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글을 쓰는 의도는 동악회의 역사를 남기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고향소식에 목말라 할 우식이 친구를 위해 씀을 밝혀 둡니다.
우식아!! 요즘 잘 살고 있냐??
오늘(2004/12/11)은 동악회 정기총회겸 망년회 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당초 생각은 4:30pm경 집을 떠나려고 맘을 먹었는데, 아내가 바깥 볼일을 좀 봐야 한다면서 3시경에 나가자고 해서 4시경에 돌아와, 동악회 결산서를 마무리 하고, 출발하니 예정시간보다 좀 지연되었습니다. 그래서, 5:20pm경 일산집을 떠났습니다.
장충동 평안도족발집에서 6:00 정각에 만나기로 했으니 지각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파트 앞에서 택시를 탔습니다. 일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그런지 출발지인 마두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가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습니다.그냥 졸은 것이 아니라, 꾸벅꾸벅 졸았든 모양 입니다. 뭔가가 나의 머리를 밀친다는 기분에 얼떨떨한 상태에서 눈을 떴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한테 내 머리를 처박았나 봅니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모피 반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모피가 따뜻했던 모양입니다.지하철에서 보면 종종 졸면서 옆자리에 앉은분 한테 머리를 처박아, 저 양반은 왜 똑바로 못자고 저렇게 옆 사람한테 피해를 주노? 하고 평소에 생각했었는데, 아뿔사! 나도 그들과 똑같이 그랬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십중팔구 내가 졸면서 머리를 옆 아주머니한테 처박아서, 아주머니가 언짢은 기분으로 팔 옆구리로 내 머리를 밀어 올렸던 것 입니다.
멍한 기분으로 아주머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휴대전화 벨이 울렸습니다.
전화를 받자 고씨? 고씨? 하면서 나를 확인하는데. 엉? 고씨? 속으로 누구야 하면서 누구인지를 생각하는데 목소리가 김인기 친구 목소리 였습니다. 응 그래! 하고 답하니 왜? 아직도 안오냐?고 한다. 응! 지금 종로3가를 향해서 가고 있어 하니. 지하철이야? 하고 묻는다. 그래! 하니 알았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동국대 지하철역에서 나와서 장충동 족발집 방향으로 나가는데, 한가지 아쉬운 점은 장충동 족발은 서울에서도 유명한 곳인데 역에서 나가는 표지판에 장충동 족발로 가는 표시가 없었다는 것이 관광객을 위한 서비스 정신도 부족하지만, 수도권 시민을 위한 서비스도 영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쉬웠습니다. 20여년전에 학벌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하여 주경야독을 한 기억이 머리속에 아스라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땐 힘들지만 졸업장을 따겠다는 일념과 나와 같이 늦깎이 공부를 시작한 친구들을 만나는 즐거움에 무거운 가방을 행복한 마음으로 들고 다닌 추억이 콧등을 시리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보다 장충동이 많이 개발되어 현대식 건물로 들어서 불빛도 당시보다는 많이 휘황찬란 하였습니다.
6시 30분경쯤 약속 장소인 평안도족발집에 도착하였습니다. 평안도족발집은 사람들로 꽊;찼으며, 왁자지껄 해서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카운터를 쳐다보니 할머니가 앉아 계신데, 손님이 와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동악회 모임방이 어디냐고 물었더니만, 모씨? 모씨? 하신다. 순간적으로 아하 모상광씨를 예기한다고 판단하고,그렇다고 하자 옆건물 비슷한 방을 가르키신다.
그 방으로 갔더니만 이미 친구들이 다 와 있었습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친구들의 머리칼을 보니 우리도 나이를 좀 먹었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총무를 맡을 당시인 94년도만 해도 동악회 친구들의 머리는 검은 머리가 주류를 이루었었는데, 10년의 세월이 훌쩍 건너뛴 지금은, 친구들의 머리칼 세력판도는 신흥세력인 흰머리파에 의해서 검은 머리파의 세력이 완전히 제압된 형국이었습니다.
평안도족발집 2층에 100여명의 손님떼가 들이닥쳐 그기에 족발갔다주느라고, 우리방에는 족발이 영 올 생각을 안하는것 같아 친구들이 어서 족발 갖다 달라고 야단입니다.
드디어 중짜 족발(1접시당 25,000원) 4개가 들어 왔습니다. 모두가 족발을 먹기 시작 했습니다. 소주에 먹었는데, 나는 소주가 쓰다는 생각이 들어서 맥주를 시켜서 먹었습니다.
