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묘(경기도 기념물 48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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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묘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고 자료도 있어서 일부 자료를 보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찾아가는데 쉽지만은 않더군요. 마석초등학교 정류장에서 내려서 초등학교 건너편 방향의 골목으로 들어가면 개천이 있고, 작은 다리를 건너면 골목 입구에 흥선대원군 묘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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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 묘 진입 골목 |
▲ 산 밑의 길 우측으로 돌아서... |
▲ 흥선대원군 묘역 입구 전경 |
이 골목(위 좌측 사진)으로 길을 따라서 쭉 들어갑니다. 산을 끼고 돌아가면(위 중앙 사진) 우측에 연립이 보입니다. 여기서도 길을 따라서 조금 더 들어가면 입구(위 우측 사진)가 나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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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 묘역 초입 전경 |
입구를 지나면 흥선대원군 묘소 500미터라는 안내 표지판이 있습니다. 좌측에는 흥원(興園)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습니다. 비석 뒤편에는 언제, 고양군에서 파주군으로 다시 이 곳을 묘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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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선군 신도비 |
▲ 영선군 이준용 묘역 석물 |
▲ 이장이 진행 중인 묘역 전경 |
묘역으로 가는 주변에는 나무들의 잔가지들이 많이 쳐진 것 같습니다. 안으로 조금 들어가 보니 간벌을 하고 있다는 안내판이 있더군요. 묘역으로 가는 길은 진흙으로 좋지 않습니다. 우측에 신도비가 서 있는데, 신도비에는 영선군(永宣郡) 신도비라고 쓰여 있더군요. 영선군이 누구인지...
☞ 뒤에 자료(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일부 발췌)를 찾아보니...
"이준용(李埈鎔, 1870~1917)은 흥선대원군의 손자로 1910년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지고 보국숭록대부에 승진, 육군참장이 되었다. 일본측의 압력으로 내부협판에서 물러났을 때는 극렬한 배일주의자였으나 뒤에는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좌측 언덕에 있는 묘역으로 올라가 보니 묘역 앞에 석물들이 여기저기 뒹글고 있었습니다. 곡담 안에 봉분도 없어지고 복토가 되어 있었습니다. 흙의 상태를 보니 이장을 한지 채 며칠이 안된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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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 묘와 이우 묘 입구 |
▲ 영선군 양자 이우 묘역 석물 |
▲ 이장이 진행 중인 묘역 전경 |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산길에 진흙이 뒤 엉켜 있습니다. 간벌과 이장으로 어수선 합니다. 우측에는 흥선대원군의 큰 아들인 이재면의 묘가 있습니다. 이 곳의 묘도 시신은 이장되었으며, 석물들은 이준용의 묘와 같이 이장된 곳으로 옮기려고 밧줄들이 석물에 감겨져 있었습니다.
☞ 이재면(李載冕, 1845~1912)은 흥선대원군 장남이며, 고종의 형입니다.
"이재면은 1882년 임오군란 때 무위대장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호조판서·선혜청당상·삼군부지사·훈련대장·어영대장을 겸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좌찬성과 좌우참찬을 겸임, 1894년 통리기무아문의 동문사당상경리사가 되고 제1차 김홍집 내각의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1900년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지고, 1910년 흥친왕(興親王)에 책봉되었다." -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일부 발췌 -
흥선대원군의 장남과 장손의 묘를 다른 곳으로 동시에 이장하였습니다. 어디로? 왜? 이장을 하였는지...
※ 당시에 저는 이재면과 이준용의 묘역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는 줄 알았는데, 제가 다녀 온 뒤에 다른 사람 들이 올린 자료를 보니 석물들은 서울 역사박물관에 기증 형식으로 옮기고 시신은 화장을 해서 이재면의 묘터에 납골당인지 뭔지를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직접 가서 확인해 보아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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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 신도비 |
▲ 묘역 입구에 세워진 비 |
▲ 흥선대원군 묘역 입구 전경 |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이재면의 묘 좌측에는 흥선대원군의 묘가 있습니다. 입구에는 신도비가 있으며, 비몸의 한 쪽은 총탄 자국인지 많이 훼손되어 시멘트로 발라 놓았는데 조금 보기 흉합니다. 신도비 위쪽에 국태공원소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바로 우측에 묘역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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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 묘소 |
▲ 흥선대원군 묘역 후경 |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묘역입니다. 묘역은 5각의 곡담으로 둘러져 있으며, 봉분은 큰 편으로 밑에는 얕은 둘레석을 둘렀으며, 윗 부분은 조금 눌린 듯한 모습입니다. 곡담 안에는 석양이 봉분 좌우로 서 있습니다.
