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全琫準, 1855 ~ 1895).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
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랴
- 전봉준 장군의 유언시 –
동학 농민 운동을 이끈 전봉준 녹두장군.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일군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되었다. 일제 당국은 그에게 지위를 준다거니 재산을 준다거니 온갖 방법으로 회유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죽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재판정에서도 너무 당당하여 일본 관리들도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일본군에 붙잡혀 압송되는 '동학 접주, 전봉준'
“내가 아는 시인 한사람 집에는..” / 조태일의 시
내가 아는 시인 한사람 집에는 ... 춘하추동 녹두장군 초상화 만 덜렁 걸려 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일어 났다가 정부와 일군의 합작으로 전라도 피노리에서 붙잡히어 들것위에 실려가는 녹두장군...하늘을 향해 부끄럼 없이 틀어 올린 상투며, 단정히 맨 옷고름, 이제는 자유스러운 눈빛으로 산천초목을 끌어 안은 녹두장군...처음에는 아이들도 무섭다고 하였다지만 이제는 저 사람 우리 할아부지다 할아부지다 하며 자랑을 일삼는단다.
서당의 훈장에서 동학의 접주로
전봉준은 전라도 고부(지금의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사람이다.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 이곳 저곳을 이사 다니며 살았다. 그는 어린 시절 키가 작아 '녹두'라 불렸고 그 때문에 녹두장군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 향교의 장의(掌議)를 맡을 만큼 배움이 있었으나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훗날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못이긴 백성들의 대표로 관가에 소장(訴狀)을 냈다가 모질게 두들겨 맞고 장독(杖毒)으로 한 달만에 세상을 뜬다.
전봉준 고택.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개보수 과정에서 1878년에 쓴 상량문이 발견됐다.
전봉준은 약을 팔아 생계를 꾸렸고 서당을 열어 훈장 노릇도 했다. 그는 다섯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 '논이 서 마지기에 불과 했으며 아침에는 밥 먹고 저녁에는 죽을 먹는' 빈농의 처지였다. 그는 조상의 묘자리를 봐주는 지관에게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삼십대에 그는 서울에 가서 흥선대원군을 만났다고 한다. 모두 무엇인가를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뿐인데,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는 그에게 대원군은 '무슨 부탁이 있어서 왔느냐'고 물었고 "오직 저는 나라를 위할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대원군은 이 비범한 청년과의 대화 중에 강(江)이라는 글자를 써 주었다. "네가 일어나서 한강까지만 와라. 그러면 내가 호응해 주겠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의 농민군은 한강까지 진격하지도 못했고 일본군에 잡혀 가서도 흥선대원군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전봉준을 고부접주로 임명한 동학(천도교) 제 2대 교주, 최시형.
그는 1890년경 동학에 입교했으며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2대 교주 최시형에게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이철영 기자 /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86127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군에서 시작된 동학계(東學系) 농민의 혁명운동. 그 규모와 이념적인 면에서 농민봉기로 보지 않고 정치개혁을 외친 하나의 혁명으로 간주하며, 또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外勢)에 항거하였으므로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최제우와 동학농민.
역사적 배경
조선 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해이(解弛)하기 시작한 18세기부터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곧 농업, 산업, 수공업, 신분제도 등 하부구조에서의 봉건적 구성의 붕괴가 바로 사회의식에 반영되어 실학(實學)의 발생과 평민의식의 대두를 보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실례로서 1811년(순조 11)에 있었던 홍경래의 난을 들 수 있으며, 그 후 1862년(철종 13) 진주(晉州)의 농민봉기를 시초로 삼남 각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극도로 문란해진 삼정(三政)에 대한 반항으로, 이미 이때부터 혁명 발생의 역사적 배경은 조성되고 있었다.
혁명의 이념적 바탕이 된 동학은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풍수사상과 유(儒),불(佛),선(仙)의 교리를 토대로 서학(西學:기독교)에 대항하여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則人心)’을 내걸고, 새로운 세계는 내세(來世)가 아니라 현세에 있음을 갈파하여, 당시 재야에 있던 양반계급은 물론 학정과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 커다란 종교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동학의 교조, 최제우.
그러자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체포, 1864년 사형에 처하였다. 교도들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궐기하여 혁명에 호소하자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뒤에 그 동학군을 영도한 인물로 전봉준(全琫準)이 등장하였다.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부두에 쌓아둔 광경.
