀의 차가 출발하는 걸 본 릭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작은 폭발이 연쇄적으로 몇 차례 일어난 후 잠잠한 트레일러. 어느새 거의 뼈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불길 사이로 거대한 체구가 몸을 일으켰다.

"역시, 캐니보어인가? 응?"

그런데, 그의 모습이 좀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를 감싸듯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어른이 아이를 안고 있는 그런 모습…?

그 순간 촉수가 트레일러 가까이 있던 한 남자의 몸을 관통했다.

"컥!"
"이런, 쏴!"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제각기 무기들을 꺼내들며 트레일러를 향해 난사하기 시작했다. 전쟁터와 같은 굉음이 울리지만 괴물은 맨몸으로 그 모든 총알을 막아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내구력이었다. 그 순간, 그의 거대한 몸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동시에 하늘로 향하는 순간 다시 네 사람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괴물은 둘이었다! 레이언에게 당부를 들었는데, 이런 실수를! 릭이 혀를 차는 사이 하늘에서 떨어진 캐니보어는 검은 제복의 한 남자의 머리를 깨부수고 있는 중이었다.

릭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더 이상 참기 힘든데?"

검집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 순간 땅을 박차는 릭 카니발! 그가 달리는 풍압에 불길이 단숨에 비켜서고 섬광처럼 그의 손에서 화살보다도 빠른 검격이 쏟아졌다.

"크아아악!"

형택의 팔 하나가 허공을 날았다. 형택의 비명을 들어서였을까? 쿵쿵거리며 달려드는 캐니보어의 발걸음 소리가 릭의 귀에 들려온다. 검을 땅에 박고 몸을 허공에 띄운다. 마치 검을 탄 채로 물구나무를 서는 것처럼. 은빛 칼날이 그의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듯 크게 휘지만 부러질 것 같은 위태로움은 없다. 탄성이 대단한 듯 단숨에 다시 원래 모습을 되찾는 검, 그리고 그 탄성을 이용해서 릭은 순식간에 아크로바틱을 선보이며 뒤에서 달려드는 캐니보어의 공격을 피해냈다. 캐니보어의 주먹이 허공을 헛돈다.

"모두 후퇴해!"

릭이 소리치자 주저하는 몸짓들. 하지만 한 번 더 릭이 손을 내젓자 그제서야 각자 타고 온 차량이나 헬기에 올라타는 그들이다. 어느새 전쟁터가 된 도로에는 릭과 캐니보어, 유형택만 남았다.

"이 빌어먹을 놈! 감히 내 팔을!"

릭의 얼굴이 형택을 향했다.

"아, 당신이 유형택이군. 촉수괴물이 됐다는 소식은 레이언에게 들었어. 재생 안된다고 징징 짠다던데 진짜였네?"
"이 자식!"
"그나저나."

릭은 단숨에 형택의 말을 끊었다. 그는 피곤하다는 표정을 하며 캐니보어와 형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진짜로 나를 나서게 만들다니. 좀 짜증이 나긴 하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 검을 몇 번 휘둘렀다. 은빛 궤적이 허공을 수놓는다.

"이 검의 이름이 뭔지 알아?"

왠지 모를 여유에 캐니보어와 형택, 둘 모두 움직이지 않는 채 릭을 주시했다.

"이 검의 이름은 엑셀리온(EX-Elion). 다들 엑스칼리버(EX-Calibur)는 알지? 이 녀석은 바로 그 엑스칼리버의 레플리카, 즉 복제품이야."

릭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바로 세웠다. 날카로운 예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이 녀석은 꽤나 까다로운 녀석이라서 말이지. 자기를 상대하는 적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으면 힘을 빌려주질 않는 녀석이야. 검 주제에 건방지지? 그래도 명색이 전설의 검을 흉내 낸 녀석인데 고작 베어지는 일만 할 줄 아는 건 아닐 거 아냐?"

그 순간 검의 표면으로 푸른색의 룬어가 가득 새겨졌다. 검신 전체를 감싸는 성스러운 에너지, 성검 엑셀리온. 그 진정한 모습이 드러났다.

"각오해. 내 엉덩이를 떼게 한 죗값은 무거워."

절대적인 자신감이었다.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에 두 괴물이 긴장한다. 하지만그들의 등 뒤로 밀려드는 어둠의 오오라. 괴물들의 얼굴이 밝아지고 절대적인 자신감에 차 있던 릭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든다.