봉분 앞에는 상석이, 좌우로는 키가 큰 망주석과 문인석, 석마가 양 옆에 서 있으며, 중앙에는 장명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른쪽 문인석의 얼굴은 훼손되어 원래 모양과 똑 같이 채워서 만들어 놓았는데, 색깔이 달라서인지 조금은 징그럽게 보입니다.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보면 마석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들이 훤히 내려다 보입니다만, 개발되는 모습이 좋게만 느껴지지 않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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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 묘역 전경 |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1820∼1898)의 묘이다. 그는 철종이 후계자 없이 죽은 후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조대비와 힘을 합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뒤의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대원군이 되어 직접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 세도정치 근절, 서원철폐, 세제개혁, 법전정비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으며, 밖으로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과감한 혁신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서양세력의 접근에 대해서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통해 통상요청을 거부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는 그들의 침략을 무력으로 저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여 백성들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근대 문명의 수용이 늦어졌으며, 집권 후반기에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와 대립하게 되어 정치에서 실권을 잃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고양군 공덕리에 모셨다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옮겼으며, 1966년 4월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
이하응 초상 일괄(보물 149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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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단령포본 |
▲ 흑건청포본 |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장년기와 노년기 전신초상 6점으로 5점은 서울역사박물관, 1점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이하응 초상> 5점은 모두 조선말기 최고의 어진화사(御眞畵師)인 이한철(李漢喆)이 그렸는데, 먼저 그린 3점(黑團領袍本·金冠朝服本·臥龍冠鶴氅衣本)은 고종 원년(1863, 癸亥)의 44세 때 그린 초본을 토대로 하여 50세가 되던 고종 7년(1869, 己巳)에 이모한 것이고 뒤에 그린 2점(袱巾深衣本·黑巾靑袍本)은 환갑을 맞은 고종 17년(1880, 庚辰)의 61세 주갑상(周甲像)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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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룡관학창의본 |
▲ 복건심의본 |
5점의 초상 모두 복식이 다르며 의관과 기물이 매우 화려·성대할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한철이 그려 수준 높은 묘사력과 화격을 보여주는 최상급의 걸작들이다. 더구나 뛰어난 필력을 자랑했던 이하응의 친필 표제(表題)와 영정함 안에 써넣은 별폭의 홍지표제(紅紙表題), 궁중 표구장의 족자표장(簇子表粧), 유소(流蘇), 영정보, 향낭, 영정함, 영정함보 등이 고스란히 전하고 있어 조선말기 왕실의 아름답고 격조 있는 초상화 문화를 종합적으로 엿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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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관조복본 |
▲ 금관조복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하응 초상>은 금관조복본으로 그림의 크기나 기본적인 도상, 재료, 기법, 화풍, 풍격, 수준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863년 이한철, 유숙 작의 “금관조복본”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대략 비슷한 시기에 동일한 작가들에 의해 그려진 복본(複本)이나 별본(別本)으로 추정된다. ※ 이하응 초상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가져옴. |
흥선대원군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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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 22-2
빨간 압정이 있는 곳에 흥선대원군묘가 있습니다.
교통편 : 버스 마석초교 정류장(화도교회앞)에서 하차하여 지도 우측의 다리를 건너서 산을 끼고 길을 따라 1Km 정도 들어가면 가면 묘역 입구가 보입니다.
묘역 입구에서도 묘역까지는 한참을 들어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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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근처 갔었어도 못 보고 와서 서운했는데 보게 되어 감사합니다.
흥선대원군묘....흥선헌의대원왕 흥원.
지금은 이장이 다완료되서 납골묘가 됬는데... 저 흥원이라는 표석도 없어졌어요...지금은 볼수없는 곳이죠... ㅠㅠ