뿐만 아니라 일본 기선(汽船)이 조선 연안에서 무역에 종사함은 물론, 세미(歲米) 운송을 위한 기선의 도입으로 종래의 조군(漕軍)과 선상(船商)은 몰락하게 되었고, 그 위에 세미운송의 책임자인 전운사(轉運使)의 횡포 또한 막심하였다.이러한 절박한 사정 속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갈수록 가중되어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세도 정치로 인한 농민의 고통은 실로 견디기 힘들었다.
동진강이 흘러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던 고부 들녘은 호남의 대표적인 곡창이었다. 당시 서울 사람들의 소원 가운데 하나는 '자식 하나 잘 길러 호남에서 벼슬살이 시키는 것'이었다.
이 무렵 고부군수로 조병갑(趙秉甲)이 부임하였다. (1892년 1월)
그는 수세를 더 걷기 위해 동진강의 탈 없는 보(湺)를 놔두고 하류 쪽에 새로운 보를 하나 더 쌓았다. 그 명목으로 700석의 수세를 거두었다. 고부의 유지들에게는 불효, 간통, 도박, 형제불화의 트집을 잡아 2만 냥을 빼앗았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고, 가을에 수세(水稅)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다하였다.
19세기 세도 정치로 인한 관리들의 부패는 극에 달하여 뇌물수수가
관행처럼 되어있었다. 처벌을 받는 태형이나 곤장형 마저 뇌물을 주면
소리는 크나 아프지 않게 때리는 척만 하는 악습이 고질적으로 이어졌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은 학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동학의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있는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을 선두로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
'만석보를 내 손으로 부수리라, 썩어 문드러진 이 세상을 부수리라!'
전봉준은 죽어가는 아비를 모셨던, 관가에서 3마장 떨어진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서 20명의 동지와 함께 사발통문을 만든다.
1893년 11월 말목장터 봉기를 주도한 21명의 동학군 참여자들이
각 리(里)의 집강(執綱)들에게 돌려 연락을 주고받은 사발통문.
1894년 재임에 성공한 조병갑의 부임일을 기해 전봉준은 1월 10일 새벽 농민군 천여 명과 함께 말목장터에서 봉기한다. 말목장터를 지켜온 커다란 감나무 밑에서 전봉준은 갑오년 그 길고도 아름다운 싸움의 깃발을 올린 것이다.
죽창에 목숨을 맡긴 농민들의 분노가 물 밀 듯 일어섰다. 1894년 1월 10일 새벽, 1,000여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고, “전운사를 폐지하라,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외국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아라, 각 포구의 어염선세(漁鹽船稅)를 혁파하라, 수세 기타 잡세를 없애라, 탐관오리를 제거하라, 각읍의 수령,이서(吏胥)들의 학정 협잡을 근절시키라” 는 등의 폐정개혁 조목을 내걸고 노도와 같은 형세로 고부관아에 밀어닥쳤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동학혁명도.
한편 전라감사(全羅監司)로부터 고부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군수 조병갑을 체포 압송하게 하는 한편, 용안현감(龍安縣監) 박원명(朴源明)을 후임으로 부임하게 하고, 이어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使)로 보냈다.
신임군수 박원명은 도내 형편을 잘 아는 광주사람으로,그의 적절한 조처에 의하여 군중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켜 농민봉기의 주모자를 수색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동학군, 체포 되어 형을 기다리지만 그들의 모습은 당당하다.
전봉준은 피신하여 정세를 관망하다가 이 기회에 고질의 뿌리를 뽑아야 하겠다고 판단,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교조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1894년 3월 하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構)˙부안(扶安)˙고창(高敞)˙ 흥덕(興德) 등의 접주들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전봉준이 먼저 점령한 백산(白山)으로 모여드니, 그 수가 1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위의 그림은 백산 농민 대회 광경이다.( 1894년)
이 대회에서는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일어서면 흰옷을 입은 동학군만 보여 백산이오, 앉으면 죽창만 보여 죽산이라는 말이다.