'뭐지? 이 느낌은?'

그 순간 요요스런 웃음이 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끼요끼요끼요! 과연 그럴까나? 누구 엉덩이가 더 무거운지 한 번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누구냐!"

릭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진득한 덥고 어두운 공기와 주변을 메우는 광소 뿐.

"친구들은 아까 도망치던 저 녀석의 친구들을 쫓아. 능력자가 서너 명 끼어있었어. 맛있는 식사가 될 거야."
"뭐?"

캐니보어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기다리고 있었다.

"■■■■■■■■!!!"

그와 동시에 릭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캐니보어! 그런 캐니보어를 막아서며 검을 찌르는릭이지만 보이지 않는 막에 막혀 검이 튕겨져 나가고 만다. 그리고 그 사이에 형택도 그를 벗어나 캐니보어의 어깨에 올라타고 있었다.

"왼팔의 원한은 지옥에서 갚도록 하지! 키키키킥!"

순식간에 멀어지는 두 괴물. 쳇, 하고 릭은 혀를 찾지만 이미 놓친 두 녀석을 생각하는 건 나중이다. 일단 지금은 자신을 둘러싼 이 공기를 걷어내는 것이 중요했다. 검을 앞에 세우고 눈을 감았다. 엑셀리온을 중심으로 푸른 빛이 퍼져나간다. 어두운 공기가 밖으로 쫓기듯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정화(淨化, Purification)!"

그 순간 두텁게 덮여 있던 어두운 공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갈라지는 그 공기의 가운데 기괴한 모습의 광대 하나가 서 있었다.

얼굴에는 일그러진 미소의 가면, 검붉은 색과 불길한 회색이 교차된 삐에로복을 입고서 커다란 장갑을 낀 손에는 자신보다 더 큰 낫을 들고 있는 광대. 칼날은 마치 어둠 그 자체인 듯 검게 일렁이고 있었다.

광대는 기묘할 정도로 큰 각도로 고개를 옆으로 까닥거렸다.

"네 칼, 마음에 드는 듯도, 안 드는 듯도?"
"뭐?"

반응할 새도 없이, 광대는 릭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낫이 내려쳐지는 걸 간신히 엑셀리온으로 막아낸다. 그 순간 엑셀리온에서 푸른 섬광이 튀어오른다. 검이 고통스러운 듯 검명을 토해내며 검신에 새겨진 룬어들이 요동을 쳤다.

"이런?"

당황한 릭이 발로 광대를 밀쳤지만 발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다. 어느새 광대는 다시 릭의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목을 간질이는 감각.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자 거대한 낫이 그가 서 있던 공간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 칼, 내가 가져야겠어. 그리고 너는 죽는 게 낫겠다."

까닥까닥. 격한 각도로 휘청이는 얼굴. 릭이 물었다.

"넌 뭐지?"
"음. 알려줄까? 알려주면 죽여야 되는데. 아, 어차피 죽일 거니까 알려줘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광대는 고민하듯 커다란 장갑을 낀 손을 가면에 대고 허리를 옆으로 구부렸다. 그 각도가 너무도 커서 얼굴이 마치 땅에 닿을 듯 했다. 마치 몸에 뼈가 없는 듯 몸짓 하나하나가 희극적이었다.

"끼요끼요끼요! 좋아. 내 이름은 트럼프(Trump). 트럼프야. 남은 여생 잘 부탁해."
"그래, 잘 부탁하지. 트럼프."

릭은 몸을 일으켜 다시 자세를 취했다. 엑셀리온과 트럼프가 든 낫은 상극, 맞부딪히면 불리했다. 이 검을 탐내고 있으니 부수지는 않으리라. 힘껏 부딪혀볼까? 하지만 돌진하기도 전에 어느새 트럼프는 또 다시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젠장!"

냅다 앞으로 달려버리는 릭이었다. 순간이동계? 아니면 질량을 무시하는 중력계? 능력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렇게 기척도 소리도 없는 적은 처음이었다. 육체 강화형 팰러딘 시스템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대적할 수 있겠지만 자신은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팰러딘 시스템을 갖출 수 없는 육체가 되었다. 그래서 주어진 것이 바로 이 엑셀리온. 이 검 하나로도 팰러딘 시스템은 부럽지 않았는데, 아니 오히려 더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과거가 그리워지는 릭이었다. 그 순간 화끈한 감각이 왼팔을 스쳤다.

"크윽!"

