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남편은 길 박사
이기숙
나의 남편은 길 박사이다. 그는 유난히 여행하기를 좋아하고 길눈이 밝은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친구들은 길 박사라고 부른다. 실은 성이 김 씨라 김 박사이지만 사석에선 그리 부른다.
고향이 충정도인 남편은 광산 김 씨의 후손으로 양반 족보를 중요시 여긴다. 일찍이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니며 믿음이 깊어진 그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나 대학은 신학교를 선택하였다. 대학 졸업 후 농촌의 아주 작은 교회에 가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2년 만에 목사가 되고 결혼도 하였다. 그러나 주소를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영장을 받지 못한 그는 군 미필자가 되고 말았다.
4.19 혁명과 5.16혁명으로 그는 국토건설단이라도 갔다 와야 했다. 마침 군목을 모집하는 공고가 나서 지원하여 군목으로 입대하였다. 주일은 주일대로 일하고 평일은 평일대로 근무하는 군목생활은 쉬는 날이라곤 하루도 없었다.
그를 따라 전방으로 쫓아다니던 나는 군인가족이지만 남편이 군목이라는 특수직함 때문에 다른 군인가족과 어울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지역주민과도 어울릴 수 없어 항상 외톨이가 되었다. 나는 교사 자격증이 있었으나, 결혼과 동시 직업 갖기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남편을 따라 군인가족으로 전방 후방 옮겨 다니면서 그 생활의 만족을 찾지 못했다.
남편이 속초 간성에 근무할 때이다. 초등학교 교사 임용고시가 있기에 조용히 혼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춘천으로 시험 보러 가기 전 날 남편에게 이야기 하였다. 발령 대기 중에 남편이 홍천으로 임지를 옮겼다. 교육위원회에 다시 발령 희망지를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받은 첫 학교가 홍천군 두촌면 삼포초등학교였다.
그 후론 남편의 임지를 옮길 때마다 따라 다니지 못하니 혼자 임지로 가 근무 할 때가 많았다. 그러니 시간만 있으면 여기저기 안 가본 데가 없는 군목 생활이었다.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를 거치는 동안 길 박사에게는 길을 익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군 생활은 13년 만에 그만두고 전주에서 제대를 하면서 바로 교회를 개척하였다.
퇴직금 전부를 헌금으로 바쳐 교회부지 사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리 뛰고 저리 뛰어 2년 만에 200평 대지의 80평 2층 건물로 교회를 신축하였다. 그 과정에서 가정의 모든 경제는 나 혼자 감당하였다. 고로 나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편 하는 일 도우랴 애들 건사하랴 살림하랴 직장 생활하랴 그야말로 1인 4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니 남편 잘못 만나 고생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행복할 리 없다. 항상 불만이고 항상 힘들어했다.
그러나 90년도에 자동차를 갖게 되면서부터 남편은 나의 출근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방학 때는 이곳저곳 여행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차가 없는 친구를 위해 가끔 봉사를 하기도 하였다.
한 번은 절친한 선배(주계명)목사님의 아들이 군대 가서 훈련을 받고 있을 때이다. 1년 차 선배인 그와는 친구같이 허심탄회하게 지낸다. 차가 없는 그가 아들 면회를 가는데 쾌히 기사로 도움을 주기로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해는 이미 저서 어두웠다. 고속도로를 오다가 차가 막히니까 어림으로 짐작하고는 샛길로 가자고 들어섰다. 가다보니 직감적으로 무엇이 좀 이상함을 느꼈다.
난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표현 할 수 없었다. 운전이나 길에 대해선 잔소리를 말라는 남편의 핀잔을 가끔 들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는 길은 시골의 농로(農路)인성 싶었다. 그것도 공사가 끝나지 않은 가도 가도 논밭뿐 지방도로로 나오는 길이 없었다. 시간은 한 밤중 사방(四方)은 어두움으로 덮였고 지나는 사람 한 명 없으니 이곳이 어디냐고 물을 수도 없다. 더 이상 갈 수 없게 길이 막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차를 돌려 다시 가던 길로 나왔다. 항상 길에 대해선 자신만만하여 큰소리치던 남편이 오늘은 아무 말도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문다. 동행한 친구 내외도 불안한지 “잘못 들어섰으면 다시 나오면 되지 뭐, 천천히 갑시다.” 라며 안정을 시킨다. 늘 큰소리치던 남편인지라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밤중에 사고라도 날까봐 꾹 참고 있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격이 되었다.
남편은 81년도에 친구들 여섯 명과 미국 여행을 하였다. 누워서 잘 수도 있는 중형차를 빌려 세 명이 교대로 운전을 하면서 20일 동안 미국일주를 하였다. 그 때만 해도 여행비가 만만치 않고 자녀들이 한창 중 고등학교를 다닐 때라 부인들은 못 가고 남자들끼리만 갔었다.
그 후 남편은 미국 얘기만 나오면 어디가 어떻고 어디는 어떻고 신이 나서 아는 체를 하고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는다. 그 중 독일 캐나다 미국 3개국에서 30여 년을 살아온 친구가 있었다. 영어가 되는 그의 안내로 한 여행이지만 그도 깜짝 놀랄 정도로 미국지리를 훤히 꿰고 있다. 그래 붙여진 별명이 길 박사이다
이제 칠순이 넘었으나 건강에 이상이 없고 병원 원목으로 소일거리가 있으니 아직도 의욕이 넘친다. 자신도 건강하지만 나도 건강하고 매사에 의욕적이다. 나이 들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적극 후원하고 돕는다.
뿐만 아니라 여행을 좋아하는 그는 해마다 해외여행을 꿈꾸고 있으며 국내 여행은 수시로 다니고 있다. 남편과 함께 가는 여행은 마음을 푹 놓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 운전 잘하고 여행 좋아하는 남편 덕에 가끔은 ‘김 박사면 뭘 해. 길 박사가 낳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행복의 미소를 짓는다.
200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