전봉준은 대오를 정비한 다음 거사의 대의를 선포하였다. 곧,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③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盡滅)시킬 것 등의 4대강령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들의 탐학에 시달리던 인근 각처의 동학군과 농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앞을 다투어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태인의 동학군은 3월 29일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하여 관속(官屬)들을 응징하고 무기를 탈취하니 혁명군의 기세는 한층 더 충천하였다.
동학농민군 그림.
동학농민군 그림은 1893년 10월 26일 창간한 일본의 천우협 기관지인 이륙신보(二六新報) 1894년 8월 11일자에 실려있다. 이륙신보사 주필 영복(鈴木)은 "동학당원들은 황색, 청색, 흑색의 띠로 각기 부서의 구분을 두었으며, 의복은 진한적색 마포로 해서 입었고, 등에는 화승총을, 허리에는 약통과 화승을 차고 있다"고 삽화를 설명하였다. 지휘관 모습은 8월 12일자에 실린 삽화다. 양산을 들고 칼을 찬 채 말에 타고 있다. 왼편 위쪽 도장을 '제중의인(濟衆義仁) 이라고 새겨진 동학당원의 인장'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제중의소'의 잘못이다. 동학당원 인장이 아니라 1994년 봄부터 여름까지 농민군 지휘소를 지칭하는 지휘부 인장이다. 신문에는 동학당원의 印形이라면서 '濟衆義印'으로 표시하였다.
급보에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이재섭(李在燮) 등에게 명하여 영병(領兵) 250명과 보부상대(褓負商隊) 수천 명을 이끌고 동학군을 섬멸하라고 하였다. 4월 6일부터 7일 새벽까지 관군은 도교산(道橋山)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과 황토현(黃土峴)에서 싸움을 벌였다.
전봉준의 오른 팔 김개남 장군.
2차 봉기 때는 오히려 그의 역할이 더 컷다고한다.
피신 중 체포되어 전라도 관찰사 이도재에게 처형되어 최후를 마쳤다.
관군은 철저히 참패하여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하였다.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불과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면서 관아를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방면하였으며,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이서가(吏胥家)에 방화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군사 800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전주성(全州城)에 입성한 초토사 홍계훈의 경군(京軍)과 동학군은 월평리(月平里)의 황룡촌(黃龍村)에서 첫 대전을 벌였다. 일대 격전의 결과 경군은 대패하였고 동학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 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홍계훈의 경군(京軍)이 출동하는 광경을 바라보고있다.
한편 홍계훈의 경군은 28일에야 전주성밖에 이르러 완산(完山)에 포진하고 포격을 가하였다. 동학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가하였으나 소총과 죽창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차차 수세에 몰려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하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효수된 동학군.
홍계훈은 이 때를 이용하여 선무공작(宣撫工作)을 시작하였으니, 즉 정부는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을 이미 징계하였고, 앞으로도 탐관오리는 계속 처벌할 것과 폐정(弊政)의 시정을 약속하였다. 때마침 앞서 요청하였던 청(淸)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일본은 일본대로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持久戰)을 벌이는 것은 불리할 뿐더러 청,일 양군이 출동하여 국가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운다는 것은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정부군의 선무공작에 순응하여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최초의 농민자치정부 '집강소'
도집강소(都執綱所)에서 원정을 처리하는 전봉준 장군의 모습이다.(그림/이의주 화백)
1894년 5월 7일 정부로부터 폐정개혁의 실시를 약속 받은 전주화약이 성립되자 농민군은 해산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무장은 풀지 않고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와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에게 원정서(原情書)를 보내 폐정개혁의 조속한 실시를 촉구했으나 정부에서는 계속 폐정개혁을 외면하고 있었다.
전라도 지역은 정부의 무장력과 집행력이 상실되고 사실상 농민군이 장악한 상태였으므로 5월 중순경부터 농민군은 스스로 폐정개혁을 시행하기 위해 산발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기 시작하여 5월 하순에는 전라도 지방에 대도소(大都所), 도소(都所), 대의소(大義所), 행군의소(行軍義所) 등의 이름으로 집강소가 설치되어 본격적으로 집강소 통치시대가 시작되었다.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한 것은 폐정을 자신들의 힘으로 개혁하기 위해서였다. 동학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탐관오리와 탐익한 부호들을 색출해 징계하고, 양인과 천민의 신분해방을 실천해 나갔다.