타들어갈 것 같은 느낌. 보통 자상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아니다. 지속해서 상처에서 고통을 보내주고 있었다. 독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엑셀리온, 라이트 세이버 모드(Light Saber Mode), 리미트(Limit) 30초, 발동!"

엑셀리온의 검날이 맹렬하게 타오른다. 마치 무협에서 이야기하는 검강이 검 밖으로 뻗어나오는 것 같이 푸른 섬광의 칼날이 엑셀리온 바깥으로 2미터 넘게 뻗어 나왔다. 광대의 낫에 뒤지지 않는, 능가하는 길이였다. 릭의 얼굴에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져갔지만 릭은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허공으로 검을 휘둘렀다. 몇 번 허공을 휘젓던 검이 어느 순간 검은 낫에 가로막혔다.

가면 속에서 웃고 있는 광대가 말을 걸었다.

"재미있는 칼이네. 누구한테 주면 좋을까?"
"그 낫도 탐나는 걸."

가면 속에서 요요스런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나처럼 되고 싶어?"

속삭이듯 물어오는 광대의 질문에 등골까지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단숨에 광대를 밀치고 다시 검을 휘둘렀지만 강화된 엑셀리온의 칼날에도 광대의 낫은 너무 쉽게 엑셀리온을 받아 넘겼다.

20초가 지나고 있었다. 30초 안에 어떻게든 끝장을 봐야 한다. 능력의 발동에는 언제나 그 반동이 있어서 제한된 힘을 넘기는 힘을 사용할 시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엑셀리온의 라이트 세이버 모드도 마찬가지였다. 릭의 표정에 다급함이 묻어나지만 트럼프는 여유만만이었다.

30초가 되었다.

엑셀리온을 감싸고 있던 섬광이 사라지고 릭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경직, 광대의 낫이 여유롭게 휘둘러졌다.

엑셀리온을 쥔 릭의 팔이 허공을 나른다.

광대는 검을 쥔 채 절단 된 릭을 팔을 든 채 한껏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신비하고 또 신비스럽게.



◈



"크윽……."

오른팔의 절단면을 왼손으로 감싼 채 쓰러진 릭. 그리고 쓰러진 그는 안중에도 없이 엑셀리온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 트럼프. 햇살에 비쳐보기도 하고, 땅에 두들겨 보기도 했다. 가끔씩 엑셀리온은 푸른 방전을 일으키며 트럼프를 거부하는 듯도 보였지만 그가 지닌 어둠의 힘이 너무나 강력한 것인지 곧 반항을 그만두고는 잠들어버린 듯 표면의 푸른 룬어들을 모두 지운 채 평범한 검으로 돌아와 있었다.

"에이. 재미없네."

광대가 그림자 속으로 엑셀리온을 집어넣어 버렸다. 말 그대로 자신의 그림자 아래로 엑셀리온을 놓자 그림자가 그걸 삼켜버린 것이다. 그 모습에 릭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대체 넌 뭐지?"
"트럼프라고 했잖아."

질문이 오자 곧바로 고개를 돌려 답하는 광대다. 그는 낫을 어깨에 걸친 채 터벅터벅 릭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원하는 게… 뭐지?"
"별 거 없는데? 너희들과는 반대야."
"뭐?"
"너희는 세상을 통제하길 원하잖아?"

고통스런 얼굴이었던 릭의 얼굴에 의문이 인다. 그는 고개를 들어 트럼프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세상을 원해."

트럼프는 릭과 얼굴 높이를 맞추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보이지 않는 가면 아래로 마치 꿰뚫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통제를 위한 힘. 각성하기 전엔 그저 그런 능력인 절대청각, 알지?"
"……!"

릭의 얼굴이 굳어진다.

"어차피 각성해도 그 능력으로 세상을 지배한다느니, 파괴한다느니 하는 건 평~생 불가능할거야. 그냥 좀 편리하지만 이왕 능력을 가지려면 하늘을 날고 뿅뿅! 레이저를 쏘고 힘도 좀 쎈 그런 능력이 좋을 거야. 그렇지? 끼요끼요!"
"대체 무슨 소리를… 통제하기 위한 힘… 이라니?"

출혈로 정신이 희미해진다. 하지만 정신을 잃을 순 없었다. 만약에 살아남을 가능성을 위해 더 많은 걸 알아야 했다.

