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트 목사는 전도를 위해 전주-정읍 간을 말을 타고 왕래하며 그 중간지점인 금산리에 머물곤 했는데 어느날 그는 이 고장 마방의 주인인 조덕삼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부자였고 집안은 대대로 유교를 믿었던 보수 가문이었다.
어느 날 조덕삼이 먼저 마방의 손님인 테이트 선교사에 접근하였고 둘은 서로 많은 교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드디어 그는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테이트에게 말한다. “선교사님, 앞으로는 저희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십시다." 이래서 오래도록 기도하였던 테이트의 기도 응답이 이루어졌으며 금산리에 기독교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 시작되었다.
이 금산교회가 시작되는 데는 또 한명의 빼 놓을 수 없는 주역이 있다. 이자익 목사이다. 그는 일제시대에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이나 지낸 유명한 목사이다.
이 무렵 이자익 청년은 조덕삼 씨의 집에서 일하던 마부였다. 그는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무학자였지만 매우 총명하여 마부로 일하면서 틈틈이 독학 하였고 또 주인을 따라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이 두사람과 박희서가 세례를 받고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금산교회가 공식으로 출발하는 시초가 되었던 것이다.
금산교회는 신앙적으로도 놀라운 일이 또 있었다. 교인이 100명 가까이로 불어나자 장로 한분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조덕삼 웅은 떨어지고 머슴인 이자익 청년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반상을 엄하게 따지던 봉건적인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조덕삼 웅은 의연히 교회앞에 나가 말하였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나는 이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그 후 집에 돌아오면 주인과 마부요, 교회에서는 장로와 평신도로 두사람이 열심히 자기 직분을 다하였다. 그 뒤 조덕삼 웅도 장로가 되었지만 그는 선배 장로인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유학시키고 목사가 되기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고 목사가 된 후에는 금산교회에 초빙하여 담임목사로 시무하게 하여 교회가 더욱 부흥하게 되었다. 그 후 이자익 목사는 세 번씩이나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며 한국교회에 많은 업적을 남기에 되었다.
※ 왜 교회당을 “ㄱ”형으로 지었는가?
한쪽 날개는 남자석, 다른 한쪽 날개는 여자석. 남녀칠세부동석이라 남녀가 서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구조이다. 모서리에 강대상이 있고 그 강대상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님만 남녀석을 번갈아 볼 수 있고, 틈새가 나는 중간에는 흰 포장을 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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