강화(講和)가 성립된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하고 동학군은 폐정개혁의 실시와 교세확장을 위하여 전라도 53주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은 이미 상륙하였고,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했던 일본공사 하나부사와 궁궐을 습격했던 낭인 일행들.
그리하여 신곡(新穀)이 여무는 시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9월에 접어들자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孫華中)은 광주에서 궐기하였으며, 호남,호서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손화중(孫華仲).
35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손화중(孫華仲)’은
전봉준의 혁명론에 공명하여 1894년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백산에서 봉기,
전봉준과 동학 농민 운동을 이끌었다. 우금치 패배이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전봉준과 함께 처형 되었다.
전봉준은 전주 삼례(參禮)를 동학군의 근거지로 삼고 대군을 인솔, 일단 논산에 집결한 뒤 3방향으로 나누어 공주(公州)로 향하였다. 또한 각지의 수령들도 수원,옥천 등 요지를 점거하여 동학군을 원호하였다.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관군과 일본군은 급히 증원부대를 요청, 동학군이 공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붙잡힌 동학군을 땅바닥에 꿇어앉히고 일본군이 지키고있는 공주감옥.
10월 21일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손병희의 10만 호서군은 관군과 일본 연합군을 공격,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상대방의 막강한 근대적 무기와 화력으로 인해 우금치(于金峙)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여 논산,금구,태인 등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서 재기를 꾀하던 중, 11월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써 미증유(未曾有)의 광범한 민중의 무장봉기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1년 동안에 걸쳐 30∼40만의 희생자를 낸 채 끝났고, 이들의 개혁의지는 이후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쳐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다.
갑오개혁(1894)을 주관한 군국기무처.
군국기무처는 갑오경장의 중추적 역할을 한 기관으로 정치.군사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했다. 봉건적 신분제적 농민수탈을 완화하고 민중의 사소한 불만을 해소시킴으로써 농민혁명을 예방하고 개화파 정권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던 기구였다. 의정부 산하 정책의결기구로 총재와 20인 이하의 회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거기서 채택된 의안은 국왕의 재가를 거친 후 국법으로 효력을 발생하였다. 1894년 7월 15일 제1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자 군국기무처 회의원의 다수가 내각의 대신.협판으로 임명되고 군사 경찰관계 최고책임자들은 당연직 회의원이 됨으로써 합좌기관적 성격도 가지고 개혁을 추진하였다. 군국기무처는 6월 25일에서 10월 1일까지 3개월 동안 210건의 제도개혁안 또는 정책건의안을 의결하고 국왕의 재가를 얻어 공포하였다. 주요한 내용은 의정부와 궁내부의 분리, 개국기년 사용, 문벌과 양반 상민 차별 혁파, 불법적 경제수탈 금지 등이었다.
http://reltih.cafe24.com/data/korea_history/donghak/sa11.html
전봉준, (박생광 작품)
농민들에게 붙잡혀 일본군사들에게 인계된 전봉준은 순창을 거쳐 담양에 있는 일본군 제19대대 대장 미나미에게 인계돼 서울의 일본공사관으로 호송되었다.
공사관에 억류돼 신문받을 때 법관이 죄인 취급하며 다루려 하자 전봉준은 “동학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여 탐학하는 관리를 없애고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 악을 행하여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를 없애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 사람을 매매하는 것과 국토를 농락하여 사복을 채우는 자를 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너희는 외적을 이용하여 자국을 해하는 무리이다. 그 죄 가장 중대하거늘,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고 법관을 준열히 꾸짖었다.
일본 공사관에 억류돼 있을 때 어떤 일본인이 “그대의 죄상은 일본 법률로 논할 것 같으면 상당한 국사범이지만 사형에 까지는 이르지 아니할 수도 있으니 그대는 마땅히 일본인 변호사에게 위탁하여 재판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오, 또는 일본정부의 양해를 얻어 활로를 구함이 좋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였다.
일본 공사관 (남산 녹천정).
전봉준은 1894년 12월 24일 순창에서 체포되어 곧바로
서울 남산의 녹천정에 있는 일본공사관으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다.
전봉준은 이에 “내 구구한 생명을 위하다가 활로를 구함은 본의가 아니다”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며칠후 또 다른 일본인이 나타나 일본공사에게 살려달라고 청원하도록 설득하였다. 전봉준은 “이때에 와서 어찌 그러한 비열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죽음을 기다린지 오래 되었다”며 분연히 거절하였다.