족발만 먹으니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빈대떡을 시켰는데 맛이 별로였습니다. 동악회의 영원한 주방장인 철형이 친구가 빈대떡이 맛이 없는 것은 계란을 넣어서 퍽퍽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족발에 비하여 빈대떡은 정말 맛이 없었습니다. 빈대떡뿐만 아니라 전(부침개)은 대부분 되면(반죽에서 물이 적은 상태) 맛이 없기 때문에 약간 질(묽)어야 맛이 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윤종권씨 부인께서 조금 늦게 왔고, 족발은 안 먹는다 하여 빈대떡을 더 시켰습니다. 이어서 종권이 친구가 도착하였습니다.
부산에서 오늘 저녁 7시경에 KTX를 타고 출발한 충근이 친구가 마지막으로 10시 30분경에 족발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충근이 친구가 도착하여서 족발 한접시를 추가로 시켰는데, 처음나온 족발과는 달리 따끈따끈 하였습니다. 따끈따끈하니 족발이 정말로 맛있었습니다.
역시 한국 음식은 온기가 있어야 대개 제 맛이 난다는 것을 실감 하였습니다.
부산에 사는 충근이 친구는 최근에 농촌에서 필요한 파레트를 개발하였는데 재활용품을 원료로 하여 만든것 이라서 경쟁력이 있어서 전망이 밝다고 하였습니다.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빌어드립니다.
수원에 사는 인기 친구는 지하철 끊긴다고 먼저 집으로 갔고, 우리 일행도 11시 30분경 족발집에서 문을 닫는다고 아주머니들이 눈치를 주어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족발집을 떠났습니다.
계산대에 계신 할머니가 음식값을 계산 하시는데 그 실력이 장난 아니었습니다. 메모지 같은 종이에다가 메뉴명과 음식값을 쭉 적더니만 암산으로 총액을 표기 하였습니다. 할머님의 계산 실력에 크게 놀라서 엉? 할머님! 그걸 암산으로 계산하세요? 하고 물었더니만, 응! 내가 女商 나왔어!
이 정도 암산은 쉬운거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도 이 나이에 테니스 치러 자주나가서 아직 펄펄 날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종권이 친구는 족발을 집에 가져간다고 별도로 주문을 하여서 가져 가고, 친구들은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졌습니다. 나와 같이 기범이 부부는 콜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고, 장충근, 이철형부부, 윤종권부부, 모상광부부는 같이 정병주 친구네 집으로 갔습니다. 정병주 친구집으로 간 이유는 집이 족발집에서 가깝고, 이사한지가 얼마 안된다고 하여서 겸사겸사 그리고 한잔 더 하자면서 갔습니다. 정병주 친구집에서 2시30분까지 마신 모양입니다.
매년 말에 동악회 정기총회겸 망년회에 참석 하여서 동악회의 결산서를 보면, 총무가 회비를 제대로 걷지 않아서 항상 흑자도산 상태인 것을 과감히 해결해 보겠다고, 스스로 총무직을 맡은 해가 19994년도 였습니다. 지금이 2004년도니 동악회 총무를 11년간 하였습니다.
총무재임 초반부와 중반부까지는 그런대로 의욕을 갖고 총무직을 수행하였으나, 후반부에는 개인적인 문제로 인하여 총무직을 등한시 하여 결산서를 보면 아시겠지만 정기모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점에 대해선 총무를 떠나면서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2001년도와 2002년도는 정기모임이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은채 한해가 지나갔습니다. 동악회 역사상 가장 모임이 적었던 기간으로 기록 될것 같습니다. 사실 총무직을 작년에 그만둘수 있었지만, 작년에는 연말에 미수금 회비가 많아 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한해더 하면서 미수금 회비를 해결해 놓고 총무직을 그만두겠다 하여 일년을 더 하였습니다.
그 결과 2004년 금년말에는 미수금 회비를 거의 해결하고 총무직을 떠나게 되어 한편으론 시원하면서 또한편으론 섭섭하군요.
이제 새로운 총무(신종섭)와 회장(홍기범)님이 동악회를 잘 이끌어 주실 것을 믿고서 동악회 총무를 미련 없이 훌훌 떠나겠습니다.
우식이 친구야! 친구가 고국에 와서 같이 족발 먹은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몇년이 흘러 갔습니다. 지나고 보면 세월이 정말 유수 같다는 말이 실감나는구료.
친구야! 이제 나이를 먹으니 시간 가는 것이 점점 빨라진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고향의 친구 소식에 목말라 할 우식이 친구에게 이 글을 띄우면서 조금은 갈증이 풀리길 바라면서 마칩니다. 새해에는 모두 모두 행운이 함께 하기를!!! 동악회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