"모르겠어? 유아영은 세계에 귀 기울이는 자야! 그녀가 있으면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물론 인간의 정신을 유지한 채로는 힘들겠지만 너희 쪽 상부에서는 이미 그 능력에 맞는 장비도 개발해 뒀을 걸? 너희가 자랑하는 그 팰러딘 시스템이라는 방식으로 말이지. 그리고는 유아영의 정신은 꽝! 폭발하고 헤롱헤롱해진 유아영은 그냥 세상에 있는 모든 소리를 수집하는 도청기가 되어버리는 거야. 멋지긴 한데,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과는 좀 맞지 않지? 그래서 그녀를 먹으려고 해. 그녀의 능력 자체는 꽤 좋은 능력이니까 캐니보어에게 도움이 될 거야."

충격이다. 상부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유아영을 지키라는 오더는 바로 이 때문에? 유아영의 존재를 알아챈 이 녀석들의 습격을 빌미삼아 유아영에게 팰러딘 시스템을 이식하기 위해서? 정의라고 믿고 있던 마음 속의 뭔가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걱정 마. 넌 죽을 텐데 뭐. 네 걱정은 잘 아니까 유아영은 우리가 꼭! 먹어서 없애줄게. 고맙지?"
"아, 안 돼… 컥!"

그 순간 릭의 가슴에 검은 낫이 꽂혔다. 입으로 피가 열류해 드러누운 그의 입으로 계속해서 피가 토해진다. 눈동자가 격하게 떨린다. 알려야 하는데. 적어도 레이언에게라도……. 레이언의 믿음직스러운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 이 녀석이라면 모든 걸 알아채고 이 녀석들에게서도, 그리고 조직의 상부에서도 그녀를 지켜줄 거야. 애써 결심해 본다.

서서히 눈이 감긴다. 다시금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단정한 롱헤어. 갸름한 얼굴. 큰 눈동자. 어릴 때부터 졸졸 자신을 쫓아다니던 귀여운 여자아이가 눈이 감기는 짧은 시간동안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그게 다에요?"

쀼루퉁한 얼굴.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그녀의 표정이 떠오르자 온몸의 감각이 사라져가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온다.

'아니 뭐, 딱히 어떻게 해달라는 건 아니고…….'

바라보는 시선을 회피하며 왠지 몸을 배배 꼬는 그녀의 모습. 저 어색한 손동작은 어떡할 거냐. 내가 없으면 대체 누가 데려갈지. 죽는 와중에도 걱정이 된다.

"사랑해."

입가에 내어 말해보았다. 피에 젖은 목소리였지만 이 감정만은 진짜였다.

"사랑해."

조금 더 많이 말해줄 것을. 더 자주 보고, 더 많이 사랑해 줄 것을. 눈물이 흐른다.

"정아현… 사… 랑해……."

릭은 눈을 감았다. 입가에 맴도는 그 말을 계속해서 하고 싶지만 더 이상 힘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만나러 가야지. 꿈에서라도 만나서 계속해서 말해주고 싶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드디어 10화네요. 그리고 첫 사망자가 등장했습니다. 네. 릭 카니발이 죽었습니다. 사실 이 친구는 외전도 생각해봤는데 지금 이 이야기가 좀 길어지면서 언제 쓸 수 있을까 생각이 드네요. 릭 카니발의 외전은 역시 마찬가지로 블리디스트 레이언이 주역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언제 쓸지는 모르겠습니다.

요며칠 못써서 오늘 힘내서 꽤 많이 썼다고 생각하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2편에 나눠올릴까 했지만 그럼 또 양이 모자랄 것 같고. 그냥 한 편에 몰아넣었습니다.

사용된 설정은

히어로 캐릭터 - 블러디스트 레이언

입니다. 지적하실 사항이나 잘못된 점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style by 아크v의 글틀 

[나유나유]

아... 형택이 형주가 된 부분이 있어요. 첫 등장 부분...

[위한]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_^

[유로스]

릭의 최후는 쓸쓸하군요. 트럼프는 조커랑 닮았네요.

[위한]

아, 역시. 다크나이트 보기 전부터도 이거 위험한데 생각했어요. 이름도 생각이 안나서 옆에 트럼프 뭉치가 있길래...-_-; 네이버 검색해보니까 다른 의미도 있어서 아 좋네- 이렇게 결정했습니다. 왠지 실패같아요;

[시에라]

죽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죽었네요 흠.

[위한]

애초부터 죽이기 위해 공을 들인 녀석이라서-_-; 공들인만큼 표현은 안됐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