일본은 전봉준을 살려서 조선침략의 하수인으로 이용하려 하였지만 이를 간파하고 단호히 거절한 것이다. 전봉준의 선고 공판은 1895년 1월 29일이었다. 재판정에 끌려나온 전봉준은 심한 고문으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재판장은 법무협판 이재정이고 판관은 장백과 일본인 우찌다 영사였다.
즉시 사형을 집행한다는 ‘부대시참(不待時斬)’의 판결이 내리자 전봉준은 분연히 무릎을 치고 일어나면서 “정도(正道)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고 대갈일성하여 재판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교수대에 올라갈 때 법관이 전봉준에게 “가족에게 할 말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자 “나는 다른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내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컴컴한 적굴속에서 암연히 죽이느냐”며 꾸짖어 최후의 순간까지도 굳건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전봉준 판결문과 서광범.
전봉준 재판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재판장 서광범과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였다. 전봉준과 서광범은 고등재판소에서 만났다.
전봉준의 교수형을 집행한 집행총순(執行總巡)은〈동학사〉를 쓴 오지영에게 다음과 같이 전봉준의 최후의 모습을 전하였다.
“나는 전봉준이 처음 잡혀오던 날부터 끝내 형을 받던 날까지 그의 전후 행동을 잘 살펴보았다. 그는 과연 보기 전 풍문으로 듣던 말보다 훨씬 돋보이는 감이 있었다. 그는 외모부터 천인만인의 특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청수한 얼굴과 정채 있는 이목으로 엄정한 기상과 강장한 심지는 세상에 한번 놀랠만한 대위인·영걸이었다. 과연 그는 평지돌출로 일어서서 조선의 민중운동을 대규모적으로 대창작한 자이니 그는 죽을 때까지 그의 뜻을 쫓지 아니하고 본심 그대로 태연히 간 자이다”고 하였다.
일본인들이 촬영한 전봉준의 효수된 머리는 두 눈이 부릅뜬 혁명가의 형형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머리와 시체는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근대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혁명가 전봉준 장군의 사체에 대해 역사는 공백으로 남아있다.
근대 민중혁명의 영웅 전봉준의 태가 어디에 묻혔는지, 그의 시신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를만큼 우리 근현대사에서 동학혁명과 전봉준장군은 배제되고 잊혀졌다.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이 열리면서 전봉준과 동학혁명은 재평가 받게되고 국회는 국가지정일로 삼기에 이르렀다.
전봉준장군 연설장면을 재현한 ‘역사재현굿’
전봉준이 처형을 앞두고 남긴 유시 ‘운명(殞命)’은 지금도 그의 애국애족 정신을 찾게 한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 운 다하여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허물이 되랴,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김삼웅(언론인/성균관대 겸임교수)
From : The Religious Herald/2004./05/06.
2남2녀 둔 전봉준, 농민전쟁 뒤 절손
전봉준(全琫準) 영정.
전봉준은 두 아내를 둔 것으로 전해진다. 첫째 부인 송씨는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사망했고, 둘째 부인 이씨는 농민전쟁 당시에 생존했다고 한다. 전봉준은 공초(供招)에서 가족이 6명이라고 밝혔다. 곧 본인 부부를 포함해 자녀를 4명 두었다는 말이다.
전봉준이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 고부 조소리에서 살 때 아이들의 손을 잡고 황토재에 있는 아내의 무덤에 성묘했다고 마을사람들은 전해주고 있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주소지를 태인 동곡리(현재 정읍시에 속함)라고 밝혔다. 아마도 고부봉기가 있은 뒤 가족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자녀 4명이 태어난 순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2남2녀였던 것으로 보인다.(최현식 조사)
전봉준이 체포된 뒤 전봉준의 고향으로, 전씨들이 집단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 고창 당촌은 깡그리 불에 탔고 전씨들도 몰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봉준의 옛집 방안 모습.
전봉준의 첫딸 옥례는 15세의 나이로 화를 피해 이름을 바꾸고 진안 마이산 금당사로 들어가 공양주로 있었다. 그녀는 23세 때 이씨 집안으로 출가했는데, 1970년 자신이 살았던 고부의 전봉준 고택을 일러주어 복원케 했다.
둘째 딸은 뒤에 태인 지금실로 출가해 살고 있었다. 장남 용규는 동곡리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차남 용현(또는 동일)은 누나가 사는 지금실에서 몸을 숨겨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고 한다.
지금실에는 동네사람들이 전봉준의 가묘를 만들고 받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용현은 머슴살이를 하면서 동네에서 노름을 일삼다가 노름빚을 져서 남의 소를 팔아먹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의 두 딸은 살아남아서 자식을 두었다. 외손녀인 강금례는 동곡리에 살면서 자식을 두었다.
전봉준은 외손을 둔 것으로 보이나 친손들은 있는지 없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전봉준만이 절손이 된 것은 아니다. 많은 농민군 지도자들의 가족이 몰살이 되거나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그리하여 오늘날 확인할 길이 없게 되었다.
2004년 2월 국회에서 농민군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어 110년 만에 농민군 지도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들에게 주는 훈장이나 표창장은 누가 받아 보관할 것인가?
http://www.khan.co.kr/kh_news/art_view.html?artid=200405191854441&code=210060
전봉준 장군에 대한 공초 기록
다음의 문답은 "내 백성을 위해서 힘을 다하였는데 사형을 받을 이유가 있는가?" 라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던 녹두 장군 전봉준에 대한 공초(☞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한 것)기록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전봉준 공초 문서.
문: 그대가 전라도 동학 괴수라 하니 과연 그러한가?
답: 처음에 창의로 기포하였을뿐 동학괴수라 할 것은 없다.
문: 동학이란 어떤 주의,어떤 도학인가?
답: 수심하여 충효로 본을 삼아 보국안민하자는 것이다.
문: 그대는 동학을 몹시 좋아하는가?
답: 동학은 수심경천하는 도인고로 몹시 좋아한다.
문: 그대가 기포할 때에 거느린 사람은 모두 동학인가?
답: 소위 접주는 모두 동학이요,그 나머지 거느린 사람은 충의지사라 할 사람들이다.
문: 고부에서 기포할 때에 동학이 많았느냐, 농민이 많았느냐?
답: 기포할 때에 농민과 동학이 합하였으나 동학은 적고 농민은 많았다.
문: 접주라는 것은 어떠한 이름인가?
답: 영솔이라는 뜻으로 모든 일을 다 지휘하는 자이다.
문: 고부 민란 때 동학이 많았는가, 원민(怨民:원망하여 일어난 백성을 말함)이 많았는가?
답: 원민과 동학이 비록 합세하였으나, 동학은 적었으며 원민이 많았다.
문: 난을 일으킨 후 어떤 일을 하였는가?
답: 난을 일으킨 후 개간한 황무지에서 강제로 거둔 세금을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관청에서 쌓은 만석보를 허물었다.
문: 그 후에는 어떤 일을 하였는가?
답: 그 후에는 다시 흩어졌다.
문: 다시 봉기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답: 그 후에 들으니,귀국이 개화라 일컫고 처음부터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의 서울로 쳐들어와 밤중에 왕궁을 공격하여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하기로, 초야의 사민이 충국 애국지심으로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의병을 규합하고 일본인과 접전하여 이 사실을 일차로 묻고자 함이었다.
문: 그 후에 다시 어떤일을 하였느냐?
답: 그 후에 생각해 보니, 공주 감영은 산으로 막히고 강을 끼고 있어 지리적 조건이 좋으므로 이 곳을 차지하고 굳건히 지킨다면 일본군이 쉽게 쳐들어 오지 못할 것 같아서 공주에 들어 가 일본 군에게 격문을 전하고 일본군과 대치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이 먼저 공주를 점령하였으므로 사태가 서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차례 접전 후 만여명의 군사를 점검해 보니 산 자가 3천여명이었고 그 후 다시 두 차례 접전 후 점검해 보니 불과 5백명이었다.그래서 패주하여 금구에 이르러 다시 군사를 모으니 수효는 점점 늘어으나 기율이 없어 다시 싸우기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일본군이 따라와 두 차례 접전 후 패주하여 각자 해산 하였다. 금구에서 해산한 후 나는 서울의 내막을 상세히 알고자 상경하려다가 순창에서 민병에게 붙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